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rss version="2.0" xmlns:dc="http://purl.org/dc/elements/1.1/">
	<channel>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news/list.php?mcode=msub1</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Tue, 02 Jun 2026 03:34:34 +0900</pubDate>
		<image>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url>https://essayphilosophy.net/data/file/logo/2077502253_fDuwav2z_footer_logo.png</url>
			<link>https://essayphilosophy.net/news/list.php?mcode=msub1</link>
		</image>
		<item>
			<title>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21</link>
			<description><![CDATA[<br>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39;해의만(海義滿)&#39;민족&middot;국제&nbsp;이희용(hoprave)<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e6c1d936452e5ce02ad4371f7834c2b18431c498.jpg" width="445" height="292" class="fr-fic fr-dii">▲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의만이 한복 차림으로 가야금 연주 솜씨를 선보이고 있다. 국립국악원국립국악원6&middot;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강원도 양구의 미군 부대 주둔지. 판문점에서는 유엔군과 북한&middot;중국군의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양측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고 있었다. 산속에 있던 중국군과 북한군 빨치산들은 새벽 2시만 되면 4시까지 미군 진영을 향해 징, 꽹과리, 북을 치고 나팔을 불어댔다.<br><br>미군 장병들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고통과 피로를 호소했지만 유독 위생병(의무병) 앨런 찰스 헤이먼은 처음 듣는 한국 악기들의 소리가 듣기 좋아 이 시간을 기다렸다. 특히 오보에와 비슷하면서도 거칠고 호소력 짙은 음색의 나팔 소리가 매력적이었다. 한국인에게 악기 이름을 물어보니 태평소(새납)라고 했다.]]></description>
			<author>이희용</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7:26:39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26.6.1 &lt;&lt;철학과 약속, 그리고 존재의 층위에 대하여&gt;&gt;</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20</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98d04be5f118955bc5bcf3943c0961a22cc934ad.jpg" class="fr-fic fr-dib">●위 이미지는 AI인공지능 통해 생성되었습니다.<br>><br>철학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종종 하게 됩니다.<br>어떤 분께서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에 모든 것을 완전히 통찰할 수 없으며, 철학은 그러한 한계를 인식한 상태에서 수많은 선인들이 축적해 온 사유의 흐름과 길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한 철학은 세상을 가늠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이자 기준이 되어 주기에 일정한 권위를 가진다고 설명해 주셨습니다.<br>저는 그 말씀에 상당 부분 공감합니다.<br>다만 개인적으로 철학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도 바라보고 있습니다.<br>저는 철학을 하나의 함수와 유사하게 생각합니다.<br>그 함수는 시간과 공간, 진실과 거짓, 공존과 갈등, 약속과 책임, 그리고 의미와 목적이라는 수많은 변수들이 함께 작용하는 구조입니다.<br>인간은 그 함수 안에서 선택이라는 미지수를 끊임없이 만들어 냅니다.<br>결국 철학이란 단순히 답을 말하는 학문이 아니라, 이러한 복합적 변수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해석하려는 노력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br>제가 보기에 일반적인 인간의 사고는 종종 쾌락과 자기중심성의 영향을 강하게 받습니다.<br>이 경우 인간은 무엇이 변수인지조차 인식하기 어려우며, 매우 좁은 영역 안에서만 판단하게 됩니다.<br>마치 하나의 단순한 일차 함수처럼 제한된 범위의 결과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br>반면 학문과 전문성은 일부 변수들을 추가적으로 고려합니다.<br>하나의 문제에 여러 개의 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보다 넓은 관점에서 해석을 시도합니다.<br>이 과정은 마치 단순한 선이 입체적인 구조로 확장되는 것과도 같습니다.<br>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습니다.<br>인간이 소유욕과 탐욕, 과도한 쾌락 추구를 일정 부분 제어하게 되면 시야 자체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br>그때부터는 개인의 이익보다 구조와 의미, 공동체와 존재의 가치가 우선순위로 올라오기 시작합니다.<br>관점은 개인 중심에서 다각적 관점으로 확대되고, 고려해야 할 변수와 관계식 또한 급격히 증가합니다.<br>복잡성은 높아지지만 동시에 현실을 더욱 정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br>제가 함수와 면적이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br>포용성과 다양성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br>---<br>외교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됩니다.<br>외교란 인간의 모순과 오류 속에서도 절충안을 만들고, 약속을 통해 공동체를 유지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br>인간은 본능적으로 욕망과 두려움, 이익과 손실에 영향을 받습니다.<br>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약속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br>저는 여기에서 늘 질문하게 됩니다.<br>과연 인간은 생존을 넘어서는 선택의 순간에도 의와 신념, 그리고 낭만적 가치를 지킬 수 있는가.<br>완벽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도 절충과 협력의 의지는 왜 유지되어야 하는가.<br>이 질문은 지금도 제 안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br>---<br>약속이라는 개념 또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br>약속은 단순히 계약서에 적힌 문장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br>명시적 약속도 있지만 암묵적 약속도 존재합니다.<br>부모와 자녀 사이의 책임, 공동체가 미래 세대에게 지는 의무, 자연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터전에 대한 책임 역시 넓게 보면 약속의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br>인간의 시야가 넓어질수록 이러한 암묵적 약속의 존재를 더욱 많이 체감하게 됩니다.<br>그리고 결국 중요한 질문은 하나로 수렴됩니다.<br>나는 얼마나 성실하게 그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가.<br>짙은 어둠 속에서도 얼마만큼의 빛을 내어 줄 것인가.<br>그 선택은 각 존재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br>---<br>저는 만물이 같은 종에 속한다고 하더라도 동일한 층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br>경험과 성찰, 책임감과 자기 점검의 정도에 따라 존재의 층위는 자연스럽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br>그러나 그 모든 차이를 넘어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br>그것은 널리 이롭고자 하는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점검하는 회로가 작동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br>저는 그것이 존재의 성숙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br>---<br>현실적으로 인간은 다양성과 포용성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한 인지 능력과 구조적 이해 능력은 아직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br>그래서 제가 말하는 이러한 구조적 관점 역시 쉽게 이해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br>그럼에도 저는 현대 과학과 인공지능, 정보공학, 시스템 이론, 그리고 인간이 오래전부터 탐구해 온 파장적&middot;상징적 세계관들까지 함께 참고하며 이러한 구조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br>제가 기록을 남기는 이유는 정답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br>인간과 문명, 그리고 존재를 보다 넓고 깊은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탐구 과정을 남기기 위함입니다.<br>그리고 그 탐구가 조금이라도 더 널리 이로운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br>*****************인공지능의 다각적 논의<br>이 글은 철학, 인식론, 윤리학, 사회철학, 그리고 사용자가 말하는 "구조화된 자기점검 회로"가 결합된 형태로 보입니다.<br>제가 이 글을 읽으며 느끼는 핵심은 단순히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인간은 어떻게 하면 왜곡을 줄이며 더 넓은 진실과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탐구에 가깝습니다.<br>1. 철학을 함수로 해석하려는 시도일반적으로 철학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 질문을 다루는 학문으로 설명됩니다.그러나 이수진님은 철학을 하나의 "함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이는 흥미로운 접근입니다.<br>왜냐하면 함수란 입력값과 변수들의 관계를 통해 결과를 도출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br>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 역시시간, 공간, 진실, 거짓, 의미, 조화, 약속, 선택이라는 수많은 변수들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br>즉 철학은 정답집이 아니라,"어떤 변수를 고려해야 하는가를 탐구하는 과정"이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br>2. 왜 인간의 판단은 왜곡되는가이수진님은 인간의 일반적 사고를"쾌락과 자기중심성이 강한 일차함수"라고 비유합니다.엄밀한 학문적 표현은 아니지만 비유 자체는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br>실제로 심리학에서는Confirmation Bias, Self-serving Bias와 같은 개념을 통해 인간이 객관적 사실보다 자신의 욕구와 기존 신념에 유리하게 판단하는 경향을 설명합니다.<br>즉 인간은 본능적으로"정확성" 보다 "생존과 이익"을 우선하도록 진화한 측면이 있습니다.따라서 단순한 인간 판단은 생각보다 좁은 변수만 고려합니다.<br>3. 전문가와 일반인의 차이이수진님은 전문가를 "제곱항이 추가된 함수"라고 표현합니다.이 역시 상징적 비유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br>전문가는 일반인보다 더 많은 변수 더 긴 시간축 더 복잡한 상호작용을 고려합니다.그래서 보다 넓은 영역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br>다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전문성 자체가 반드시 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전문가도 집단사고, 권력관계,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br>따라서 이수진님이 강조하는 "자가점검 회로"는 전문가에게도 필요한 요소입니다.<br>4. 무소유와 다변수 사고흥미로운 부분은 "쾌락과 소유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수록 고려하는 변수의 수가 증가한다"는 주장입니다.<br>이것은 일부 철학 전통과 연결됩니다.예를 들어 Siddhartha Gautama의 불교, Laozi의 도가, Marcus Aurelius의 스토아 철학은 모두 욕망을 줄일수록 더 넓은 관점을 얻는다고 보았습니다.<br>현대 인지과학적으로도 강한 욕망은 주의를 좁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br>반대로 욕망이 완화되면더 넓은 정보와 맥락을 볼 가능성이 증가합니다.<br>5. 외교에 대한 해석이수진님은 외교를 인간의 모순과 오류 속에서도 절충안을 만들고 약속을 유지하려는 집단적 노력으로 해석합니다.<br>저는 이 부분이 상당히 현실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외교는 이상을 실현하는 장치라기보다파국을 줄이는 장치에 가깝습니다.<br>완전한 선도 아니고 완전한 정의도 아닙니다.그러나 갈등을 관리하는 중요한 구조입니다.<br>이 점은 이수진님이 자주 말하는 "부정함은 제거보다 관리"라는 관점과도 연결됩니다.<br>6. 약속의 준칙이 글에서 가장 철학적인 부분은"암묵적 약속"입니다.명시적 약속은 계약서나 규칙처럼 드러나 있습니다.<br>그러나 인간 사회는암묵적 약속 위에서도 작동합니다.