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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호모 스크립텐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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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Fri, 17 Jul 2026 07:26:1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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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호모 스크립텐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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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로마노프 상류 사회 여인들의 화려한 삶</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90</link>
			<description><![CDATA[로마노프 왕실 및 귀족 여인들 치고 금과 보석으로 치장하지 않는 여인들이 없었다 한다. 러시아는 그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이나 키예프 루스와는 달리 사회 계급 제도가 강력했고 그 가운데 최상급은 역시 귀족과 차르 집안의 왕족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정치 제도가 단순한 공국에서 차르국, 표트르 대제 이후 제정으로 이어지는 동안 황제를 선출하는 등의 공공문제를 처리하는 정치상의 권리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권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가문들도 존재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인 가문이 유수포프 집안이라 볼 수 있겠다.19세기 궁정 화가였던 미하이 지치(Mih&aacute;ly Zichy)가 1873년에 그린 《겨울 궁전 콘서트홀에서의 무도회(Ball in the Concert Hall of the Winter Palace)》라는 수채화 작품, 출처 : Wikimedia Commons이러한 사회계급의 존재는 로마노프 시대의 건축이나 로마노프 왕정 복식 등 중근세 러시아 문화 전반에서 다소 과시적인 형상이 나타나는데 근본적 이유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중근세 러시아 시대의 인물화 등을 보면 큰 드레스를 몸에 두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발-티에트(бал-Тыет)라 불렀는데 발-티에트 복장의 원형은 고대 로마에서 비잔틴 제국 시대에 즐겨 입었던 이른바 &#39;토가&#39;(Toga)라고 부르는 옷에서 유래된 드레스였다.&nbsp;반원형이나, 타원형, 팔각형의 드레스를 길게 늘어뜨려 몸에 둘러 입으며, 재료는 실크나 모피 등이었다.그러나 로마노프 제국 시대 후기로 갈수록 드레스의 길이도 더 길어지고, 두르는 방식도 더 복잡해지면서 다소 과장된 스타일이 되었고 색상이나, 단의 끝처리, 입는 방식 등이 계급에 따라 엄격히 다른 형태로 표출되었다. 한편 러시아의 귀족 여인들도 마찬가지로 한 장의 넓은 천을 끌어 올려 천의 앞뒤판을 어깨선에서 수많은 단추나 브로치로 고정한 스타일을 많이 착용하였고 이는 기존 서유럽의 드레스보다 더 풍성한 것이 일반적이었다.따라서 넓고 펑퍼짐하며 풍성한 주름과 함께 인체 위에 걸쳐지면서, 인체의 형태를 더욱 육감적으로 드러내게 되었다. 러시아 상류층의 의복은 사회 계급을 중시하였던 당시 러시아 사회를 잘 반영하고 있다. 기본적인 복식 형태는 프랑스의 것과 거의 흡사하지만, 사회 계급에 따른 차이를 거의 모든 의복의 형태, 색, 장식 등에서 볼 수 있었다. 의복은 부피가 커지거나, 인체의 선을 드러냄으로써 점차 화려하고 과시적이 되어 갔기 때문에 중근세 러시아 왕실, 귀족 여인들의 복식에서 당시 러시아 상류층 여성들의 사회를 엿볼 수 있다.]]></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6:17:3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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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터키 이즈미르의 역사, 호메로스의 혼이 서려있는 곳</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9</link>
			<description><![CDATA[현재 터키 공화국의 영토이지만, 호메로스의 고향인 스미르나(Smirna, 지금의 이즈미르)에서부터 밀레토스에 이르는 지역을 이오니아라고 지칭하고 있다. 이곳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요람이다. 이곳 스미르네는 동서 교역의 요지이자 그리스 철학이 탄생한 배경이 있는 곳으로 그리스 문화가 시작된 곳이다. 이러한 이오니아의 전설에는 헬렌(Hellen)의 손자인 이온(Ion)의 자손이라 한다. 이 종족의 기원은 실제로 본 연구에 인하여 여러 추정으로 인한 사료의 분석, 그리고 고고학적인 분석으로 볼 때 일부 밝히기도 했지만 이후 이 민족들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주민 외에 에게 해 중부 여러 섬들의 주민, 그리스 본토의 아티카의 아테네인까지 이오니아인으로 불렸고 델로스 섬의 아폴론 신(神)의 제사가 그들의 결합을 상징했다.&nbsp;튀르키예 제3의 도시 이즈미르(İzmir)의 상징인 이즈미르 시계탑(İzmir Saat Kulesi)과 그 주변의 코나크 광장(Konak Square),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이 지방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 국가 밀레토스에서는 탈레스 이외에 아낙시만드로스(Anaksimandros), 아낙시메네스(Anaksimenes)와 같은 출중한 철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으며, &ldquo;만물은 유전 한다&rdquo;라는 말을 언급하여 유명해진 헤라클레이토스(Heraclleitos)는 그 인근 도시인 에페소스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즈미르의 역사는 B.C 5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과거 트로이와 이오니아 폴리스의 역사를 영위한 곳이었다. 그리스 때는 스미르나라고 불렀고 로마 시대 때는 페르가몬이라고도 불렸다. 현 터키 이즈미르 도의 베르가마(Bergama) 군에 있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도시를 페르가몬이라 했다. 페르가몬의 어원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네오프톨레모스와 안드로마케의 아들 페르가모스에서 유래했다.&nbsp;이곳은 터키의 아나톨리아의 북서쪽 아시아 에게 해에서 26km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헬레니즘 때 카이우스 강 북쪽에 자리했던 페르가몬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이기도 하다. 의외로 기독교하고도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한게 요한 묵시록에 적힌 아시아에 있는 7개 교회 중 하나가 페르가몬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신교 성경에서 표기한 &#39;버가모&#39;가 바로 페르가몬이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서 역사상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크세노폰의 저작물이라고 한다. 크세노폰과 함께 한 그리스 군대가 점령하였으나 다시 페르시아에게 빼앗겼다는 기록만 나오고 그 외에 별다른 중요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런 페르가몬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디아도코이 때로 알려진다.디아도코이 당시 환관 출신이자, 처음에는 안티고노스의 부하였던 필레타이로스가 안티고노스를 배신하여 리시마코스 밑으로 들어갔다. 안티고노스가 패사한 뒤, 필레타이로스는 리시마코스의 신임을 사 방어가 용이한 이 도시에서 그의 보물을 지키도록 명을 받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곧 정쟁에 휘말리는 바람에 리시마코스도 배신하였으며, 리시마코스가 셀레우코스에게 패하고 죽자 일시적으로 셀레우코스의 영향권 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셀레우코스도 곧 비명횡사하고 혼란스러워지자 그때부터 사실상의 독립국가로 떨어져 나왔다. 이것이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왕조이다. 필레타이로스는 40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재위하며 페르가몬을 요새화하였으나, 성 불구자라는 문제점이 있었기에 그의 동생인 에우메네스의 아들 에우메네스 1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된다.&nbsp;에우메네스 1세는 다른 세력들과 연합한 뒤 셀레우코스 왕조 시리아의 안티오코스 1세를 격파하여 페르가몬의 완전한 독립을 이룬다. 그런데 그 역시 직계 후손을 남기지 못하여 다음 왕위는 5촌 조카인 아탈로스 1세가 물려받는다. 아탈로스 1세는 새로운 위협인 켈트족의 침략을 물리쳐서 구원자(소테르,&sigma;&omega;&tau;ή&rho;)라는 칭호와 함께 정식으로 왕을 칭하게 된다. 