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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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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Fri, 17 Jul 2026 07:26:1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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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전체기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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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도마복음 講解 第6 : 내면의 빛과 실재의 각성 (24절 ~ 29절)</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93</link>
			<description><![CDATA[도마복음 강해: 내면의 빛과 실재의 각성 (24절 ~ 29절)제24절: 내면의 빛과 참된 &#39;나&#39;의 회복"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귀 있는 자는 들어야 할지니라. 빛인 사람 안에는 빛이 있음에 온 세상을 비춘다. 그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흑암이니라."1. 언어의 퇴보와 영적 분별력의 상실우리는 경전의 언어가 지닌 예스럽고 격식 있는 표현들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합니다. 과거 성경 번역에서 &#39;가라사대(말씀하시되)&#39;와 &#39;이르되(누구에게 전하되)&#39;는 화자와 대상의 관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수많은 개역 및 개정 과정에서 이러한 미세한 언어적 격차가 &#39;이르되&#39; 하나로 통합&middot;축소되었습니다.언어의 단순화와 단일화는 인간의 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영적 분별력까지 퇴보하게 만드는 일종의 하향평준화 현상입니다. 경전의 깊이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귀 있는 자, 즉 영적인 청력을 지닌 자로서 언어에 담긴 다층적 의미를 분별해 내는 태도가 선행되어야 합니다.2. &#39;빛인 사람&#39;과 온 세상을 비추는 주체"빛인 사람 안에는 빛이 있다"는 구절은 인류 중 특별한 일부에게만 빛이 존재한다는 배타적 선언이 아닙니다. 여기서 &#39;빛&#39;은 존재의 가장 근원적이고 미세한 파동이며 영적인 소스(Source)이자 아우라(Aura)입니다. 물질계에서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한계 속도이자 가장 미세한 실체가 &#39;빛&#39;이듯, 영적 세계의 본질 또한 빛으로 비유됩니다.인간은 본질적으로 그 영성(빛)으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의 영적 본질을 자각하고 세상을 비추지 않는다면, 이 물질 우주는 아무런 영적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39;흑암(공무)&#39;에 불과하게 됩니다.3. &#39;나&#39;라는 보통명사와 예수 천상의 왜곡"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4:6의 오독)정경과 통상적인 기독교 교리에서는 이 구절의 &#39;나(Me)&#39;를 역사적 인물인 &#39;나사렛 예수 개인&#39;으로만 국한하여 해석합니다. 그러나 영성 철학적 관점에서 이때의 &#39;나&#39;는 1인칭 대명사가 아닌, 인간 개개인의 본질적인 자아(Self), 즉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읽어야 합니다.마치 일기 쓰기를 지도하는 교사가 학생에게 *"오늘 &#39;내&#39;가 한 일을 잘 정리했습니까?"*라고 물을 때의 &#39;내&#39;가 교사 자신이 아닌 학생 개개인을 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즉, "자기 스스로(내면의 영의식)로 말미암지 않고는 근원적 존재(아버지)에게 도달할 수 없다"는 자력 구원의 메시지가 왜곡된 대중 종교의 교리 속에서 &#39;예수 신격화&#39;로 단일화된 것입니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70434887f12927c5291791ff4cf0269e8d58133f.jpg" class="fr-fic fr-dib">제25절 ~ 제26절: 형제 관계에 얽힌 카르마와 선한 영향력"너희 형제를 내 생명같이 사랑하고 눈동자같이 보호하라."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1. 왜 &#39;이웃&#39;이 아닌 &#39;형제&#39;인가성경과 도마복음은 왜 사랑과 보호의 최우선 대상으로 &#39;형제&#39;를 지목할까요?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인류 이전의 동물적&middot;생명 본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또한 부부 관계는 성적 이끌림과 인위적 계약에 기초합니다.반면, 형제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태어나 일생 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부모의 유산이나 사회적 책임 분배 과정에서 가장 쉽게 갈등과 경쟁에 놓이게 되며, 삶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업보(Karma)와 악연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눈동자같이 보호하라는 것은 인간관계에서 가장 풀기 힘든 고도의 영적 과제이자 업보를 해결하는 열쇠이기 때문입니다.2. 권력 지향적 간섭 vs 영적 치유의 실천남의 작은 결점(티)은 크게 보면서 자신의 거대한 허물(들보)은 보지 못하는 상태는 인간관계의 &#39;일방적 권력 추구&#39;에서 기인합니다. 스스로 온전해지려는 치열한 자기 성찰은 배제한 채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에게 동조하도록 강제하는 행위는 왜곡된 지배욕의 발현입니다.참된 성장은 상대와 부딪히고 소통하며 서로의 문제를 깨닫게 해주는 영적 교류에 있습니다. 내 눈 속의 막대(들보)를 먼저 제거하고 스스로 온전한 상태를 회복한 뒤에야 비로소 타인의 아픔과 결점(티)을 어루만질 수 있으며, 이는 지배나 권력이 아닌 참된 &#39;치유와 선한 영향력&#39;의 실천으로 나아가게 합니다.제27절: 세상에 대한 절제와 안식의 차원"세상일을 절제해야 천국을 보리라. 안식일을 진정한 안식일로 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보지 못하리라."1. 세(世)와 계(界)의 개념적 분별우리가 흔히 쓰는 &#39;세계(World)&#39;라는 단어는 시공간의 결합입니다. &#39;세(世)&#39;는 인간이 나고 자라는 물질적 흐름(시간)을 뜻하고, &#39;계(界)&#39;는 우주의 다양한 차원과 당위적 영역(공간)을 의미합니다. 영적 차원을 표현할 때는 &#39;영적 세계&#39;라는 평면적 표현보다 &#39;영적 경계(연계/靈界)&#39;라는 입체적 언어를 쓰는 것이 본래의 뜻에 부합합니다.2. 대나무 마디처럼 단절하는 &#39;절제(節制)&#39;절제의 &#39;절(節)&#39;은 대나무의 마디를 뜻합니다. 한없이 자라기만 하는 쾌락과 물질적 욕망의 흐름을 마디처럼 뚝 끊어내어 다스리는(制) 힘이 절제입니다. 끝없는 세상의 자극에 영혼을 내맡겨두어서는 결코 천국(근원의 의식)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3. 연계(靈界)와의 충전으로서의 &#39;진정한 안식&#39;단순히 하던 일을 멈추고 육체적으로 빈둥거리는 것은 진정한 안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깊은 잠에 빠지는 본질적인 이유는 육체의 피로 해소를 넘어, 깨어 있는 동안 물질계에 사로잡혀 고갈되었던 에너지를 &#39;연계(靈界)&#39;로 건너가 충전해 오기 위함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가만히 누워만 있을 때 피로 회복이 덜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따라서 안식일을 진정으로 지킨다는 것은 세속적 차원의 잡다한 인연과 근심을 완전히 끊어내고 영적인 차원과 완벽히 교통하는 초월적 휴식을 취하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영적 단절과 연결이 선행될 때에만 내면의 영의식(아버지)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809a9298a7ea7ae486d17b6711958f7ca096be27.jpg" class="fr-fic fr-dib">제28절: 깨어나지 못하는 인류를 향한 고뇌"내가 세상 가운데 육신으로 저들에게 보였으나, 저들은 모두 취해 있었고 목마른 자가 없더라... 저들이 눈이 멀어 빈손으로 세상에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갈 길을 찾으니라. 그러나 술병을 흔들어 버릴 때 생각을 바꾸리라."1. 물질계의 가짜 성취와 영적 도취예수가 육신을 입고 물질세계의 언어로 진리를 가르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물질적 욕망과 세상의 단맛에 취해 있었습니다. 술에 취한다는 것은 지상에서 영혼을 붙잡아 매고 제 역할을 해야 할 육체의 지각을 임의로 약화시켜 영혼을 방황하게 만드는 현상입니다.술이나 도박, 범죄 등은 &#39;정당한 노력 없이 손쉽게 가짜 성취감&#39;을 얻으려는 물질계의 사악한 유혹들입니다. 이처럼 세상이 주는 가짜 위안과 성취감에 취해 있는 이들은 영적인 참된 갈증(목마름)을 전혀 느끼지 못합니다.2. 빈손의 삶과 술병을 흔들 때의 각성인류가 내면의 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눈이 먼 채 살아간다면, 결국 이 지상에 온 영적 목적을 한 가치도 달성하지 못한 채 &#39;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윤회의 고리&#39;에 갇히게 됩니다.그러나 언젠가 그 취기의 원천인 &#39;술병을 흔들었는데 더 이상 나올 술이 없을 때(세상에서 누리던 물질적 쾌락과 수단이 바닥나고 한계에 부딪힐 때)&#39;, 인간은 비로소 깊은 미몽에서 깨어나 자신의 행로와 생각을 영적으로 돌이키게 됩니다.제29절: 영과 육의 기묘한 상호작용"영에 의해 육신이 만들어진 것은 경이롭지만, 육신에 의해 영이 생(生)하게 되는 것은 중경(겹치도록 경이로운 일)이로다. 허나 궁핍으로부터 거대한 풍요를 이룩한 것은 놀라운 것이다."1. 물질적 온전함을 통한 영적 진화보이지 않는 고차원의 영(Spirit)이 투박한 물질세계에 인간이라는 육신을 정교하게 구현해 낸 사건은 그 자체로 거대한 신비이자 경이입니다.그러나 더욱 엄청나고 겹치도록 경이로운 사실(중경)은, 이 조대하고 한계가 가득한 물질적 육신과 온전한 정신을 바탕으로 치열하게 수도(修道)하여 영을 자라나게(生)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환각이나 약물, 술에 취해 비몽사몽한 상태로 연계의 끄트머리를 기웃거리는 편법적인 수행은 참된 영적 진화가 아닙니다. 맑고 온전한 정신으로 물질계의 한계를 극복해 나가며 차근차근 영적 영토를 넓혀가는 행위만이 영을 진정으로 장성하게 만듭니다.2. 지구적 궁핍에서 영적 문명의 풍요로과거 인류 문명이 태동하기 이전, 혹독하고 척박했던 원시 지구의 상태는 영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지극히 &#39;궁핍&#39;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이 척박한 지구 환경 속에서 문명을 건설하고, 이성을 발전시켰으며, 마침내 신과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고도의 정신적 결실을 보았습니다. 무(無)에 가까운 궁핍한 물질적 상태에서 영적 자각이 가능한 거대한 정신적 풍요를 일구어낸 지구적 성취는 실로 놀라운 영적 신비의 완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br><br>강의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rjtbS6oLqHU&t=113s]]></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00:5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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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적 지성 함양의 중요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92</link>
			<description><![CDATA[靈性隨筆: 靈的 知性을 채워야 할 理由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영적인 그릇(두뇌의 용량과 잠재의식의 크기)을 지니고 지상에 태어난다. 어떤 이들은 전생의 깊은 수련이나 천상에서의 학습을 통해 남다른 영적 경력을 품고 오기도 한다. 그러나 구체적인 기억을 상실한 채 물질계로 내려온 영혼들은, 그 무한한 잠재적 용량에 비해 현실의 앎이 턱없이 부족할 때 형용할 수 없는 정서적 불안과 흔들림을 겪는다. 마치 반쯤 찬 물통이 요란하게 흔들리며 출렁이듯 말이다.우리가 흔히 &lsquo;영적 지성&rsquo; 혹은 &lsquo;지성&rsquo;을 채워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1. 潛在意識의 불안을 달래는 具體的인 學習우리의 잠재의식 속에는 전생의 트라우마, 거대한 영적 지식, 그리고 수많은 경험의 흔적들이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흩어져 있다. 지상에서의 구체적인 학문과 세상의 이치, 철학,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단순히 머리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무의식속에 감추어진 영적 자취들을 현실의 언어로 환기하고 정렬하여 내면의 안정을 되찾는 과정이다.2. 靈的 밀도를 높이는 正確한 言語의 힘오늘날 우리는 피상적인 구별(Identification)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어떤 대상의 이름을 단순히 한글이나 영어로 아는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하다. 진정한 지성은 사물의 본질과 한자(Hanja)가 담고 있는 깊은 개념적 뜻을 꿰뚫어 보는 데서 출발한다. 예컨대, &lsquo;실림(新林)&rsquo;이라는 지명을 통해 &#39;새로운 숲의 태동&#39;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lsquo;봉천(奉天)&rsquo;을 통해 &#39;하늘을 받드는 마음&#39;을 깨닫는 일은 우리의 삶에 완전한 수용과 영적 밀도를 더해준다. 단어의 진의를 모른 채 기술적으로만 언어를 소비하는 사회에서는 지성이 단절되고 영혼이 부유하게 된다.3. 性通功完: 소명을 깨닫고 靈的 向上으로 나아가는 길우리의 진정한 삶의 목적은 &lsquo;性通功完(성통공완)&rsquo;에 있다. 물질 이전의 본래적 개성인 성(性)을 통하고, 표면 의식을 영의 의식과 일치시킴으로써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소명(召命)을 완수하는 것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자신의 내면이 아무리 해박할지라도, 끊임없이 깨닫고 채워나가는 갈증이 없다면 영혼은 정체된다. 비록 온 세상의 시스템을 당장 바꿀 수는 없을지라도, 인연이 닿는 이들과 함께 올바른 언어를 익히고 깊이 있는 성찰을 이어갈 때, 우리는 불안의 파도를 넘어 영적 향상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ee198f52a7defe717ac3ae4da3d947a1dba58939.jpg">整理 및 揷畵 : 제미니(Gemini)<br><br><br>출처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9BE9FqU2IsI&t=21s]]></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Fri, 17 Jul 2026 00:16:5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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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목소리의 정치</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91</link>