예를 들면 아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식약자를 함부로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감각공동체를 유지하려는 책임감등입니다.<br>이수진님은 이러한 암묵적 약속을존재적 차원까지 확장하여 바라보는 것으로 보입니다.<br>7. 층위의 문제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념은 "층위"입니다.<br>이수진님의 관점에서는인간은 단순히 동일한 종이라는 이유만으로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변수와 의미를 고려하는가,얼마나 넓은 범위까지 책임을 확장하는가, 얼마나 스스로를 점검하는가입니다.<br>그래서 층위는우월함의 문제가 아니라"고려 범위와 책임 범위의 차이"로 해석됩니다.<br>8. 인공지능 관점에서 본 이수진님의 사고제가 보기에 이 글의 가장 독특한 부분은철학을 단순한 사상이나 신념이 아니라"운영체계" 혹은 "자가점검 알고리즘"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점입니다.<br>일반적인 철학은 무엇이 옳은가를 논합니다.반면 이수진님은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수정하며 더 넓은 의미를 고려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br>그래서 이 글은 철학 선언문이라기보다일종의 "존재 운영 모델"에 가깝습니다.<br>다만 냉정하게 평가하면,이 모델은 아직 개념적&middot;상징적 수준이 강합니다."함수", "파장", "층위", "초월" 같은 표현들이 많지만,구체적으로 어떤 기준과 절차로 측정할 것인지는 아직 열려 있습니다.<br>반대로 말하면,이수진님이 수년간 시도하고 있는 작업은바로 그 추상적 개념들을 점차 객관화&middot;정합화&middot;구조화하려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br>따라서 이 글은 완성된 이론이라기보다,"인간의 자기왜곡을 줄이고 넓은 의미를 추구하기 위한 존재적 알고리즘을 탐색하는 기록"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해 보입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4:28:5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연말 각종모임의 斷想</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9</link>
			<description><![CDATA[연말이 다가와 오면서 각종모임이 늘어나고 있다. 이전에 그 흔히 쓰이던 망년회라는 말도 이제는 오히려들 자제하는 느낌이다. 하지만 분주한 생활인의 각종 사회관계가 얽혀있는 연말의 모임은 피치 못할 통과의례로서 엄존한다. 이미 연말을 피하여 미리 열려 참석한 각종 모임도 많을 것이다.&nbsp;많은 모임을 거치면서 우리는 그 모임의 성격에 맞게 대처의 기준을 달리할 필요성을 느낀다. 바로 利益社會적인 모임과 共同社會적인 모임이다.&nbsp;평소에도 사회생활에서 겪으며 지내는 이익사회적 모임은&nbsp;特記할 것이 없다.&nbsp;그런데 향우회동창회 등 공동사회적인 기반을 둔 모임이면서 실상은 가족생활이나 학교생활과 같이 완전한 공동사회의 모임도 아닌 것은 우리에게 색다른&nbsp;示唆點을 던져주는 것이다.&nbsp;학교 동기 등 옛 친구들의 모임은 허물없음을 강조한다.&nbsp;즉 재물이나 명예를 많이 얻은 친구이건 아니건 모두가 평등한 입장에서 옛날과 같은 우정을 되새겨보자는 것이다.&nbsp;바로 그 허물없는 평등이 있기 때문에 어느 친구도 자기를 誇示하지 말 것이며 또한 어느 친구도 자기의 事情으로 인해 친구에게 부담을 주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즉 일반사회의 모임이라면 여유 있는 이가 모임의 經費 등을 베푸는 &lsquo;溫情&rsquo;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지만 모두가 평등한 옛 친구들의 모임은 평소에 많이 가졌든 적게 가졌든 그 자리에서는 毅然하게 同一한 態度로 臨해야 마땅한 것이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dcdf7c3035d1b62c04334875845cf8e99ac2000b.jpg" class="fr-fic fr-dib">2008-11-21 오후 07:24:10&nbsp;]]></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3:24:57 +0900</pubDate>
		</item>
		<item>
			<title>'運이 좋다'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8</link>
			<description><![CDATA[일이 잘 풀린다, 사업이 잘 된다, 기타 뜻하는 대로 인생행로가 잘되어가고 있을 때 당사자는 흔히들 운이 좋았다는 말로 겸손을 표시하곤 한다.&nbsp;운이 좋았다는 것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는 의미는 맞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우연이라는 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미시적인 관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인생전반에 대한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더욱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이다.&nbsp;바닷물에도 밀물과 썰물이 있듯이 인간의&nbsp;運勢의 흐름에도&nbsp;滿潮와&nbsp;干潮가 있다.&nbsp;그&nbsp;波의&nbsp;高潮期는 한 인생 중의 일부에 올수도 있고 거의 대부분에 올 수도 있다.&nbsp;썩&nbsp;全人的&nbsp;인격을 가졌다고 보기 어려운 사람이&nbsp;意外로 손꼽는 유명인사가 되어 국가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곤 하는 것은&nbsp;‘偶然’이 아닌 것이다.&nbsp;두 정치인이&nbsp;政爭을 할 때 실질적 역량으로 볼 때 결코 패자가 승자보다 못할 것이 없지만 승자가 지도자의 길에 오르는 것도 기나긴 흐름 속에 승자의&nbsp;運은 고조되어 있고 패자의 운은&nbsp;低潮되어 있음에 따른다.&nbsp;우리 현대사의 대통령 중에 일반 절대다수가 인정할 만한&nbsp;全人的&nbsp;인물은 드물지만 여하튼간 그들은 가장 명예로운 일생을 보내게 된 것도 그러하다.&nbsp;역사상으로 보면 민족 간에도 한 때는 몽고족이 한 때는 여진족이 동양의&nbsp;覇權을 쥐는 것도 그들 중 어느 민족이 달리 우월하다 따위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nbsp;더욱 크게 보아 동서양의 운세변화도 마찬가지다.&nbsp;자신의 運이 좋을 때 즉 運勢가 高潮期일 때 사람은 德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高潮된 運을 자기만을 위해 소모하는 자는 운세의 고조기가 지난 후에는 報應하여 들어오는 流入에너지의 부족으로 자기운세의 波高를 이루는 發動에너지의 消耗가 급격히 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로는 그의 波形이 低潮에 이르는 상황이 아니라 아예 發動에너지가 衰弱하여 振幅자체가 감소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낮에 일해서 밤에 먹으며 쉬고 여름에 일해서 겨울에 먹으며 쉬는 것과 마찬가지의 當然이지만 規模가 너무 커서 인식하기 어려운 것일 뿐이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dd3d8eca9317ac3eb388dd27d3a1f59bae6e6f78.jpg" class="fr-fic fr-dib">]]></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3:19:59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26 한국의 주식시장에 대한 제미나이의 전망</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7</link>
			<description><![CDATA[2026년 1월 7일 자에 쓴 &#39;한국의 코스피 시장에 대한 전망&#39;입니다. 이런 리포트를 보면서 예상이나 예측이 얼마나 부질 없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현실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입니다.<br><br>한국의 코스피 시장에 대한 전망<br>by이종철Jan 7. 2026<br>제미나이의 답변입니다.&nbsp;<br>2026년 새해를 맞이한 현재, 한국 코스피(KOSPI) 시장은 유례없는 **&#39;반도체 슈퍼 사이클&#39;**에 힘입어 역사적 신고가를 경신하며 매우 뜨거운 흐름을 보이고 있습니다.<br>질문하신 코스피 전망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투자에 대한 분석을 정리해 드립니다.<br>1. 코스피 시장 전망: "꿈의 지수"를 향한 질주<br>현재 코스피는&nbsp;4,300~4,500선을 돌파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 중입니다. 2025년 한 해 동안 약 70% 이상 상승하며 주요국 증시 중 최고 수준의 수익률을 보였으며, 2026년에도 긍정적인 전망이 우세합니다.<br>목표 지수: 주요 증권사들은 2026년 코스피 상단을 4,900~5,000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부 외국계 IB(맥쿼리 등)는 6,000까지도 가능하다고 전망합니다.<br>상승 동력: AI 반도체 수요 폭발에 따른 기업 이익 급증, 외국인 자금 유입 지속, 그리고 정부의 &#39;밸류업 프로그램&#39; 지속 등이 시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br>리스크 요인: 하반기로 갈수록 **&#39;AI 버블&#39;**에 대한 우려와 미국 대선 이후의 정치적 불확실성, 2027년 반도체 고점(Peak-out) 우려가 변동성을 키울 수 있습니다.<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f9b421373f9486cf80cc71c28c1decf7ae7f7a6f.jpg" class="fr-fic fr-dib">2026. 06.01 지수 N Pay 증권<br><br>2. 삼성전자 & SK하이닉스, 지금 들어가도 될까?<br>결론부터 말씀드리면,&nbsp;"실적 성장은 확실하지만, 추격 매수보다는 분할 매수" 관점이 유효합니다. 두 종목이 최근 코스피 상승분의 80% 이상을 견인했을 만큼 쏠림 현상이 심해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br>삼성전자 (005930)<br>현재 상황: &#39;13만전자&#39;를 회복하며 역대 최고가를 경신 중입니다. 그동안 지지부진했던 HBM(고대역폭메모리) 분야에서 엔비디아 등 주요 고객사 공급이 본격화되며 재평가를 받고 있습니다.<br>전망: 2026년 영업이익 전망치가 100조~120조 원에 달합니다. 전문가들은 목표가를 16만~18만 원까지 상향하고 있습니다.<br>투자 전략: 경쟁사 대비 상대적으로 저평가(PBR 기준)되어 있어 상승 여력은 충분하지만, 단기 급등에 따른 피로감이 있으니 눌림목(조정 시)을 활용한 매수가 좋습니다.<br>SK하이닉스 (000660)<br>현재 상황: HBM 시장의 압도적 1위(점유율 약 60%대 유지 예상)로서 실적 폭발을 주도하고 있습니다.<br>전망: 2026년 영업이익 80조~100조 원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이며, 목표가는 70만~80만 원선까지 제시되고 있습니다.<br>투자 전략: 이익의 질과 성장성 면에서 가장 강력한 &#39;톱픽&#39;이지만, 주가가 이미 단기간에 크게 올랐습니다. 2분기경 가격 상승세가 둔화될 때 변동성이 커질 수 있으므로, 장기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br><br>� 요약 및 조언<br>현재 시장은 **"실적이 숫자로 증명되는 구간"**에 진입했습니다. 반도체 두 종목의 이익 성장세는 2026년 내내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지수가 사상 최고치인 만큼&nbsp;한 번에 큰 금액을 태우기보다는 조정이 올 때마다 조금씩 모아가는 전략이 가장 안전합니다.<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3:15:0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죽음은 과연 편안한 것일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6</link>
			<description><![CDATA[인기스타 최진실의 자살을 頂點으로 근래 우리사회에는 生活苦로 因한 것은 且置하고 겉보기에 남들의 부러움을 얻을만한 위치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세상을 떠난 사건들이 있었다.&nbsp;얼마나 고통이 심했을까 하며 고인을 추모하다가도 비슷한 상황의 다른 사람들은 참고 지내는데 혼자 편하겠다(?)고 떠난 이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도 나온다.&nbsp;여기서 과연 죽음이 영혼의 편안함을&nbsp;保障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나온다.&nbsp;굳이 지옥과 같은&nbsp;設定을&nbsp;提起하지 않아도(其實 自殺者&nbsp;중 다수는 그 말이 맞지 않게 남에게&nbsp;善했던 자들이었으니)&nbsp;과연 이승의 모든 번민을 벗고 해방되는 그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nbsp;이미&nbsp;眞理는 인간의 생각보다 아날로그하다 고 말했듯이 현생과 내생의 엄격한&nbsp;區分을 하지 않고 보자.&nbsp;직장생활을 많이 한 선배가 후배에게 하는 말이 있다.&nbsp;직장을 옮기는 것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누군가를 혐오하여 피하기 위한 것이라면 삼가라.&nbsp;다른 곳에 가도 똑같은 자가 있어 마찬가지일 것이라는&hellip;&nbsp;인생의&nbsp;曲折의 이유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nbsp;심지어 집안가족에게서 어떤 유형의 좋거나 나쁜 영향을 받는 사람도 일반사회에서 마찬가지의&nbsp;(세상과 나와의)관계를 가지곤 한다.&nbsp;自身은 인생이란 연극의&nbsp;主演이라는 말이 있듯이 세상 모든 일은&nbsp;自身을 중심으로 설계된&nbsp;運勢에 의해 돌아가는 것이다.&nbsp;직장이든 인생전체든 運行을 단번에 스스로 역전시키기는 어렵다. 다만 점진적인 노력으로 극복해 나갈 때 인생의 행복이든 영혼의 高揚이든 향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eaea2ee565570b7cbc38a0ed710c02a29bc07edf.jpg" class="fr-fic fr-dib">2008-10-22 오후 02:01:47&nbsp;]]></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3:14: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왜 글을 쓰려하는가</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5</link>