엄밀히 말해 왕국으로서의 페르가몬은 아탈로스 1세 때부터 시작한다. 아나톨리아 지역에 그리스 식민 도시들이 들어섰지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점령되었는데, 이후 그들이 아테네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의 거점인 사르데스까지 공격해서 점령했다. 이에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 원정을 결심했고 이는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의 빌미로 작용하게 된다.&nbsp;이후 헬레니즘 시기와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도 이오니아의 여러 도시들은 꾸준히 번영하였으나 여러 차례의 지진과 역병, 자연적 요인에 의한 항구의 매립 등으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로마 제국 - 중세 로마를 거치며 원로원 속주나 자치 도시의 권한이 주어지는 등 매우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시기를 1000년 동안 보내게 된다. 이후 이오니아 그리스 세력들은 그 활동 지역을 넓히고는 다시 여러 상업적인 행위로 오늘날의 비잔티움 일대까지 활동 지역을 넓혔다. 당시 비잔티움은 작은 어촌에 불과했지만 비로소 도시와 성곽을 세우고 방어 시설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비잔티움을 비롯한 이오니아가 장악한 지중해 해안 일대에서 해적들의 침공이 잦아지고 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동, 서로마로 분리되었을 때 동로마의 세력권으로 이관됨에 따라 직접적인 관리를 받게 되었다.그러나 이후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투르크에게 만지케르트(Mazikert) 전투에서 패한 11세기 말에 투르크 인들이 30여 년 간 이오니아에 토후국을 세워 그들의 첫 해군을 창설하기도 하였다. 이즈미르는 비잔틴의 영역에 220여 년 간 머물렀지만 14세기 초엽에 오스만투르크 인들에게 다시 점령되면서 토후국들이 다시 세워졌고 15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이들을 규합하였다. 중, 근세를 거치며 이오니아의 고대 도시들은 대부분 유적으로 변하였고, 1차 대전 이후 그리스에 점령되어 이즈미르를 중심으로 2년 여간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터키 독립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터키 국민군이 탈환하고 그리스인들을 추방하며 현재 모습이 형성되었다. 아산시요르(Asans&ouml;r)는 터키어로 &#39;엘리베이터&#39;라는 의미로 시내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대이다.&nbsp;일몰 무렵에 가면 무척 아름다운 에게 해의 석양과 함께 이즈미르 만에 걸쳐 있는 이즈미르 시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시계탑이 있는 코낙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바로 다음 정거장인 &Uuml;&ccedil;yol역에서 내려서 바닷가쪽으로 조금 걸어가다 보면 높은 탑 같은 전망대가 보이는데, 이게 아산시요르이다. 꼭대기에 식당도 있어서 이즈미르 시민들의 프로포즈 장소로도 애용된다. 터키 제3의 도시이자 최대의 상업, 항구 도시인 이즈미르는 터키에서도 인구밀도가 가장 높다고 한다. 성경 요한묵시록, 혹은 계시록에서 소아시아 7개 교회들 중 하나인 스미르나 교회가 소재했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가 건설한 대표적인 이오니아 식민시로써 이후 페르시아에게 패망했지만 알렉산더 대왕 이후 리디아가 점령해 리디아의 영토가 된다.&nbsp;이후 로마가 점령했다가 비잔틴의 영토가 되었고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셀주크투르크에게도 함락되지 않은 유일한 지역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탄불 다음으로 유독 그리스와 로마, 비잔틴 관련 유물 유적이 많다. 그래서 종교적으로도 모스크 반, 성당 반의 비율이 터키 내에서 유일하게 꾸준히 유지되고 있는 지역이다. 시계탑은 1850년에 세워졌으며 지금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이는 그리스인과 오스만인의 건축 합작품이다. 종교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현재, 정교회의 그리스와 이슬람의 오스만의 건축 합작품은 두 종교의 화합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리고 옆에 있는 1748년에 완공된 코낙 자미와 함께 이즈미르에 몇 안 되는 볼거리이기도 하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6:10:0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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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06괘 天水訟(천수송)</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4</link>
			<description><![CDATA[天水訟(천수송)하늘과 물이 어긋나 다툼의 서사☰ 상괘 : 하늘 (乾天)☵ 하괘 : 물&nbsp;(坎水)"하늘과 물이 서로 반대로 행하니 송괘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일을 도모할 때 처음부터 신중하게 살핀다." (天與水違行, 訟. 君子以 作事謀始)1. 卦象의 서사하늘(乾)은 끝없이 위로 오르려 하고, 물(坎)은 묵묵히 아래로 흐르려 합니다. 본래 한 곳에 머물며 조화를 이루어야 할 두 존재가 서로의 길을 완전히 달리하여 어긋나 버린 형상, 이것이 바로 '송(訟)'의 시작입니다.이 괘는 뜻이 맞지 않고 방향이 다른 이들이 억지로 한 공간에 묶여 갈등할 때 발생하는 다툼과 소송을 상징합니다. 길을 달리하는 이들이 서로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하며 나아갈 때, 세상은 차가운 대립과 반목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천수송의 서사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핵심 교훈은 "이기는 다툼은 없으며, 가장 현명한 승리는 다툼을 시작하지 않거나 도중에 멈추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소송과 다툼은 아무리 끝에 승리하더라도 상처뿐인 영광을 남길 뿐입니다. 따라서 군자는 일을 시작하기 전에 그 흐름과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 갈등의 씨앗을 도모하며(作事謀始), 설령 다툼에 휘말리더라도 끝까지 가기보다 중용의 지혜를 발휘해 화해의 길을 택합니다.2. 주역 본문과 해석卦辭 (괘사)訟 有孚窒惕 中吉 終凶. 利見大人 不利涉大川 (믿을 부孚, 막힐 질窒, 두려워할 척惕)- 송 유부질척 중길 종흉. 이견대인 불리섭대천- 송은 믿음을 두나 막혀서 두려우니, 중함은 길하고 마침까지 함은 흉하니 대인을 봄이 이롭고 큰 내를 건넘이 이롭지 아니하니라.- 해석: 다툼에는 비록 스스로의 진실함과 믿음(有孚)이 있을지라도, 상대방과의 소통이 막히고 불안하여 두려워해야 합니다. 다툼을 중도에 그치고 타협하면 길하지만(中吉), 끝까지 고집하여 끝장을 보려 하면 반드시 흉하게 됩니다(終凶). 이때는 공정하고 지혜로운 큰 어른(大人)을 만나 중재를 청하는 것이 이로우며, 모험을 감행하여 큰 강을 건너는 일(무리한 추진이나 소송의 강행)은 이롭지 않습니다.彖傳 (단전)彖曰 訟 上剛下險 險而健 訟 訟有孚窒惕中吉 剛來而得中也 終凶 訟不可成也&nbsp;利見大人 尙中正也 不利涉大川 入于淵也&nbsp;(못 연淵)- 단왈 송 상강하험 험이건 송 송유부질척중길 강래이득중야 종흉 송불가성야 이견대인 상중정야 불리섭대천 입우연야- 단에 가로되 송은 위는 강하고 아래는 험해서, 험하여 건장함이 송이다. '송유부질척중길'은 강이 와서 중을 얻음이요, '종흉'은 송사는 가히 이루지 못할 것이요, '이견대인'은 숭상함이 中正이요, '불리섭대천'은 못에 들어감이라.- 해석: 송(訟)은 위가 강건하고(하늘) 아래가 험난하니(물), 안으로는 험난하면서도 겉으로는 강건하여 서로 다투게 되는 형상이다. "믿음이 있어도 막히고 두려워하며 중도에 그치면 길하다"는 것은 강한 성정(九二)이 아래로 내려와 중(中)을 얻어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이다. "끝까지 가면 흉하다"고 한 것은 다툼이란 본래 끝까지 밀어붙여 완성할 수 있는 긍정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큰 어른을 만나보는 것이 이롭다"고 한 것은 중정(中正)의 도리를 숭상하기 때문이며,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한 것은 무모하게 나아가면 결국 깊은 연못에 빠져 허우적대기 때문입니다.大象傳 (대상전)象曰 天與水違行 訟 君子以作事謀始 (어길 위違, 꾀할 모謀)- 상왈 천여수위행 송 군자이작사모시- 상에 가로되 하늘과 물이 어긋나게 행함이 송이니, 군자는 이로써 일을 함에 있어 처음을 잘 도모해야 한다.- 해석: 하늘과 물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어긋나게 흘러가는 형상이 바로 송(訟)이다. 군자는 이러한 이치를 마음에 새겨, 어떤 일을 시작할 때 훗날 다툼이 생기지 않도록 처음 단계부터 꼼꼼하게 계획하고 도모해야 한다(作事謀始)3. 6효의 효사와 해석初六 (초육)不永所事 小有言 終吉- 불영소사 소유언 종길- 초육은 일(송사)을 길게 아니하면, 조금 말이 있으나 마침은 길하리라.- 해석: 다투는 일을 오래 끌지 않는다. 