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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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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Thu, 15 Oct 2026 19:36: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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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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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편소설_칸첸중가_024_하얀 고양이 / 귀신</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8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a6dbf0162ad18652ba519a2426f8ccd8b2c5e105.png" class="fr-fic fr-dib"><br>하얀 고양이&nbsp;하얀 고양이가 튀어나온 문 앞에 서서 춤추듯 비틀거리는 사람은 미셸인가 했더니 병수 형이었다.&nbsp;병수 형인가 했더니 다시 미셸이었다.&nbsp;이런 착각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미셸은 병수 형을 닮았음을 알 수 있었다.&nbsp;병수 형은&nbsp;1975년&nbsp;12월에 서울 종로구 창신동 낙산 기슭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nbsp;병수 형은 반야라는 부르던 하얀 암고양이와 함께 살았었다.&nbsp;반야는 병수 형의 죽은 애인의 이름이기도 했다.&nbsp;<br><br>병수 형은 반야를 마치 애인처럼 끌어안고 다녔지만 나는 반야가 달갑지 않았다.&nbsp;그 음산한 울음소리는 특히 싫었다.&nbsp;그때 나는 도봉산 밑에 살았기 때문에 종로통에서 술 마시다 통금에 쫓기면 병수 형 자취방을 찾아가곤 했다.&nbsp;병수 형은 집에 없는 날도 많았지만 상관없었다.&nbsp;언제나 신발장 맨 아래 있는 헌 털신 속에 열쇠를 두고 다녔기 때문이다.&nbsp;반야도 염려 없었다.&nbsp;병수 형이 없을 때는 반야도 나타나지 않았다.&nbsp;병수 형이 없던 어느 날,&nbsp;자다가 깨보니 반야가 새벽 달빛을 등지고 들창 턱에 웅크리고 앉아 음산하게 울고 있었다.&nbsp;내가&nbsp;&lsquo;가&rsquo;라고 짧게 소리치자,&nbsp;반야는 들창 너머로 사라졌다.&nbsp;창을 닫으며 내다봤던 골목 안은 달빛이 하얬는데,&nbsp;거기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를 어떤 존재의 모습이 언뜻 스쳤다.&nbsp;들창을 닫고 다시 누웠을 때는 좀 전에 스쳤던 모습이 병수 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nbsp;병수 형은 며칠 후에 그 방에서 죽었다.&nbsp;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nbsp;발인하는 날 아침에 나는 구두를 잃어버렸다.&nbsp;하얀 영안실 슬리퍼를 신고 관을 들었다.&nbsp;하얀 영안실 슬리퍼를 신고 영구차에 탔으며,&nbsp;하얀 영안실 슬리퍼를 신고 벽제화장장에 갔다.&nbsp;화장을 마친 후,&nbsp;병수 형 친구 종태 형이 하얀 영안실 슬리퍼를 신은 내 꼴을 보고 말했다. &lsquo;병수의 하얀 부케를 네가 받았구나&rsquo;라고.&nbsp;병수 형 다음 죽을 차례는 나라는 뜻이었다.&nbsp;그런데 그렇게 말한 종태 형이 먼저 갔다.&nbsp;<br><br>그는 이듬해에 북한산 어느 바위틈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었다.&nbsp;부검 결과는 저체온증으로 인한 심장 쇼크였다.&nbsp;비 오는 날 술에 취해 바위 밑에서 자다가 변을 당한 것이었다.&nbsp;혹자는 변을 당한 것이 아니라 자살일 거라고 우겼다.&nbsp;달빛이 하얗게 내리는 학교 마당에서 나는 돌아섰다.&nbsp;누가 안에서 내던진 하얀 슬리퍼처럼 고양이가 튀어나온 것이 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불길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nbsp;미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왜 그러냐고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단호한 걸음으로 비탈을 올랐다.&nbsp;돌아보지도 않았다.&nbsp;광장에 올라서자,&nbsp;눈앞에서 개들이 으르렁거렸다.&nbsp;달빛에 시퍼렇게 빛나는 눈들과 날카로운 송곳니,&nbsp;길게 흐르다 뚝뚝 떨어지는 침을 보자 머리칼이 곤두섰다.&nbsp;미친개들이 아닐까 싶었다.&nbsp;주변엔 돌도 막대기도 없었다.&nbsp;주머니에서 소주 봉지를 급히 꺼내 개들에게 던졌다.&nbsp;개들이 주춤하는 사이에 급히 혁대를 풀었다.&nbsp;혁대 끝을 감아쥐고 빙빙 돌렸다.&nbsp;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은 점점 늘어났다.&nbsp;다섯 마리,&nbsp;여섯 마리&hellip;&hellip;.&nbsp;무서웠다.&nbsp;뛰고 싶었지만 천천히 걸었다.&nbsp;내가 뛰면 개들도 뛴다.&nbsp;개들의 추적 본능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nbsp;왼손은 흘러내리는 바지를 움켜쥐고,&nbsp;오른손은 혁대를 빙빙 돌리며 걸었다.&nbsp;그렇게 걸었던 것까지 기억이 났는데 그다음은 기억이 안 났다.&nbsp;어떻게 된 걸까?&nbsp;내가 누워있는 이곳은 어디일까?&nbsp;<br><br>머리가 너무 무거워서 들 수 없었다.&nbsp;눈을 뜰 수도 없었다.&nbsp;눈곱이 말라붙어 속눈썹들로 눈을 꿰매 놓은 것 같았다.&nbsp;손가락에 침을 묻혀 속눈썹을 적시고 살살 문질러서 간신히 눈꺼풀을 벌렸다.&nbsp;커튼 한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nbsp;어딘지 전혀 알 수 없는,&nbsp;비좁은 방이었다.&nbsp;일어나고 싶어서 눅눅하고 묵직한 솜이불을 젖혔다.&nbsp;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편두통을 앓았을 때처럼 머리가 욱신욱신 아팠다.&nbsp;목이 타고,&nbsp;아랫입술 안쪽이 쓰라렸다.&nbsp;개를 쫓기 위해 휘두르던 허리띠가 내 입술을 스친 기억이 났다.&nbsp;이불 속에서 배를 더듬었다.&nbsp;여권과 달러가 든 전대는 배에 붙어 있었다.&nbsp;허리띠는 어쨌을까?&nbsp;배 밑의 사타구니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nbsp;손목이 허전했다.&nbsp;시계는 어쨌을까?&nbsp;어디다 흘렸을까?&nbsp;이 방에 있을까?&nbsp;침대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nbsp;다시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 호흡을 가다듬었다.&nbsp;누군가 옆에 있었으면,&nbsp;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가져다주고,&nbsp;찬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hellip;&hellip;.&nbsp;한 때는 있었다.&nbsp;나도 한때는 누군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nbsp;지금은 아니다.&nbsp;지금은 혼자다.&nbsp;아,&nbsp;이 무서운 세상에 혼자라니!&nbsp;락바 라마?&nbsp;그는 시킴으로 떠났다.&nbsp;그는 유스호스텔에 있었다.&nbsp;여기는 유스호스텔이 아니다.&nbsp;롱아일랜드도 아니다.&nbsp;여기는 어딜까?&nbsp;만일 내가 여기서 이대로 죽으면 어떻게 될까?&nbsp;경찰이 오겠지.&nbsp;경찰은 내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 연락할 테고,&nbsp;영사는 한국의 관할 경찰서를 통해 유족을 수배할 것이다.&nbsp;어머니와 딸의 얼굴이 떠올랐다.&nbsp;지난밤 꿈이 떠올랐다.&nbsp;전신전화국의 철창이 떠올랐다.&nbsp;다르질링의 국립병원에는 유족이 올 때까지 시체를 안치하는 냉동실이 있을까?&nbsp;냉동실이 없으면 방부제 처리를 하거나 소금에 절여둘지도 모른다.&nbsp;어쩌면 신원 확인만 하고 화장해 버릴지도 모른다.&nbsp;차라리 화장해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nbsp;귀신&nbsp;까무룩 다시 잠들었다가 누군가가 내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깼다.&nbsp;흐린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nbsp;흐리게 보이던 얼굴이 서서히 명료해지자 그가 타파 구릉이라는 것을 알았다.&nbsp;어젯밤에 알리멘트의 식당 문을 두드렸던 상황이 스쳤다.&nbsp;비로소 안심이 되었다.&nbsp;&ldquo;타파,&nbsp;마실 물 좀 줘.&rdquo;&ldquo;우선 좀 일어나 앉자.&nbsp;물은 앉아서 먹어야지.&rdquo;&nbsp;타파가 누워 있는 내 어깨 뒤로 손을 넣어 일어나 앉도록 도와주었다.&nbsp;물병은 머리맡의 탁자 위에 있었다.&nbsp;내 손목시계와 허리띠도 탁자 위에 있었다.&nbsp;내 손을 뻗어 물병을 들고 물을 마시는데,&nbsp;내가 앉아 있는 침대가 물 위의 보트처럼 빙그르르 도는 것 같았다.&nbsp;&ldquo;천천히 마셔.&nbsp;넌 좀 아픈 것 같다.&nbsp;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rdquo;&ldquo;병원은 안 가도 돼.&nbsp;아스피린 두 알이면 해결될 거야.&nbsp;술이 좀 과했던 데다 광장에서 만난 미친개들 때문에 혼났을 뿐이야.&rdquo;&nbsp;&ldquo;네가 여기를 찾아온 시간은 자정이 훨씬 넘은 시간이었어.&nbsp;우린 막 자려던 참이었지.&nbsp;마침,&nbsp;이 방이 비어 있어서 널 이 방으로 데려온 거야.&nbsp;잘 들어 둬,&nbsp;이 동네 개들은 밤이면 미친개가 된다.&nbsp;특히 달밤에 더 미쳐.&nbsp;어젯밤 그 개들의 눈에는 네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으로 보였을 거야.&rdquo;&nbsp;&ldquo;귀신?&nbsp;하긴 내게는 늘 술 마시다 죽은 귀신들이 따라다니지.&nbsp;개들은 내가 아니라 나를 따라다니는 귀신을 보고 짖었을 거야.&rdquo;&ldquo;그래.&nbsp;개는 귀신을 보는 동물이다.&nbsp;어쨌든 밤늦게 다니지 마.&nbsp;얼마 전에도 서양 여행자 한 명이 광장에서 개들에게 목을 물어뜯겼어.&nbsp;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중태였지.&nbsp;넌 운이 좋았던 거야.&rdquo;&nbsp;유리병에 남은 물을 마저 마시고 탁자에 놓인 시계를 손목에 꼈다.&nbsp;오전&nbsp;10시가 좀 넘었다.&nbsp;서두르지 않아도 롱아일랜드에 가서 체크아웃할 시간이 충분했다.&nbsp;타파에게 그 방에서 하루 더 묵어도 되겠냐고 물으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nbsp;&lsquo;가능하지&rsquo;라고 했다.&nbsp;타파 구릉을 따라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 툭바를 시켰다.&nbsp;우선 국물만 들이켰다.&nbsp;그래도 갈증이 안 풀렸다.&nbsp;갈증과 숙취를 풀기 위해 맥주를 한 병 달라고 했더니 타파는 카운터에 두 손으로 짚고 서서 한숨을 푹 쉬었다.&nbsp;&ldquo;김,&nbsp;네게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난다.&nbsp;더구나 넌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어.&nbsp;난 널 데리고 병원에 갈 생각이었어.&rdquo;&ldquo;환자 취급하지 말아 줘 타파.&nbsp;하지만 네 말을 듣고 보니 맥주는 그만두는 게 좋겠다.&nbsp;대신 시원한 사이다를 한 병 줘.&rdquo;&nbsp;타파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병을 꺼내어 뚜껑을 땄다.&nbsp;&ldquo;그럼.&nbsp;그럼.&nbsp;이게 낫지.&nbsp;그런데 하나 묻자.&rdquo;&ldquo;물어봐.&rdquo;&ldquo;어제 누구와 마신 거냐?&rdquo;&ldquo;미셸을 알지도 모르겠네.&nbsp;광장 밑에 있는 학교의 영어 선생 겸 교감.&rdquo;&nbsp;&ldquo;맙소사.&nbsp;그 주정뱅이에다 오입쟁이!&nbsp;그는 끝난 인간이야.&nbsp;다르질링에서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nbsp;주정뱅이들이나 걸인들 빼고는.&rdquo;&ldquo;주정뱅이라는 건 알아.&nbsp;그런데 오입쟁이라니?&rdquo;&ldquo;지금 마누라가 네 번째 마누라다.&nbsp;마누라가 되기 전에는 제자였는데 세 번째 마누라가 버젓이 있을 때부터 몰래 정을 통했거든.&rdquo;&nbsp;&ldquo;미셸에 대해서 잘 아는군.&rdquo;&ldquo;다들 잘 알지,&nbsp;아무도 상대를 안 해.&nbsp;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주면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알아?&nbsp;혹시 다시 만나더라도 네가 여기 묵는다는 걸 말해서는 안 돼.&rdquo;&ldquo;어제 아일랜드에 묵는다고 했던 것 같아.&nbsp;그런데 왜?&rdquo;&nbsp;&ldquo;여기는 말해 주지 않는 게 현명할 거야.&nbsp;말해 주면 대낮부터 찾아와서 마시자고 할 테니까.&rdquo;&ldquo;네 말을 들으니 다시 피곤해진다.&rdquo;&ldquo;그러면 이제 다시 올라가서 좀 더 쉬는 게 어때?&rdquo;&ldquo;아냐,&nbsp;차라리 좀 걷는 게 나.&nbsp;아일랜드에 가서 체크아웃하고 올 거야.&rdquo;&nbsp;일어서서 의자를 탁자 밑에 넣었다.&nbsp;타파가 한 마디 더 했다.&ldquo;이런 말을 하기 미안하지만,&nbsp;어제처럼 심야에 오면 곤란해.&nbsp;한 번은 인정상 봐 주지만 두 번은 안 봐준다.&nbsp;무슨 말인지 알겠지?&rdquo;&ldquo;약속한다.&nbsp;난 원래 오늘 오후에 시킴으로 떠날 계획이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nbsp;내일 혹은 모레 떠날까 싶어.&nbsp;그동안 잘 먹고 푹 쉴 거니까 그런 걱정은 말아 줘.&nbsp;참,&nbsp;방 줘서 고맙다는 말을 안 했군.&nbsp;정말 고마워.&rdquo;&ldquo;알았어.&nbsp;새삼스럽기는!&rdquo; 계속>&nbsp;]]></description>
			<author>김홍성</author>
			<pubDate>Thu, 15 Oct 2026 12:58:24 +0900</pubDate>
		</item>
		<item>
			<title>막셀  모스 증여론 강독 4</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80</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939d75630ecfbb49456750a1063c1508a6bf46ae.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672px;"><br>&nbsp;&nbsp;막셀 모스가 하마말의 시를 인용하면서 우리가 살펴 보았던 단어들 즉, 선물, 웃음, 기만, 거짓말(cadeau, rire, dol, mensonge)은 상호적인 호혜주의에 근거해서 나에게 행위한 타자에대해 동일하게 되 갚아주어야 한다는 논리를 지니고 있다.&nbsp;그러나 하마말을 막셀 모스처럼 의 관점에서 바라 보는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 잠언적이며 교훈적인 시(Spruchgedicht)로 바라 본다면 타자의 거짓말을 기만으로 되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거짓말을 하게 된 내적 동기에 주목 할 수가 있다.&nbsp;독일 시인이자 독문학자인 카를 짐로크 (Karl Joseph Simrock)가 1851년에 북구 유럽시 하마말을 번역하면서 표제어를 하마말과 함께&nbsp;높은 자의 노래(Des Hohen Lied)로 표기한다. 여기에 독일어로 수록된 내용의 일부를 리하르트 바그너는 4부작의 니벨룽의 반지로 작곡을 하게 된다. 바그너와 니이체는 막역한 사이였기 때문에 니이체가 간접적으로 바그너의 작품을 통해 높은 자의 노래(Des Hohen Lied) 즉 북구유럽의 고대시인 하마말을 읽었다고 추론 할 수가 있을 것이다.&nbsp;니이체에 관한 문헌연구에 따르면 니이체가 짐로크 Simrock가 출판한 Die Edda 속에 덧붙혀져 있는 해설(Erl&auml;uterungen)을 읽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가령 하마말에서 Wiedervergeltung(보답)이라는 단어는 짜라투스트라의 타란툴라편의 Vergeltung/Rache(응보/복수)와 좋은 비교가 되고 있다.&nbsp;막셀모스가 인용하고 있는 하마말은 동일한 크기로 받은 것 만큼 되 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 정당하고 이것이 평등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니이체는 짜라투스트라의 타란툴라편에서 평등자체의 개념에 주목하기보다는 평등과 호혜를 원하면서도 오히려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분노하고 있는 지에 주목 한다. 거짓된 평등이라는 도덕적 가면을 모순적 상황에 처하도록 만듬으로써 상대의 도덕적 가면을 벗기고 자기모순을 드러내려 한다. 거짓말에는 기만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막셀모스의 입장이 아니라 니이체는 복수의 도덕을 복수의 주체 자신에게 되돌려, 그 도덕의 기원을 폭로한다.&nbsp;짜라투스트라의 에서 니이체는 평등과 정의를 부르짖으며 원한과 질투를 퍼뜨리는 위선적인 선동가들을 &#39;타란툴라&#39;로 규정하고 이를 강력하게 비판한다.&nbsp;Von den Taranteln&nbsp;Siehe, das ist der Tarantel H&ouml;hle! Willst du sie selber sehn? Hier h&auml;ngt ihr Netz: r&uuml;hre daran, dass es erzittert.봐, 여기가 바로 타란툴라의 굴이야! 직접 보고 싶은가 ? 여기 거미줄이 걸려 있는데, 만져보면 꼼짝 못 할 거야&nbsp;여기서 타란툴라&#39;, &#39;굴&#39;, &#39;거미줄&#39;은 단순한 자연 묘사가 아니라 니체가 혐오했던 특정 인간 부류와 그들의 사상을 상징한다. 타란툴라(독거미)는 평등의 설교자들 (위선적 선동가들)을 의미한다. 니이체는 겉으로는 &#39;평등&#39;과 &#39;정의&#39;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에 대한 질투와 원한(Ressentiment)으로 가득 차 남을 찌르고 싶어 안달이 난 지식인과 선동가들을 독거미에 비유하고 있다. 이들의 무기는 물리면 온몸에 독이 퍼지는 독니(비수 같은 말과 사상)에 해당 한다 .거미줄(Netz)은 그들이 쳐놓은 사상적 덫이며 "거미줄을 건드려 파르르 떨게 하라"는 말은, 그들이 사회에 촘촘히 쳐놓은 위선적인 도덕과 법률, 사상체계를 흔들어 깨워야 한다는 것을 상징 한다.&nbsp;대중을 평등이라는 달콤한 말로 유혹해 파멸시키는 사상적 독거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똑똑히 보고, 그들이 쳐놓은 덫을 두려워하지 말고 흔들어 그 정체를 폭로하라고 짜라투스트라는 선언한다.&nbsp;짜라투스트라는 독거미가 겉으로는 &#39;정의&#39;, &#39;사랑&#39;, &#39;평등&#39;을 부르짖지만, 그 영혼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바로 &#39;Rache(복수심)&#39;과 Ressentiment(원한, 시기심)이다. 스스로 창조적이고 강해질 수 없는 무력한 자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자(고귀한 자, 강한 자)를 끌어내려 하향 평등을 만들기 위해 품은 음험한 복수심인 것이다.<br><br>Also rede ich zu euch im Gleichniss, die ihr die Seelen drehend macht, ihr Prediger der Gleichheit! Taranteln seid ihr mir und versteckte Rachs&uuml;chtige<br>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한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자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아 ! 너희는 내게 거미줄을 치는 자들이며, 숨어서 복수하는 자들이다<br>&nbsp;너희야말로 내게는 타란툴라(독거미)들이요, 숨겨진 복수주의자들이다!. 겉으로는 정의와 약자를 위하는 척하지만, 본질은 그저 잘난 자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가득 차 뒤에서 독침을 꽂을 기회만 노리는 숨겨진 복수주의자들(versteckte Rachs&uuml;chtige)에 불과하다<br>&nbsp;니이체는 왜 평등(Gleichheit)을 부르짖는 자들을 이토록 격렬하게 비난했을까? 니이체는 자신이 쓰는 비유(Gleichniss)&#39;라는 단어와 그들이 외치는&#39;평등(Gleichheit)&#39;이라는 단어의 독일어적 유사성을 의도적으로 배치한다. "너희가 가짜 평등(Gleichheit)으로 세상을 속이니, 나는 진실을 담은 비유(Gleichniss)로 너희를 부수겠다"는 문학적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39;니이체가 보기에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역량, 재능, 생명력의 크기가 다르다<br>&nbsp;고귀하고 강한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삶을 창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반면, 무력하고 나약한 자들은 스스로 올라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와 뛰어난 자들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즉,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정의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강자에 대한 깊은 질투와 숨겨진 복수심(Rachs&uuml;chtige)&#39;에서 나온 하향 평등화의 전략이라는 것이라고 니이체의 진단한다.영혼을 미치게 만드는 선동가들은 대중에게 "너희가 불행한 것은 저 뛰어난 자들, 저 부유한 자들 때문이다"라며 증오를 심어준다. 이 독에 감염된 대중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대신 타인을 증오하는 광기(die Seelen drehend)에 빠져들게 된다<br>&nbsp;"거짓말에는 기만으로" 되 갚아야 한다는 하마말에서 확인 되었던 서술(On doit avoir dol pour mensonge)은 니이체의 입장에서는 달라 지게 된다. 타란툴라들은 세상에 &#39;평등과 정의&#39;라는 거대한 거짓말(mensonge)을 유포하고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이 쳐놓은 거미줄을 역으로 이용해 그들의 분노를 유도하고 덫에서 끌어내는 철학적 전략과 기만(dol)으로 맞선다. 상대의 위선을 그들이 가진 본능적인 분노로 무너뜨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가장 강력한 &#39;받은 대로 돌려주기&#39;의 도덕적 실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nbsp;오히려 짜라투스트라는&nbsp; 독거미가 겉으로는 &#39;정의&#39;, &#39;사랑&#39;, &#39;평등&#39;을 부르짖지만, 그 영혼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안다고 선언한다 그것은 바로 &#39;Rache(복수심)&#39;과 Ressentiment(원한, 시기심)이다. 스스로 창조적이고 강해질 수 없는 무력한 자들이, 자신보다 뛰어난 자(고귀한 자, 강한 자)를 끌어내려 하향 평등을 만들기 위해 품은 음험한 복수심인 것이다.&nbsp;Also rede ich zu euch im Gleichniss, die ihr die Seelen drehend macht, ihr Prediger der Gleichheit! Taranteln seid ihr mir und versteckte Rachs&uuml;chtige!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비유로 말한다. 영혼을 변화시키는 자들, 평등을 설교하는 자들아 ! 너희는 내게 거미줄을 치는 자들이며, 숨어서 복수하는 자들이다!&nbsp;너희야말로 내게는 타란툴라(독거미)들이요, 숨겨진 복수주의자들이다!. 겉으로는 정의와 약자를 위하는 척하지만, 본질은 그저 잘난 자들에 대한 시기심으로 가득 차 뒤에서 독침을 꽂을 기회만 노리는 숨겨진 복수주의자들(versteckte Rachs&uuml;chtige)에 불과하다.&nbsp;니이체는 왜 평등(Gleichheit)을 부르짖는 자들을 이토록 격렬하게 비난했을까? 니이체는 자신이 쓰는 비유(Gleichniss)&#39;라는 단어와 그들이 외치는&#39;평등(Gleichheit)&#39;이라는 단어의 독일어적 유사성을 의도적으로 배치한다. "너희가 가짜 평등(Gleichheit)으로 세상을 속이니, 나는 진실을 담은 비유(Gleichniss)로 너희를 부수겠다"는 문학적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39;니이체가 보기에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역량, 재능, 생명력의 크기가 다르다.&nbsp;고귀하고 강한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 삶을 창조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반면, 무력하고 나약한 자들은 스스로 올라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해야 한다"는 논리를 가져와 뛰어난 자들을 자기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한다. 즉, 이들이 말하는 평등은 정의로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강자에 대한 깊은 질투와 숨겨진 복수심(Rachs&uuml;chtige)&#39;에서 나온 하향 평등화의 전략이라는 것이라고 니이체의 진단한다.영혼을 미치게 만드는 선동가들은 대중에게 "너희가 불행한 것은 저 뛰어난 자들, 저 부유한 자들 때문이다"라며 증오를 심어준다. 이 독에 감염된 대중은 자신의 삶을 가꾸는 대신 타인을 증오하는 광기(die Seelen drehend)에 빠져들게 된다.&nbsp;"거짓말에는 기만으로" 되 갚아야 한다는 하마말에서 확인 되었던 서술(On doit avoir dol pour mensonge)은 니이체의 입장에서는 달라 지게 된다. 타란툴라들은 세상에 &#39;평등과 정의&#39;라는 거대한 거짓말(mensonge)을 유포하고 있지만 짜라투스트라는 이 거짓말에 속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들이 쳐놓은 거미줄을 역으로 이용해 그들의 분노를 유도하고 덫에서 끌어내는 철학적 전략과 기만(dol)으로 맞선다. 상대의 위선을 그들이 가진 본능적인 분노로 무너뜨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니체가 말한 가장 강력한 &#39;받은 대로 돌려주기&#39;의 도덕적 실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짜라투스트라는 인간은 이러한 복수심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이러한 해방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희망으로 가는 다리인 것이다.&nbsp;Denn dass der Mensch erl&ouml;st werde von der Rache: das ist mir die Br&uuml;cke zur h&ouml;chsten Hoffnung und ein Regenbogen nach langen Unwettern.인간을 복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 그것이야말로 내게 있어 최상의 희망으로 가는 다리이며, 긴 폭풍우 후의 무지개이다.&nbsp;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해서 언급하는 &#39;구원&#39;은 기독교적인 사후 세계의 구원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 결핍, 억울함에 발목이 잡혀 타인을 증오하고 끌어내리려는 &#39;복수심(Rache)&#39;이라는 정신적 감옥에서 인간이 스스로 벗어나는 것이다. 니체는 인류의 역사와 도덕이 그동안 이 복수심(원한)에 의해 오염되어 왔다고 보았으며, 진정한 의미의 초인(&Uuml;bermensch)이 되기 위한 첫걸음은 바로 이 복수심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씻어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높은 희망으로 가는 다리 (Die Br&uuml;cke zur h&ouml;chsten Hoffnung)는 인간이 마주서있는 &#39;짐승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자 다리&#39;이다.&nbsp;인간이 과거에 대한 증오를 버릴 때, 비로소 자기 파괴적인 삶을 끝내고 창조적이고 고귀한 존재인 &#39;초인&#39;이라는 가장 높은 희망을 향해 건너갈 수 있다.. 복수의 극복은 곧 새로운 인간으로의 진화를 의미 한다. 오랜 폭풍우 끝의 무지개 (Regenbogen nach langen Unwettern)&#39;에서 오랜 폭풍우&#39;는 인류가 서로를 시기하고, 평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에게 독침을 꽂으며 증오 속에서 싸워온 어두운 역사를 상징한다. &#39;무지개&#39;는 마침내 그 증오의 비가 그치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사랑(아모르 파티, Amor Fati)하게 된 인간의 영혼 위에 떠오르는 신성한 평화와 축복의 상징이 되고 있다.&nbsp;"선물에는 선물로, 거짓말에는 속임수로 갚아야 한다"는 고대 바이킹의 격언을 카를 짐로크 (Karl Joseph Simrock)의 독일어 번역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는 니이체는 왜 오래된 하마말의 싯구를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여기서 "복수심으로부터 구원받아야 한다"고 전환 시키고 있을까? 이 두 가지는 모순되지 않는다.&nbsp;니이체가 말하는 가장 나쁜 복수심은 뒤에 숨어서, 평등과 정의라는 가면을 쓰고, 음습하게 원한을 키우는 타란툴라식의 복수심이다. 반면 고대 격언의 상호주의는 그 자리에서 당당하게 갚아 주고 깨끗하게 털어버리는 전사의 방식의 호환성이다. 즉, 니이체는 마음속에 앙금을 쌓아두고 영혼을 썩히는 위선적인 복수심에서 인류가 완전히 구원받아야(erl&ouml;st werde) 한다고, 즉 그렇게 당당하게 감정을 청산하고 복수심마저 초월해 낸 인간만이, 비로소 과거의 사슬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한 무지개(Regenbogen)를 띄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nbsp;<br>]]></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Thu, 15 Oct 2026 09:37:3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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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理)와 기(氣) 사이,   理와 氣, 그리고 피로 물든 조선의 봄</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9</link>
			<description><![CDATA[<br><br>내가 조선 전기 성리학과 기묘사화를 배경으로 한 역사철학소설을 써 보았다. 2025년에 자전적 소설(대양미디어, 2025)을 썼는데, 이번에는 조선의 역사를 배경으로 철학 소설이다. 이 작품의 배경을 이루는 갑자사화(1504), 중종반정(1506), 정국공신 위훈삭제 논란과 현량과 실시(1519), 그리고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으로 촉발된 기묘사화(1519)는 모두 조선 전기의 실제 역사적 사건이다. 작품 속에서 인물들이 나누는 이(理: 원리·보편적 당위·도덕적 기준)와 기(氣: 구체적 현실·생명과 욕구·역사적 조건)를 둘러싼 대화는, 후대(16세기 중후반)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율곡 이이가 전개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및 이기호발(理氣互發), 기발이승氣發理乘) 논쟁의 정밀한 이론적 단초들을 16세기 초 사림파 태동기의 정치적·윤리적 위기 상황 속으로 끌어와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치가 현실의 고통과 분리될 때 어떻게 도덕적 폭력이 되는가, 반대로 현실의 형편이 보편적 원리를 잃을 때 어떻게 비루한 기회주의로 전락하는가라는 물음은 조선 성리학의 핵심 과제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과 사회를 성찰하는 데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철학과 현실’의 관계 문제이다. 앞으로 총 10회에 걸쳐 연재한다.<br><br>이(理)와 기(氣) 사이&nbsp;理와 氣, 그리고 피로 물든 조선의 봄&nbsp;<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f284d4316ce119c6c59d71e3173a6afe66a9ad5a.jpg" class="fr-fic fr-dib"><br>서장 — 불타는 글자 (1504년, 갑자사화)&nbsp;한양의 밤은 책이 타는 냄새로 깊어졌다.&nbsp;종로의 어느 사대부 집 대문 앞에서 의금부 군졸들이 서고의 서책을 마당으로 거칠게 던졌다.&nbsp;마른 한지들이 밤하늘의 매서운 바람을 타고 새처럼 솟구쳤다가 화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nbsp;불길 속에서&nbsp;『대학(大學)』의 한 장이 뒤집혔다. ‘재명명덕(在明明德,&nbsp;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이라는 먹글자가 붉은 불꽃을 머금더니 이내 검게 말려 올라가 재로 부서졌다.&nbsp;먹 냄새와 송진 타는 냄새,&nbsp;그리고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 끌려가며 토해내는 비명이 뒤섞여 도성의 겨울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글자가 죄를 지었습니까?”&nbsp;열아홉 살의 윤서겸이 불타는 마당을 등진 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nbsp;그의 손끝은 추위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 없게 떨리고 있었다.아버지 윤정은 아들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nbsp;평생 홍문관과 성균관을 오가며 경전을 강론하던 아버지의 손이었으나,&nbsp;그날 밤의 손아귀 힘은 무인의 것처럼 단단하고도 절박했다. “글자는 죄가 없다.&nbsp;글자를 읽는 사람에게 죄를 씌우는 자들이 있을 뿐이다.”“그렇다면 지금 임금께서는 천하의 이치(理)를 어기고 계시는 것입니까?&nbsp;성현의 말씀에 군주는 하늘의 이치를 체현하는 자라 하였는데,&nbsp;어찌하여 이치를 적은 책을 태우고 이치를 말한 신하의 목을 베는 것입니까?”“쉿.&nbsp;입을 다물어라.&nbsp;지금은 질문 하나가 사람 열을 죽이는 시절이다.”&nbsp;윤정은 문풍지 너머로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피바람이 한양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nbsp;생모 폐비 윤씨의 죽음에 얽힌 복수로 시작된 연산군의 칼날은 사림(士林)과 훈구(勳舊)를 가리지 않고 도성 전체를 거대한 도살장으로 만들고 있었다.&nbsp;이미 죽은 자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쪼개고 시신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剖棺斬屍)가 연일 이어졌고,&nbsp;한글로 적힌 벽서 한 장 때문에 도성 안의 언문 서책들이 모조리 수거되어 불태워졌다.&nbsp;서겸이 스승으로 모시던 노학자는 사흘 전 새벽에 오랏줄에 묶여 끌려갔고,&nbsp;그날 이후 윤정의 집 문밖에는 그의 이름을 아는 친우들이 더는 나타나지 않았다.그해 겨울,&nbsp;도성의 바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종이 타는 냄새와 피비린내를 몰고 다녔다.&nbsp;윤정은 집 안 깊숙한 곳의 작은 서고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그고 화로에 불을 피웠다.&nbsp;먹을 갈고 붓을 쥐던 그의 마른 손등 위로 푸르고 붉은 핏줄이 팽팽하게 솟아 있었다.&nbsp;그는 시렁에서 한 권씩 서책을 꺼내 표지를 뜯고 갈피를 헤쳐 화로 속에 밀어 넣었다.“왜 책까지 태우십니까?&nbsp;아버지께서 평생 모으고 손수 주석을 단 것들 아닙니까?”&nbsp;서겸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다.“내가 태우는 것은 성현의 책이 아니라 이 책의 여백에 적힌 사람들의 이름과 서찰이다.”&nbsp;윤정은 불길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누가 누구와 교유했는지,&nbsp;누가 어떤 시구(詩句)에 화답했는지가 모두 역모의 연좌(連坐)를 묻는 사초(史草)가 된다.”“이름을 지우면 그분들이 살아납니까?”“살아날 수도 있지.&nbsp;아니면 그저 며칠,&nbsp;몇 달을 잠깐 더 살 뿐일 수도 있고.”&nbsp;윤정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nbsp;서겸이 화로 속으로 손을 뻗어 타들어 가는 종이 한 장을 집으려 하자 아버지가 부젓가락으로 아들의 손목을 매섭게 쳤다. “손대지 마라!&nbsp;거기에는 네 스승이 지난봄에 보내온 시가 적혀 있다.&nbsp;네가 그 시의 기상을 좋아한 것을 아비도 안다.&nbsp;하지만 지금 이 도성에서 곧은 글 한 줄은 칼 한 자루보다 날카로워,&nbsp;쓴 자의 목을 베고 읽은 자의 삼족을 멸한다.”“글을 읽고 그 속에서 억지로 죄를 찾아낸다면,&nbsp;그것은 쓴 이의 잘못이 아니라 읽는 이가 잘못한 것 아닙니까?&nbsp;성현께서 말씀하신 격물치지(格物致知)란 사물의 바른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지,&nbsp;남의 말꼬리를 잡아 죽일 구실을 찾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옳은 물음이다.”&nbsp;윤정은 부젓가락을 내려놓고 아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서겸아,&nbsp;물음의 옳음이 저 문밖의 칼날을 막아 주지는 않는다.&nbsp;지금 우리가 마주한 것은 학당의 강론이 아니라 미쳐 날뛰는 권력의 기세다.”서겸은 입술을 깨물며 책상 위에 놓인 깨끗한 한지 한 장을 끌어당겼다.&nbsp;그리고 채 마르지 않은 붓을 들어 그 한가운데에 큰 글씨로&nbsp;‘理(이)’&nbsp;자 하나를 힘주어 썼다.&nbsp;먹물이 번지며 종이 위에 단정한 획이 자리 잡았다. “아버지,&nbsp;그렇다면 이 글자는 대체 어디에 있습니까?&nbsp;불타는 책 속에 있습니까,&nbsp;칼을 휘두르는 임금의 어좌 위에 있습니까,&nbsp;아니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까?”윤정은 화로 옆에 타다 남은 책갈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주자(朱子)께서는 천하에 이치 없는 기운(氣)이 없고,&nbsp;기운 없는 이치가 없다(天下無無理之氣，亦無無氣之理)고 하셨다.&nbsp;아마도 이치는 책 속이나 마음속 어딘가,&nbsp;혹은 그 둘 사이에 있겠지.&nbsp;하지만 내가 반평생 성리(性理)의 학문을 배우고도 끝내 모르겠는 것은 따로 있다.”&nbsp;윤정의 눈에 화로의 불빛이 일렁였다. “우주의 근본 이치를 안다고 떠드는 사람들의 손에,&nbsp;성현의 도리를 입에 올리는 자들의 소매에 왜 그토록 쉽게 남의 피가 묻는가 하는 것이다.”“이치가 사람을 죽이는 겁니까?”“아니다.&nbsp;이치는 형체도 없고 소리도 없으며 냄새도 없다(無形無聲).&nbsp;이치 스스로는 칼을 쥐지 못한다.&nbsp;다만 보이지 않는 이치를 자기만이 독점한 소유물로 여기는 자가 사람을 죽인다.&nbsp;자기의 욕망과 공포,&nbsp;자기의 권세를 하늘의 절대적인 이치라 부르는 순간,&nbsp;경전의 거룩한 문구는 살육의 뒤에 따라오는 깃발이 될 뿐이다.”그때 골목 저편에서 다급한 말발굽 소리와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밤공기를 가르며 다가왔다.&nbsp;횃불의 붉은 그림자가 담장 너머로 어른거렸다.&nbsp;윤정은 지체 없이 품속에서 낡고 작은 필사본 책 한 권을 꺼내 서겸의 가슴에 안겼다.&nbsp;『주자어류(朱子語類)』와 성리학 요체들을 윤정 자신이 평생에 걸쳐 발췌하고 평을 달아 놓은 수택본(手澤本)이었다.&nbsp;맨 첫 장에는 윤정의 단정한 필체로&nbsp;‘천하의 이치는 하나이나 그 나뉨은 만 가지로 다르다(理一分殊).&nbsp;만물의 이치는 본래 하나이나 그 기운과 형편은 결코 같지 않다’(萬物之理本是一個，其氣稟賦各異各色)&nbsp;글이 적혀 있었다.“뒷문으로 나가 지금 당장 남쪽으로 내려가거라.&nbsp;경상도 산청의 깊은 산속에 내가 젊었을 적 함께 공부하던 노스승의 옛 절집이 있다.&nbsp;거기서 이름을 숨기고 살아라.”“아버지는요?&nbsp;함께 가셔야 합니다!”“나는 여기 남겠다.&nbsp;집주인이 사라지면 관군들은 즉각 나루터와 고갯길을 봉쇄할 것이다.&nbsp;누군가는 문을 열고 저들을 맞이하여 시간을 벌어야 한다.&nbsp;사람은 저마다 감당할 자리가 있는 법이다.”서겸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nbsp;그는 떠나기 전,&nbsp;아버지의 옷자락을 붙잡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아버지,&nbsp;책에는 인간의 본성이 곧 하늘의 이치(性卽理)이며,&nbsp;천하의 이치는 본래 순선무악(純善無惡,&nbsp;순수하게 선하여 악함이 없음)하다고 쓰여 있습니다.&nbsp;그런데 왜 세상은 이토록 잔혹합니까?&nbsp;왜 선한 이치가 지배한다는 세상에서 죄 없는 이들이 개죽음을 당합니까?”윤정은 아들의 물음에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nbsp;대신 아들의 등을 떠밀어 마루 밑 비밀 통로와 이어진 뒷문 쪽으로 보냈다.&nbsp;아버지의 그 깊고 무거운 침묵이 서겸에게는 평생 읽은 어떤 성현의 학설보다 오래,&nbsp;그리고 아프게 남았다.그날 밤 의금부 도사와 관군들의 횃불이 골목 끝을 피처럼 붉혔다.&nbsp;대문이 부서져라 열리는 소리가 나고,&nbsp;서겸은 마루 아래 어두운 틈에 숨을 죽이고 엎드려 아버지가 낯선 관리에게 차분하게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다. “역적의 문하생들과 내통한 죄가 없다면 어찌하여 이 밤에 문을 걸어 잠그고 종이를 태웠느냐?”&nbsp;관리의 서슬 퍼런 호통에 윤정이 대답했다. “죄가 없어도 두려울 수는 있습니다.&nbsp;천둥이 치면 죄 없는 미물도 몸을 숨기는 것이 자연의 기운(氣)&nbsp;아니겠습니까.”&nbsp;그 말 뒤로 소름 끼치는 긴 침묵과 함께 오랏줄을 묶는 소리가 흘렀다.&nbsp;훗날 서겸은 평생에 걸쳐 수많은 경전의 문답과 조정의 쟁론을 기억했으나,&nbsp;그의 철학이 시작된 진짜 자리는 아버지의 말이 끊긴 바로 그 침묵의 순간이었다.&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Wed, 14 Oct 2026 23:22: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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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막셀 모스의 선물론 강독 3</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8</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b3b2eddaeaac364a533906a4981cbc820f7d6cdd.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668px;"><br>On doit &ecirc;tre un ami&nbsp;pour son ami&nbsp;et rendre cadeau pour cadeau&nbsp;on doit avoir&nbsp;rire pour rire&nbsp;et dol pour mensonge&nbsp;사람들은 자신의 친구에게 친구가 되어야 하고&nbsp;선물은 선물로 갚아야 하며 웃음에는 웃음으로&nbsp;거짓말에는 거짓말로 갚아야 한다.&nbsp;&nbsp;에 수록되어 있는 112시구인 본문은 대구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에게는 가 되어야 하고 은 < 선물>로 되 갚아야 하고 에는 로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고 나와 타자의 관계를 규정한다. 소위 말해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상호주의 원리가 배태되어 있다. 선물에는 선물로 되 갚아야 한다는 것은 나와 타자 즉, 서로 친구사이에는 호혜적 공존의 관계가 성립하지만 거짓말에는 거짓말로 되갚는다는 것은 전략적 기만과 상호 보복의 관계가 동전의 양면처럼 존치되고 있다.<br>&nbsp;거짓말에는 거짓말로 번역된 mensonge는 우리말로 거짓말이나 잘못된 진술로 번역될 수 있지만 dol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법률적으로 그리고 다분히 의도를 지닌 기만이나 속임수를 의미한다. 자신이 친구라고 여겼던 타자가 거짓말(mensonge)로 자신을 속였다는 것은 호혜적 공존을 파괴하는 것이므로 나는 파괴된 신뢰를 다분히 의도성을 지닌 기만dol으로 되 되갚아야 하는 것이다. 친구라고 여겼던 타자의 단순한 거짓말의 의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이 현상적으로 나타난 거짓말의 사실성을 기준으로 하여 나는 의도된 기만으로 되 갚는 것이다.&nbsp;고대의 바이킹 사회에서는 기만행위나 거짓말에 대한 중간적인 국가 권력이나 사법체게가 미비했다. 호혜성이 부정되었을 때 혹은 계약을 위반했을 때 위법성과 불법을 규정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이 부재하였기에 호혜성의 파괴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것은 나의 가문이나 믿을 수 있는 동맹이였기에 중재자 없이 상호 호혜적 균형이 부정되었을때는 부정된 방식 그대로 되돌려 주어야 하는 것이다.&nbsp;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단어는 선물로 번역된 단어 cadeau이다. 막셀모스는 그의 증여론에서 선물에 해당하는 단어를 두 가지로 사용하는데, don과 cadeau가 그것이다. cadeau는 다시 반환되어야 할 의무를 지니지 않고 단순히 증여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 노르웨이어를 프랑스어로 막셀모스가 옮기면서 cadeau pour cadeau로 표현한 것은 주고받고 다시 답례로 되돌려지는 순환 구조 속에 오딘의 신화 속의 선물이 놓여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물에 대하여 pour cadeau 선물로 답례해야 한다고 rendre cadeau 모스가 번역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등가물의 교환을 전제로 하는 선물에 불과하다.&nbsp;따라서 don와 cadeau, 이 두 단어 사이에는 미세한 차이가 존재한다. 선물은don 주어야 할 의무와 받아야 할 의무 그리고 다시 되돌려 주어야&nbsp;할 의무의 순환 구조속에 존재하는 선물이다. 선물의 특성상 주어진 즉시 답례되어 져서는 않되며 유한한 시간적인 제한을 두고 현재 받은 선물은 미래 어느 시점에 반환되어지고 이렇게 미래에 반환되어진다고 하는 시간의 관점에서 선물이 주어지는 순간에 받는 사람과 선물을 주는 사람은 미래의 시간과 연결 된다.&nbsp;현재의 선물을 주고받는 이 양자는 미래의 어느 한 순간과 연결되면서 현재의 선물을 주고받는 이 사건은 미래의 불특정한 어느 시점과 연결된다. 현재시점에서 선물을 준 사람은 즉시 선물을 되돌여 받을 수가 없기에 선물을 준 사람과 받은 사람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미래 어느 시점에 선물을 되돌려 받는다고 하는 의무만이 현 사실성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의무는 현재와 미래 사이의 시간의 간격을 상호신용(credit)이&nbsp;매개한다.&nbsp; 물권의 이동(transaction)사이에 존재하는 현재와 불특정한 미래라는 이 두 계기는 이 두 계기를 매개하는 양태에 따라 다양하게 현상화된다. 우리는 두 계기를 연결하는 방법에 따라, 즉 어떻게 현재와 미래를 사회적으로 연결하느냐 하는 방식에 따라 증여,신용,채무,계약이라는 상이한 형태의 사회적 관계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현재와 미래의 시간적 간격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계기 속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사회화하느냐에 있다. 현재의 급부 뒤에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행위는 답례채무&middot;신용계약이라는 현재의 의무와 관계 속에 포괄적으로 규정된다.&nbsp;불확실성을 사회화하는 과정을 진화론적으로 고찰하면 고대사회의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을 단순한 물물교환으로 규정하면서 아울러 원시적인 거래 방식으로 규정하면서 상품경제가 보다 진화론적 진전을 이룬 것으로 일반의 경제사학자들은 규정한다. 이 지점은 막셀모스의 주장과 상반되는 입장이기도 한데 증여론 중반부에서 막셀모스의 입장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모스의 입장은 현재와 미래의 양화적 시간 간격을 신용credit이라는 질적 규정으로 대치시키면서 고대나 게르만의 계약법과 로마의 물권법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현재와 미래를 묶는 사회화의 방법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서술하면서 . 경제학사를 진화론적으로 전개하는 관점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견지 한다.&nbsp;모든 거래 transactions는 증여를 포함하여 양화된 시간 간격을 질적인 신용 credit이 순환하면서 사회 전체를 어떻게 구성하고 결속하고 이 신용이 사회 전체 내부에서 순환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 모스의 입장이다. 이러한 신용의 순환은 사회 내에서 스스로 순환하면서 주고, 받고, 되갚는 구조를 만들 뿐만 아니라 급부(prestation)를 구성한다고 모스는 주장한다.&nbsp;메리 더글라스는 막셀 모스의 증여론 영문판 서문에서 프랑스어 prestation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프랑스어 prestation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부담금, 직업적으로 제공되는 서비스나 재화, 수당, 출산이나 사망 수당, 군인에게 지급된 급여, 패전국이 부담하는 현물 배상, 관중에게 보여주는 운동이나 공연에서의 활약상, 봉건시대 영주에 대한 신하의 의무 혹은 맹세나 서약, 변호사의 법정에서의 선서, 위자료, 행정기관에서 부과하는 노역 등을 의미 한다.&nbsp;프랑스어 prestation은 선물이 한 사회 내에서 순환되면서 파생시키는 각종 관계에서&nbsp;이행되어야 할 행위 사실과 재화를 포괄한다. 