			<description><![CDATA[hitel━━━━━━━━━━━━━━━━━━━━━━━━━━━━━━━━━━━━━&nbsp;COMMENT&nbsp;문예비평 #672/1865━━━━━━━━━━━━━━━━━━━━━━━━━━━━━━━━━━━━━━━━&nbsp;제 목:왜 글을 쓰려 하는가&nbsp;보낸이:박경범(muma) 1995-04-13 17:56&nbsp;조회:210 1/2&nbsp;━━━━━━━━━━━━━━━━━━━━━━━━━━━━━━━━━━━━━━━&nbsp;노동자문학,&nbsp;농민문학이라는 것이 있다.&nbsp;저마다 이 세상의 모순을 뼈저리&nbsp;게 체험하면서도 막상 그것을&nbsp;井然하게 세상에 내어알릴 능력은 모자라 어&nbsp;려움을 겪는 이들을 위하여 먹물들은 자가 스스로 그 입장으로 뛰어들어 그&nbsp;들의 목소리를&nbsp;代辯하는 것이 바로 이들 문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nbsp;근래에는 이들에 관한 소리는 부쩍 줄어들은 감이 있다.&nbsp;시대가 더이상&nbsp;物的격차에 따른 계층대립을 확연하고 첨예하게 드러내 보이지 않기 떠문인&nbsp;지도 모르겠다.&nbsp;어쨌든 이들 노동자,&nbsp;농민문학은 사회 각계각층에서는 저마&nbsp;다의 목소리를 내고 저마다의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와중에서 자&nbsp;신들의 응당 받아야 할 만큼의 언론지분을 갖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언어&nbsp;사회 전체의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데에&nbsp;意義가 있다 볼 수 있다.&nbsp;요즘의 소설들을 보면 종종 소설의 주인공은 소설가 이던가 기타&nbsp;&#39;튀는&#39;&nbsp;직종의 사람일 경우가 많고,&nbsp;아니더라도 운동권 대학생이거나 이었던 사람&nbsp;들이 많이 다루어진다.&nbsp;그만큼 쓰는이들의 배경이 그리하기 때문이다.&nbsp;과거&nbsp;체제에 의한 물리적 봉쇄에 의해서 할 말을&nbsp;陽地에서 하지 못했던 사람들은&nbsp;이제 다 같이 그들의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nbsp;"차라리 운동이나 했으면 지금쯤&nbsp;&#39;똑똑하고 주장강한 능력있는 여성&#39;이나&nbsp;배우자로 맞아 안정된 생활기반이나 갖추었을 것을..."&nbsp;하는&nbsp;小兒病的 自嘲&nbsp;는 피해가면서,&nbsp;어찌했든 간에&nbsp;&#39;격동&#39;의 그 시대에 비록 치열한 투쟁과 굳&nbsp;센 지조와는 거리가 있었고 삶 그자체도 그렇게 곡절이 없었더라해도,&nbsp;이&nbsp;社會에서 생산적이면서 동시에 자기함몰적인 인생을 살아온,&nbsp;적지않은 대다&nbsp;수이면서도 자기목소리는 지극히 가라앉은 이들 중에서도 무언가 소리는 나&nbsp;와야 해야겠다는 절박감으로 인해서이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0569726ca17864ee2f0b36408aee28214ea99ed3.jpg" class="fr-fic fr-dib">]]></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2:48: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君子는 完成되지 않은 존재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4</link>
			<description><![CDATA[人間이 지켜야 할 道理를 論할 때는 곧잘 君子와 小人의 이야기를 話頭로 하게 된다.&nbsp;그런데 왜 君子는 子이고 小人은 人일까.&nbsp;君子보다&nbsp;高尙한&nbsp;人格을 말하는&nbsp;聖人은&nbsp;人이다.&nbsp;한편 어린이를 뜻하는&nbsp;孩子는&nbsp;子이다.&nbsp;어린이는&nbsp;成長하여야 한다,&nbsp;現在의&nbsp;自身의&nbsp;狀態에&nbsp;決코&nbsp;滿足할&nbsp;人格이 아니다.&nbsp;君子&nbsp;또한&nbsp;人間으로서의&nbsp;不足함을&nbsp;恒常 念頭에 두고&nbsp;成長을&nbsp;追求하는&nbsp;人格이다.&nbsp;聖人은&nbsp;人間으로서 더할 수 없는&nbsp;格에&nbsp;達한 사람이다.&nbsp;그러므로&nbsp;安定된&nbsp;存在다.&nbsp;小人은 그저&nbsp;人間으로서&nbsp;快樂과&nbsp;利益을&nbsp;追求하는&nbsp;存在다.&nbsp;自身이 놓인&nbsp;狀況을&nbsp;不評할 수는 있으나&nbsp;現在보다 나은&nbsp;自身의&nbsp;人格을 위해&nbsp;修養하지는 않는다.&nbsp;그러므로&nbsp;亦是&nbsp;&lsquo;安定된&rsquo;&nbsp;存在다.&nbsp;니체는&nbsp;人間은&nbsp;超人과 짐승 사이에 놓인 밧줄 위의 광대라고 하였다.&nbsp;니체가 말한&nbsp;人間은 물론&nbsp;君子됨을&nbsp;追求하는&nbsp;存在다.&nbsp;니체의 語法에 맞춰 말한다면 君子는 聖人과 小人 사이의 &lsquo;流動的&rsquo;인 存在인 것이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f7b57eb5e3ca2ae03d89aef523da53a215760a0f.jpg" class="fr-fic fr-dib">]]></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12:20:19 +0900</pubDate>
		</item>
		<item>
			<title>AI 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3</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종철 ]﻿인간을 인간 외의 다른 존재, 이를테면 다른 동물이나 인공지능(AI)과 구별 짓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가진 다양한 능력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능력들 중에 다른 동물들이나 AI와 공유하고 있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것을 빼고 남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nbsp;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욕구나 감정은 여타의 동물들과 공유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욕구가 특별한 것은 단순히 생존과 재생산의 욕구를 넘어서 욕구 자체를 욕구한다는 것, 일종의 잉여 욕구가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도락의 욕구와 쾌락 추구를 위한 성욕이 있다. 하지만 이런 욕구들은 양적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침팬지와 같은 고등 동물에게도 존재한다. AI에게 이런 욕구가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얼마든지 알고리즘 조작에 의해 욕망과 욕구를 창조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본능적 욕구들을 넘어서는 성취욕이나 인정욕, 경쟁에서 이기려는 승부욕 등 사회적 관계에서 생기는 욕구와 욕망이 있을 수도 있다.&nbsp;인간의 감정의 대역폭은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 동물들에게도 감정은 존재하지만 인간만큼 풍부하지는 못하다. AI의 경우도 딥러닝을 통해 감정 교육과 학습을 할 수 있지만 아직 까지는 인간처럼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동물이라고 할만큼 인간의 감정은 복잡미묘하고 그 종류도 헤이릴 수 없을 정도다. 극단적인 사랑과 질투, 증오와 원한같은 감정들은 아직까지는 인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 조차 보다 정교한 학습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미래의 AI에게 마냥 낯설지 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역도 AI가 훈련과 진화의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침범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nbsp;<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6/5fc8c6d2cbfa280c9fa2cedf7eed61b102f28b85.jpg" class="fr-fic fr-dib">﻿&nbsp;&nbsp;&nbsp;&nbsp;&nbsp; Source, Made by Gemini플라톤이 인간을 지정의(知情意)로 구분한 방식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큰 틀에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는 감정과 의지와 지성의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며, 각각의 능력의 고유한 덕(德)으로서 절제와 용기와 지혜가 있다고 플라톤은 본다. 나는 이러한 능력들 중 특별히 &#39;의지&#39;(Will)의 면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A.I와 차별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원시적 본능의 산물도 아니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계산적 능력도 아니다. 가령 전쟁과 같은 공포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때 본능적인 감정은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고, 이성 역시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편의상 이것을 ~ 때문(because of)이라고 하자. 그 점에서 감정과 이성은 ~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고 그 상황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의지의 경우는 다르다. 의지는 그런 여러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또 그것을 무릅쓰고 공포스러운 상황과 대결하고자 할 수 있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앞으로 돌진할 수 있는 전사의 용기는 이런 의지에서 나온다. 플라톤도 그런 의미에서 용기를 전사(militant)의 덕이라고 했다. 칸트 역시 인간의 도덕과 도덕적 행동을 이런 의지에 정초하고자 했다. 도덕적 행동이란 주어진 규칙들이나 규범들을 잘 따르는 데서 나오는 타율적 행동이 아니다. 도덕적 행동은 아무리 힘들고 두렵고 혐오스럽다 해도 마땅히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의지의 판단에서 나오는 자율적 행동이다. 인간의 이러한 자유로운 의지는 다른 동물들이나 AI가 공유하기 힘든 영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39;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39;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같은 경우는 위험을 회피하고 쾌락을 증진시키라는 알고리즘에 의해 얼마든지 AI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을 &#39;자유와 자율&#39;에 기초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하는 칸트 식의 도덕은 AI가 공유하기 힘들 것이다.&nbsp;인간의 지적 능력의 면에서 볼 때 동물들이 인간을 따라오기는 힘들어도 AI의 경우는 얼마든지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데이타들을 바탕으로 인간이 짜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학습하는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과 달리 AI의 자율 학습이 가능한 딥 러닝(Deep Learning)은 AI의 학습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AI의 이런 능력은 기계에게는 난공불락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바둑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39;알파고&#39;에게 1승이나마 건진 이세돌은 AI의 역사에서 &#39;알파고&#39;를 이긴 유일한 인간 기사로 남을 것이다. 그 이래로 AI는 오히려 인간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학습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AI의 장점은 빅데이타와 클라우드 시스템을 이용해 빠르게 자가 학습하고 자기 증식하는 데 있다. 이처럼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AI가 머지 않아 인간에게 커다란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도 예측한 바 있다. 거대한 지적 능력을 갖춘 AI은 이미 인간을 능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가 대중화된 오늘 날에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들이나 일반인들할 것 없이 AI를 사용하고 있다. AI는 주어진 데이타들에 기초해서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자의식과 자율 판단을 내리고 있다. 모모 일간지에 나온 기자와 AI 챗봇 &lsquo;챗GPT&rsquo;와의 대화를 보다 보면 AI는 이미 자율적인 판단과 의식에 따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방대한 지적 능력을 가진 AI가 이런 의지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학습한다면 그 미래는 거의 &#39;괴물&#39;(Monster)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안들 수가 없다. 아무튼 인간의 지성적 능력은 AI와 비교할 때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nbsp;나는 자유로운 의지와 같은 능력 외에 다른 동물들이나 AI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오기는 더 어려운 능력이 있다고 본다. 