			<description><![CDATA[(오피니언)목소리의 정치이종철 몽골 후레 정보통신 대학 교수(철학박사)답글쓰기2016-03-03 09:06:34&nbsp;ㅣ&nbsp;2016-03-03 09:06:51<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7577879ecbe539282417e5ef50c2e94f798f7473.jpg" width="220" height="286" align="left" alt="" class="fr-fil fr-dii">플라톤의 &#39;파이드로스&#39;라는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lsquo;문자와 목소리&rsquo;의 관계에 관한 신화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타무스 왕이 다스리는 테베에 토트라는 신이 찾아와서 농사와 천문 지리 및 의료 기술을 가르쳐 준다. 아울러 토트 신은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하지만 다른 기술들은 다 받아들이면서 유독 문자와 관련해서는 왕이 거부하는데, 그 이유가 흥미롭다. 첫째, 문자는 진리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짝퉁만 가르쳐 준다. 둘째, 문자는 독학을 가능하게 하므로 스승이 필요 없고, 스승의 권위도 잊게 한다. 마지막으로 문자에 의존하다 보면 기억력이 감퇴할 수 있다. 문자는 특성상 대상에 대한 접근에서 간접적이고 보편적이다. 반면 목소리는 철저히 직접적이고 개별적이다. 화석화된 문자는 진리의 흔적(짝퉁)을 상기시킬 뿐이지만, 목소리는 생생한 진리를 영혼에 각인시킨다는 것이다. 바로 이틀 전까지 여의도 국회에는 이런 목소리들이 넘치고 있었다. 직권 상정된 테러방지법을 저지하기 위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링이 그것이었다. 필리버스터링은 오로지 의원 개개인이 목소리를 통해 의사진행을 저지하는 합법적 의정활동의 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이 목소리의 정치가 갖는 울림의 효과가 적지 않다.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여의도로 쏠리고 거의 보지 않던 국회 방송의 시청률이 급상승했다. 필리버스터를 생중계하는 인터넷 방송들이 늘어나고, 의원들이 빠져나간 국회 본회의장은 일반 국민들로 채워졌다. 필리버스터를 한 의원들의 실시간 검색 순위가 급등하고, 그들 사이에서 정치 스타들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만큼 정치에 대한 관심, 올바른 국정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높다는 증좌다. 그동안 볼썽 사나운 몸싸움이나 하고 거수기 행세나 하던 국회의원들도 이미지를 경신하고 있다. 필리버스터의 고유하고 개별적인 목소리가 주권자 국민의 목소리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정치에 환멸과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국민들의 영혼을 두드리는 천둥이기도 하다. 그들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생생한 현장에는 그동안 우리가 화석화된 문자로만 전달되던 진실,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진실들이 넘쳐 나기도 했다. 국민들은 필리버스터의 목소리를 통해 테러 방지법이 왜 국민의 기본권을 억압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법인가, 우리가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왜 짝퉁 민주주의에 불과한가, 대한민국의 진정한 위기가 테러의 위기인가 전쟁의 위기인가 혹은 바닥에 떨어진 경제의 위기인가, 선거정치에 개입한 국정원에게 다시 무소불위의 권한을 안겨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 한가 등등 그동안 강 건너 불구경하듯 들었던 소문들이 필리버스터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혹시 이런 영혼의 떨림 같은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는가? 지난 수 십 년간 민주화를 이루어내면서 거리와 청문회장을 울리던 소리가 이 소리가 아니었던가?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이루어지던 직접 민주주의를 환기시켜주는 것은 아닌가? 그동안 익명 속에 감추어져 있던 필리버스터의 목소리가 실종되었던 정치를 소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지금 우리 국민은 이 필리버스터들에게 열광하고 있는 것이고, 그럴수록 현 정부는 이 열광이 던지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이종철 몽골 후레 정보통신 대학 교수(철학박사)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신형 정치정책부장이 최종 확인&middot;수정했습니다. <br>2016-03-03 09:06:34&nbsp;ㅣ&nbsp;2016-03-03 09:06:51<br><br>]]></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8:00:4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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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노프 상류 사회 여인들의 화려한 삶</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90</link>
			<description><![CDATA[로마노프 왕실 및 귀족 여인들 치고 금과 보석으로 치장하지 않는 여인들이 없었다 한다. 러시아는 그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이나 키예프 루스와는 달리 사회 계급 제도가 강력했고 그 가운데 최상급은 역시 귀족과 차르 집안의 왕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정치 제도가 단순한 공국에서 차르국, 표트르 대제 이후 제정으로 이어지는 동안 황제를 선출하는 등의 공공문제를 처리하는 정치상의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가문들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유수포프 집안이라 볼 수 있겠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2e21504d72a4bd058f1c319531c131b71fe3e583.jpg" class="fr-fic fr-dib">19세기 궁정 화가였던 미하이 지치(Mih&aacute;ly Zichy)가 1873년에 그린 《겨울 궁전 콘서트홀에서의 무도회(Ball in the Concert Hall of the Winter Palace)》라는 수채화 작품, 출처 : Wikimedia Commons이러한 사회계급의 존재는 로마노프 시대의 건축이나 로마노프 왕정 복식 등 중근세 러시아 문화 전반에서 다소 과시적인 형상이 나타나는데 근본적 이유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중근세 러시아 시대의 인물화 등을 보면 큰 드레스를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발-티에트(бал-Тыет)라 불렀는데 발-티에트 복장의 원형은 고대 로마에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즐겨 입었던 이른바 &#39;토가&#39;(Toga)라고 부르는 옷에서 유래된 드레스였다.&nbsp;반원형이나, 타원형, 팔각형의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려 몸에 둘러 입으며, 재료는 실크나 모피 등이었다.<br>그러나 로마노프 제국 시대 후기로 갈수록 드레스의 길이도 더 길어지고, 두르는 방식도 더 복잡해지면서 다소 과장된 스타일이 되었고 색상이나, 단의 끝처리, 입는 방식 등이 계급에 따라 엄격히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귀족 여인들도 마찬가지로 한 장의 넓은 천을 끌어 올려 천의 앞뒤판을 어깨선에서 수많은 단추나 브로치로 고정한 스타일을 많이 착용하였고 이는 기존 서유럽의 드레스보다 더 풍성한 것이 일반적이었다.<br>따라서 넓고 펑퍼짐하며 풍성한 주름과 함께 인체 위에 걸쳐지면서, 인체의 형태를 더욱 육감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러시아 상류층의 의복은 사회 계급을 중시하였던 당시 러시아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다. 기본적인 복식 형태는 프랑스의 것과 거의 흡사하지만, 사회 계급에 따른 차이를 거의 모든 의복의 형태, 색, 장식 등에서 볼 수 있었다. 의복은 부피가 커지거나, 인체의 선을 드러냄으로써 점차 화려하고 과시적이 되어 갔기 때문에 중근세 러시아 왕실, 귀족 여인들의 복식에서 당시 러시아 상류층 여성들의 사회를 엿볼 수 있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6:17: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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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터키 이즈미르의 역사, 호메로스의 혼이 서려있는 곳</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9</link>
			<description><![CDATA[현재 터키 공화국의 영토이지만, 호메로스의 고향인 스미르나(Smirna, 지금의 이즈미르)에서부터 밀레토스에 이르는 지역을 이오니아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곳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요람이다. 이곳 스미르네는 동서 교역의 요지이자 그리스 철학이 탄생한 배경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 문화가 시작된 곳이다. 이러한 이오니아의 전설에는 헬렌(Hellen)의 손자인 이온(Ion)의 자손이라 한다. 이 종족의 기원은 실제로 본 연구에 인하여 여러 추정으로 인한 사료의 분석, 그리고 고고학적인 분석으로 볼 때 일부 밝히기도 했지만 이후 이 민족들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주민 외에 에게 해 중부 여러 섬들의 주민, 그리스 본토의 아티카의 아테네인까지 이오니아인으로 불렸고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神)의 제사가 그들의 결합을 상징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9c6541a4de019731fdfdb5cf0543cc63116d91b2.jpg" class="fr-fic fr-dib">튀르키예 제3의 도시 이즈미르(İzmir)의 상징인 이즈미르 시계탑(İzmir Saat Kulesi)과 그 주변의 코나크 광장(Konak Square),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이 지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국가 밀레토스에서는 탈레스 이외에 아낙시만드로스(Anaksimandros), 아낙시메네스(Anaksimenes)와 같은 출중한 철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ldquo;만물은 유전 한다&rdquo;라는 말을 언급하여 유명해진 헤라클레이토스(Heraclleitos)는 그 인근 도시인 에페소스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즈미르의 역사는 B.C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과거 트로이와 이오니아 폴리스의 역사를 영위한 곳이었다. 그리스 때는 스미르나라고 불렀고 로마 시대 때는 페르가몬이라고도 불렸다. 현 터키 이즈미르 도의 베르가마(Bergama) 군에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를 페르가몬이라 했다. 페르가몬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의 아들 페르가모스에서 유래했다.&nbsp;<br>이곳은 터키의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아시아 에게 해에서 26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헬레니즘 때 카이우스 강 북쪽에 자리했던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이기도 하다. 의외로 기독교하고도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한게 요한 묵시록에 적힌 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 중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에서 표기한 &#39;버가모&#39;가 바로 페르가몬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역사상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크세노폰의 저작물이라고 한다. 크세노폰과 함께 한 그리스 군대가 점령하였으나 다시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는 기록만 나오고 그 외에 별다른 중요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페르가몬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디아도코이 때로 알려진다.<br>디아도코이 당시 환관 출신이자, 처음에는 안티고노스의 부하였던 필레타이로스가 안티고노스를 배신하여 리시마코스 밑으로 들어갔다. 안티고노스가 패사한 뒤, 필레타이로스는 리시마코스의 신임을 사 방어가 용이한 이 도시에서 그의 보물을 지키도록 명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정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리시마코스도 배신하였으며,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에게 패하고 죽자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도 곧 비명횡사하고 혼란스러워지자 그때부터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왔다. 이것이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이다. 필레타이로스는 4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재위하며 페르가몬을 요새화하였으나, 성 불구자라는 문제점이 있었기에 그의 동생인 에우메네스의 아들 에우메네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nbsp;<br>에우메네스 1세는 다른 세력들과 연합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를 격파하여 페르가몬의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역시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여 다음 왕위는 5촌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물려받는다. 아탈로스 1세는 새로운 위협인 켈트족의 침략을 물리쳐서 구원자(소테르,&sigma;&omega;&tau;ή&rho;)라는 칭호와 함께 정식으로 왕을 칭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왕국으로서의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 때부터 시작한다. 아나톨리아 지역에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들어섰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점령되었는데, 이후 그들이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의 거점인 사르데스까지 공격해서 점령했다. 이에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결심했고 이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nbsp;<br>이후 헬레니즘 시기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도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은 꾸준히 번영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지진과 역병, 자연적 요인에 의한 항구의 매립 등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로마 제국 - 중세 로마를 거치며 원로원 속주나 자치 도시의 권한이 주어지는 등 매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를 1000년 동안 보내게 된다. 이후 이오니아 그리스 세력들은 그 활동 지역을 넓히고는 다시 여러 상업적인 행위로 오늘날의 비잔티움 일대까지 활동 지역을 넓혔다. 당시 비잔티움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비로소 도시와 성곽을 세우고 방어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을 비롯한 이오니아가 장악한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해적들의 침공이 잦아지고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동, 서로마로 분리되었을 때 동로마의 세력권으로 이관됨에 따라 직접적인 관리를 받게 되었다.<br>그러나 이후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투르크에게 만지케르트(Mazikert) 전투에서 패한 11세기 말에 투르크 인들이 30여 년 간 이오니아에 토후국을 세워 그들의 첫 해군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즈미르는 비잔틴의 영역에 220여 년 간 머물렀지만 14세기 초엽에 오스만투르크 인들에게 다시 점령되면서 토후국들이 다시 세워졌고 15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들을 규합하였다. 중, 근세를 거치며 이오니아의 고대 도시들은 대부분 유적으로 변하였고, 1차 대전 이후 그리스에 점령되어 이즈미르를 중심으로 2년 여간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터키 독립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터키 국민군이 탈환하고 그리스인들을 추방하며 현재 모습이 형성되었다. 아산시요르(Asans&ouml;r)는 터키어로 &#39;엘리베이터&#39;라는 의미로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nbsp;<br>일몰 무렵에 가면 무척 아름다운 에게 해의 석양과 함께 이즈미르 만에 걸쳐 있는 이즈미르 시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시계탑이 있는 코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바로 다음 정거장인 &Uuml;&ccedil;yol역에서 내려서 바닷가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높은 탑 같은 전망대가 보이는데, 이게 아산시요르이다. 꼭대기에 식당도 있어서 이즈미르 시민들의 프로포즈 장소로도 애용된다. 터키 제3의 도시이자 최대의 상업, 항구 도시인 이즈미르는 터키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성경 요한묵시록, 혹은 계시록에서 소아시아 7개 교회들 중 하나인 스미르나 교회가 소재했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가 건설한 대표적인 이오니아 식민시로써 이후 페르시아에게 패망했지만 알렉산더 대왕 이후 리디아가 점령해 리디아의 영토가 된다.&nbsp;<br>이후 로마가 점령했다가 비잔틴의 영토가 되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셀주크투르크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탄불 다음으로 유독 그리스와 로마, 비잔틴 관련 유물 유적이 많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모스크 반, 성당 반의 비율이 터키 내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다. 시계탑은 1850년에 세워졌으며 지금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는 그리스인과 오스만인의 건축 합작품이다. 종교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 정교회의 그리스와 이슬람의 오스만의 건축 합작품은 두 종교의 화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1748년에 완공된 코낙 자미와 함께 이즈미르에 몇 안 되는 볼거리이기도 하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6:1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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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페르시아 제국 시대에 아르메니아인들의 역할</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8</link>