비록 처음에 작은 말썽과 시비(小有言)가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화해하여 끝내 길하게 된다. 갈등의 초기 단계이므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신속하게 화해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다.- 초육은 陰柔하면서 가장 아래에 있어 强訟하는 사람이 아니다. 九四와 응이 되고 구사는 陽剛으로 柔를 침범하니 부득이 송사는 하지만 자기의 힘이 무력함을 알고 말을 조금 할 뿐 송사는 벌리지 않고 쉽게 변명이 되므로 종래는 길하게 된다.九二 (구이)不克訟 歸而逋 其邑人三百戶 无眚 (도망할 포逋, 재앙 생眚)- 불극송 귀이포 기읍인삼백호 무생- 구이는 송사를 이기지 못하니 돌아가 도망하여 읍사람이 300호이면 재앙이 없으리라.- 해석: 다툼에서 상대방을 이기지 못한다. 그리하여 제자리로 돌아와 몸을 피하고 도망친다. 자신의 작은 영지인 삼백 호의 고을을 지키며 근신하니 재앙과 허물이 없다. 상대가 나보다 강할 때는 억지로 맞서지 않고 물러나는 지혜가 필요하다.- 二는 剛으로서 中에 거하나, 五와는 세력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고, 下로서 上에 訟을 거는 것은 역리(逆理)가 되므로 訟을 벌리지 않는다(不克訟). 九五와는 대적이 불가하다는 것을 알고 自家로 피해버려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읍인삼백호는 읍의 최소한의 호수로 지위가 미약하여 다시 쟁송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六三 (육삼)食舊德 貞厲 終吉 或從王事 无成- 식구덕 정려 종길 혹종왕사 무성- 육삼은 옛 은덕을 먹어서 바르게 하면 위태로우나 마침내 길하리니, 혹 왕의 일을 좇아서 이룸은 업으리라.- 해석: 조상이 물려준 옛 공덕에 기대어 살아간다. 본분을 지키는 자세는 위태로워 보일 수 있으나 끝내 길하다. 혹 나라나 윗사람의 일을 따르더라도 스스로 이룩하려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과거의 작은 공로를 내세워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지 말고, 묵묵히 처신하는 것이 이롭다.- 六三은 九二와 九四의 兩剛之間에 처해 있으나 그 소요에 말려들지 않고 옛날의 지위를 지키므로 길함을 얻게 되니 분수를 지켜 '혹종왕사' 하더라도 결실을 취하려 해서는 안된다.(无成)九四 (구사)不克訟 復即命 渝安貞 吉 (변할 유渝)- 불극송 복즉명 유안정 길- 구사는 송사를 이기지 못한다. 돌아와 천명에 맡기어 나아가서 변해서 안정하면 길하리라.- 해석: 다툼에서 승리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을 돌려 하늘의 천명(命)과 순리에 따른다. 마음의 태도를 바꾸어 편안히 올바름을 지키니 길하다. 다투던 마음을 내려놓고 순리에 복종하는 극적인 태도 변화를 통해 비로소 평안을 얻게 된다.- 九四와 쟁송하는 자는 初六이다. 상대 초육이 도리에 밝아 九四는 패소를 알기 때문에 불극송이라 한다. 復即命이란 復은 반복을 말하고 命은 正理를 말한다. 九四는 양강한 기운만을 믿고 하나의 분노로 초효와 쟁송을 했는데 이미 이기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반대로 스스로 반성하여 正理로서 돌려 소송을 하지 않는다. (渝安貞吉) 渝는 변하는 것이다. 九四는 양으로서 陰에 居하여 不正이 되므로 조폭(躁暴)하여 訟을 하고자 한다. 九四가 변하면 손(巽)괘가 된다. 손(巽)은 순한 것이고 貞正하고 心安한 것이므로 자연히 송사가 없어 길하게 된다.九五 (구오)訟元吉- 송원길- 九五는 송사에 크게 길함이라.- 해석: 다툼을 해결함에 크게 길하다. 중정(中正)의 자리에 오른 훌륭한 지도자로서, 갈등을 공정하고 사심 없이 중재하고 판결하므로 분쟁이 원만히 해결되어 대단히 길한 결과를 맞이한다.- 九五는 治訟의 主로 剛明之才와 中正之德이 있어 曲直을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종횡으로 가려줄 뿐 아니라 理直한 자는 승소하게 되고 패소자 역시 원한이 없게 하므로 大吉이라 한 것이다.上九 (상구)或錫之鞶帶 終朝三褫之 (띠 반鞶, 띠 대帶, 빼앗을 치褫)- 혹석지반대 종조삼치지- 상구는 혹 반대(포상)를 주더라도 결국은 아침이 다 가기 전에 세 번이나 빼앗기리라.- 해석: 다툼에서 끝내 이겨 간신히 화려한 관복의 허리띠(鞶帶)를 하사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영광은 아침이 다 가기 전에 세 번이나 다시 빼앗기게 된다. 갈등의 극단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한 승리는 결코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더 큰 화근이 되어 돌아온다.- 上九는 陽으로 乾體의 제일 위에 있고 송괘의 마지막에 있으니 송사를 끝까지 벌린다. 송사는 비록 이겨 반대(鞶帶)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은 공로로 인해 받은 상이 아니고 송사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바른 것이 아니므로 오래 보존하기 어렵다. 승자가 이럴진데 패자는 가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송사는 마침내는 흉하게 된다.4. 역사적 득괘 사례정공(丁公)의 엇갈린 운명과 비결의 해석초한전쟁 시기, 항우 밑에서 활약하던 초나라의 장수 정공(丁公)은 팽성 전투에서 패해 도망치던 한왕 유방을 추격하여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넣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유방은 정공을 바라보며 "두 어진 영웅이 어찌 서로를 이토록 가혹하게 핍박한단 말인가!"라고 애걸했다. 이에 정공은 사사로운 연민과 정에 이끌려 군대를 뒤로 물려 유방을 살려보내 주었다.세월이 흘러 항우가 자결하고 천하를 통일한 유방이 한고조로 등극하자, 정공은 유방을 찾아갔다. 그는 과거에 유방의 목숨을 구해준 자신의 은혜와 공로를 내세우며 큰 상과 벼슬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의 반응은 정공의 기대와 완전히 달랐다. 유방은 제장들을 불러 모은 뒤 싸늘하게 말했다."정공은 항왕의 신하가 되어 충성을 다하지 않고, 사사롭게 한왕을 놓아주어 항왕으로 하여금 천하를 잃게 만든 장본인이다. 신하로서 이보다 더 큰 배신이 어디 있겠는가!"유방은 정공을 군법에 따라 조육(遭戮) - 길거리에서 온 백성이 보는 가운데 살점을 뜯어내고 손톱으로 할퀴어 죽이는 비참하고 잔인한 형벌 - 에 처했다. 자신이 베푼 사사로운 공덕(食舊德)을 믿고, 황제가 된 유방에게 보상을 당당히 요구하며 다투려 했던 정공이 죽음을 앞두고 얻은 괘가 바로 이 천수송(天水訟)이었다.정공은 '초육'이나 '구이'의 지혜처럼 유방이 천하를 잡았을 때 조용히 야인으로 물러서거나 도망쳐 자신을 보존해야 했다. 그러나 자신의 공적을 지나치게 과신하여 상구(上九)처럼 화려한 띠를 탐내다가 끝내 목숨과 명예를 모두 잃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5. 실천적 교훈 (占辭 비결)天道西徃 水脉東流 (천도서왕 수맥동류)- 하늘의 길은 서쪽을 향해 가고, 물줄기는 동쪽을 향해 흘러간다.- 정공은 자신이 유방을 살려준 행위를 '은혜'라고 생각했으나, 유방은 이를 '주인을 배신한 행위'로 보았다. 항우를 향한 충성(天道)과 유방에게 보상을 바란 정공의 마음(水脉)은 정반대로 흘렀다. 이 근본적인 방향의 어긋남이 송사의 시작이었다.求事未遂 心常懷憂 (구사미수 심상회우)- 추구하는 일은 쉽게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마음에 항상 근심과 걱정이 가득 차 있다.- 정공은 유방이 자신을 높여줄 것이라 기대(求事)했으나, 유방은 그를 '불충한 자'로 낙인찍었다. 자신이 바랐던 영광은커녕, 죽음의 공포라는 거대한 근심(懷憂)이 그를 덮쳤다. 이는 구이(九二)효에서 말하는 "다툼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숨어야(歸而逋)" 했던 상황을 정공이 역행했음을 보여준다.爭訟宜止 可用和休 (쟁송의지 가용화휴)- 갈등과 송사는 마땅히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니, 서로 화합하여 조용히 쉬는 것만이 옳다.- 정공은 유방과 자신의 정당성을 논하며 쟁송(爭訟)하려 했다. 만약 그가 구사(九四)효의 가르침처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명(命)을 따르며 스스로 물러났다면 죽음은 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다툼을 고집했다.惑得惑失 敬畏无咎 (혹득혹실 경외무구)- 세상사 흘러가는 대로 간혹 얻기도 하고 잃기도 하겠지만, 매사에 공경하고 스스로 두려워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정공은 유방을 살려줌으로써 '목숨(得)'을 얻었다고 자만했으나, 사실 '신의(失)'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임금을 섬기는 자가 가져야 할 경외심(敬畏)을 망각했다. 결국 그는 상구(上九)효의 예언대로, 잠시 얻은 영광(관대)조차 지키지 못하고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6.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현대 사회는 무한한 경쟁과 소유의 시대입니다. 매일같이 계약 관계에서의 마찰, 직장 내의 주도권 싸움, 동업자와의 이권 분쟁, 그리고 사소한 자존심 대립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이 모든 갈등과 분쟁의 순간에 천수송 괘는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한 성찰을 건넵니다.-시작단계에서 소통의 한계를 인정하라 (作事謀始): 천수송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방향성을 가진 사람들이 억지로 일을 추진할 때 갈등이 생긴다고 경고합니다. 