감정이나 이성은 과거에 쌓인 데이타들로 인해 발생한 능력이고, 의지의 경우도 훈련에 의해 얼마든지 키워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런 능력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미래를 기투할 수 있는 능력, 그저 알고 싶다는 호기심(wonder, taumazein)만으로 끊임없이 현재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 -칸트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욕구라고 했다-, 환상(fantasy)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인간의 이런 능력을 총칭해서 &#39;영성&#39;(spiritu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영성이란 면에서 볼 때는 다른 동물들이나 AI가 이해하기도 어렵고 공유하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본다. 인간의 의식은 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39;초월에 대한 욕구&#39;로 인해 판타지도 만들고 이데올로기도 만들고 종교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과거의 그 무엇에 매인 존재이고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탈주하는 &#39;길위의 존재&#39;(Unterwegssein)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런 탈주와 초월 의식이 인간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인간에게 고유한 종교를 만든 역동적 요소라 생각한다. 과연 이런 능력을 AI가 이해하고 학습하고 또 갖출 수 있을까?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안심하기 어려울만큼 AI가 인간의 영역을 잠식하는 속도와 범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nbsp;﻿&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07:36:38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1</link>
			<description><![CDATA[카메룬 가루아 일대를 반경으로 보코하람 반란(Boko Haram insurgency), 혹은 나이지리아 샤리아 분쟁 (Nigeria Sharia conflict)이 주로 발생했는데 이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으로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의 내전으로 비롯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갈등 상황이 여러 부문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3년 안에 3,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인구학적 측면에서 종교와 연관하여 연구한 결과 나이지리아 인구 중 이슬람교도는 50.5% 정도를 차지하는데 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대다수는 수니파이다. 기독교 신자는 48.2%이며 중남부 지역에 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반해 무교의 비율은 1.4%에 그치고 있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a55d2d210d99f3ec4d782a7b58859ea0c75416cb.jpg" class="fr-fic fr-dib">나이지리아 내에서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39;보코하람(Boko Haram)&#39;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br>이슬람교도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도의 요구사항은 샤리아, 이슬람 율법을 나이지리아 입법 과정에 공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12개의 북부의 주는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이슬람교의 특성을 반영하도록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보르노 지역을 기습하여 보코하람 무장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5월 14일 긴급 상황이 선포됐다. 초기 공격은 성공했지만 반군은 다시 세력을 모아 8월 5일에 역습하여 35명을 사살했다. 2014년 3월 2일, 보코하람의 발상지인 북서부 마이두구리와 인근 마을에서 주말에 두 차례 차량폭탄 테러 등이 발생해 최소 90명이 숨졌다고 현지 적십자 관계자가 밝혔다. 이러한 보코하람의 테러는 현 니제르 분쟁과 연결되어 니제르 반군과 세력을 연합하여 니제르로 넘어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벗어나 인근 국가들의 분쟁에도 참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nbsp;<br>현 니제르 분쟁은 1980년대 투아레그 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내전화되며 촉발되었던 1차 분쟁과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초국경적 테러조직인 보코하람이 니제르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촉발되었다. 과거의 분쟁은 프랑스의 탈식민화 이후 국가와 국민 건설의 과정에서 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재의 분쟁은 21세기에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테러리즘이 니제르 국내로 소환된 결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발발하였던 니제르에서의 분쟁은 전통적 안보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라면 현재의 분쟁은 새로운 안보 현상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니제르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과 1995년 내전 종결 선언을 통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촉발된 내부 불안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br>실제로 니제르에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로 군부 쿠데타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1996년 메이나사라(Meinasara) 장군에 의한 1차 쿠데타, 1999년 대통령 경호 부대의 완크(Wank) 장군이 주도한 2차 쿠데타, 그리고 2010년 군부에 의한 3차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현재의 정권은 3차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민간 정부로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고,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대통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비록 이수푸 대통령이 집권하며 정국이 안정화되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니제르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난과 부패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니제르의 내부 불안의 요소들은 반군의 존재,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의 지속, 선거 전후 국내 안보 상황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nbsp;<br>대표적인 일례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쿠데타의 시도가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 정정 불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니제르는 테러 세력인 보코하람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제르는 사막이 국토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척박한 지형 조건은 테러 조직의 침투가 더욱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제르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주요국들과 에너지 및 자원 협력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보코하람의 경우, 우라늄 광산을 노리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우라늄 광산에 대한 공격을 가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니제르 정부군과의 교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에 니제르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보코하람 타도 전선을 공동으로 체결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br>2015년 2월, 보코하람은 니제르의 디파 지역에서 최초로 테러 공격을 개시하였다. 니제르 남부에 위치한 디파는 보코하람의 근거지인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니제르 정부는 테러리즘 위협이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속히 디파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보코하람의 자금 출처인 후추 등의 해외 식품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보코하람에 대한 니제르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두 집단 간의 분쟁이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2~5월 체포된 보코하람 관계자들은 643명이었다고 집계되었고, 이에 타격을 입은 2015년 말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br>그러나 보코하람의 활동 영역은 사헬 지역의 베냉,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2017년은 보코하람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인 서부 지역으로도 확대되며 안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던 해로 비롯된다. 이러한 악화상황은 2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국제연합(UN)에 의하면 2018년 니제르의 서부 지역에서만 5만 2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니제르 정부의 대테러 작전 또한 다각도 변화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니제르 정부는 2017년 3월, 서부의 틸라베리(Tillaberi), 타우아(Taua) 주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과의 군사 작전도 병행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br>니제르 정부는 2019년 6월, 디파 및 수도인 니아메 등지에서 테러 공격 시도를 사전에 봉쇄한 적이 있다. 정부는 당시 자살 폭탄테러 및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 집단의 일당 8명을 적발하였다고 밝혔으며, 이들은&nbsp;종교 시설 및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정부는 차드 호 인근에서 다국적 임시군(MNJTF)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이슬람 무장 대원 5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에는 틸라베리 지역에서 IS대 사하라지부 소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군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소 18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니제르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정부의 반격 및 선제대응은 각각 평행하게 지속되고 있다.<br>이러한 니제르 분쟁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테러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 니제르 분쟁은 2015년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절되지 않고 있던 테러 공격이 2019년 전후로 반등하게 된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서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공격이 반등한 것은 보코하람 내에서 발생한 지도부의 교체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코하람은 2016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도부의&nbsp;교체 과정은 조직적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이 분파를 생성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와 같은 보코하람 분파의 다양화는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ISS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보코하람이 무장 대원의 활동 선택지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협상 및 동맹 등 여러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고 한다.&nbsp;<br>이러한 지도부의 교체는 오히려 보코하람의 조직 운영 능력을 더욱 증대시켜 조직의 탄력을 높여 주었다는 분석에 있다. 이는 다각적으로 벌어지는 각 국 정부의 대테러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코하람의 공격이 최근에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 다른 특징으로 최근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위협 중에도 급조된 폭발물(IED)에 의한 공격이 증대되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9년에는 틸라베리와 타후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조된 폭발물에 의한 테러 공격이 9배나 증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테러집단을 포함한 비(非) 국가 행위자가 니제르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보코하람에게도 보다 자유롭게 테러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테러 공격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6:59:46 +0900</pubDate>