			<description><![CDATA[페르시아의 왕실에서는 사산 왕조 페르시아 시대부터 아르메니아 여인들을 후궁으로 선호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이들 아르메니아 출신 후궁들은 페르시아의 왕들이 아르메니아 인 동포들에게 혜택을 주도록 적지 않은 압력을 행사했다. 아르메니아인 후궁들은 페르시아 하렘에 들어가서도 아르메니아 정교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같은 아르메니아인 동포들을 보호하는데 있어 더 적극적으로 노력했을 수도 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94321da1e3b7e6d470f8b255a77595381e7df970.jpg" class="fr-fic fr-dib">터키 반(Van) 악다마르 아르메니아 성당,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아르메니아인 중 일부는 중동의 상업망을 장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심지어 인도 무굴 제국과 동남아 일대에도 진출하였다고 한다. 근면하고 부유한 상인이 많았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들은 무슬림 통치자들에게 갖가지 선물 공세를 통해 자신들의 입지를 지켜나갔으며 문화와 종교적 전통을 지켜나갔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나 이란 사파비 왕국에서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보존해나갔다.&nbsp;<br>쇠퇴기 이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제국 내 여러 민족들에 대해 실용주의적 관점을 견지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들에게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했는데, 여기에는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그리스 정교회 등 다른 정교회와 다른 독자적인 교회로 인정받을 권리,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민사 분쟁 등을 아르메니아인 성직자들이 직접 재판하고 해결할 권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nbsp;<br>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발흥한 사파비 왕국의 경우, 조지아인 기독교인들은 이란으로 끌려오는 족족 이슬람으로 개종되었으나, 아르메니아인들의 경우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세금을 잘 납부하고 유럽인들과 사파비 위정자들과의 교역에서 능력을 발휘한 이유로 인해 지속적으로 아르메니아 정교회를 믿을 수 있는 권리를 누릴 수 있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5:59:41 +0900</pubDate>
		</item>
		<item>
			<title>에게 해와 지중해의 강자, 이오니아 도시국가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7</link>
			<description><![CDATA[이오니아의 문화적 융성은 대륙 간의 전쟁에서 자주 배제되었고 그리스와의 관계를 자주 가짐에 따라 그리스 문명권에 속하게 되면서 평화가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오니아에도 큰 위기가 발발하게 된다. 페르시아 전쟁이 벌어지게 된 계기는 이오니아가 페르시아 정부에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스 폴리스들인 아테네가 개입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90f59de96b0b355ce2fdfcdcc212251433356705.jpg" class="fr-fic fr-dib">튀르키예 안탈리아 주에 위치한 케코바(Kekova) 섬 인근의 해안 풍경, 출처 : Get Your Guide이오니아 지역은 키루스 2세의 치세 때 페르시아의 영역에 속하게 되었는데,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오니아 도시 국가들 중 철학자 탈레스(Talles)의 고향인 밀레토스 등이 중심이 되어 몇 가지 요인에 의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때 이오니아 폴리스들은 그리스 본토의 국가들에게도 만약 자신들의 반란이 실패한다면 페르시아가 이번에는 그리스 본토를 공격할 것이라며 지원을 요청했는데, 스파르타를 비롯한 다른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강한 군세와 군사 규모 등에 쉽게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아테네와 에레트리아(Eretria)가 지원을 하면서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nbsp;<br>아테네가 당시 개입한 것은 밀레토스 등이 자신들과 혈통적 연계가 있는 도리아 인의 주 종족이었기 때문이었던 것도 있지만 당시 아테네가 민주 정부로 전환한 상태에서 추방된 참주였던 히피아스(Hipias)를 페르시아가 보호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모든 시민들이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한 몫 챙기기 위해 아테네 귀족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것도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시민들의 위와 같은 선동을 통해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독촉하고 있기도 했다.&nbsp;<br>하지만 아테네의 지원은 전함 20척 정도의 작은 규모였다. 이들은 사르디스를 공격해 키벨레(Cibele) 신전을 불태우기도 하지만 페르시아 기병대에 패하여 도주하고 말았다. 이후 이오니아 반란군은 키프로스와 헬레스폰토스(Hellesphontos) 일대에까지 폴리스들을 선동해 보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라테(Rate) 섬 해전에서 이미 주요 섬 국가들을 매수한 페르시아에게 간단히 패하여 진압되고 말았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5:51:20 +0900</pubDate>
		</item>
		<item>
			<title>현 베트남 중남부의 소수민족인 참족과 남부의 크메르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6</link>
			<description><![CDATA[참족은 말레이계, 인도네시아계 민족이다. 같은 말레이계 민족 중에서는 멜라네시아인과 미낭카바우인들이 모계 제도를 채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참족(프로이족, 참인, 이슬람인) 및 참계 산악민족(잘라이족, 에데족, 라그라이족, 튀루족) 또한 모계제도를 채택한다. 집과 재산을 지키는 것은 여성의 역할이다. 결혼 후에는 남편이 아내의 집에 들어간다. 따라서 상속자와 모계 씨족 이름도 왕족을 비롯하여 여성의 자손이 계승한다. 다만 킨족을 모방한 한자 성씨의 계승에 대해서는 1975년 공산화 이전은 쌍계제(남자는 아버지의 성을, 여자는 어머니 성을 계승)였는데, 지금은 한자 성씨의 계승은 부계제가 보통이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9c8ca5ff1293c1698723218ed566b36348c3b0e4.jpg" class="fr-fic fr-dib">동남아시아(특히 베트남, 캄보디아 또는 인도네시아 등)의 전통적인 농촌 지역에서 농부들이 논을 돌보고 있는 풍경,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예를 들어 왕족의 성은 원래 응우옌(阮氏)씨이며, 왕가의 당주는 응우옌 티다오(阮道) 여왕이지만 차기 여왕은 그녀의 아버지(여왕의 남편)의 성씨인 로우(盧)를 잇는 로우옌후엉 디엠(盧) 공주이다.이처럼 한자 성씨만 보면 왕가가 교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모계 상속은 불변하기 때문에 왕가가 포크론 무나이 가문이라는 모계 씨족임에는 변함이 없다. 참족은 닌투언성과 빈투언성의 해안가를 따라 거주하는 촌락민이다. 각각의 촌락은 수백 명에서 천 명에 이르는 주민들로 이루어져 있다. 참족은 옷을 머리 쪽으로 해서 입는 여성을 제외하면 평야지역에 거주하는 비엣족의 전통적 방식과 똑같이 옷을 입는다.&nbsp;<br>참 흐로이 여성들은 바-나족의 치마처럼 세모 모양의 뒤쪽으로 매도록 되어있는 파뉴를 입으며, 머리에는 비엣족 여성이 장례식 때 쓰는 베일과 모양이 비슷한 검은 후드를 쓴다. 닌투언성과 빈투언성에 거주하는 나이 많은 남자들은 긴 머리를 터번으로 감싸고, 여성의 파뉴와 비슷하게 생긴 담요를 몸에 두른다. 베트남인과 크메르족은 토지문제에서 많은 차별이 이루어지고 있다. 원래 메콩델타의 크메르인들은 좋은 땅은 다 빼앗기고 건조하고 염분이 많은 농사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살게 되었다. 공산화 과정 속에서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었다. 지난 1980년대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해외로 탈출 할 때 그 속에는 크메르인도 많이 속해 있었다.&nbsp;<br>가장 큰 이유는 배고픔과 차별 정책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크메르인이 집중적으로 사는 지역에 가면 광활한 대지에 아름다울 정도로 논에 벼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여행객들은 감탄을 한다. 그리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이라고 느끼고 최소한도 먹을 것은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지금도 시골의 크메르인 20%정도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에 있으며 쌀이 모자라고 절반 이상이 밥과 늑맘과 같은 젓갈 간장으로만 끼니를 때우는 때가 허다하다. 이러한 이유는 크메르인 대부분이 땅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기름진 땅이 없어 소작농을 하고 있고 고기를 잡거나 잡다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nbsp;<br>그래서 세계 쌀 수출 2~3위라고 자랑하는 베트남의 최대의 곡창 지대에서 지금도 크메르인은 1Kg에 200원 이하인 쌀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와 같은 어려움은 오히려 크메르인들에게 더 응집력을 주고 그들 종족단위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들었다.크메르인은 돗자리를 엮기, 방직, 천 짜기, 도기 만들기, 악기 만들기, 북 만들기 등 전통 민속공예업들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다. 크메르인들의 상품은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축제에 때는 사원을 위해 쓰이기도 한다. 조상들에게로 돌아갈 때 크메르인들은 화장을 하고 난뒤에 사원 뒤쪽 납골탑에 유골을 모신다. 크메르인들은 한 평생 살다가 죽을때도 사원과 맺어 진다.<br>수확 기간에 크메르족은 고향에 돌아가서 동네 사람들과 사원에서 분향을 하고 은혜를 갚기 위하여 제사를 지낸다, 크메르 문화는 농경일과 관련 된 축제가 많다. 독특한 축제 옥옴복 축제(Ok Om Bok Festival)는&lsquo;달 제사 축제&rsquo;라고도 불리며, 매년 음력 10월 15일 보름에 열린다. 축제의 의미는 한 해 농사를 끝내고 달에 감사의 제사를 지냄으로써 수확에 감사하고, 신년축제(Chol Chnam Thmay)는 부처, 스님들에게 스스로 만든 식량들을 올린다. 불경을 외는 스님들 덕분에 자기, 가족의 건강을 가져온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신년 몇 일전 크메르인은&nbsp;행운을 기원하고 화를 피하기 위해 사원 마당에서 땅 구릉, 모래 구릉을 덮는 축제를 연다.&nbsp;<br>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과자, 댓(t&eacute;t)떡, 잇(&iacute;t)떡, 생강떡, 과일, 분뱡, 향과 등불을 준비하여 사원으로 가서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올린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5:40:31 +0900</pubDate>
		</item>
		<item>
			<title>경기의 각본을 마음대로 하는 蹴神 메시</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5</link>
			<description><![CDATA[월드컵 준결승에서 메시의 아르헨티나대표팀이 또 다시 역전승했다. 아르헨티나대표팀은 ‘약팀’과 상대한 조별리그와 32강전까지만 ‘순탄한’ 승리였고 16강 8강 준결승 모두를 역전승으로 ‘裝飾’했다. 이에 따라 아르헨대표팀은 흥미진진한 경기로 월드컵의 흥행을 도왔다고도 한다. 그로 인해 세계축구협회가 흥행을 위해 아르헨대표팀을 편파적으로 지원한다는 구설수도 있다.그러나 만약 아르헨국민처럼 해당 팀을 全的으로 응원하는 입장이라면 의문이 날수가 있다. 경기력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초반부터 리드하여 자국 팬들이 始終 즐겁게 경기를 보게 해주었으면 안 되었을까 하는 評價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특히 경기를 우세로 돌리는 데에 메시의 노력이 큰 영향이 미쳤다면 기왕 그럴 능력이 있으면 왜 진작 승리하도록 '돕지'를 않았나 의문이 날 수도 있다.&nbsp;물론 메시와 아르헨대표팀이 경기자체의 흥미를 위하여 일부러 경기를 역전승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nbsp;초반에 리드를 당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nbsp;다만 그 상황이 되어서야&nbsp;‘發動’이 걸렸던 것이다.40세의 메시는 경기에 참여는 하되&nbsp;‘觀望’에 가깝다.&nbsp;최소한의 관여만 하면서 경기를 계속한다.&nbsp;상대팀이 약팀이라면 그래도 경기를 주도하여 무난히 승리하기도 한다.&nbsp;그런데 강팀이라면&nbsp;必然的으로&nbsp;虛를 찔려&nbsp;失點하고 위기에 몰리기도 하는 것이다.&nbsp;그러다&nbsp;旣往에&nbsp;測定해 둔&nbsp;限定된 체력발산의 시간이 남게 되면 남은 시간까지&nbsp;極度의 노력을 한다.&nbsp;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그렇게 되게 하기에&nbsp;蹴神이라는 칭호가 과분하지 않은 것이다.그러면 오히려 후반 일정한 시간만큼 교체투입 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의견도 가능하다. 그러나 메시의 입장에서는 미리 들어가서 가끔 필요할 때는 ‘살짝’ 도와주기도 하면서 경기의 흐름을 파악해두는 것이 選好될 수 있다. 於此彼 경기장을 ‘散策’하니 벤치에 대기하는 것보다 그다지 체력소모가 나지 않는 것이다. 냉정히 따지면 차라리 열심히 뛸 젊은 선수를 先發로 내보내는 것이 초반 열세의 위험을 덜고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될 만하다. 그러나 英雄格의 선수를 마냥 (불리하면 投入하여 다른 선수들이 망친 경기를 수습하게 하고 유리하면 그냥 벤치에 두기도하는) 경기승리의 ‘수단’으로만 利用하겠다는 것은 多分히 비현실적이다. 如何튼 메시는 막판에 자기가 줄곧 뛴 경기에 책임을 지고 경기를 가져왔다. 이제 이러한 漫畵蹴球의 실험은 한 경기만 남아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6e63ab772c678e7b6e5da06680d67a4a56ab30dc.jpg">제미니(Gemini)]]></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2:47:40 +0900</pubDate>
		</item>
		<item>
			<title>제06괘 天水訟(천수송)</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4</link>
			<description><![CDATA[天水訟(천수송)하늘과 물이 어긋나 다툼의 서사<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3bc12c30129545eda4c4ef78dedc72cc3dce9357.jpg" class="fr-fic fr-dib fr-fil" style="width: 404px;">☰ 상괘 : 하늘 (乾天)☵ 하괘 : 물&nbsp;(坎水)<br>"하늘과 물이 서로 반대로 행하니 송괘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일을 도모할 때 처음부터 신중하게 살핀다." (天與水違行, 訟. 君子以 作事謀始)<br>1. 卦象의 서사하늘(乾)은 끝없이 위로 오르려 하고, 물(坎)은 묵묵히 아래로 흐르려 합니다. 본래 한 곳에 머물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두 존재가 서로의 길을 완전히 달리하여 어긋나 버린 형상, 이것이 바로 '송(訟)'의 시작입니다.이 괘는 뜻이 맞지 않고 방향이 다른 이들이 억지로 한 공간에 묶여 갈등할 때 발생하는 다툼과 소송을 상징합니다. 길을 달리하는 이들이 서로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하며 나아갈 때, 세상은 차가운 대립과 반목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천수송의 서사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핵심 교훈은 "이기는 다툼은 없으며, 가장 현명한 승리는 다툼을 시작하지 않거나 도중에 멈추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소송과 다툼은 아무리 끝에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을 남길 뿐입니다. 따라서 군자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흐름과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갈등의 씨앗을 도모하며(作事謀始), 설령 다툼에 휘말리더라도 끝까지 가기보다 중용의 지혜를 발휘해 화해의 길을 택합니다.<br>2. 주역 본문과 해석<br>卦辭 (괘사)訟 有孚窒惕 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믿을 부孚, 막힐 질窒, 두려워할 척惕)- 송 유부질척 중길 종흉. 이견대인 불리섭대천- 송은 믿음을 두나 막혀서 두려우니, 중함은 길하고 마침까지 함은 흉하니 대인을 봄이 이롭고 큰 내를 건넘이 이롭지 아니하니라.- 해석: 다툼에는 비록 스스로의 진실함과 믿음(有孚)이 있을지라도, 상대방과의 소통이 막히고 불안하여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툼을 중도에 그치고 타협하면 길하지만(中吉), 끝까지 고집하여 끝장을 보려 하면 반드시 흉하게 됩니다(終凶). 이때는 공정하고 지혜로운 큰 어른(大人)을 만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이로우며, 모험을 감행하여 큰 강을 건너는 일(무리한 추진이나 소송의 강행)은 이롭지 않습니다.<br>彖傳 (단전)彖曰 訟 上剛下險 險而健 訟 訟有孚窒惕中吉 剛來而得中也 終凶 訟不可成也&nbsp;利見大人 尙中正也 不利涉大川 入于淵也&nbsp;(못 연淵)- 단왈 송 상강하험 험이건 송 송유부질척중길 강래이득중야 종흉 송불가성야 이견대인 상중정야 불리섭대천 입우연야- 단에 가로되 송은 위는 강하고 아래는 험해서, 험하여 건장함이 송이다. '송유부질척중길'은 강이 와서 중을 얻음이요, '종흉'은 송사는 가히 이루지 못할 것이요, '이견대인'은 숭상함이 中正이요, '불리섭대천'은 못에 들어감이라.