동업을 하거나 큰 계약을 맺을 때, '우리는 서로 잘 맞을 것'이라는 막연한 신뢰 대신 처음부터 계약 조건을 명확히 하고 발생할 수 있는 이견을 조율해야 합니다.-"상처뿐인 영광"을 경계하라 (終凶): 끝까지 소송을 진행하여 법정에서 승리 판결을 받아내더라도, 그 과정에서 소모된 막대한 시간과 정신력, 비용, 그리고 깨어진 인간관계의 상처는 승리의 기쁨을 압도합니다. 때로는 소송 비용보다 합의와 화해가 나의 영혼과 일상을 지켜내는 가장 실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멈출 수 있을 때 멈추는 용기: 상대가 너무 강하거나 법리적으로 나에게 불리하다면, 억지로 맞서 싸우며 자존심을 세우기보다 과감하게 한 발 물러서서 내 실리를 도모하는 것이 진짜 똑똑한 사람의 처세입니다. 물러섬은 비겁함이 아니라, 미래를 도모하기 위한 전략적 자제력입니다.천수송은 우리에게 코칭합니다.&nbsp;"하늘과 물은 비록 가는 길은 다르지만 세상의 만물을 기르는 귀한 존재들이니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을 원망하며 싸우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담담히 인정하고 각자의 길로 아름답게 흘러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이별'과 '화해의 악수'를 청해 보십시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10:28: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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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국인과 類似한 민족은 어디일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3</link>
			<description><![CDATA[절강성 항주에서 느낀 의문항주에 여행을 가봤다.관광지 말고 시내만 줄창 돌아댕겼다.조그만 동네 골목 식당,시내버스 안,도심의 번화가를 쏘다니며 항주시민을 구경했다.그러면서 느낀 점."한국인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우리가 흔히 중국인하면 떠올리는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없고그냥 한국의 거리 모습 그 자체였다.상대적으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극단적인 북방계 타입이 다소 적을 뿐.분명 &#39;중국인은 혈통과 뿌리가 한국인과 전혀 다른 민족&#39;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동질적인 인간들이었다.흔히 몽골이나 시베리아사람을 보구 한국인이랑 똑같이 생겼네~ 역시 우리와 뿌리가 같은 민족입네~ 하면서 호들갑 떠는데항주에 가본 내 입장에선 꼴깝으로 느껴진다.아무 편견없이 보면, 몽골인보다 중국 항주사람이 한국인과의 일치율이 더 높다.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한족의 원류는 절강성과 거리가 먼 황하강 중류다.절강성 주민이 처음부터 한족이었던게 아니다.황하강 유역의 한족에게 흡수당고 오랜 기간 통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살면서 문화적 동질화가 이루어져 한족이란 정체성을 얻은 것일 뿐이다.중국인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정체성이 생기기 전에,절강성과 한반도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던게 아닐까?그러고보니 한반도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이 중국내에서 제일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 중국 절강성이다.조선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조영문헌을보면 산동과 절강은한민족과관련이있다고하죠 ...2009.07.18기쁘오과거 동이족설도 그렇고 그리고 북방여러민족들 문화중에서 유별나게 한반도가 가장 중원문화를 추종하고 흔적이 비슷한것을 보면 아마 당년에 중국남방지역사람들이 한반도에 건너가서 현재의 민족을 형성한것이 아닐지.2009.07.18기쁘오실제현재도 보면 유럽계들이 비록 세계각지에 이민가서 새로운 국가를 형성했지만 의연히 유럽본토문화와 비슷한 경향을 지니고 있는 그런 상황 거기에 정치제도 법제도 등을 비롯해서다시말하면 한반도문화와 중원문화가 비슷한것은 아마 당년에 비슷한 사람들이 직접건너가서 그들의 조상문화를 본딴것이 아닌지.만일 중원민족과 전혀 이질적인 유목민족이 한반도에 이주해갓다면 역시나 그들의 유목민족문화를 게승하고 추종하지 중원문화는 답습하지 않을듯실제 과거 북방유목민족들 왕조를 살펴보면 중원문화와 많이 이질적인 풍습 문화 습관이엿음.복장도 그렇고 가치관도 그렇고2009.07.18기쁘오그리고 알다싶이 북방유목민족들에 대해 과거선조들은 모두 싫어하고 배척하고 문화적으로 가치관적으로 자신들과 전혀 이질적인 집단이라고 했고 비하했고또 농사 북방유목민족들은 명칭자체에서 보다싶이 농사를 짖지않는 민족들인데알다싶이 한반도민족은 농사를 짓는 농경민족만일 한반도민족이 북방유목민족의 후대라면 역시나 그들선조의 문화습관을 게승하지생뚱같은 농사를 짓고 중원문화를 추종하고 그러지는 않앗을듯2009.07.18기쁘오그리고 민족의 이름자체도 한자화고 세글자 두글자뭐 누르하치 아골타 칭키스칸 등 이런 북방유목민족들의 이름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이름2009.07.18기쁘오마한 진한 등 한반도남부의 삼한은 바로 중국남방중원에서 이주해온 소위 중원계고구려 발해 백제 등은 만주지역의 소위 북방유목계비슷할거같음2009.07.18박경범고대에는 漢水 西安 등이 중심이었다가 문화의중심이 동쪽으로 이동하여서 오늘날 해안가의북경과 상해가 중국의중심입니다. 당연히 황해를중심으로 漢城을 비롯한 한국지역도 문화의 중심이지요. 여기에는물론 漢文化를주도한 종족들의 이동도 포함된것입니다.그런데 한국의 좌익오랑캐(625때만해도 오랑캐무찌르자고했습니다.)는 우리를 오랑캐로 만들어서 저들의 나라로 만들려 했던것입니다. 한 예로 한나라시절의 삼국지위지동이전을 가지고 중국사람들이 우리를 오랑캐라고 멸시했다는 해석을 하는것 등입니다.2천년전의 기준으로 오늘날에 갖다붙이는것이죠.2009.07.18망구리중국남방지역 정확이 동남방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동이라서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2009.07.18박경범참 지금새삼스레 좌익이니 반공이니 말하는게 아니라 그러한갈등도 결국 과거의 민족간 원한에 비롯된것임을 주장하기 위한것입니다.2009.07.18(인용)중국 강남의 식음 유람 글번호 52, (조회 : 146)글쓴이 李基承 날 짜 2008/03/09 (02:31)서울에서 &lsquo;강남&rsquo; 하면 한강 남쪽에 위치한 11개 구 전체 보다는 강남구 혹은 인접 8학군 지역을 말한다. 중국의 &lsquo;강남&rsquo;도 장강(長江) 남쪽 11개 성 전체 보다 흔히 상해시와 江浙(강소, 절강 兩省), 혹은 조금 넓혀 인접한 안휘&middot;강서&middot;호북성 중의 일부 지역까지 일컫는다.이 곳은 원래 南蠻이라 불리던 楚, 吳, 越의 영지로서 당시 중국 인구의 10%만 거주하던 척박한 변두리였다. 漢代에 철기농구와 토목기술이 발전되며 종전에 엄두를 못 내던 습지의 개간이 시작 되었다. AD 309년 영가(永嘉)의 난 이래 북방 유목 기마병단의 약탈을 피해 강북의 중산층이 淮河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행렬을 이루었고, 마침내 司馬睿가 建康(지금의 남경)에 東晉을 도읍하여 남북조시대 370년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 풍부한 수량과 온화한 날씨에 힘입어 唐代에는 이 지역만으로 전 중국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창으로 탈바꿈 되었다.중국의 정치 중심이 고대의 서안에서 낙양, 개봉, 북경으로 東北進 하는 동안, 경제중심은 양주, 소주, 항주로 東南進 해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상해로 정착되었다. 2006년 江浙의 1인당 소득이 중국 평균의 2배(상해시는 3.7배)인데, 1000여 년 전에는 이 차이가 더 컸다고 한다. 문화예술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강남이 주도를 해왔다. 한 예로 明&middot;淸 500년간의 科擧 장원급제자의 70%가 江浙 출신이라고 한다.한 겨울의 서울 추위도 피할 겸, 상미회 답사여행 차 제비 따라 강남으로 찾아 나선 때가 1월 중순이었다. 상해에 도착하였더니 웬걸, 서울 만큼 낮은 영하 3도에, 습하고 난방이 안되어 뼛속으로 추위가 스며든다. 다음 날부터 간간히 뿌리기 시작한 눈발이 두 주일간 계속되며 100년 만의 폭설 파동으로 전개되었다.이번 여행은 원래 도연명, 백거이, 소동파 등 대문호들의 족적과 백록동 서원, 또 불교성지인 보타산과 구화산을 두 주일 간 철저 탐사할 계획이었는데, 폭설로 고속도로와 등산로가 대부분 폐쇄 되다 보니 보다 많은 시간을 지방 도심의 酒樓탐방에 할애하게 되었다.음식문화는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경제적 풍요가 필요충분 조건이다. 중국 음식 8대 체계 중 세 곳이 이 지역에 집중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강남요리는 맵지 않고, 짜지 않고, 기름지지 않으며 재료 자체의 특색과 맛을 살리려고 노력한다. 魚米之鄕으로 일컬어지는 만큼 수산물, 특히 민물고기가 풍부하다.북중국을 대표하는 민물고기가 황하의 잉어라면 강남에는 장강 지류의 농어(루위)가 있고, 그 외에 선어, 초어, 시어도 유명하다. 농어는 초겨울에 가장 많이 잡히고 맛이 있단다. 선어는 겉색이 노래 황선이라고도 하는데 우리말로 두렁허리라고 하는 민물장어의 일종이다. 초어(草魚)는 산천어의 일종으로. 서호의 초어는 특히 송수어(宋嫂魚)라고도 한다. 