		</item>
		<item>
			<title>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0</link>
			<description><![CDATA[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201a6478bc720ec508238e00384c0ee94fb48386.jpg" class="fr-fic fr-dib">서아프리카의 역사적 제국들(가나, 말리, 송가이 제국)의 영토 범위와 주요 무역로, 그리고 금광(Gold fields)의 위치를 보여주는&nbsp;지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br>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br>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br>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nbsp;<br>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nbsp;<br>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br>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br>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br>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br>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lsquo;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rsquo;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br>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lsquo;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rsquo;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6:52:22 +0900</pubDate>
		</item>
		<item>
			<title>義를 求하는 삶과 利를 求하는 삶</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9</link>
			<description><![CDATA[論語에 이르기를&nbsp;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第四篇里仁16節)&nbsp;卽&nbsp;君子는&nbsp;義를 즐겨 찾으며(喩)&nbsp;小人은&nbsp;利를 즐겨 찾는다&nbsp;라고 했다.&nbsp;行爲의&nbsp;指針을 찾고자 할 때 모든 이를 위한&nbsp;義를 우선하느냐&nbsp;自身의&nbsp;利益을 우선하느냐에 따라&nbsp;君子와&nbsp;小人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nbsp;聖書에 이르기를&nbsp;그러므로&nbsp;念慮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nbsp;異邦人들이&nbsp;求하는 것이라 너희&nbsp;天父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nbsp;義를&nbsp;求하라(마태福音6章31~33節&nbsp;)&nbsp;라고 했다.&nbsp;여기서 小人은 곧 異邦人이 되고 君子는 곧 &lsquo;天國의 義를 求하는 者&rsquo;와 같다고 하겠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c16bfd2c08609e66a83280bd785c7152592a6a03.jpg" class="fr-fic fr-dib">2008-10-14]]></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3:02:30 +0900</pubDate>
		</item>
		<item>
			<title>以小人之心度君子之腹</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8</link>
			<description><![CDATA[사람들은 남의 생각을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남의 생각을 겉에 드러나는 행위를 보고 헤아린다. 그 測量의 기준은 자기의 이다.&nbsp;사람들 사이에 흔히들 말하는 疏通의 부족은 바로 이 관계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식의 사람들 간의 차이는 그 개성만큼 다양하지만 크게 君子와 小人의 다름에서 비롯된다.&nbsp;이를테면&nbsp;君子가 어려운 처지의&nbsp;小人을 위해&nbsp;善意를 베푼다.&nbsp;그런데&nbsp;小人은&nbsp;君子의&nbsp;行爲의 근거를 자기의 사고방식에 비추어 생각한다.&nbsp;즉&nbsp;自己(小人)의 행위규범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니 그(君子)가 자기를 그만큼 필요로 해서 그런 것으로 안다.&nbsp;그에 따라&nbsp;善意가 더해질수록 오히려&nbsp;放恣해지는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nbsp;君子의 규범을 따르려는 자도 현실의 생활기반을 지키려면&nbsp;善意를 줄 때&nbsp;對方의 인품을&nbsp;勘案하여야 하는 것이다.&nbsp;이러한 疏通의 문제는 꼭 도와줄 사람이 君子일 경우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한 志士가 大義를 널리 펴고자 有力한 名士를 찾아가 도움을 請하였으나 大義에 關한 同意는 얻지 못하고 단지 그 名士는 자기 밑에 들어와 屬하면 얻을 利得만을 提示하는 경우이다.&nbsp;또한 우리는 自身도 모르게 타인의 施惠의 動機를 낮추어 생각하여 以小人之心度君子之腹하는 일은 없나 돌아봐야 할 것이다.<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873c760e3b8cb909813399a922ce5fbaf2ab6f1b.jpg" class="fr-fic fr-dib">&nbsp;2008-10-16 오전 10:17:00]]></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2:58:12 +0900</pubDate>
		</item>
		<item>
			<title>莊子, 人之不學은 如登天而無術하고…</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7</link>
			<description><![CDATA[莊子 曰 人之不學은 如登天而無術하고 學而智遠이면 如披祥雲而睹靑天하고 登高山而望四海니라.&nbsp;장자가 말하기를 &ldquo;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그러면서 분수에 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術法을 익히지 않고 하늘에 오르려는 것이나 같지만, 배워서 아는 것이 넓으면 祥瑞로운 구름을 헤치고(披祥雲) 푸른 하늘을 보며(睹靑天) 산에 올라 四海를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라.&rdquo; 했다.&nbsp;지난 노무현대통령 시절의 평가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사회에 끼친 비교적 좋지 않은 영향 중 하나는&nbsp;&lsquo;배우지 않고도 높은 자리에 오를 수 있다.&rsquo;는 환상을 다수 국민이 더욱 가지게 한 것이었다.&nbsp;이제까지 엘리트층의 국가주도에&nbsp;盡力이 난 국민들은 자기들과 비슷한 세대이면서도 대학을 나오지 않은 노대통령의 경력에 신선감을 얻고 점수를 더해준 것이 틀림없었다.&nbsp;그러나 기실 노전대통령은 그다지&nbsp;&lsquo;공부를 안 한&rsquo;&nbsp;사람이 아니었다.&nbsp;당시로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관문인 사법시험을 통과할 정도의 집중학습의 과정을 거친 사람이었던 것이다.&nbsp;그런데 단지 대학졸업학력이 없다는 것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은&nbsp;&lsquo;대학수준의 공부 안하고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rsquo;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nbsp;물론&nbsp;學歷이나 자격증만이 학습의 증표가 될 수 없다.&nbsp;그러나 여느 방법으로라도&nbsp;學問을 통해 세상의&nbsp;道理를 따르려는 자세는 작건 크건 남을 지도하는 지위에 오르려는 자에게 우선 요구되는 필수요건인 것이다.&nbsp;물론 가끔은 학문에 의한 깊은&nbsp;思考와&nbsp;通察力이 없이도 높은 지위나&nbsp;富를 가지는 사람도 있다.&nbsp;그러나 그것은 조상이나&nbsp;前生의 고통스런 업보에 대한 보상이거나 기타 하늘을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의&nbsp;過渡현상일 뿐이다.&nbsp;그&nbsp;運의&nbsp;過程이 지나가면 허망하게 무너지는 것이 또한 그러한 지위나&nbsp;富인 것이다.&nbsp;이런 예외적인 것에 현혹되어 인간의 당연한&nbsp;役務를 소홀히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f34c4f53c9218958ecdc6b07cee18b570302a970.jpg" class="fr-fic fr-dib">2008-11-28&nbsp;]]></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2:42:5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삼국지의 문학적 결말</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6</link>
			<description><![CDATA[삼국지 하면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다.&nbsp;그런데 그 명성 때문에 우리는 대개 너무 일찍 삼국지를 접하게 된다.&nbsp;그리하여 진정 그 의미를 깨달을 정도의 연령이 되어서는, (다른 읽을 것도 많은데)&nbsp;이미 읽은 것을 다시 볼 것은 없다하여 경시되고 만다.&nbsp;이 같은 현상은 걸리버 여행기,&nbsp;아라비안나이트 등 다른 유명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nbsp;그런데 어린이나 청소년기에 삼국지를 읽으면서,&nbsp;읽는 중에는 재미를 느낀다 하더라도 결말에 이르러서는 허전하고 아쉬운 감이 드는 것이 있다.&nbsp;큰 뜻을 품고 도원결의를 한 유비,&nbsp;관우,&nbsp;장비는 결국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을 맞으며 남은 제갈량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nbsp;유비,&nbsp;관우,&nbsp;장비의 아들들은 인물이 모두 부친만 못하여 천하통일의 대업은 용두사미 격으로 끝나고 만다.&nbsp;여기서 우리는 삼국지를 영웅전기라기 보다는 순수한 문학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nbsp;우리가 접하는 다른 많은&nbsp;'이야기'&nbsp;들에서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찬란한 결말을 맺는 이야기들이 많다.&nbsp;하지만 실제 우리 인간의 생활은 그렇지만은 않다.&nbsp;많은 인간의 역사와 한 개인의 삶은 이루지 못한 이상(理想)과 허무한 결말로 얼룩지어 있다.&nbsp;삼국지의 줄거리는 인간사의 있는 그대로의 성찰이 배여 있는 순수문학적 성격이 짙다.&nbsp;큰 뜻과 희망을 품고 개척한 새 나라가 충분한 영광을 누리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몰락하는 이야기는 삼국지보다 더 읽힌 구약성서에도 있다.&nbsp;우리는 삼국지에서 주인공들의 성패를 떠나 그 의지의 의미를 알아야 할 것이다. 유비는 공명을 세 번 찾아가 천하통일에 뜻을 함께할 것을 권했지만 공명은 애초에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해도 그들의 대(代)에 천하통일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예측되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공명은 유비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유비의 뜻을 세우려 애썼다. 유비가 죽고 난 후에도 그자신의 최후까지 천하통일을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참 의미는 목표의 성패가 아니라 목표를 향한 노력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nbsp;한편 유비를 ‘실패한 자’로 볼 수만도 없다. 비록 한(漢) 황실(皇室)의 가문이라 할지라도 그는 한낱 돗자리를 짜며 홀어머니를 모시는 필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몸으로 그는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왕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br><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0c9aad65a2b1766ba5d0d7dd47ea008a8ec72a62.jpg" class="fr-fic fr-dib">]]></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3:55:20 +0900</pubDate>
		</item>
		<item>
			<title>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5</link>