- 해석: 송(訟)은 위가 강건하고(하늘) 아래가 험난하니(물), 안으로는 험난하면서도 겉으로는 강건하여 서로 다투게 되는 형상이다. "믿음이 있어도 막히고 두려워하며 중도에 그치면 길하다"는 것은 강한 성정(九二)이 아래로 내려와 중(中)을 얻어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면 흉하다"고 한 것은 다툼이란 본래 끝까지 밀어붙여 완성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어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고 한 것은 중정(中正)의 도리를 숭상하기 때문이며,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한 것은 무모하게 나아가면 결국 깊은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기 때문입니다.<br>大象傳 (대상전)象曰 天與水違行 訟 君子以作事謀始 (어길 위違, 꾀할 모謀)- 상왈 천여수위행 송 군자이작사모시- 상에 가로되 하늘과 물이 어긋나게 행함이 송이니, 군자는 이로써 일을 함에 있어 처음을 잘 도모해야 한다.- 해석: 하늘과 물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게 흘러가는 형상이 바로 송(訟)이다. 군자는 이러한 이치를 마음에 새겨,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훗날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처음 단계부터 꼼꼼하게 계획하고 도모해야 한다(作事謀始)<br>3. 6효의 효사와 해석<br>初六 (초육)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불영소사 소유언 종길- 초육은 일(송사)을 길게 아니하면, 조금 말이 있으나 마침은 길하리라.- 해석: 다투는 일을 오래 끌지 않는다. 비록 처음에 작은 말썽과 시비(小有言)가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화해하여 끝내 길하게 된다. 갈등의 초기 단계이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신속하게 화해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초육은 陰柔하면서 가장 아래에 있어 强訟하는 사람이 아니다. 九四와 응이 되고 구사는 陽剛으로 柔를 침범하니 부득이 송사는 하지만 자기의 힘이 무력함을 알고 말을 조금 할 뿐 송사는 벌리지 않고 쉽게 변명이 되므로 종래는 길하게 된다.<br>九二 (구이)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도망할 포逋, 재앙 생眚)- 불극송 귀이포 기읍인삼백호 무생- 구이는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읍사람이 300호이면 재앙이 없으리라.- 해석: 다툼에서 상대방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하여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피하고 도망친다. 자신의 작은 영지인 삼백 호의 고을을 지키며 근신하니 재앙과 허물이 없다. 상대가 나보다 강할 때는 억지로 맞서지 않고 물러나는 지혜가 필요하다.- 二는 剛으로서 中에 거하나, 五와는 세력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下로서 上에 訟을 거는 것은 역리(逆理)가 되므로 訟을 벌리지 않는다(不克訟). 九五와는 대적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自家로 피해버려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읍인삼백호는 읍의 최소한의 호수로 지위가 미약하여 다시 쟁송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br>六三 (육삼)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식구덕 정려 종길 혹종왕사 무성- 육삼은 옛 은덕을 먹어서 바르게 하면 위태로우나 마침내 길하리니, 혹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룸은 업으리라.- 해석: 조상이 물려준 옛 공덕에 기대어 살아간다. 본분을 지키는 자세는 위태로워 보일 수 있으나 끝내 길하다. 혹 나라나 윗사람의 일을 따르더라도 스스로 이룩하려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과거의 작은 공로를 내세워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묵묵히 처신하는 것이 이롭다.- 六三은 九二와 九四의 兩剛之間에 처해 있으나 그 소요에 말려들지 않고 옛날의 지위를 지키므로 길함을 얻게 되니 분수를 지켜 '혹종왕사' 하더라도 결실을 취하려 해서는 안된다.(无成)<br>九四 (구사)不克訟 復即命 渝安貞 吉 (변할 유渝)- 불극송 복즉명 유안정 길- 구사는 송사를 이기지 못한다. 돌아와 천명에 맡기어 나아가서 변해서 안정하면 길하리라.- 해석: 다툼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돌려 하늘의 천명(命)과 순리에 따른다. 마음의 태도를 바꾸어 편안히 올바름을 지키니 길하다. 다투던 마음을 내려놓고 순리에 복종하는 극적인 태도 변화를 통해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 九四와 쟁송하는 자는 初六이다. 상대 초육이 도리에 밝아 九四는 패소를 알기 때문에 불극송이라 한다. 復即命이란 復은 반복을 말하고 命은 正理를 말한다. 九四는 양강한 기운만을 믿고 하나의 분노로 초효와 쟁송을 했는데 이미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반대로 스스로 반성하여 正理로서 돌려 소송을 하지 않는다. (渝安貞吉) 渝는 변하는 것이다. 九四는 양으로서 陰에 居하여 不正이 되므로 조폭(躁暴)하여 訟을 하고자 한다. 九四가 변하면 손(巽)괘가 된다. 손(巽)은 순한 것이고 貞正하고 心安한 것이므로 자연히 송사가 없어 길하게 된다.<br>九五 (구오)訟元吉- 송원길- 九五는 송사에 크게 길함이라.- 해석: 다툼을 해결함에 크게 길하다. 중정(中正)의 자리에 오른 훌륭한 지도자로서, 갈등을 공정하고 사심 없이 중재하고 판결하므로 분쟁이 원만히 해결되어 대단히 길한 결과를 맞이한다.- 九五는 治訟의 主로 剛明之才와 中正之德이 있어 曲直을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종횡으로 가려줄 뿐 아니라 理直한 자는 승소하게 되고 패소자 역시 원한이 없게 하므로 大吉이라 한 것이다.<br>上九 (상구)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띠 반鞶, 띠 대帶, 빼앗을 치褫)- 혹석지반대 종조삼치지- 상구는 혹 반대(포상)를 주더라도 결국은 아침이 다 가기 전에 세 번이나 빼앗기리라.- 해석: 다툼에서 끝내 이겨 간신히 화려한 관복의 허리띠(鞶帶)를 하사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침이 다 가기 전에 세 번이나 다시 빼앗기게 된다. 갈등의 극단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 승리는 결코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더 큰 화근이 되어 돌아온다.- 上九는 陽으로 乾體의 제일 위에 있고 송괘의 마지막에 있으니 송사를 끝까지 벌린다. 송사는 비록 이겨 반대(鞶帶)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공로로 인해 받은 상이 아니고 송사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바른 것이 아니므로 오래 보존하기 어렵다. 승자가 이럴진데 패자는 가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송사는 마침내는 흉하게 된다.<br>4. 역사적 득괘 사례<br>정공(丁公)의 엇갈린 운명과 비결의 해석초한전쟁 시기, 항우 밑에서 활약하던 초나라의 장수 정공(丁公)은 팽성 전투에서 패해 도망치던 한왕 유방을 추격하여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유방은 정공을 바라보며 "두 어진 영웅이 어찌 서로를 이토록 가혹하게 핍박한단 말인가!"라고 애걸했다. 이에 정공은 사사로운 연민과 정에 이끌려 군대를 뒤로 물려 유방을 살려보내 주었다.세월이 흘러 항우가 자결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이 한고조로 등극하자, 정공은 유방을 찾아갔다. 그는 과거에 유방의 목숨을 구해준 자신의 은혜와 공로를 내세우며 큰 상과 벼슬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의 반응은 정공의 기대와 완전히 달랐다. 유방은 제장들을 불러 모은 뒤 싸늘하게 말했다."정공은 항왕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사사롭게 한왕을 놓아주어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장본인이다. 신하로서 이보다 더 큰 배신이 어디 있겠는가!"유방은 정공을 군법에 따라 조육(遭戮) - 길거리에서 온 백성이 보는 가운데 살점을 뜯어내고 손톱으로 할퀴어 죽이는 비참하고 잔인한 형벌 - 에 처했다. 자신이 베푼 사사로운 공덕(食舊德)을 믿고, 황제가 된 유방에게 보상을 당당히 요구하며 다투려 했던 정공이 죽음을 앞두고 얻은 괘가 바로 이 천수송(天水訟)이었다.정공은 '초육'이나 '구이'의 지혜처럼 유방이 천하를 잡았을 때 조용히 야인으로 물러서거나 도망쳐 자신을 보존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공적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상구(上九)처럼 화려한 띠를 탐내다가 끝내 목숨과 명예를 모두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br>5. 실천적 교훈 (占辭 비결)<br>天道西徃 水脉東流 (천도서왕 수맥동류)- 하늘의 길은 서쪽을 향해 가고, 물줄기는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 정공은 자신이 유방을 살려준 행위를 '은혜'라고 생각했으나, 유방은 이를 '주인을 배신한 행위'로 보았다. 항우를 향한 충성(天道)과 유방에게 보상을 바란 정공의 마음(水脉)은 정반대로 흘렀다. 이 근본적인 방향의 어긋남이 송사의 시작이었다.求事未遂 心常懷憂 (구사미수 심상회우)- 추구하는 일은 쉽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마음에 항상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차 있다.- 정공은 유방이 자신을 높여줄 것이라 기대(求事)했으나, 유방은 그를 '불충한 자'로 낙인찍었다. 자신이 바랐던 영광은커녕, 죽음의 공포라는 거대한 근심(懷憂)이 그를 덮쳤다. 이는 구이(九二)효에서 말하는 "다툼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숨어야(歸而逋)" 했던 상황을 정공이 역행했음을 보여준다.爭訟宜止 可用和休 (쟁송의지 가용화휴)- 갈등과 송사는 마땅히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니, 서로 화합하여 조용히 쉬는 것만이 옳다.- 정공은 유방과 자신의 정당성을 논하며 쟁송(爭訟)하려 했다. 만약 그가 구사(九四)효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명(命)을 따르며 스스로 물러났다면 죽음은 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다툼을 고집했다.惑得惑失 敬畏无咎 (혹득혹실 경외무구)- 세상사 흘러가는 대로 간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겠지만, 매사에 공경하고 스스로 두려워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정공은 유방을 살려줌으로써 '목숨(得)'을 얻었다고 자만했으나, 사실 '신의(失)'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임금을 섬기는 자가 가져야 할 경외심(敬畏)을 망각했다. 결국 그는 상구(上九)효의 예언대로, 잠시 얻은 영광(관대)조차 지키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br>6.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br>현대 사회는 무한한 경쟁과 소유의 시대입니다. 매일같이 계약 관계에서의 마찰, 직장 내의 주도권 싸움, 동업자와의 이권 분쟁, 그리고 사소한 자존심 대립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이 모든 갈등과 분쟁의 순간에 천수송 괘는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성찰을 건넵니다.-시작단계에서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라 (作事謀始): 천수송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억지로 일을 추진할 때 갈등이 생긴다고 경고합니다. 동업을 하거나 큰 계약을 맺을 때, '우리는 서로 잘 맞을 것'이라는 막연한 신뢰 대신 처음부터 계약 조건을 명확히 하고 발생할 수 있는 이견을 조율해야 합니다.-"상처뿐인 영광"을 경계하라 (終凶): 끝까지 소송을 진행하여 법정에서 승리 판결을 받아내더라도, 그 과정에서 소모된 막대한 시간과 정신력, 비용, 그리고 깨어진 인간관계의 상처는 승리의 기쁨을 압도합니다. 때로는 소송 비용보다 합의와 화해가 나의 영혼과 일상을 지켜내는 가장 실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멈출 수 있을 때 멈추는 용기: 상대가 너무 강하거나 법리적으로 나에게 불리하다면, 억지로 맞서 싸우며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과감하게 한 발 물러서서 내 실리를 도모하는 것이 진짜 똑똑한 사람의 처세입니다. 물러섬은 비겁함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자제력입니다.천수송은 우리에게 코칭합니다.&nbsp;"하늘과 물은 비록 가는 길은 다르지만 세상의 만물을 기르는 귀한 존재들이니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원망하며 싸우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담담히 인정하고 각자의 길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이별'과 '화해의 악수'를 청해 보십시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0:28:18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국인과 類似한 민족은 어디일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3</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3bc5b2aecba47524a45482e0e70aa22c8e84e36c.jpg" class="fr-fic fr-dib">절강성 항주에서 느낀 의문항주에 여행을 가봤다.<br><br>관광지 말고 시내만 줄창 돌아댕겼다.<br><br>조그만 동네 골목 식당,시내버스 안,도심의 번화가를 쏘다니며 항주시민을 구경했다.<br><br>그러면서 느낀 점.<br><br>"한국인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br><br>우리가 흔히 중국인하면 떠올리는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없고<br><br>그냥 한국의 거리 모습 그 자체였다.<br><br>상대적으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극단적인 북방계 타입이 다소 적을 뿐.<br><br>분명 &#39;중국인은 혈통과 뿌리가 한국인과 전혀 다른 민족&#39;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동질적인 인간들이었다.<br><br>흔히 몽골이나 시베리아사람을 보구 한국인이랑 똑같이 생겼네~ 역시 우리와 뿌리가 같은 민족입네~ 하면서 호들갑 떠는데<br><br>항주에 가본 내 입장에선 꼴깝으로 느껴진다.<br><br>아무 편견없이 보면, 몽골인보다 중국 항주사람이 한국인과의 일치율이 더 높다.<br><br>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br><br>한족의 원류는 절강성과 거리가 먼 황하강 중류다.<br><br>절강성 주민이 처음부터 한족이었던게 아니다.<br><br>황하강 유역의 한족에게 흡수당고 오랜 기간 통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살면서 문화적 동질화가 이루어져 한족이란 정체성을 얻은 것일 뿐이다.<br><br>중국인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정체성이 생기기 전에,<br>절강성과 한반도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던게 아닐까?<br><br>그러고보니 한반도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이 중국내에서 제일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 중국 절강성이다.<br><br>조선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br><br><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g%2Fbtn_modify.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 <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g%2Fbtn_reply.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 <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g%2Fbtn_delete.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 <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g%2Fbtn_write.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 <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g%2Fbtn_list.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대조영<br>문헌을보면 산동과 절강은<br>한민족과<br>관련이있다고하죠 ...<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e82f0065670beee6fc6d70e1bbe44285c77def70.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기쁘오<br>과거 동이족설도 그렇고 그리고 북방여러민족들 문화중에서 유별나게 한반도가 가장 중원문화를 추종하고 흔적이 비슷한것을 보면 아마 당년에 중국남방지역사람들이 한반도에 건너가서 현재의 민족을 형성한것이 아닐지.<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9adbebd1edbaaa3758a348f51395f63d4a49b548.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기쁘오<br>실제현재도 보면 유럽계들이 비록 세계각지에 이민가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했지만 의연히 유럽본토문화와 비슷한 경향을 지니고 있는 그런 상황 거기에 정치제도 법제도 등을 비롯해서<br><br>다시말하면 한반도문화와 중원문화가 비슷한것은 아마 당년에 비슷한 사람들이 직접건너가서 그들의 조상문화를 본딴것이 아닌지.<br>만일 중원민족과 전혀 이질적인 유목민족이 한반도에 이주해갓다면 역시나 그들의 유목민족문화를 게승하고 추종하지 중원문화는 답습하지 않을듯<br><br>실제 과거 북방유목민족들 왕조를 살펴보면 중원문화와 많이 이질적인 풍습 문화 습관이엿음.