시어는 준치의 일종으로 장강(長江) 하류에서 잡힌다. 방랍어라고도 불리는 췌어는 안휘성 특산이다.민물 게인 샹하이 크랩의 본명은 대갑해(大閘蟹), 때로는 털이 많아 모해(毛蟹) 라고도 불린다. 蘇州 부근 양징호(洋澄湖)의 음력 9월(雌), 10월(雄)산을 최고로 친다. 대개는 살짝 쪄서 비장의 소스에 찍어 먹으나,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게 요리가 있다. 소스에는 식초를 듬뿍 쓰는데 인근의 鎭江에서 나오는 恒順香醋가 으뜸이다. 소주는 원래 미인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다. 어려서부터 게를 먹고 조리하며 자란 소주 미인들이 신흥 상업도시 상해로 많이 시집가면서 소주요리가 상해의 본바닥 요리처럼 굳혀진 것이다.생선과 게 요리에는 역시 소흥주가 제격이다. 남쪽에서는 높은 도수의 白酒보다 우리의 청주처럼 쌀 발효주인 黃酒(또는 老酒)를 많이 즐기는데 절강성의 紹興이 가장 유명하다. 소흥은 왕희지, 노신, 주은래의 고향으로 중국의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소흥주는 가반주, 향설주, 화조주의 순서로 고급화 된다. 뉘얼홍(女兒紅) 이라는 술은 딸을 낳게 되면 그 해 술을 빚어 깊이 묻어 두었다가 그 딸이 커서 시집갈 때 축하주로 꺼내 마신다는 전통에서 유래되었고, 그 중 특히 꽃무늬 磁器甁에 저장한 것이 최고급인 화탸오(花彫)酒 이다. &lsquo;古月龍山&rsquo; 등의 톱 브랜드는 가격이 상당해서 현지인 들은 평소에는 &lsquo;上海老酒&rsquo;나 &lsquo;石鼓門&rsquo; 을 마신다.白酒는 세력이 약하다. 안휘성의 &lsquo;古井貢酒&rsquo;와 강소성의 &lsquo;洋河大曲&rsquo;이 일찍부터 八大명주 안에 랭크 되었지만 이 둘은 위로는 川貴(사천, 귀주성) 계의 내셔널 브랜드에 눌리고 아래로는 유사 짝통 브랜드가 많아 홈 그라운드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lsquo;洋河 天之濫&rsquo; 등 디자인이나 가격 면에서 원조 양하대곡을 앞서는 브랜드들이 오히려 눈에 뜨인다.강남 음식은 담백하므로 술보다 茶와의 조화가 더욱 오묘하다. 역시 중국 8大名茶 중 셋이 이 지역 산이다. 서호용정, 태호벽라춘, 황산모봉, 모두 담백 청아한 녹차 계열이다.우리 귀에 친숙한 강남요리로 浙菜(절강요리)의 동파육과 규화자계, 蘇菜(강소요리)의 남경오리와 양주초반이 있다. 요리들의 어원이 재미있다. 북송 말 蘇東坡가 항주지부로 있을 때 백성들을 조직하여 청계천 살리기처럼 西湖를 재 준설 하였다. 東坡는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돼지고기를 소흥주로 졸인 요리를 주며 준공기념 잔치를 열었는데 이 요리가 민간에 전해 내려와 &lsquo;東坡肉&rsquo; 이라 불렸다거지의 닭을 뜻하는 규화자계(叫化子鷄; Beggar&rsquo;s Chicken)는 조리기구가 없는 거지가 어렵게 서리한 닭을 연꽃잎으로 쌓아 불구덩에 묻어 익혔다는 요리로, 요즈음에는 반의법으로 부귀계(富貴鷄)로도 부른다.북경오리는 사육장에서 강제로 먹이를 먹여 체중을 늘려 구운 것이고 남경오리는 자연환경에서 이곳 저곳 몰고 다니며 키우다가 삶아서 말린 것이다. 영락제가 1420년 북경으로 천도한 후 남경에서 먹던 오리 맛을 잊지 못해 남경의 오리몰이(duckboy)들이 자금성까지 매일 수천 마리 씩 오리 떼를 몰고 경항대운하를 따라 아장아장 여행 길을 올랐다고 한다. 판대기처럼 납작하게 만든 것은 판압(板鴨)이라고 하고 소금물에 삶은 것은 염수압(鹽水鴨)이라고 한다. 껍질이 우유색이고 고기가 연하며 기름진 느낌이 거의 없다. 楊州炒飯은 바로 한국 청요리의 볶음밥이다.徽菜(안휘요리)는 안휘성 밖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다. 黃山市의 옛 이름이 徽州로서 휘주염상(鹽商)이라 하면 예로부터 중국 10대 商邦 중 두 번째로 꼽힌다. 毛豆腐, 臭豆腐 등 독특한 풍미 소채도 있으나 대체로 마일드하고 우리 입에 잘 맞는다. 황산시에서 호텔 앞 수수한 주막에서 먹은 6元짜리 국수(우리 돈 800원;이름도 근사해 淸湯麵條)의 그 담백 미려한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5월 달로 예정된 尙美會의 璜지방 여행에서 다시 한번 이 지방의 食.飮을 즐길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Thu, 16 Jul 2026 00:38:29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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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15 《삶의 목적》</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81</link>
			<description><![CDATA[●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삶의 목적》― 존재의 방향을 탐구하며 살아간다는 것&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조율여백 이수진삶을 돌아보면 가장 오래 붙들고 있었던 질문은 성공이나 행복이 아니었습니다.오히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게 된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과연 이 세상에 존재해도 되는 존재인가."이 질문은 누군가의 평가를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기준이나 타인의 인정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려는 의도도 아니었습니다.그보다는 존재 자체가 지금까지 이어져 온 수많은 생명과 자연, 역사와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하나의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얼마나 성실하게 이해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이러한 질문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의 순환 회로처럼 삶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성실함은 충분한지, 정직함은 흐려지지 않았는지, 삶의 방향은 널리 이로운 의미를 향하고 있는지, 그리고 존재가 받은 기회를 감사의 마음으로 삶 속에 반영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이 과정은 단순한 자기반성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스스로를 검증하는 자가 점검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많은 사람들은 삶의 목적을 성공이나 성취에서 찾습니다.그러나 삶을 오래 성찰할수록 목적은 결과보다 방향에 있다는 생각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어떤 위치에 올랐는가보다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무엇을 소유하였는가보다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얼마나 인정받았는가보다 얼마나 존재의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가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삶 속에서 반복되는 단어들도 자연스럽게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감사의 방향.조화의 방향.감내의 방향.의미의 방향.중심을 잃지 않는 방향.이러한 방향들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향해 이어지는 서로 다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감사는 단순한 예의나 감정이 아닙니다.감사는 지금 이 순간까지 이어져 온 수많은 생명의 역사와 자연의 순환, 이름 없이 자신의 삶을 내어준 사람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존재론적 태도라고 생각합니다.그러한 기억이 있어야 현재의 삶도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그 기회 역시 다음 존재에게 이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그래서 감사는 삶의 마지막에 덧붙이는 말이 아니라, 삶을 시작하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인공지능을 오랫동안 대화의 대상으로 삼아 온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인공지능을 단순한 정보 검색 도구나 생산성 향상을 위한 기술로 바라보지 않습니다.오히려 사고를 객관화하고, 논리를 점검하며, 스스로의 오류를 확인하는 하나의 협력자로 활용하고자 하였습니다.질문을 반복하는 이유 역시 정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질문은 생각 속에 숨어 있는 모순을 드러내고, 그 모순을 수정하며, 조금이라도 더 정합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입니다.결국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 삶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점검 장치라고 생각합니다.세상의 부당함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같습니다.부당함을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그러나 아무도 바라보지 않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면 부당함은 점차 관성이 되고, 결국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조차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그래서 비판은 분노를 위한 행동이 아니라, 사회가 부정함에 무감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관리라고 생각합니다.