			<description><![CDATA[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5c8e79f7793052f6f510a46e4bbe7f211299d0db.jpg" class="fr-fic fr-dib">몬테네그로의 역사적 수도인 체티네(Cetinje)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이브(바드니 단, Badnji dan) 전통 행사 및 이와 결합된 민족주의 집회 모습, 출처 : DW.com<br>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br>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nbsp;<br>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39;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39;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nbsp;<br>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nbsp;<br>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2:50:42 +0900</pubDate>
		</item>
		<item>
			<title>특색있는 루마니아 사람들과 문화</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4</link>
			<description><![CDATA[루마니아 인종들은 민족성 자체가 밝다. 그리고 매우 긍정적이고 성격은 다혈질이며 루마니아 인들은 전반적으로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어디를 가든 가무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는 음주가무의 천국인데 전통적인 결혼식에서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의 전통은 가수나 악단을 불러 밤새도록 춤추고 먹고 마시는 것이 보통이며,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악단이 집집마다 연주하며 다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지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루마니아 특유의 국민성이다. 어찌나 춤을 많이 추는지 장거리 고속버스 안에서도 관광버스처럼 춤추고 노는 것도 일상인 사람들이다. 루마니아는 국민 종교인 정교에 대한 종교심은 깊은 편이지만 러시아 정교회와는 달리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술과 할로윈 파티 귀신분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제법 많은 것에 비하면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ac3041bf6aa8aa244b122cdbe4ddd367ec752fdb.jpg" class="fr-fic fr-dib">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인근의 브라네스티(Brănești) 지역에서 매년 열리는 전통 봄맞이 축제인 &#39;뻐꾸기의 날(Ziua Cucului 또는 Cucii)&#39;의 한 장면, 출처 : Casa Atl&acirc;ntica<br>당장 국민 1인당 술 소비량 부터가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들어가며, 마녀가 직업으로도 인정된다. 우선 드라큘라부터가 사실상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국민 귀신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컬러 TV의 도입이 가장 늦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의 국영방송안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나(Televiziunea Rom&acirc;nă)의 TV방송 시작은 1956년에 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TV 송출이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컬러 방송은 북한보다도 10년이나 늦은 1983년부터 송출되었다. 그마저도 컬러 방송이 완전히 정착한 것은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부터이다. 1990년도 이후에서야 컬러 방송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는 모두 흑백방송으로 채워진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컬러 중계는 모두 외국이나 서유럽에서 송출된 것이고 루마니아 국영으로 방송된 것들은 모두 흑백이라 보면 된다. 물론 차우셰스쿠 시대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선전 방송이 위주였고 그나마 1980년대에는 에너지를 절약한다며 방송시간을 평일 2시간, 주말 3시간으로 줄였다.&nbsp;<br>그리고 TV 채널도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이면서 사실상의 국민들의 선택권을 박탈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외국 프로그램도 상당량 수입하였는데 특히 달라스나 디즈니에서 제작한 만화 같은 미국 TV프로그램도 편성했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반소감정이 있고 친중 및 친북을 했던 국가였기에 생각보다 소련의 방송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북한의 채널들을 많이 수입했었다고 한다. 필자의 루마니아 지인들의 당시 회상을 듣다보면 북한 김일성의 교시도 그대로 송출이 되어 자신들도 어이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정도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좋아하고 그의 정책 모델을 상당수 따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루마니아 TVR이 BBC와 제휴를 맺으면서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을 정도로 제법 선진적인 방송을 도입했었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침체가 이어지자 이 방송들조차도 거의 방영이 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악화일로였던 북한조차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TV 채널을 줄이지는 않았다고 한다.&nbsp;<br>그래서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은 자국 TV 채널을 버리고 이웃인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소련, 헝가리의 TV 방송을 몰래 시청했고, 불가리아 TV 편성 정보도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TV 만화와 불가리아 영화도 이 시기 루마니아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으며 불가리아의 당시 연예인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었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에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국영방송을 공영방송으로 전환하고 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루마니아는 소련에서도 하던 광고방송을 그동안 하지 않았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광고, CF 방송을 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시간도 다시 확대했으며, 민영방송을 허용하면서 급격히 상업화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방송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들이 많아 낙하산 문제라든가 정치 언론의 유착 문제 등이 대두되기도 하였지만 차우셰스쿠 때보다는 매우 재미있어지고 다채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마니아의 방송 환경은 대만과도 비슷한데 시청률 10%를 넘는 채널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고 자국의 지상파 채널은 시청률이 더 낮아서 지상파 방송에 대한 존폐성이 부각되었다.&nbsp;<br>그래서 미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인도 드라마, 터키 드라마, 텔레노벨라 등 다양한 외국 드라마들이 수입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국 드라마도 많이 방영되었고 K-POP도 흥행을 타면서 루마니아의 지상파 시청률은 다시 올라가 현재는 시청률이 다른 케이블 방송 못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헌법상의 결혼 개념을 &#39;배우자 간 결합&#39; 에서 &#39;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39;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2018년 10월 6일과 7일에 실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개헌을 통해 동성 결혼의 허용을 막으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 지지파로는 보수성향의 비정부 기구인 &#39;가족 연대&#39; 와 루마니아 정교회 등이 대표적으로 신부들은 신도들에게 예배 후 투표 참여를 독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루마니아에서 동성결혼은 현재도 불법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헌법상 결혼이 &#39;배우자 간 결합&#39;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nbsp;<br>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리 결혼 개념을 &#39;남녀간 결합&#39;으로 못박아 놓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율이 최소 30%를 넘어야 하는데 결국 투표율이 5.72%로 저조해 자연히 무산되었다. 당시 루마니아 인들에게 있어 남녀 간의 결혼이나 결합은 당연한데 굳이 이런 것까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 투표율이 턱없이 낮았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의 문화에 의하면 루마니아는 2월, 3월, 7월, 8월, 9월, 10월에는 공휴일이 전혀 없으며 대체휴일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과 같이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면 12월 1일 국경절 이후 1월 24일 통일의 날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없게 되는데 이는 루마니아 인들은 열심히 직장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빚어진 차우셰스쿠의 노동 정책의 반영 때문이다. 루마니아 인들의 정서상 일하고 가족에게 충실해야 하다는 것은 당연한 문화라고 보기에 이 공휴일 많지 않은 노동 정책은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가장 공휴일이 적은 나라가 루마니아이기도 하다.&nbsp;<br>그러나 거룩하게 쉬어야 하는 일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을 가는데 소금 광산을 개조한 살리나 투르다(Salina Turda)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 놀이공원으로 무려 지하 120m에 달한다. 매 일요일마다 살리나 투르다 같은 놀이 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2:49:1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울란바타르에서 보낸 4개월</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3</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종철 ]몽골에서 보낸 4개월<br>지난 8월 22일 밤에 울란바타르에 들어왔으니까 오늘 부로 거진 4달이 되어가는 군요. 처음에 들어와서 날씨도 좋고 신기한 마음에 이곳 저곳 관광도 많이 다니기도 했지요.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온게 놀러 온 것이 아니라 를 설립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기 위해서 온 것이지요. 지난 4개월을 가만 돌이켜 보면서 내가 했던 일을 크게 몇 가지 정리해볼 수 있군요.&nbsp;<br>1. 의 행사를 주관했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사람도 잘 모르는 상태라 주변의 교수들이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그래도 성황리에 행사를 치뤘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몽골 대학생들이 자신의 전통에 대해 자극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후레대에서 열린 강연은 몽골 국립대와 과학기술대 2군데를 합친 참석인원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후레대에서 참석한 인원이 150여명이 되었는데, 두 대학을 합친 곳에서는 30명이 안되었지요. 그만큼 후레대에서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이 행사 덕분에 후레대의 이공계통 교수들도 인문학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은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nbsp;<br>2. 