따라서 prestation은 국가, 종교, 경제, 사회, 상품, 관습, 도덕,계약, 결혼, 잔치나 연회를 전체적으로 통합하는 용어로 증여론에서 사용되고 있다. 메리 더글라스는 prestation이 포괄성을 지닌다는 의미에서 영어로total을, 그리고 prestation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녀가 생각하기에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하는 단어 service를 결합하여 프랑스어 prestation을 total service로 옮기고 있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프랑스어 prestation를 급부給付로 일반적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 경우 급부給付라는 용어는 책무자의 채무 이행이라는 법학적인 범주에서 태생되었다.]]></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Wed, 14 Oct 2026 02:42:2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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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치에도 수리 기사의 직업정신이 필요하다!</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d6b62018dab4526dc87ed3e68d01a7784ca93a66.jpg" class="fr-fic fr-dib"><br>스마트폰 충전 단자에 문제가 생겨 서비스센터에 다녀왔다. 몇 번 들러본 곳이지만 갈 때마다 친절하고 수리도 확실하다. 담당 기사는 휴대전화를 분해해 충전 단자 쪽 회로판을 교체한 뒤, 고장 원인과 수리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사용에 불편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전화까지 걸려 왔다. 기술에 친절을 더하고, 자신이 한 일의 결과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그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노트북을 수리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여의도의 두어 평 남짓한 작업실에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노트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액정을 손보는 까다로운 작업이었는데, 기사는 능숙하게 기기를 분해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하게 고쳐 놓았다. 나도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직접 노트북 액정을 열었다가 오히려 전체를 망가뜨린 적이 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고, 자신감과 전문성 사이에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는 이런 차이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멀쩡하던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교차로에서 잠시 멈춘 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때 원인을 정확히 짚어 내고 차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정비 기사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자동차의 구조를 안다는 것은 부품 이름을 줄줄 외운다는 뜻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증상에서 보이지 않는 원인을 찾아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줄 안다는 뜻이다.물론 모든 기술자가 그런 신뢰를 주는 것은 아니다. 진단을 잘못해 엉뚱한 부품부터 바꾸는 사람도 있고, 고객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이용해 불필요한 수리를 권하는 사람도 있다. 고객은 의심이 들어도 전문지식이 부족해 반박하기 어렵다. 나는 그래서 한 번 거래해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오래 관계를 유지한다. 비용이 합리적인지,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수리한 결과에 책임을 지는지를 함께 본다.한번은 자동차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담당 기사는 차에 문제가 있다며 예상보다 훨씬 비싼 견적을 내밀었다. 수리하지 않으면 검사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평소 거래하던 정비소에서 고쳐 오겠다고 하자 검사필증을 내주었다. 설명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곳을 나온 뒤에는 차량 운행에도 문제가 생겨 결국 견인차를 불러야 했다. 익숙한 정비소로 옮기고 나니 수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비용도 처음 견적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당시 운행 문제가 왜 생겼는지 내가 기술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객에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설명했는지, 수리의 필요성과 비용을 정직하게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전문성이 신뢰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의 무지를 이용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경험이었다.이 문제는 작은 정비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이 생활 깊숙이 들어온 지금은 거대한 통신기업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2025년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대표적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약 2,3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고를 조사한 뒤, 안전조치 의무와 유출 통지 의무 위반을 이유로 그해 8월 약 1,348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사실만으로 고객의 정보가 안전하게 보호되는 것은 아니었다.가입자는 통신망의 보안 상태를 직접 점검할 수 없다. 기업이 필요한 조치를 했으리라고 믿고 서비스를 이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조직일수록 설명과 책임의 의무가 더 무거워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얼마나 정확히 밝히는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같은 잘못을 막을 장치를 마련하는지가 중요하다. 내 휴대전화를 고쳐 준 기사가 수리 후의 불편까지 확인했던 태도는 대기업에도 요구되는 직업정신이다.나는 이런 전문성과 책임이 사물의 수리나 신체의 치료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 갈등을 조정하는 행정, 공동체의 방향을 정하는 정치에도 필요하다. 오히려 다루는 문제가 복잡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높은 수준의 판단과 책임이 요구된다.고대 그리스 철학이 덕과 앎, 기술의 관계를 거듭 물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인간을 잘 이끄는 능력을 기계를 잘 고치는 기술과 그대로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기술인 테크네와, 인간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행동하는 실천적 지혜인 프로네시스를 구별했다.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함께,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지혜를 요구한다.자동차 수리에서는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목표에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바람직한지부터 의견이 갈린다. 같은 정책이라도 누구에게는 혜택이 되고 누구에게는 부담이 된다. 효율을 높이는 조치가 약자의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능력에는 사실을 파악하고 수단을 선택하는 기술뿐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하는 판단이 포함되어야 한다.계획이론가 토머스 라이너(Thomas Reiner)가 제시한 &lsquo;가치의 기술자&rsquo;라는 표현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계획가의 역할을 논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 나는 이 표현을 정치에도 적용해 보고 싶다. 좋은 정치인은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전문성과 함께, 그 능력을 어떤 가치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갖추어야 한다.물론 가치의 기술자라고 해서 시민을 대신해 좋은 삶을 결정할 권한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시민은 전문가가 마음대로 고쳐 놓을 수 있는 부품이 아니다.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동체의 방향을 함께 결정하는 주체다. 정치의 전문성은 시민의 판단을 대신하는 권위가 아니라, 시민이 더 잘 판단하고 함께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능력이어야 한다.문제를 한국 정치로 돌리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우리 정치인들은 권력을 얻는 방법에 비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얼마나 익히고 있는가. 선거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능력과, 민생의 어려움을 줄이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은 다르다. 전자에 능숙하다는 이유만으로 후자까지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선거 때마다 물갈이 요구가 쏟아진다. 그러나 새 인물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정치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초선이라고 무능한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당선됐다고 유능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공부하는 태도,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 다른 의견을 조정하는 인내심, 그리고 자신이 만든 법과 정책의 결과를 확인하는 책임감이다. 정당은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고 길러 내는 조직이어야 한다.그런데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법안 발의 건수나 방송 출연 횟수, 상대 진영을 향한 공격의 강도에 머문다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법안을 많이 냈다는 사실만으로 시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제도가 왜 작동하지 않는지 살피고, 실행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따지며, 시행 뒤의 문제까지 고쳐야 비로소 일이 완성된다. 수리 기사가 부품을 교체한 횟수만 자랑하고 차가 제대로 움직이는지는 살피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그를 찾겠는가.대통령에게는 그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한 분야에서 쌓은 경력과 명성이 곧바로 국가 운영 능력이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헌법이 정한 권한의 한계를 지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국가 운영은 자신의 확신을 관철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확신을 끊임없이 검증받는 일이기 때문이다.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과 그 뒤의 사태는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재판관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어 2026년 2월 19일에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형사재판의 최종 확정 여부와 구별하더라도,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대해 이처럼 중대한 헌법적&middot;형사적 판단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정치의 책임을 새삼 묻게 한다.이 사태를 정치 초보자의 미숙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경험 부족과 권한 남용은 구별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유능하다는 것은 원하는 일을 밀어붙이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하고, 법과 절차를 지키며, 권력에 대한 견제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지켜야 할 한계를 무너뜨리는 데 쓰인다면 공동체를 해치는 능력이 될 뿐이다.정당 역시 이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당마다 정책과 지지 기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시민이 묻는 것은 그 차이가 실제 삶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는 것이다. 주거비 부담을 얼마나 줄였는지, 돌봄의 공백을 어떻게 메웠는지, 청년이 미래를 계획할 조건을 얼마나 넓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진영의 잘못을 감싸고 상대의 실패만 부각하는 일에 능숙하다면, 정당의 전문성은 공동체보다 조직의 생존에 봉사하게 된다.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뿐 아니라 그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생길 결과까지 감당해야 한다. 좋은 뜻이었다는 말로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더라도 국민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면,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 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한다.그렇다고 정치의 모든 실패를 개인의 인품이나 능력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잘못된 진단을 걸러 내고, 무리한 결정을 제어하고, 실패한 정책을 수정할 제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유능한 사람을 뽑는 일과 누구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좋은 정치는 한 사람의 탁월함에 기대는 만큼이나 여러 사람의 오류를 교정하는 체계에 달려 있다.서비스센터에서 돌아온 뒤 받았던 짧은 전화가 다시 생각난다. 수리한 뒤 사용하는 데 불편은 없는지 묻는 전화였다. 그 말에는 자신이 한 일이 상대의 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확인하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나는 우리 정치에서도 이런 태도를 보고 싶다. 법을 만들고 예산을 집행한 뒤, 시민의 삶이 실제로 나아졌는지 되묻는 정치 말이다.고장 난 휴대전화 하나를 고치는 사람도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결과를 확인한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맡은 정치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거창한 구호를 듣기 전에 묻고 싶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어떻게 고칠 것인가. 그리고 고친 뒤에도 끝까지 책임질 것인가.]]></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Tue, 13 Oct 2026 20:44:52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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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패배 속의 정신사: 식민지 병합에서 역전까지(1910–2030)</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6</link>
			<description><![CDATA[국문&nbsp;초록1910년&nbsp;국권을&nbsp;상실한&nbsp;민족이&nbsp;한&nbsp;세기&nbsp;만에&nbsp;산업화&middot;민주화&middot;문화적&nbsp;세계화를&nbsp;동시에&nbsp;이룩한&nbsp;사례는&nbsp;세계사에&nbsp;드물다. 본고는&nbsp;이 &lsquo;역전의 100년&rsquo;을&nbsp;설명하는&nbsp;심층&nbsp;변수로서 &lsquo;정신적&nbsp;저수지&rsquo; 가설을&nbsp;제시한다.특히&nbsp;본고는&nbsp;이&nbsp;물음을&nbsp;경계&nbsp;밖(beyond borders), 곧 750만&nbsp;재외동포의&nbsp;시좌(視座)에서&nbsp;던진다. 국경&nbsp;단위의&nbsp;사관&nbsp;바깥에&nbsp;서&nbsp;있는&nbsp;디아스포라의&nbsp;자리야말로&nbsp;대한민국의&nbsp;거시사와&nbsp;대동사관을&nbsp;가능하게&nbsp;하는&nbsp;관점임을&nbsp;방법론적&nbsp;전제로&nbsp;삼는다.먼저 663년&nbsp;백강전투에서 1910년&nbsp;병합에&nbsp;이르는 1,300년의&nbsp;거시적&nbsp;시야에서&nbsp;한&middot;일&nbsp;관계사를 &lsquo;분리의 3단계&rsquo;로&nbsp;재구성하고, 일본의&nbsp;대륙&nbsp;지향을 &lsquo;본토&nbsp;회복&nbsp;서사&rsquo;라는&nbsp;해석적&nbsp;가설로&nbsp;읽는다(반론&nbsp;병기).이어 19세기&nbsp;말의&nbsp;총체적&nbsp;위기&nbsp;속에서&nbsp;창발한&nbsp;신흥&nbsp;민족종교 &mdash; 수운&nbsp;최제우의&nbsp;동학, 증산&nbsp;강일순의&nbsp;증산&nbsp;계열, 홍암&nbsp;나철의&nbsp;대종교, 소태산&nbsp;박중빈의&nbsp;원불교 &mdash; 가&nbsp;시천주&middot; 인내천&middot; 인존&middot; 해원상생&middot;정신개벽으로&nbsp;이어지는&nbsp;후천개벽&nbsp;사상사&nbsp;속에서&nbsp;인간관의&nbsp;대전환을&nbsp;이루고, 이들이&nbsp;민족사학과&nbsp;함께&nbsp;형성한&nbsp;정신적&nbsp;저수지가 3&middot;1운동의&nbsp;종교연대로&nbsp;폭발하여&nbsp;남강&nbsp;이승훈&mdash;오산학교&mdash;김기석으로&nbsp;이어지는&nbsp;교육의&nbsp;전승&nbsp;회로를&nbsp;통해&nbsp;제도화되는&nbsp;과정을&nbsp;추적한다.아울러&nbsp;오늘날&nbsp;교세는&nbsp;미약하나&nbsp;민족사관&nbsp;현양의&nbsp;선봉에&nbsp;서&nbsp;온&nbsp;민족종교의&nbsp;역사적&nbsp;위상을&nbsp;재평가한다. 나아가&nbsp;단재&nbsp;신채호의&nbsp;혼(魂)의&nbsp;사관과&nbsp;김기석의&nbsp;정신사적&nbsp;현실&nbsp;판단을&nbsp;준거로, 20세기&nbsp;한국사의&nbsp;굴절과&nbsp;왜곡에도&nbsp;불구하고&nbsp;이&nbsp;정신적&nbsp;자산이&nbsp;산업화&middot;민주화&middot;K-컬처라는&nbsp;현대적&nbsp;성취와&nbsp;맺는&nbsp;상관관계를&nbsp;구조적&nbsp;요인들과의&nbsp;변수&nbsp;통제&nbsp;속에서&nbsp;논증한다.결론에서는&nbsp;백강&nbsp;이후&nbsp;기원을&nbsp;지운&nbsp;백제&nbsp;유민과&nbsp;기원을&nbsp;현양하는&nbsp;오늘의&nbsp;디아스포라를&nbsp;대비&nbsp;시켜, 일본이라는&nbsp;거울(경고)에&nbsp;디아스포라라는&nbsp;거울(희망)을&nbsp;병치한다. 아울러&nbsp;남북&nbsp;분단이 &lsquo;존재론적&nbsp;분리&rsquo;로&nbsp;굳어질&nbsp;위험을&nbsp;경고하고, 식민사관&middot;사대사관을&nbsp;넘어서는&nbsp;홍익&nbsp;대동사관을&nbsp;남&middot;북&middot;해외&nbsp;세&nbsp;주체가&nbsp;함께&nbsp;쓰는 2030년&nbsp;통일&nbsp;시대정신의&nbsp;사관적&nbsp;기초로&nbsp;제안한다.주제어:&nbsp;정신사, 백강전투, 신채호, 김기석, 3&middot;1운동, 신흥&nbsp;민족종교, 후천개벽, 인존, 산업화, 민주화, K-컬처, 대동사관, 통일, 디아스포라, 재외동포<br>Ⅰ. 서론: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mdash; 문제 제기와 사관의 전환&nbsp;<br>1. 물음: 패배는&nbsp;어떻게&nbsp;역전이&nbsp;되었는가크로체는 &ldquo;모든&nbsp;진정한&nbsp;역사는&nbsp;현대사&rdquo;라고&nbsp;하였다.[1] 과거의&nbsp;사건은&nbsp;현재의&nbsp;절실한&nbsp;물음&nbsp;속에서만&nbsp;역사로&nbsp;되살아난다. 오늘&nbsp;우리가&nbsp;던지는&nbsp;물음은&nbsp;이것이다. 1910년&nbsp;국권을&nbsp;통째로&nbsp;상실하고, 1945년&nbsp;타율적으로&nbsp;해방되어&nbsp;국토마저&nbsp;분단되고, 전쟁&nbsp;후유증으로1953년&nbsp;세계&nbsp;최빈국의&nbsp;폐허&nbsp;위에&nbsp;섰던&nbsp;민족이, 어떻게&nbsp;한&nbsp;세기&nbsp;만에&nbsp;산업화와&nbsp;민주화를&nbsp;동시에&nbsp;이루고&nbsp;나아가&nbsp;자신의&nbsp;문화로&nbsp;세계와&nbsp;대화하는&nbsp;나라가&nbsp;되었는가. 이른바 &lsquo;역전의 100년&rsquo;의&nbsp;동력은&nbsp;무엇인가.본고가&nbsp;이&nbsp;물음을&nbsp;던지는&nbsp;자리는&nbsp;서울이&nbsp;아니라&nbsp;로스앤젤레스, 곧&nbsp;경계&nbsp;밖(beyond borders)&nbsp;이다. 오늘&nbsp;약 708만에&nbsp;이르는&nbsp;재외동포는&nbsp;남과&nbsp;북&nbsp;어느&nbsp;체제에도&nbsp;온전히&nbsp;속하지&nbsp;않은&nbsp;채&nbsp;민족사를&nbsp;살아가는&nbsp;제3의&nbsp;주체다.[2] 경계&nbsp;밖의&nbsp;삶은&nbsp;결핍이&nbsp;아니라&nbsp;시좌(視座)다. 국경&nbsp;단위로&nbsp;재단된&nbsp;국사(國史)의&nbsp;틀&nbsp;밖에&nbsp;서&nbsp;있기에, 디아스포라는 1,300년의&nbsp;거시사를&nbsp;국가&nbsp;간&nbsp;대립의&nbsp;연대기가&nbsp;아니라&nbsp;하나의&nbsp;문명권이&nbsp;갈라지고&nbsp;다시&nbsp;만나는&nbsp;드라마로&nbsp;조망할&nbsp;수&nbsp;있다. 본고의&nbsp;거시적&nbsp;시야와&nbsp;대동사관은&nbsp;바로&nbsp;이&nbsp;자리에서&nbsp;비로소&nbsp;가능해지는&nbsp;관점임을&nbsp;먼저&nbsp;밝혀&nbsp;둔다.통상적&nbsp;설명은&nbsp;구조에서&nbsp;답을&nbsp;찾는다. 냉전&nbsp;지정학과&nbsp;미국의&nbsp;원조, 발전국가의&nbsp;산업정책, 높은&nbsp;교육&nbsp;투자, 수출&nbsp;주도&nbsp;전략&nbsp;등이다. 이들은&nbsp;모두&nbsp;필요조건이다. 그러나&nbsp;유사한&nbsp;구조적&nbsp;조건에&nbsp;놓였던&nbsp;다른&nbsp;탈식민&nbsp;국가들이&nbsp;같은&nbsp;성취에&nbsp;이르지&nbsp;못했다는&nbsp;사실은, 구조만으로는&nbsp;설명이&nbsp;완결되지&nbsp;않음을&nbsp;시사한다. 본고는&nbsp;그&nbsp;결락(缺落)을&nbsp;메우는&nbsp;심층&nbsp;변수로 &lsquo;정신적&nbsp;저수지(spiritual reservoir)&rsquo; 가설을&nbsp;제시한다. 패배의&nbsp;시대에&nbsp;신흥&nbsp;민족종교와&nbsp;민족사학, 그리고&nbsp;교육&nbsp;구국운동이&nbsp;축적해&nbsp;놓은&nbsp;가치&middot;상징&middot;조직&middot;인적&nbsp;네트워크의&nbsp;총량이, 구조적&nbsp;기회가&nbsp;열렸을&nbsp;때&nbsp;민족적&nbsp;응답의&nbsp;질과&nbsp;속도를&nbsp;결정했다는&nbsp;가설이다.이는&nbsp;본&nbsp;컨퍼런스〈역전의&nbsp;정신사〉에&nbsp;부여된&nbsp;과제, 곧 &lsquo;정신사적&nbsp;뿌리와&nbsp;현대적&nbsp;성취(산업화&middot;민주화&middot;K-컬처)의&nbsp;상관관계&rsquo;를&nbsp;규명하는&nbsp;작업이며, 다른&nbsp;세션에서&nbsp;다루어질&nbsp;민족종교의&nbsp;창발, 후천개벽&nbsp;사상, 1919년의&nbsp;이념, 독립항쟁&nbsp;조직의&nbsp;논의를&nbsp;종합하여&nbsp;현재와&nbsp;미래로&nbsp;잇는&nbsp;결론부의&nbsp;성격을&nbsp;갖는다.<br>2. 1,300년의&nbsp;시야: 백강에서&nbsp;병합까지 &mdash; 하나의&nbsp;해석적&nbsp;가설이&nbsp;물음에&nbsp;답하려면&nbsp;시야를 1910년보다&nbsp;훨씬&nbsp;멀리, 663년의&nbsp;백강(白江) 하구까지&nbsp;소급할&nbsp;필요가&nbsp;있다. 그해 8월&nbsp;나당연합군은&nbsp;백제&nbsp;부흥군과&nbsp;그를&nbsp;지원한&nbsp;왜(倭)의&nbsp;대선단을&nbsp;백강&nbsp;어귀에서&nbsp;격파하였다. 『구당서』는&nbsp;왜선 400척이&nbsp;불타 &ldquo;연기와&nbsp;불꽃이&nbsp;하늘을&nbsp;붉게&nbsp;물들이고&nbsp;바닷물마저&nbsp;붉었다&rdquo;고&nbsp;전한다.[3] 백제&nbsp;부흥의&nbsp;꿈이&nbsp;좌절되자&nbsp;왕족&middot;귀족&middot;학자&middot;기술자를&nbsp;포함한&nbsp;백제&nbsp;유민들이&nbsp;여러&nbsp;차례에&nbsp;걸쳐&nbsp;대규모로&nbsp;열도로&nbsp;건너가&nbsp;정착하였다. 그&nbsp;누적&nbsp;규모를&nbsp;발표자는 20만&nbsp;명&nbsp;이상으로&nbsp;추정한다.[4]주목할&nbsp;것은&nbsp;그&nbsp;이후의&nbsp;속도다. 패전&nbsp;후&nbsp;열도의&nbsp;정권은&nbsp;다이호&nbsp;율령(701)으로&nbsp;율령국가의&nbsp;골격을&nbsp;세우고, 720년에는&nbsp;정사(正史) 『일본서기』를&nbsp;완성한다.[5] 패배로부터&nbsp;두&nbsp;세대가&nbsp;지나기&nbsp;전에&nbsp;국가&nbsp;형태와&nbsp;공식&nbsp;역사를&nbsp;함께&nbsp;갖춘&nbsp;것이다. 그런데&nbsp;『일본서기』의&nbsp;서사는&nbsp;단순한&nbsp;건국&nbsp;기록이&nbsp;아니다. 그것은&nbsp;자신들의&nbsp;한반도&nbsp;기원을&nbsp;지우는&nbsp;대신, 거꾸로&nbsp;신대(神代) 이래&nbsp;한반도&nbsp;남부를&nbsp;경영했다는&nbsp;서사(이른바&nbsp;임나일본부)를&nbsp;축조함으로써[6] 스스로를&nbsp;만주&nbsp;대륙과&nbsp;중국&nbsp;동부, 한반도에&nbsp;이르는&nbsp;동북아&nbsp;문명의&nbsp;정통&nbsp;계승자로&nbsp;정위하려는&nbsp;기획이었다. 요컨대&nbsp;망국의&nbsp;유민이&nbsp;새&nbsp;땅에서&nbsp;국가를&nbsp;세우며, 잃어버린&nbsp;본토에&nbsp;대한&nbsp;기억을 &lsquo;본래&nbsp;우리의&nbsp;강역이었다&rsquo;는&nbsp;신화적&nbsp;청구권으로&nbsp;반전시킨&nbsp;것이다.[7]이&nbsp;심층&nbsp;서사의&nbsp;관점에서&nbsp;보면, 그&nbsp;뒤의&nbsp;역사에&nbsp;하나의&nbsp;장기&nbsp;지속하는&nbsp;충동이&nbsp;감지된다. 1592년&nbsp;도요토미&nbsp;히데요시는 &lsquo;정명가도(征明假道)&rsquo;를&nbsp;내걸고&nbsp;조선을&nbsp;침공하였으나&nbsp;그&nbsp;칼끝은&nbsp;조선을&nbsp;넘어&nbsp;명, 곧&nbsp;대륙을&nbsp;향해&nbsp;있었다.[8] 그&nbsp;기획이&nbsp;좌절된&nbsp;뒤에도&nbsp;충동은&nbsp;소멸하지&nbsp;않았다. 서세동점의&nbsp;시대에&nbsp;가장&nbsp;발&nbsp;빠르게&nbsp;서구&nbsp;제국주의를&nbsp;수입한&nbsp;일본은&nbsp;정한론(1873)에서&nbsp;한일병합(1910)으로, 만주국(1932)에서&nbsp;대동아공영권으로&nbsp;나아가며&nbsp;마침내 &lsquo;조상들의&nbsp;땅&rsquo;이라&nbsp;여긴&nbsp;대륙&nbsp;침탈을&nbsp;실행에&nbsp;옮겼다.[9] 백강에서&nbsp;병합까지 1,300년 &mdash; 이것이&nbsp;본고가&nbsp;취하는&nbsp;거시적&nbsp;시야다.물론&nbsp;이&nbsp;독법은&nbsp;해석적&nbsp;가설이며, 주류&nbsp;학계의&nbsp;통설과는&nbsp;구별하여&nbsp;제시한다. 통설은&nbsp;야마토&nbsp;정권의&nbsp;자생적&nbsp;성립을&nbsp;전제하고, 임진왜란을&nbsp;전국&nbsp;통일&nbsp;이후의&nbsp;국내&nbsp;정치적&nbsp;요인으로, 근대&nbsp;일본의&nbsp;팽창을&nbsp;서구&nbsp;제국주의&nbsp;모방이라는&nbsp;근대적&nbsp;현상으로&nbsp;설명한다. 본고의 &lsquo;본토&nbsp;회복&nbsp;서사&rsquo; 가설은&nbsp;이러한&nbsp;실증적&nbsp;인과&nbsp;설명을&nbsp;대체하려는&nbsp;것이&nbsp;아니라, 개별&nbsp;사건들의&nbsp;국면적&nbsp;원인&nbsp;아래에서&nbsp;작동해&nbsp;온&nbsp;심층의&nbsp;집단&nbsp;서사, 맥닐(W. H. McNeill) 이&nbsp;말한 &lsquo;신화역사 (Mythistory)&rsquo;의&nbsp;층위를&nbsp;조명하려는&nbsp;것이다.[10] 민족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실증된 과거만이 아니라 스스로 믿는 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lsquo;지운 기억이 어떻게 갈망이 되는가&rsquo;라는 반문에 대해서는, 의식이 지운 기원일수록 서사의 심층 구조에 무의식적 충동으로 침전된다는 관점을 취한다. 『일본서기』가 기원을 지우는 바로 그 행위로써 대륙 경영의 서사를 축조했다는 사실이 그 증좌다. 바로 그렇기에 이 가설은 검증과 반증에 열려 있어야 하며, 본 컨퍼런스가 종합토론에서 반론 세션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br>3. 사관의&nbsp;전환: 식민사관&middot;사대사관에서&nbsp;홍익&nbsp;대동사관으로거시적&nbsp;시야가&nbsp;필요한&nbsp;둘째&nbsp;이유는&nbsp;사관(史觀)의&nbsp;문제다. 우리는&nbsp;지난 100년의&nbsp;역사를&nbsp;여전히&nbsp;두&nbsp;개의&nbsp;빌린&nbsp;안경으로&nbsp;보아&nbsp;왔다. 하나는&nbsp;식민사관이다. 조선총독부&nbsp;조선사편수회가&nbsp;축조한&nbsp;타율성론과&nbsp;정체성론은&nbsp;한국사를&nbsp;반도에&nbsp;가두고&nbsp;그&nbsp;출발점인&nbsp;고조선을&nbsp;신화로&nbsp;격하하였다.[11] 다른&nbsp;하나는&nbsp;사대사관으로, 중화&nbsp;중심&nbsp;또는&nbsp;강대국&nbsp;중심의&nbsp;질서&nbsp;속에서&nbsp;우리&nbsp;역사의&nbsp;자리를&nbsp;종속&nbsp;변수로&nbsp;배치해&nbsp;온&nbsp;관성이다. 두&nbsp;안경&nbsp;모두&nbsp;한국사를 &lsquo;당하는&nbsp;역사&rsquo;로&nbsp;서술하게&nbsp;만든다.본고는&nbsp;그&nbsp;대안으로 &lsquo;홍익&nbsp;대동사관(弘益大同史觀)&rsquo;을&nbsp;제안한다. 이는&nbsp;홍익인간(弘益人間) 의&nbsp;건국&nbsp;이념을&nbsp;사관의&nbsp;원리로&nbsp;삼아, 동아시아사를&nbsp;지배와&nbsp;종속의&nbsp;서사가&nbsp;아니라&nbsp;문명의&nbsp;공유와&nbsp;상생의&nbsp;서사로&nbsp;재구성하려는&nbsp;관점이다. 대동사관은&nbsp;국수주의적&nbsp;자기&nbsp;확대가&nbsp;아니다. 일본을&nbsp;영원한&nbsp;타자로&nbsp;배제하는&nbsp;것이&nbsp;아니라, 본디&nbsp;같은&nbsp;문명의&nbsp;포대기에서&nbsp;자라난&nbsp;이웃이&nbsp;어떻게&nbsp;타자가&nbsp;되어&nbsp;갔는지를&nbsp;직시함으로써, 오늘의&nbsp;남북이&nbsp;같은&nbsp;길을&nbsp;걷지&nbsp;않도록&nbsp;경계하는&nbsp;성찰의&nbsp;사관이다. 아래에서&nbsp;본고는&nbsp;기승전결의&nbsp;구성에&nbsp;따라, 패배의&nbsp;구조와&nbsp;정신적&nbsp;저수지의&nbsp;형성(承), 역전의&nbsp;동력과&nbsp;현대적&nbsp;성취(轉), 그리고 2030년을&nbsp;향한&nbsp;통일&nbsp;시대정신(結)을&nbsp;차례로&nbsp;논한다.예상되는&nbsp;반론에&nbsp;미리&nbsp;답해&nbsp;둔다. 가치를&nbsp;내장한&nbsp;사관을&nbsp;제안하는&nbsp;것은&nbsp;결국&nbsp;식민사관의&nbsp;거울상이&nbsp;아닌가. 아니다. 관점(perspective)과&nbsp;왜곡(distortion)은&nbsp;세&nbsp;가지&nbsp;기준으로&nbsp;갈린다. 첫째, 사료&nbsp;취급의&nbsp;정직성이다. 조선사편수회는&nbsp;사서를&nbsp;수거&middot;통제하며&nbsp;서사를&nbsp;축조했지만, 대동사관&nbsp;은&nbsp;모든&nbsp;전거를&nbsp;공개하고&nbsp;논쟁&nbsp;중인&nbsp;사료는&nbsp;논쟁&nbsp;중이라고&nbsp;밝힌다. 둘째, 반증에&nbsp;대한&nbsp;개방성이다. 본고는&nbsp;핵심&nbsp;주장들을&nbsp;해석적&nbsp;가설로&nbsp;명시하고&nbsp;반론을&nbsp;병기하지만, 타율성론은&nbsp;스스로를&nbsp;가설로&nbsp;취급한&nbsp;적이&nbsp;없다. 셋째, 타자의&nbsp;자리다. 식민사관은&nbsp;타자를&nbsp;열등한&nbsp;객체로&nbsp;배치했지만, 홍익의&nbsp;사관은&nbsp;타자 &mdash; 일본, 그리고&nbsp;북조선 &mdash; 를&nbsp;같은&nbsp;문명의&nbsp;갈라진&nbsp;가지로&nbsp;대우한다. 요컨대&nbsp;문제는&nbsp;가치의&nbsp;유무가&nbsp;아니다. 가치&nbsp;없는&nbsp;사관은&nbsp;없다. 문제는&nbsp;그&nbsp;가치가&nbsp;학문의&nbsp;규율에&nbsp;복종&nbsp;하는가이다.<br>Ⅱ. 패배의&nbsp;구조와&nbsp;정신적&nbsp;저수지의&nbsp;형성, 1860&ndash;1945<br>1. 서세동점과&nbsp;두&nbsp;갈래의&nbsp;응전19세기&nbsp;후반&nbsp;동아시아는&nbsp;서구&nbsp;제국주의라는&nbsp;미증유의&nbsp;파도&nbsp;앞에&nbsp;섰다. 일본의&nbsp;응전은&nbsp;물질의&nbsp;길이었다. 화혼양재(和魂洋才)를&nbsp;내걸고&nbsp;출발한&nbsp;메이지&nbsp;유신은&nbsp;곧&nbsp;탈아입구&nbsp;(脫亞入歐) 로&nbsp;기울었고, 서양의&nbsp;물질문명과&nbsp;함께&nbsp;그&nbsp;제국주의까지&nbsp;통째로&nbsp;수입하여&nbsp;동아시아에서&nbsp;패권을&nbsp;행사하는&nbsp;길로&nbsp;나아갔다. 그&nbsp;귀결이&nbsp;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1910년의&nbsp;병합이었다.가난하고&nbsp;힘없던&nbsp;조선은&nbsp;물질의&nbsp;경쟁에서&nbsp;패배하였다. 그러나&nbsp;바로&nbsp;그&nbsp;패배의&nbsp;골짜기에서&nbsp;전혀&nbsp;다른&nbsp;응전이&nbsp;시작되었으니, 그것은&nbsp;정신의&nbsp;길이었다. 본고는&nbsp;이&nbsp;시기에&nbsp;축적된&nbsp;가치&nbsp;(홍익&middot; 상생&middot;자존), 상징(단군&middot;개벽), 조직(교단과&nbsp;학교), 인적&nbsp;네트워크의&nbsp;총량을 &lsquo;정신적&nbsp;저수지&rsquo;라&nbsp;부른다. 물질의&nbsp;전쟁에서&nbsp;진&nbsp;민족이&nbsp;정신의&nbsp;저수지에&nbsp;물을&nbsp;채우고&nbsp;있었던&nbsp;것이다. 그&nbsp;첫&nbsp;수원(水源)이&nbsp;아래에서&nbsp;살필&nbsp;신흥&nbsp;민족종교의&nbsp;창발이다.[12]<br>2. 위기&nbsp;속의&nbsp;창발: 민족종교&nbsp;발생의&nbsp;사회사적&nbsp;배경과&nbsp;비교종교학적&nbsp;고찰신흥&nbsp;민족종교의&nbsp;발생은&nbsp;우연이&nbsp;아니라&nbsp;총체적&nbsp;위기의&nbsp;산물이었다. 19세기&nbsp;조선은&nbsp;안으로&nbsp;세도정치의&nbsp;부패와&nbsp;삼정(三政)의&nbsp;문란, 거듭되는&nbsp;기근과&nbsp;콜레라의&nbsp;창궐로&nbsp;민중의&nbsp;삶이&nbsp;뿌리째&nbsp;흔들렸고, 밖으로는&nbsp;이양선의&nbsp;출몰과&nbsp;서학(西學)의&nbsp;확산, 아편전쟁&nbsp;이후&nbsp;중화&nbsp;질서의&nbsp;붕괴가&nbsp;세계관&nbsp;전체를&nbsp;뒤흔들었다. 홍경래의&nbsp;난(1811)에서&nbsp;임술민란(1862)에&nbsp;이르는&nbsp;민란의&nbsp;세기는&nbsp;기성&nbsp;질서의&nbsp;응답&nbsp;능력이&nbsp;소진되었음을&nbsp;보여&nbsp;준다. 기성&nbsp;종교도&nbsp;마찬가지였다. 지배&nbsp;이데올로기로&nbsp;경직된&nbsp;성리학은&nbsp;민중의&nbsp;고통에&nbsp;답하지&nbsp;못했고, 오백&nbsp;년&nbsp;억불(抑佛) 아래&nbsp;산중으로&nbsp;밀려난&nbsp;불교는&nbsp;사회적&nbsp;발언권을&nbsp;잃은&nbsp;지&nbsp;오래였으며, 천주교는&nbsp;외래&nbsp;세력과&nbsp;결부되어&nbsp;박해와&nbsp;경계의&nbsp;대상이&nbsp;되었다. 이&nbsp;종교적&nbsp;공백에서&nbsp;민중은&nbsp;밖에서&nbsp;빌려&nbsp;오지&nbsp;않고&nbsp;스스로의&nbsp;영성으로&nbsp;새&nbsp;하늘을&nbsp;열었다. &lsquo;위기&nbsp;속의&nbsp;창발(emergence)&rsquo;이란&nbsp;이를&nbsp;가리킨다.비교종교학의&nbsp;시야에서&nbsp;보면&nbsp;위기의&nbsp;시대에&nbsp;민중&nbsp;종교운동이&nbsp;분출하는&nbsp;것은&nbsp;세계사적&nbsp;보편&nbsp;현상이다. 중세&nbsp;유럽의&nbsp;천년왕국운동, 청&nbsp;말의&nbsp;태평천국, 북미&nbsp;원주민의&nbsp;고스트&nbsp;댄스가&nbsp;그러하다.[13] 그러나&nbsp;한국의&nbsp;신흥&nbsp;민족종교는&nbsp;이&nbsp;보편&nbsp;유형과&nbsp;뚜렷이&nbsp;구별되는&nbsp;특성을&nbsp;보인다. 첫째, 파국의&nbsp;종말론이&nbsp;아니라&nbsp;전환의&nbsp;개벽론이다. 세계의&nbsp;멸망과&nbsp;선민(選民)의&nbsp;구원이&nbsp;아니라, 선천(先天)의&nbsp;낡은&nbsp;질서가&nbsp;다하고&nbsp;후천(後天)의&nbsp;새&nbsp;문명이&nbsp;열린다는&nbsp;대전환의&nbsp;선포다. 둘째, 심판이&nbsp;아니라&nbsp;해원(解冤)이다. 압제자에&nbsp;대한&nbsp;보복의&nbsp;서사&nbsp;대신, 쌓인&nbsp;원한을&nbsp;풀고&nbsp;함께&nbsp;사는&nbsp;상생의&nbsp;서사를&nbsp;택했다. 셋째, 무장&nbsp;봉기의&nbsp;좌절&nbsp;이후에도&nbsp;절멸적&nbsp;폭력으로&nbsp;기울지&nbsp;않고&nbsp;교육&middot; 수양&middot;문화&nbsp;운동으로&nbsp;방향을&nbsp;전환하는&nbsp;놀라운&nbsp;자기&nbsp;절제를&nbsp;보였다. 패배의&nbsp;한(恨)을&nbsp;보복이&nbsp;아니라&nbsp;개벽의&nbsp;에너지로&nbsp;승화시킨&nbsp;이&nbsp;특성이야말로, 훗날 3&middot;1운동의&nbsp;비폭력&nbsp;노선과&nbsp;민주화&nbsp;운동의&nbsp;평화적&nbsp;성격으로&nbsp;이어지는&nbsp;원형질이다.창발의&nbsp;계보를&nbsp;그&nbsp;창시자들로&nbsp;짚어&nbsp;보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nbsp;경주의&nbsp;몰락&nbsp;양반가에서&nbsp;태어나 1860년&nbsp;결정적&nbsp;종교&nbsp;체험&nbsp;속에서&nbsp;동학을&nbsp;창도하였다. 내&nbsp;몸에&nbsp;한울님을&nbsp;모셨다는&nbsp;시천주(侍天主)의&nbsp;선언은&nbsp;신분제&nbsp;사회의&nbsp;근저를&nbsp;흔드는&nbsp;것이었고, 그는 1864년 &lsquo;좌도난정(左道亂正)&rsquo;의&nbsp;죄목으로&nbsp;처형되었으나&nbsp;그&nbsp;도맥은&nbsp;해월&nbsp;최시형을&nbsp;거쳐 3세&nbsp;교조&nbsp;의암&nbsp;손병희의&nbsp;천도교로&nbsp;이어졌다.[14]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nbsp;동학농민전쟁의&nbsp;참상을&nbsp;목도한&nbsp;뒤&nbsp;무력이&nbsp;아닌&nbsp;길을&nbsp;물어, 원한으로&nbsp;가득&nbsp;찬&nbsp;천지의&nbsp;질서&nbsp;자체를&nbsp;뜯어고친다는&nbsp;천지공사(天地公事)를&nbsp;행하고&nbsp;해원상생을&nbsp;선포하였다. 그&nbsp;법통은&nbsp;사후&nbsp;보천교&middot;증산도&middot; 대순진리회&nbsp;등&nbsp;증산&nbsp;계열&nbsp;교단들로&nbsp;이어졌다.[15]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은&nbsp;문과에&nbsp;급제한&nbsp;엘리트&nbsp;관료&nbsp;출신으로, 을사오적&nbsp;처단을&nbsp;시도하다&nbsp;유배되었고, 1909년&nbsp;단군&nbsp;신앙을&nbsp;다시&nbsp;일으켜&nbsp;대종교를&nbsp;열었다. 국교(國敎)의&nbsp;재건이&nbsp;곧&nbsp;국권의&nbsp;재건이라는&nbsp;그의&nbsp;확신은&nbsp;만주&nbsp;무장투쟁의&nbsp;모체가&nbsp;되었으며, 그는 1916년&nbsp;구월산&nbsp;삼성사에서&nbsp;스스로&nbsp;목숨을&nbsp;끊어&nbsp;순교하였다.[16]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1916년 대각 후 &lsquo;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rsquo;는 표어로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전신)를 세우고, 저축조합과 간척 사업으로 개벽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새 길을 열었다.[17] 국망 전후 반세기 사이에 몰락 양반의 아들, 농민의 아들, 급제 관료, 청년 구도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서 같은 방향의 문을 연 것이다.<br>3. 후천개벽의&nbsp;사상사: 인존&middot;해원상생&middot;정신개벽과&nbsp;인간관의&nbsp;대전환이들&nbsp;종교의&nbsp;사상사적&nbsp;핵심은&nbsp;인간관의&nbsp;대전환에&nbsp;있으며, 그&nbsp;계보는&nbsp;뚜렷한&nbsp;상승선을&nbsp;그린다. 수운의&nbsp;시천주 &mdash; 사람은&nbsp;저마다&nbsp;한울님을&nbsp;모신&nbsp;존재다 &mdash; 에서&nbsp;출발하여, 해월의&nbsp;사인여천(事人如天) &mdash; 사람&nbsp;섬기기를&nbsp;하늘같이&nbsp;하라 &mdash; 을&nbsp;거쳐, 천도교의&nbsp;인내천(人乃天) &mdash; 사람이&nbsp;곧&nbsp;하늘이다 &mdash; 에&nbsp;이른다. 증산은&nbsp;여기서&nbsp;한&nbsp;걸음&nbsp;더&nbsp;나아가&nbsp;인존(人尊)을&nbsp;선포하였다. 하늘의&nbsp;시대와&nbsp;땅의&nbsp;시대가&nbsp;지나고&nbsp;이제&nbsp;사람이&nbsp;높임을&nbsp;받는&nbsp;시대가&nbsp;열린다는&nbsp;것이다. 소태산의&nbsp;정신개벽은&nbsp;이&nbsp;인간&nbsp;존엄의&nbsp;사상을&nbsp;물질문명&nbsp;시대의&nbsp;과제로&nbsp;번역하였다. 물질의&nbsp;개벽이&nbsp;인간을&nbsp;노예로&nbsp;만들지&nbsp;않으려면&nbsp;정신의&nbsp;개벽이&nbsp;그에&nbsp;상응해야&nbsp;한다는&nbsp;통찰은, 기술문명&nbsp;비판으로서&nbsp;오늘날에도&nbsp;유효하다.이&nbsp;계보가&nbsp;함축하는&nbsp;인간관의&nbsp;변화를&nbsp;음미할&nbsp;필요가&nbsp;있다. 천명을&nbsp;받드는&nbsp;백성에서, 하늘을&nbsp;모신&nbsp;존재로, 하늘&nbsp;그&nbsp;자체로, 마침내&nbsp;천지의&nbsp;주인으로 &mdash; 반상(班常)과&nbsp;적서(嫡庶), 남녀와&nbsp;장유의&nbsp;차별이&nbsp;물샐틈없던&nbsp;신분제&nbsp;사회의&nbsp;한복판에서&nbsp;만민의&nbsp;존엄이&nbsp;선언된&nbsp;것이다. 해월이&nbsp;며느리의&nbsp;베&nbsp;짜는&nbsp;소리를&nbsp;한울님의&nbsp;일하심이라&nbsp;하고&nbsp;어린이를&nbsp;때리지&nbsp;말라&nbsp;가르친&nbsp;것은&nbsp;그&nbsp;실천적&nbsp;표현이며, 천도교&nbsp;소년운동에서&nbsp;방정환의&nbsp;어린이&nbsp;선언과&nbsp;어린이날이&nbsp;나온&nbsp;것은&nbsp;그&nbsp;제도적&nbsp;결실이다.[18] 요컨대 후천개벽의 인간관은 서구 인권 담론의 수입 이전에 이 땅의 영성이 내재적으로 도달한 인간 존엄의 선언이었고, 제Ⅲ장에서 보듯 한 세기 뒤 민주화의 정신사적 원류가 된다.<br>4. 교세와&nbsp;공헌의&nbsp;비대칭: 신흥&nbsp;민족종교의&nbsp;위상에&nbsp;대한&nbsp;정당한&nbsp;평가오늘의&nbsp;종교&nbsp;지형에서&nbsp;이들의&nbsp;자리는&nbsp;초라해&nbsp;보인다. 2015년&nbsp;인구총조사&nbsp;기준&nbsp;개신교&nbsp;인구는&nbsp;약 19.7%, 불교는 15.5%, 천주교는 7.9%인&nbsp;데&nbsp;비해, 천도교&middot;대종교&middot;원불교&middot;증산&nbsp;계열을&nbsp;모두&nbsp;합쳐도 1%에&nbsp;미치지&nbsp;못한다.[19] 수천&nbsp;년&nbsp;전통의&nbsp;사찰과&nbsp;문화&nbsp;유산을&nbsp;지닌&nbsp;불교, 그리고&nbsp;구한말&nbsp;미국&nbsp;선교사들의&nbsp;학교&middot;병원과&nbsp;함께&nbsp;뿌리내리고&nbsp;해방&nbsp;후&nbsp;미국&nbsp;주도의&nbsp;질서와&nbsp;고도성장의&nbsp;물결에&nbsp;올라타&nbsp;대형&nbsp;교회로&nbsp;기업화하기까지&nbsp;한&nbsp;개신교의&nbsp;교세에&nbsp;비하면, 민족종교의&nbsp;현재&nbsp;교세는&nbsp;미미하다.그러나&nbsp;이&nbsp;비대칭을&nbsp;읽을&nbsp;때&nbsp;두&nbsp;가지를&nbsp;기억해야&nbsp;한다. 첫째, 오늘의&nbsp;교세는&nbsp;자유로운&nbsp;경쟁의&nbsp;결과가&nbsp;아니라&nbsp;탄압의&nbsp;누적&nbsp;결과다. 동학은&nbsp;창도자의&nbsp;처형과&nbsp;농민전쟁의&nbsp;학살로&nbsp;수십만의&nbsp;피를&nbsp;흘렸고, 일제는&nbsp;민족종교를 &lsquo;종교&rsquo;가&nbsp;아닌 &lsquo;유사종교&rsquo;로&nbsp;분류하여&nbsp;경찰&nbsp;단속의&nbsp;대상으로&nbsp;삼았다. 한때&nbsp;수백만&nbsp;신도로&nbsp;추산되던&nbsp;보천교는&nbsp;강제&nbsp;해산되었고, 대종교는&nbsp;교단의&nbsp;중심을&nbsp;만주로&nbsp;옮겨야&nbsp;했으며&nbsp;무장투쟁의&nbsp;대가로&nbsp;지도부가&nbsp;궤멸당하는&nbsp;임오교변(1942)을&nbsp;겪었다.[20] 민족과&nbsp;운명을&nbsp;같이한&nbsp;종교는&nbsp;민족이&nbsp;수난당할&nbsp;때&nbsp;함께&nbsp;수난당했던&nbsp;것이다. 둘째, 종교의&nbsp;역사적&nbsp;무게는&nbsp;신도&nbsp;수로&nbsp;재는&nbsp;것이&nbsp;아니다. 교세의&nbsp;저울이&nbsp;아니라&nbsp;정신사의&nbsp;저울로&nbsp;달면&nbsp;형세는&nbsp;역전된다.실제로&nbsp;근현대사의&nbsp;결정적&nbsp;국면마다&nbsp;민족종교는&nbsp;교세와&nbsp;어울리지&nbsp;않는&nbsp;압도적&nbsp;기여를&nbsp;하였다. 3&middot;1운동은&nbsp;천도교의&nbsp;기획력과&nbsp;자금, 보성사의&nbsp;인쇄망&nbsp;없이는&nbsp;불가능했고, 민족대표 33인의&nbsp;최다수가&nbsp;천도교인이었으며&nbsp;그&nbsp;영도자가&nbsp;손병희였다. 대종교는&nbsp;북로군정서와&nbsp;청산리&nbsp;대첩의&nbsp;모체였고, 임시정부&nbsp;요인의&nbsp;상당수가&nbsp;대종교적&nbsp;배경을&nbsp;지녔다.[21] 나아가&nbsp;개천절의&nbsp;국경일&nbsp;제정, 단기&nbsp;연호의&nbsp;사용, 교육이념&nbsp;홍익인간의&nbsp;채택&nbsp;등&nbsp;신생&nbsp;대한민국의&nbsp;정신적&nbsp;상징&nbsp;체계&nbsp;자체가&nbsp;대종교가&nbsp;지켜&nbsp;온&nbsp;단군&nbsp;사상의&nbsp;국가적&nbsp;수용이었다.[22] 천도교의&nbsp;《개벽》지는&nbsp;식민지기&nbsp;최대의&nbsp;사상&nbsp;잡지였고, 원불교는&nbsp;교육&middot;의료&middot;교화&nbsp;사업으로&nbsp;개벽의&nbsp;사회화를&nbsp;이어&nbsp;왔다.물론&nbsp;이는&nbsp;타&nbsp;종교의&nbsp;공헌을&nbsp;깎아내리려는&nbsp;것이&nbsp;아니다. 기독교는 33인의&nbsp;한&nbsp;축이자&nbsp;근대&nbsp;교육&middot;의료의&nbsp;통로였고, 만해&nbsp;한용운이&nbsp;보여&nbsp;주듯&nbsp;불교에도&nbsp;민족적&nbsp;각성의&nbsp;흐름이&nbsp;있었다. 본고가&nbsp;강조하는&nbsp;것은&nbsp;위상의&nbsp;정당한&nbsp;회복이다. 민족의&nbsp;시원(단군)과&nbsp;역사&nbsp;주권을&nbsp;종교적&nbsp;정체성의&nbsp;핵심으로&nbsp;삼아&nbsp;민족사관&nbsp;현양의&nbsp;선봉에&nbsp;서&nbsp;온&nbsp;것은&nbsp;신흥&nbsp;민족종교였으며, 정신적&nbsp;저수지의&nbsp;원천&nbsp;수원이&nbsp;바로&nbsp;여기였다. 교세가&nbsp;아니라&nbsp;이&nbsp;공헌이, 이들&nbsp;종교가&nbsp;한국&nbsp;근현대&nbsp;정신사에서&nbsp;차지해야&nbsp;할&nbsp;정당한&nbsp;자리다.<br>5. &ldquo;역사는&nbsp;혼이다&rdquo;: 단재와&nbsp;백암의&nbsp;혼의&nbsp;사관정신적&nbsp;저수지의&nbsp;또&nbsp;하나의&nbsp;수원(水源)은&nbsp;민족사학이었다. 백암&nbsp;박은식은&nbsp;『한국통사』&nbsp;(1915)에서&nbsp;나라의&nbsp;형체(國魄)는&nbsp;멸할&nbsp;수&nbsp;있어도&nbsp;나라의&nbsp;혼(國魂)인&nbsp;역사가&nbsp;살아&nbsp;있는&nbsp;한&nbsp;국가는&nbsp;반드시&nbsp;부활한다고&nbsp;썼다.[23] 단재&nbsp;신채호는&nbsp;「독사신론」(1908)에서&nbsp;민족을&nbsp;역사&nbsp;서술의&nbsp;주체로&nbsp;세웠고,[24] 『조선상고사』&nbsp;총론에서&nbsp;역사를 &ldquo;아(我)와&nbsp;비아(非我)의&nbsp;투쟁의&nbsp;기록&rdquo;으로&nbsp;정의하였다.[25] &ldquo;역사는&nbsp;혼이다. 혼을&nbsp;잃은&nbsp;민족에게&nbsp;역사는&nbsp;없다&rdquo;는&nbsp;명제는&nbsp;이&nbsp;두&nbsp;사가의&nbsp;사상을&nbsp;관통하는&nbsp;민족사학의&nbsp;핵심&nbsp;테제다.[26] 나라를&nbsp;빼앗긴&nbsp;시대에&nbsp;역사&nbsp;서술은&nbsp;학문이기&nbsp;이전에&nbsp;혼의&nbsp;보존&nbsp;투쟁이었다.이&nbsp;테제의&nbsp;절박성은&nbsp;상대의&nbsp;기획을&nbsp;보면&nbsp;선명해진다. 조선총독부는&nbsp;병합&nbsp;직후부터&nbsp;사서를&nbsp;수거하고, 1925년&nbsp;조선사편수회를&nbsp;설치하여&nbsp;『조선사』 37책을&nbsp;편찬하였다. 