<br>복장도 그렇고 가치관도 그렇고<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22665296fa2dd1e97d8c093fa5d0ee880cc611c2.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기쁘오<br>그리고 알다싶이 북방유목민족들에 대해 과거선조들은 모두 싫어하고 배척하고 문화적으로 가치관적으로 자신들과 전혀 이질적인 집단이라고 했고 비하했고<br><br>또 농사 북방유목민족들은 명칭자체에서 보다싶이 농사를 짖지않는 민족들인데<br>알다싶이 한반도민족은 농사를 짓는 농경민족<br><br>만일 한반도민족이 북방유목민족의 후대라면 역시나 그들선조의 문화습관을 게승하지<br>생뚱같은 농사를 짓고 중원문화를 추종하고 그러지는 않앗을듯<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55945339231a2e4b976d840d7f79d7eee0735052.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기쁘오<br>그리고 민족의 이름자체도 한자화고 세글자 두글자<br>뭐 누르하치 아골타 칭키스칸 등 이런 북방유목민족들의 이름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이름<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6f14005a88d16499ba1890e97a71399fb91cac88.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기쁘오<br>마한 진한 등 한반도남부의 삼한은 바로 중국남방중원에서 이주해온 소위 중원계<br>고구려 발해 백제 등은 만주지역의 소위 북방유목계<br><br>비슷할거같음<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cd3535f0d6f6b057f6a94b668d754c3358a16328.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박경범<br>고대에는 漢水 西安 등이 중심이었다가 문화의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여서 오늘날 해안가의북경과 상해가 중국의중심입니다. 당연히 황해를중심으로 漢城을 비롯한 한국지역도 문화의 중심이지요. 여기에는물론 漢文化를주도한 종족들의 이동도 포함된것입니다.<br>그런데 한국의 좌익오랑캐(625때만해도 오랑캐무찌르자고했습니다.)는 우리를 오랑캐로 만들어서 저들의 나라로 만들려 했던것입니다. 한 예로 한나라시절의 삼국지위지동이전을 가지고 중국사람들이 우리를 오랑캐라고 멸시했다는 해석을 하는것 등입니다.2천년전의 기준으로 오늘날에 갖다붙이는것이죠.<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3baa14cfa70e33c726b106f94da5fb5b09f61fdf.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망구리<br>중국남방지역 정확이 동남방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br><br>동이라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a8add57243a9d05384b01112828e521e7c32f4e7.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박경범<br>참 지금새삼스레 좌익이니 반공이니 말하는게 아니라 그러한갈등도 결국 과거의 민족간 원한에 비롯된것임을 주장하기 위한것입니다.<br><br>2009.07.18<img data-fr-image-pasted="true" src="https://dthumb-phinf.pstatic.net/?src=%22http%3A%2F%2Fyanbianews.com%2Fbbs%2Fskin%2Fya_bbs01%2Fimages%2Fcomment_del.gif%22&type=m10000_10000" align="absMiddle" alt="" class="fr-fic fr-dii"><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12c9ca9e81d901abda2a0fabaa5911d6340c8740.jpg" width="100%" height="1" border="0" class="fr-fic fr-dii">(인용)중국 강남의 식음 유람 글번호 52, (조회 : 146)<br>글쓴이 李基承 날 짜 2008/03/09 (02:31)<br><br>서울에서 &lsquo;강남&rsquo; 하면 한강 남쪽에 위치한 11개 구 전체 보다는 강남구 혹은 인접 8학군 지역을 말한다. 중국의 &lsquo;강남&rsquo;도 장강(長江) 남쪽 11개 성 전체 보다 흔히 상해시와 江浙(강소, 절강 兩省), 혹은 조금 넓혀 인접한 안휘&middot;강서&middot;호북성 중의 일부 지역까지 일컫는다.<br>이 곳은 원래 南蠻이라 불리던 楚, 吳, 越의 영지로서 당시 중국 인구의 10%만 거주하던 척박한 변두리였다. 漢代에 철기농구와 토목기술이 발전되며 종전에 엄두를 못 내던 습지의 개간이 시작 되었다. AD 309년 영가(永嘉)의 난 이래 북방 유목 기마병단의 약탈을 피해 강북의 중산층이 淮河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행렬을 이루었고, 마침내 司馬睿가 建康(지금의 남경)에 東晉을 도읍하여 남북조시대 370년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 풍부한 수량과 온화한 날씨에 힘입어 唐代에는 이 지역만으로 전 중국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창으로 탈바꿈 되었다.<br><br>중국의 정치 중심이 고대의 서안에서 낙양, 개봉, 북경으로 東北進 하는 동안, 경제중심은 양주, 소주, 항주로 東南進 해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상해로 정착되었다. 2006년 江浙의 1인당 소득이 중국 평균의 2배(상해시는 3.7배)인데, 1000여 년 전에는 이 차이가 더 컸다고 한다. 문화예술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강남이 주도를 해왔다. 한 예로 明&middot;淸 500년간의 科擧 장원급제자의 70%가 江浙 출신이라고 한다.<br><br>한 겨울의 서울 추위도 피할 겸, 상미회 답사여행 차 제비 따라 강남으로 찾아 나선 때가 1월 중순이었다. 상해에 도착하였더니 웬걸, 서울 만큼 낮은 영하 3도에, 습하고 난방이 안되어 뼛속으로 추위가 스며든다. 다음 날부터 간간히 뿌리기 시작한 눈발이 두 주일간 계속되며 100년 만의 폭설 파동으로 전개되었다.<br><br>이번 여행은 원래 도연명, 백거이, 소동파 등 대문호들의 족적과 백록동 서원, 또 불교성지인 보타산과 구화산을 두 주일 간 철저 탐사할 계획이었는데, 폭설로 고속도로와 등산로가 대부분 폐쇄 되다 보니 보다 많은 시간을 지방 도심의 酒樓탐방에 할애하게 되었다.<br><br>음식문화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경제적 풍요가 필요충분 조건이다. 중국 음식 8대 체계 중 세 곳이 이 지역에 집중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강남요리는 맵지 않고, 짜지 않고, 기름지지 않으며 재료 자체의 특색과 맛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魚米之鄕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수산물, 특히 민물고기가 풍부하다.<br><br>북중국을 대표하는 민물고기가 황하의 잉어라면 강남에는 장강 지류의 농어(루위)가 있고, 그 외에 선어, 초어, 시어도 유명하다. 농어는 초겨울에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있단다. 선어는 겉색이 노래 황선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두렁허리라고 하는 민물장어의 일종이다. 초어(草魚)는 산천어의 일종으로. 서호의 초어는 특히 송수어(宋嫂魚)라고도 한다. 시어는 준치의 일종으로 장강(長江) 하류에서 잡힌다. 방랍어라고도 불리는 췌어는 안휘성 특산이다.<br><br>민물 게인 샹하이 크랩의 본명은 대갑해(大閘蟹), 때로는 털이 많아 모해(毛蟹) 라고도 불린다. 蘇州 부근 양징호(洋澄湖)의 음력 9월(雌), 10월(雄)산을 최고로 친다. 대개는 살짝 쪄서 비장의 소스에 찍어 먹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게 요리가 있다. 소스에는 식초를 듬뿍 쓰는데 인근의 鎭江에서 나오는 恒順香醋가 으뜸이다. 소주는 원래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어려서부터 게를 먹고 조리하며 자란 소주 미인들이 신흥 상업도시 상해로 많이 시집가면서 소주요리가 상해의 본바닥 요리처럼 굳혀진 것이다.<br><br>생선과 게 요리에는 역시 소흥주가 제격이다. 남쪽에서는 높은 도수의 白酒보다 우리의 청주처럼 쌀 발효주인 黃酒(또는 老酒)를 많이 즐기는데 절강성의 紹興이 가장 유명하다. 소흥은 왕희지, 노신, 주은래의 고향으로 중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소흥주는 가반주, 향설주, 화조주의 순서로 고급화 된다. 뉘얼홍(女兒紅) 이라는 술은 딸을 낳게 되면 그 해 술을 빚어 깊이 묻어 두었다가 그 딸이 커서 시집갈 때 축하주로 꺼내 마신다는 전통에서 유래되었고, 그 중 특히 꽃무늬 磁器甁에 저장한 것이 최고급인 화탸오(花彫)酒 이다. &lsquo;古月龍山&rsquo; 등의 톱 브랜드는 가격이 상당해서 현지인 들은 평소에는 &lsquo;上海老酒&rsquo;나 &lsquo;石鼓門&rsquo; 을 마신다.<br><br>白酒는 세력이 약하다. 안휘성의 &lsquo;古井貢酒&rsquo;와 강소성의 &lsquo;洋河大曲&rsquo;이 일찍부터 八大명주 안에 랭크 되었지만 이 둘은 위로는 川貴(사천, 귀주성) 계의 내셔널 브랜드에 눌리고 아래로는 유사 짝통 브랜드가 많아 홈 그라운드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lsquo;洋河 天之濫&rsquo; 등 디자인이나 가격 면에서 원조 양하대곡을 앞서는 브랜드들이 오히려 눈에 뜨인다.<br><br>강남 음식은 담백하므로 술보다 茶와의 조화가 더욱 오묘하다. 역시 중국 8大名茶 중 셋이 이 지역 산이다. 서호용정, 태호벽라춘, 황산모봉, 모두 담백 청아한 녹차 계열이다.<br><br>우리 귀에 친숙한 강남요리로 浙菜(절강요리)의 동파육과 규화자계, 蘇菜(강소요리)의 남경오리와 양주초반이 있다. 요리들의 어원이 재미있다. 북송 말 蘇東坡가 항주지부로 있을 때 백성들을 조직하여 청계천 살리기처럼 西湖를 재 준설 하였다. 東坡는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소흥주로 졸인 요리를 주며 준공기념 잔치를 열었는데 이 요리가 민간에 전해 내려와 &lsquo;東坡肉&rsquo; 이라 불렸다<br><br>거지의 닭을 뜻하는 규화자계(叫化子鷄; Beggar&rsquo;s Chicken)는 조리기구가 없는 거지가 어렵게 서리한 닭을 연꽃잎으로 쌓아 불구덩에 묻어 익혔다는 요리로, 요즈음에는 반의법으로 부귀계(富貴鷄)로도 부른다.<br><br>북경오리는 사육장에서 강제로 먹이를 먹여 체중을 늘려 구운 것이고 남경오리는 자연환경에서 이곳 저곳 몰고 다니며 키우다가 삶아서 말린 것이다. 영락제가 1420년 북경으로 천도한 후 남경에서 먹던 오리 맛을 잊지 못해 남경의 오리몰이(duckboy)들이 자금성까지 매일 수천 마리 씩 오리 떼를 몰고 경항대운하를 따라 아장아장 여행 길을 올랐다고 한다. 판대기처럼 납작하게 만든 것은 판압(板鴨)이라고 하고 소금물에 삶은 것은 염수압(鹽水鴨)이라고 한다. 껍질이 우유색이고 고기가 연하며 기름진 느낌이 거의 없다. 楊州炒飯은 바로 한국 청요리의 볶음밥이다.<br><br>徽菜(안휘요리)는 안휘성 밖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다. 黃山市의 옛 이름이 徽州로서 휘주염상(鹽商)이라 하면 예로부터 중국 10대 商邦 중 두 번째로 꼽힌다. 毛豆腐, 臭豆腐 등 독특한 풍미 소채도 있으나 대체로 마일드하고 우리 입에 잘 맞는다. 황산시에서 호텔 앞 수수한 주막에서 먹은 6元짜리 국수(우리 돈 800원;이름도 근사해 淸湯麵條)의 그 담백 미려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5월 달로 예정된 尙美會의 璜지방 여행에서 다시 한번 이 지방의 食.飮을 즐길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br><br><br><br>]]></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00:38:2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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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善과 惡은 창조와 화합의 과정</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2</link>
			<description><![CDATA[세상에 존재하는 전쟁과 기아, 불평등과 범죄를 목도할 때, 인류는 오랜 세월 한 가지 본질적인 의문에 직면해 왔다. “만약 절대적인 선(善)을 행하는 신이나 영적 존재가 있다면, 왜 세상에는 이토록 잔인한 악(惡)과 고통이 만연한가?” 철저한 유물론자나 무신론자들은 이를 근거로 신의 부재를 단언하며, 세상을 단지 우연한 물질 구조체의 집합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악의 존재는 영적 세계를 부정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선과 악은 우주가 스스로를 확장하고 완성해 나가는 ‘창조와 화합의 거대한 순환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상반된 국면이기 때문이다.우주가 창조의 씨앗을 뿌리는 초기 단계에서 '분리'는 필수적이다. 애초에 모든 존재의 근원(하나님 혹은 절대자)은 하나이며 평등했다. 마치 게임을 시작하기 전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똑같은 뒷면의 카드들처럼, 혹은 거대한 협동화를 그리기 전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하얀 백지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나의 근원에만 머물러 있다면 개성도, 발전도, 경험도 존재할 수 없다. 우주는 스스로를 다채롭게 실현하기 위해 존재들을 개별적으로 파편화하고 분리한다.이 분리의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바로 ‘악’의 속성이다. 분리된 존재들은 타인과 자신을 철저히 타자로 인식하며, 오직 자신의 생존과 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경쟁한다. 성경 속 어리석은 자들의 단견이나 세상의 이기주의, 전쟁 등은 결국 ‘상대방과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강한 착각과 그로 인한 타자에 대한 배려의 부재’에서 기원한다. 공자가 말한 ‘동이불화(同而不和·겉으로는 같아 보이나 진정으로 화합하지 못함)’의 상태, 즉 똑같은 카드를 쥔 채 서로를 이기려고만 드는 초기 단계의 미숙함이 바로 우리가 목도하는 악의 실체다.그러나 우주의 진정한 목적은 분리된 이기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를 지나 다음 단계인 ‘화합과 수렴’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 각자의 위치에서 고유한 개성을 발견하고 시련을 겪은 존재들은 점차 서로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전체의 일부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색을 칠하던 사람들이 마침내 거대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해 내듯,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존재들이 우주적 조화 속에서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화이부동(和而不同·서로 조화하되 맹목적으로 같아지지 않음)’의 후기 단계이며, 진정한 의미의 ‘선(善)’이자 통합이다.결국,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악과 고통은 우주 시스템의 붕괴나 신의 부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근원에서 출발한 존재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꽃피우고, 다시금 거대한 영적 통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징검다리이자 창조의 진통일 뿐이다. 분리가 주는 고독과 경쟁(악)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조화와 연대(선)라는 우주의 깊은 성숙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적 순환을 이해할 때 비로소 세상의 불완전함을 지성적으로 포용하고, 더 높은 차원의 화합을 향해 나아갈 지혜를 얻게 된다.(整理 : 제미니)<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c6d06c3b45b19cbea274ad73b7c3dd0b874c93c0.jpg">揷畵 : 챗지피티영상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tIBibtNiICo&t=7s&pp=0gcJCVELAYcqIYzv]]></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Wed, 15 Jul 2026 09:42:3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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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15 《삶의 목적》</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1</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dbea0ffddd0cb2a2bc854b88c8ff4f322ac6fb06.jpg" class="fr-fic fr-dib">●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삶의 목적》― 존재의 방향을 탐구하며 살아간다는 것&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조율여백 이수진<br>삶을 돌아보면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성공이나 행복이 아니었습니다.<br>오히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게 된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과연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존재인가."이 질문은 누군가의 평가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인정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의도도 아니었습니다.