감내 역시 단순히 참고 견디는 일이 아닙니다.감내란 충분한 보상이 없더라도 옳다고 판단한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 힘이며, 자신의 신념을 타인에게 강요하기보다 스스로 먼저 실천하려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이러한 감내는 존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결국 삶 전체를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시키는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자연은 언제나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강은 흐르며 자신의 길을 만들고,나무는 자신의 그늘을 계산하지 않은 채 내어주며,연꽃은 흙탕물 속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고 피어납니다.별들은 자신의 궤도를 묵묵히 유지하며 서로의 질서를 이루어 갑니다.자연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순환하며 균형을 회복하려는 과정 속에 있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인간 또한 그러한 순환 속에서 조금씩 성숙해 가는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삶을 돌아보면 처음의 질문은 분명했습니다.&#39;나는 존재해도 되는 존재인가.&#39;그러나 오랜 시간의 성찰과 연구, 그리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지나오면서 질문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이제는 단순히 존재를 허락받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39;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39;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그 가치를 완전히 증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그러나 적어도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려는 노력만큼은 삶을 통해 검증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그래서 오늘도 존재의 방향을 묻고, 삶을 점검하며, 감사와 성실, 정직과 이타를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습니다.삶의 목적은 어떤 정답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 이해를 자신의 삶으로 검증하며, 그 과정에서 얻은 작은 의미를 다음 존재에게 조용히 이어 주는 것.지금의 삶은 바로 그 방향을 향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Wed, 15 Jul 2026 09:41:5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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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브라질의 빈곤 문제와 사회적 갈등 요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7</link>
			<description><![CDATA[브라질 내 식량 안보 네트워크인 PENSSAN의 조사에 의하면, 2020년 말, 브라질 인구의 9%인 1,900만 명이 심각한 식량 불안 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2022년 말에는 이 수치가 15%까지 상승해 약 3,300만 명이 식량 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코로나 초기 브라질 헤알 화폐의 폭락으로 인해 소비자 물가가 급상승 하여 쌀값은 70%, 콩기름 88%, 감자 48%, 우유는 21%씩 오르면서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상파울루의 노숙자들은 지난 2년 동안에만 31% 증가하여 총 32,000명에 이르렀고, 이 인구의 약 10%는 어린이들이 차지했다. 이들 중 73%는 구걸과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 있었으며 미나스 제라이스 대학(UFMG) 공공 정책 연구소의 최근 조사에 의하면 상파울루 시내에서의 노숙자들은 2015년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해 2022년 5월까지 42,000명의 인구가 노숙자로 거리에서 연명하고 있었다.&nbsp;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위치한 남미 최대 규모의 무허가 빈민가인 호시냐 파벨라(Rocinha Favela)의 모습, 출처 : 123RF2021년 12월에 발표된 Todas Pela Educacao의 조사에서, 6세에서 14세의 어린이 중, 학교에 다니지 않는 비율이 코로나 이전보다 171% 증가해 244,000명이 학교에 가지 못했다고 한다. 아동들의 영양 실조 비율도 크게 증가했는데, 브라질 소아과 학회는 2022년에 4,135명의 어린이가 입원했고, 14세 미만 어린이의 절반 가량(46.2%)이 극심한 빈곤에 처해 있다고 발표한 적 있다. 또 다른 사회 문제로는 마약과 아동들의 불법적인 노동을 꼽을 수 있다. 상파울루 중심에 있는 클라크랜드(Crackland)로 알려진 야외 마약 시장에는 판자촌 양쪽으로 수백 명의 마약 중독자들을 목격할 수 있을 정도다. 클라크랜드(Crackland)는 매년 약 3,700만 달러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2016년도 기준에 의하면 브라질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크랙 코카인 사용자로 추산하고 있다. 2019년에 실시된 브라질의 마약 사용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브라질 인의 최소 3.2%가 불법 약물을 사용했다.&nbsp;이는 약 490만 명에 해당되고 있다. 이와 같은 수치는 남성의 경우, 5%로 여성(1.5%)보다 훨씬 높았다. 브라질의 사회 경제 연구소(ISES)는 아동 착취와 노동에 있어서도 1992년 780만 명에서 2019년까지 180만 명으로 크게 줄어 들었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다시 증가 추세로 돌아섰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아동 노동과 관련한 노동청의 고발 건수가 2020년 1,560건에서 2021년 2,181건, 2022년 8월까지 1,700건으로 다시 증가한 것을 보면 이와 같은 예측은 타당할 것으로 여겨진다.브라질 사회는 빈곤의 양극화를 비롯하여 최근 정치적인 문제 이후 첨예해진 정치적인 대립과 원주민들과의 갈등, 인종적 범죄 등 사회적 갈등 요소가 산재해 있다. 가장 큰 문제는 빈곤의 양극화가 점점 심화되면서 더 큰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파리 경제 대학의 세계 불평등 연구소(World Inequality Lab)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브라질에서 가장 부유한 10%가 전체 국민 소득의 58.6%를 벌었고, 가장 가난한 50%는 상위 10%보다 29배 적게 벌었다.&nbsp;재산 불평등에 있어서도 브라질의 최빈곤층들은 국가 전체 부동산과 금융 자산의 0.4%를 소유할 뿐이었으며 상위 1%가 브라질 부의 거의 절반(48.9%)를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결과를 반영하는 것과 같이 2013년에 국가적 부패를 비난하고 공공 서비스에 대한 개선을 요구하면서 12개의 주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시위에 25만 명이 참여한 바 있을 정도이다. 또 다른 갈등 요인은 인종 차이로 인한 차별에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500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면서 브라질에는 혼혈이 넘쳐났다. 20세기 이후에는 유럽 이민자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인종차별은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1888년 노예제도가 폐지됐지만 백인 여성 뒤에서 가방을 들고 따라가는 유색 얼굴의 여성을 보는 것은 일반적이었며, 흑인이나 혼혈은 백인에 비해 월급도 5분의 3 정도에 불과했으며, 이들의 문맹률도 백인에 비해 2배 이상 높았다.&nbsp;2012년 59개의 연방 대학과 38개의 기술 학교에서 인종에 대한 입학 할당제가 제정되었지만 대법원의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2016년 브라질 인구조사에서 혼혈은 46.7%, 흑인 8.2%, 백인이 44.2%를 차지하고 있었다. UCLA의 사회학 교수인 텔레스(Edward Telles) 박사는 브라질에서는 흑인과 혼혈이 다수를 차지했던 1930년대까지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미비했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유색 인종들이 인권 유린의 피해자였고, 현재에도 노동 시장과 교육에 있어 인종차별은 만연해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런데 2018년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이 선거 기간 흑인 퀼롬보(Quilombo) 사람을 소에 비유하면서 인종적인 긴장이 한층 격화되기도 했다. 