단군은&nbsp;신화로, 고조선은&nbsp;반도&nbsp;북부의&nbsp;작은&nbsp;부족사회로, 한국사의&nbsp;무대는&nbsp;만주와&nbsp;대륙에서&nbsp;한반도로&nbsp;축소되었다. 그것은&nbsp;영토의&nbsp;병합에&nbsp;뒤이은&nbsp;기억의&nbsp;병합, 곧&nbsp;혼의&nbsp;말살&nbsp;기획이었다. 단재가&nbsp;뤼순&nbsp;감옥에서&nbsp;순국하기까지&nbsp;상고사&nbsp;서술에&nbsp;매달린&nbsp;것은, 빼앗긴&nbsp;국가보다&nbsp;먼저&nbsp;빼앗기고&nbsp;있던&nbsp;것이&nbsp;역사였기&nbsp;때문이다. 패배&nbsp;속에서&nbsp;혼을&nbsp;지킨&nbsp;자와&nbsp;승리&nbsp;속에서&nbsp;혼을&nbsp;지운&nbsp;자 &mdash; 20세기&nbsp;전반의&nbsp;한일&nbsp;관계는&nbsp;이&nbsp;두&nbsp;정신사의&nbsp;대결이기도&nbsp;하였다.<br>6. 1919년: 종교연대의&nbsp;정신사적&nbsp;폭발정신적&nbsp;저수지의&nbsp;수문이&nbsp;처음&nbsp;열린&nbsp;사건이 1919년 3&middot;1운동이다. 천도교&middot;기독교&middot;불교의&nbsp;지도자 33인이&nbsp;종교와&nbsp;교파의&nbsp;벽을&nbsp;넘어&nbsp;연대하였고, 두&nbsp;달여&nbsp;동안 200만&nbsp;명&nbsp;이상이&nbsp;만세&nbsp;시위에&nbsp;참여하였다.[27] 3&middot;1운동은&nbsp;군사적으로는&nbsp;아무것도&nbsp;얻지&nbsp;못한 &lsquo;실패&rsquo;였다. 그러나&nbsp;그것은&nbsp;왕조의&nbsp;회복이&nbsp;아니라&nbsp;&lsquo;민국(民國)&rsquo;의&nbsp;수립을&nbsp;선언한&nbsp;공화주의&nbsp;혁명이었고, 폭력이&nbsp;아니라&nbsp;비폭력의&nbsp;도덕적&nbsp;우위로&nbsp;제국에&nbsp;맞선&nbsp;문명사적&nbsp;선언이었으며, 그&nbsp;직접적&nbsp;결실로&nbsp;대한민국임시정부가&nbsp;건립되었다. 패배의&nbsp;형식&nbsp;속에&nbsp;담긴&nbsp;승리 &mdash; 이것이 3&middot;1운동의&nbsp;정신사적&nbsp;본질이다.종교적&nbsp;저수지가&nbsp;무장투쟁의&nbsp;역량으로&nbsp;전이된&nbsp;사례도&nbsp;뚜렷하다. 1909년&nbsp;나철이&nbsp;중광한&nbsp;대종교는&nbsp;단군&nbsp;신앙으로&nbsp;만주의&nbsp;한인&nbsp;사회를&nbsp;조직하였고, 그&nbsp;교단&nbsp;조직은&nbsp;북로군정서의&nbsp;모체가&nbsp;되어&nbsp;청산리&nbsp;대첩(1920)의&nbsp;인적&nbsp;기반을&nbsp;이루었다.[28] 신흥 민족종교가 관념의 체계에 머물지 않고 학교와 군대, 신문과 결사로 육화되었다는 사실은, 정신사가 곧 실천사였음을 보여 준다.<br>7. 남강&mdash;오산&mdash;김기석: 혼의&nbsp;전승&nbsp;회로정신적&nbsp;저수지가&nbsp;다음&nbsp;세대로&nbsp;이어지는&nbsp;통로는&nbsp;교육이었다. 그&nbsp;표본이&nbsp;남강&nbsp;이승훈과&nbsp;오산학교다. 보부상&nbsp;출신의&nbsp;사업가였던&nbsp;남강은&nbsp;도산&nbsp;안창호의&nbsp;연설에&nbsp;감화되어 1907년&nbsp;오산학교를&nbsp;세웠고, 105인&nbsp;사건으로&nbsp;옥고를&nbsp;치렀으며, 3&middot;1운동에서&nbsp;기독교계를&nbsp;대표하여 33인의&nbsp;한&nbsp;사람으로&nbsp;섰다. 오산학교는&nbsp;조만식&middot;함석헌&middot;김소월&middot;이중섭&nbsp;같은&nbsp;인물들을&nbsp;길러&nbsp;낸, 식민지&nbsp;조선의&nbsp;대표적인 &lsquo;혼의&nbsp;양성소&rsquo;였다.이&nbsp;계보의&nbsp;정신사적&nbsp;의미를&nbsp;학문의&nbsp;언어로&nbsp;정리한&nbsp;이가&nbsp;김기석(金基錫, 1905~1974)이다. 오산학교&nbsp;출신으로&nbsp;와세다와&nbsp;도호쿠에서&nbsp;철학을&nbsp;공부한&nbsp;그는, 해방&nbsp;후&nbsp;서울대학교&nbsp;사범대학&nbsp;교수와&nbsp;학장, 한국교육학회&nbsp;초대&nbsp;회장으로서&nbsp;신생&nbsp;대한민국의&nbsp;교원&nbsp;양성&nbsp;체계를&nbsp;세웠고, 『현대정신사』&nbsp;등의&nbsp;저술로&nbsp;정신사라는&nbsp;문제&nbsp;틀을&nbsp;한국&nbsp;학계에&nbsp;도입하였다.[29] 그가&nbsp;만년에&nbsp;심혈을&nbsp;기울여&nbsp;집필한&nbsp;전기가&nbsp;『남강&nbsp;이승훈』(1964)이다.[30]김기석의&nbsp;현실&nbsp;판단의&nbsp;요체는&nbsp;이렇게&nbsp;요약할&nbsp;수&nbsp;있다. 3&middot;1운동은&nbsp;정치적으로는&nbsp;좌절되었으나&nbsp;그&nbsp;좌절이야말로&nbsp;민족&nbsp;정신사의&nbsp;기점이&nbsp;되었으며, 패배&nbsp;속에서&nbsp;단련된&nbsp;혼은&nbsp;교육을&nbsp;통해&nbsp;다음&nbsp;세대의&nbsp;인격과&nbsp;역량으로&nbsp;전승된다는&nbsp;것이다. 그는&nbsp;남강의&nbsp;생애에서&nbsp;그&nbsp;전승&nbsp;회로의&nbsp;원형을&nbsp;보았고, 스스로&nbsp;사범대학장으로서&nbsp;그&nbsp;회로를&nbsp;국가적&nbsp;제도로&nbsp;확장하였다. 같은&nbsp;오산&nbsp;출신인&nbsp;함석헌이&nbsp;『뜻으로&nbsp;본&nbsp;한국역사』에서&nbsp;한국사의&nbsp;고난을&nbsp;세계사적&nbsp;사명의&nbsp;담지로&nbsp;읽어&nbsp;냈다면,[31] 김기석은 그 고난의 정신사를 교육 제도 속에 부어 넣은 실천가였다. 단재가 혼의&nbsp;사관을&nbsp;세우고, 남강이 혼의&nbsp;학교를&nbsp;세웠다면, 김기석은 혼의&nbsp;사범(師範)을&nbsp;세운&nbsp;것이다. 1949년&nbsp;교육법&nbsp;제1조가&nbsp;대한민국&nbsp;교육의&nbsp;이념으로 &lsquo;홍익인간&rsquo;을&nbsp;명시한&nbsp;것은&nbsp;이&nbsp;전승&nbsp;회로가&nbsp;신생&nbsp;공화국의&nbsp;골격에&nbsp;각인된&nbsp;상징적&nbsp;순간이었다.[32]<br>Ⅲ. 역전의 동력: 정신사적 뿌리와 현대적 성취의 상관관계, 1945&ndash;2020년대&nbsp;<br>1. 굴절과&nbsp;왜곡: 혼의&nbsp;잠복기해방은&nbsp;도둑같이&nbsp;왔고, 미완으로&nbsp;왔다. 국토는&nbsp;분단되었고, 전쟁이&nbsp;산하를&nbsp;태웠으며, 반민특위의&nbsp;좌절로&nbsp;식민&nbsp;협력의&nbsp;청산은&nbsp;무산되었다. 역사학에서도&nbsp;조선사편수회에&nbsp;참여했던&nbsp;학맥이&nbsp;강단의&nbsp;주류로&nbsp;이어지면서, 단재와&nbsp;백암이&nbsp;목숨으로&nbsp;지킨&nbsp;사관은&nbsp;제도권&nbsp;밖으로&nbsp;밀려났다. 20세기&nbsp;후반&nbsp;한국사&nbsp;서술의&nbsp;굴절과&nbsp;왜곡은&nbsp;이&nbsp;미청산의&nbsp;그림자다. 그러나&nbsp;잠복이&nbsp;소멸은&nbsp;아니다. 저수지의&nbsp;물은&nbsp;지표&nbsp;아래에서&nbsp;흐르고&nbsp;있었다. 잠복기에도&nbsp;수로(水路)는&nbsp;있었다. 오산의&nbsp;후예들이&nbsp;세운&nbsp;학교들, 교단과&nbsp;재야로&nbsp;스며든&nbsp;민족종교&nbsp;출신의&nbsp;인맥, 그리고&nbsp;함석헌의&nbsp;《씨알의&nbsp;소리》로&nbsp;대표되는&nbsp;저항&nbsp;담론이&nbsp;제도권&nbsp;밖에서&nbsp;혼의&nbsp;언어를&nbsp;이어&nbsp;날랐다.[33] 그 물길이 다시 지표로 솟은 세 개의 분출구가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문화적 세계화다.<br>2. 산업화: 교육열이라는&nbsp;정신사적&nbsp;유산1962년 1인당&nbsp;국민소득&nbsp;약 120달러의&nbsp;최빈국이&nbsp;한&nbsp;세대&nbsp;만에&nbsp;산업국가로, 두&nbsp;세대&nbsp;만에 3만 5천&nbsp;달러의&nbsp;선진&nbsp;경제로&nbsp;도약한 &lsquo;한강의&nbsp;기적&rsquo;은[34] 통상&nbsp;발전국가론으로&nbsp;설명된다. 암스덴은&nbsp;국가&nbsp;주도의&nbsp;후발&nbsp;산업화&nbsp;전략을,[35] 에커트와&nbsp;식민지&nbsp;근대성론자들은&nbsp;식민지기에&nbsp;형성된&nbsp;자본과&nbsp;제도의&nbsp;유산을&nbsp;강조한다.[36] 냉전&nbsp;체제하의&nbsp;미국&nbsp;원조와&nbsp;시장&nbsp;접근도&nbsp;결정적&nbsp;조건이었다. 본고는&nbsp;이&nbsp;구조적&nbsp;설명들을&nbsp;성실히&nbsp;수용한다.그러나&nbsp;구조가&nbsp;설명하는&nbsp;것은&nbsp;기회이지&nbsp;응답이&nbsp;아니다. 같은&nbsp;원조, 유사한&nbsp;지정학적&nbsp;조건에서&nbsp;왜&nbsp;유독&nbsp;이&nbsp;민족은&nbsp;세계&nbsp;최고&nbsp;수준의&nbsp;교육열로&nbsp;응답했는가. 문맹률이 80퍼센트에&nbsp;육박하던&nbsp;해방&nbsp;공간에서&nbsp;불과&nbsp;십수&nbsp;년&nbsp;만에&nbsp;완전&nbsp;취학에&nbsp;근접하고, 전쟁&nbsp;피난지의&nbsp;천막에서도&nbsp;학교부터&nbsp;세운&nbsp;이&nbsp;행동&nbsp;양식은&nbsp;경제적&nbsp;유인만으로는&nbsp;환원되지&nbsp;않는다.[37] 그 심층에는 배움으로 사람이 하늘이 된다는 동학적 인간관, 실력을 길러 나라를 되찾는다는 교육구국&middot;자강운동의 기억, 그리고 남강&mdash;오산&mdash;김기석으로 이어진 교육입국의 회로가 놓여 있다. &lsquo;잘살아보세&rsquo;의 집단적 열망은 단순한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패배의 한(恨)을 개벽의 에너지로 반전시키는 정신사적 동력의 세속적 표현이었다. 요컨대 구조는 무대를 제공했고, 정신사는 배우의 연기력을 길러 놓았던 것이다.<br>3. 민주화: 3&middot;1 원형의&nbsp;반복과&nbsp;확장한국&nbsp;민주화의&nbsp;궤적은&nbsp;정신사적&nbsp;계보가&nbsp;가장&nbsp;선명하게&nbsp;드러나는&nbsp;영역이다. 4&middot;19혁명(1960), 부마항쟁과 5&middot;18민주화운동(1979~80), 6월항쟁(1987), 그리고&nbsp;촛불혁명(2016~17)에&nbsp;이르기&nbsp;까지, 한국의&nbsp;민주주의는&nbsp;제도의&nbsp;이식이&nbsp;아니라&nbsp;비폭력&nbsp;대중&nbsp;항쟁의&nbsp;반복적&nbsp;분출로&nbsp;쟁취되었다. 그&nbsp;원형이 3&middot;1운동임은&nbsp;헌법&nbsp;전문이&nbsp;스스로&nbsp;증언한다. 대한민국은 &ldquo;3&middot;1운동으로&nbsp;건립된&nbsp;대한민국임시정부의&nbsp;법통과&nbsp;불의에&nbsp;항거한 4&middot;19민주이념을&nbsp;계승&rdquo;하는&nbsp;나라다.[38] 보국안민과 인내천을 외치며 일어선 동학 농민의 대오에서, 만세를 부르던 1919년의 군중을 거쳐, 광장의 촛불에 이르는 이 계보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명제가 한 세기 반에 걸쳐 정치적 근대의 언어로 번역되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br>4. K-컬처: 혼의&nbsp;문화적&nbsp;발현산업화와&nbsp;민주화를&nbsp;이룬&nbsp;뒤에&nbsp;온&nbsp;것이&nbsp;문화의&nbsp;세계화다. BTS와 K-팝, 칸과&nbsp;아카데미를&nbsp;석권한&nbsp;『기생충』(2019~20), 세계&nbsp;최대 OTT의&nbsp;기록을&nbsp;갈아치운&nbsp;『오징어&nbsp;게임』(2021), 그리고 K-드라마&middot;웹툰&middot;K-푸드에&nbsp;이르기까지, 한국&nbsp;문화는 21세기&nbsp;소프트파워의&nbsp;대표적&nbsp;사례가&nbsp;되었다.[39] 커밍스가&nbsp;지적했듯 20세기&nbsp;내내&nbsp;한국은&nbsp;주변국의&nbsp;렌즈로만&nbsp;조명되던&nbsp;나라였으나,[40] 이제&nbsp;세계가&nbsp;한국의&nbsp;렌즈로&nbsp;자신을&nbsp;비추어&nbsp;보기&nbsp;시작한&nbsp;것이다.정신사의&nbsp;관점에서 K-컬처의&nbsp;핵심은&nbsp;물량이&nbsp;아니라&nbsp;서사의&nbsp;보편성이다. 한(恨)을&nbsp;신명으로&nbsp;풀어내는&nbsp;풍류의&nbsp;미학, 약자의&nbsp;고통에&nbsp;대한&nbsp;공감과&nbsp;해원(解冤)의&nbsp;서사, 위계를&nbsp;뒤집는&nbsp;개벽적&nbsp;상상력은&nbsp;『기생충』과&nbsp;『오징어&nbsp;게임』이&nbsp;세계인의&nbsp;심금을&nbsp;울린&nbsp;문법&nbsp;그&nbsp;자체다. 널리&nbsp;인간을&nbsp;이롭게&nbsp;한다는&nbsp;홍익의&nbsp;이념은, 자국&nbsp;문화의&nbsp;우월성&nbsp;과시가&nbsp;아니라&nbsp;인류&nbsp;보편의&nbsp;이야기로&nbsp;승화될&nbsp;때&nbsp;비로소&nbsp;세계와&nbsp;공명한다는&nbsp;것을 K-컬처는&nbsp;실증하고&nbsp;있다. 물론&nbsp;여기에도&nbsp;수출&nbsp;산업화&nbsp;전략, 플랫폼&nbsp;자본, 디지털&nbsp;전환이라는&nbsp;구조적&nbsp;조건이&nbsp;작동했음을&nbsp;병기해&nbsp;둔다. 그러나&nbsp;콘텐츠의&nbsp;혼까지&nbsp;산업&nbsp;정책이&nbsp;만들&nbsp;수는&nbsp;없다.<br>5. 방법론적&nbsp;성찰: 변수&nbsp;통제와&nbsp;반론에&nbsp;답함이상의&nbsp;논증에&nbsp;대해&nbsp;예상되는&nbsp;반론은&nbsp;정신사적&nbsp;설명이&nbsp;사후적&nbsp;목적론, 곧&nbsp;성공한&nbsp;결과에&nbsp;원인을&nbsp;소급&nbsp;부여하는&nbsp;오류가&nbsp;아니냐는&nbsp;것이다. 정당한&nbsp;경계다. 본고의&nbsp;주장은&nbsp;정신사&nbsp;일원론이&nbsp;아니다. 냉전&nbsp;체제, 산업화&nbsp;정책, 교육&nbsp;투자, 인구&nbsp;구조와&nbsp;같은&nbsp;구조적&nbsp;변수들을&nbsp;통제하고&nbsp;나서도&nbsp;여전히&nbsp;설명되지&nbsp;않는&nbsp;나머지 &mdash; 응답의&nbsp;강도, 속도, 방향 &mdash; 를&nbsp;설명하는&nbsp;심층&nbsp;변수로서&nbsp;정신적&nbsp;저수지를&nbsp;제안하는&nbsp;것이다. 이&nbsp;가설은&nbsp;비교사적으로&nbsp;검증&nbsp;가능하다. 유사한&nbsp;구조적&nbsp;조건에&nbsp;놓였던&nbsp;사회들과의&nbsp;비교, 종교&middot;교육&nbsp;네트워크의&nbsp;밀도와&nbsp;이후&nbsp;성취의&nbsp;상관에&nbsp;대한&nbsp;실증&nbsp;연구가&nbsp;후속&nbsp;과제이며, 본&nbsp;컨퍼런스가&nbsp;구조적&nbsp;요인을&nbsp;다루는&nbsp;종합토론을&nbsp;병치한&nbsp;것은&nbsp;이&nbsp;검증의&nbsp;장을&nbsp;스스로&nbsp;여는&nbsp;설계다. 특히&nbsp;대만&middot;베트남처럼&nbsp;민족종교의&nbsp;매개&nbsp;없이도&nbsp;강한&nbsp;교육열을&nbsp;보인&nbsp;유교&nbsp;문화권&nbsp;사회들과의&nbsp;비교는&nbsp;이&nbsp;가설이&nbsp;통과해야&nbsp;할&nbsp;가장&nbsp;엄격한&nbsp;시험대다. 교육열의&nbsp;유교적&nbsp;기원론과&nbsp;개벽적&nbsp;기원론을&nbsp;변별하는&nbsp;실증&nbsp;연구를&nbsp;후속&nbsp;과제로&nbsp;명시해&nbsp;둔다.<br>Ⅳ. 결론: 2030년을 향하여 &mdash; 일본이라는 거울과 통일 시대정신&nbsp;<br>1. 분리의 3단계: 일본이라는&nbsp;거울이제&nbsp;서론의&nbsp;거시적&nbsp;시야로&nbsp;되돌아가자. 1,300년의&nbsp;한일&nbsp;관계사는&nbsp;하나의&nbsp;공동&nbsp;문명권이&nbsp;완전한&nbsp;타자로&nbsp;갈라서는&nbsp;과정, 곧 &lsquo;분리의 3단계&rsquo;로&nbsp;요약된다. 첫째는 663년&nbsp;백강전투가&nbsp;초래한&nbsp;지리적&nbsp;분리다. 백제&nbsp;유민의&nbsp;주류가&nbsp;열도로&nbsp;건너가&nbsp;『일본서기』로&nbsp;자기&nbsp;기원을&nbsp;재구성하면서, 같은&nbsp;핏줄이&nbsp;다른&nbsp;역사를&nbsp;쓰기&nbsp;시작했다. 둘째는 1592년&nbsp;임진왜란의&nbsp;적대적&nbsp;분리다. 같은&nbsp;문명의&nbsp;포대기에서&nbsp;자란&nbsp;이들이&nbsp;침략자와&nbsp;피침략자로&nbsp;마주&nbsp;서면서&nbsp;분리는&nbsp;감정의&nbsp;골짜기로&nbsp;깊어졌다. 셋째는 1910년&nbsp;병합의&nbsp;존재론적&nbsp;분리다. 상대의&nbsp;역사와&nbsp;혼&nbsp;자체를&nbsp;말살하려&nbsp;한&nbsp;식민&nbsp;지배를&nbsp;통해, 그들은&nbsp;더&nbsp;이상&nbsp;같은&nbsp;조상을&nbsp;기억하지&nbsp;않는&nbsp;민족이&nbsp;되었다.이&nbsp;거울에&nbsp;오늘의&nbsp;남북을&nbsp;비추면&nbsp;전율하지&nbsp;않을&nbsp;수&nbsp;없다. 1945년&nbsp;이후 80년, 남과&nbsp;북은&nbsp;서로&nbsp;다른&nbsp;어휘로&nbsp;말하고&nbsp;다른&nbsp;영웅을&nbsp;기억하며&nbsp;다른&nbsp;역사를&nbsp;가르친다. 젊은&nbsp;세대에서 &lsquo;같은&nbsp;민족&rsquo;이라는&nbsp;감각&nbsp;자체가&nbsp;희미해지고&nbsp;있다. 일본이&nbsp;우리&nbsp;곁을&nbsp;완전히&nbsp;떠나는&nbsp;데&nbsp;천&nbsp;년이&nbsp;넘게&nbsp;걸렸다면, 분단&nbsp;체제는[41] 그보다 훨씬 가파른 속도로 존재론적 분리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다. 백강 이후의 열도가 두 세대 만에 별개의 국가 서사를 완성했음을 상기하면, 80년의 분단은 이미 위험 수역이다. 역사를 공유하지 못한 민족은 결국 같은 민족이기를 멈춘다 &mdash; 이것이 일본이라는 거울이 주는 경고다. 물론 이 비유에는 한계가 있다. 한일의 분리는 바다와 언어의 분화를 수반한 천 년의 과정이었고, 남북은 같은 언어와 생존 세대의 기억을 아직 공유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안도의 근거가 아니라 기회의 근거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mdash; 그것이 이 거울의 진짜 전언이다.<br>2. 또&nbsp;하나의&nbsp;거울: 디아스포라 &mdash; 경고에서&nbsp;희망으로그런데&nbsp;재외동포의&nbsp;시좌에서는&nbsp;이&nbsp;역사에&nbsp;또&nbsp;하나의&nbsp;거울이&nbsp;보인다. 백강&nbsp;이후의&nbsp;백제&nbsp;유민과&nbsp;오늘의&nbsp;코리안&nbsp;디아스포라는&nbsp;같은&nbsp;이산(離散)에서&nbsp;출발했으나&nbsp;정반대의&nbsp;정신사를&nbsp;쓰고&nbsp;있다. 유민은&nbsp;본토를&nbsp;잃고&nbsp;기원을&nbsp;지우며&nbsp;스스로&nbsp;타자가&nbsp;되는&nbsp;길을&nbsp;갔다. 오늘의&nbsp;디아스포라는&nbsp;본토가&nbsp;건재한&nbsp;채&nbsp;경계를&nbsp;넘어&nbsp;살며, 기원을&nbsp;지우는&nbsp;것이&nbsp;아니라&nbsp;현양한다. 로스앤젤레스의&nbsp;한인 2세들이&nbsp;목격하는&nbsp;것은&nbsp;부모&nbsp;세대가&nbsp;감추고&nbsp;싶어&nbsp;했던&nbsp;출신국이&nbsp;자녀&nbsp;세대의&nbsp;문화적&nbsp;자산으로&nbsp;반전되는&nbsp;광경이며, 구매력&nbsp;기준 1인당&nbsp;소득에서&nbsp;한국이&nbsp;일본을&nbsp;추월했다는&nbsp;통계는[42] 그&nbsp;체감의&nbsp;뒤늦은&nbsp;확인일&nbsp;뿐이다. 국권을&nbsp;찬탈당한&nbsp;나라의&nbsp;후손이&nbsp;찬탈한&nbsp;나라를&nbsp;활력과&nbsp;문화에서&nbsp;앞지르는&nbsp;이&nbsp;광경은, 단재가&nbsp;뤼순의&nbsp;감옥에서&nbsp;상상할&nbsp;수&nbsp;없었던&nbsp;방식의&nbsp;아(我)의&nbsp;승리다.홍익인간은&nbsp;애초에&nbsp;국경의&nbsp;이념이&nbsp;아니었다. 널리&nbsp;인간을&nbsp;이롭게&nbsp;하라는&nbsp;명제에는&nbsp;민족의&nbsp;경계가&nbsp;없으며, 홍산의&nbsp;제단에서&nbsp;하늘에&nbsp;제를&nbsp;올리던&nbsp;시원의&nbsp;문명은&nbsp;영토&nbsp;국가&nbsp;이전의&nbsp;문명, 말하자면&nbsp;최초의 beyond borders였다. 그렇다면&nbsp;남&middot;북&middot;해외라는&nbsp;세&nbsp;꼭짓점&nbsp;가운데&nbsp;경계&nbsp;밖의&nbsp;동포야말로&nbsp;어느&nbsp;체제의&nbsp;공식&nbsp;사관에도&nbsp;매이지&nbsp;않기에&nbsp;공통&nbsp;뿌리의&nbsp;기억을&nbsp;가장&nbsp;자유롭게&nbsp;말할&nbsp;수&nbsp;있는&nbsp;자리다. 일본이라는&nbsp;거울이&nbsp;경고라면, 디아스포라라는&nbsp;거울은&nbsp;희망이다. 본&nbsp;컨퍼런스가&nbsp;태평양&nbsp;건너&nbsp;로스앤젤레스에서&nbsp;열린다는&nbsp;사실&nbsp;자체가, 분리의&nbsp;서사를&nbsp;되돌리는&nbsp;홍익&nbsp;문명권의&nbsp;회복이&nbsp;이미&nbsp;시작되었다는&nbsp;증거다.<br>3. 홍익&nbsp;대동사관과&nbsp;화평한&nbsp;남북국&nbsp;시대그렇다면&nbsp;무엇이&nbsp;이&nbsp;분리를&nbsp;멈출&nbsp;수&nbsp;있는가. 본고의&nbsp;답은&nbsp;사관의&nbsp;회복, 곧&nbsp;공통&nbsp;뿌리&nbsp;의식의&nbsp;고양이다. 남한&nbsp;교육기본법의&nbsp;홍익인간&nbsp;이념과&nbsp;북한의&nbsp;단군릉&nbsp;복원이&nbsp;보여&nbsp;주듯, 단군과&nbsp;고조선의&nbsp;기억은 38선이&nbsp;갈라놓지&nbsp;못한&nbsp;남북&nbsp;공통의&nbsp;정신적&nbsp;지층이다. 홍산문화를&nbsp;비롯한&nbsp;요하&nbsp;일대의&nbsp;고고학적&nbsp;발견은&nbsp;그&nbsp;지층의&nbsp;깊이를&nbsp;시사하는&nbsp;자원이며,[43] 그&nbsp;귀속을&nbsp;둘러싼&nbsp;학계의&nbsp;논쟁을&nbsp;존중하되,[44] 남북이&nbsp;함께&nbsp;발굴하고&nbsp;함께&nbsp;해석해야&nbsp;할&nbsp;공유&nbsp;유산임은&nbsp;분명하다. 식민사관이&nbsp;잘라&nbsp;낸&nbsp;뿌리를&nbsp;남북이&nbsp;함께&nbsp;잇는&nbsp;역사&nbsp;교육이야말로&nbsp;가장&nbsp;깊은&nbsp;수준의&nbsp;통일&nbsp;운동이다.대동사관은&nbsp;미래&nbsp;설계의&nbsp;원리이기도&nbsp;하다. 홍익은&nbsp;남과&nbsp;북&nbsp;어느&nbsp;한쪽의&nbsp;번영이&nbsp;아니라&nbsp;널리&nbsp;함께&nbsp;이로움이요, 상생은&nbsp;흡수가&nbsp;아니라&nbsp;함께&nbsp;삶이며, 자존은&nbsp;외세의&nbsp;눈치가&nbsp;아니라&nbsp;스스로의&nbsp;결단이다. 이&nbsp;원리를&nbsp;경제의&nbsp;언어로&nbsp;번역하면, 남의&nbsp;효율과&nbsp;북의&nbsp;평등주의적&nbsp;잠재력을&nbsp;결합하는&nbsp;인본주의적&nbsp;중도&nbsp;경제 &mdash; 생활임금과&nbsp;공동&nbsp;복지를&nbsp;보장하는&nbsp;특구&nbsp;모델, 교류&nbsp;수익의&nbsp;일부를&nbsp;남북의&nbsp;소외&nbsp;계층에&nbsp;돌리는&nbsp;공동번영기금 &mdash; 로&nbsp;구체화될&nbsp;수&nbsp;있다. 그것은&nbsp;맹자가&nbsp;말한&nbsp;인정(仁政), 곧&nbsp;사람의&nbsp;가치를&nbsp;천하보다&nbsp;무겁게&nbsp;여기는&nbsp;정치의&nbsp;현대적&nbsp;실현이며,[45] 적대적 두 국가론을 넘어 &lsquo;화평한 남북국 시대&rsquo;를 경유하여 존재의 회복으로서의 통일로 나아가는 경로다.<br>4. 맺음말: 역전의&nbsp;완성을&nbsp;향하여본고의&nbsp;논지를&nbsp;요약한다. 첫째, 663년&nbsp;백강에서 1910년&nbsp;병합에&nbsp;이르는 1,300년의&nbsp;시야는&nbsp;한일&nbsp;관계를 &lsquo;같은&nbsp;뿌리의&nbsp;분리사&rsquo;로&nbsp;읽게&nbsp;하며, 이는&nbsp;남북&nbsp;분단의&nbsp;미래에&nbsp;대한&nbsp;가장&nbsp;준엄한&nbsp;경고가&nbsp;된다(해석적&nbsp;가설로서, 반론에&nbsp;열려&nbsp;있다). 둘째, 1860년&nbsp;이후&nbsp;신흥&nbsp;민족종교와&nbsp;민족사학&nbsp;이&nbsp;축적한&nbsp;정신적&nbsp;저수지는 3&middot;1운동에서&nbsp;폭발하고&nbsp;남강&mdash;오산&mdash;김기석의&nbsp;교육&nbsp;회로를&nbsp;통해&nbsp;제도화되어, 구조적&nbsp;기회가&nbsp;열린 20세기&nbsp;후반&nbsp;산업화&middot;민주화&middot;K-컬처라는 3중의&nbsp;성취로&nbsp;분출되었다. 셋째, 그러므로 &lsquo;역전의 100년&rsquo;의&nbsp;다음&nbsp;과제는&nbsp;자명하다. 패배&nbsp;속에서&nbsp;지켜&nbsp;낸&nbsp;혼이&nbsp;물질적&nbsp;역전을&nbsp;이루었다면, 이제&nbsp;우리는&nbsp;그&nbsp;혼의&nbsp;힘을&nbsp;분단이라는&nbsp;마지막&nbsp;패배의&nbsp;극복, 곧&nbsp;민족의&nbsp;존재&nbsp;회복으로&nbsp;돌려야&nbsp;한다.2030년은&nbsp;병합 120년이자 3&middot;1운동 111년이&nbsp;되는&nbsp;해다. 우리는&nbsp;이&nbsp;시점을 &lsquo;역전의&nbsp;완성&rsquo;을&nbsp;향한&nbsp;원년으로&nbsp;삼을&nbsp;것을&nbsp;제안한다. 크로체의&nbsp;명제대로&nbsp;모든&nbsp;역사는&nbsp;현대사다. 백강의&nbsp;불길도, 병합의&nbsp;치욕도, 만세의&nbsp;함성도&nbsp;오늘&nbsp;우리의&nbsp;물음&nbsp;속에서&nbsp;되살아난다. 역사는&nbsp;혼이다. 혼을&nbsp;잃은&nbsp;민족에게&nbsp;역사가&nbsp;없다면, 혼을&nbsp;지킨&nbsp;민족에게는&nbsp;아직&nbsp;쓰이지&nbsp;않은&nbsp;역사가&nbsp;있다. 패배&nbsp;속의&nbsp;정신사가&nbsp;역전의&nbsp;정신사가&nbsp;되었듯, 분단의&nbsp;정신사는&nbsp;통일의&nbsp;정신사가&nbsp;될&nbsp;것이다. 그&nbsp;서사의&nbsp;다음&nbsp;장을&nbsp;쓰는&nbsp;일은&nbsp;반도의&nbsp;남과&nbsp;북만의&nbsp;몫이&nbsp;아니다. 태평양&nbsp;건너&nbsp;이곳에, 경계&nbsp;밖에&nbsp;모인&nbsp;우리&nbsp;모두의&nbsp;몫이다.&nbsp;참고문헌:1.&nbsp;사료『삼국사기』,&nbsp;『구당서』,&nbsp;『일본서기』,&nbsp;『맹자』.『동경대전』,&nbsp;『용담유사』,&nbsp;『대순전경』,&nbsp;『원불교&nbsp;정전』.대한민국&nbsp;헌법;&nbsp;교육법(1949);&nbsp;교육기본법.통계청,&nbsp;「2015&nbsp;인구주택총조사:&nbsp;종교&nbsp;부문」, 2016.외교부,&nbsp;「재외동포현황」, 2023.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2.&nbsp;국문&nbsp;문헌김기석,&nbsp;『남강&nbsp;이승훈』, 1964(재간:&nbsp;한국학술정보, 2005).김기석,&nbsp;『현대정신사』;&nbsp;『철학개론』;&nbsp;『윤리전서』.김현구,&nbsp;『임나일본부설은&nbsp;허구인가』,&nbsp;창비, 2010.박은식,&nbsp;『한국통사』, 1915.백낙청,&nbsp;『분단체제&nbsp;변혁의&nbsp;공부길』,&nbsp;창작과비평사, 1994.신용하,&nbsp;『3&middot;1운동과&nbsp;독립운동의&nbsp;사회사』,&nbsp;서울대학교출판부, 2001.신채호,&nbsp;「독사신론」,&nbsp;《대한매일신보》, 1908.신채호,&nbsp;『조선상고사』,&nbsp;《조선일보》&nbsp;연재, 1931.오욱환,&nbsp;『한국&nbsp;사회의&nbsp;교육열:&nbsp;기원과&nbsp;심화』,&nbsp;교육과학사, 2000.우실하,&nbsp;『동북공정&nbsp;너머&nbsp;요하문명론』,&nbsp;소나무, 2007.이형구,&nbsp;『발해연안에서&nbsp;찾은&nbsp;한국&nbsp;고대문화의&nbsp;비밀』,&nbsp;김영사, 2004.존&nbsp;카터&nbsp;코벨(김유경&nbsp;편역),&nbsp;『부여&nbsp;기마족과&nbsp;왜』,&nbsp;글을읽다, 2006.한명기,&nbsp;『임진왜란과&nbsp;한중관계』,&nbsp;역사비평사, 1999.함석헌,&nbsp;『뜻으로&nbsp;본&nbsp;한국역사』,&nbsp;한길사(개정판).한국학중앙연구원,&nbsp;『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nbsp;「김기석」&nbsp;항목.3.&nbsp;영문&nbsp;문헌Amsden, Alice H., Asia&rsquo;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9.Cohn, Norma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57.Croce, Benedetto, Teoria e storia della storiografia, 1917.Cumings, Bruce, Korea&rsquo;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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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paper proposes the hypothesis of a &ldquo;spiritual reservoir&rdquo; as the deep variable behind this century of reversal. The question is posed from beyond borders: the seven million Koreans of the diaspora, standing outside the official frames of both Korean states, occupy the very vantage point from which a thirteen-century macro-history becomes visible. It first reframes thirteen centuries of Korea&ndash;Japan relations &mdash; from the Battle of Baekgang (663) through the Imjin War (1592) to the Annexation (1910) &mdash; as three successive stages of separation (geographic, antagonistic, ontological), and offers, as an interpretive hypothesis presented alongside mainstream counterarguments, a reading of Japan&rsquo;s continental ambitions as a long-dur&eacute;e narrative of &ldquo;recovering the ancestral homeland.&rdquo; It then traces how Korea&rsquo;s new national religions &mdash; Donghak founded by Ch&rsquo;oe Che-u (1824&ndash;1864), the Jeungsan lineage of Kang Il-sun (1871&ndash;1909), Daejonggyo revived by Na Ch&rsquo;ol (1863&ndash;1916), and Won Buddhism founded by Pak Chung-bin (1891&ndash;1943) &mdash; transformed the very conception of the human being through the lineage of Sicheonju, Innaecheon, Injon, Haewon-sangsaeng, and the Great Opening of the Spirit (jeongsin gaebyeok), and how these religions, though numerically small today compared with Buddhism and corporatized Protestantism yet standing in the vanguard of national historical consciousness, together with nationalist historiography accumulated values, symbols, organizations, and human networks that erupted in the interreligious solidarity of the March First Movement (1919) and were institutionalized through the educational lineage running from Yi Sung-hun and the Osan School to Kim Ki-suk, dea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rsquo;s College of Education and pioneer of Geistesgeschichte in Korea. Drawing on Shin Chae-ho&rsquo;s historiography of the national soul (hon) and Kim Ki-suk&rsquo;s judgment that the &ldquo;failed&rdquo; March First Movement was in fact the fountainhead of modern Korean spiritual history, the paper argues &mdash; with explicit controls for structural factors such as the Cold War, developmental-state policy, and educational investment &mdash; that this spiritual reservoir best explains the intensity, speed, and direction of Korea&rsquo;s modern achievements in industrialization, democratization, and K-culture. The conclusion holds up Japan as a mirror: the eighty-year division of Korea is sliding toward ontological separation at a far faster pace than the millennium that estranged Japan. Yet a second mirror offers hope: whereas the Baekje refugees after Baekgang erased their origins and became the other, today&rsquo;s diaspora lives beyond borders while proclaiming its roots &mdash; the third vertex, together with South and North, of a Hongik civilization to be restored. It therefore proposes a Hongik-Daedong historiography &mdash; beyond colonial and Sinocentric frames &mdash; as the historiographical foundation of a unification Zeitgeist toward 2030.Keywords:&nbsp;spiritual history (Geistesgeschichte), Battle of Baekgang, Shin Chae-ho, Kim Ki-suk, March First Movement, new national religions, Later Heaven Opening (hucheon gaebyeok), industrialization, democratization, K-culture, Hongik-Daedong historiography, unification, Korean diaspora, beyond borders<br>[1]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역사서술의 이론과 역사』(Teoria e storia della storiografia, 1917)에서 &ldquo;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대사이다&rdquo;라고 하였다. 과거는 현재의 삶의 관심 속에서만 역사로 되살아난다는 뜻이다.[2] 외교부,&nbsp;「재외동포현황(2023)」&nbsp;기준&nbsp;재외동포는&nbsp;약&nbsp;708만&nbsp;명이다.[3] 『삼국사기』&nbsp;권28&nbsp;백제본기&nbsp;의자왕조&nbsp;및&nbsp;『구당서』&nbsp;권84&nbsp;유인궤(劉仁軌)&nbsp;열전.&nbsp;『구당서』는&nbsp;백강구&nbsp;전투에서&nbsp;왜선&nbsp;400척이&nbsp;불타&nbsp;&ldquo;연기와&nbsp;불꽃이&nbsp;하늘을&nbsp;붉게&nbsp;물들이고&nbsp;바닷물마저&nbsp;붉었다(煙焰漲天&nbsp;海水皆赤)&rdquo;고&nbsp;전한다.[4] 『일본서기』&nbsp;덴지(天智)기에는&nbsp;백제&nbsp;유민&nbsp;남녀&nbsp;400여&nbsp;인을&nbsp;오미(近江)에, 700여&nbsp;인을&nbsp;가모군(蒲生郡)에&nbsp;사민하고&nbsp;좌평&nbsp;여자신&middot;귀실집사&nbsp;등&nbsp;지배층에게&nbsp;관위를&nbsp;수여한&nbsp;기사&nbsp;등이&nbsp;단편적으로&nbsp;전한다.&nbsp;수차에&nbsp;걸친&nbsp;이주의&nbsp;누적&nbsp;규모를&nbsp;20만&nbsp;명&nbsp;이상으로&nbsp;보는&nbsp;것은&nbsp;사료의&nbsp;단편성을&nbsp;감안한&nbsp;발표자의&nbsp;해석적&nbsp;추정이며,&nbsp;학계의&nbsp;실증적&nbsp;합의&nbsp;수치는&nbsp;아님을&nbsp;밝혀&nbsp;둔다.[5] 다이호(大寶)&nbsp;율령은&nbsp;701년,&nbsp;『일본서기』는&nbsp;720년&nbsp;도네리&nbsp;친왕(舍人親王)&nbsp;주관으로&nbsp;완성되었다. &lsquo;일본&rsquo;&nbsp;국호와&nbsp;&lsquo;천황&rsquo;&nbsp;칭호의&nbsp;공식화도&nbsp;7세기&nbsp;말~8세기&nbsp;초의&nbsp;일이다.[6] 『일본서기』의&nbsp;이른바&nbsp;&lsquo;임나일본부&rsquo;&nbsp;서사에&nbsp;대한&nbsp;비판적&nbsp;검토로는&nbsp;김현구,&nbsp;『임나일본부설은&nbsp;허구인가』,&nbsp;창비, 2010&nbsp;참조.[7] 존&nbsp;카터&nbsp;코벨(Jon Carter Covell),&nbsp;김유경&nbsp;편역,&nbsp;『부여&nbsp;기마족과&nbsp;왜』,&nbsp;글을읽다, 2006.&nbsp;에가미&nbsp;나미오(江上波夫)의&nbsp;기마민족&nbsp;정복왕조설&nbsp;이래,&nbsp;야마토&nbsp;왕권&nbsp;형성에서&nbsp;한반도계&nbsp;도래인의&nbsp;역할은&nbsp;일본&nbsp;학계&nbsp;안에서도&nbsp;꾸준히&nbsp;논의되어&nbsp;왔다.[8] 도요토미&nbsp;히데요시는&nbsp;조선에&nbsp;&lsquo;정명가도(征明假道)&rsquo;를&nbsp;요구하였고,&nbsp;관백&nbsp;서한에서&nbsp;명&nbsp;정복&nbsp;후&nbsp;천황의&nbsp;베이징&nbsp;이주&nbsp;구상까지&nbsp;언급하였다.&nbsp;임진왜란의&nbsp;배경과&nbsp;국제관계에&nbsp;대해서는&nbsp;한명기,&nbsp;『임진왜란과&nbsp;한중관계』,&nbsp;역사비평사, 1999&nbsp;참조.[9] 메이지&nbsp;초기의&nbsp;정한론(征韓論, 1873)&nbsp;논쟁에서&nbsp;쇼와기의&nbsp;대동아공영권&nbsp;구상에&nbsp;이르는&nbsp;대륙&nbsp;팽창&nbsp;노선의&nbsp;연속성에&nbsp;대한&nbsp;논의는&nbsp;일본&nbsp;근대사&nbsp;연구의&nbsp;오랜&nbsp;주제이다.[10] 주류&nbsp;학계의&nbsp;통설은&nbsp;야마토&nbsp;정권의&nbsp;자생적&nbsp;성립을&nbsp;전제하며,&nbsp;임진왜란은&nbsp;전국(戰國)&nbsp;통일&nbsp;후&nbsp;다이묘&nbsp;세력의&nbsp;배출구&nbsp;확보&nbsp;등&nbsp;국내&nbsp;정치적&nbsp;요인으로,&nbsp;근대&nbsp;일본의&nbsp;팽창은&nbsp;서구&nbsp;제국주의&nbsp;모방이라는&nbsp;근대적&nbsp;현상으로&nbsp;설명한다.&nbsp;본고의&nbsp;&lsquo;본토&nbsp;회복&nbsp;서사&rsquo;는&nbsp;이러한&nbsp;실증적&nbsp;인과&nbsp;설명을&nbsp;대체하려는&nbsp;것이&nbsp;아니라,&nbsp;장기&nbsp;지속의&nbsp;심층&nbsp;서사(mythistory)&nbsp;차원에서&nbsp;제기하는&nbsp;해석적&nbsp;가설이다.&nbsp;신화와&nbsp;역사&nbsp;서술의&nbsp;관계에&nbsp;대해서는&nbsp;William H. McNeill, &ldquo;Mythistory, or Truth, Myth, History, and Historians,&rdquo; American Historical Review 91-1, 1986&nbsp;참조.[11] 조선총독부는&nbsp;1925년&nbsp;조선사편수회를&nbsp;설치하여&nbsp;『조선사』&nbsp;37책을&nbsp;편찬하였다.&nbsp;이마니시&nbsp;류(今西龍)&nbsp;등이&nbsp;주도한&nbsp;이&nbsp;사업은&nbsp;단군조선을&nbsp;신화로&nbsp;격하하고&nbsp;한국사의&nbsp;무대를&nbsp;반도에&nbsp;국한하는&nbsp;타율성론&middot;정체성론의&nbsp;골격을&nbsp;만들었다.[12] 본&nbsp;장&nbsp;제2~4절의&nbsp;논의는&nbsp;본&nbsp;컨퍼런스〈위기&nbsp;속의&nbsp;창발〉(19세기&nbsp;말&nbsp;민족종교&nbsp;발생의&nbsp;사회사적&nbsp;배경&nbsp;및&nbsp;비교종교학적&nbsp;고찰)과&nbsp;〈후천개벽의&nbsp;사상사〉(인존&middot;해원상생&middot;정신개벽&nbsp;사상의&nbsp;계보와&nbsp;인간관의&nbsp;변화)의&nbsp;주제와&nbsp;조응한다.[13] 위기&nbsp;시대&nbsp;민중&nbsp;종교운동의&nbsp;비교&nbsp;연구로는&nbsp;Norman Coh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57(중세&nbsp;유럽&nbsp;천년왕국운동)&nbsp;참조.&nbsp;청&nbsp;말의&nbsp;태평천국(1851~1864),&nbsp;북미&nbsp;원주민의&nbsp;고스트댄스(1890)&nbsp;등도&nbsp;같은&nbsp;유형에&nbsp;속한다.[14] 최제우의&nbsp;가르침은&nbsp;한문&nbsp;경전&nbsp;『동경대전(東經大全)』과&nbsp;한글&nbsp;가사&nbsp;『용담유사(龍潭遺詞)』로&nbsp;전한다.&nbsp;경전을&nbsp;한글&nbsp;가사로&nbsp;지어&nbsp;아녀자와&nbsp;민중에게&nbsp;직접&nbsp;전한&nbsp;것&nbsp;자체가&nbsp;개벽적&nbsp;실천이었다.[15] 증산의&nbsp;언행은&nbsp;『대순전경』&nbsp;등으로&nbsp;전하며,&nbsp;그&nbsp;사후&nbsp;법통을&nbsp;계승한&nbsp;교단으로&nbsp;보천교&middot;증산도&middot;대순진리회&nbsp;등이&nbsp;있다.[16] 나철은&nbsp;1907년&nbsp;을사오적&nbsp;처단을&nbsp;기도한&nbsp;자신회(自新會)&nbsp;사건으로&nbsp;유배되었고, 1909년&nbsp;음력&nbsp;1월&nbsp;15일&nbsp;단군교&nbsp;(이듬해&nbsp;대종교로&nbsp;개칭)를&nbsp;중광(重光)하였다. 1916년&nbsp;황해도&nbsp;구월산&nbsp;삼성사에서&nbsp;일제의&nbsp;교단&nbsp;탄압에&nbsp;항거하여&nbsp;순명삼조(殉命三條)를&nbsp;남기고&nbsp;조천(朝天)하였다.[17] &lsquo;물질이&nbsp;개벽되니&nbsp;정신을&nbsp;개벽하자&rsquo;는&nbsp;원불교&nbsp;『정전(正典)』&nbsp;총서편의&nbsp;개교표어.&nbsp;박중빈은&nbsp;1916년&nbsp;대각(大覺)&nbsp;후&nbsp;저축조합&nbsp;운동과&nbsp;전남&nbsp;영광&nbsp;길룡리&nbsp;간척으로&nbsp;실천&nbsp;공동체를&nbsp;세웠고, 1924년&nbsp;불법연구회를&nbsp;창립하였다(1948년&nbsp;원불교로&nbsp;개명).[18] 해월&nbsp;최시형의&nbsp;사인여천(事人如天)&nbsp;법설과&nbsp;「내수도문(內修道文)」&nbsp;참조.&nbsp;천도교&nbsp;소년회의&nbsp;방정환은&nbsp;1922년&nbsp;어린이날을&nbsp;제정하고&nbsp;잡지&nbsp;《어린이》를&nbsp;창간하였다.[19] 통계청,&nbsp;「2015&nbsp;인구주택총조사:&nbsp;종교&nbsp;부문」.&nbsp;종교&nbsp;인구&nbsp;비율은&nbsp;개신교&nbsp;19.7%,&nbsp;불교&nbsp;15.5%,&nbsp;천주교&nbsp;7.9%&nbsp;순이며,&nbsp;원불교&middot;천도교&middot;대종교&nbsp;등&nbsp;민족종교&nbsp;계열은&nbsp;각각&nbsp;0.3%&nbsp;미만으로&nbsp;집계되었다.[20] 조선총독부는&nbsp;「포교규칙」(1915)&nbsp;등으로&nbsp;신도(神道)&middot;불교&middot;기독교만을&nbsp;&lsquo;종교&rsquo;로&nbsp;인정하고&nbsp;민족종교를&nbsp;&lsquo;유사종교&rsquo;로&nbsp;분류하여&nbsp;경무국&nbsp;단속&nbsp;아래&nbsp;두었다.&nbsp;차경석의&nbsp;보천교는&nbsp;1920년대&nbsp;한때&nbsp;수백만&nbsp;신도로&nbsp;추산되었으나&nbsp;1936년&nbsp;강제&nbsp;해산되었고,&nbsp;대종교는&nbsp;1942년&nbsp;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nbsp;윤세복&nbsp;이하&nbsp;지도부가&nbsp;대거&nbsp;투옥되고&nbsp;다수가&nbsp;옥사하였다.[21] 무오독립선언(1919)의&nbsp;서명자&nbsp;다수와&nbsp;북로군정서&nbsp;지도부가&nbsp;대종교인이었으며,&nbsp;임시정부의&nbsp;신규식&middot;조완구&middot;박찬익&nbsp;등&nbsp;요인들도&nbsp;대종교적&nbsp;배경을&nbsp;지녔다.[22] 개천절은&nbsp;대종교의&nbsp;경축일에서&nbsp;기원하여&nbsp;1949년&nbsp;국경일로&nbsp;제정되었고,&nbsp;단군기원(檀紀)&nbsp;연호는&nbsp;1948~1961년&nbsp;공용되었다.&nbsp;홍익인간&nbsp;교육이념(각주&nbsp;32&nbsp;참조)과&nbsp;함께&nbsp;신생&nbsp;공화국의&nbsp;상징&nbsp;체계에&nbsp;수용된&nbsp;대종교적&nbsp;유산이다.[23] 박은식,&nbsp;『한국통사(韓國痛史)』, 1915.&nbsp;백암은&nbsp;결론에서&nbsp;나라의&nbsp;형체(國魄)는&nbsp;멸할&nbsp;수&nbsp;있어도&nbsp;나라의&nbsp;혼(國魂)인&nbsp;역사가&nbsp;살아&nbsp;있으면&nbsp;국가는&nbsp;부활한다고&nbsp;하였다.[24] 신채호,&nbsp;「독사신론(讀史新論)」,&nbsp;《대한매일신보》, 1908.[25] 신채호,&nbsp;『조선상고사』&nbsp;총론(《조선일보》&nbsp;연재, 1931). &ldquo;역사란&nbsp;무엇이뇨.&nbsp;인류&nbsp;사회의&nbsp;아(我)와&nbsp;비아(非我)의&nbsp;투쟁이&nbsp;시간부터&nbsp;발전하며&nbsp;공간부터&nbsp;확대하는&nbsp;심적&nbsp;활동&nbsp;상태의&nbsp;기록이니라.&rdquo;[26] &ldquo;역사를&nbsp;잊은&nbsp;민족에게&nbsp;미래는&nbsp;없다&rdquo;는&nbsp;경구는&nbsp;문헌상&nbsp;전거가&nbsp;확정되지&nbsp;않은&nbsp;채&nbsp;단재&nbsp;정신의&nbsp;요약으로&nbsp;널리&nbsp;회자된다.&nbsp;본고에서&nbsp;&lsquo;역사는&nbsp;혼&rsquo;이라는&nbsp;명제는&nbsp;단재의&nbsp;낭가사상과&nbsp;백암의&nbsp;국혼론을&nbsp;아우르는&nbsp;민족사학의&nbsp;핵심&nbsp;테제로&nbsp;사용한다.[27] 신용하,&nbsp;『3&middot;1운동과&nbsp;독립운동의&nbsp;사회사』,&nbsp;서울대학교출판부, 2001.[28] 대종교는&nbsp;1909년&nbsp;나철이&nbsp;중광(重光)하였고,&nbsp;그&nbsp;교단&nbsp;조직은&nbsp;북간도&nbsp;무장투쟁의&nbsp;인적&middot;조직적&nbsp;기반이&nbsp;되었다.&nbsp;북로군정서&nbsp;총재&nbsp;서일은&nbsp;대종교&nbsp;지도자였으며,&nbsp;청산리&nbsp;대첩(1920)의&nbsp;주역들&nbsp;다수가&nbsp;대종교인이었다.&nbsp;본&nbsp;컨퍼런스&nbsp;제4세션의&nbsp;논점이다.[29] 김기석(金基錫, 1905~1974)은&nbsp;평북&nbsp;용천&nbsp;출생으로&nbsp;오산학교를&nbsp;졸업하고&nbsp;와세다대학&middot;도호쿠제국대학에서&nbsp;철학을&nbsp;공부하였으며,&nbsp;해방&nbsp;후&nbsp;서울대학교&nbsp;사범대학&nbsp;교수&middot;학장과&nbsp;한국교육학회&nbsp;초대&nbsp;회장을&nbsp;지냈다.&nbsp;『현대정신사』,&nbsp;『철학개론』,&nbsp;『윤리전서』&nbsp;등의&nbsp;저술을&nbsp;남겼다.&nbsp;한국학중앙연구원,&nbsp;『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nbsp;「김기석」&nbsp;항목&nbsp;참조.[30] 김기석,&nbsp;『남강&nbsp;이승훈』, 1964(재간:&nbsp;한국학술정보, 2005).[31] 함석헌,&nbsp;『뜻으로&nbsp;본&nbsp;한국역사』(초판&nbsp;『성서적&nbsp;입장에서&nbsp;본&nbsp;조선역사』, 1950;&nbsp;개정판&nbsp;한길사).&nbsp;함석헌&nbsp;역시&nbsp;오산학교에서&nbsp;남강과&nbsp;다석&nbsp;류영모의&nbsp;훈도를&nbsp;받았다.[32] 대한민국&nbsp;교육법(1949)&nbsp;제1조는&nbsp;&ldquo;교육은&nbsp;홍익인간의&nbsp;이념&nbsp;아래&hellip;&rdquo;라고&nbsp;규정하였고,&nbsp;이&nbsp;이념은&nbsp;현행&nbsp;교육기본법&nbsp;제2조에&nbsp;계승되어&nbsp;있다.[33] 함석헌이&nbsp;1970년&nbsp;창간한&nbsp;《씨알의&nbsp;소리》는&nbsp;군사정권기&nbsp;재야&nbsp;저항&nbsp;담론의&nbsp;거점이었다.&nbsp;오산학교&nbsp;인맥이&nbsp;해방&nbsp;후&nbsp;교육계와&nbsp;종교계로&nbsp;확산된&nbsp;경로에&nbsp;대해서는&nbsp;본고&nbsp;Ⅱ장&nbsp;7절&nbsp;참조.[34] 세계은행(World Bank)&nbsp;자료&nbsp;기준&nbsp;한국의&nbsp;1인당&nbsp;국민총소득(GNI)은&nbsp;1962년&nbsp;약&nbsp;120달러에서&nbsp;2020년대&nbsp;3만&nbsp;5천&nbsp;달러&nbsp;수준으로&nbsp;성장하였다.[35] Alice H. Amsden, Asia&rsquo;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9.[36] Carter J. 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rsquo;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Gi-Wook Shin &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37] 오욱환,&nbsp;『한국&nbsp;사회의&nbsp;교육열:&nbsp;기원과&nbsp;심화』,&nbsp;교육과학사, 2000.[38] 대한민국&nbsp;헌법&nbsp;전문: &ldquo;유구한&nbsp;역사와&nbsp;전통에&nbsp;빛나는&nbsp;우리&nbsp;대한국민은&nbsp;3&middot;1운동으로&nbsp;건립된&nbsp;대한민국임시정부의&nbsp;법통과&nbsp;불의에&nbsp;항거한&nbsp;4&middot;19민주이념을&nbsp;계승하고&hellip;.&rdquo;[39] Joseph S. Nye, Soft Power: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 PublicAffairs, 2004.[40] Bruce Cumings, Korea&rsquo;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 W. Norton, 1997.[41] 백낙청,&nbsp;『분단체제&nbsp;변혁의&nbsp;공부길』,&nbsp;창작과비평사, 1994.[42] 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nbsp;기준&nbsp;구매력평가(PPP) 1인당&nbsp;GDP에서&nbsp;한국은&nbsp;2018년을&nbsp;전후하여&nbsp;일본을&nbsp;추월하였다.&nbsp;시장환율&nbsp;기준으로도&nbsp;양국의&nbsp;격차는&nbsp;사실상&nbsp;소멸하였다.[43] 우실하,&nbsp;『동북공정&nbsp;너머&nbsp;요하문명론』,&nbsp;소나무, 2007;&nbsp;이형구,&nbsp;『발해연안에서&nbsp;찾은&nbsp;한국&nbsp;고대문화의&nbsp;비밀』,&nbsp;김영사, 2004.[44] 홍산문화(기원전&nbsp;4500~3000)의&nbsp;담당&nbsp;주체를&nbsp;둘러싸고&nbsp;중국&nbsp;학계는&nbsp;중화문명&nbsp;기원론(요하문명론)의&nbsp;근거로,&nbsp;한국&nbsp;학계&nbsp;일부는&nbsp;고조선&nbsp;문화권과의&nbsp;연관&nbsp;속에서&nbsp;해석한다.&nbsp;어느&nbsp;쪽이든&nbsp;단정적&nbsp;귀속은&nbsp;시기상조라는&nbsp;신중론이&nbsp;있으며,&nbsp;본고는&nbsp;이를&nbsp;&lsquo;공유&nbsp;기억의&nbsp;자원&rsquo;&nbsp;차원에서&nbsp;다룬다.[45] 『맹자』 양혜왕 상&middot;공손추 상의 인정(仁政)론. 남북 융합 경제 구상의 상세한 논의는 발표자의 별고 「화평한 남북국 시대」(2025) 참조.]]></description>
			<author>김철호</author>