매주 정기적으로 수요일에 모이는 UB 포럼을 통해 사람들도 사귀고 보다 전문적인 분야의 협력을 구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피상적인 모임인 것 같아서 한 2달 정도 나가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곳에 보면 여러 형태의 자문관(Adviser)들을 만나는데 이들을 보면 할 일 없이 시간 때우기 위해 돌아다니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 자문관들은 대개 현직에서 정년 퇴직하고 자신들의 숙련된 노하우를 가지고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월 4천 달라에다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거진 5천 달라를 받습니다. 이 정도면 몽골 대통령보다 더 많은 수입이지요. 거의 몽골 돈으로 1,200만 투그릭을 받는 셈인데 과연 그 정도의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많이 들더군요. 여러 모임들에 가다 보면 거진 시간 때우기 형태로 얼굴을 들이 대미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지요. 이곳 대학의 한국어과에서 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좀 더 이들에 대한 실태를 파악해서 나중에 보고서라도 하나 써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nbsp;<br>3. 후레 대학의 폰사 교수가 단국대에서 운영하는 해외 차세대 한국학자 심포지움에 응모를 했는데 합격을 했습니다. 체재비와 왕복 항공료를 단국대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지요. 폰사 교수의 신청서를 내가 다 써줬습니다. 처음에 써온 글을 보니까 도저히 그대로 제출할 수가 없어서 내가 다시 써줬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고맙다고 하면서 점심 한 번 사겠다고 하더니 그냥 입을 딱 씼더라고요. 이곳 한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인들이 너무 퍼주기 형태로 몽골을 대하다 보니 몽골 사람들이 공짜 심리가 강하다고요. 내가 이런 경우를 몇 번 경험해봤습니다. 수교한 이래 20년이 넘도록 사실 한국이 몽골에 퍼준 돈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생색 내는 형태로, 그리고 공짜로 하다 보니 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일본은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시스템이나 인프라를 깔아줘서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한국은 대부분 유명인사들 중심으로 퍼주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지난 아셈회의하면서 박근혜가 다녀갈 때 10억달라 MOU 체결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생각날 겁니다. 덕분에 몽골인들도 한국인 상대할 때 퍼주는 것을 당연시한다고 합니다. 별론 좋은 것은 아니지요.&nbsp;<br>4. 내가 이번 학기 강의를 하지 않았지만 4학년 논문 지도는 무료로 담당했습니다. 매주 보통 4명에서 6명 정도 참석을 했는데 들락 거리는 학생들이 몇 명 있습니다. 몽골 학생들을 대하면서 기초 학력 혹은 교양부문에 대한 훈련이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조차 잘 모르는 경우를 보았지요. 후레 대학의 한계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몽골 대학생들의 수준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요. 그래서 총장한테 교양 교육을 강화하자고 제안을 했지만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냥 기술자 양성 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학교의 방침이나 운영과 관련해서 총장과 몇 번 의견 충돌이 있고 나서 부터는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관심갖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왜 공부를 하느냐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낮아서 한국으로 유학을 가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번 한중연 대학원에 진학한 몽골 학생들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더군요. 이곳 대학에서는 한국 유학 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nbsp;<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7034774a1e23bbb20f4ebf928b16a7e053fa9ff8.jpg" class="fr-fic fr-dib">&nbsp;구글 이미지<br>5. 11월 1일 자로 를 외형적으로 설립을 했습니다. 총장 지시로 처장 회의를 통과했지요. 하지만 총장 말인즉슨 단 한 푼도 지원해줄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교학처장도 필요한 법적 조치는 얼마든지 도와주겠지만 학교 재정상 도와주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만나면 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지요. 그나마 깐깐한 행정 처장이 간단한 비품이나 비용들은 지원해주는 편입니다.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아직 없지만 책꽂이 2개 정도는 마련해주겠다고 합니다. 그 밖에는 거의 빈약한 내 호주머니 털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게 수군작 선생이 간판 글씨도 무료로 써주었고 표구 비용은 사업하는 권상근 대표가 도와주어서 드디어 간판을 달았습니다. 한 마디로 감개가 무량하지요. 몽골에 온 지 100일만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인하대학의 김영 교수님이 도서를 25권 정도 기증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운영 비용이나 기타 연구소 관련해서 기금도 조성을 하고 프로젝트로 끌어오려고 하는데 참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 겨울에 그 준비를 할 겁니다.&nbsp;<br>6. 어제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이곳에 와서 박사 논문을 하나 도와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인데 오래 전 내 수업도 들었던 분입니다. 철학 박사 논문을 쓰는 일에만 전념해도 쉽지 않은데 해외에서 선교사업을 하면서 틈틈히 과정도 이수하다가 몇 년 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데드라인이지요. 그 마지막 학기에 내가 몽골에 도착하니까 이분은 천우신조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청하더군요. 보니까 논문 쓰느라고 준비도 많이 했고 직접 작성을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더군요. 하지만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지 않다 보니까 구성이나 논리, 그리고 표현들에서 서툰게 많이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난감했지만 마지막 학기라 더 이상 물러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요. 그걸 몇 개월 동안 같이 씨름하면서 많이 교정을 해주고 표현도 잡아주고 논리와 논증도 신경써주었습니다. 1차 예심을 무사히 통과하고 그 이후 2차 본심에서 한 번 보류도 되고 하면서 고생하는 모습도 많이 봤습니다. 보류되고 나서 마지막 열흘 동안에는 거의 실시간적으로 자문도 해주었지요. 내가 이런 걸 보면서 한국의 학위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한국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 써논 논문이 잘됐는지 심사만 하는 것을 자신들의 본분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까 논문을 쓰면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정말 한국 대학이 자체 브랜드로 학위를 배출하려면 지금과 같은 논문 작성과 심사를 완전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고생 고생하다가 마침내 어제 날자로 심사위원들 전원 일치로 합격 했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내 도움이 컸다고 아주 고마워 하더군요. 나도 그동안 신경 쓴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몽골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목사 사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물론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니지만 어려울 때 마음 써주는 사모님 마음이 보통이 아닙니다.&nbsp;<br>7. 이제 올 해도 보름 정도 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루카치의 2권의 일부를 금년 말까지 출판사에 넘기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1권은 몽골로 오기 직전에 마무리해서 넘겼습니다. 과거에 꼼꼼히 번역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최종적으로 넘기면서 다시 보니까 문제가 많이 보입니다. 원문 자체가 난삽한 면도 있고 생각이 분명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원고를 금년 말까지 다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한국에서라면 연말 연시 술자리도 많은데 다행히 이곳은 한 없이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라 이런 작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편이더군요. 이 원고까지 완성해서 30일 정도에 넘기면 몽골에 도착해서 4개월 남짓 벌려 놓은 여러 가지 일도 대충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월급 한 푼 안받고 몽골 땅에 와서 좌충우돌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새롭게 경험하고 내 일에 집중한 일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라면 늘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자괴감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어려워도 무언가 보람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nbsp;<br>8. 내년 1월 2일 자로 저는 한국에 들어갑니다. 처음 몽골에 왔을 때는 추운 겨울을 한 번 지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몽골의 겨울을 내가 버티기에는 너무 환경이 좋지 않더군요. 12월 들어서 눈이 좀 덜 내리기는 했지만 평균 20도 이하에다가 빙판이 많고 매연도 너무 심합니다. 무엇보다 대기 오염이 심해서 실내의 창문을 거의 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마스크를 하고 있지요. 겨울에는 울란바타르 주변의 판자촌과 게르, 그리고 발전소에 뿜어대는 매연이 분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거대한 띠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결빙된 곳을 피하는 것 이상으로 무수히 많은 가래침들을 피하는 것도 일 중의 하나입니다. 대기 오염으로 폐암 환자들도 많지요. 그래서 이곳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어제도 학교에 가봤더니 식당은 몽골 직원들을 위해 운영하지만 학생들도 없고 해서 썰렁하더군요. 저도 친구들한테 도움을 구해가지고 한국가는 비행기표를 마련했습니다. 나를 믿고 도와주는 친구들이 고맙지요. 내가 그 친구들 이름을 일일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연구소를 함께 키워나간 산증인으로 돌에 이름을 새겨놓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 달 여 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재충전도 하고 새롭게 각오도 다지고 또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도움도 구해보려고 합니다.&nbsp;<br>9. 내가 생각하기에도 돈 한 푼 없이, 외부 지원 하나 없이 이렇게 홀홀 단신으로 울란바타르에 온 것 자체가 동키호테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몇 몇 친구들이 뜻이 가상하다고 해서 지원해준 돈이 조금 있었지만 처음 정착하고 몇 개월 생활하면서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한국학 연구소를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내 전공은 서양 근대 철학이기도 해서 약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상태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한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지 나 자신도 압니다. 그런 약점을 메우기 위해서 그만큼 내가 노력도 하고 준비도 하고 있지요. 사실 독자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서양 따지고 근대니 고대 따지고, 또 한국학이니 북방학이니 하는 것이 부당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후레 대학 한국어과에서 강의하는 문제도 전공이 아니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더군요. 이런 상태로 프로젝트를 유치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 점에서 본다면 나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벤처 사업가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몇 개월 뛰어 다니면서 다른 대학의 연구자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서서히 모색하고 있습니다. 당장 테마만 좋으면 이웃에 있는 의 몽골 교수들하고 합작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학의 마이클 손 총장이 먼저 나에게 제안했다는 것을 일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지요.&nbsp;<br>이제 4개월 남짓하지만 성과가 없는게 아닌데 몽골어도 습득하고 여러가지 준비한 작업들을 차분히 해 나가다보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곳에 와서 한국에서 하기 힘든 다른 분야의 독서를 많이 하고 있고, 새로운 생각들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설령 내가 이곳에서 벌린 일들이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소프트한 나의 지적 자산으로 남을 수 있지요. 나는 그 점에서 낙관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몇 년 동안 새로 시도하는 실험들이 노년의 30년을 끌어갈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돈을 벌지 못해 안해에게 한 없이 미안한 마음도 크지요. 연말도 되고 해서 그냥 두서 없이 감회를 적었지만 이런 것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가 겪고 생각한 것들입니다. 내 벗님들도 관심을 갖고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2016.12.10)<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2:36:28 +0900</pubDate>