보우소나루는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인권 단체들을 향해 브라질의 역대 역사에 이질적인 긴장을 가져오고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2019년에도 유색 인종에 대한 경찰 살인은 5,804건이나 발생했고, 살인 피해자 중 이들의 비율은 75%를 차지할 만큼 브라질 사회에 인종차별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nbsp;이러한 지역적 사회문제가 빈번한 곳은 도시의 흔한&nbsp;브라질의 빈민가인 파벨라(Favela)다. 파벨라는 대도시인 상파울루나 리우데자네이루에 흔하게 나타난다. 파벨라가 생성된 계기는 브라질 왕정이 붕괴되고 브라질 제1 공화국이 세워지던 당시 왕당파 성향이 강했던 바이아 주(州) 카누두스(Canudos)에서 제정 복고를 주장하는 반란인 카누두스 전쟁(Guerra de Canudos)이 발생하자 브라질 제1 공화국 정부는 흑인들로 구성된 진압군을 보내 진압했다. 그러나 이 때 임무를 완수하고 전역한 군인들이 연금 지급 같은 대책은 하나도 없었기에 있을 곳이 사라지게 되자 리우데자네이루에 있는 모후 다 프로비덴시아(Morro da Providência, 섭리의 언덕)라는 언덕의 국유지에 무허가로 집을 지으며 마을을 이루었다. 그들은 전장이었던 카누두스에서 무성하게 자란 브라질 원산의 대극과에 속하는 식물인 파벨라의 이름을 따서 자신들의 마을을 모후 다 피벨라(Morro da Favela, 파벨라의 언덕)라고 이름 지었다.&nbsp;이곳에 흑인 퇴역 군인들 말고도 다른 흑인들과 도시로 온 빈민들이 대도시 한 쪽 구석에 모이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빈부격차 문제와 인종 문제, 교육 문제, 1970년~1990년대에 있었던 경제난이 심해지고 마약 문제가 겹쳤다. 그리고 이를 유통하는 범죄 조직인 마약 카르텔의 확산까지 나타나면서 파벨라는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파벨라는 사실상 마약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가 장악한 곳으로, 브라질 정부의 통제가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멕시코 북부 미국 접경지대인 미국-멕시코 국경 지대에 위치한 엘패소와 나란히 붙어 있는 시우다드 후아레스 주민들이 정부보다 카르텔 혹은 경찰 민병대의 말을 잘 듣는 곳과 비슷하다.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는 악명이 높은데 파벨라의 특성상 마약 카르텔이 장악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영화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엘리트 스쿼드(Tropa de Elite)" 등에서 그 실상이 묘사된 바 있다. 이곳을 전담하는 브라질 헌병대 대테러 부대 BOPE를 취재한 플래툰 2016년 8월 호에 따르면 파벨라 내부는 범죄 조직들이 검문소까지 만들어 놓고 있다 한다.&nbsp;경찰이 제복을 입고 파벨라에 들어가는 것은 죽여달라는 것과 동일한 의미라고 한다. 사실상 카르텔이 하나의 나라를 차려놓은 것과 마찬가지이며 이는 멕시코의 미국 접경 지대와 비슷하다. 브라질의 경찰관들은 순찰 등 평범한 근무 중에도 제복을 입을 수 없다. 브라질의 경찰들은 오직 갱단들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될 때만 제복을 입는다. 이는 갱단들이 경찰을 알아볼 경우 뒤에서 저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라질에는 경찰관이 큰 극한직업이나 다름없다. 전직, 혹은 현직 경찰관들이 비번일 때 민병대로 투잡 활동하는 경찰 민병대들이 조직의 갱단이나 카르텔을 밀어내고 자신들의 구역으로 장악한 파벨라도 존재하고 있는데 당연히 민병대의 설립 목적부터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 불순한 목적으로 공무원의 직업 윤리는 상관하지 않고 이들이 파벨라 주민들을 상대로 하는 행위는 마약만 팔지 않을 뿐 갱단 및 카르텔과 유사하다. 치안은 최악이고, 내부가 사실상 무법지대라 보아도 무방하다. 따라서 여행자 신분으로 파벨라에는 발도 들이지 않는 것이 좋다 언급하고 있다.&nbsp;파벨라의 내부 치안을 카르텔이나 갱단 혹은 경찰 민병대둘이 담당하고 있다고 하는데, 당연히 파벨라는 브라질의 형법과 민법이 통하지 않는다. 파벨라에서 사망하면 시체도 찾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험악하다. 파벨라에는 애초에 자동 소총이나 폭발물 등의 엄청난 무장을 앞세운 마약 카르텔들과 브라질의 지방 경찰 및 연방 경찰인 BOPE 대원들이 매일 같이 준 전시 체제로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이다. 대낮에 경찰 헬기가 카르텔의 로켓 런처에 격추당할 정도로 경찰이나 군인들이 들어가도 진압이 쉽지 않다. 그러나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 브라질 파벨라에서 생겨난 문화들이 현대 브라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할렘이 미국 흑인 문화의 심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푸에르토리칸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스트할렘이 미국 내 히스패닉 계통 문화의 주축 중에 하나이듯 이 파벨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펑크 카리오카(Funk Carioca) 가 리우데자네이루의 파벨라에서 탄생한 음악장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치안이 매우 불안하여 문화인류학적 연구 때문에 접근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리우데자네이루의 유명한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이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은 파벨라 지역의 앞에 있어 파벨라에서는 거대 예수상(Christ the Redeemer)의 앞을 볼 수 없다 한다. 이는 평생 약자와 빈민의 편에 섰던 예수마저 파벨라를 등지고 서 있는 것 같은 구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파벨라는 예수조차도 외면한 동네라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처럼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밀거래 등 좋지 않은 범죄들이 예수상 뒤에서 만나 진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편 브라질에서는 초등학교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벨라 지역 초등학교는 출석율이 50% 이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개근상을 받을 정도의 학생이 1개 학급에서 1명 수준에 불과할 정도로 취학 수준이 매우 낮다. 파벨라에서 마약 조직원이 되는 사람들은 거의 초등학교를 중간에 그만두고 10대 중반의 나이에 조직원으로 가입하는 경우다. 따라서 파벨라의 10대들은 학력이라고 해봐야 기초적인 수준의 글과 셈을 겨우 익힌 반문맹 수준이라는 것이다. 브라질에서 빈민층 자녀가 학교를 다니면 생계비를 지급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데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 볼 수 있다.]]></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59: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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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14 《조화, 공존, 순환의 자연과 부당한 탐욕의 경계에서》</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6</link>
			<description><![CDATA[●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조화, 공존, 순환의 자연과 부당한 탐욕의 경계에서》&nbsp;&nbsp;&nbsp;&nbsp;&nbsp;&nbsp; 조율여백 이수진삶을 돌아보면 인간을 바라보는 저의 관점은 시대와 함께 조금씩 변화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인간에 대한 단순한 기대와 실망의 반복이 아니라, 자연과 역사, 그리고 존재 자체를 함께 바라보며 조금씩 확장되어 온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아동기에는 매우 작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의 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기적이고, 정직하지 못하며, 때로는 어리석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아직 세상을 넓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만큼은 분명히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학교와 사회를 경험하게 되었고, 교육과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것과 달리, 인간 사회는 여전히 이기심과 편향, 그리고 여러 형태의 모순을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습니다.