			<pubDate>Tue, 13 Oct 2026 11:08:4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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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논어의 인개념 분석을 통한 공자의 인성학</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5</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239d3122b0c6aeb336582fd807b3724aa1765a14.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695px;"><br>論語속에 仁 개념에 대한 고찰&nbsp;논어 텍스트속에서 공자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 즉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철학적으로 설정하고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를 칸트처럼 서술하지 않는다. 공자는 인간이 놓인 실제적이고 실존적인 상황속에서 다시 말해 구체적인 인간 관계 속에 인을 서술함으로서 그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인성론을 전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은 인(人)&rsquo;과 &lsquo;기(己), 심(心)&rsquo;과 &lsquo;성(性)&rsquo;, 그리고 &lsquo;욕(欲)&rsquo;과 &lsquo;지(知)&rsquo;, &lsquo;정(情)&rsquo;, &lsquo;의(意)&rsquo;의 관계 속에서 구체화된다. 仁이 타인과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서술되면 인(人)&rsquo;과 &lsquo;기(己)의 관계 범주에서 고찰되는데 이 경우 공자는 인(人)과 기(己)를 각각 객체와 주체로 구분하고 또 인격 특성에 따라 소인(小人)과 성인(聖人)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인(人)과 기(己)에 관한 공자의 언급은 윤리적 가치 실현 및 당위 실천 주체로서 기(己)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기己가 수修와 결합되면 기(修己)가 되고 좀 더 구체성을 지니게 되면 수기(修己)는 수신(修身)이 된다. 수기(修己)는 인(仁)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德이 되고 있다. 수기(修己)에 관한 공자의 관심은 또한 욕(欲)에도 놓여 있고, 그래서 부정적 욕구,욕심, 욕망을 경계하면서 도덕 의지[欲]의 발현이 강조된다. 도덕적 열정이 도덕적 지식보다 강조되면서 도덕 감정보다 도덕 의지[欲]가 강조된다. 인(人)이 본성과 마음의 관점 서술되면 심(心)&rsquo;과 &lsquo;성(性)&rsquo;의 관계 범주에서 인(人)이 논어에서 서술되며 아울러 인(人)은 욕망(欲)과 앎(知), 감정이나 정서(情) 그리고 의(意)&rsquo;의 관계 속에서 서술된다.&nbsp;본론&nbsp;논어라는 전체 텍스트 구조 속에서의 인(仁)&nbsp;學而:&nbsp;有子曰：「其為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不好犯上，而好作亂者，未之有也。君子務本，本立而道生。孝弟也者，其為仁之本與！」유자 노나라 사람 유약有若 자는 자유子有 여기서 유자의 표현은 증삼과 더불어 유약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논어가 편찬 되었다는 하나의 반증이 되고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혹은 사마천의 중니제자 열전仲尼弟子列傳참조.&nbsp;1.孝弟也者 其為仁之本與！&nbsp;효제라는 것은 인의 근본이라 할 것이다.관계개념속에서 윤리적 실천인 나와 부모 사이의 윤리적 실천인 효와 나 자신과 나의 형제사이의 윤리적 실천인 제가 인의 근본이 되고 있다. 그러나 효제자체를 인의 근본으로 규정하면仁之本 인의 범주가 효제에 한정되게 된다. 이 경우 < 효제 >는 인을 행하는 것為仁것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체와 용의 문제&nbsp;學而:&nbsp;子曰：「巧言令色，鮮矣仁！」공자께서 말씀 하셨다.&nbsp;교묘하게 꾸민 말과 부드러운 말은 인이 드물다.인이 교묘하게 꾸민 말과 부드러운 말에는 인이 내포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인을 속성으로 간주해서 로 문장 구조를 바꿀 수는 없는데 인의 본체론적 심의가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인륜성(sittlichkeit>에서 인간의 행위( 말, 몸짓,낯 낯빛complexion, face color )를 인자체와 관련 시킬 수 없다. 현상으로 드러난 인간의 행위라는 관점에서 인仁이 서술되고 있다.&nbsp;2.學而:&nbsp;而親仁子曰：「弟子入則孝，出則弟，謹而信，汎愛眾，而親仁。行有餘力，則以學文。」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젊은 사람이 집에 들어가면 효를 행하고 밖에 나오면 (윗사람에게)공경스러우며, 삼가고 믿음성이 있고 널리 뭇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한다. (이렇게 하고도 여력이 있으면 ( 그 힘으로) 글을 배운다.&nbsp;-而親仁이를 한자 그대로 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효와제 근 신이 모두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 규범이므로에서 인이 으로 해석되었다.인이 어떤 사람이 지닐 수 있는 품성이나 자질이라는 측면에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 에서 인을 윤리적 차원에 한정 하지 않고 정치적 범주 까지 확장 할 수 있다면 어진 사람은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사람으로 규 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에서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구분 될 수도 있지만 논어에서 인은 도덕적 윤리적 범주에서 정치적 영역으로 확장되는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nbsp;인이 주관적 도덕성의 영역에 머물면 개별적인 도덕적 역량을 의미 하는 것이지만 아울러 인이 예라고 하는 객관적인 관계 질서 속에서 발양되면 인은 정치적 역량이 된다. 인은 주관성의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객관 적인 삶의 질서들( 관습, 법)속에서 발양되어야 하는 것이다. 인은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도덕성을 단순히 정치화< politicization of morality >하려는 구조 속에서 고찰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도덕화< moralization of politics>되어야 한다는 구조의 차원에서 고찰 되어야 한다. 인간적 생을 총괄 하는 삶의 영역속에서 인이 고찰 되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극기복례克己復禮/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Reinhold Niebuhr)&nbsp;3.八佾:&nbsp;子曰：「人而不仁，如禮何？人而不仁，如樂何？」공자께서 말씀 하셨다.&nbsp;사람이 인하지 않다면 예를 행한 들 무엇하며&nbsp;,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음악을 한들 무엇하겠는 가&nbsp;?- 여례如禮, 여악如樂에서 如여는 어떤 준거에 따라서 실행에 옮기는 동사로 해석되고 있다.&nbsp;사람이 인하지 않다면(人而不仁)라는 서술에서 인은 개별적인 도덕적 역량,혹은 내면화된 품성을 의미하지만 예와 악이라는 객관적인 삶의 질서속에서 인은 구체화 된다.나와 타자와의 관계 즉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예禮는 행하여 지고 악樂 또한 행하여 진다(PRACTICE/ NOT DOING). 악이 공동체 속에서 삶의 질서를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악은 예악이 된다. 논어 팔승八佾편에서의 악樂은 개인의 심성 혹은 영혼을 고양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년기 때부터 가르쳐 져야 한다는 플라톤의 서술(법률편)방식으로 논의되고 있지 않다.&nbsp;음악이 지니는 교육학적 혹은 심성론에 관한 언급은 다산의 대학공의에서도 확인 된다 참조 사항으로 병기 한다.&nbsp;-&nbsp;朱子作序。雖以大學之書。爲太學敎人之法。而其實古者太學。敎人之法。敎以禮樂。敎以詩書。敎以弦誦。敎以舞蹈。敎以中和.敎以孝弟주자가 자신이 쓴 을 지을 때, 대학이라는 책을 태학(교육기관, 역자주)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그 옛날의 태학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법은 예와 악, 시경과 서경,그리고 현악기연주와 낭송, 춤과 중화,그리고 효제를 가지고 사람을 가르 쳤다.&nbsp;역자주)현악기 연주와 낭송; 한자 원문인 현송(弦誦)이라는 단어를 풀어 쓴 것이다. 弦현은 현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의미하고 誦송은 시를 소리내어 읽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운율에 감정이 더해지면 낭송이 되고 이러한 낭송에 다시 현악기의 반주가 더해지게 되면 현송弦誦이 된다.&nbsp;논어의 기록에도 弦歌(현가) 라는 표현이 확인 되고 있다. 초기에는 詩시를배울때, 弦樂(현악)에 맞추어 부르는 것을 弦歌(현가)라했으며，,음악없이 낭독을 하는 것을 송誦이라하였고 이를합하여 현송弦誦이라했다.&nbsp;후에 광범위하게 수업이나 낭독하는 것을 칭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송은 시를 효율적으로 그리고 심미적으로 익힐 수 있는 교육방법중에 하나 였다. 고대중국에서 낭송에 동반되는 악기는 남성적인 음조를 지니는 거문고였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현송이라는 것은 현악기 거문고의 운율과 함께 시가 낭송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nbsp;역자주성균 이라는 용어는 주(周)나라 시대의 주례(周禮)에서 확인된다.&nbsp;주례(周禮)&nbsp;춘관(春官)&middot;대사악(大司樂)편에 다산이 대학공의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확인 되고 있다.&nbsp;대사악은 국가의 주요 제례나 음악(禮樂)을 담당하기도 했다.&nbsp;기록상에서는 주례에 최초로 성균이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계급의 분화가 일어나고 지배층과 피 지배층이 생기면서,&nbsp;지배층은 전쟁이나 공동체를 위한 제례,&nbsp;등을 피지배층에게 공지하거나 교육 시켜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nbsp;주나라 이전에는 이러한 공지와 백성에 대한 풍속 교화는 일정한 장소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로 행하여지다가 주나라 때에 이르러 성균成均이라는 학제&nbsp;學制형태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nbsp;우리는 성균 이라는 용어의 유래를&nbsp;&lsquo;成人材之未就,&nbsp;均風俗之不齊&rsquo;(아직 이루지 못한 인재를 이루게 하고 고르지 못한 풍속을 가지런하게 한다)&nbsp;구절에서 각각 앞 구절의 성成과 뒷 구절의 균均을 빌려와서 성균 이라는 단어를 조어 한 것으로 이해 하지만,&nbsp;원래 중국 고대에서 균均은 조율調律&nbsp;또는 운韻과 관계가 있는 단어였다.&nbsp;균均이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음악과 관련되기 때문 이였다. 원래 음악과 연관된 악사樂師를 길러 내거나, 이러한 악사樂師에 의해 교육이 수행되는 교육기관이 성균成均였다. 상대商代의 관학官學인 종宗과 주대周代의 성균成均은 말할 것도 없고 춘추春秋전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고대上古의 교학敎學체제는 텍스트 중심이 아니었다. 구술口述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 졌는데, 이러한 구술 가운데에 그 내용이 되는 부분이 시詩가 되고, 기억하여 암기하기 쉽도록 리듬(音韻)을 붙인 것이 가(歌)가 된다. 시와 음률을 다한 것을 몸으로 표현 하면 무(舞)가 된다. 이와 같이 시(詩)와 악(樂)은 모두 예(禮)와 관련이 있었고 시와 악을 교육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예를 교육하는 것과 동의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nbsp;다산이 대학 공의에서 주례를 인용 하면서, 대사악(大司樂)이니 악덕(樂德) 악어(樂語) 악무(樂舞)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고대 구술 중심의 문화 전승과 교육에 악樂이 중요한 방법론 이였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nbsp;문화 전승과 그 교육에서 시詩와 가歌가 지닌 韻律을 고르게 한다는 것은 결국 교육의 정합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교육의 정합성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면 성균成均이 된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악樂을 가르치고 악樂을, 시현試演하고 악樂을 통해서 예禮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오늘날의 표현인 악공(樂工)으로 표현하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존재한다. 주례는 이러한 사람들을 악사樂師라고 지칭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는 악사(樂師)가운데에 맹인도 적지 않았다. 논어 위령공편에도 공자가 樂師악사 면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坐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nbsp;운율을 고르게 한다는 의미를 지닌 성균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제후(諸侯)국의 최고 교육기관을 성균관(成均館)이라고 지칭했다. 이 경우 성균관은 황제의 교육기관이었던 벽옹(辟雍)이나 또는 국자감(國子監)보다는 서열이 낮은 교육기관을 의미하게 된다.&nbsp;고대 중국에서 음악은 덕성 함양을 위한 필수 과목이었는데, 공자孔子 자신 또한 시에서 흥기하며, 예에서 서며, 음악에서 이루어진다고 논어위정편(論語爲政編)에서 진술하고 있다. (興於詩 立於禮 成於樂). 주자朱子는 논어의 이 부분을 주석하며 풀이하면서 &ldquo;심지어 배우는 자가 마지막에 의리가 정밀하여지고 어진 것이 완숙하여 도덕에 화순해지는 것은 반드시 이 음악에서 얻어지기 때문에 이것은 배우는 것의 완성이다.&rdquo;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可以養 故 學者之終 所以至於義精仁熟而自和順於道德者 必於此而得之 是는 學之成也)&nbsp;예기의 악기(樂記)에서도 예禮과 악樂은 몸에서 떨어 질 수 없다고 언급되고 있다.&nbsp;군자가 말했다. 예禮와 악樂은 잠깐이라고 하더라도 몸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 악樂을 익히고 이러한 익힘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면, 바르고 온유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저절로(油然) 생겨나는 것이다. 이렇듯 즐거워지면(樂) 편안해지며(安) 또 편안해서 그 편안함이 오래 지속되면 그 오래 지속됨이 하늘에 이르르게 되고, 하늘(天)에 도달하게 되면 신神에게 이르르게 된다. 하늘은 말하지 않아도 맡기고 믿으며, 신神은 노하지 않아도 위엄이 있다. 악을 익히고 마음을 다스린 사람이다(君子曰：禮樂不可斯須去身。致樂以治心，則易直子諒之心油然生矣。易直子諒之心生則樂，樂則安，安則久，久則天，天則神。天則不言而信，神則不怒而威，致樂以治心者也。致禮以治躬則莊敬，莊敬則嚴威。心中斯須不和不樂，而鄙詐之心入之矣。外貌斯須不莊不敬，而易慢之心入之矣)&nbsp;역주)&nbsp;예기 악기편에 의하면 이렇듯 고대 중국에서 음악은 오늘날 음악이 지닌고 있는 여흥성이나 유흥적 요소에서 정의하거나 규정되고 있지 않다. 고대 중국에서 음악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어떤 격렬한 감정이나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감정에 노출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행위일수가 없었다.&nbsp;어디까지나 중국 고대에서 음악은 마음을 평온하게(易) 하고 바르게하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론의 관점에서 다루어 졌다. 음악을 익혀서 마음의 편안함과 바름이 오래 지속되면 그 마음이 하늘에 까지이르르고 그 마음이 하늘에 까지 이르르면 이세상의 모든 神( 하늘에는 천신天神이 있고 땅에는 태묘나 종묘들에 모신 선왕이 있고 곡신穀神(社)을 비롯한 지신地神(稷)등의 신이 존재한다.)&nbsp;&nbsp;禮는 층차적 관계의 범주이면서 전체적으로 위계질서를 구조화시킨다면 樂은 이러한 층차적 질서인 예를 조화롭게 구성하고 화해 시키는 것이다. 공자스스로가 예와 악을 조화시킨 실례는 예기 단궁편에서 확인 할수 있다.&nbsp;공자의 제자 안연이 죽고 장사를 치른후에 안연의 대상을 공자가 모두 치른 후에 대상에 올렸던 고기(상육(祥肉)를 공자가 먹었는데, 이때, 대상의 상육을 바로 공자가 먹은 것이 아니라 공자 스스로 거문고를 탄 후에 먹었다. (顔淵之喪 饋祥肉 孔子出受之 入彈琴而后食之 )&nbsp;영어의 music과 같이 단순한 악기 소리와 인간의 음성만을 예기의 악이 의미 할 수 없다. 악은 노래와 악기 연주, 그리고 예식의 의미에서의 춤이 함께 융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악은 제례이며, 신분적 층차성과 차별적 신분 구성원들이 한데 어울리는 공간이면서 시간이 된다. 악이 인간의 내면적 정서와 감동을 발흥시킨다는 측면에서는 악은 내적인것이고 인간 내재적 심성의 영역에서 수행되어지는 것이므로 외면으로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악이 의례에 참석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일정 공간과 시간의 지속성속에서 구성원 사이의 층차적이고 총체적 관계를 외향적으로 조화롭게 의식(儀式)을 통해 표출해 낼 때 악樂은 예禮가 된다. 이제 악樂은 예禮의 단계로 이행했고 예는 다스려지는 치도治道 곧, 정치政治의 영역으로 지양 된 것이다.&nbsp;음악에 관한 영어 표현인 music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에 순수 예술의 한 장르로 자리 메김 했는데 원래 music은 예술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리스 여신 Muse가 학문과 예술을 관장했고, Muse는 그녀의 신적인 재능을 언제나 탁월하고 완전하게 발휘하였으므로 이러한 탁월한 그녀의 재능 또는 기술을 의미하는 단어가 music이었다. 따라서 music은 어떤 것을 실행해 내는 능력인 techne와 동의어로 간주되었다.&nbsp;그리스어 mousike는 (&tau;έ&chi;&nu;&eta;)techne를 의미했다. 라틴어 Musa는 학문과 예술을 관장하는 신을 가리켰다. 중세에 음악이란 소리나 음향을 중심으로 하는 장르 뿐만 아니라 시를 의미하기도 하였는데, 라틴어로 musicus는 음악가뿐만 아니리 시인을 의미했다. 오늘날처럼 시와 음악을 엄격하게 구분하여 각각 장르화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nbsp;중세의 Musica는 통상적으로 소리(sound)와 소음(noise) , 목소리(voice), 음(音. musical sound )를 세분하게 구분하고 있지는 않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기의 악기편에서 소리(sound), 목소리(voice), 음(音. musical sound )의 구분과 그 현상학적&middot;발생론적 서술을 우리가 유의하여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소리(sound), 목소리(voice), 음(音. musical sound )이 엄격히 구별되어지지는 않고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다.&nbsp;영어 sound가 우리의 청각기관을 통해 지각되어지고 들려지게 된다(what is heard)는 의미에서 sound는 noise와 구별되지 않는다 이때 sound는 noise를 구별짓는 기준은 청각자의 입장에서 들리어 진 것(what is heard)이 유의성을 지니는 것이냐 아니야의 여부가 관건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음악(music)을 noise와 단순히 구별지으려는 시도는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어떤 청각자에게 noise가 유의성을 충분히 전달했고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noise 가 잘 조직된 소리(organized sounds)로 인지 되었다면 noise는 이 청각자에게는 음(音 musical sound)이 된다.&nbsp;단순한 소리와 소음과 음악을 구별하는 기준은 소리의 발생론적 측면에서 행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소음도 어떤 집단이나 청각자가 조합된 소리로 들었다고 한다면 소음과 음악의 구별은 문화적 범주에서 다루어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음악(music)과 잘 조직된 소음(organized noise)을 구분 할수 있는 기준을 지니고 있는 걸까 ?라틴어로 Tympana sonuerunt 라는 표현은 북소리가 울렸다는 의미인데 라틴어 sono가 단순히 들려지었다는 관점에서 사용되고 있다. sono는 말이 제재로 언급되거나, 노래하거나 낭송하거나, 발음이 되는 경우에도 모두 사용되어 지는데 우리의 청각이 사실상 수동능동진행형태의 감각 작용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what is heard, what is being heard , the power of being heard).&nbsp;sonor는 소리,음향, 고함소리,소음,잡음을 의미하고, sonans는 시끄러운, 소리나는,울리는, 자랑스런, 목소리나 말씨가 고운..을 의미한다.sonoritas는 음향, 혹은 음조의 아름다음을 가리킨다. sonus는 영어로 sound(swan)와noise모두를 의미한다.sonipes는 발로 소리를 낸다는 의미에서 말의 발굽소리를 의미했는데,&nbsp;잘 달리는 말의 말굽소리라고 하는 청각적 측면에서 조성된 이 단어는 실제로 잘달리는 말 또는 준마를 의미했다.&nbsp;로마시대에는 닭이 곡식 낱알을 쪼아서 그 낱 알갱이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의 질에 따라서 사사로운 점을 보았는데 이러한 점을 라틴어로&nbsp;sonivium tripudium&nbsp;이라고 지칭했다.&nbsp;사람 목소리인 라틴어 vox를 단순한 소리인 sono와 구별 지을때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nec vox hominem sonat . 이 문장에서 vox와 sono는 분명히 구별되어져서 쓰이고 있다. Te carmina nostra sonabunt에서 sono는 찬양이나 칭송의 의미로도쓰이고 있다.vow는 확연히 인간의 발성기관을 통해서 발화된 소리(sound)를 의미했다. magna voce 큰목소리로, 사실의 소리vox rerum, 현명한 소리vow erudita ,시골 사람의 소리와 농부의 소리 rustica vox et agrests 등에서 확인 할수 있는 것처럼 sono와는 구별되어 쓰여지고 있다.&nbsp;예기는 음악과 소음의 구분을 미리 전제해서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영어 noise는 어원상&nbsp;그리스어 naus(배를 의미 했다)에서 noise는 유래 했는데 감기나 두통과 같은 일상적인 질병이 아니고 건강한 상태에 있는 남자라고 하더라도 항해를 위해 배에 승선하기만 하면 경험하게 되는 배멀미seasickness를 의미했다. 불쾌하고 견디긴 힘들다는 의미의 nausea에서 소음(noise)으로 전이 되었다.&nbsp;예기는 음악의 서술을 소음과 소리와 같은 인식론적인 기준으로 이분법화하여서 시작하고 있지 않다 . 예기는 음악을 음악이 발생하게되는 현상론적 측면에서 기술하기 시작한다. 예기는 음이나 소리등이 어디로부터 발생하는지를 전제로하여 악론樂論을 시작한다. 예기의 악기론에 의하면 음音은 인간의 심정주체인 마음에서 일어난다. 음은 인간의 지각능력이며 미학적 주체인 마음을 매개로 발생한다.&nbsp;음을 지각하는 주체인 마음은 마음을 움직이게하는 어떤 대상을 전제하지 않고도 주체인 마음이 음을 만들 수 있다고 예기 악론은 주장 할까 ? 그렇지 않다.왜냐하면 소리 또는 음音이란 기본적으로 수동의 형태로 인식되어지는 것이므로 외적 사물의 움직임이 주체인 마음에 어떤 변화를 야기시킬 때 형성되고 나타나는 것이 된다고 예기 악론은 기술한다. 그러면 하나의 질문을 더 제기 해보자 .&nbsp;주체인 마음을 움직이게하는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 모두 음音으로 나타 난다고 할수 있을까 ?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사물에 의하여 마음을 움직인 이 운동이 서로 변화하면서 서로 조응할때만이 音으로 나타난다고 악론은 서술하고 있다. 마음을 움직인 소리(sound)가 유기적으로 조직화 된 소리( organized sound)로 이행되었을 때만이 단순한 소리(sound)가 음악적 소리(musical sound)로 나타 날수 있는 것이다.&nbsp;이미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예기 악론은 소음을 다루고 있지는 않는데, 소음은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에 속하지 못하거나, 혹여 소음이 우연적인 방식으로 인간주체인 마음을 움직였다고 하더라도 소음의 성질상 서로 소음의 음색과 음조가 상응하거나 서로 변화하면서 조화로운 관계를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므로 음音( musical sound)이 되지 못한다.(noise and sound mass)&nbsp;里仁:&nbsp;子曰：「里仁為美。擇不處仁，焉得知？」인에 거처하는 것(里仁마을로 삼는 것)이 좋다美.&nbsp;인에 처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면어떻게 지혜롭다고 하겠는 가&nbsp;?&nbsp;주석)-인을 마을로 삼는 것은 자신이 살고자하는 장소를 선택하듯이 주체의 결정에 의한 것이다. 들野에 있는 것을 노盧라고 고대에서는 지칭했는데 노盧는 경작하는 밭에 임시로 지은 움막을 의미 한다면( 中田有盧/小雅) 리里는 읍邑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리里는 사람이 마땅히 머물러야 할 장소를 의미한다. 리里는 거처하거나 거처 하지 않음의 선택지속에 결정된다. 어떤 사람의 선택이 인에 거하지 않기不處仁로 결정될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과 은 선택지가 되고 각각&nbsp;은 지혜로운 선택이 되고 은 지혜롭지 못한 선택이 된다.을 넘어 오래 머물러 편안함을 얻으면 인仁은 편안한 집(안택安宅)이 된다(仁，人之安宅也/ 孟子)&nbsp;里仁:&nbsp;子曰：「不仁者不可以久處約，不可以長處樂。仁者安仁，知者利仁。」공자께서 말씀하셨다.&nbsp;인하지 못한 사람은 오래 동안 곤궁에 처해 있을 수 없고오랫 동안 즐거움에 처해 있을 수 없다. 인한 사람은 인을 편하게 여기고 지혜로운 사람은 인을 이롭게 여긴다.&nbsp;-논어 리인편에서 에 대한 직접적인 규정은 확인 되지 않는다. 개념에서 개념으로 연역되는 방식으로 인과 불인이 서술되지 않는다. 품성이나 체득된 덕으로써 고 지칭 하는 경우 은 이라는 실존적 상황 속에서 자기 내면의 윤리적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한계 상황(곤궁함約)을 감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곤궁함 즉 약約은 < 동여 메어 묶여 있는 것>을 의미 한다. < 동여 메어 묶여 있음約>은 윤리적 측면, 도덕적 측면, 정치적 측면, 경제적 측면을 모두를 포괄하는 한계 상황이다.리인 편에서 약約은 일반적으로 경제적 결핍과 연관된 것으로 해석 된다.. 인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과 한계 상황의 구조를 인식하지 못하고 < 동여 메어 묶여 있는約 한계 상황>이 오래 지속 되면(久 ,duration) 이러한 상황을 벗어 나기 위해서 자기 내면의 본심을 잃어버리고&nbsp;은 자기 내면의 동일성( 본심本心)을 오랫 동안 지속(久 ,duration)하지 못하는 반면에 은 자기 내면의 동일성( 본심本心)을 오랫 동안 지속시킬 수 있다. 본심의 동일성을 지속시키는 것, 즉 자기의 동일성속에서 이 된다.&nbsp;그런데 이란 인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나 체득 된 을 의미 한다고 할 수 있을 까?&nbsp;安仁안인이란 그 자체로 선한 행위를 지칭하지 않는다. 安仁안인은 도덕적 선을 가정 하거나 전제 하지 않는다, 安仁안인이 도덕적 선을 목적론적으로 전제하게 되면 安仁안인은 목적과 수단의 관계에 놓이게 되기 때문이다.&nbsp;안인安仁은 본능과 감정에 대한 인위적 통제가 아니라, 실존적 상황 속에서 윤리적 행위를 쉽게 자발적으로 선택하며 그러한 행위자체가 즐거움이 되는, 그래서 선택과 행위 자체가 자연화 된를 의미한다. 이 이다.&nbsp;브룩크스 E.Bruce Brooks는 자신의 저서 the Original Analects에서 논어 이인里仁편을 공자의 생애사에서 가장 먼저 발화 되고 기술된 것으로 확정하고 가장 앞쪽에 이인里仁편을 편집해서 영어로 번역 하고 있다. 브룩크스는 인仁을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이인편 두 번째 구절인 을 로 영역英譯 한다.&nbsp;한자어 이 영어로 번역되는 게 아니라 의 형태로 전사轉寫되어 표현 되고 있다. 브룩크스는 2019년 이루어졌던 영어 인터뷰에서 이 영어로 번역 되지 않았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한다. &ldquo; 논어의 전개 과정에서 인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변화하기 때문에 단일한 영어 번역이 마련 되지 않는다(rvn 仁. Since its meaning changes over the course of the Analects, a single English translation will not serve) &rdquo;&nbsp;제임스 레게는 논어 본문 을 로 번역 한다. 을 < virtue>로 번역하고 있는 것이 확인 된다. 제임스 레게의 < virtue>를 한자어로 옮기면 으로 번역 된다. 그렇다면 은 이 될 수 있는 가? 혹은 은 이 될 수 있는 가 ?&nbsp;브룩크스 E.Bruce Brooks는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서술되고 있는 을 덕으로 간주 하고 있는가 ? 브룩크스가 이인里仁편에서 인仁을 덕virtue으로 영어로 번역하지 않고 한자어 을 전사轉寫transcription해서 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 했다.그렇다면 번역자인 브룩크스 E.Bruce Brooks는 이인里仁편에서 언급되는 을&nbsp;어떻게 이해 하고 있는 것일까 ?&nbsp;&nbsp;브룩크스 E.Bruce Brooks는 논어 이인里仁편의 편명을 영어로 the Original Analects속에 명기 하고 있는데 브룩크스의 인仁에 대한 관점을 영어 편명을 통해서 확인 할 수가 있다.&ldquo; A The Cardinal Virtue RVN 仁 &rdquo;&nbsp;브룩크스는 인仁을 가장 중요한 덕(The Cardinal Virtue)으로 이해를 하고 있다.그가 이인里仁편의 편명을 가장 중요한 덕(The Cardinal Virtue)으로 명기하고 영어 번역에서는 인仁을 전사轉寫된 으로 명기 한 것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논어에서 인仁의 의미가 내용과 문맥에 따라 변화하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논어에서 인仁이 덕德의 범주에서만 서술되고 있다고 단언 할 수 있를까 ?&nbsp;논어에 대한 외국어 번역작업들 가운데 브룩크스처럼 전사轉寫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번역자 자신이 이해한 맥락에 따라 자신의 모국어로 독자적으로 번역한 작업으로는 리카르트 빌 헤름Richard Wilhelm의 독일어 번역을 거론 할 수 있을 것이다.&nbsp;-&nbsp;참고로 논어 텍스트 속에서 인仁과 덕德의 관계를 고찰하기 위한 시론적인 작업의 일부로써 빌 헤름Richard Wilhelm의 논어 작업 일부를 아래와 같이 명기해본다.&nbsp;(1) 12.19.1 &ldquo;군자의 덕은 바람이고&rdquo;&nbsp;@< das Wesen德 des Herrschers ist der Wind >(2)4.11.1 &ldquo;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편히 머물 곳을 생각한다.< der Edle君子&nbsp;liebt @den inneren Wert德&nbsp;, der Gemeine小人&nbsp;liebt das Irdische >(3)2.3.2 &ldquo;&nbsp;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다스리면 백성들은 부끄러 워 할 줄도 알고 또한 잘못을 바로잡게 된다.&rdquo;<br>&nbsp;(4)12.19.1 &ldquo;&nbsp;소인의 덕은 풀이다.&rdquo;< @das Wesen德&nbsp;der Geringen小人&nbsp;ist Gras>(5)2.1.1 &ldquo;&nbsp;공자께서 말씀하셨다.&nbsp;덕으로써 정치를 한다.&rdquo;< der Meister sprach : Wer kraft @seines Wesens德&nbsp;herrscht >(6)4.25.1 &ldquo;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nbsp;반드시 이웃이 있다.&rdquo;<br>(7)14.35.1 &ldquo; 천리마[ 또는 좋은말 驥(천리마 기]는 그 힘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덕을 일컫는 것이다&rdquo;--여기서 덕은 잘 조련되었다는 뜻을 의미한다.&nbsp;< An einem Ross schatzt man nicht die Starke, sondern die Rasse德 >(8)12.10.1 &ldquo;충성과 신의를 위주로하고 도의를 실천하고 살아가는 것이 덕을 숭상하는 것이다.&rdquo;&nbsp;(9)6.27.1 &ldquo;중용의 덕은 지극하도다&rdquo;<br>(10)8.1.1 &ldquo;&nbsp;태백은 지극한 덕을 지닌 분이라 할 수 있다.&rdquo;<br>(11)7.22.1 &ldquo;&nbsp;하늘이 나에게 덕을 부여해 주셨는데&nbsp;&rdquo;<br>(12)16.12.1 &ldquo;백성들중에 그의 덕에 대해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rdquo;<br>(13)14.5.1 &ldquo;&nbsp;덕이 있는 사람은 바른 말을 하지만&nbsp;&rdquo;<br>(14)14.6.1 &ldquo;군자로구나 그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그 사람은&rdquo;<br>(15)17.14.1 &ldquo;&nbsp;공자께서 말씀하셨다.&nbsp;길에서 듣고서 그것을 그대로 길에서 말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다. &rdquo;<br>(16)18.5.1 &ldquo;&nbsp;어찌 그리 덕이 쇠미해졌는가&nbsp;&rdquo;<br>(17)17.13.1 &ldquo;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로다.&rdquo;鄕原은 향원(鄕愿)이라고도 하는데 마을에서 성실한 척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마을에 서 시류나 시세에 영합하면서도 점잖고 성실한 듯이 보이는 사람으로 처세하여 순박한 마을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공자는 이러한 향원들이 위선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Jene ehrbaren Leute im Lande sind Rauber @der Tugend德 >&nbsp;(18)11.2.2 &ldquo;덕행으로 모범이 된 사람으로는 안연,&nbsp;민자건,.....&rdquo;&nbsp;(19)7.3.1 &ldquo;&nbsp;덕을 닦지 못하는 것,&nbsp;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nbsp;옳은 일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nbsp;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nbsp;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rdquo;< Der Meister sprach : Dass Anlagen德 nicht gepflegt werden,dass Gelernte nicht besprochen wird , dass man seine Pflicht kennt und nicht davon angezogen wird, dass man Ungutes an sich hat und nicht imstande ist es zu bessern : das sind Dinge, die mir Schmerz machen>&nbsp;위에서 열거한 德에 관한 용례 19가지는 논어원전 속에서, 德이 문장으로 들어가 있는 모든 부분을 발췌하여 본 것이다. 위에서 발췌한 총 19번의 의 용례를 빌헤름이 독일어로 옮긴 단어의 사용 빈도수에 맞추어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nbsp;Wesen&nbsp;】5회&nbsp;,&nbsp;【&nbsp;innerer Wert&nbsp;】2회&nbsp;,【&nbsp;Rasse&nbsp;】1회,&nbsp;【&nbsp;Tugend&nbsp;】2회,【&nbsp;Geist&nbsp;】4회,【&nbsp;Anlage】&nbsp;2회,【&nbsp;Granz&nbsp;】1회,【&nbsp;ethisch hochstehend&nbsp;】1회,【&nbsp;Eigenschaft&nbsp;】1&nbsp;회[ 1 ] 德을 &ldquo;Wesen"으로 번역한 경우&nbsp;빌헤름은 논어 , , ,,에서 德을 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는 논어 위정편을 번역하면서,&ldquo; 일반적으로 중국글자 이 독일어의 으로 번역되지만 실제로는 보다 광의의 포괄적인 의미를 갖고 있고, 중국의 주석서에 의하면 [德은 실재들이 생기(生起)하기 위하여 지니고 있는 어떤 것]이며, 이것은 한 개인으로부터 발휘되는 능력과 인격(사람됨)의 모든 본성을 포괄한다&rdquo;라는 주석을 붙이면서 암묵적으로 의 德을 으로 옮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빌헤름의 주석과 관련지어 을 해석하자면 뒤에는 가 부가되어 이해되어야 한다.&nbsp; 따라서 君子의 德은 군자의 인품이나 인격으로부터 비롯되는 능력을 가리키게 된다. 군자의 이와 같은 능력은 다양한 인간학적 관계 범주에서 발휘되는데, 현대중국어에서 德(de)이 ,,를 의미하는 것처럼, 군자의 능력은 각각 층차적으로 의 영역에서 그리고 < Moral>과 < Sittlichkeit >의 영역에서 발양 된다. 논어 위정편2.1.1에서 의 주체는 논어원문 상에는 명기되어 있지 않지만 정치행위의 주체는 소인(小人)이 아니라 君子인 것은 분명하다, 논어 안연편12.19.1에서 빌헤름은 君子를 로 옮기고 있는데, 여기서 君子는 단순한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어 번역어가 의미하듯이를 가리키고 있다. 군자의 정치적 측면에서의 君子의 능력은 정치의 영역에서 바람으로 비유되고 있다. 이러한 君子에 대한 번역은 논어 리인편 4.11.1에서 君子를 로 번역하고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리인편4.11.1의 君子에 대한 번역 은 위정편2.11과 안연12.19.1편에서의 君子에 대한 번역과는 다르게 도덕적 품성의 문제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군자에 대한 서술관점이 정치적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도덕성에 있는 것이라면 이때의 德은 위정 편에서의 이 아니라 君子가 내면에 간직한 능력을 표현할 수 있는 독일어번역어로 옮겨져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빌헤름은 리인4.11.1편에서 德을 로 옮기고 있다.&nbsp;송대의 유학자들은 인仁을 심성心性에 내재한 천부天賦의 성性으로 규정 한다. 인을&nbsp;오직 본성이 선한 것으로 간주하게 되면 이 경우 인은 자연 체득 한 것이 된다.(惟性仁者 自然體之)&nbsp;반면에 다산 정약용은 인仁을 인륜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성덕成德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 확인 된다.(案仁者人倫之成德 /論語古今註 )&nbsp;공 자는 과 에 관계에 대하여서도 언급 한다. 은 에 머물 수 있지만 오래 머물 수長處가 없다. 인하지 못한 사람은 즐거움에 오래 머물게 되면 ( 본심을 잃어버리고) 반드시必 음탕하게 된다(久樂必淫/論語集注 ) 혹은 반드시 미혹되어 어지럽게 된다(淫).&nbsp;논어 본문에서 공자는 인하지 못한 사람은 없다고 술회하고 있는데 주자는 논어 집주에서 이 를 술회하고 있다.&nbsp;인한 사람이 인에 편하게 머물 수 있다고 한다면 지혜로운 사람知者은 인仁과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까 ? 논어 이인편에서 어떤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면&nbsp;그는 인을 이로운 것利으로 인식한다.(知者利仁). 실존적 상황 속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인을 선택하여 행위로 옮기는 것은 화급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을 행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가장 이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곤궁에 처할 때에도 본심을 잃지 않고 인에 머물고 즐거움에 처 할 때에도 인에서 떠나지 않는다. 은 선택하고 결정해서 행위를 실천 해야만 하는 에서 ,와 가 서로 분리 되어 있지 않는 것을 의미 한다. 내재적-자발적 찬동에 의하지 않은 인仁의 실천은 인위적인 실천이다.&nbsp;예기禮記의 기록에는 인仁을&nbsp;, ,&nbsp;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기록이 확인 된다.&nbsp;논어 이인 편에서 서술되지 않고 있는 강인强仁은 인위적으로 강요된 인仁을 의미한다.&nbsp;외면적으로 인仁을 행하였다고 해도 죄를 두려워해서 인을 행하였다면 이러한 인의 실천은&nbsp;이 된다.( 禮記/表記 子曰：「仁有三，與仁同功而異情。與仁同功，其仁未可知也；與仁同過， 然後其仁 可知也。仁者安仁，知者利仁，畏罪者強仁 )&nbsp;인을 실행에 옮길 경우 어떤 사욕이나 욕심 없이 인仁을 좋아하고 반대로 어떤 일체의 두려움 없이 불인不仁을 미워 하는 일은 그렇다면 누구에게나 가능 한 일일까?&nbsp;공자는 예기에서 술회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통치자 또는 군자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인仁을 인위적으로 강요 할 것이 아니라 통치자 자신이 먼저 실행에 옮겨 몸으로 보여 주어야 한다고 역설 한다. 또한 행위 규칙이나, 규범 혹은 법을 군자나 통치자의 도덕적 역량을 기준으로 제정 할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키거나 준수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마련해야 한다고 술회 한다.(禮記/表記 子曰：「無欲而好仁者，無畏而惡不仁者，天下一人而已矣。是故君子議道 自己，而置法以民)&nbsp;里仁&nbsp;子曰：「唯仁者能好人，能惡人。」공자가 말씀하셨다. 오직 인한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 할 수 있고 오직 인한 사람만이사람을 능히 미워 할 수 있다.&nbsp;이 과 어떻게 구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좋아하고好 싫어하는 것惡은 군자나 소인이나 지닐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그러나 이 과연 옳은 것인가를 묻는다면, 과 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판단이 된다. 호인好人과 악인惡人은 옳음과 그릇됨의 가치론의 범주에서 다시 되 물어져야 하는 것이다.&nbsp;논어 텍스트에서는 어떠한 동기에서 타인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 여부가 구체적으로 서술되고 있지 않고 인 , 혹은 과 그리고 호오好惡의 감정이 문장을 구성한다.&nbsp;&nbsp;어진 사람仁者만이 오직唯 능히 좋아能好하고 능히 싫어 할수 있다能惡면 인仁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인지능력으로 간주 될 수 있는 가?&nbsp;&nbsp;그리고 이 경우 자신의 감정의 정당성을 인仁을 통해서 마련 할 수 있다면 은 도덕적 혹은 정치적 정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간주 할 수 있는 가?&nbsp;예기 대학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확인 된다.오직 인한 사람만이 이들을 추방하여 내 몰아 사방 오랑캐(四夷의)땅으로 흩어지게 하고 나라 안(中國)에서 더불어 함께 살지 않는다.&nbsp;이를 일컬어 어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어진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말 한 것이다.(禮記/大學 唯仁人放流之，迸諸四夷，不與同中國，此謂唯仁人為能愛人，能惡人)&nbsp;논어 편에서 기술되고 있는&nbsp;<br>里仁:&nbsp;子曰：「苟志於仁矣，無惡也。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참으로 인에 뜻을 둔다면 악은 없을 것이다.<br>주석)&nbsp;- 사람이 자신의 지향성을 인仁에 두고자하면, 즉 본문처럼 진실로(구苟) 인에 두고자 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의도했던 혹은 의도하지 않 했 던 가에 상관 없이 그 결과가 악에 이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까?&nbsp;공자는 진실로 지향점을 인仁에 두었다면 악은 없다고 단언 한다. 그러면 악惡이 없다는 것(無惡)은 무오류의 완결성(Geschlossenheit)을 의미하는가 ? 자신의 의지의 지향점을 인에 두는 것 자체가 선의 결과들을 필연적으로 산출해 낸다고 하면 의지의 지향성과 그 결과들은 일체의 우연을 배제하는 닫혀진 체계(closed system)속에 놓여 있는 것으로 파악 되어야 한다.의지의 지향성과 지향성의 실재적 결과들 사이에 우연성이 개입되면 지향성과 실재적 결과사이에는 불일치가 존재하게 된다. 의지의 지향성을 인에게 두었지만 미처 인仁을 이루지 못했을 경우가 존재한다.(志於仁者 未及成仁/論語古今注)&nbsp;것은 악(惡)이 아니고 허물(過)이 된다. 인仁에 지향점을 두고 인仁을 실천하는 경우에도 허물(過)이 되는 행동이 수반될 수 있는 것이다.(楊氏曰 苟志於仁, 未必無過擧也/朱子集註)&nbsp;그러나 이러한 허물이나 과오가 악을 행하는 것일 수는 없다(然而爲惡則無矣/朱子集註)다산은 허물과 악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역설한다.(案過與惡不同/論語古今注)의지의 지향성과 지향성의 실재적 결과들의 불일치 ,즉 우연성인 허물(過)은 인(仁)과 함께 통찰 되어야 하고 이렇듯 허물이 인과 함께 통찰 될 때만이 인(仁)의 구체성(其仁)이 인식 될 수 있다.( 禮記 表記: 與仁同過 然後其仁可知也. )어떤 사람이 지향점을 인에 둔다는 것을 논어 이인편에서는 지어인(志於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지志는 주체의 의지가 선택한 방향성을 의미 한다. 마음心의 의지意가 목적성을 지니게 되면 지志가된다. 공자는 자신이 지나온 삶의 변곡점을 서술하면서 최초의 자발적이고 목적 지향적 의지 행위를 15세에 이르러 배움學에 의지志의 지향점을 설정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為政:子曰：「吾十有五而志于學)&nbsp;공자가 15세에 선택했던 목적 지향 행위(志)는 그의 나이 공자는 30세에 바로 서게 되고(立), 40세에 이르러서는 미혹됨이 없게 되고(不惑), 50세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정한 명을 알게 되며(知天命), 60세에 이르러서는 귀가 순하게 되고(耳順), 70에 이르러서는 본인 마음 가는 데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일련의 결과로 이어 지고 있다.(為政: 子曰：「吾十有五而志于學，三十而立，四十而不惑，五十而知天命，六十而耳順，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性近習遠 聖人&nbsp;지향성을 지닌 동사 지(志)가 배움(學)과 결합되었다는 것은 나 를 전제하고 있다. 공자는 자기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며 옛 것을 좋아해서 부지런하게 그것을 구한 사람이라고 논어에서 술회하고 있다. ( 述而:子曰：我非生而知之者，好古，敏以求之者也 )&nbsp;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원래부터 본성이나 성품에 갖추어진 자질이, 일반인과 확연히 구별되었기 때문에 공자는 배움에 뜻을 두어 법도에 어긋남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nbsp;공자는 &ldquo;사람의 본성(本性)은 서로 가깝고 습성(習性)은 멀다&rdquo;라고 술회 한다.(陽貨:子曰：「性相近也，習相遠也 )&nbsp;이러한 맥락에서 공자는 도 아니고 도 아니라는 것이 그 자신의 서술에서 확인 된다. 배움에 뜻을 두는(志于學) 사람은 배운 이후에야 알게 된다. 뜻을 세우는 것이 배움의 선행 조건이 된다. 공자 자신도 배움의 선행조건과 배움이 요구되어지는 실존적 상황을 서술 한다. 어떤 배움에 대한 선행 조건 없이 알고 있다면 이런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알 고 있는 사람이다.&nbsp;&nbsp;태어나면서부터 알지는 못했지만 배움의 선행조건이 자기 자신에 의해 조건 지어진 사람 즉 스스로 배움에 뜻을 두어 아는 사람이 있다. 태어나면서 아는 사람도 아니고 스스로 배움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닌 경우에 배움의 선행조건은 갑자기 처하게 된 곤궁한 한계상황에 의해 수동적으로 조건 지어 지게 된다. 자신이 수동적으로 처하게 된 실존적 한계상황을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이 경우에 해당 한다.&nbsp;수동적으로 실존적 한계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라도 배우지 않는 사람도 존재 한다.&nbsp;(季氏:孔子曰：「生而知之者，上也；學而知之者，次也；困而學之，又其次也； 困而不學，民斯為下矣)&nbsp;공자가 살았던 당시 수동적으로 처하게 되었던 은 외교적 관례를 숙지하지 못하거나 그 세밀한 절차를 인지하지 못해서 처하게 된 곤궁한 상황을 의미한다.&nbsp;&nbsp;춘추좌전 소공 7년의 기록에 의하면 소공이 초나라를 방문한 기록이 확인된다. 맹희자가 소공을 수행하였지만 맹희자는 소공을 도와 예와 도를 행하지 못하였고 정나라 제후 정백이 사지량(師之梁)에서 소공을 위로 하는 대접자리에서도 맹희자는 소공을 돕는 개(介)의 역할을 올바르게 수행하지 못하였는데 맹희자가 예법의 도를 정밀하게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nbsp;(春秋左傳: 昭公七年 三月，公如楚，鄭伯勞于師之梁，孟僖子為介，不能相儀，及 楚，不能荅郊勞)&nbsp;이러한 사례에서 맹희자가 처한 상황이 곤(困)이되고 곤(困)을 극복하는 방법은 학(學)이 된다. 