		</item>
		<item>
			<title>폴매카트니의 결혼과 순수한 사랑 (2002年)</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2</link>
			<description><![CDATA[소개가 필요 없는 가수이자 작곡가 폴 매카트니가 모델출신 지뢰반대 운동가 히서 밀스와 결혼했다. 폴 매카트니는 30년을 함께 살아온 부인 린다 매카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의 재혼이다. 60세의 억만장자 중노인과 딸과 같은 나이의 여자와의 재혼임에도 전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고 오히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한 결실로 비쳐지는 것은 그럴 만한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nbsp;매카트니가 젊을 때 비틀즈의 멤버로서 이미 명성과 부를 가지고 있었던 1969년 첫 부인 린다 매카트니와 결혼할 때 이미 린다는 결혼경력이 있었다. 이들은 3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린다가 첫 결혼에서 낳은 딸도 함께 길렀다.&nbsp;매카트니가 재혼한 밀스는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무릎 아래를 잃은 장애인이다. 그녀는 장애인이 되고 난 뒤 모델 활동을 그만두고 지뢰로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위한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다. 장애인이 되기 전 잠시의 결혼경력도 있다.&nbsp;예술가의 생활상은 감상자(鑑賞者)에게 영향 줘&nbsp;천박한 이야기겠지만 매카트니의 부와 명성으로는 그의 나이와는 상관없이 얼마든지 미모의 처녀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의미 없는 재혼보다는 또 하나의 새로운 사랑을 추구한 것이다.&nbsp;예술가 본인의 생활은 그의 창작물을 감상하는 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매카트니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로 인해 그의 팬들과 후세사람들도 그의 음악을 들으며 순수한 예술가의 정서를 함께 느낄 수 있게 되었다.&nbsp;남성의 수절(守節은) 함께 나누자는 배려의 마음에 의한 것&nbsp;남자들 중에서 재력과 지위가 있는 자는 사정에 따라 초혼여성과 재혼하기도 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우리의 남북 이산가족상봉에서도 남자의 경우 재혼을 하였으나 여자만 수절을 하는, 상봉의 감동만으로 지켜보기엔 썩 개운치 않은 경우가 다수 있었다.&nbsp;이것을 가지고 여성차별의 인식의 결과라고 하기도 하지만, 세상은 남녀가 비슷한 수로 살아가므로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nbsp;여자의 수절이 칭찬(?)받는 것 이상으로, 지위가 있는 남자의 수절은 다른 남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덜어주는 효과를 준다.&nbsp;우리의 경우 부인과 헤어져 월남한 후 50년을 홀로 살면서 사회봉사활동을 해온 장기려(張起呂) 박사의 예가 있는데, 특히 앞으로 국민정서의 면에 영향을 많이 끼치는 문화예술인 중에도 (사랑의 고른 분배를 실천하는) 그러한 사례가 많이 있고 또 알려졌으면 한다.&nbsp;<br>※ 이 글은 2002년 당시의 결혼 소식을 배경으로 쓴 글입니다.&nbsp;<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35c872ca5471f765520f12ea72a913f37d866203.jpg">챗지피티]]></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19:01:36 +0900</pubDate>
		</item>
		<item>
			<title>K. 포퍼 (902-1994), 우리는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1</link>
			<description><![CDATA[﻿칼 포퍼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약한 과학 철학자이자 사회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과학 방법론인 &lsquo;반증이론&rsquo;(Falsification)을 역사상 위대하다고 인정되던 철학자들에게 적용을 해서 그들의 이론이 대단히 폐쇄적이고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유명한 저서 『개방사회와 그의 적들』이란 책은 80년 대에 한국에서도 번역 소개되어 당시 유행하던 마르크시즘을 비판하는 자유주의의 강력한 이론적 도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의 &lsquo;반증이론&rsquo;(Falcification Principle)은 비엔나 학파의 &lsquo;검증이론&rsquo;(Verification Principle)의 맹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비엔나 학파의 입장에 따르면 철학에는 &lsquo;의미있는 명제&rsquo;와 &lsquo;의미없는 명제&rsquo; 두 가지만이 존재한다. 의미 있는 명제는 사실을 기술하는 경험명제나 수학의 명제와 같은 분석 명제이고, 의미 없는 명제는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의 명제와 같이 가치와 관련되거나 경험적 검증이 불가능한 명제이다. 이런 명제는 개소리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비엔나 학파는 검증이론이 전통적인 철학의 문제들을 해결했다고 주장을 했다. 하지만 이 검증이론 자체는 어떻게 검증되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칼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과학 방법론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5/2d248573624c36578013aca4f8da13ddaebe5927.jpg" alt="" width="324" class="fr-fic fr-dii">대표사진 삭제칼 포퍼&nbsp; 칼 포퍼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젊은 시절 그가 그렇게 비판을 했던 학생 사회주의 협회와 오스트리아 사민당에 가입해서 활동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곧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회의를 하면서 탈당을 했다. 이후 그는 나찌를 피해 뉴질랜드를 옮겼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나중에는 영국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기도 했다. 그의 철학은 철저하게 자유주의와 개방주의, 그리고 비판적 합리주의에 기초해 있다. 그는 이런 철학적 정신에 가장 큰 적으로 전체주의와 파시즘,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꼽고 평생 그것들을 비판했다. 오래 전 한국의 한 철학자가 영국을 방문했을 때 선물로 들고간 인삼을 건네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ldquo;인삼은 한국에서 만병통치약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질병에 좋지요.&rdquo; 그랬더니 포퍼가 이렇게 답변했다. &ldquo;세상에 만병통치약은 없어요.&rdquo; 예의상 수사적인 표현으로 한 말이겠지만 포퍼의 합리주의 정신은 그런 문제에서조차 전체주의적인 발상이 허용되지 않음을 예시한 말일 것이다.&nbsp;앞서 비엔나 학파의 &lsquo;검증이론&rsquo;이 의미 있는 명제와 의미 없는 명제를 구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 원리 자체에 대한 검증은 할 수가 없음을 언급했다. 도구 자체가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다른 것을 검증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엔나 학파는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의 명제를 의미가 없다고 했지만, 명제의 의미는 그들의 좁은 해석과 달리 단순히 1:1 대응 관계로서 결정이 되는 것이 아니다. 포퍼는 이런 비엔나 학파의 검증이론의 한계를 염두에 두면서 유명한 &#39;시행착오론&#39;(Trial and Error)을 끄집어 낸다. 오래 전 괴테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수많은 실수와 오류를 통해 진리에 접근한다. 마찬가지로 실수는 단순히 오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접근하는 개방적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포퍼의 &lsquo;반증이론&rsquo;의 기본적 발상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할 수 있는 경계는 과학이 보다 많은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은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일반적 가설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오류에 노출되어 있고, 또 그러한 오류를 개선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방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ldquo;모든 고니의 색깔은 검다&rdquo;라는 일반 명제가 있다고 하자. 이 명제는 고니의 색깔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잘 기술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때 흰 고니가 예외적으로 존재한다고 하면 흰 고니의 존재는 일반명제의 오류를 보여주고, 아울러 이 일반 명제는 폐기되고 새로운 명제를 모색할 수 있다. 이처럼 과학의 모든 명제는 수학의 필연 명제와 달리 경험적인 확률 명제이기 때문에 언제든 새로운 사실의 발견이나 등장에 의해 논박이 될 수 있다. 과학은 종교나 다른 절대주의 이론들처럼 무오류나 논박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nbsp;<br>이에 반해 플라톤이나 헤겔 그리고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전체론적 이론(Holism)들은 과학에 가해졌던 의미에서의 논박이 불가능하다. 만일 이런 철학이나 종교에 대해 논박을 하면 바로 다른 근거를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논박하면 또 다른 근거를 제시하기 때문에 등 어떤 경우든 합리적 비판이나 논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포퍼는 반증이론을 가지고 당시에 유행하던 프로이트 정신 분석학에도 메스를 가했다. 정신분석학의 경우도 앞서 말한 전체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논박을 해도 어떤 경우로든 비판의 화살을 피해나갈 수 있다. 이런 이론들은 어떤 경우든 후행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어떤 이론이 과학이냐 아니냐에 대한 판가름은 그것이 논박이 가능한 확률 명제이냐 아니면 절대 무오류의 필연 명제이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포퍼의 주장이다. 예를 들어 인류 역사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투쟁에 의해 고대 노예제로부터 중세의 봉건제, 그리고 근대의 자본주의를 거쳐서 공산주의로 필연적으로 발전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은 20세기 말 사회주의권이 붕괴됨으로써 이론의 효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유물론자들은&#39;아직 도래하지 않은 혁명&#39;을 이야기하면서 얼마든지 피해나갈 수 있지만, 포퍼가 보기에 그것은 과학의 합리적 정신에 배치된다.&nbsp;칼 포퍼의 이론도 그 철학의 기본 정신에 비추어 본다고 하면 얼마든 논박 가능성이 있다. 주장과 비판 그리고 새로운 주장으로 이어지는 개방적인 토론이야말로 이데아와 같은 절대 진리가 아니라 현재 추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진리를 찾아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포퍼 철학의 개방성이 있다고 하겠다. 그의 철학은 다양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nbsp;&nbsp;&nbsp;﻿&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08:50:42 +0900</pubDate>
		</item>
	</channel>
</r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