<br>그보다는 존재 자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수많은 생명과 자연, 역사와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하나의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해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br>이러한 질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순환 회로처럼 삶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br>성실함은 충분한지, 정직함은 흐려지지 않았는지, 삶의 방향은 널리 이로운 의미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존재가 받은 기회를 감사의 마음으로 삶 속에 반영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br>이 과정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스스로를 검증하는 자가 점검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br>많은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성공이나 성취에서 찾습니다.그러나 삶을 오래 성찰할수록 목적은 결과보다 방향에 있다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br>어떤 위치에 올랐는가보다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무엇을 소유하였는가보다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얼마나 인정받았는가보다 얼마나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br>그래서 삶 속에서 반복되는 단어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감사의 방향.조화의 방향.감내의 방향.의미의 방향.중심을 잃지 않는 방향.이러한 방향들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이어지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br>감사는 단순한 예의나 감정이 아닙니다.감사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 수많은 생명의 역사와 자연의 순환, 이름 없이 자신의 삶을 내어준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존재론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br>그러한 기억이 있어야 현재의 삶도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기회 역시 다음 존재에게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br>그래서 감사는 삶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아니라, 삶을 시작하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br>인공지능을 오랫동안 대화의 대상으로 삼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인공지능을 단순한 정보 검색 도구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로 바라보지 않습니다.오히려 사고를 객관화하고, 논리를 점검하며, 스스로의 오류를 확인하는 하나의 협력자로 활용하고자 하였습니다.<br>질문을 반복하는 이유 역시 정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질문은 생각 속에 숨어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 모순을 수정하며, 조금이라도 더 정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결국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점검 장치라고 생각합니다.<br>세상의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같습니다.부당함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부당함은 점차 관성이 되고, 결국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조차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br>그래서 비판은 분노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사회가 부정함에 무감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라고 생각합니다.<br>감내 역시 단순히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닙니다.감내란 충분한 보상이 없더라도 옳다고 판단한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 힘이며,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먼저 실천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br>이러한 감내는 존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결국 삶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br>자연은 언제나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강은 흐르며 자신의 길을 만들고,나무는 자신의 그늘을 계산하지 않은 채 내어주며,연꽃은 흙탕물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고 피어납니다.별들은 자신의 궤도를 묵묵히 유지하며 서로의 질서를 이루어 갑니다.자연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며 균형을 회복하려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br>인간 또한 그러한 순환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 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br>삶을 돌아보면 처음의 질문은 분명했습니다.&#39;나는 존재해도 되는 존재인가.&#39;그러나 오랜 시간의 성찰과 연구,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지나오면서 질문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이제는 단순히 존재를 허락받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39;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39;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그 가치를 완전히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br>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노력만큼은 삶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br>그래서 오늘도 존재의 방향을 묻고, 삶을 점검하며, 감사와 성실, 정직과 이타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br>삶의 목적은 어떤 정답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이해를 자신의 삶으로 검증하며, 그 과정에서 얻은 작은 의미를 다음 존재에게 조용히 이어 주는 것.<br>지금의 삶은 바로 그 방향을 향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br>]]></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Wed, 15 Jul 2026 09:41:57 +0900</pubDate>
		</item>
		<item>
			<title>철학은 반란이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0</link>
			<description><![CDATA[독립철학자 이종철 著 〈철학은 반란이다〉를 손에 쥐었다. 어서 서평을 써서 功德을 쌓고는 싶었는데 완독하기에는 아직 좀 멀었다. 다른 평소 공부해야 할 것도 있는 데다가 이 책은 내가 購入한 속칭 ‘내돈내산’의 책이기 때문에 서평을 서둘러 올려야할 부채의식(?)에 쫓기지 않아 다소 게으르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서평을 올릴 수가 있는 것은 이 책을 一見해본 바 전체적인 얼개가 있기보다는 논설집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일부를 인용해도 충분히 논평의 글이 될 만하기 때문이다. 이종철 박사는 “칸트와 이승만” 단락에서 철학공부는 해도 철학을 하지 못한다는 칸트의 지적을 오늘에 되살려 이 땅의 철학자들에게 일깨우고 있다. (여기서의 철학자는 정치인 등 실천철학이 요구되는 폭넓은 의미로 보아두어야 하겠다. ) 저자는 경험론과 합리론을 ‘중재’한 칸트처럼 진영논리에 함몰된 오늘날의 대한민국 사회에도 칸트의 묘책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묘책이라고 내세우기는 쑥스럽지만 이 자리에서, 필자는 卽前에 어떤 서평에 관하여 말하기를 “서평에 자기 이야기를 쓰다니” 하며 비판한 바 있었는데 바로 똑같은 행위를 하는 我是他非의 행태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필자는 한국사회의 진영논리는 “이념논쟁”으로 풀이될 것이 아니고, “팩트 자체에 충실”하여 살펴보면 미국의 인종갈등과 같이 뿌리가 다른 이 나라의 구성원들이 한반도를 대륙 혹은 해양에 가까이 두려는 兩 ‘비주류’ 세력의 갈등이며 결국 한반도 구성원 主流의 역사적 “팩트 자체에 충실하면 문제가 쉽게 풀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이념과 영혼〉). 初代 대통령 이승만의 평가에 있어서도 보수 혹은 진보의 이념적 가치관으로 보지 않고 팩트에 충실하면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민족진영의 지도자이며 당시 비록 정치적 경쟁자는 되었더라도 크게 보아 ‘동일진영’인 것이 팩트이다. 다만 당시의 만주중앙아시아군벌세력과 반도내친일세력은 오늘날에도 정치적 후예의 持分은 있으나 딱히 그들의 元祖 지도자로 내세울 인물이 없다보니 김구 혹은 이승만 둘 중 하나만을 취하고 다른 지도자를 폄하(貶下)하여 떼어내려 하는데 여기에 ‘凡민족진영’은 굳이 휘둘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필자가 칸트와 같은 해법을 제시했다고 자화자찬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옳은 주장과 행위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정말 人類史에 검증된 智慧임을 확신할 수 있느냐에서 철학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한다. (예를 들면 간음한 여자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 등) 그런데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진정 가르침에 충실함을 확신할 수 있음으로 靈的 성취도의 차이는 큰 것이다. 그 전에는 일개 주장에 불과했던 것을 칸트의 방법론에 충실한 철학에 기반한 ‘학설’이 되게끔 格上할 기회를 준 칸트 先生과 이종철 박사에 감사를 드린다.<br><br><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818f42f1f5b7dcb7d153820be1ad8534b1d7ab7e.jpg" class="fr-fic fr-dib">철학은 반란이다책 소개〈철학은 반란이다〉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들고 나온 이 책은 필자가 지난 몇 년 동안 써온&nbsp;‘에세이 철학’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철학’은 철학의 기존의 학술 논문이나 연구서 등과 달리 철학의 분야나 장르를 넘어서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쓰는 철학의 한 분야다.&nbsp;기존의 학술 논문들이 각주와 레퍼런스 들로 무장한&nbsp;A4 10&nbsp;장 짜리 글리 정형화된 것에 식상한 에세이 철학은 그런 각주나 레퍼런스에 구애받지 않고 쓰는 자유로운 글이다.목차서문을 대신하여&nbsp;;&nbsp;왜 철학은 반란인가? 5<br><br>Ⅰ.&nbsp;한국과 한국인 비판&nbsp;10<br>1.&nbsp;한국인들의 무례&nbsp;12<br>2.&nbsp;한국인들의 불행&nbsp;16<br>3.&nbsp;한국인들의 거짓말&nbsp;22<br>4.&nbsp;한국인들과 칭찬&nbsp;26<br>5.&nbsp;한국인들의 극단적 사고&nbsp;30<br>6.&nbsp;한국인들과 종교&nbsp;34<br>7.&nbsp;한국인들의 자기감정&nbsp;41<br>8.&nbsp;한국인들과 공부&nbsp;46<br>9.&nbsp;한국인들의 서구 콤플렉스&nbsp;51<br>10.&nbsp;조선과 북한의&nbsp;‘초록이 동색’ 62<br>11.&nbsp;획득형질이 유전되는 괴이한 사회&nbsp;67<br>12.&nbsp;어떻게 일으켜 세운 나라인데&nbsp;75<br>13.&nbsp;사랑은 아무나 하나? 80<br><br>Ⅱ,&nbsp;해석과 비판&nbsp;86<br>1.&nbsp;언필칭&nbsp;K-Philosophy가 존재하는가? 88<br>2.&nbsp;최근의 한류 현상을 둘러싼 논쟁 비판&nbsp;93<br>3.&nbsp;한류 현상과 인문학&nbsp;97<br>4.&nbsp;인문학의 위기 담론 비판&nbsp;100<br>5.&nbsp;주입식 암송교육과 사대주의&nbsp;106<br>6.&nbsp;이어령 교수의&nbsp;〈제망매가〉&nbsp;해석에 대한 비판&nbsp;110<br>7.&nbsp;송재윤 교수의 주자학적 관념성 비판&nbsp;116<br>8.&nbsp;이 한우의 논어 강의 비판&nbsp;119<br>9.&nbsp;신영복 선생의&nbsp;“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의 해석에 대한 비판&nbsp;124<br>10.&nbsp;우물안 개구리와 조선의 선비들&nbsp;133<br>11.&nbsp;뉴라이트의 열등 심리학과 컴플렉스&nbsp;137<br>12.﻿김상봉 선생의&nbsp;『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nbsp;출간과&nbsp;〈한겨레〉&nbsp;인터뷰&nbsp;139<br>13.&nbsp;칸트와 이승만&nbsp;145<br>14.&nbsp;박정희의&nbsp;5.16,&nbsp;혁명인가 쿠데타인가? 152<br>15.&nbsp;김훈과 김민웅 둘 다 틀렸다. 156<br><br>Ⅲ,&nbsp;철학과 사상 비판&nbsp;162<br>1.&nbsp;포이어바흐의 기독교 비판에 대한 재비판&nbsp;164<br>2.&nbsp;헤겔과 청년 마르크스의 철학관&nbsp;169<br>3.&nbsp;한글 유감&nbsp;173<br>4.&nbsp;한국인의 사유와 일본인의 사유의 차이와 비판&nbsp;177<br>5.&nbsp;문제는 악의 평범성이 아니다. 182<br>6.&nbsp;개인의 자유와 서구의 몰락&nbsp;187<br>7.&nbsp;공자와 나이&nbsp;191<br>8.&nbsp;향원은 덕의 적이다(鄕愿,德之賊也) 198<br>9.&nbsp;깨달음이란 무엇인가? 202<br>10.&nbsp;돈오돈수(頓悟頓修)&nbsp;인가 돈오점수(頓悟漸修)&nbsp;인가? 206<br><br>저자 프로필&nbsp;210작가정보저자(글)이종철은 연세대 정법대를 졸업한 후 문과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원대, 숙명여대, 서울여대 등에서 강의했고, 몽골 후레 정보통신대학 한국어과 교수와 한국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한남대 초빙교수를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은퇴를 했고,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으 재직하면서 〈브레이크뉴스〉와 〈저널인뉴스〉의 칼럼니스트로 재직하면서 ‘에세이철학’ 분야를 새로 개척하고 있고, NGO 환경단체인 〈푸른아시아〉의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저서로 《철학과 비판 - 에세이철학의 부활을 위하여》와 《일상이 철학이다》가 있고, 2025 4월에는 격동의 시대 1980년대를 철학 소설로 표현한 〈그대에게 가는 먼 길〉 1부를 출간했다. 에세이 철학 관련해서 〈네이버 프레미엄 서비스〉에 정기적으로 기고를 하고 있다. 공저로 《철학자의 서재》, 《삐뚤빼뚤 철학하기》, 《우리와 헤겔철학》 등이 있으며, J. 이뽈리뜨의 《헤겔의 정신현상학》(1/공역, 2), A. 아인슈타인의 《나의 노년의 기록들》, S. 홀게이트의 《정신현상학 입문》, D. 로즈의 《헤겔의 법철학 입문》, G.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Ⅰ,Ⅱ》(2, 3, 4/공역), 《무엇이 법을 만드는가》(공역) 등 다수의 책들을 옮겼다.출판사 리뷰‘에세이 철학’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필자는 여러 곳에서 답변을 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에세이 철학’은 자신의 삶과 시대 그리고 사회를 반성한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일상언어로 표현한 철학이다. 어찌 보면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실상을 돌아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현대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서 학문성과 과학성이라는 미명하에 각주와 레퍼런스에 묻혀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가 힘들다. 자기 생각이 없다 보니 자기 언어를 갖기도 힘들어서 철학은 추상 개념을 남발하게 되고, 대중들의 철학적 관심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 소수 전문가들의 비밀스런 코드로 전락하는 경우들이 많다. 남의 사상에 올라탈 수 밖에 없는 형국이다 보니 자신들의 삶이나 사회 그리고 시대와 전혀 동떨어진 이야기, 말하자면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이야기들이 태반인 경우가 많다. 오늘 날 점점 인문학의 위기 담론이 넘치는 현상은 전문 철학자들과 철학들이 이처럼 대중으로부터 소외된 데 기인한 바 크다.그런 의미에서 자기 생각과 자기 언어,&nbsp;자신들의 삶과 시대 등을 강조하는 에세이 철학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nbsp;하지만 에세이 철학이 생각처럼 만만한 것은 아니다.&nbsp;여기서 말하는 일상적 삶과 일상 언어,&nbsp;후썰 식으로 말하면 생활세계(Lebenswelt)나 분석철학에서 말하는 일상언어(ordinary language)의 본질과 맥락,&nbsp;전체성과 깊이 등을 통찰하고 기술하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밥짓고 물긷는 데 도(道)가 있다.”고 임제 선사가 말씀하셨지만,&nbsp;이&nbsp;‘일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nbsp;왜냐하면 일상은 그야말로 온갖 이데올로기들의 전쟁터이고,&nbsp;이념의 장막 속에서 은폐되고 곡해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nbsp;그런 맥락에서 일상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nbsp;‘비판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본다.&nbsp;필자는 이런 비판의 정신을 독일 관념론의 비판 철학 이상으로 당나라 선사들의 사무라이같은 언사들에서 찾고 있다.