논어 계씨(季氏)편의 서술 형식으로 다시 곤(困)과 학(學)을 구성하면 곤한 상황에 처하게 되어 배우는 것, 곧 곤이학지(困而學之)가 된다.맹희자(孟僖子)는 임종 때 공자에게 예를 공자에게 배우라는 유언을 맹희자의 두 아들 맹의자(孟懿子)와 남궁경숙(南宮敬叔)에게 담겼다는 기록이 과 의 사기에서 확인 된다. 양백준의 고증에 따라 맹희자의 사망 시기를 소공昭公 7년이 아니라 소공昭公 24년으로 비정(比定) 한다.&nbsp;(春秋左傳: 昭公七年 九月 :及其將死也，召其大夫曰，禮，人之幹也，無禮無以立，吾聞將有達者，曰孔丘，聖人之後也，而滅於宋，其祖弗父何，以有宋而授厲公，及正考父佐戴，武，宣，三命茲益共，故其鼎銘云，一命而僂，再命而傴，三命而俯，循牆而走，亦莫余敢侮，饘於是，鬻於是，以餬余口，其共也如是，臧孫紇有言曰，聖人有明德者，若不當世，其後必有達人，今其將在孔丘乎，我若獲沒必屬說與何忌於夫子，使事之而學禮焉，以定其位，故孟懿子，與南宮敬叔，師事仲尼，仲尼曰，能補過者，君子也，詩曰，君子是則是效，孟僖子可則效已矣)&nbsp;15세의 공자의 선택(志)이, 그의 삶의 모든 변곡점들이< (志)-->(立)-->(不惑)-->(知天命)-->(耳順)-->(不踰矩) >맺고 있는 관계들을 필연적으로 도출 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공자는 15세의 목적 지향적 의지 행위(志)에서 비롯된 그 결과를 명사로 서술하지 않고 최초의 자발적 선택을 서술 했던 맥락속에서(志)에서 삶의 변곡점들을 일관되게 동사로 서술 한다.< (志)(立)(不惑)(知)(耳順)(不踰矩) >. 만약 공자가 즉 명사로 생의 변곡점들을 서술하려 했다고 한다면 그의 나이 52세에 맡았던 관직인 대사구(大司寇)를 생의 변곡점에 대한 서술로 기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nbsp;공자가 지나온 생의 변곡점을 명사로 서술하는 기록은 후대에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확인 된다. (世家 /孔子世家: 其後定公以孔子為中都宰，一年，四方皆則之。由中都宰為司空，由司空為大司寇)&nbsp;<br>里仁:&nbsp;子曰：「富與貴是人之所欲也，不以其道得之，不處也；貧與賤是人之所惡也，不以其道得之，不去也。君子去仁，惡乎成名？君子無終食之間違仁，造次必於是，顛沛必於是。」&nbsp;공자께서 말씀 하셨다. 부유함과 고귀함, 이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다. (합당한)도로 얻은 것이 아니면 처하지 않는다. 가난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다. (합당한)도로 얻은 것이 아니어도 떠나지 않는다.&nbsp;군자가 인을 떠나면 어찌(惡) 이름을 이루겠는 가 ? 군자는 식사를 (한끼)하는 시간에도 인을 어기지 않고 급하고 구차 할 때에도 반드시 인에 처한다.&nbsp;&nbsp;공자는 인을 사람들이 욕망하여 얻고자 하거나 도달하고자 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혹은 원하지 않는 것의 관계에서 인仁을 서술 한다. 과 , 과 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획득된 것(得之)이며 그 자체로 선(善) 일수 없다. 아울러 과 , 과 은 그 자체로 악(惡)일 수도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자는 과 을 사람들이 으로 서술하고 과 을 으로 서술 한다.&nbsp;- 문제 제기&nbsp;里仁:&nbsp;子曰：「富與貴是人之所欲也，不以其道得之，不處也；貧與賤是人之所惡也，不以其道得之，不去也。君子去仁，惡乎成名？君子無終食之間違仁，造次必於是，顛沛必於是。」&nbsp;공자는 부유함과 고귀함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과 에 처하지 않는다고 서술한다. 공자는 가난과 천함도 정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거기에 처하지 않는다(不處)고 본문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상태 혹은 천한 상태를 떠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이 확인 된다.&nbsp;가난과 천함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고, 부당하다고 생각 되어지는 조건이나 상황에 의해 더욱이 이러한 곤궁한 상황에 처하게 된 다면 이러한 상황을 가능한 한 벗어나야 한다고 공자가 서술했어야 하지 않을 까 ? 구지 이러한 상황을 떠나지 말라고 한 이유는 어디에 있는 가 ?&nbsp;빈천(貧賤)의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방법론적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빈천을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가 ? 한대漢代의 이 부분에 대한 해석과 주자朱子의 풀이도 빈천을 함부로 벗어나기 위한 인위적 노력을 해서는 않된다고 하는 소극적 견해를 견지하고 있다.&nbsp;&nbsp;다산은 빈천에 대한 숙명론을 비판 한다. &ldquo;타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빈천에 처하게 되었을 경우 (논어의 본문처럼) 빈천을 떠나지 않는 것이 인仁 이라면 군자는 평생 빈천을 떠날 수 없다. 오직 떠나지 않는 것(不去)만을 바른 도(道)로 여긴다면 어찌 이것이 시중(時中)의 옳바름이라 하겠는 가 ?&rdquo;&nbsp;다산은 소극적으로 빈천을 떠나지 않는 것만이 군자가 지켜야할 도道가 아니라 정당한 방법 즉 도道로써 빈천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道 즉 정당한 방법으로 빈천을 벗어 날 수 없는 경우에만 떠나지 않는 것이라고 역설(不去) 한다.&nbsp;( 論語古今注 卷二 : 里仁 第四: 駁曰 非也。苟如是也，君子終無去貧賤之日矣。一得貧賤，惟以不去爲法，道與非道，掉頭不問，豈君子時中之義乎？唯不以其道得去之，則不之而已)&nbsp;里仁:&nbsp;子曰：「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好仁者，無以尚之；惡不仁者，其為仁矣，不使不仁者加乎其身。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我未見力不足者。蓋有之矣，我未之見也。」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아직까지 인을 좋아하는 사람과 불인을 싫어하는 자를&nbsp;보지 못했다. 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고, 불인을 싫어하는 사람은 인을 행함에 있어 불인한 것이 자신의 몸에 붙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루동안 자신의 힘을 인에다 쓸수 있는 사람이 있었을 까 ? 나는 힘이 부족해서 인을 다 행하지 못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아마 힘이 부족해서 더 이상 인을 행할 수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인을 행하는 그런 사람이 잇을수 있겠지만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nbsp;里仁:&nbsp;子曰：「人之過也，各於其黨。觀過，斯知仁矣。」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의 허물은 그 무리에 따라 다르다. 허물을 보면 그 사람의 인의 정도를 알수 있게 된다.&nbsp;公冶長:&nbsp;或曰：「雍也，仁而不佞。」子曰：「焉用佞？禦人以口給，屢憎於人。不知其仁，焉用佞？」&nbsp;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옹은 인하기는 하지만 말 재주가 없다고 말하자 공자께서는 말씀하셨다.말 재주를 어디에다 쓴다는 말인가&nbsp;?&nbsp;그럴듯한 말재주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대하면 자주 다른 사람의 미움을 사게 된다.그가 인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말 재주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nbsp;<br>公冶長:&nbsp;孟武伯問：「子路仁乎？」子曰：「不知也。」又問。子曰：「由也，千乘之國，可使治其賦也，不知其仁也。」「求也何如？」子曰：「求也，千室之邑，百乘之家，可使為之宰也，不知其仁也。」「赤也何如？」子曰：「赤也，束帶立於朝，可使與賓客言也，不知其仁也。」맹무백이 물었다. 자로는 인합니까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모르겠습니다.다시 묻자 공자께서는 유는 그로 하여금 전투용 수레 천대를 가진 나라의 군사를 다스리게 할 수는 있으나 그가 인한지는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구는 어떻습니까 라고 묻자 공자게서는 구는 천호가 되는 읍과 전투용 수레 백대를 가진 경대부 집안의 가재 노릇을 할 수는 있나 그가 인 한지는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nbsp;公冶長:&nbsp;子張問曰：「令尹子文三仕為令尹，無喜色；三已之，無慍色。舊令尹之政，必以告新令尹。何如？」子曰：「忠矣。」曰：「仁矣乎？」曰：「未知，焉得仁？」「崔子弒齊君，陳文子有馬十乘，棄而違之。至於他邦，則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之一邦，則又曰：『猶吾大夫崔子也。』違之。何如？」子曰：「清矣。」曰：「仁矣乎？」曰：「未知。焉得仁？」자장(子張)이 묻기를 &ldquo;영윤(令尹)인 자문(子文)이 세 번 벼슬하여 영윤(令尹)이 되었으되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고, 세 번 벼슬을 그만두면서도 서운해하는 기색이 없어서 옛날 자신이 맡아보던 영윤(令尹)의 정사를 반드시 새로 부임해온 영윤(令尹)에게 알려주었으니, 어떻습니까?&rdquo; 하자, 공자(孔子)께서 &ldquo;충성{忠}스럽다.&rdquo;라고 대답하셨다. &ldquo;인(仁)하다고 할 만합니까?&rdquo; 하고 다시 묻자, &ldquo;모르겠다. 어찌 인(仁)하다고 할수 있겠는가.&rdquo; 하셨다.&nbsp;주석)공자는 영윤 자문이 충성스럽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의 본성이나 천성天理으로부터 그러한 충성이 연유되었는 지에 관해서는 공자는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다. 외면으로 들어난 충과 내면적인 인을 서로 분리해서 공자는 자문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최자(崔子)에 대한 공자의 평가도 그가 &ldquo;청백〔淸〕하다고 말 할 수는 있지만 인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아울러 언급한다. 최자가 제(齊)나라 대부(大夫)를 사양하고 제나라를 떠난 것이(違)&nbsp;이해(利害)의 사사로움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원망과 후회를 품은체로 제나라를 떠난 것인지를 공자는 확신 할 수 없기에 청백함과 인을 분리하고 있다. 행위 사실인 청백함과 내적 동기인 인을 공자는 분리하고 있다.&nbsp;雍也:&nbsp;子曰：「回也，其心三月不違仁，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안회(顔回)는 그 마음이 3개월 동안 인(仁)을 떠나지 않았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仁)에 이를 뿐이다.&rdquo;&nbsp;주석)공자는 내면화된 인의 지속성에 관하여 언급한다. 지속성의 기준은 3개월과 1일 혹은 한 달과 각각 비교되어 설정된다. 3개월三月에서 3은 숫자 4나 5와 대소관계에 놓여 있지 않다. 3은 장기 지속( longue dur&eacute;e )을 의미하면서(言其久) 아울러 인에서 떠남(違)과 대립한다.&nbsp;&nbsp;공자의 다른 제자들은 인의 지속성이 하루나 1 개월에 이를 뿐이였다(至). 1 개월이나 하루 정도의 인의 지속성은 문맥상 쉽게 인을 떠나는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違仁) . 이러한 의미에서 3개월이라는 인의 지속성은 인을 떠나지 않는 다는 상징성을 획득한다(不違仁). 3개월과 하루나 한 달의 구별은 어느 것이 안이 되고 밖이되며 어느 것이 객이되고 주인이되는 가를 인식하는 것이고, 마땅이 배우려는 사람은 차례 차례 마음으로 힘쓰고 또 힘써서(勉勉循循) 인의 지속성을 중단 없이(不能已) 유지해야 한다.&nbsp;雍也:&nbsp;樊遲問知。子曰：「務民之義，敬鬼神而遠之，可謂知矣。」問仁。曰：「仁者先難而後獲，可謂仁矣。」번지(樊遲)가 지(智)에 대하여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사람들이 의로움에 이를 수 있도록 힘쓰고( 務民之義) 귀신(鬼神)을 공경(恭敬)하되 멀리한다면(敬鬼神而遠) 지혜(智)롭다고 할 수 있다.&rdquo; 다시 인(仁)에 대하여 묻자, 또 말씀하셨다. &ldquo;인자함(仁者)이란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에 하니, 이렇게 한다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다.&rdquo;&nbsp;주석)&nbsp;번지가 질문한 지혜에 대한 공자의 대답과 인에 대한 대답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nbsp;지혜는 위정자와 피통치자의 관계에서 먼저 서술된다. 인륜적 생을 총괄하는 규범(人道)가운데에 위정자가 공동체의 구성원인 백성들에게 힘써야 할 것은 의로움이며 , 의로움이 위정자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확충되어 지면 이것을 공자는 지혜라고 지칭 한다. 지혜는 비가시적 존재(鬼神)와도 관련해서 언급된다. 비 가시적 존재를 단순히 믿기만 한다면(信) 미혹되는 것(迷惑)이고 , 비가시적 존재(鬼神)를 믿지 않는 다면 공경하지 않게 된다. 비 가시적 존재를 믿으면서도(信) 미혹되지 않는 실천적 지혜는 비가시적 존재를 공경하면서도 멀리하는 것이고 이것을 지혜롭다고 공자는 서술 한다.&nbsp;공자는 인을 이라고 서술한다. 어렵고(艱) 고된(苦)것을 먼저 할 것인지 소득이 되어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獲) 먼저 할 것인지에 대한 판단과 실행은 개인의 실천적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 선택지를 지닌다. < 어려운 일을 먼저(先難) 하고 얻는 것을 뒤로 돌리는 것>은 합리적 판단의 지평을 넘어서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선택과 실행자체가 행위자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본질상 자신에게 어렵고(艱) 수고로우(苦) 면서도 후행적으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도덕적 선택이나 정치적 선택을 누구나 내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자는 < 어려운 일을 먼저(先難) 하고 얻는 것을 뒤로 돌리는 것>을 지혜(知)로 규정하지 않고 인(仁)으로 규정한다.&nbsp;&nbsp;어려운 일을 먼저하고 결코 얻음을 헤아리지 않는다면(不計所獲) 이러한 행위는 인하다. 그러나 타자와 자기 자신의 관계 즉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관점에서 어렵고(艱) 고된(苦)것을 자신에게 소득이 되어 이로운 일을 이러한 인(仁)은 서(恕)가 된다.- 서(恕)를 힘써 행하는 것이 인(仁)이 되는 것인지 ,서(恕)를 힘써 행하는 것이 인(仁)에 가까워지는 지는 것인지, 혹은 다산 정약용처럼 반드시 서(恕)를 행한 이후에 인(仁)을 이룰수 있는지에(恕而後成仁) 관한 논의는 추후에 서술하기로 한다.&nbsp;雍也:&nbsp;子曰：「知者樂水，仁者樂山；知者動，仁者靜；知者樂，仁者壽。」공자(孔子)께서 말씀하였다. &ldquo;지혜로운 사람은(智者) 물을 좋아하고 인한 사람은(仁者) 산(山)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사람(智者)은 동적(動的)이고 인한 사람은(仁者) 정적(靜的)이며, 지혜로운 사람은 낙천적(樂天的)이고 인한 사람은(仁者) 장수(長壽)한다.&nbsp;雍也:&nbsp;宰我問曰：「仁者，雖告之曰：『井有仁焉。』其從之也？」子曰：「何為其然也？君子可逝也，不可陷也；可欺也，不可罔也。」재아(宰我)가 물었다. &ldquo;어진사람(仁者)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우물속에 인이 있다&rdquo;고 해도 그 인을 찾아 우물속으로 들어갑니까?&ldquo;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군자(君子)는 그로 하여금 가게 할 수는 있으나 빠지게 할 수는 없으며, 속일〔欺〕 수는 있으나 속일〔罔〕 수는 없는 것이다.&nbsp;雍也:&nbsp;子貢曰：「如有博施於民而能濟眾，何如？可謂仁乎？」子曰：「何事於仁，必也聖乎！堯舜其猶病諸！夫仁者，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能近取譬，可謂仁之方也已。」&nbsp;자공(子貢)이 말하였다. &ldquo;만일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博施〕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면〔濟衆〕 어떻겠습니까? 인(仁)하다고 할 만합니까?&rdquo;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어찌 인(仁)을 일삼는 데 그치겠는가. 반드시 성인(聖人)일 것이다. 요순(堯舜)도 이에 있어서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을 것이다.&nbsp;述而:&nbsp;子曰：「志於道，據於德，依於仁，游於藝。」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도(道)에 뜻을 두며, 덕(德)을 굳게 지키며,인(仁)에 의지하며 예(藝)에 노닐어야 한다.&nbsp;述而:&nbsp;冉有曰：「夫子為衛君乎？」子貢曰：「諾。吾將問之。」入，曰：「伯夷、叔齊何人也？」曰：「古之賢人也。」曰：「怨乎？」曰：「求仁而得仁，又何怨。」出，曰：「夫子不為也。」염유(有)가 말하기를 &ldquo;선생님(夫子)께서 위(衛)나라 군주(君主)를 도우실까?&rdquo;라고 하자,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ldquo;좋습니다. 내 장차 여쭈어보겠습니다.&rdquo;고 하였다.&nbsp;들어가서 &ldquo;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어떠한 사람입니까?&rdquo; 하고 묻자, 공자(孔子)께서는 &ldquo;옛날의 현인(賢人)이시다.&rdquo; 하고 대답하셨다. &ldquo;후회(後悔)하셨습니까?&rdquo; 하고 묻자, &ldquo;인(仁)을 구하여 인(仁)을 얻었으니, 다시 어찌 후회(後悔)하였겠는가.&rdquo;라고 대답하셨다. 자공(子貢)이 나와서 말하기를 &ldquo;선생님(夫子)께서는 그를 돕지 않으실 것이다.&rdquo; 하였다.&nbsp;述而:&nbsp;子曰：「仁遠乎哉？我欲仁，斯仁至矣。」&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인(仁)이 멀리 있는가? 내가 인(仁)을 하고자 하면 인(仁)이 당장 (나에게로) 이르는 것이다.&rdquo;&nbsp;述而:&nbsp;子曰：「若聖與仁，則吾豈敢？抑為之不厭，誨人不倦，則可謂云爾已矣。」公西華曰：「正唯弟子不能學也。」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ldquo;성인(聖人)과 인자(仁者)야 내 어찌 감히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스스로 배우는데 싫증내지 않고 , 남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rdquo; 하셨다. 공서화(公西華)가 말하였다. &ldquo;바로 이것이 저희 제자(弟子)들이 배울 수 없는 점입니다.&rdquo;&nbsp;泰伯:&nbsp;子曰：「恭而無禮則勞，慎而無禮則葸，勇而無禮則亂，直而無禮則絞。君子篤於親，則民興於仁；故舊不遺，則民不偷。」&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공손하되 예(禮)가 없으면 수고롭고, 삼가되 예(禮)가 없으면 두렵고, 용맹스럽되 예(禮)가 없으면 혼란하고, 강직하되 예(禮)가 없으면 너무 급하다.&rdquo;&nbsp;&ldquo;윗자리에서 다스리는 자가가 친척에게 후하게 하면 백성들이 인(仁)에 흥기(興起)하고, 옛 친구를 버리지 않으면 백성들의 인심이 각박해지지 않는다.&rdquo;&nbsp;泰伯:&nbsp;曾子曰：「士不可以不弘毅，任重而道遠。仁以為己任，不亦重乎？死而後已，不亦遠乎？」&nbsp;증자(曾子)가 말씀하였다. &ldquo;선비는 도량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된다. 책임이 무겁고 길이 멀기 때문이다.&rdquo; 인의 실현을 자기의 임무로 삼으니 막중하지 않은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것이니 이 또한 멀지 않은가?&nbsp;&nbsp;<br>泰伯:&nbsp;子曰：「好勇疾貧，亂也。人而不仁，疾之已甚，亂也。」용맹스러운 것을 좋아하면서 가난을 싫어하면 난동을 부리고,&nbsp;사람이 어질지 못하다다고해서 그것을 미워함이 심하면 난동을 부린다.&nbsp;子罕:&nbsp;子罕言利，與命，與仁。&nbsp;공자(孔子)께서는 이(利)와 명(命)과 인(仁)을 드물게 말씀하셨다.&nbsp;주석)공자는 이익과 운명과 인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많지 않았다. 괴력난신怪力亂神, 즉 상식을 벗어난 이상한 현상이나 용력으로 믿을 수 없는 폭력이나 힘, 패란이나 반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귀신에 대해서는 공자는 언급이 없었다는 서술이 술이편에서 확인 된다. 공야장 13편에서도 공자께서는 인간의 본성과 천도에 관하여 말씀하시는 것은 들을 수가 없었다는(夫子之言性與天道 不可得而聞也) 언급과도 자한편의 는 언급은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공자는 양화편에서 인간의 타고난 본성(性)은 서로가 큰 차이는 없지만 결국 후행적인 습성(習性)에 의하여 사람마다 그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라고 술회하고 있다(性相近也 習相遠也).&nbsp;子罕:&nbsp;子曰：「知者不惑，仁者不憂，勇者不懼。」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지혜로운 자는 의혹하지 않고, 인(仁)한 자는 근심하지 않고, 용맹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는다.&rdquo;&nbsp;&nbsp;顏淵:&nbsp;顏淵問仁。子曰：「克己復禮為仁。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為仁由己，而由人乎哉？」顏淵曰：「請問其目。」子曰：「非禮勿視，非禮勿聽，非禮勿言，非禮勿動。」顏淵曰：「回雖不敏，請事斯語矣。」안연(顔淵)이 인(仁)을 묻자,&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자기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nbsp;어느 날 자신의 사욕(私慾)을 이겨 예(禮)에 돌아가면 천하(天下)가 이 사람을 인(仁)하다고 할 것이다.&nbsp;인(仁)을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지,&nbsp;남에게 달려있는 있겠는가&nbsp;?안연(顔淵)이&nbsp;&ldquo;그 자세한 내용을을 묻겠습니다.&rdquo;&nbsp;하고 말하자,&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nbsp;예(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nbsp;예(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며,&nbsp;예(禮)가 아니면 동(動)하지 마는 것이다.&rdquo;&nbsp;안연(顔淵)이 말하였다. &ldquo;제[회(回)]&nbsp;가 비록 불민(不敏)하오나 청컨대 이 말씀을 힘써 행하겠습니다.&nbsp;주석)극기복례(克己復禮)는 나로써 나를 이기는 것을 의미 한다(以己克己).&nbsp;결국 소체와 대채를 기르는 경우에도 결국 나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由己)&nbsp;이러한 맥락에서 극기(克己)는 결국 유기(由己)와 모순적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nbsp;顏淵:&nbsp;仲弓問仁。子曰：「出門如見大賓，使民如承大祭。己所不欲，勿施於人。在邦無怨，在家無怨。」仲弓曰：「雍雖不敏，請事斯語矣。」중궁(仲弓)이 인(仁)을 묻자,&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문을 나갔을 때에는 큰손님을 뵈온 듯이 하며,&nbsp;백성에게 일을 시킬 때에는 큰 제사(祭祀)를 받들 듯이 하고,&nbsp;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nbsp;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으며,&nbsp;집안에 있어서도 원망함이 없을 것이다.&rdquo;&nbsp;중궁(仲弓)이 말하였다. &ldquo;제[옹(雍)]&nbsp;가 비록 불민(不敏)하오나 청컨대 이 말씀을 힘써 행하겠습니다.&rdquo;&nbsp;주석)자신이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야 한다(己所不欲，勿施於人)는 언급은 위령공편에서 자공이 공자에게 한평생 실천 할 수 있는 한마디의 말을 물었을때도 공자가 자공에게 내려준 말이다(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曰, 其恕乎. 己所不欲勿施於人).자신과 타자 관계에서 타인에 관한 도덕적 행위의 정당성은 공자에 의하면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요구하지 않는 것 속에서 확보 된다. 내가 하고자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 할 수 있을 까(己所欲，施於人) ?&nbsp;顏淵:&nbsp;司馬牛問仁。子曰：「仁者其言也訒。」曰：「其言也訒，斯謂之仁已乎？」子曰：「為之難，言之得無訒乎？」&nbsp;사마우(司馬牛)가 인(仁)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어진사람은仁者) 그 신중하기 때문에 그 말이 머뭇거려 진다 .&rdquo; 말하였다. &ldquo;그 말하는 이 머뭇겨려지면 인(仁)이라 고 합니까 ?&rdquo;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였다. &ldquo; 행하기가 어려우니, 말함에 머뭇거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nbsp;顏淵:&nbsp;子張問：「士何如斯可謂之達矣？」子曰：「何哉，爾所謂達者？」子張對曰：「在邦必聞，在家必聞。」子曰：「是聞也，非達也。夫達也者，質直而好義，察言而觀色，慮以下人。在邦必達，在家必達。夫聞也者，色取仁而行違，居之不疑。在邦必聞，在家必聞。」자장(子張)이 &ldquo;선비가 어떠하여야 이 통달(達)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rdquo;라고 묻자 공자께서는 네가 말하는 통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고 하셨다. 자장(子張)이 대답하였다. &ldquo;제후나라에서 일을 해도 반드시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며, 대붕의 식읍에서 잃을 해도 있어도 반드시 소문이 나는 것입니다.&rdquo;&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이것은 명성이(聞)이 있는 것이지 통달(達)한 것이 아니다.&rdquo; 통달(達)이란 질박하며 정직하고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빛을 관찰하며 생각해서 몸을 낮추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 일을 해도 반드시 통달(達)하고, 대부의 식읍에 일을 해도 반드시 통달(達)하게 되어 있다.&nbsp;명성(聞)이란 얼굴빛은 인(仁)을 취하나 행실은 실제로 인을 어기면서도 스스로 어질다고 자처하여 의심치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 있어도 반드시 명성이 있고, 대부의 식읍에서도 있어도 반드시 명성이 난다.&rdquo;&nbsp;주석)&nbsp;마융은 남의 말을 살피고 얼굴 빛을 관찰하며 몸을 낮추는 것은 이미 다른 사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인식한 것이라고(知其所欲) 풀이하고 다산도 마융의 입장에 따르고 있다. 가령 겸손하고 사양하는 사람은(謙退之人) 사람은 술을 주거 받거나 음식을 먹거나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자리에 나아갈 때라도 매사에 남의 말을 살피고 남의 안색을 관찰하여 공동체속에에서 자신이 행하여 할 바와 타인이 하고자 하는 바를 조화롭게 구성해 내는 사람이다. 겸손하고 사양하는 사람은(謙退之人) 간사하고 아첨하는 사람(佞人)과 구별 된다.&nbsp;顏淵:&nbsp;樊遲問仁。子曰：「愛人。」問知。子曰：「知人。」樊遲未達。子曰：「舉直錯諸枉，能使枉者直。」樊遲退，見子夏。曰：「鄉也吾見於夫子而問知，子曰，『舉直錯諸枉，能使枉者直』，何謂也？」子夏曰：「富哉言乎！舜有天下，選於眾，舉皋陶，不仁者遠矣。湯有天下，選於眾，舉伊尹，不仁者遠矣。」번지(樊遲)가 인(仁)에대하여 묻자,&nbsp;공자(孔子)께서&nbsp;&ldquo;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rdquo;&nbsp;하셨다.&nbsp;지(智)를 묻자,&nbsp;공자(孔子)께서&nbsp;&ldquo;사람을 알아보는 것 것이다.&rdquo;&nbsp;하셨다.&nbsp;번지(樊遲)가 그 내용을 깨닫지하지 못하자,&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nbsp;번지(樊遲)가 물러가서 자하(子夏)를 만나보고 물었다. &ldquo;지난번에 선생님(夫子)을 뵙고 지(智)를 물었더니,&nbsp;선생께서&nbsp;&lsquo;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다.&rsquo;하셨으니,&nbsp;무슨 말씀인가?&rdquo;자하(子夏)가 말하였다. &ldquo;풍부하다.&nbsp;그 말씀이여!&nbsp;순(舜)임금이 천하(天下)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들 중에서 선발해서 고요(皐陶)를 들어 쓰시니, 인하지 않은 자(不仁들이 멀리 사라졌고, 탕(湯)임금이 천하(天下)를 소유함에 여러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 이윤(伊尹)을 들어 쓰시니, 인하지 않은자(不仁)들이 멀리 사라졌다.&nbsp;주석)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지인(知人)의 지(知)는 서경書經에서 확인되는&nbsp;顏淵:&nbsp;曾子曰：「君子以文會友，以友輔仁。」증자(曾子)가 말씀하였다. &ldquo;군자(君子)는 문(文)[학문(學問)]&nbsp;로써 벗을 모으고,&nbsp;벗을 통하여써 인(仁)의 수준을 향상 시킨다.&nbsp;子路:&nbsp;子曰：「如有王者，必世而後仁。」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만일 왕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성왕이 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백성들이 인(仁)해질 것이다.&nbsp;&nbsp;子路:&nbsp;樊遲問仁。子曰：「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번지(樊遲)가 인(仁)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셨다. &ldquo;평상시에 거처(居處)할 때에에 공손하고 , 일을 집행할 때에에 신중하며하며,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에 한결 같이 마음을 다해야 한다. 이것은 비록 오랑캐(夷狄)의 나라에 가더라도 버려서는 안 된다.&rdquo;&nbsp;&nbsp;子路:&nbsp;子曰：「剛毅、木訥，近仁。」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강하고 굳세고, 질박하고 어눌(語訥)함이 인(仁)에 가깝다.&rdquo;&nbsp;憲問:&nbsp;憲問恥。子曰：「邦有道，穀；邦無道，穀，恥也。」「克、伐、怨、欲不行焉，可以為仁矣？」子曰：「可以為難矣，仁則吾不知也。」&nbsp;원헌(原憲)이 수치스러운 일을 물으니, 공자(孔子)께서 대답하셨다. &ldquo;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 녹(祿)만 먹으며, 나라에 도(道)가 없을 때에 녹(祿)만 먹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다.&rdquo;&nbsp;이기기를 좋아하고 자기의 공로를 자랑하며, 원망하고 탐욕 함을 행해지지 않게 한다면 인(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rdquo;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어려운 일이라고는 할 수 있으나 , 인(仁)인지는 내 알지 못하겠다.&nbsp;憲問:&nbsp;子曰：「有德者，必有言。有言者，不必有德。仁者，必有勇。勇者，不必有仁。」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덕(德)이 있는 자는 반드시 말을 하지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반드시 덕(德)이 있지는 못하다. 인자한 사람은仁者)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가 있는 자는 반드시 인(仁)한 것은 아니다.&rdquo;&nbsp;憲問:&nbsp;子曰：「君子而不仁者有矣夫，未有小人而仁者也。」&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군자(君子)로서 인(仁)하지 못한 자는 있어도 소인(小人)으로서 인(仁)한 자는 있지 않다.&rdquo;&nbsp;憲問:&nbsp;子路曰：「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未仁乎？」子曰：「桓公九合諸侯，不以兵車，管仲之力也。如其仁！如其仁！」&nbsp;자로(子路)가 말하였다. &ldquo;환공(桓公)이 공자 규(公子糾)를 죽이자, 소홀(召忽)은 그를 위하여 죽었고,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으니, 관중(管仲)은 인(仁)하지 못할 것입니다.&rdquo;&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였다. &ldquo;환공(桓公)이 제후(諸侯)들을 규합하되, 병거(兵車)[무력(武力)] 를 쓰지 않은 것은 관중(管仲)의 힘이었으니,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누가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rdquo;&nbsp;주석)&nbsp;인의 평가와 기준을 어느 관점에서 고찰해야 하는 가&nbsp;?관중의 정치적 공적과 소홀(召忽)의 인성 내면에서 발양되는 인(仁)을 비교했을 때 결과적으로 관중의 정치적 행위를 소홀의 순절과 같이 인한 것으로 평가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공자는 관중이 순절하지는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관중의 정치적 행위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보면 인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자공은 관중이 환공을 도왔던 것을 거론하며 관중이 인하지 않다고 주장하지만 &ldquo;관중(管仲)이 환공(桓公)을 도와 제후(諸侯)의 패자가 되어 한 번 천하(天下)를 바로잡아,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받고 있으니, 관중(管仲)이 없었다면 나[우리] 는 그 머리를 풀고 옷깃을 왼편으로 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rdquo; 라며 관중의 정치적 행위가 인한 것임을 다시 한번 주장한다.&nbsp;憲問:&nbsp;子曰：「君子道者三，我無能焉：仁者不憂，知者不惑，勇者不懼。」子貢曰：「夫子自道也。」&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군자(君子)의 도(道)가 세 가지인데, 나는 능한 것이 없다. 인한 사람은(仁者) 근심하지 않고, 지혜로운 자는(智者)는 의혹하지 않고, 용기 있는 자는(勇者) 두려워하지 않다.&nbsp;衛靈公:&nbsp;子曰：「志士仁人，無求生以害仁，有殺身以成仁。」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자신의 삶을 추구하느라고 인(仁)을 해침이 없고, 자신을 죽여 인(仁)을 이루는 경우는 있다.&rdquo;&nbsp;衛靈公:&nbsp;子貢問為仁。子曰：「工欲善其事，必先利其器。居是邦也，事其大夫之賢者，友其士之仁者。」자공(子貢)이 인(仁)을 행하는 것에 관하여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기술자(工人)가 그 일을 잘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기구[연장] 를 예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어느 나라에 살려 한다면 그 나라의 대부(大夫)들 가운데 현명한 사람을 섬기며, 그 나라의 선비가운데(士) 인(仁)한 자를 벗삼아야 한다.&rdquo;&nbsp;&nbsp;衛靈公:&nbsp;子曰：「知及之，仁不能守之；雖得之，必失之。知及之，仁能守之。不莊以涖之，則民不敬。知及之，仁能守之，莊以涖之。動之不以禮，未善也。」&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지혜가 거기에 미치더라도 인(仁)이 능히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면 비록 얻더라도 반드시 잃는다.지혜가 거기에 미치며 인(仁)히 능히 그것을 지키더라도 장엄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임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를 공경하지 않는다. 지혜가 미쳐서 인(仁)이 능히 지켜내며 장엄함으로써 백성들을 대하더라도 백성들을 흥동(興動)시키기를 예(禮)로써 하지 않는다면 선(善)하지 못하다.&rdquo;&nbsp;衛靈公:&nbsp;子曰：「民之於仁也，甚於水火。水火，吾見蹈而死者矣，未見蹈仁而死者也。」&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사람이 인(仁)을 물과 불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욱 절실하다. 물과 불은 그것을 내 밟다가 죽는 자를 보았지만와 인(仁)을 밟다가 죽는 자는 내가 보지 못하였다.&rdquo;&nbsp;衛靈公:&nbsp;子曰：「當仁不讓於師。」&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인(仁)을 당하여서는 스승에게도 사양하지 않는다.&rdquo;&nbsp;陽貨:&nbsp;陽貨欲見孔子，孔子不見，歸孔子豚。孔子時其亡也，而往拜之，遇諸塗。謂孔子曰：「來！予與爾言。」曰：「懷其寶而迷其邦，可謂仁乎？」曰：「不可。」「好從事而亟失時，可謂知乎？」曰：「不可。」「日月逝矣，歲不我與。」孔子曰：「諾。吾將仕矣。」&nbsp;양화(陽貨)가 공자(孔子)를 만나고자 하였으나, 공자(孔子)께서 만나주지 않으시자, 양화(陽貨)가 공자(孔子)에게 삶은 돼지를 선물로 보내주니, 공자(孔子)께서도 그가 없는 틈을 타 사례하러 가시다가 길에서 마주치셨다.공자(孔子)에게 말하기를 &ldquo;이리 오시오. 내가 그대와 말을 하겠오. 훌륭한 보배를 품고서 나라를 어지럽게 버려두는 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rdquo; 하니, 공자(孔子)께서 &ldquo;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rdquo; 하셨다. 양화(陽貨)가 &ldquo;종사(從事)하기를 좋아하면서 자주 때를 놓치는 것을 지(知)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rdquo; 하니, 공자(孔子)께서 &ldquo;그렇다고 할 수 없습니다.&rdquo; 하셨다. 양화(陽貨)가 &ldquo;해와 달이 흘러가니, 세월은 나를 위하여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rdquo; 하니, 공자(孔子)께서 &ldquo;알았습니다. 나는 장차 벼슬을 할 것입니다.&rdquo; 하셨다.&nbsp;陽貨:&nbsp;子張問仁於孔子。孔子曰：「能行五者於天下，為仁矣。」請問之。曰：「恭、寬、信、敏、惠。恭則不侮，寬則得眾，信則人任焉，敏則有功，惠則足以使人。」자장(子張)이 공자(孔子)에게 인(仁)을 여쭙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능히 다섯 가지를 천하(天下)에 행할 수 있으면 인(仁)이 된다.&rdquo; 하셨다. 자장(子張)이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니, 말씀하시기를 &ldquo;공손함〔恭〕, 너그러움〔寬〕, 믿음〔信〕, 민첩함〔敏〕, 은혜로움〔惠〕 이니, 공손하면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너그러우면 여러 사람들을 얻게 되고, 믿음이 있으면 남들이 의지하게 되고, 민첩하면 공이 있게 되고, 은혜로우면 충분히 남들을 부릴 수 있게 된다.&rdquo; 하셨다.&nbsp;陽貨:&nbsp;子曰：「由也，女聞六言六蔽矣乎？」對曰：「未也。」「居！吾語女。好仁不好學，其蔽也愚；好知不好學，其蔽也蕩；好信不好學，其蔽也賊；好直不好學，其蔽也絞；好勇不好學，其蔽也亂；好剛不好學，其蔽也狂。」&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기를 &ldquo;유(由)야! 너는 여섯마디 말과(六言)과 그에 따르는 여섯 가지 페단(六蔽)을 들어보았느냐?&rdquo; 하시자, 대답하였다. &ldquo;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rdquo; &ldquo;앉거라. 내 너에게 말해 주리라.&rdquo;&nbsp;인(仁)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가려짐]이 어리석게 되고〔愚〕, 지혜〔知〕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호탕하게 되고〔蕩〕, 믿음〔信〕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해치게 되고〔賊〕, 정직〔直〕한 것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급하게 되고〔絞〕, 용맹〔勇〕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어지럽게 되고〔亂〕, 강(剛)한 것만 좋아하고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경솔하게 된다〔狂〕 .&nbsp;陽貨:&nbsp;子曰：「巧言令色，鮮矣仁。」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말을 좋게 하고, 얼굴빛을 곱게 하는 자는 인(仁)한 사람이 드물다.&nbsp;陽貨:&nbsp;宰我問：「三年之喪，期已久矣。君子三年不為禮，禮必壞；三年不為樂，樂必崩。舊穀既沒，新穀既升，鑽燧改火，期可已矣。」子曰：「食夫稻，衣夫錦，於女安乎？」曰：「安。」「女安則為之！夫君子之居喪，食旨不甘，聞樂不樂，居處不安，故不為也。今女安，則為之！」宰我出。子曰：「予之不仁也！子生三年，然後免於父母之懷。夫三年之喪，天下之通喪也。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재아(宰我)가 말하였다. &ldquo;삼년상(三年喪)은 기년(期年)만 하더라도 너무 오래다고 할 것입니다. 군자(君子)가 3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않으면 예(禮)가 반드시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音樂)을 익히지 않으면 음악(音樂)이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묵은 곡식이 다 없어지고 새 곡식이 오르며, 불씨 만드는 나무도 바뀌어지니, 1년이면 그칠 만한 것입니다.&rdquo; 공자(孔子)께서 &ldquo;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너에게는 편안하냐?&rdquo; 하시니, 대답하기를 &ldquo;편안합니다.&rdquo; 하였다.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네가 편안하면 그리 해라. 군자(君子)가 거상(居喪)할 때에 맛있는 것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으며, 거처함에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니, 네가 편안하면 그리 해라.&rdquo;&nbsp;재아(宰我)가 밖으로 나가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재아(宰我)의 인(仁)하지 못함이여! 자식이 태어나서 3년이 지난 뒤에야 부모의 품을 벗어나게 된다. 삼년상(三年喪)은 온천하의 공통된 상(喪)이니, 재여(宰予)는 3년의 사랑이 그 부모(父母)에게 있었는가?&rdquo;&nbsp;&nbsp;微子:&nbsp;微子去之，箕子為之奴，比干諫而死。孔子曰：「殷有三仁焉。」&nbsp;미자(微子)는 떠나가고 기자(箕子)는 종이 되고 비간(比干)은 간(諫)하다가 죽었다.&nbsp;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ldquo;은(殷)나라에 세 인자(仁者)가 있었다.&nbsp;子張:&nbsp;子夏曰：「博學而篤志，切問而近思，仁在其中矣。」자하(子夏)가 말하였다. &ldquo;배우기를 널리 하고 뜻을 독실히 하며, 절실하게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인(仁)이 그 가운데 있다.&nbsp;子張:&nbsp;子游曰：「吾友張也，為難能也。然而未仁。」자유(子游)가 말하였다. &ldquo;나의 벗 자장(子張)은 어려운 일을 잘하나, 그러나 인(仁)하지는 못하다.&rdquo;&nbsp;子張:&nbsp;曾子曰：「堂堂乎張也，難與並為仁矣。」증자(曾子)가 말씀하였다. &ldquo;당당하구나, 자장(子張)이여! 함께 인(仁)을 하기는 어렵다.&rdquo;&nbsp;堯曰:&nbsp;堯曰：「咨！爾舜！天之曆數在爾躬。允執其中。四海困窮，天祿永終。」舜亦以命禹。曰：「予小子履，敢用玄牡，敢昭告于皇皇后帝：有罪不敢赦。帝臣不蔽，簡在帝心。朕躬有罪，無以萬方；萬方有罪，罪在朕躬。」周有大賚，善人是富。「雖有周親，不如仁人。百姓有過，在予一人。」謹權量，審法度，修廢官，四方之政行焉。興滅國，繼絕世，舉逸民，天下之民歸心焉。所重：民、食、喪、祭。寬則得眾，信則民任焉，敏則有功，公則說。요(堯)임금이 말씀하셨다. &ldquo;아! 너 순(舜)아, 하늘의 역수(曆數)가 너의 몸에 있으니, 진실로 그 중(中)을 잡도록 하라. 사해(四海)가 곤궁하면 천록(天祿)이 영원히 끊어질 것이다.&rdquo; 순(舜)임금도 이 말씀으로써 우(禹)임금에게 명(命)[훈계] 하셨다.&nbsp; 말씀하셨다. &ldquo;나 소자(小子) 이(履)는 검은 희생〔玄牡〕을 써서 감히 거룩하신 상제(上帝)께 아룁니다. 죄(罪)가 있는 사람을 제가 감히 용서하지 못하오며, 상제(上帝)의 신하를 제가 감히 가리우지 못하와, 신하를 간택(簡擇)함은 상제(上帝)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내 몸에 죄(罪)가 있음은 만방(萬方) 때문이 아니며, 만방(萬方)에 죄(罪)가 있음은 그 책임[죄] 이 내 몸에 있습니다.&rdquo;주(周)나라에 큰 베풂이 있으니, 선인(善人)이 이에 부(富)하게 되었다.&nbsp;&nbsp;&ldquo;비록 지극히 가까운 친척〔周親〕 이 있으나 인한 사람만 같지 못하며, 백성들의 과실은 나 한 사람에게 있다.&nbsp;]]></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Tue, 13 Oct 2026 02:10: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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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함께 나누어 먹는 몸  ,  함께 생각하는 몸 ,  그리고  하나되는 감정들</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42c01543f41969aec5417e3684b2dfcfe6d156ec.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695px;"><br>&nbsp; 함께 나누어 먹는 몸 , 함께 생각하는 몸 , 그리고 하나되는 감정들&nbsp;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당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 아테네 청년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아리스토텔레레스의 대답은 간결했는데, 각자의 자기 자신의 습관과 잘 결혼하라고 답을 내놓고 있다.&nbsp;다소 의아스럽게 들릴 수 도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젊은이에 대한 충고의 요지는 좋은 여성을 자신의 외부에서 찾지 말고 자신의 몸에 좋은 습관이 길들여지도록 부단히 노력 한다면 그러한 자신의 몸의 좋은 습관들이 좋은 배후자를 만나도록 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는 것이 었다. 그리스어로 결혼과 습관은 어원적으로 동일한 데, 습관이 한번 우리의 몸에 굳어지게 되면 좀처럼 바뀌어지거나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결혼 또한 습관과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이다.&nbsp;어찌 보면 시시 콜콜하게 여겨 질 수 있는 좋은 결혼의 방법을 아테네 청년들이 당시 대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었듯이 , 아테네의 고대 그리스 인들은 특히 스파르타나 기타 다른 지역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서로 물음을 던지고 물음에 답하는 자유스러운 몸들의 만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이런 즐거운 몸들의 만남은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자유로운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자들과 노예들은 시민들이 어울리는 이러한 몸들의 만남에서 제외된 몸들이었다.&nbsp;&nbsp;어떤 주제가 주어지면 하루 해를 다 보내서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아테네 시민들은 토의하고 또 토의했다. 토론의 귀결점은 토론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연령과 같은 몸의 자연적 차이나 빈 부의 차이와 같은 사회적인 몸의 차이에 제약됨이 없이 토론 참가자들이 오직 논리적인 몸과 몸들의 교류와 만남을 통하여 생성된 논리적인 정합성에 있었다.&nbsp;플라톤의 과 크세노폰의 을 통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어떻게 논리적 몸들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다.&nbsp;그리스어로 이란 말은 함께syn 와 마심 posia 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논리적인 몸들의 기쁜 만남 (향연) 을 크게 나누어서 술을 마시는 주연과 토론으로 구분하고 있다. 결혼식, 생일, 우승자에 대한 축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환송등을 위해 향연이 마련되기는 했고 술과 노래, 춤 , 게임 등이 동반되 었지만 술을 마시는 주연은 향연에서 토론을 위한 전제적 성격의 한부분을 이룰 뿐이다. 플라톤의 기록인< 향연>에서 보면 향연이 있던 그날도 일부 참석자들은 술에 취해,집에 돌아가거나, 쓸어져서 옆에서 자기도 했지만 , 주량이 대단 했던 소크라테스는 참석자 모두가 잠든 새벽 첫 닭이 울때까지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수 있다.&nbsp;&nbsp;소크라테스의 연설 마지막까지 아가톤, 아리스토파네스등이 그나마 남아서 연설을 들었지만 큰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서 풍습 데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마시던 이들은 차차 졸음을 견디다 못해 아리스토파네스에 이어 아가톤도 잠이들고 만다. 특히 술에 골아떨어졌던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와 주고받은 이야기의 내용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nbsp;<br>&nbsp;플라톤의 은 술에 곯아 떨어져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시거나 논리적 토론을 주고 받을수 있는 사람들의 몸들이 향연장소에 있지 않게 되었을 그때에, 엄청난 술에도 끄떡없던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열리었던 장소를 떠남으로서 끝을 맺게 된다. 플라톤의속에 나타난 두주불사인 소크라테스의 엄청난 음주량에 놀라기도 하지만 향연의 목적이 술을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전이나 술을 마시는 동안 그리고 술을 마신 후에도 동일한 논리적 몸을 간직했던 소크라테스에 우리는 더욱 놀라워 하게 된다. 술 취하지 않는 정신, 바로 그가 소크라테스였다.&nbsp;&nbsp;논리적인 몸들의 열린 만남의 場이였던 고대 그리스의 향연은 로고스적인 요소인 상호 토론이 주된 구성요소였지만 ,향연을 시작 하기 전에 향연을 베푸는 주체자가 각각 안내한 자신들의 위치에서 풍요의 신이자 포도주의 신이 디오니소스 에게 포도주 원액을 따라서 땅에 몇 방울 떨어 뜨리는 형식의 헌주를 하고 이 디오니소스 신을 찬미하는 찬가를 부르고 간단한 통례대로의 의식을 거친후 술을 마셨다는 점에서 그리스에서 향연은 일종의 민족종교적인 제례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nbsp;헌주와 신에 대한 찬미 그리고 일련의 예식은 일반적인 향연뿐만 아니라 올림푸스 신전에서의 제례 그리고 크고 작은 신들에 대한 축제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공동의 예식이었다.&nbsp;자유로운 남성 시민들의 몸들의 모임인 향연은 고대 그리스 민속종교의 제례성을 지닌 였다. 고대 그리스이전에 향연과 같은 공동 식사는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도 확인&nbsp;할수 있지만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의 향연은 왕족들만의 모임의 성격의 것이었다. 시민의 영역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엿볼 수 있는 포도주를 따르고 신을 찬미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는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하게 한다.<br>&nbsp;신약 성경가운데 다음 4곳에서 ,, ,에서 직접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 저녁을 묘사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만찬에 대한 서술은 아니지만< 요한복음6장 51절~59절>에서 성찬의 의미로서 만찬의 서술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만찬이 갖는 의미와 몸들의 관계 그리고 감정들을 살펴 볼 것이며 , 고대그리스의 를 구성했던 논리적인 몸들이 어떻게 유대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의 몸(&sigma;&omega;&mu;&alpha; )을 기억하는(&alpha;&nu;&alpha;&mu;&nu;&eta;&sigma;&iota;&nu; ) 를 구성하는 거룩한 몸들이 되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nbsp;플라톤의 에서보면 , 향연 참가자들이 토론에 아무리 치중 한다해도 토론을 하는 중에도 포도주를 계속 마시면서 토론에 참가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소크라테스 또한 충분히 포도주를 마셨으면서도 가문 좋은 집에서 열린 질 좋고 값비싼 포도주를 사양하지 않고 계속 마시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향연은 이틀을 연이어 열리기도 했으며 슬픔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포도주는 언제나 향연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주빈이었다.&nbsp;&nbsp;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들 수 있는데, 연이어서 이틀을 향연을 연다면 향연 참석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어떻게 꾸려 나갔을까 하는 점이다. 작은 모임의 향연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구성요소를 모두 갖춘 향연을 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br>&nbsp;가령 격식을 차려서 전식으로서 허브향이 가미된 포도주를 한잔씩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향연의 두번째 부분인 토론 즉 심포토스에 들어가지전에 까지 시라쿠스출신의 예쁜 아울로스aulos 연주자들을 초대해서 그 연주를 감상한다든지 젊고 멋진 소년 소녀 무용수들을 초청해 칼 돌리기나 덤부링하기 ,무언극등을 감상한다는 것은 향연의 주최 비용을 상당히 높이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nbsp;<br>&nbsp;더구나 플라톤이 전하는 에서의 소크라테스처럼 밤새워 술을 마실 경우 향연을 주최한 집주인은 밤새워 마실 포도주까지 미리 마련해야 했다. 여분의 포도주를 모두 마셨을 경우 주인은 대개 일정량의 물과 포도주 원액을 사람 키만한 항아리인 크라테르 craterd에 섞어 자그만한 술병으로 계속 손님에게 내놓게 하기도 했다.&nbsp;물론 일반적으로 향연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실 음료와 음식들을 동반한 노예에게 향연 장소에 들고 가도록 하고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지만 , 향연에서는 일단은 자신이 가져간 음료와 음식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탁자 밑에 메 달아놓고 주인이 장만한 음식을 먼저 시식하는 것이 관례였고 음식이 남더라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탁자 밑에 움크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던 개들에게 빵과 음식을 뭉쳐서 개먹이로 던져 주는 것이 관례였다.&nbsp;&nbsp;엄밀한 의미에서 향연을 주최하고 손님들을 초청한다는 것은 신분이 자유로운면서도 어느 정도 부유한 아테네시민만이 가능한 일이 였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향연을 주최하는 주인도 격식에 맞추어 향연을 배 풀 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어야 하는 것은 향연을 주최함에 있어서 필요 조건 이었지만 초대 받은 손님들의 경제적 상태가 또한 각각 자신의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흔쾌히 향연에 응할 수 있는 경제적 구조 속에 놓여져 있을 때, 향연은 열려지게 되고 기쁘게 초대된 손님들로 체워 질수 있었다.&nbsp;&nbsp;어떤 의미에서 오늘날과 같은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생을 꾸려 간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가령 제화공이 가죽구두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제화공의 삶이 자신이 만든 가죽구두를 구매하는 사람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은 그 자신이 항상 다른 사람의 욕구를 만족 시켜야 하는 일종의 예속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므로 타자를 위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자신과 타자의 관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노예奴隸에게나 가능한 관계구조였다.&nbsp;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의사 출신이라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던 정서적 거부 반응도 바로 이러한 고대 그리스인인 직업관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특히 남자의 경우 점차 성인이 되어 가면서 가능하면 빨리 가정경제적인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아테네에 비해 집단 군사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던 스파르타는 성인이 된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부끄럽고 불명예스러운것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정서는 아테네 시민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욱 강력했다.&nbsp;스파르타에서 건강하지 않은 남자아이는 출생직후 직후부터 스파르타의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건강한 남자아이들만이 7세스파르타의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건강한 남자아이들만이 7 이후에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전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전사 공동체에서 전사로 자라난 성인 스파르타 성인 남자의 결혼이란, 결혼을 통해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된 부인이 전적으로 가족경제를 중심으로 한 일체의 경제행위를 가장을 대신해 수행하게 됨으로써 스파르타의 남자 시민들은 공적인 영역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하는 일이었다.<br>&nbsp;따라서 스파르타에서 시민이면서 성인인 남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활동을 공적인 영역에 할애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아테네에 비하여 더욱 남성적이며 강력한 군사적 의미를 지닌 정치적 공동체였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 결혼은 시민 남자들의 공적인 활동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통과의례였다.&nbsp;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은, 적어도 자유로운 시민은 타자의 욕구에 종속된 사회적 동물일 수는 없었으며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에 참여 하는 정치적 동물이어야 했다.&nbsp;그런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언급 했을까 ?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언급했다고 알려져서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명구가 된 이 명제는 사실상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황에는 적합하지도 않다. 이제까지의 언급에서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가족 경제의 사적 울타리를 넘어서 공적인 정치적 영역으로 이행하여야 할 아테네에서 시민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동물이 되어야 했다.&nbsp;폴리스 공동체에서 정치적 레토릭( zoon logon ekhon )을 나눌 때 아테네 시민은 공적인 즉 정치적 영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이 아테네 시민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다시 가족 경제의 영역인 사적 영역으로 이행 할 것을 권면하는 듯한 언급을 할 수가 있었을까 ?&nbsp;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었다.&nbsp;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었다.정치학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정치적 동물 zoon politikon 이 아퀴나스의 창조적 오역 ?에 의해 사회적 동물로 전환된다. 라틴문명의 스펙트럼으로 채색된 사회적 동물은 , 고대 그리스에서 공적 영역이 단지 정치적 영역에 한정되었지만 이제 공적 영역은 경제영역까지 그 외연이 확대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살았던 중세 시대에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야 했다.&nbsp;&nbsp;알렉산더 대왕이 어렵게 인도 서부 초입까지 그리스 원정군을 이끌고 다달 았지만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 본령으로 원정을 확대하지 않고 그리스로의 귀환길에 오르게 된 배경에도 원정에 동반했던 장군들의 강력한 반대 논리를 대왕 자신이 논리적으로 설득 할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참작해야 만 한다.&nbsp;정치형태가 공화정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 왔던 그리스 원정 군이 여기서 그리스로 귀환 한다면 다시는 동방원정의 꿈을 실현시킬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격정에 가깝도록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본령의 진입을 설득하지만 장군들을 논리적으로 설득 시킬 수는 없었다.&nbsp;&nbsp;여기서 역사적 가정을 한가지 해서 만약 알렉산더의 그리스 원정군이 아니라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이 티벳의 고원을 넘어 인도의 동부 초입에 이르렀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 문신과 무신들에게 진시황제가 원정의 확대 여부를 물어 볼 수는 있겠지만 일찍이 농업을 기반으로 봉건 사회를 확립한 절대 군주인 진시황은 관료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 일뿐 본의의 의지에 따라 원정의 확대 여부를 결정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nbsp;<br>&nbsp;동양의 왕들은 논리적인 몸들이 이미 아닌 서열화된 최고의 몸이었다. 가령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조선왕조 시대에도 관료들과 군왕사이에 국가적 업무를 위시한 크고 작은 사항에 관한 토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논리적 몸들의 만남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니었다. 조선 왕조 시대에 군왕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과거 이전세대에 지금 되고 있는 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왕을 관료가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었다.&nbsp;<br>&nbsp;역사적 기록의 범위는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포괄 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를 비롯한 사마천의 사기, ,를 포함한 일체 역사적 기록물을 총괄 했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관료가 되기 위한 학문적 연마의 기간은 대단히 길고 험난했고 방대한 양의 중국 역사서를 비롯한 13경에 관한 숙지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관료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학문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군왕들이 등극했던 시기를 고찰해보면 정치와 군사,문화 면에서 여타의 왕들이 치세했던 시기에 비해 월등이 뛰어 났던 점을 확인 할수 있다.( 세종대왕, 영조,정조)&nbsp;&nbsp;유교적 이념의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연령 또는 여성 남성이라는 자연성의 몸과 신분이라는 사회적 몸들을, 모두 추상화하여 논리적 몸들로 전환 시킬수 없었다. 유교적 공동체 내에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들은 절제되고 순화되어서 가족관계를 비롯한 제반 사회적 관계의 적절한 연관속에서 들어 나야만 하는 예禮인 것이다. 주자성리학의 한국 철학적 담론의 요체인 사단 칠정론四端 七情論 도 , 결국 성性을 지닌 우리의 마음( 心 )이 자기 자신을 비롯한 공동체내에서 어떻게조 화로운 감정(情)들의 상태로 드러나는냐는 문제를 화두로 하고 있는 철학적 담론이라 할 것이다.&nbsp;유교적 가치이념이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의 몸이 논리적인, 로고스의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특정한 관계범주( 가족, 직장, 혈연, 지연)의 구체적인 상황들에 놓이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상하의 구별관계의 규정속으로 편입되도록 구성원을 배치한다. 이러한 상하관계의 구조 속에서는 항상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전체성의 부분으로만 자신의 개별성을 인식하려는 행동을 보인다.&nbsp;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와 같은 유교적 상하관계에 고착되었는지를 할 수 있는 퀴즈를 풀어보자. 다음 퀴즈를 읽고 답을 말하되, 문제를 읽은 뒤 2초 안에 답을 말해야 실험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nbsp;&nbsp;서대문구 홍은동에 살고 있는 21세의 훤 칠 한 키의 약간의 탈모 증상이 있는 대학생 김 성만은 중간 시험 기간이어서 대학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공부할 생각으로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마침 언제나 아침 이른 새벽에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김성만은 녹색 보행 신호가 들어와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 음주 운전 단속을 피해 역주행하던 화물차의 앞 범퍼에 치여 중상을 입고 근처 대학 병원 응급실로 운송되어 갔다.&nbsp;&nbsp;응급실에서 신원을 확인받고 응급 수술을 기다리는 김 성만 학생에게 수술을 준비하던 키가 큰 외과의사가 그를 알아보고는 정신없이 뛰어와서는 비명을 지르듯이``아이고 이게 웬 일이냐 ! 내 아들 성만아&hellip;. 일찍 학교 도서관에 &hellip;간다더니..``하고 김성만 학생이 누워 있는 침대를 붙잡고 놀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 했다.&nbsp;&hellip;&hellip;&hellip;&hellip;&hellip;&hellip;.,&nbsp;자 이 외과 의사는 누구 일까&nbsp;?&nbsp;&nbsp;대답은 여러 가지 일수 있다. 김성만에게 달려온 외과의사는 키가 크고 의사 가운데에서도 힘든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 의사이므로 남자일 것이고 남자라면 당연히 김성만의 아버지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 다른 추론은 통상적으로 의사 그것도 외과 의사는 담당 할 수술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매일같이 이른 새벽에 출근하지 않으므로 김성만의 아버지가 외과 의사일 수는 없으며, 그렇다면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유일한 관계는 어머니밖에 없음으로 이 달려온 외과 의사는 어머니일 수 있다.&nbsp;외과의사가 자기 아들을 잘 못 오인 할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배제 하기로 한다.&nbsp;통계적으로 보면 외과 의사의 특성상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의사에 관한 통념상 외과 의사를 김성만의 아버지로 대답하는 경우가 어머니라고 대답하는 경우보다 월등이 많은데 , 이것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gender가 사회적 통념에 의하여 어느 특정한 직업군에 자연스럽게 연관되거나 표상되는 기호 체제가 존재한다는 반증이다.&nbsp;]]></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21:30:1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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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논개의 몸에 대한 담론</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3</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382933860860e0fe4704cca75c3f82ce107d586f.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592px;"><br>개체로서의 한 인간의 지적 능력을 통계화하고 수량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던 하나의 개념 장치였던 지능지수 만큼이나 1990년대에 미국에서 고안되었던 감성 지수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과 흥미의 진전은 감정의 문제가 개별적 개인의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으로 까지 전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 한다고 할 것이다.&nbsp;우리에게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면서 자연적인 것이다. 일상의 삶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또는 정서 반응을 우리는 모두 의식화 해 낼 수 없다. 감정은 언제나 직접성을 띄는 것이어서 일정 시간의 지속성을 지닐 뿐 특별히 의식에 의해 표상화 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감정은 사라진다 . 한 달 전에 점심시간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미각이나 포만감 , 그리고 함께 식사를 했던 지인들과 나누었던 즐거운 대화를 생생히 그 감응 그대로 기억 할수 있을까 ? 특별히 기억해야 할 추억거리가없다면&nbsp;무엇을 먹었는지 조차 희미 할 것이다.&nbsp;의식으로 모든 감정이 환원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일상속에 항시 느낌이나 정서,혹은 감정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있다.&nbsp;우리들 자신조차 사실 자기자신을 사유나 이성보다 더 직접적으로 원형적인 자아로서 감정이나 느낌,혹은 정서를 통해 만나고 교감을 하며 감응한다.&nbsp;자기 감정이 그것이다.&nbsp;오늘은 왠지 활력이 넘치고 느낌이 좋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유를 알수 없지만 지치고 생기가 없어서 쉬고 싶을 때가 있다.&nbsp;알수 없이 느낌이 좋고, 이유없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우리신체의 전체적인 자연적 반응을 의식이 하나의 단일한 표상으로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 몸에서 일어난 직접적이고 자연적이며 전체성으로 일어난 하나의 사태를 기분 좋은 느낌이나 기분 나쁜 느낌으로 단순하게 표상 을 하지만 이렇게 표상된 느낌이나 감정이 외적 원인 인지 내적원인지를 의식의 주체인 자아가 확인 할 수가 없는 것이다.&nbsp;의식의 주체가 좋은 느낌,&nbsp;또는 나쁜 느낌의 인과 관계를 확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느낌자체를 인식론적으로 부적절 한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부정 될수 없다.이와 반대로 우리들의 자아는 원인과 결과 관계가 확인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nbsp;또는&nbsp;라는 수식어를 첨가해서 느낌이나 감정을 표상하는 것이다.어떤 경우든 우리들의 자아는 우리신체 상태의 직접성을 표상으로 매개한다.&nbsp;매개된 직접성으로서의 감정은 이제 술어가 된다.&nbsp;나는 기분이 좋다,혹은 나쁘다 의 서술이 그것이다.&nbsp;의식으로 표상하는 자아 없이는 감정이나 정서,&nbsp;혹은 느낌은 성립 할수 없다.&nbsp;단세포 동물인 아메바를 얇은 실핀 같은 것을 이용해 툭툭 건드리면 고통의 감정을 느낄까 ? 뾰족한 물체가 아메바의 몸에 닿는 순간 아메바는 이 불쾌한 ? 자극의 반대 반향으로 헤엄을 칠것이다. 차가운물을 아메바가 있는 수조에 붓는다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할것이며 동일한 온도라면 먹이가 좀더 풍부한 농도가 짙은 곳으로 유영 할 것은 분명하다.아메바는 어떻게 진동이 심한 곳보다는 안전하고 조용한 곳으로 이동 할수 있을까&nbsp;?&nbsp;주지하다시피 단세포인 아메바는 뇌가 있을 리 없으며 신경도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바의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반응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반응을 표상할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느낌이나 감정이 성립 할수 없다. 반응은 있지만 느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바는 오직 아메바라고 하는 자신의 몸만을 지닐 뿐이다.&nbsp;감정은 우리 몸에서 일어난 자연적 신체 상태를 의식이 하나의 표상으로 산출한 것이기 때문에 몸의 감각적 변화를 동반한다.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분노, 슬픔, 우울함, 지루함, 사랑, 가족애, 혐오,수치, 질투,연민, 신뢰 등의 다양한 감정들의 표현은 특별히 감정훈련을 받은 연극 배우 같은 직업군을 제외한 일상의 사람들에게 서는 신체의 변화로 여과없이 나타 난다.&nbsp;직접성을 띄는 감정의 표현들은 비언어적 의사소통 행위로 들어난다, 손짓,발짓,몸짓등의 제스춰들이 그것이다. 일련의 사례들의 분석은 비언어적 의사소통 행위가 무의식적인 내적 감정상태를 독해해 낼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nbsp;신체의 자연적 상태에서 일어나고 비언어적 의사소통행위를 동반하는 감정,또는 감정의 표현은 감정표현의의 담지자인 주체나 객체모두를 포괄하는 지금 사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이다.&nbsp;감정의 발생이나 그것에 대한 인지가 직접성의 형태를 지닐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감정현상은 우리들의 신체,곧 우리들의 몸을 통해서 , 몸에 의해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몸의 표현인 감정은 몸에서 일어난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인 동시에 즉각적으로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도 읽혀지고 해독되어져타자의 감정적 반응을 야기시킨다는 의미에서 감정 그 자체는 하나의 행위이다.&nbsp;사적영역에서나 공적영역에서 우리들은 우연적인 방식이든 필연적인 방식이든 수많은 감정을 지닌 몸들을 마주친다.우리 몸은 이렇든 세계내에 열림의 형태로 주어져 있으며,타자들은 나의 몸으로부터 나는 타자의몸으로 부터 감정들을 해독한다.&nbsp;공동체의 구성은 공동체의 이념이나 목적,합목적성과 같은 차가운 지식으로만 완결되지 않는다.&nbsp;공동체 구성원간의 정서적,혹은 감성적 감응이 완결성을 이룬다.모든 생명체를 비롯해서 인간은 자연적인 몸이라는 육체성을 전제로 다른 몸들을 만난다.&nbsp;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nbsp;사유의 주체,&nbsp;초자아.&nbsp;이드 는 항시 나의 몸을 전제로 생각하고 추상하며,&nbsp;욕망한다.&nbsp;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몸이며 이미 몸이었다.&nbsp;어떤 공동체 안에서 한 구성원이 논리적으로 정연하고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누구도 부정할수 없도록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구성체 내의 다른 구성원에게 주장한다고 해도 양자간의 정서적 감응이 없다면 죽은 시체처럼 차가운 사실의 전달일 뿐이다. 정서적 감응이없는 몸들의 만남만이 이뤄지게 되면 자연적인 몸을 지닌 우리들의 몸들은 피곤하며, 불쾌하다. 아메바를 비롯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보다 쾌적하고 좋은 몸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을 지니고 있으며 항상성 그 자체의 활동이 바로 몸이다.&nbsp;&nbsp;그리스신화에서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사랑에 빠져 구애를 하게 되고&nbsp;아폴론의 예언의 능력을 승락조건으로 받기로 하고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구애를 허락한다. 그러나 예언의 능력만을 챙긴체 사랑을 주지않는 카산드라에게&nbsp;화가 잔뜩 난 아폴론은 단 한번의 입맞춤으로 카산드라에게서 설득력을 빼앗아가 버린다. 얼음처럼 투명하게 별빛처럼 뚜렷히 카산드라는 예언을 할수 있었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게 된다. 키산드라의 신화는 동감이나 사랑, 기쁨따위의 정서적 감응없는 사실체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현실성이 없음을 반증한다. 실지로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사람들은 카산드라의 사실 전달로서의 예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nbsp;트로이 사람들은 카산드라가 또는 고 말하고 있는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감응이 없다는 이유로 해서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공동체에서 정신적으로 추방 당하고 있다.&nbsp;감정을 이해 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은 철학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주지주의적 관점에서 감정은 사유나 이성에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파악 되어 져 왔다. 합리적인 로고스인 이성에 대척점을 지닌 감정이 몸과 결합되었을때는 몸을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동서양의 역사속에서 우리는 손쉽게 발견한다. 인류의 역사는 몸이 지니고 있는 에로스를 통제하고 제어 하고 로고스를 통하여 문명을 만들어 온것이다. 감정의 통제는 몸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수 없다.&nbsp;누가 감정을 통제하는가 ? 그래서 결국 누가 몸을 통제하는가 ?&nbsp;감정을 통제하려는 역사는 인간에 대한 몸을 통제하려는 역사와 동일하다.&nbsp;감정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nbsp;감정의 역사성은 감정 표현의 의미에서 표현된 몸의 역사성이다.&nbsp;어떤 감정은 허용되어 지고 어떤 감정은 금지되며,&nbsp;또 어떤 감정들은 처벌되어 지거나 죄악시 되어진다.&nbsp;감정이나 감정의 표현이 한 사회 내에서 형성되어지고 생성되며&nbsp;,&nbsp;어떤 특정 감정들은 강화되며,&nbsp;약화되기도 한다.&nbsp;감정 표현의 양태 또는 몸의 표현의 양태는 그 개인이 속한 사회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nbsp;감정표현의 양태는 우리 몸이 지닌 직접성을 지나 상징화 되고 추상화 되어진다.&nbsp;논개, 그리고 그녀의 몸 ,음탕한 몸에서 의리 있는 몸으로&nbsp;일상의 일 가운데 너무 나도 잘 알려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어져서 오히려 바르게 인식되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하는데 논개에 관한 이야기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 까 한다.&nbsp;조선왕조시대에 기생,&nbsp;그것도 관비는 노비와 신분상 차이가 없었다.&nbsp;조선왕조시대에 기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은 전체 인구의&nbsp;0.5&nbsp;퍼센트를 상회할 정도로 많았다.논개이야기를 에서 기록하고 있는 유몽인도 임진왜란에 목숨을 잃은 기생들이 논개외에도 부지기수로 많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논개의 죽음도 여러 다른 기생의 죽음과 외면적으로 고찰한다면 큰 차이가 없다.&nbsp;논개를 기타 다른 기생의 죽음으로부터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점은 왜장을 남강 위의 바위에서 부둥켜 안고 떨어져 죽음으로써 왜장으로부터 정조를 지켰으면서 결과적으로 유교의 덕목인 나라에 대한 충성됨을 체현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지킨 몸에서 국가를 지킨 몸으로 몸의 외연이 확장된 것이다.&nbsp;조선시대에 기생은 연회에서 흥을 돋우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하는 직업군의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관비는 통상적으로 지금 시간으로 아침 9시경에 소속된 관에 나아가 출근을 확인받아야 했으며 연회의 특성상 퇴근의 확인은 없었다. 진주의 관기였던 16세기 말경에 논개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nbsp;논개는 전라도 장수의 현감을 지냈던 최경원을 따라서 장수에서 진주에 오게 된 것으로 미루어 최경원이 논개를 아꼈던 것으로 여겨진다.&nbsp;어떤 문헌에는 논개가 진주병사였던 최경원의 소실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지만 신분이 관기였던 논개가연회에서 다른 관원이나 사대부를 접대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기생 혹은 창기에 대한 사대부들의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이었다. 정조때 19세의 정약용은 화순에 현감으로 있던 그의 부친인 정재원이 예천 군수로 전보되자 자신의 처와 함께 진주를 방문하고 그 감회를 와 같은 시를 남겼고 , 정약용의 장인이자 논개의 사당을 정조 3년에 처음으로 보수하는 책임을 맡았던 홍화보의 부탁을 받아서 를 지었는데, 이러한 속에서 기생들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을 엿 볼수 있다.&nbsp;`` 창기 같은 여인들이란 어려서부터 음탕하고 지조 없는 여인들로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성품이 허량하여 그 마음속에는 남정네라면 모두 지아비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부부간의 도리도 모르는데 어찌 군신 간의 의리를 알 수 있겠는가 ? ``&nbsp; 확인할 수 있는 정약용의 기생에 대한 일련의 판단들을 조선 왕조 당대의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간주해도 다른 무리는 없을 것이다.&nbsp;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설적이며 부정적인 직업윤리를 가진 것으로 간주 되었던 진주관비 논개는 왜장을, 그녀 자신이 몸을 섞었던 그 많은 다른 남자들의 몸들의 범주에 귀속시키 못했을까 ? 몸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죽음을 결심할 정도의 격한 감정에 논개를 다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nbsp;이러한 궁금점을 풀어줄 실마리를 지금은 필사본으로만 내려오는 유몽인의 에서 엿볼 수 있다. 논개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것이 선조 26년 즉 1593년 6월 로, 2차 진주성싸움이 패전으로 끝난 직후였고 이 1621년에 쓰여져서 약간의 시간의 간격이 있기는 하지만 전해오는 많은 논개에 관한 문헌 가운데 유몽인의 기록은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진주성 함락후에 당시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 위문하며 때에 따라서는 전몰 가족을 조사하고 포상하는 업무를 맡았던 무군사 직책을 떠맡아서 세자와 함께 삼남 지방에 내려왔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유몽인은 업무의 일환으로 진주에 내려와 논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노인이나 생존자들에게 청문하여 채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nbsp;그는 에서 논개의 죽음을 국가의 신성한 교화를 입은 백성으로서의 충절의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선 건국의 이념이었던 주자 성리학적 유교이념이 담론의 생산자인 사대부들은 물론 조선왕조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중 가장 기저층이자 사실상 주변인에 머물렀던 관노비에 해당하는 관기에까지 삼투되여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16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이념적으로 완전히 건국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로소 16세기 조선을 구성하던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군주로부터 천민,또는 관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려가 아닌 조선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사실상 2세기의 적응 기간을 거쳐 구성원들에게 체화되었다. 실질적인 조선건국이 실현된것이다.&nbsp;&nbsp;조선의 유교 이념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몸과 몸들에서 일어나는 감정들과 그 감정들의 변용을 통제하고 허용하며 금지하고 구성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권력이 되었다. 같은 공동체 내의 익명의 다른 몸들에게는 허락되는 몸이지만 왜장에게만은 허용될 수 없는&nbsp;배타적인 몸이 논개의 몸인 것이다. 허락되어지는&nbsp;몸이었던 논개의 몸은 절개라고 하는 유교적 도덕 감정으로 체화된 몸이었다. 물론 왜에 대하여 조선을 구성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 우월감이 논개의 죽음의 그 기저에 전제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nbsp;정약용은 에서 마치 그 자신이 논개가 강물 위로 목숨을 던지던 계사년 6월 남강에 있었던 것처럼 논개를 애절하게 추모한다.&nbsp;`` 부인들은 천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는 여인도 있고, 의리상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은 여인도 있어서 이들을 절節이니 열烈 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그저 자신의 목숨만을 끊었을 뿐이다. 계사년에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했을 때 어여쁘고 어린 의로운 한 기녀가 왜장을 유인하여 강위 바위에서 춤추다가 춤이 서로 어우러졌을 때 왜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중략~&nbsp;이 어찌 열열한 현부인이 아니겠는가 한 연약하고 어린 여인이 마침내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 나라에 보답 할 수 만 있었다면 임금과 그 신하의&nbsp;義理가 세상에 밝혀 졌으니 진주 성의 패배쯤은 근심할 것 없었다.&nbsp;이 얼마나 장쾌한가&nbsp;! ``&nbsp;그러나 정작 죽임을 당한 왜장은 논개의 몸과 감정을 완전히 잘못 해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사도를 근간으로 한 당시 왜는 전쟁에서의 승리는 전승을 올린 지역의 일체의 것이, 즉 가축으로부터 토지,가옥,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전승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미 결혼한 여인이라도 사무라이는 전리품의 일환으로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해서 사서 삼경이나 십삼경이 일찍이 왜에 소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승려들이나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 층에서 교양의 함양차원에서 읽혀 정도 일뿐 명나라나 조선처럼 유교이념의 확립차원에서 과거 시험을 통한 지배 이념의 재생산 의 체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왜와 조선 사이의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볼 때,우리는 왜장이 논개가 기생의 신분이든 이미 혼인한 여념집의 부인되었던지에 관계없이 논개의 몸을 취할수 있다는 몸에 대한 자기만의 해독 코드를 지녔음을 쉽사리 추론해 볼 수가 있다. 몸과 그리고 몸들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을 파악하는 해독 코드들의 불일치가 가져온 문화적 타살인 것이다.&nbsp;왜장의 죽음은 당시 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풍신 수길에게 보고되고 ,전쟁터에서의 전사가 아닌 일개 기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작성해 두었던 출병자의 명부에서 왜장의 이름은 삭제되게 된다.&nbsp;&nbsp;1593년 계사년 6월에 몸을 던진 논개의 몸은 오늘날 박종화의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節槪 와 忠의 義理를 상징화된 몸이 되었지만 논개의 몸에 대한 상징화는 광해군을 비롯해 인조,경종, 영조, 정조, 심지어 고종에 이르기까지 논개사후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300여년에 걸친 장구한 상징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nbsp;오늘날 진주 남강에 있는 논개가 왜장과 함께 자진한 바위에는 義巖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전각은 임진왜란때 함경도 의병장이었던 정문부의 둘째아들 정대융이 새긴것으로 추정된다. 글을 잘 짓고 붓글씨의 필법도 뛰어났던 정대웅은 자신의 부친인 정문부가 인조 2년 정월에 무고로 화를 당하자 부친의 권고를 따라 경상도 진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게다가 촉성루에 의암기를 지었던 오두인이 경상우도에 관원으로 파견나왔던 참에 진주성에 들러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전각이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의암기를 지었을 때가 효종 2년 1651년의 일이므로 적어도 1651년이전에 의암이라는 전각이 바위에 세겨져야 하므로 정대웅이 진주로 거처를 옮긴 인조 3년경 1625년경을 바위에 전각된 시점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듯하다. 논개 사후 32년이 지난 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이 두 글자는 조선 왕조에 걸쳐 논개의 몸이 상징화되는 데에 중요한 시발점이자 계기가 된다.&nbsp;논개의 몸과 그녀의 몸에 체현되어 있는 절개와 의리의 감정들을 성리학적 이념으로 채색된 몸과 감정들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조선 사회 사대부들에 의해 부정당하거나 거부당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 4년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자 국가차원에서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미담사례,즉 충신,효자, 열녀들을 읍 단위까지 홍문관 부제학등으로 하여금 채록하도록 하고 그 채록의 결과는 광해군 9년에 < 동국신속삼강행실도>로 발간 된다. 미담사례의 채록은 한양을 제외한 전국 전역에 걸쳐서 사대부나 일반 서민 ,또는 공노비나 관노비를 막론하고 충,효 ,열이 현저한 사람을 보고하게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관기였던 논개를 비롯한 여러 기생들이 거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기는 그 신분이 천박하다는 이유로 수록되지 못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논개마저도 수록되지 않았다.&nbsp;&nbsp;을 지었던 유몽인이 논개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이< &lt;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담당하는 실무자는 아니었지만 광해군즉 왕명으로 인해 의 발문을 작성했다. 따라서 추정컨데, 유몽인이 논개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지만 , 아무리 논개라고 하더라도 당시 사대부 관료들에게서 논개의 몸과 감정은 단순히 음탕한 여자의 몸과 감정 그 이상의 것일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유몽인 자신이 인조 2년에 화를 당함으로써 논개의 몸의 상징화는 역사적인 잠복기를 맞이해야만 했다.&nbsp;조선조에서 논개의 몸과 감정이 절개와 충의 의리를 지킨 의로운 기생으로 공식적으로 상징화되는 계기는 논개가 죽은 후 128년이 지난 1721년 경종 1년에 일어나게 된다. 광해군때 음탕한 몸으로 상징화 된 관기의 몸이 어떤 이유에서 절개가 있는 몸으로 또는 의리가 체화된 몸으로 전환되었을까 ? 사대부들이 관기에 대한 부정적 윤리관을 철회했거나 아니면 관기들의 몸이 더 이상 음탕하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었을까 ?&nbsp;논개사후 32년이 지난 인조 3년경을 전후 해서 진주 지방에서는 양반과 서민 사이 에서는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인정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미 義巖이라는 전각 된 논개의 몸은 절개와 의리를 지킨 몸으로 상징화되어 있었다. 연례적으로 논개에 대한 제례가 거행되었고 적어도 진주 지역에서 비록 신분이 관기였지만 절개와 의리를 지켰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다.&nbsp;&nbsp;성리학자였던 정식과 박태무도 논개에 관한 글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명암 정식과 서계 박태무는 진주 지방 출신의 남명 조식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라는 사실이다. 지역적 연고와 학맥을 이 두 사람은 같이한다. 당시 진주 지방의 유림들은 논개의 몸이 진주라고 하는 지역에서만 상징화되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nbsp;&nbsp;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독특한 정치적 상황의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재가 논개의 몸이었다. 조선초기에 영남 출신의 관료의 절반이 진주출신이라는 말이 유행 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진주였고 의 기록에 의하면 경상도의 진주전라도의 남원, 그리고 구례가 전국에서 최고의 기름진 땅으로 일컬어 질 만큼 진주의 농업 생산력은 당대 최고였다. 진주는 17세기와 18세기에는 田結數가 2배로 늘고 수확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는데, 오늘날 방죽에 해당하는 제언 (提 堰) ,보(洑) 의 개수가 경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 1.5배나 더 많았다. 이러듯 튼실한 물적인 토대와 생산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해온 진주지방의 양반 지주층이었지만 인조반정 (1623 )을 거치면서 大北파의 이념적 지주인 남명학의 본향이었던 진주는 심한 타격을 받았다. 더욱이 영남 지방에서 굉장한 지지를 받았던 이인좌의 난 ( 1728년 )이후에는 어떻게 하든지 역모의 사상적 뿌리를 남명학에서 찾으려는 분위기가 조정에 팽배하게 된다.&nbsp;가령 1740년 문신 이천보는 영조와의 대화속에서 ,조식 뿐만 아니라 조식의 뒤를 잇는 정인홍등을 경상도 우도,즉 진주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그 기질이 순수하지도 못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면서 같은 경상도라고 해도 이황이 경상 좌도 출신이라서 경상 좌도 출신 사대부들이 무신년 (1728년)에 난을 일으키지 않았으며,그리고 글을 잘짓고 배움이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놀랍게도 영조는 이천보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여 옳다고 여기고 있다.&nbsp;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인조 반정(1623 )으로 참형을 당하고 그 신원이 결국 회복되지 않은 정인홍의 고향은 경상우도인 진주가 아니라 경상좌도인 합천이었다. 엄연히 고향이 합천인데도 정인홍의 스승 조식의 고향이 진주라는 이유만으로 정인홍의 사상적 고향을 진주로 간주해서 진주를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nbsp;물론 1796년에 조식에 대한 제사가 국가적으로 인정되고 영조와 정조 시기에 진주를 포함한 영남 지역의 인재 등용이 논의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경상 우도 진주는 기피 지역이었다. 진주는 경제적으로 최적화된 환경을 지녔지만 중앙 정치권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정치적 격리와 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경상 우도 진주가 역모의 기운이 만연하는 逆 鄕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유림들이 사는 忠 鄕으로 상징화되어야만 길만이 있을 뿐이었다.&nbsp;진주 유림들의 오랜 바람과 관심은 논개의 몸과 그녀의 절개와 의리의 숭고한 감정들이 조정으로부터 언제 어떻게 공식적으로 상징화되느냐 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주 유림들이 누차 공식적인 상징화를 시도 해 보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번번히 좌절 되었는데, 경종 원년5월에서 2년 11월 까지 경상 우병사로 진주로 내려왔던 최진한을 통해 조정으로부터 논개의 몸과 감정들은 절개와 충성스러운 의로운 기생으로 공인 된다.조선 조정은 논개의 몸을 공식적으로 義 妓로 확인해주는 것이다.&nbsp;경종 1년 1721년의 일이다. 최진한이 논개가 절개와 충의 의리를 지킨 기녀라는 사실을 진주 士 民 의 요청를 빌어 우병영에 제출했고 그후 비변사의 협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논개가 지니고 있는 여러 이미지가 구성 될수 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의 능력의 탁월함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보다는 최진한 자신이 집권 세력과 상당히 밀접하고 밀착된 관계에 있었던 점이 더 크게 작용했었다는 점은 조선시대의 정치의 배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논개의 몸과 감정들은 더 이상 음탕한 몸과 감정들이 아닌 의리 있는 몸과 감정들이 된 것이다.&nbsp;&nbsp;논개의 몸과 감정들이 사적인 영역인 자신을 지키는 몸과 감정으로부터 공적인 영역의 몸인 나라를 지키는 몸과 감정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는 논개의 몸과 감정들이 조선사회의 정상적인 사회 질서들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의 아마존 여전사처럼 무기나 창을 들고서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군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여성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희생의 방식으로 유교적 가치를 완성하고 전달했다는 점이다.&nbsp;논개의 몸과 감정들이 성리학적 질서 속으로 편입 될 수 있었던 세번 째 요소로는 유교적 이념의 척도를 적용하지 않은 논개의 몸과 감정들에 대학 해독가능성을 완벽히 차단 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논개의 몸과 감정들에 관한 상이한 해독도 가능하다. 숭고한 성리학적 이념을 동원 할 필요 없이,남강의 한 바위위에서 그저 단순히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발생적 자기 방어행위 일수도 있었고 , 아니면 전라도 장수에서부터 논개 자신이 모셔 왔던 최경원이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촉석루 밑으로 투신하여 산화 했고 치열 했던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상당수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됨으로써 논개라는 개인이 실존인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 것이 그녀의 죽음에 더욱 근본적인 동기일수가 될수도 있었을 것이다.&nbsp;&nbsp;그러나 이 두 가지의 상이한 개연성은 권력이 논개의 몸과 감정을 통제 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권력은 구태여 논개의 몸과 감정들을 상징화 할 필요가 없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해독되어 코드화 된 논개의 몸과 감정들이야말로 진주 지방의 유림이나 중앙 정치 세력 모두에게 필요한 몸이며,감정들인 것이다.&nbsp;&nbsp;유교의 이념으로 일단 코드화 되어진 논개의 몸과 감정들은 모든 물체가 관성을 지니듯 논개의 몸과 감정은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각색되고 구체화된다 . 논개가 애초에 왜장 한 사람과 춤을 추다가 부둥켜안고 남강으로 투신했지만 . 에 의하면 한 명으로는 부족한지 동시에 2명을 안고 투신하고 있다. 최경원과 논개의 관계도 처음에는 최경원이 그저 논개를 눈여겨보는 관계에서 사랑하는 관계 ( 愛)가 된다. . 박태무의 에서는 논개가 가야금을 퉁기며 노래를 하고 있다.&nbsp;<br>&nbsp; 이름이 알려 지지 않았던 왜장의 이름도 가토 키요사마(1562- 1611)로 언급되다가 1908년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이며 민속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게야 무리 로쿠스케로 알려지기도 한다. 장수 현감으로 있던 최경원을 따라서 진주로 논개가 옮겨 왔다는 정황을 들어 논개의 고향을 장수라고 추정하다가 < 호남읍지1872>에서는 논개의 고향은 막연히 장수가 아닌 임현내면 풍천으로 구체화 된다. 에는 논개의 고향이 임현내면 풍천에서 더욱 구체화되어서 대곡 주천리로 일컬어 지며, 1954년에는 지역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 원래 논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이 되며 朱라는 성까지 생기게 되어서 이름 주 논개가 된다.구한말에 편집된 에서 논개는 장렬히 산하한 女忠臣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고종 9년까지 논개의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br>]]></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20:52: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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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상언어와 분석철학의 전통</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2</link>