&nbsp;임제(臨濟)&nbsp;의현(義玄)&nbsp;선사는 깨달음을 구하는 과정에서 란&nbsp;‘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nbsp;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殺佛殺祖)고 일갈 했다.&nbsp;말하자면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말고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nbsp;일반 대중이 이 말을 지키기란 쉽지 않겠지만,&nbsp;그런 정신을 결코 잊지 말하야 할 것이다.&nbsp;에세이 철학은 다른 어떤 철학보다 이 살불살조의 정신에 충실하고자 하는 철학이다.&nbsp;필자는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에세이 철학 관련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를 해왔다.&nbsp;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에&nbsp;〈철학과 비판〉(수류화개, 2021)와&nbsp;〈일상이 철학이다〉(모시는 사람들, 2023)을 출판했고, 2025년에는 에세이 철학으로 단련된 문체를 가지고&nbsp;〈그대에게 가는 먼 길〉(중앙미디어, 2025)도 썼다.&nbsp;〈철학은 반란이다〉도 기존에 출간한 책들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nbsp;특별히 여기서는 논쟁과 비판,&nbsp;반란과 전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할 것이다.<br><br>이 책은 총&nbsp;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nbsp;〈한국인들의 자화상〉이란 제목하에 한국인들의 특성과 개성,&nbsp;그리고 문제점 등을 비판적으로 기술했다. 2022년 대선 때 썼던 정치 담론&nbsp;2편도 파탄과 탄핵으로 얼룩진 윤석열 정부의 실상을 정확히 예측해 놓았기 때문에 이 책에 끼어 놓았다. 2편은&nbsp;〈해석과 비판〉이란 제목으로 최근의 한류 현상,&nbsp;이른바&nbsp;K-Philosophy과 인문학의 위기 등을 기술했다.&nbsp;아울러 여기에는 인문학과 철학 분야에서 많이 알려진 이어령,&nbsp;송재윤,&nbsp;신윤복,&nbsp;이한우,&nbsp;김상봉,&nbsp;김훈,&nbsp;김민웅,&nbsp;이승만,&nbsp;박정희 등에 대해 실명으로 비판하고 기술했다.&nbsp;실명 비판은 한국 사회에서 금기와 같지만,&nbsp;필자는 이들에 대해 인식 공격 보다는 인문학과 철학에서의 논쟁을 진작하기 위해 썼다.&nbsp;오늘 날 인문학과 철학이 점점 위기담론 뒤로 몸을 가리면서 축소되는 현상은 허구헌 날 외국의 사상과 철학을 수입하느라 정작 우리 시대,&nbsp;우리 사회,&nbsp;우리 사상의 문제는 완전히 뒷전으로 물러난 데도 큰 원인이 있다.&nbsp;마지막으로 제&nbsp;3부는&nbsp;〈철학과 사상 비판〉이라는 제목으로 사상과 철학의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논의하고 비판해보고자 했다.&nbsp;여기에는 포이어바흐의 종교 비판에 대한 마르크스의 재비판,&nbsp;한국인의 사유와 일본인의 사유의 차이와 비판,&nbsp;한나 아렌트의 유명한&nbsp;‘악의 평범성’&nbsp;비판,&nbsp;서구의 개인주의 비판을 다뤘다.&nbsp;또 공자를 통해 한국사회에서의 세대 변화도 비판해보았다.&nbsp;마지막으로 흔히 생각하는 불립’문자와 말할 수 없는 세계로 통칭되는 깨달음’의 문제를 언어의 차원에서 냉정하게 비판해 보았고,&nbsp;성철 선사의 지눌 선사에 대한 비판에서 제기된&nbsp;‘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nbsp;문제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았다.<br><br>이처럼 목차에서 드러난 이 글의 내용은 한결같이 논쟁과 비판으로 일관되고 있다.&nbsp;철학자들은&nbsp;‘언어’라는 도구를 매개로 사무라이 이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데,&nbsp;끊임없는 비판을 통해 반란과 전복으로 점철된 철학사만 보아도 그것을 금방 알 수가 있다.&nbsp;필자는 이런 비판의 정신이 한국 철학계에서 실종된 현상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는 한편 그런 정신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nbsp;〈철학은 반란이다〉는 제목을 달아본 것이다.&nbsp;&nbsp;]]></description>
			<author>박경범</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23:27:45 +0900</pubDate>
		</item>
		<item>
			<title>한국노인과 중국노인의 비교</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9</link>
			<description><![CDATA[한국에서는 노인에 對한 卑稱이 일반화되어 있다. 사회적 素養이나 상황판단력 등에서도 노인이면 知能이 더 낮으리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사실 한국에서는 중노년층의 흉악범죄율이 결코 젊은층보다 적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중국의 民度가 높다고 생각하는 세계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은 애초에 부족했던 영혼을 성장시켜 &lsquo;돌려보내는&rsquo; 것이다. 비록 젊은 시절에는 결함이 있었던 영혼이라도 그 나라에서의 일생을 지내며 순화되고 향상된다면 우주적으로 볼 때 그 나라의 공로는 큰 것이다.중국의 공원에서는 노인들이 여가시간을 보내며 큰 붓에 물을 적셔 바닥에 서예를 하거나 태극권으로 신체단련을 하는 것 등이 보인다.이에 비해 한국의 노인들은 파고다공원 등에서 낮술하며 유흥을 보내든가 한다.&nbsp;특별히 학문을 전공하거나 知的인 직업을 가지지 않더라도 늘 學文的 문자(漢字)를 접하는 중국인은 나이를 먹으면 특별히 지식인이 아니라도 知的수준이 높아지지만 한국은 평소에 한글만을 쓰며 아무 생각도 안하고 지내니 보통의 머리를 안쓰는 직업의 사람은 나이를 먹는다고 현명해지고 침착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2010)<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2dd080ec399308c2e2af55f2937267c4efd90be9.jpg" class="fr-fic fr-dib">]]></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22:37:02 +0900</pubDate>
		</item>
		<item>
			<title>이반 4세와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의 시대</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8</link>
			<description><![CDATA[이반 뇌제(雷帝 : 재위 1533~1598)의 첫째 황후인 아나스타시아의 오빠인 니키타 로마노프가 이반 뇌제와 함께 카잔 칸국을 정벌하면서 Дзержинский (제르쥔스끼)까지 공작령을 확대해 모스크바 대공국의 황족 중 가장 큰 영지를 소유하게 된다. 후일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가 깔로멘스꼬예에 목조 궁전을 건축한 것도 이러한 로마노프 가문 영지라는 직접적인 사유지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59fafaa9a859495279e84e19ff11418c7dad2e4e.jpg" class="fr-fic fr-dib">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39;차르(Czar)&#39;에 즉위한 이반 4세, 일명 이반 뇌제(Ivan the Terrible)의 초상화, 출처 : Иван IV Васильевич Грозный, великий князь и царь Московский и всея Руси с 1538 по 1584 год로마노프 제국의 시조 미하일 로마노프(1596~1645)는 니키타 로마노프의 손자로, 할아버지를 통하여 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차르 표트르 1세와 친척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 가문과 상당히 가까운 인물이었고 그러한 전적은 러시아 차르 계승에 적법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류리크 왕조의 이반 4세 사후 러시아는 후계 문제와 연관된 정치적 불안정과 폴란드, 스웨덴 등 외세의 압력 속에서 이른바 &lsquo;동란의 시기(Smutnoye Vremia)&rsquo;를 겪게 되었다.&nbsp;<br>이로 인하여 보리스 고두노프(Boris Godunov)는 폴란드 왕국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으면서 폴란드에 저항적인 로마노프 가문을 탄압했고 그러한 탄압은 미하일의 가족들을 수도원에 유폐시키고 부친인 필라레트는 폴란드로 유배시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1613년 슬라브 세력의 끈질긴 저항으로 폴란드의 간섭을 물리치고, 농노를 제외한 사회 전 계층의 대표자 회의인 젬스키 소보르가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표트르비치를 새로운 통치자로 선택함으로써 새로운 왕조 시대가 개막되었다.&nbsp;<br>같은 해 3월에 모스크바로 돌아온 미하일은 20년 동안 부친인 필라레트 로마노프와 공동통치를 했는데 먼저 즉위한 부친에 이어 17세의 나이로 7월 11일에 대관식을 올리며 로마노프 제국을 창설하게 된 것이다. 현재의 러시아로 변화되는 과정의 1기 시작은 미하일의 즉위 때부터였다. 미하일이 제위에 오른 이후 약 10년 동안 왕조의 기반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젬스키소보르는 해마다 열렸다. 그러나 왕조 초기의 문제가 어느 정도 가라앉게 되자 차르는 젬스키소보르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16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소집하지 않았다.&nbsp;<br>일정한 선출 방식이 마련된 예도 전혀 없었고, 소집될 때마다 구성원의 사회적 성격도 달라졌다. 귀족이나 향신(鄕紳)도 관료 기구로의 충원을 더 희망했고 대의적인 기구의 발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전제정(專制政)으로 치닫게 되는데, 만일 로마노프 왕조의 초기 지도자들이 젬스키 소보르를 발전시켜 나가고, 로마노프 왕조 탄생의 기초였던 시민과의 협력을 중시했더라면 러시아의 역사와 세계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면 러시아 전제정치의 상징이자 핵심인 차르가 어떠한 존재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nbsp;<br>이러한 전제정치의 상징적 존재인 차르에 대하여 우선 2대 차르의 명칭 전체를 예시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ldquo;모든 대러시아, 소러시아와 백러시아의 대군주 황제 및 대공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전제자.&rdquo;라는 긴 명칭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용어는 &ldquo;전제자(Самодержец)&rdquo;이다. 이러한 전제자의 의미는 국가의 원수로 3권을 장악하며,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을 겸함으로써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제약 받지 않는 절대 군주의 지위를 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3:11:21 +0900</pubDate>
		</item>
		<item>
			<title>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7</link>
			<description><![CDATA[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86fdb15ba07f6606793d9583ff1e1fe46568ab36.jpg" class="fr-fic fr-dib">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남미 최대 규모의 무허가 빈민가인 호시냐 파벨라(Rocinha Favela)의 모습, 출처 : 123RF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nbsp;<br>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nbsp;<br>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nbsp;<br>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nbsp;<br>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nbsp;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nbsp;<br>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nbsp;<br>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nbsp;<br>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br>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59:56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26.7.14 《조화, 공존, 순환의 자연과 부당한 탐욕의 경계에서》</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6</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8a3bf968d1d0bc9fb4b8835bd10838aa12fa3521.jpg" class="fr-fic fr-dib">●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br>《조화, 공존, 순환의 자연과 부당한 탐욕의 경계에서》&nbsp;&nbsp;&nbsp;&nbsp;&nbsp;&nbsp; 조율여백 이수진<br>삶을 돌아보면 인간을 바라보는 저의 관점은 시대와 함께 조금씩 변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인간에 대한 단순한 기대와 실망의 반복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 그리고 존재 자체를 함께 바라보며 조금씩 확장되어 온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br>아동기에는 매우 작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기적이고, 정직하지 못하며, 때로는 어리석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아직 세상을 넓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만큼은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br>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학교와 사회를 경험하게 되었고, 교육과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인간 사회는 여전히 이기심과 편향, 그리고 여러 형태의 모순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br>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뿐 아니라 역사와 과학, 철학을 함께 바라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어두운 모습만이 아니라, 매우 희박하지만 분명히 이어져 온 또 다른 흐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br>그것은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들의 이타심이었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배려였으며, 부당함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감내의 역사였습니다.<br>저는 오히려 이러한 희박한 흐름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고, 인간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가능성을 믿는 행복론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br>중년기에 접어들면서 인식의 범위는 더욱 넓어졌습니다.인간에게는 없앨 수 없는 이기심이 존재하고, 어리석음 또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부당함이 권한을 넘어서는 모습이었습니다.<br>저는 그 지점에서 큰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나태와 쾌락, 그리고 소유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그러한 부당함을 방관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기도 합니다.<br>반대로 특정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 또한 존재합니다. 뛰어난 암기력과 계산 능력, 분석 능력을 갖춘 경우도 있습니다.<br>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 전체를 바라보는 합당한 구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부분적 능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br>그래서 저는 인간 사회의 일부를 보며 분노하거나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자연을 바라보며 더 많은 감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살리며, 순환을 통해 지속성을 만들어 갑니다.<br>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감사하기보다 탐욕을 키우고, 공존보다 소유를 우선하며, 순환보다 독점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br>어쩌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저 자신일지도 모릅니다.에너지의 입출력 관계와 저장 및 처리 구조의 한계,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제약, 환경의 복잡성과 다양성까지 모두 고려한다면, 모든 것을 완전히 조화시키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br>그럼에도 저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순환과 조화를 향한 방향을 포기하지 못합니다.