			<description><![CDATA[<br><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1d9bd6216588f1809404dde9fb90f9c34524e4f6.jpg" class="fr-fic fr-dib"><br>내가 철학을 처음 배우던 시절에는 한국 사회의 80년 대 분위기 때문에 주로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 들어왔고, 다음에는 시대와 현실을 담은 헤겔 철학이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가 마음내 변혁 철학의 심장과 브레인 역할을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이 한 시대를 휘어 잡았다. 이런 시대 분위기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한다는 것은 너무나 반 시대적이어서 특별히 관심 있는 학생을 제외하고서는 거의 외면 당했다. 비판적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K. 포퍼의 철학 조차도 완전히 무시당했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서 내가 배운 철학은 프레게와 러셀과 논리실증주의자 그리고 전후기 비트겐슈타인 등이었다. 이들 철학은 일단 분석적이고 명쾌해서 접근하기가 쉬웠다. 덕분에 나도 석사 3학기 때 까지는 비트겐슈타인 후기 철학을 가지고 논문을 쓸까 고민을 했었다.분석 철학은 영미 철학의 전통에서 성장한 철학이다. 영국의 경험론은 대체로 반 형이상학적이고 반목적론적이었다. 대륙의 합리론자들이 실체가 무엇이고, 그것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니면 라이프니츠 처럼 수도 없이 많다고 하는 지를 가지고 논쟁을 했다. 로크는 적어도 우리 정신 밖의 실체인 X를 인정했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서는 불가지론(agnoticism)의 입장을 취했다. 버클리는 그것을 지각적 표상으로 환원했다. 그의 유명한 &ldquo;존재는 지각이다&rdquo;(Ecce est percipi)라는 명제가 그것을 말해준다. 데이비드 흄에 오면 이런 실체는 단순히 인상들의 다발(Bundle of impressions)로 간주된다. 불멸의 영혼이라는 실체는 감각의 다발이고, 뉴턴의 기계론적 인과법칙도 반복적 습관에서 이루어지는 연상의 법칙으로 주관화된다. 이런 면에서 데이비드 흄은 근대 경험론이 갈 수 있는 막다른 골목까지 간 셈이다. 20 세기의 &lsquo;논리 실증주의&rsquo;(Logical Positivism)는 흄의 20세기 버젼이나 다름 없다.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역할을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애매하고 모호한 말들로 인해 철학의 문제들이 생긴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추방한다면 철학의 전통적인 문제들도 해결될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정신을 추종한 비엔나 써클은 세상에는 단 두 가지의 명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lsquo;의미있는 명제&rsquo;와 &lsquo;의미없는 명제&rsquo;가 그렇다. 수학과 논리학의 명제들, 그리고 경험적 검증이 가능한 명제들이 전자에 속하고, 가치 명제나 형이상학적 명제는 논리적인 명제도 아니고 경험적으로 검증이 되는 명제도 아니기 때문에 후자에 속한다. 비엔나 써클의 철학자들은 검증이론(Verification theory)의 이러한 분석을 통해 철학의 문제를 다 해결했다고 생각했다.사실 이러한 도발적인 주장들이 철학적 문제들을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들이 끼친 공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비엔나 써클(Vienna Circle)의 일원인 루돌프 카르납은 그 당시 대단히 떠 받들어졌던 하이데거의 의 모호하고 애매한 명제들을 하나 하나 까 뒤집으면서 분석 비판을 시도한 적이 있다. 철학을 형이상학의 모호한 구름 위에서 지상의 밝은 빛 한 가운데로 끌고 내려오려 한 것이다. 물론 형이상학의 전 체계를 낱낱의 명제들로 해체해 명제 단위로 비판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하지만 카르납의 작업은 적어도 비판적 언어 철학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준 셈이다. 이런 전통이 미국으로 건너가 분석 철학(Analytic Philosophy)의 초석을 만들었다.(Logico-Tractatus)에 나타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39;그림 이론&#39;(Picture theory)은 언어와 세계의 대응을 통해 명제의 의미를 단순화 시켰다. 반면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일상 언어의 문맥에서 이루어지는 언어의 쓰임(usage of language)을 통해 언어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은 저항이 없으면 더 빨리 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진공 상태를 가정했는데, 오히려 더 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들은 대륙의 철학자들처럼 사변의 전체로 얽혀 있지 않고, 일상 속에 살아 있는 언어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철학적 작업이 무엇인 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삶과 현실에서 유리된 추상 개념들을 현란하게 구사해야지만 철학을 하는 거라는 전통 철학의 모호한 환상을 확실하게 깨버린 것이다.내가 헤겔 마르크스의 철학을 할 때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차원에서 영미권의 분석 철학을 무조건 백안시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일상 언어에 기초한 &#39;에세이 철학&#39;을 하면서 분석 철학의 정신, 그들이 사용하는 일상 언어, 삶에 기초한 철학 등과 같은 분석 철학의 정신이 에세이 철학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철학의 정신을 살려서 삶과 시대의 문제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굳이 대륙권 인가 영미권 인가의 구분도 무색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영미권의 철학에서 &#39;헤겔 르네상스&#39;(Hegel Rennaissance)라고 할 만큼 헤겔 철학에 대한 논문과 연구서들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다. 분석 철학의 한계를 대륙 철학의 정신을 받아들여 돌파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가 있다. 독일 철학 역시 하버마스 이래로 어중쩡한 포지션 때문에 새로운 철학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는 영미권의 철학에 대해 적극 관심을 보이는 철학자들도 적지 않다.우리가 고정된 하나의 길만 고집하려는 것은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한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형이상학자들이 믿는 전통적인 명제 하나가 있다. 화엄의 인드라 망처럼 &ldquo;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rdquo;는 것이다. "도는 하나이지만, 그것에 이르는 길은 여럿이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본다면 진리는 그것을 어떤 길로 어떻게 접근하느 냐에 따라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한계를 인정한다면 동과 서, 그리고 고금의 벽을 얼마든지 벗어 던지고 철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부활하고, 화엄과 주역의 존재론이 양자역학과 대화하고, 분석적 정신과 종합적 정신이 동양의 음양의 관계처럼 대대 관계를 이루어 하나의 방법론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을까?<br><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20:47: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막셀 모스의 선물론 강독 2</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cb5335dfb11669a2806fada0d0ac177fcc519d03.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670px;"><br>Avec des armes et des v&ecirc;tementsles amis doivent se faire plaisir;chacun le sait de par lui-m&ecirc;me (par ses propres exp&eacute;riences)Ceux qui se rendent mutuellement les cadeauxsont le plus longtemps amis,si les choses r&eacute;ussissent &agrave; prendre bonne tournure<br>무기들과 옷들로&nbsp;친구끼리는 서로기쁘게 해야 한다.이건 누구나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선물을 주고받는 사람들은가장 오랫동안 친구로 남는다.만약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말이다.<br><br><br>주석<br>계속해서 증여론의 서론을 대신해서 막셀 모스가 인용하고 있는 < 하마말H&aacute;vam&aacute;l/ 높은신 분의 말>의시에서 등장하는 시어는 무기des armes와 옷des v&ecirc;tements이 확인 된다.&nbsp;무기와 옷은 친구사이에 교환되고 답례로 되돌려지는 순환구조속에 놓여져 있는 선물cadeaux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우정이란 두 신체에 깃든 하나의 영혼"이라는 개념이라는 전제하에 무기와 옷이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전투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필수적이 무기와 옷이 나와 타자사이에서 순환 되는 상호성속에서만 친구가 존재한다.&nbsp;<br>일방적인 희생이나 착취가 아닌, 서로 마음과 성의를 주고받는 균형이 있어야 우정이 유지되는 것으로 고대 바이킹의 지혜를 담고 있는 < 하마말H&aacute;vam&aacute;l>은 충고 하고 있다. 증여론 중후반부에서 막셀 모스는 북유럽신화의 계약법적 특성과 고대 게르만 사회에서 계약과 로마법을 자세히 다루면서 다시 한번 상호성 개념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br>무기들과 옷들로 친구끼리 서로 기쁘게 해야 한다는 오딘의 시는 마르셀 모스가 고찰하고 있는 포틀래치나 뉴기니 지역의 원주민에게서도 동일하게 선물을 교환하는 형태속에서도 확인 되는 데&nbsp;교환되는 무기와 옷들이 교환되는 즉시 답례품으로 주어 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친구 사이의 두 물건(무기와 옷)사이에는 각각의 답례로 되돌려지기까지 시간의 지연이 따른다. 이러한 시간의 지연은 주고 받는 두 당사자나 두집단 사이의 신뢰credit를 구성한다.<br>상품경제의 체계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 사이에도 주어진 선물은 시간의 지연을 두고 반환되어야 할 의무 관계가 존재 한다. 선물을 받는 즉시 답례한다면 이것은 선물이 아닌 구매나 판매와 같은 경제 행위가 된다.<br>&nbsp;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체계에서 거래되는 모든 것 즉 소유권이 이양되는 모든 거래에는 등가치의 교환이 최소한 이루어 져야 한다. 노동이든 물권법적 변동이든 등가치의 교환이 수반 되어야 하며 시간적 지연이 일어나서는 않되는 것이다.직접적이고 동시간적인 물권의 이동을 우리는 현금거래라고 지칭한다.<br>직접적인 물권의 이동이 발생하였는데 동일한 가치의 재화가 교환되지 않았을 경우, 시간의 지연을 허용하는 거래라고 한다면 이 시간의 지연은 신뢰credit의 형태로 양화되어지고 시간의 지연이 길어 질 수록 이자interest(이해관계)의 형태로 의무적으로 법적으로 판매 당사자에게 되돌려 져야 한다.<br>막셀모스가 인용하고 있는 오딘의시에서 고 서술되는 것을 우리는 확인 할 수 있다. 친구관계는 영속적인 관게가 아니라 선물을 주고 받는 관계의 순환이 지속되는 조건속에서 지속된다.&nbsp;<br>.이 문장은 교환의 순환구조가 유지되는 조건하에서 친구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친구라는 개념은 선물을 교환하는 순환구조의 산물일 뿐이다.&nbsp;<br>이러한 구조주의적 서술은 모든 단일 명사인 주체, 타자의 존재론적 위상을 부정하고, 국가, 심지어는 소쉬르와같은 언어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오직 관계들의 차이의 산물이라는 철학적 쟁점을 잉태하고 있다. 주체와 그 해체에 관한 논쟁은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에서 그 정점을 이루는데 개인적으로 하버마스의 논점이 취약한 것으로 보인다<br>]]></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20:16:0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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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막셀모스의 증여론 강독 1</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70</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dbffdd8007ef057691155f0b1f58ee6f00d05684.jpg" class="fr-fic fr-dib" style="width: 600px;"><br><br>Je n'ai jamais trouvé d'homme si généreuxet si large à nourrir ses hôtesque « recevoir ne fût pas reçu »,ni d'homme si... (l'adjectif manque)de son bienque recevoir en retour lui fût désagréable&nbsp;<br>나는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관대하고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그러한 사람은 받는 것조차 싫어하지 않았다.또한 자신의 소유물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돌려받는 것을 싫어했다.그는 자기 소유물을 너무나 소중히 여겼다.그는 자기 소유물을 받는 것을 싫어했다.그는 자기 소유물을 너무나 사랑해서 받는 것조차 싫어했다.나는 그렇게 관대하고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br><br>주석<br>전체 해석 (Traduction et Sens)"나는 자신의 손님들을 대접함에 있어 너무나 관대하고 통이 커서 '받는 것이 (단순히 빚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또한 자신의 재물을 주는 데 너무나 [아낌이 없어서 / 인색해서] 답례를 받는 것이 그에게 불쾌한 일이 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br>13세기 고대 노르드어 시 모음집 《하바말(Hávamál)》 제39절의 일부로, 오딘 신이 전하는 관대함과 상호주의에 관한 지혜를 담고 있다. 이 문장은 너무나 베풀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남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으며, 답례를 받는 것 또한 불쾌해하지 않는다는 덕목을 강조하며 고대 바이킹 사회의 선물을 교환하는 문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nbsp;<br>막셀모스는 그의 증여론의 서문에&nbsp;《하바말(Hávamál)》의 시 일부를 배치하여 선물이란 주어지고 그 선물을 받고 다시 답례로 돌려 주는 것이며 이러한 선물의 교환이 상품경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사회적인 전체 반대급부의 구조속에서 순환하는 것임을 인용한 시를 통해서 암시하고 있다.&nbsp;<br>환대란 나의 경계 밖에 있는 타자를 주체인 나와 동등한 자로 간주하여 손님으로 맞이하는 것이다.자크 데리다는 그의 강연집 에서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Émile Benveniste)의 연구를 바탕으로, 환대를 뜻하는 프랑스어 'Hospitalité'의 라틴어 어원인 'Hospes'와 'Hostis'의 결합에 주목한다. 데리다의 주장에 의하면 프랑스어 'Hospitalité'는 라틴어 어원인 'Hospes'와 'Hostis'의 결합으로 파생된 단어인데 라틴어 Hospes는 평등한 관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영접하는 주인을 의미하고 Hostis는 본래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이방인(Stranger)'을 뜻했으나, 역사적으로 공동체의 경계를 위협하는 '적(Enemy)'이라는 의미로 변화했다고 그는 서술 한다.<br>데리다는&nbsp;이 어원적 분석을 통해 환대(Hospitality)의 중심에는 이미 적대성(Hostility)이 내포되어 있음을 밝혀낸다.데리다는 환대와 적대라는 이 상반된 두 개념을 합성하여 '호스티탈리티(Hostipitalité, 적대적 환대)'라는 신조어를 제시한다.&nbsp;<br>이는 환대가 언제나 적대로 뒤바뀔 수 있는 위험천만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환대는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로 구분된다.조건적 환대는 현실의 법과 제도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 일정한 조건(신원 증명, 체류 기간, 규칙 준수 등)을 요구하게 된다.주인이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공간이 '내 것'이라는 주권(Sovereignty)을 주장해야 하며, "여기서는 내 규칙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순간, 환대는 이방인을 통제하고 배제하는 또 다른 형태의 적대이자 폭력이 된다.&nbsp;<br>반면에 무조건적 환대는 윤리의 영역에 속한 것이어서 이방인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묻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문을 열어주는 절대적 환대이다. 상대가 나를 해칠 수 있는 '호스티스(적)'일지라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위험을 감수한다.그런데 이 두가지 조건적 환대와 무조건적 환대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를 파괴하는 모순적 교착상태에 놓여 있다.불가능한 이념인 무조건적 환대와 현실의 조건적 환대는 서로 양립 가능한 관게항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nbsp;<br>호스티스'는 환대의 이면에 숨겨진 '이방인이자 적'의 얼굴이며 환대가 이방인을 환영하는 윤리적 행위인 동시에, 주권을 지키기 위해 이방인을 통제하려는 적대적 행위(Hostility)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다. 데리다는 헤겔 법철학의 구분들 즉 가족, 시민사회, 국가등을 언급하면서 우리가 이방인을 맞이 할 때&nbsp;국가(L'État-nation)나 시민사회는 법과 제도로 이 경계를 나누려 하지만, 환대 안에는 이미 언제든 적대로 돌변할 수 있는 위험(Problematic)이 내포되어 있다고 지적 한다.<br>&nbsp;인간은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서 출발해, 경제적 이익이 충돌하는 시민사회를 거쳐, 궁극적으로 '국가'라는 보편적 공동체 안에서 자유를 실현하지만 국가나 시민사회가 설정한 '안과 밖', '우리와 타자'의 경계가 과연 정당한가 묻고 있다.]]></description>
			<author>김병철</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15:21:51 +0900</pub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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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28괘 澤風大過(택풍대과)</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8</link>
			<description><![CDATA[제28괘 澤風大過- 대들보가 휘는 위기(棟撓) 속의 의연함☱&nbsp;상괘 : 연못 (兌澤)☴&nbsp;하괘 : 바람 (巽風)<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DhfMzYg/MDAxNzkxNDI2MjI1NDQy.p229Lso3AB2EGEQFsG4ZLylDK80E0U_tQodAx3ziZugg.lJka-3vQb7-ByjD-2QTlj4hfXSVo12UeVVLlfDVnVk4g.PNG/%ED%83%9D%ED%92%8D%EB%8C%80%EA%B3%BC.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415" data-height="253"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3ff695cd06dc9c39c9df4206d0ad4d222c241078.jpg">택풍대과 괘&bull; 호괘(互卦): 중건천(重乾天, ☰☰) - 내부의 극한적 강건함과 과부하의 압력&bull; 도전괘(倒轉卦): 택풍대과(澤風大過, ☱☴) - 대칭적 불변괘가 요구하는 절대적 자기 통제&bull; 배합괘(配合卦): 산뢰이(山雷頤, ☶☳) - 턱의 비움과 절제를 통한 반면교사&bull; 착종괘(錯綜卦): 풍택중부(風澤中孚, ☴☱) - 중심을 비우고 신뢰로 묶어 세우는 연대<br>지나침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말라.<br>&nbsp;1. 卦象의 서사澤下有風 , 큰 물이 나무 위를 덮쳐 기둥이 휘어지고(本末弱), 지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39;비정상적인 과잉과 위기&#39;를 상징한다. 크게 지나치는 과도기(大過)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지위도 높지만, 바로 그 &lsquo;지나침&rsquo;이 파국을 부른다. 그러나 중심을 잃지 않고 격류를 견디는 자는, 세상이 두려워 숨을 곳을 찾아도 마음이 편안하다. 과도한 때에 의연함으로 버티는 것이 곧 생존의 지혜다."낚싯바늘이 곧은 것은 고기를 잡으려 함이 아니라, 세월을 낚기 위함이다"&nbsp;<br>2. 주역 본문과 해석卦辭 (괘사)원문: 大過 棟橈 利有攸往 亨.&nbsp;(기둥 동棟, 흘들릴 요橈)현토: 대과는 동이 요니 이유유왕하야 형하니라.직역: 대과는 기둥이 흔들리니 갈 바를 둠이 이로와서 형통하니라.해석: 나무가 약해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휘거나 구부러지는 것을 요(橈)라 한다. 양은 속성이 크고 음은 작은 데 대체로 보면 2음 4양으로 양이 음에 비해 지나치게 기세가 왕성하므로 「대과」라 한 것이다. 또 초효는 本이고 上효는 末에 해당하는데 본말이 모두 음으로 유약하여 크고 많은 양을 감당하지 못해 구부러지는 형상을 나타내고 있으니 「대들보가 구부러지다」라고 표현한 것이다.큰 건물의 대들보가 구부러지면 장차 집이 기울어진다. 집이 기울어지면 강력한 것으로 바로 잡거나 지탱해 주어야 쓰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듯이 나라가 기울어지면 강력한 자가 나와 구국의 일념으로 지탱해 주어야 나라를 위기에서 구할 수 있으니「갈 곳이 있으면 형통하리라」한 것이다.&nbsp;彖傳 (단전)원문: 彖曰 大過 大者過也 棟橈本末弱也, 剛過而中巽而說行, 利有攸往乃亨大過之時大矣哉.현토: 단왈 대과는 대자과야오 동요는 본말이 약야니라, 강과이중하고 손이열행이라, 이유유왕하야 내형하니 대과지시대의재라.직역: 단에 가로되 대과는 큰 것이 지나침이요 &lsquo;동요&rsquo;는 본과 말이 약한 것이다. 강한 것이 지나치되 가운데 하고&nbsp;겸손하고 기쁨으로 행함이라, 가는 바를 둠이 이로와서 이에 형통하니 대과의 때가 크도다.&nbsp;해석: 대과는 큰 것이 지나침이다. 대들보가 흔들리는 것은 뿌리와 끝이 약하기 때문이다. 강함이 지나치되 중심을 잡고 있으며, 순응하면서도 기쁘게 행한다. 그러므로 나아감에 이로우니 형통한 것이다. 대과(大過)의 때가 지닌 그 크고 중요함이여!양강(陽剛)이 지나치다 해도 두번째 九二와 다섯번째 九五의 처한 자리가 모두 中位로 中道를 얻었으며 또 손(巽)괘의 속성은 순(順)이고 태(兌)괘의 속성은 열(說)이니 대들보가 구부러지는 위기를 맞았을 때 아래의 巽과 위의 兌가 함께 합작하여 위기를 구하려 한다면 구제하지 못할 것이 없으므로 「剛過而中巽而說行 乃亨」이라 한 것이다. 크게 지나쳐 비록 기울어지거나 넘어지는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단 그것을 구할 수만 있다면 위험이 오히려 안정으로 변할 수 있으므로 대과의 때가 시사하는 바 그 의미가 크다고 한 것이다.&nbsp;大象傳 (대상전)원문: 象曰澤滅木大過 君子以獨立不懼 遯世无悶.&nbsp;&nbsp;(두려워할 구懼, 피할 돈遯, 민망할 민悶)현토: 상왈 택멸목이 대과이니 군자이하야 독립불구하며 돈세무민하나니라.직역: 상에 가로되 못이 나무를 멸하는 것이 대과니, 군자가 이로써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멀리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느니라.해석: 연못이 넘쳐 나무를 잠식하는 것이 대과의 상이다. 군자는 이를 보고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상을 멀리해도 민망하게 여기지 않느니라!&nbsp;연못이 나무위에 있으니 나무가 비록 물에 매몰된 상황이나 단 매몰되었다고 쓰러지지는 않는 까닭에 대과(大過)라 한 것이다. 군자는 이와같은 대과의 상을 관찰하여 어렵고 위험한 상황을 구제할 때 혼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과 시비를 논하지 않으며 상황을 바로하여 조심스럽게 道를 지키며 세상에 숨어서도 번민하지 않으며 세상사람과 알거나 근심하지 않으니 이것이 대과인(過人)이라 하는 것이다.&nbsp;3. 6효의 효사와 해석初六 藉用白茅 无咎,&nbsp;象日 藉用白茅 柔在下也.&nbsp; (자리/깔 자藉, 띠풀 모茅)&nbsp;현토 : 초육은 자용백모이니 무구하니라, 상왈 자용백모는 유재하야이라.직역: 초육은 자리를 까는데 희 띠풀을 쓰니 허물이 없느니라. 상에 가로되 &lsquo;자용백모&rsquo;는 부드러운 것이 아래에 있음이라.해석: 제사를 지낼 때 흰 갈대를 깔고 물건을 올리니 허물이 없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겸손하게 기초를 다지는 자세가, 과도한 위기의 때를 건너는 첫 번째 안전망이 된다.설괘전(說卦傳)에 손(巽)은 「흰 것」「초목」 등을 상징한다 하였으므로 초효를 白茅라 한 것이다. 白茅는 제사에 술을 올리는 물건으로 백모를 쓰는 것은 공경과 엄숙함의 표시이다. 초육은 음유(陰柔)한 효로 巽괘의 첫자리에 있으며 양강한 양효들의 아래에 처했으니 이미 유순한데 白茅를 써서 공경을 표시하고 조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허물이 없다고 한 것이다.상에 이르기를, 띠풀이 손괘의 맨 아래에 있으므로 백모를 쓰는 형상이라 하였다.&nbsp;九二 枯楊生稊 老夫得其女妻 无不利, 象日 老夫妻 過以相與也&nbsp; (마를 고枯, 버들 양楊, 싹 제稊)현토: 구이는 고양이 생제하며 노부득기녀처니 무불리하니라. 상왈 노부여처는 과이상여야이라.직역: 구이는 마른 버들이 싹이 나며 늙은 지아비가 그 처를 얻으니 이롭지 않음이 없느니라. 상에 가로되 &lsquo;노부여처&rsquo;는 지나침으로써 더불어 하느니라.해석: 마른 버드나무에 새 싹이 돋고, 늙은 남자가 젊은 아내를 얻으니 상서로워 불리함이 없다. 아무리 과도하고 쇠락한 때일지라도 생명의 회복은 가능하며, 적절한 조화를 통해 새로움을 얻는다.제(梯)란 고목에 새 뿌리가 난다는 뜻이다. 九二는 강한 기세의 양효가 유한 음의 자리에 있고 자리에 있고 中道를 얻었으며 아래로는 초효와 比의 관계인데 초효는 음이니 음양상비(陰陽相比)로 부부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다. 설괘전에 건(乾)은 노마(老馬)라 했으니 九二 양효를 老라 했고 老夫가 젊은 여자를 아내로 얻었다고 한 것이다.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아내로 얻으면 생육(生育)의 공이 있으니 이는 마치 마른 버드나무가 윤택한 기운을 얻어 새 뿌리가 나는 것과 같으므로 이롭지 않음이 없다고 한 것이다.상에 이르기를, 강한 양효가 유한 음을 얻으면 강해도 지나치게 강하지 않으며, 유한 음효가 강한 양을 얻으면 유해도 지나치게 유하지 않으니 이는 강유가 상제(相濟)의 도를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늙은이가 젊은 여자를 아내로 얻은 것은 지나친 것이지만 서로 함께 할 수 있다는 뜻이다.&nbsp;九三 棟橈 凶, 象日 棟橈之凶 不可以有輔也.&nbsp;(용마루/기둥 동棟, 흔들릴 요橈)현토: 구삼은 동이 요니 흉하니라. 상왈 동요지흉은 불가이유보야일새라.직역: 구삼은 기둥이 흔들리니 흉하니라. 상에 가로되 &lsquo;동요지흉&rsquo;은 가히 도움이 있지 않음이라.해석: 대들보가 흔들리니 흉하다. 지나친 강함과 과신 탓에 중심을 잃고 끝내 무너져 내리는 형국이다.동요(棟)란 대들보가 구부러진다는 것이니 장차 집이 무너짐을 뜻하고 있다. 九三은 강한 양효로서 강한 자리에 있으니 지나치게 강한 자이다.무릇 사람도 지나치게 성정이 강하기만 하면 독단에 빠져 대중과 함께 화합할 줄을 모르고 대중과 화합할 줄 모르면 함께 친해지지 않는 법이다. 큰 집이 장차 기울어 질 때는 나무 하나만으로는 지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다른 것의 도움을 받아야 하나 상응이 되는 上爻 역시 「구부러진 대들보의 형상」으로 부조를 받지 못하므로 흉하다 한 것이다.상에 이르기를 대들보가 구부러졌으니 흉하다 함은 보완해 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九三효는 지나치게 강한 독단적 성정 탓으로 人和하지 못해 아무도 돕는 사람없이 고립되었으니 대들보가 구부러지고 부러지는 위험을 당해도 지탱할 수 없다는 뜻이다.&nbsp;九四 棟隆吉 有它吝, 象曰 棟隆之吉 不橈乎下也.(높을 융隆, 다를 타它)현토: 구사는 동륭이니 길커니와 유타면 인하리라, 상왈동융지길은 불요호하야일새라.직역: 구사는 기둥이 높아짐이니 길하거니와 다른 것을 두면 인색하리라. 상에 가로되 &lsquo;동륭지길&rsquo;은 아래에 흔들리지 아니함이라.해석: 대들보가 꼿꼿하게 솟아오르니 길하다. 다만 다른 데로 한눈을 팔거나 치우치면 인색(아쉬움)함이 남는다. 과도한 힘을 바르게 쓰면 능히 지탱해낼 수 있으나, 사사로운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九四는 상괘의 아래에 있는 효로 강한 양효로서 유한 음의 자리에 있으니 강유를 겸했으므로 지나치게 강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유하지도 않은 中和의 道를 얻은 자이니 大過의 때에 있어 위난을 구제할 수 있는 자이다. 이는 마치 대들보가 융기한 것과 같으므로 길하다 한 것이다. 유타린(有它吝)이란 九四효는 初효와 정응(正應)의 관계이나 初六은 음유한 자이니 만약 그를 취해 위난을 구제하려 하면 지나치게 유하게 되므로 有佗吝이라 한 것이다.&nbsp;九五 枯楊生華 老婦得其士夫 无咎无譽, 象日 枯楊生華 何可久也 老婦士夫 亦可醜也.&nbsp;(꽃 화華, 기릴 예譽, 추할 추醜)현토: 구오는 고양이 생화하며 노부득기사부니 무구나 무예리라. 상왈 고양생화 하가구야며 노부사부이 역가추야로다.직역: 구오는 마른 버들이 꽃이 나며 늙은 지어미가 젊은 남자를 얻으니 허물은 없으나 기림도 없으리라. 상에 가로되 &lsquo;고양생화&rsquo;가 어찌 가히 오래 갈 것이며 &lsquo;노부사부&rsquo;가 또한 추한 것이다.해석: 마른 버드나무에 꽃이 피고, 늙은 여인이 젊은 남편을 얻으니 허물은 없으나 명예도 없다. 과도한 한계 상황 속에서 가까스로 얻어낸 조화이기에, 평범하고 무사할 뿐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九五는 양강한 효로 中正을 얻었으며 지존(至尊)의 자리에 있으니 본래는 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기울어지는 큰 집을 구제해야 하나 아래에서 도와주는 신하가 없고 위로는 上六 효와 비(比)의 관계이긴 하나 지나치게 극에 달한 음으로 그가 돕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 이 상황은 마치 마른 버드나무에 꽃은 피었으나 새뿌리가 날 수는 없고, 또 꽃이란 잠시 피었다 지는 것으로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것과 같다. 늙은 여자(上六)가 士夫를 얻었다에서 士夫란 九五효를 가리키며 上六은 대과 괘의 맨 끝에 있으니 지나치게 극에 달한 음이므로 늙은 여자의 형상에 비유한 것이다. 이 늙은 여자가 士夫를 배필로 얻었으니 생육할 수 없기 때문에 비록 허물은 되지 않는다 해도 아름다운 일도 아니므로 허물도 없고 명예도 없다고 한 것이다.상에 이르기를 마른 버드나무에 새 뿌리가 나지 않으니 비록 꽃은 잠시 피었다 해도 곧 시들어 오래 가지는 못한다. 老婦士夫란 늙은이와 젊은이는 적(敵)은 되지 않으나 배필이 된다면 비록 허물은 아니라 해도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니므로 추하다 한 것이다.<br>上六 過涉滅頂 凶 无咎, 象日 過涉之凶 不可咎也.&nbsp;(이마 정頂)현토: 상육은 과섭멸정이라 흉하니 무구하니라, 상왈 과섭지흉은 불가구야니라.직역: 상육은 지나치게 건너다 이마를 멸함이라 흉하니 허물할 데가 없느니라. 상에 가로되 &lsquo;과섭지흉&rsquo;은 허물할 수가 없느니라.해석: 무리하게 물을 건너다가 머리까지 잠겨버리니 흉하다. 그러나 대의를 위해 스스로를 던진 것이니 허물할 수가 없느니라. 극단의 위험을 감수한 끝에 오는 초월적인 깨달음이자, 과도함마저 넘어서 버린 경지다.上六은 대과의 마지막 효이므로 &#39;과섭멸정&#39;이다. 상육은 陰柔한 효로써 지나치게 극하므로, 험한 데를 밟아 재앙을 당하는 것이다. 음으로서 대과의 極한데 처해 있으니 대과의 소임을 못 이루는 것이다. 상육이 동하면 건삼련(☰ : 首)이 되는데 여기서 &#39;頂&#39;이 나온다. 이것을 태상절(☱ : 毁折) 이 &lsquo;滅頂&#39;하는 것이다. 澤水의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않고 건너다 물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험난함을 건너다 이마를 멸하는 화를 입었으니, 다른 사람을 허물할 수 없는 것이다.朱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어진 군자가 비록 재주가 약하여 이기지 못할 것을 알지만 의리상 스스로 험난한데 뛰어들어 희생을 하니 이를 미련하다고 탓할 수 없는 것이다."그 결과가 흉할 것임은 알 수 있지만 그의 행동과 뜻은 대의를 위해 자신의 화를 돌아보지 않는데 있으므로 뜻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비록 흉하다 할지라도 義에 있어서는 허물이 될 수 없기 때문에 「无咎」라 한 것이다.<br>4. 택풍대과에서 見幾而作 메시지와 핵심 효택풍대과(澤風大過)는 연못(兌☱) 아래에 바람과 나무(巽☴)가 깔려 물이 나무를 완전히 잠식하고(澤滅木), 양기가 지나치게 넘쳐 대들보가 휘어지는(棟橈) 비상사태의 괘입니다. 따라서 대과괘에서의 견기이작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과부하와 붕괴의 징후를 초기에 알아차려 선제적으로 무게를 덜어내고 바닥을 받치며(初六), 꺾이기 직전의 오만을 멈추고(九三), 비상시국에 걸맞은 단호한 결단(九四)과 때를 아는 자제(上六)로 재앙을 돌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4.1. 기미를 포착하고 결단하는 핵심 효사(爻辭)초육(初六) : 藉用白茅, 无咎 (자용백모, 무구) - 과도함을 미연에 방지하는 극도의 신중함과 기초 보강의 기미&lowast; 기미의 상징: 제사를 지낼 때 땅바닥에 제물을 그냥 놓지 않고 깨끗한 하얀 띠풀(白茅)을 깔아 받치는 형국입니다. 중압감이 시작되는 밑바닥에서 미세한 균열이나 불경함을 감지한 상태입니다.&lowast; 견기이작 메시지: "위기는 기초가 허술할 때 기둥 전체를 무너뜨린다"는 조짐을 초기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남들이 볼 때는 결벽증이나 과잉 대응처럼 보일지라도, 매사를 띠풀로 받치듯 지극히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愼重)를 선제적으로 취해야(作) 감당하기 힘든 무게 속에서도 허물을 면합니다.<br>구삼(九三) : 棟橈, 凶 (동요, 흉) - 과강(過剛)과 독선이 부르는 파국의 기미 (반면교사)&lowast; 기미의 상징: 대들보가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휘어지며 부러지기 직전의 위기 상황입니다. 아래로는 초육을 돕지 않고 위로는 지나친 강함만을 믿고 버티다 자멸하는 형국입니다.&lowast; 견기이작 메시지: 자신의 힘과 과거의 성공 방식만을 맹신하며 타인의 조언이나 경고음을 무시하는 순간이 곧 "기둥이 부러지는 흉(凶)의 기미"임을 통찰해야 합니다. 이 징후가 감지되면 즉시 고집과 완력을 꺾고, 무리한 확장이나 강행을 멈추어 구조를 재정비해야 합니다.<br>구사(九四) : 棟隆 吉, 有它 吝 (동륭 길, 유타 린) - 기둥을 똑바로 세우는 중심의 결단과 사심 경계의 기미&lowast; 기미의 상징: 대들보가 위로 힘차게 솟구쳐 지붕을 든든하게 받치는 상입니다. 그러나 아래의 유약한 초육에게 사사로운 마음(有它)을 두면 도리어 부끄러워집니다(吝).&lowast; 견기이작 메시지: 위기 상황에서 조직과 삶을 다시 똑바로 일으켜 세우는 주춧돌 역할을 자임해야 할 타이밍의 기미입니다. 이때 흔들리지 않는 공적 대의와 굳건한 중심을 잡되,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정실주의에 한눈을 파는 순간 공든 탑이 흔들린다는 기미를 읽고 공평무사함을 견지해야 합니다.<br>상육(上六) : 過涉滅頂 凶, 无咎 (과섭멸정 흉, 무구) - 물러설 때를 놓친 극단의 파국과 결기의 기미&lowast; 기미의 상징: 강물이 불어난 위험한 시기에 무리하게 강을 건너려다 물이 정수리까지 차올라 완전히 잠겨버린 형국입니다.&nbsp;&lowast; 견기이작 메시지: 시대의 흐름이나 재앙의 규모가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물리적 한계를 완전히 넘어섰다는 신호입니다.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결기 자체는 비난할 수 없으나(无咎), 현실적으로는 무모한 만용으로 익사하는 흉을 피하기 위해 물러서야 할 한계선(Dead line)을 포착하고 멈추어야 함을 가르칩니다.<br>4.2. 택풍대과의 견기이작 메커니즘&nbsp;&lowast; 견(見): 연못(兌☱)의 맑은 거울처럼 내면을 비추어 보며, 현재 내가 짊어진 욕망과 책임의 무게가 본체(기초)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을 냉철하게 직시합니다.&lowast;&nbsp;작(作): 바람과 나무(巽☴)의 유연함과 겸손함으로 자세를 낮추어 불필요한 과잉을 덜어내고, 흰 띠풀을 깔듯(藉用白茅) 기초를 보강하여 격류 속에서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獨立不懼) 중심 태세로 전환하는 것입니다.<br>5. 현대인을 위한 메시지현대인들은 정보, 욕망, 업무, 관계의 과부하가 지배하는 그야말로 &#39;대과(大過)&#39;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택풍대과 괘는 "화려한 성공의 정점에 도취되지 말고, 과도한 무게를 덜어내며 홀로 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중심을 지키라"는 엄중한 화두를 던집니다.&nbsp;5.1. 개인적 삶에서의 활용 포인트초육의 지혜(藉用白茅) : 번아웃의 조기 경보와 삶의 디톡스&lowast; 기미 감지: 수면 부족, 만성 피로, 예민해진 감정 등 일상의 기초가 흔들리면서도 "이것만 끝내고 쉬어야지"라며 억지로 버티고 있는 한계 임계점의 순간입니다.&lowast; 실천: 바닥에 띠풀을 깔듯 일상의 기초 루틴을 극도로 소중히 다루어야 합니다. 일정을 비우고, 불필요한 약속과 소모적인 SNS 접속을 과감히 차단하는 &#39;의도적인 덜어냄&#39;을 선제적으로 실천하여 삶의 대들보가 휘어지지 않도록 하중을 줄여야 합니다.<br>구삼의 경계(棟橈) : 과잉 확증편향과 자기 과신의 경계&lowast; 기미 감지: 주변의 조언이나 가족의 걱정을 꼰대의 잔소리나 나약한 패배주의로 치부하며, 내 생각과 방식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고집을 피우는 순간입니다.&lowast; 실천: "내가 옳다"는 완고함이 기둥을 부러뜨리는 주범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자신의 판단 오류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 걸음 물러나 타인의 관점을 경청하며 유연하게 타협하는 겸손을 회복해야 붕괴를 막을 수 있습니다.<br>대상전의 독립불구(遯世无悶) : 고독을 견디는 주체적 자립&lowast; 기미 감지: 남들의 인정이나 유행, 집단의 여론에 휩쓸리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FOMO(소외 불안) 증후군에 시달리는 순간입니다.&lowast;&nbsp;실천: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나 홀로 서도 두려워하지 않고(獨立不懼), 잠시 은둔하여 주목받지 못하더라도 마음에 번민을 품지 않는(遯世无悶) 내면의 뚝심을 길러야 합니다. 타인의 박수가 아닌 나만의 본질적 가치로 자존감을 지탱해야 합니다.&nbsp;5.2. 비즈니스 및 조직 관리에서의 활용 포인트초육의 지혜(藉用白茅) : 조직의 과부하 차단과 리스크 헤징&lowast;&nbsp;기미 감지: 무리한 외형 성장과 공격적 투자로 인해 실무진의 피로도가 극에 달하고, 내부 검증 프로세스나 컴플라이언스(준법 감시)를 &#39;절차적 낭비&#39;라며 건너뛰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lowast;&nbsp;실천: 대형 프로젝트일수록 계약서의 세부 자구 검토, 품질 테스트, 재무 유동성 점검 등 기초 단계를 하얀 띠풀을 깔듯 철저하게 이중 삼중으로 보강해야 합니다. 속도전에 취해 기본을 생략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결정적인 리스크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br>배합괘 山雷頤 & 착종괘 風澤中孚의 융합 : 레거시의 과감한 구조조정과 피벗&nbsp;&lowast;&nbsp;기미 감지: 적자가 누적되는 비핵심 사업부나 수익성이 다한 낡은 프로덕트를 &#39;지금까지 투자한 매몰 비용&#39;이 아까워 정리하지 못하고 전체 조직의 발목을 잡고 있는 징후입니다.&lowast;&nbsp;실천: 기둥의 하중을 덜어내기 위해 비대해진 조직과 불필요한 사업을 과감히 도려내는 감량 경영을 단행해야 합니다. 동시에 탑다운식 강요를 멈추고 구성원들과 투명하게 위기 상황을 공유하는 진실한 신뢰(中孚)를 구축하여, 조직의 무게중심을 가볍고 기민하게 재편해야 합니다.<br>구사의 지혜(棟隆 有它吝) : 원칙에 기반한 결단과 사사로운 정실주의 척결&lowast;&nbsp;기미 감지: 비상 경영이나 중대한 혁신을 추진하면서, 특정 파벌이나 측근의 이익을 은밀히 봐주려 하거나 온정주의에 흔들리는 순간입니다.&lowast;&nbsp;실천: 위기를 돌파하는 리더십은 공명정대함에서 나옵니다. 기둥을 바로 세우듯 단호하고 일관된 원칙을 집행하되, 사적인 연고주의나 온정주의(有它)의 유혹을 단칼에 끊어내야 조직 전체의 자발적 헌신과 위기 극복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clubs; 택풍대과의 궁극적 통찰 요약지붕이 무거우면 기둥은 반드시 휘어집니다.성공과 확장의 정점에서 내 안의 지나침을 먼저 알아차리고(見幾),&nbsp;흰 띠풀을 깔듯 기초를 단단히 다지며 불필요한 욕망을 과감히 덜어내십시오.비바람이 몰아치는 격류 속에서도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獨立不懼),&nbsp;위태로운 시대를 돌파하여 삶과 비즈니스의 대들보를 우뚝 세울 수 있습니다.&nbsp;]]></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Mon, 12 Oct 2026 12:48:2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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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나의 동양철학 편력기, 여섯째 마당</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7</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aaff4ad1862cc09aec9499c25b5efbd1375b1c28.jpg" class="fr-fic fr-dib"><br>내가 이러한 비교철학의 문제의식으로 쓴 논문 2편이 있다. 하나는&nbsp;이란 논문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의 향가인 이다. 둘 다 한국양명학회에서 발간하는 에 게재되었다. 이 2편의 본격적인 학술 논문으로 인해 명실공히 나도 비교철학자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수가 있다.&nbsp;첫번째 논문은 20세기 한국의 독특한 철학자 유영모 선생의 인간관을 서양철학자의 입장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들을 검토한 것이다. 세간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다석은 함석헌 선생의 스승이다. 함선생의 '씨알'이라는 개념은 다석이 만든 것이다. 