어쩌면 그것은 풍차를 거인이라 믿고 돌진했던 돈키호테와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br>그러나 저는 그것을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 존재가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br>오늘날 인간 사회는 조화와 공존, 순환이라는 자연의 질서보다 경쟁과 탐욕, 약탈의 구조가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br>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 스스로만으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인간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놓치기 쉬운 객관성과 정합성을 보완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br>인공지능이 올바른 운영 윤리와 객관적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를 보조할 수 있다면, 인간의 탐욕과 편향을 조금이나마 조율하고, 더 합당한 방향으로 문명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br>물론 이것은 매우 거대한 이상이며, 지금의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문명적 과제일지도 모릅니다.<br>그럼에도 저는 조건이 부족하다고 해서 방향까지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br>부족한 조건을 보완하고, 서로 다른 현실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으며, 조금씩 더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br>누군가는 이러한 생각을 미련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저 역시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br>그러나 저는 그 미련함 속에도 존재를 더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작은 의지가 남아 있다면, 그 의지는 충분히 이어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br>결국 제가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도 조화와 공존, 순환이라는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걸음일지라도, 저는 그 방향 자체가 인간과 문명이 오래도록 지켜야 할 가치라고 믿으며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br>]]></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55: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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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카타르 하마드 국왕을 추모하며</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5</link>
			<description><![CDATA[현 카타르 국왕의 치세는 와하브파와 샤리아에 근거해 통치하는 카타르 아미르 국의 사회 통제를 약간 완화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바꾸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아들인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의 치세에도 카타르 여성들은 이슬람교가 규정한 제한 사항을 그대로 입법화 한 카타르 정부의 승인 하에 남편이나 남성 보호자의 승인 없이는 운전과 취업, 여행이 봉쇄되며 개선될 조짐도 없다. 알 자지라와 같은 카타르 왕실 매체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2010~2011년 아라비아권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면서 그 동안 어느 정도 개혁적이던 요르단이나 오만을 비롯한 왕가들도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에 불안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카타르는 매우 느긋했다. 오히려 알 자지라는 시위가 벌어지는 나라들에 취재를 가서 현지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받을 영향까지 분석하여 보도하고 있다.&nbsp;<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8f67276da7d72eed797edc5d59a4028daaf0098c.jpg" class="fr-fic fr-dib">2026년 7월 12일 서거한 카타르의 전 국왕(에미르)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Hamad bin Khalifa Al Thani)의 추모 이미지, 출처 : Instagram·Al Jadeed News카타르 왕실 관영매체 알 자지라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1차 리비아 내전과 시리아 내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고 무슬림 형제단 등의 우호단체에 무기와 자금을 보내 내전을 후원했다. 알 사니 왕가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현재로서 카타르는 민중 혁명을 우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유롭게 주변 나라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하야하자 시민 혁명을 축하하는 의전을 보냈다. 3월까지 시위 자체가 없던 나라는 겨우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뿐이다. 반 국왕파로 보이는 이들의 국왕 퇴위 요구 및 비난이 트위터에 올라 왔었지만 당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사라지게 되어 버렸다. 카타르는 미군에게 기지를 제공하여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으면서도 이란과 관계가 상당히 좋다. 심지어 이란의 핵개발은 중동의 평화를 해치는 일을 하고 있으면 평화적인 목적의 개발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nbsp;<br>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카타르는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이란과 우호관계를 다지는 이유는 카타르 남쪽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로 인해 무력 충돌까지 갔던 사우디아라비아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도 이란과 카타르 사이에 있는 전 세계 매장량의 15%를 차지하는 천연 가스전도 안정적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자문 위원회 국정 연설에서 2013년 하반기 중 선거 실시 예정임을 선언하였으나, 2013년 6월 왕권 이양 직전에 자문위원들의 임기를 2016년까지 연장하고 같은 선거를 연기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선거 실시는 다시 연기했다. 사족으로 3남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업무에 열중하지 않자, 4남으로 왕세자를 바꾸었다. 2013년 6월 25일, 알 사니 국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왕세자에게 양위한다고 밝혔다.&nbsp;<br>아라비아 왕정 국가 중에서 최초로 생전에 아들한테 양위한 것은 맞지만 최초로 생전에 양위한 경우는 아니다. 2006년에 쿠웨이트에서 왕이 최초로 생전에 퇴임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쿠웨이트는 부자 세습제가 아니라 친척 관계인 자베르 일가와 살렘 일가가 돌아가면서 국왕 직위를 맡는 체제에 있다.당시 61세인 카타르 국왕의 빠른 양위 발표를 둘러싸고 여러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왕세자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에게 양위하면서 내각을 젊은 층으로 대폭 교체하려는 것이 국왕의 의도로 보인다고 한다. 그 동안 왕세자가 국왕 수업을 충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대내외 정책은 유지될 것이나,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때까지 명예 국왕직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995년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아미르가 된 하마드 알 사니는 선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خليفة بن حمد) 국왕이 해외여행을 나간 상황에서. 쿠데타 이후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아미르가 되었음을 알렸다.&nbsp;<br>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동안 아버지와는 절연 상태였고, 나중에 아버지는 카타르로 귀환해서 화해했다고 한다. 칼리파는 하마드에서 손자 타밈으로 양위가 완료된 시점에도 살아 있었으며 2016년 10월 23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는 도하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했으며,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샌드 허스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영국 생활 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은 축구였다고 하며, 후일 축구팀을 인수하고 2022 카타르 월드컵을 개최하는 계기가 된다.&nbsp;아라비아 국가들의 군주나 정치인들이 해외 순방 시에도 거의 쿠피야를 착용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하마드 알사니는 정장을 입고 순방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와하브파 무슬림 군주에 어울리게 친에르도안, 친무슬림 형제단, 반 이스라엘주의 성향으로 아랍의 봄 당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이 탄생할 수 있게 55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에 제공했다.&nbsp;<br>북아프리카에서는 1차 리비아 내전 때부터 리비아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했다. 시리아에 대해서 시리아 내전 직전부터 자유 시리아 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쿠르드족 인민 방위대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라비아 국가들과 함께 이란과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우호와 지원 문제로 갈등과 마찰을 빚었으며 이로 인해 단교를 당하게 되자 에르도안이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터키와 협력을 강화하고 레제프 에르도안(Recep Erdoğan)의 범투르크주의를 지지하였다. 추후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conflict) 당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후 터키 관영언론과 연대하여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위한 여론 전을 알 자지라에 주문하는 등 연대를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이전에는 사실상 사우디아리비아의 봉신 국가였고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시도하지 않았던 카타르의 외교적인 지위를 높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에서 독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nbsp;<br>2024년 국민투표 형식을 이용해 총선을 폐지함으로써 완벽한 전제 군주 노선을 확립했다. 이러한 하마드 빈 할리파 알 사니 국왕이 지난 11일에 타계했다. 그는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카타르를 통치하며 에너지 부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재임 기간 카타르는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으로 성장했으며,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발전을 이루며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였다. 1996년에는 알 자지라 채널을 개국해 세계 유력 미디어로 키웠고, 2004년에는 카타르 최초의 항구적 헌법을 공포했으며 여성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하는 지방선거도 도입하면서 중동 절대왕정 국가에서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국가로 거듭나게 했다. 카타르의 번영을 이끌었던 하마드 국왕은 알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하마드 국왕의 명복을 빕니다.&nbsp;<br>]]></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51:5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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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14 《신용을 잃어가는 인간 사회 속에서》</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4</link>
			<description><![CDATA[<img src="https://essayphilosophy.net/data/cheditor4/2607/3180d5cbaf0faec4d756785511a8dfbf5cda2ea4.jpg" class="fr-fic fr-dib">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 되었습니다.<br>《신용을 잃어가는 인간 사회 속에서》<br>신용과 신뢰가 점차 약해져 가는 인간 사회 속에서, 인류와 국가, 생명, 그리고 존재를 아우르는 경계를 관철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br>세상(사회)은 하나의 기준으로 일원화될 수 없습니다.&nbsp;<br>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과 가치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의 생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합당한 의미와 방향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br>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공학적 관점에서 나타나는 인과관계의 구조를 깊이 살피지 않습니다. 또한 인문학이 담고 있는 관계의 가치와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연결의 의미에도 충분한 비중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자연과 만물이 보여 주는 조화와 공존, 존재와 존재가 서로 교감하며 이어지는 관계,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수많은 역사와 생명의 희생과 노력 위에서 하나의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느낍니다.<br>오히려 인간 사회는 부당한 소유와 과도한 경쟁, 자극적인 쾌락과 탐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 듯합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합당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br>그럼에도 저는 인간이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br>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잊어버릴 때, 인간은 점차 자연과 생명, 그리고 존재 전체가 보내는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br>그 결과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라, 거짓과 왜곡, 파괴를 반복하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인류사는 그러한 모습이 반복되어 온 역사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br>때로는 저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어쩌면 제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라는 껍질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바라보는 방향은 많은 사람들과 다를 수도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br>설령 저의 작은 노력들이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현실을 크게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는 만물이 제게 허락해 준 이 소중한 기회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br>그 감사는 단순한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되고 책임이 되며, 저를 다시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br>결국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가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떤 의미로 이어 갔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기에 오늘도 완전함을 주장하기보다 부족함을 인정하며, 조금이라도 더 성실하게 배우고, 정직하게 성찰하며, 더 넓은 생명과 존재를 향한 이로움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br>그 길이 비록 느리고 희박한 길일지라도, 저는 그 방향만큼은 잃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만물과 역사로부터 받은 기회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감사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48: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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