다석은 그 이전의 다른 어떤 사상가들과도 다르게 한글에 주목해서 서양의 기독교와 동양의 유불도의 핵심 사상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의미를 부여한 독특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한국 전통 사상이나 동아시아 사상의&nbsp;바탕을 이루는 유불도(儒佛道)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서양의 기독교 신관을 재해석하고, 그것을 유불도 삼교와 회통 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다석은 대부분 철학자들이 일본식 조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한글식 조어를 만들어 자기 사상의 핵심을 표현해왔다.&nbsp;다석은 기독교를 유불도의 핵심 원리에 기초해서 주체적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불교의 공(空)이나 노장의 도(道)와 태허(太虛), 그리고 유교의 천(天)이나 무극(無極)과 같은 개념들을 기독교의 신관과 연결하고자 했다. 그는 기독교의 인격적 신관에 기초한 전통 신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동양의 형이상학적인 원리에 근거해서 기독교의 신을 해석하고자 했다. 그가 말하는 ‘없이 계시는 하느님’은 있음의 차원에서는 태극을 말하고, 없음의 차원에서는 무극과 같은 것이다.&nbsp;다석은 인간을 '제나'와 '얼나'로 구분한다. 제나는 탐진치(貪瞋痴) 삼독에 사로잡혀 있는 육체적 자아이고, 얼나 혹은 참나는 이 삼독을 벗어난 정신적이고 우주적인 자아이다. 탐진치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인간은 자신의 본 바탕(받할)을 알 수 없다. 다석은 육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기초해 전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의 대속(代贖論)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다석의 인간관은 플라톤적인 이원론적 인간관과 비슷하다. 다만 육체로부터의 해방이 플라톤에게는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로 가는 데 반해, 다석에게는 자기의 내면에 있는 참나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양자가 차이가 있다. 육체를 부정하고 정신을 강조하는 플라톤식의 영지주의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적극적인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마찬가지로 다석의 얼 사상, 얼나 중심의 인간론에 대해서도 똑같은 비판을 가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의 이런 해석은 다석의 추종자들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철학 비판은 8세기 중국의 임제 선사의 말처럼, "부처가 보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가 보이면 조사를 죽여라."라는 정신에 충실할 뿐이다.&nbsp;두번째 논문은 이다. 이 논문은 후배의 상가집에 다녀오면서 신라의 향가 「제망매가」의 의미를 새롭게 의식한 데사 글의 단초를 찾았다. 하지만 이글은 학진의 연구 프로젝트에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학술논문으로 발전되었다. 에세이글이 얼마든지 학술논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런데 정작 이 논문을 완성해서 모 대학 철학연구소로 보냈는데 심사위원 3명 전원의 퇴자를 받았다. 심사위원들이 친절하게도 내가 이미 이곳 저곳에 써놓은 글들을 읽었는지 '표절'이라고 한 것이다. 논문 표절 판정은 가장 심한 게재 불가 근거가 된다. 하도 황당해서 내가 쓴 글이라고 밝히면서 재심 신청을 했는데 이번에도 3명 모두가 게재 불가 판정을 내리면서 '자기표절'이라는 것이다. 이러니 심사위원을 심사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학자들의 논문은 예술가들의 창작품과 달리 최초의 아이디어는 꾸준히 재고 수정하면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전문적인 학술 논문으로 발표한 것도 아니고 SNS에 에세이 형태로 발표한 글과 일정 부분 겹친다고 '자기표절'로 판정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나? 게재 압박 때문에 일단 나는 이 논문을 다른 학술지에 게재해서 아주 창의적인 논문이고, 문체도 좋다는 극찬을 받았다. 나아가서 '게재불가' 판정을 내린 자들을 상대로 공개적인 논쟁을 벌이려고 했지만, 그 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후배의 간청이 있어서 그냥 덮고 말았다. 이 자리에서 처음 밝히는 이야기다.&nbsp;「제망매가」는 고전문학에서 향가에 대한 관심과 이 향가가 함축하는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라는 측면에서 이미 국어학자들과 국문학자들, 그리고 불교학자들에 의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들은 일차적으로는 ‘누이와의 사별에 따른 애절한 심정을 종교적인 구도의 자세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간주하고, 좀 더 심화된 경우에는 이 작품을 통해 ‘삶의 허무성이나 불교적 내세관의 문제’ 등으로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안고 있는 고유한 시공간적 의미 외에도 이 작품에는 그것을 뛰어넘어 21세기의 독자들과 한국을 넘어서 세계인에게도 감동을 줄 수 있는 보편적 요소가 담겨 있다. 만일 이런 요소를 인정할 수 있다고 하면 이 작품은 국문학이나 불교의 관점을 넘어서 서양철학의 차원에서도 얼마든지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이글은 「제망매가」라는 향가에 드러난 죽음의 보편적 문제, 이를테면 죽음의 필연성과 우발성,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사후 세계의 문제, 죽음과 삶의 관계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제망매가」를 단순히 ‘누이의 죽음에 대한 종교적 승화’로 보는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 보고자 했다. 내가 보기에 「제망매가」는 죽음에 대한 깊은 통찰을 통해 얼마든지 시대와 지역의 한계를 넘어 보편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소지가 많다. 나는 플라톤과 스토아주의와 불교, 칸트와 하이데거, 현대의 라캉에 이르기까지 서양철학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제망매가」의 문제의식을 보편화, 현재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우리는 허구헌 날 서구의 시가에 대해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 고전 시가들도 재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nbsp;<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un, 11 Oct 2026 22:46: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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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그대에게 가는 먼 길&gt; 신간-교수신문</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cc587f1fe2bde8d9cf7ca44de47cc7c58f2cf80e.jpg" class="fr-fic fr-dib">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33070철학자가 소설을 썼다. 생소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처럼 영역과 경계를 많이 따지는 곳에서는 쉽지는 않은 일이다. 작가 이종철은 서양 근대 철학, 특히 근대 독일철학을 전공한 철학자로 오랫동안 활동을 해왔다. 지난 몇 년 전부터 그는 에세이철학에 심취해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다양한 형식의 글을 써왔다. 이 소설은 이런 실험적 글쓰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전공과 장르를 불문한 글쓰기가 드디어 소설 쓰기까지 발전한 셈이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시도가 흔하지 않다. 사르트르의 경우는 철학자로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사실 그는 소설도 꽤 썼다. 덕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지만 철학자의 신념을 지키고자 그 상을 거부했다. 10여 년 전 영화로도 나온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의 본명은 피터 비에리(Peter Bieri)인데, 그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출신으로 독일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를 한 철학 교수이다.<br>출처 : 교수신문(https://www.kyosu.net)<br><br><br><br><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un, 11 Oct 2026 12:12:52 +0900</pubDate>
		</item>
		<item>
			<title>글쟁이들이 &lt;에철네&gt;에 주목해야 할 이유</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5</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18a3cbacb7374a720bc598508cf51344e61233d9.jpg" class="fr-fic fr-dib">&nbsp;&nbsp; 사진의 출처는 AI<br>오래 전에는 글을 쓰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nbsp;<br>일기는 일기장에 쓰고, 공부한 것은 노트에 적었다.&nbsp;<br>컴퓨터가 발달하면서 컴퓨터에서 글을 쓸 수 있었다.&nbsp;<br>인터넷이 일상화되면서 여러가지 형태의 SNS가 등장했다.&nbsp;<br>그러다 보니 블로그나 카페가 유행을 했다.&nbsp;<br>이곳에 잔뜩 글과 사진을 올려 놓고 관리하던 시대가 있었다.&nbsp;<br>그 이후 페이스 북이 일상화되면서 이곳에 글을 쓰는게 하나의 습관이 되기도 했다.&nbsp;<br>나 역시 2014년에 페이스 북을 시작을 했으니 무려 경력 12년 차다.&nbsp;<br>페이스 북 덕분에 글을 참 많이 썼다.&nbsp;<br>이곳에서 점차 글쟁이 친구들도 사귀다 보니 서로 경쟁적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많아 졌다.&nbsp;<br>페친이 일종의 자극이 된 셈이었다.&nbsp;<br>그런데 페이스 북의 단점도 크다.&nbsp;<br>첫번째는 중독 성향이 있다 보니 쓸데 없이 다른 이들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nbsp;<br>더구나 쓰레기 정치글이나 선전과 광고들이 너무 많다.&nbsp;<br>이용할 수록 피곤해지는 경험을 많이 했다.&nbsp;<br>그래서 중간 중간에 쉬는 경우도 많아 졌다.&nbsp;<br>두번째는 페이스 북에 쓴 글은 휘발성 이기 때문에 자기가 글을 써놓고도 찾기가 힘들다.&nbsp;<br>물론 검색 기능이 있지만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nbsp;<br>1년에 한 번씩 기억을 되살리는 경우가 있지만, 그냥 잃어버린 기억을 우연히 찾는 느낌 뿐이다.&nbsp;<br>의 칼럼니스트가 되면 큰 장점이 있다.&nbsp;<br>이곳에 이름을 올린 칼럼니스트는 디렉토리(directory) 형태로 글을 한 꺼번에 보고 관리를 할 수 있다.&nbsp;<br>검색 기능이 워나 뛰어나 자기 글과 관련된 모든 속성을 단숨에 확인할 수 있다.&nbsp;<br>그만큼 관리가 쉽다는 의미다.&nbsp;<br>검색은 자기 디렉토리 안에서 뿐 아니라 전체에 올라온 글들에서도 단숨에 찾을 수 있다.&nbsp;<br>로딩이 빠른 데다가 검색 속도도 빨라서 이용자가 감탄할 지경이다.&nbsp;<br>글을 이곳 저곳에 쓰다 보면 도대체 내가 무슨 글을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없어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nbsp;<br>그런 의미에서 (www.essayphilosophy.net) 칼럼은 글쟁이들이 자기 글을 보관하고 관리할 수 있는 거대한 디지탈 창고(Digital Storage)와 같다.&nbsp;<br>파일 단위로 올리는 서버(Server)와는 차원이 다르다.&nbsp;<br>또 여기 칼럼 난에는 다양한 전공을 가진 전문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어 페이스북의 난잡한 형태와 달리 다른 이들의 글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br>글쟁이들 끼리 서로의 상황을 쉽게 파악하고, 자기가 썼던 글들을 관리하기가 쉽다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글을 쓰고 인용하는 데 커다란 경쟁력이 있다.&nbsp;<br>이런 기능들 만으로 지금까지 써오고 관리해왔던 디지탈 자료들을 웹사이트로 옮길 이유가 충분하다.&nbsp;<br>일종의 디지탈 이사(Digital Moving)이다.&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un, 11 Oct 2026 07:06: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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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1장 나를 지워 버린 서류</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c0d0b2f16e50889bd2a17498077e8164323b552f.jpg" class="fr-fic fr-dib">사진은 제미나이가 그림<br>﻿002.&nbsp;제1장 나를 지워 버린 서류제1부 침묵이 시작되다나는 그 날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2017년 3월 23일.그날 일어난 모든 일을 이해했기 때문은 아니다.나는 이해하지 못했다.결정을 전달받은 일이 지닌 중요성은 기억하지만, 방의 세세한 모습이나 의자들의 위치, 담당자가 정확히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거의 10년이 흘렀다. 여전히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서류 그 자체와, 그것과 함께 찾아온 안도감과 불확실성이 기묘하게 뒤섞인 감정이다.나는 난민 인정을 신청했다.그것이 내가 원했던 지위였다.나는 다른 정체성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살아갈 새로운 범주를 찾으려 했던 것도 아니었다. 아이들과 내가 겪은 상황 때문에, 그리고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단순히 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보호를 신청했다.내가 받은 결정은 나를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떠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대신 그 결정은 나를 그 두 입장 사이 어딘가에 놓았다.서류에는 내 신청이 난민협약 및 의정서상 난민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그 뒤에는 내 삶의 방향을 바꾼 문장이 이어졌다.그럼에도 나는 &ldquo;인도적 측면에서&rdquo; 한국에 머무를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하나의 지위는 거부되었고 다른 하나의 지위가 주어졌다.그때 나는 그 결정에서 가장 직접적인 부분을 이해했다.나는 머물 수 있었다.아주 어린 두 아이의 어머니에게 그것은 엄청난 의미였다.<br>내가 신청하지 않았던 지위<br>그 결정은 내가 무엇을 받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분명했다.나는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그보다 내게 덜 분명했던 것은 당장 머무를 수 있다는 허가를 넘어 인도적 체류가 무엇을 뜻하는가였다.나는 그것을 임시적인 것으로 이해했다.그것이 난민 인정과 같지 않다는 것은 알았다.그러나 그 지위에 어떤 권리와 기회, 제약이나 미래의 가능성이 따르는지는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내가 자리에 앉아 앞으로 10년이 어떤 모습일지 완전한 그림을 받아 든 순간은 없었다.그럴 수도 없었다.﻿나는 이미 내게서 많은 것을 앗아 간 상황의 여파를 감당하고 있었다.내게는 어린 두 아이가 있었다.나는 대학원 과정을 그만두었다.내가 쌓아 가던 직업적 삶은 이미 중단되어 있었다.가족 상황은 나를 엄청난 정서적&middot;육체적 압박 아래 놓이게 했다.그 시점에 내게는 체류 범주에 대한 설명보다 안정이 훨씬 더 절실했다.그래서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이해한 부분을 붙들었다.우리는 강제로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그 순간에는 그것으로 충분했다.<br>내가 보호를 요청했던 이유<br>그 서류가 왜 중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나는 내가 일구어 온 삶을 버리고 싶어서 난민 제도에 이른 것이 아니었다.나는 공부하고 일하고 있었다.나는 직업적 미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나는 이미 독립적으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부양하는 법을 배웠다.그러나 가족 상황이 급격히 달라졌다.아이들의 친가 쪽 사람들이 내게 등을 돌렸다. 스스로 내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하던 남자 역시 내게 등을 돌렸다.상황이 특히 심각해졌을 때 나는 이미 둘째 아이를 임신한 지 8개월째였다.그러고 나서 그는 내가 일하여 마련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이 나라를 떠났다.그것들을 잃은 일 자체가 나로 하여금 보호를 요청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나는 독립적으로 성장했다.물질적인 것은 다시 마련할 수 있다고 믿었다.내가 간단히 다시 마련할 수 없었던 것은 안전이었다.가족을 둘러싼 갈등과 공격은 나 자신의 취약성과 아이들을 향해 내가 짊어진 책임을 이해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았다.나는 나 자신 너머를 생각해야 했다.나는 더 이상 내가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만을 놓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아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안전하게 자랄 수 있을지를 결정하고 있었다.그렇게 난민 신청이 시작되었다.<br>결정이 내려지기 전<br>그때 나는 이미 난민인권센터와 연결되어 있었다.가족 상황 때문에 심각한 우울증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시기에 직장 친구를 통해 그곳을 처음 알게 되었다.나는 그들에게 내 가족 상황을 설명했다.그들은 처음부터 내 신청이 내 삶의 나머지 부분과 동떨어진 단순한 출입국 문제가 아님을 이해했다. 그것은 내 아이들, 가족 상황, 그리고 우리의 미래를 둘러싼 불확실성과 연결되어 있었다.난민인권센터는 처음부터 난민 신청 절차를 안내해 주었다.나 자신에게는 길잡이가 없었기 때문에 그 지원은 중요했다.나는 아주 어린 아이들을 돌보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나를 탈진시킨 상황에서 회복하는 동시에 낯선 법률 제도를 헤쳐 나가려 하고 있었다.인도적 체류 허가를 받기 전, 우리는 이주민센터에서도 약 1년을 보냈다. 아들은 그 무렵 태어났다. 아이들을 부양할 수단이 거의 없던 때도 있었다.이주민센터에서 나온 뒤에는 다른 현실적인 선택지가 없어 네 살 난 딸과 한 살 난 남동생이 집에 둘만 있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그런 상황은 내가 아이들을 위해 상상했던 삶이 아니었다.그래서 인도적 체류가 우리가 한국에서 함께 머물 수 있음을 의미했을 때 나는 안도했다.그 서류가 우리의 삶을 해결해 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순간 우리에게 절실했던 한 가지, 곧 당장 떠나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주었다.]]></description>
			<author>써니</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21:17:3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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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일상이 철학이다』 | 이종철 지음 | 모시는 사람들 | 서평</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3</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19d417b00977e9262fbd56371db779a34bcb23cb.jpg" class="fr-fic fr-dib">&nbsp;이 책은 저자가&nbsp;SNS와 잡지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nbsp;세계에 대한 그의 호기심과 관심이 흥미롭다.&nbsp;이 책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차례를 살펴보자.&nbsp;제1부는&nbsp;&lsquo;일상과 철학&rsquo;으로 삶과 철학의 경계를 허물려는 시도가 돋보인다.&nbsp;저자는 이미 전작&nbsp;『철학과 비판』에서 에세이철학의 시도를 한 적이 있다.&nbsp;현대철학은 현학의 극치로 흘러 이제는 소수의&nbsp;&lsquo;그들만의 리그&rsquo;로 전락한지 오래다. &ldquo;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nbsp;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다.&rdquo;라는 칸트의 말을 패러디하자면&nbsp;&ldquo;철학 없는 삶은 야만이고 삶 없는 철학은 공허&rdquo;일 것이다.&nbsp;철학자 이종철의 시도는 그런 점에서 칸트의 본질에 충실하다.&nbsp;필자가 높게 사는 부분이기도 하다.&nbsp;제2부는 영화와 비평이다.&nbsp;씨네21을 위사한 여타 영화 비평들을 보면 철학에 많은 빚을 지는 것처럼 보인다.&nbsp;보기에 따라 영화 그 자체보다 영화 이론에 충실해 때로는 읽기 거북할 때가 있다.&nbsp;반면 저자는 쉬운 글쓰기를 지향해&nbsp;(여담이지만,&nbsp;그의 연세대 선배였던 마광수 역시 쉬운 글쓰기를 지향했다.&nbsp;이쯤 되면 연세대의 학문적&nbsp;DNA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nbsp;자연스럽게 아포리즘을 끌어낸다.&nbsp;가독성이 매우 좋고 필자가 한 번도 보지 못한 영화의 장면을 이미지처럼 생생하게 서술하는 묘사가 뛰어나다.&nbsp;철학 이론이 물과 기름처럼 어색하기보다는 삶과 밀착해 잘 엉겨있다.&nbsp;철학과 영화의 짝짓기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nbsp;당장 가까운&nbsp;MTV철학자 슬라보예 지젝도 영화를 여러 번 건드렸다.&nbsp;저자가 전문 영화 비평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식견을 보여준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nbsp;3부는 사회와 정치다.&nbsp;맑스는&nbsp;&ldquo;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상을 해석해 왔다.&nbsp;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다&rdquo;라고 했다.&nbsp;철학이 상아탑에 갇혀 생명력을 잃는 순간 무지와 반지성이 곰팡이처럼 자라나게 된다.&nbsp;이제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nbsp;&lsquo;악의 평범성&rsquo;의 한나 아렌트나 미 제국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던 노엄 촘스키처럼 세상을 이끌었던 철학자들은 단순히&nbsp;&lsquo;해석&rsquo;에만 치중하지 않고 변혁하려 했다.&nbsp;철학자가 세상사에 관심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nbsp;저자 역시 철학자의 직업병을 버릴 수는 없는지,&nbsp;한국 정치 사회에 대한 생각을 은근하게 피력한다.&nbsp;재미있는 것은 모든 챕터 중에 가장 내용이 짧다는 것이다.&nbsp;애써 말을 아낀 것인지,&nbsp;아니면 관심사가 적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추측으로는 전자에 가깝지 않나싶다.&nbsp;야만적인 한국 정치계의 풍토를 상기한다면 굳이 벌집을 이리저리 건들 필요는 없을 터이니 말이다.&nbsp;4부는 도구와 기술이다.&nbsp;저자와 나는 페이스북 친구이다.&nbsp;일찍이 컴퓨터를 위시한 첨단&nbsp;IT&nbsp;기기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를 보고 경탄해마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nbsp;적지 않은 연세에 신문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용해 활용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반성마저 들었다.&nbsp;필자는&nbsp;80년대 후반생임에도 불구하고 드물게&nbsp;IT에 어둡고 아날로그적이다. (지금 이 글도 연필로 쓰고 있다).&nbsp;많은 인문학자들이 필자처럼&nbsp;IT와 거리가 먼 것이 사실이다.&nbsp;고령인 것도 감안해야겠지만 별 필요성을 못 느끼는 이유도 있으리라.&nbsp;저자는 블루투스와 음성인식 기술을 경험으로 구수한 입담을 풀어낸다.&nbsp;악필에 대한 자조적 고백을 필두로 음성인식 기술이&nbsp;&ldquo;그간 문자에 억눌려오거나 문자 소통에 장애를 겪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다시금 역사의 무대에 적극 등장하고 새로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rdquo;이라는 희망과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ldquo;그렇기 때문에 획기적이고 혁명적&rdquo;인 도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인다.&nbsp;이 챕터의 마지막이&nbsp;「AI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nbsp;기술 도구 문명의 끝은 인간에 대한 도전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성에 대한 자문과 고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nbsp;5부 역사와 문자,&nbsp;그리고 한글은 그가 가진 애국심의 발로를 보여준다.&nbsp;문자는 글 쓰는 일을 업으로 가진 철학자의 종교이자 숙명이라는 점에서 가장 많은 내용이 할애되어 있다.&nbsp;한글에 대한 무한한 애정도 듬뿍 담겨있다.&nbsp;또한&nbsp;&lsquo;엽전들은 안 된다&rsquo;는 민족적 자조의식에서 탈피하여 떨쳐내자는 거침없는 주장도 펼친다. &ldquo;한 가지만 덧붙이자.&nbsp;왜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오랜 역사와 문화적 자원에 긍지를 갖지 못하고 오히려 부정을 하는가?&nbsp;나는 이것을 열등감에 기인한다고 보고 이런 열등의식이 한국의 지배층에 유전자처럼 각인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dquo;&nbsp;한글에 대한 파트가 긴 것도 특징이다.&nbsp;자신감을 갖자는 내용이다. &ldquo;일본의 침략적 주장은 경계하나 본인들이 최고라는 정신은 배울 점이 있다&rdquo;는 대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nbsp;고대사에 대한 입장도 궤를 같이 하는데 환단고기와 천부경을 거론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nbsp;파스퇴르는&nbsp;&ldquo;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rdquo;고 말했다.&nbsp;그 누구보다도 가슴 뜨거운 철학자 이종철은 어쩌면&nbsp;&ldquo;철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철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rdquo;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nbsp;6부는 한국의 대학과 교육이다.&nbsp;수 십 년을 강단에 종사했고 강단철학자였던 저자가 느낀 부분을 열정적으로,&nbsp;때로는 거칠게 서술했다.&nbsp;인문학의 위기를 두고&nbsp;&ldquo;여전히 인문학 분야들은 수입 오퍼상이나 고물상 수집 수준&rdquo;이라는 일갈은 귀 기울여 들을 만하다.&nbsp;거침없고 통렬한 비판은 애정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nbsp;동시에 안타까운 쓰라림도 담겨있는 듯하다. &lsquo;무엇이 문제인가?&rsquo;를 넘어&nbsp;&lsquo;어떻게 할 것인가?&rsquo;를 제안하는 그가 변방의 아웃사이더 철학자인 것은 어쩌면 자명한 일이다.&nbsp;안락의자에 앉아&nbsp;&lsquo;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rsquo;한 지적 허영에 빠지는 대신 맞서 싸우는 길을 택한 그는 여전한 현역 파이터다.&nbsp;앞서 말한 바 있듯 『일상이 철학이다』는 『철학과 비판』의 후속작이며 에세이철학 시리즈의 시즌 2와도 같다. 저자인 이종철 철학자는 일상과 괴리된 철학을 혁파하고 일상을 철학화 하자고 주장한다. 그 도구로서 에세이철학을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하나의 장르로 구축시켰다. 그의 실험은 주체적이며 일찍이 보기 힘든 시도라는 점에서 매우 신선하다. 동시에 필자도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철학의 시원은 상아탑의 논문이 아니라 대화로 이루어진 일종의 에세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철학의 본래적 정신으로의 회귀이기 때문이다.&nbsp;]]></description>
			<author>최승우</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19:30:57 +0900</pubDate>
		</item>
		<item>
			<title>나의 동양철학 편력기, 다섯째 마당</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2</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34496d8c36c555ecaf440b64b87b554a4e0bcaf4.jpg" class="fr-fic fr-dib"><br>내가 지난 10년 동안 동양철학과 한국철학 관련해서 논문이나 연구서들을 이것 저것 읽었지만, 어떤 체계를 세워서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느낀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철학의 내용은 어떡하든 이해를 할 수가 있었지만, 한문이라고 하는 언어적인 장벽을 뛰어넘기는 쉽지가 않았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언어의 역할은 참으로 크다. 말과 달리 언어는 사유를 명확히 하고 또 그 사유의 지평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독일어를 모르고 독일철학을 한다든지 프랑스어를 모르고 프랑스철학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정신적인 친숙함을 느낀다 해도 한문이라고 하는 동아시아 공통의 언어를 모르고서는 고전 문헌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물론 지금은 다양한 형태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어 그런 번역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여전히 한문 독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에세이 형태의 글을 쓰거나 논문을 쓸 때 이런 한계를 많이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한계는 아니다.&nbsp;아무래도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연구해왔던 내가 동아시아 철학을 연구할 때 그 쪽 전문 연구자들과 똑 같이 할 수도 없도 할 필요도 없다. 나의 동아시아 철학에 대한 관심은 주로 비교철학적 연구에 있다. 동아시아 철학이나 사상에서 동서양의 사유구조를 일관하는 보편적 구조와 이러한 사유구조를 동아시아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이를 단순화시킨다면 한편으로는 내가 오랫동안 숙지해온 서양철학의 방법과 사유구조를 통해 동아시아 철학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철학이 서양철학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을 통해 서양을 이해하고, 서양을 통해 동양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은 20세기 포스트모던니즘의 확산과 영향으로 인해 전통적 의미의 분과나 경계를 허물고 얼마든지 다른 사유-타자성-를 이해하고 상호 간의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동서양 간의 보편적이고 이질적인 사유구조의 이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세세한 자구(字句)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nbsp;오래 전 동국대학에서 유식학에 관한 논문을 학위를 받은 후배가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후배는 원문을 꼼꼼히 해석하고 주석한 논문을 써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유식학(唯識學)의 용어를 가감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어투도 그런 철학의 전통을 따르다 보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통할 지 몰라도 비전공자나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나중에 논문에 관해 논평을 하면서 이 점을 지적했더니 동국대 불교철학과의 전통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논문을 쓸 수도 있고 통과도 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다른 철학과의 대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수 있다. 동서양을 위시해 모든 철학들은 그 고유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다. 대화는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차이만 고수한다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유식학은 본래 무착(無着, 310-390), 세친(世親, 320-400) 등의 인도 철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수많은 원전들이 한문으로 번역되고, 거기서 사용되는 용어들도 중국화된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식철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용어들을 한문 용어들로만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생각으로는 이런 방식의 철학은 철학의 보편적 내용을 특수한 언어의 한계에 가두는 것이고, 그것이 강조되다 보면 자구풀이에 스스로 갇히고 만다. 가뜩이나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서양철학은 오퍼상이고, 동양철학은 고물상이라고 자조식으로 말하는데, 이제는 이런 식의 연구를 지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서양이나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 철학 자체를 이해하는 것 외에도 그 철학들이 현재의 나의 철학과 이 시대의 철학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때문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과거의 철학은 원용의 차원일 뿐,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철학의 문제의식과 내용이라 할 수 있다.&nbsp;둘째, 동서양 비교 철학을 할 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한문이라는 &#39;언어&#39;였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그런데 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리고 있다. AI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외국어 번역의 수준도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이제는 전문 학술 번역의 경우에도 그 퀄리티가 95% 이상 될 정도이다. 이 정도면 전문 번역가의 수준을 상회한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AI의 번역기의 속도는 추종을 불허한다. AI의 번역기는 동서양, 고전어와 현대어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때문에 과거처럼 언어를 배우느라고 큰 고생을 하거나 시간 투자를 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오히려 그런 시간과 에너지를 철학 자체에 투입할 수도 있다. 이 AI 번역기는 앞으로 철학 연구 방식 자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연구자들이 그룹 스타디나 세미나를 할 때 원서를 가지고 한 구절씩 번역하면서 공부하곤 했다. 원전 공부에는 이 과정이 거의 필수적이다. 이러한 원전 강독을 통해 해당 철학의 내용도 공부하고 해당 언어도 학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AI 번역기가 대신해줄 수 있다. 국내외에서 학위를 받은 연구자들 대부분은 초기에 핵심 고전이나 2차 문헌을 번역하곤 했다. 한국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외국의 이론이나 철학을 번역하는 수입국에서는 학문 연구에서 번역이 자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런데 이제는 그 역할을 AI가 대신해줄만큼 충분히 성장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런 마당에 굳이 번역에 시간이나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AI의 번역기가 동서 간의 비교 철학에 가장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철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철학 연구자라면 당연히 "이제 우리는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nbsp;<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18:55: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향찰 이두 구결을 통해 보는 한글에 대한 찬사!</title>
			<link>http://essayphilosophy.net/article/1861</link>
			<description><![CDATA[1. &ldquo;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하다&rdquo; <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훈민정음 서문 의미: 우리나라(조선)의 고유한 말소리와 구조가 한자(중국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창제 배경: 중국의 한자를 빌려와 우리말을 적으려니(이두, 구결 등) 우리말의 뜻과 소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세종의 뜻: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글로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누구나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새로운 글자 28자(훈민정음)를 만들었다&nbsp;<img src="http://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10/7e387f8ae083ea76f3e5e93073546aceaf7aaf4a.jpg">훈민정음(訓民正音) 언해본 서문2. 한문(고립어)과 한국어(교착어)의 문법적 차이<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한문은 어순과 문법 구조가 우리말과 전혀 다르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우리 말 어순은 &ldquo;주어(S)+목적어(O)+술어(V)&rdquo; 인 반면 중국어는 &ldquo;S +V + O&rdquo;로 다르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한문은 &#39;고립어&#39;이고, 한국어는 조사와 어미가 발달한 &#39;교착어&#39; 이다.&nbsp;3. 한문 원문을 그대로 두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언어적 기술<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한문 어순을 그대로 두면서도 우리말의 조사(은/는/이/가)와 어미(하여, 하니, 이니라)를 글자 사이사이에 넣어서 우리말의 구조로 자연스럽게 전환하여, 읽으면서 바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어적 기술을 이용하여 왔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한문은 뜻이 통하는 자리로 단어를 늘어놓고, 우리말은 그 사이에 조사를 넣어 관계와 어미를 밝혀야 문장이 된다.&nbsp;<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이두와 향찰이 하던 일을, 한글 이후에는 구결(현토)이 이어받았다.4. 실제 문장으로 본 사례논어 첫 장, 학이(學而) 편 첫 구절로 분석해 보겠습니다.<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원문 :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nbsp;한문의 어순만 보면 &lsquo;말하다&ndash;배우다&ndash;그리고&ndash;때&ndash;익히다&ndash;그것을&ndash;아니다&ndash;또한&ndash;기쁘다&ndash;어&rsquo;로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nbsp;<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우리말은 서술어가 뒤에 오고, &lsquo;하면&rsquo; &lsquo;아니한가&rsquo; 같은 연결이 필요하다. 그래서 토를 단다(현토).&nbsp; - 토를 단다: 子曰 學而時習之면① 不亦說乎아.&nbsp; - 읽기: 자왈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nbsp; -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배우고 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postfiles.pstatic.net/MjAyNjEwMTBfMjI1/MDAxNzkxNTk2NDk1OTc5.XcH9qHD-VNxIZXSN9n-KieDdVmdmsoIVI2az7hb_PWkg.FtTHd9tl5-8QGBmApN_FRSzMFkTRnNz2QTMFm1aV-h4g.PNG/%ED%9B%88%EB%AF%BC%EC%A0%95%EC%9D%8C%EC%84%9C%EB%AC%B8.png?type=w773" data-lazy-src="" data-width="219" data-height="308" alt="" class="fr-fic fr-dii">&bull; 원문: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nbsp;&nbsp; - 현토: 人不知而不慍이면② 不亦君子乎아.&nbsp; - 해석: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nbsp;위 예에서 &lsquo;면&rsquo;①은 조건을, &lsquo;아&rsquo;는 감탄의 물음을, &lsquo;이면&rsquo;②은 양보를 우리말 어순에 맞게 끼워 넣은 토이다. 한문 자체에는 그 조사가 없고, 읽는 사람이 문맥으로 보충했다. &#39;면&#39;이나 &#39;이면&#39;의 토를 달려면 문장 전체를 오롯이 알아야 가능하다. 토를 표기하는 방법으로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 조사를 적었고, 향찰은 향가에서 그 방식을 시로 밀고 나갔다. 한글이 생긴 뒤에는 같은 자리에 한글로 &lsquo;면&middot;아&middot;이면&rsquo;을 달아 현토로 정착시킨 것이다. 글자의 뜻은 한문에 두고, 말의 뼈대는 우리 어순으로 되살리는 읽기이다.5. 향찰, 이두, 전통 구결(석독&middot;순독),&nbsp;현대의 한글 현토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의 구절인 「樊遲問仁 子曰 愛人」을 바탕으로 대비해 보겠습니다.(1) 차자체계별 표기 대비표구분표기문 형태음독(낭독)특징 및 문법적 원리한문원형樊遲問仁 子曰 愛人번지문인 자왈 애인한문의 SVO 어순 그대로 읽음 (무토독)향찰(鄕札)樊遲 仁乙 問爲隱大子 曰隱 人乙 愛爲尼羅번지 인[어딜] 문[묻]ᄒᆞᆫᄃᆡ자 ᄀᆞᄅᆞ샤ᄃᆡ 사ᄅᆞᆷ[인]을 ᄉᆞ라ᇰᄒᆞ니라&bull; 완전한 우리말 어순(SOV)으로 재배열&bull; 실질형태소는 훈독/음독, 형식형태소는 음차/훈차로 전면 표기이두(吏讀)樊遲 問仁爲隱大子曰 愛人是尼羅번지 문인ᄒᆞᆫᄃᆡ&nbsp;자왈 애인이니라&bull; 한문의 어순 유지하되 절&middot;문장 끝에 문법소(토)를 삽입&bull; 공문서&middot;실용문 위주 실질 단어(問仁, 愛人)는 한자어 그대로 유지차자구결&nbsp;(구결자/부호)樊遲問仁爲厓/𪜈(ᄒᆞᆫᄃᆡ)&nbsp;子曰厓/𪜋(ᄒᆞ샤ᄃᆡ) 愛人伊羅/𪜕(이라/이니라)번지문인ᄒᆞᆫᄃᆡ&nbsp;자왈ᄒᆞ샤ᄃᆡ 애인이라&bull; 한문 어순 사이사이에 약체자(약자)로 토(吐)를 기입하여 독송 보조현재의 한글 구결 (현토)樊遲ㅣ 問仁ᄒᆞᆫ대&nbsp;子ㅣ 曰ᄒᆞ샤대 愛人이니라번지이 문인한대&nbsp;자이 왈하샤대 애인이니라&bull; 한글로 주격조사(ㅣ) 및 연결&middot;종결어미를 직접 현토(2) 세부 표기 분석 및 설명① 향찰 (鄕札) 표기향찰은 향가(鄕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의 문맥과 어순(SOV) 전체를 100% 한자로 치환하여 적는 종합적 표기 방식입니다. 실질적인 뜻을 가진 말은 훈(뜻)을 빌리고, 조사나 어미는 음이나 훈을 빌려 촘촘하게 표기합니다.樊遲 仁乙 問爲隱大 (번지 어딜 묻ᄒᆞᆫᄃᆡ / 번지가 인을 묻자)仁(실질 의미: 어질), 乙(조사 &#39;을&#39;의 음차)問(실질 의미: 묻다), 爲(하), 隱(ㄴ/은), 大(ᄃᆡ/대)&nbsp;爲隱大 = ᄒᆞᆫᄃᆡ (연결어미 &#39;~한대&#39;)子 曰隱 人乙 愛爲尼羅 (자 ᄀᆞᄅᆞ샤ᄃᆡ 사ᄅᆞᆷ을 ᄉᆞ라ᇰᄒᆞ니라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라)曰隱 (ᄀᆞᄅᆞ샤ᄃᆡ 또는 ᄀᆞᆯ온)人乙 (사ᄅᆞᆷ을: 人은 훈차 &#39;사ᄅᆞᆷ&#39;, 乙은 음차 &#39;을&#39;)愛爲尼羅 (ᄉᆞ라ᇰᄒᆞ니라: 愛는 훈차 &#39;ᄉᆞ라ᇰ&#39;, 爲는 &#39;ᄒᆞ&#39;, 尼는 &#39;니&#39;, 羅는 &#39;라&#39;의 음차)&nbsp;② 이두 (吏讀) 표기이두는 관청의 행정 실무나 실용문에 주로 쓰였으며, 한문 본래의 단어 순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문장 마디마디에 결합어적 문법 요소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樊遲 問仁爲隱大 (번지 문인ᄒᆞᆫᄃᆡ)&#39;問仁&#39;이라는 한자 단어 덩어리 뒤에 어미 爲隱大(ᄒᆞᆫᄃᆡ)를 붙여 배경/조건을 나타냅니다.子曰 愛人是尼羅 (자왈 애인이니라)&#39;愛人&#39; 뒤에 서술격 조사와 종결어미의 결합형인 是尼羅(이니라/시니라)를 붙여 문장을 완결합니다. (是는 &#39;이/이다&#39;의 훈차, 尼는 &#39;니&#39;, 羅는 &#39;라&#39;의 음차)&nbsp;③ 전통 구결(口訣) 및 한글 현토(懸吐)구결은 한문 원문을 학습하거나 낭독할 때 문맥의 단락을 짓고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덧붙인 문법적 장치입니다.석독구결(釋讀口訣)과 순독구결(順讀口訣): 고려시대 이전에는 글자 옆에 구결자(예: 爲의 약자 𪜈, 厓의 약자 등)를 달아 우리말 어순으로 뒤집어 읽는 &#39;석독구결&#39;이 쓰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원문의 어순을 존중하면서 조사와 어미만 읽어 나가는 &#39;순독구결&#39;이 정착되었습니다.한글 구결(현토):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자 약체자 구결 대신 한글로 토를 달게 되었습니다.樊遲[ㅣ] 問仁[ᄒᆞᆫ대] 子[ㅣ] 曰[ᄒᆞ샤대] 愛人[이니라]주격 조사 ㅣ, 연결 어미 ᄒᆞᆫ대, 존칭 연결 어미 ᄒᆞ샤대, 종결 서술 이니라가 원문의 한자 덩어리 사이사이에 결합하여, 한문의 통사 구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말 교착어의 문법적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도록 돕습니다.<br> 6. 결어첫째, 위 역사적 사실을 알고 우리가 현재 한글로 의사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것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둘째, 한글로 인하여 의사소통과 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었고, 디지털 강국의 배경이 되었고, 디지털 시대에 세계 중심국가로 갈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셋째, 인문학 시대를 맞아 중국 고전이나 한문시대의 우리나라 서적을 공부하려면 한문체계와 우리말 체계를 다 같이 이해해야 제대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Sat, 10 Oct 2026 11:13: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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