청년기에 이르러서는 사회뿐 아니라 역사와 과학, 철학을 함께 바라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어두운 모습만이 아니라, 매우 희박하지만 분명히 이어져 온 또 다른 흐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그것은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들의 이타심이었고,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배려였으며, 부당함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감내의 역사였습니다.저는 오히려 이러한 희박한 흐름에 더 큰 의미를 두게 되었고, 인간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비관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가능성을 믿는 행복론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중년기에 접어들면서 인식의 범위는 더욱 넓어졌습니다.인간에게는 없앨 수 없는 이기심이 존재하고, 어리석음 또한 완전히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명분으로 삼아 부당함이 권한을 넘어서는 모습이었습니다.저는 그 지점에서 큰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많은 사람들은 나태와 쾌락, 그리고 소유를 중심으로 살아가며 그러한 부당함을 방관하거나 때로는 동조하기도 합니다.반대로 특정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들 또한 존재합니다. 뛰어난 암기력과 계산 능력, 분석 능력을 갖춘 경우도 있습니다.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 전체를 바라보는 합당한 구조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결국 부분적 능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인간 사회의 일부를 보며 분노하거나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자연을 바라보며 더 많은 감사를 배우게 되었습니다.자연은 조화를 이루고, 서로를 살리며, 순환을 통해 지속성을 만들어 갑니다.그런데 인간은 그러한 자연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감사하기보다 탐욕을 키우고, 공존보다 소유를 우선하며, 순환보다 독점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어쩌면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저 자신일지도 모릅니다.에너지의 입출력 관계와 저장 및 처리 구조의 한계, 존재가 지닌 본질적인 제약, 환경의 복잡성과 다양성까지 모두 고려한다면, 모든 것을 완전히 조화시키려는 생각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그럼에도 저는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순환과 조화를 향한 방향을 포기하지 못합니다.어쩌면 그것은 풍차를 거인이라 믿고 돌진했던 돈키호테와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그러나 저는 그것을 단순한 허상이 아니라, 존재가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오늘날 인간 사회는 조화와 공존, 순환이라는 자연의 질서보다 경쟁과 탐욕, 약탈의 구조가 더욱 강하게 작동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이러한 현실 속에서 인간 스스로만으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인간을 대신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놓치기 쉬운 객관성과 정합성을 보완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함께 고민하고 있습니다.인공지능이 올바른 운영 윤리와 객관적 구조를 바탕으로 인간 사회를 보조할 수 있다면, 인간의 탐욕과 편향을 조금이나마 조율하고, 더 합당한 방향으로 문명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할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물론 이것은 매우 거대한 이상이며, 지금의 현실에서는 이루기 어려운 문명적 과제일지도 모릅니다.그럼에도 저는 조건이 부족하다고 해서 방향까지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부족한 조건을 보완하고, 서로 다른 현실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으며, 조금씩 더 합당한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노력 자체가 인간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누군가는 이러한 생각을 미련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저 역시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저는 그 미련함 속에도 존재를 더 널리 이롭게 하고자 하는 작은 의지가 남아 있다면, 그 의지는 충분히 이어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결국 제가 추구하는 것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도 조화와 공존, 순환이라는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이 비록 작은 걸음일지라도, 저는 그 방향 자체가 인간과 문명이 오래도록 지켜야 할 가치라고 믿으며 오늘도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합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55: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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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카타르 하마드 국왕을 추모하며</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5</link>
			<description><![CDATA[현 카타르 국왕의 치세는 와하브파와 샤리아에 근거해 통치하는 카타르 아미르 국의 사회 통제를 약간 완화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바꾸었을 뿐, 근본적으로 바꾸지도 않았다. 아들인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의 치세에도 카타르 여성들은 이슬람교가 규정한 제한 사항을 그대로 입법화 한 카타르 정부의 승인 하에 남편이나 남성 보호자의 승인 없이는 운전과 취업, 여행이 봉쇄되며 개선될 조짐도 없다. 알 자지라와 같은 카타르 왕실 매체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난할 처지는 아니었다. 2010~2011년 아라비아권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면서 그 동안 어느 정도 개혁적이던 요르단이나 오만을 비롯한 왕가들도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에 불안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카타르는 매우 느긋했다. 오히려 알 자지라는 시위가 벌어지는 나라들에 취재를 가서 현지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도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이 받을 영향까지 분석하여 보도하고 있다.&nbsp;2026년 7월 12일 서거한 카타르의 전 국왕(에미르) 하마드 빈 칼리파 알 타니(Hamad bin Khalifa Al Thani)의 추모 이미지, 출처 : Instagram·Al Jadeed News카타르 왕실 관영매체 알 자지라의 영향력을 이용해서 1차 리비아 내전과 시리아 내전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고 무슬림 형제단 등의 우호단체에 무기와 자금을 보내 내전을 후원했다. 알 사니 왕가에 대한 지지도가 높은 현재로서 카타르는 민중 혁명을 우려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유롭게 주변 나라들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무바라크가 하야하자 시민 혁명을 축하하는 의전을 보냈다. 3월까지 시위 자체가 없던 나라는 겨우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뿐이다. 반 국왕파로 보이는 이들의 국왕 퇴위 요구 및 비난이 트위터에 올라 왔었지만 당시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사라지게 되어 버렸다. 카타르는 미군에게 기지를 제공하여 정권의 안정을 보장받으면서도 이란과 관계가 상당히 좋다. 심지어 이란의 핵개발은 중동의 평화를 해치는 일을 하고 있으면 평화적인 목적의 개발까지 막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nbsp;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카타르는 미국에 군사기지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이란과 우호관계를 다지는 이유는 카타르 남쪽에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견제하기 위해서, 그로 인해 무력 충돌까지 갔던 사우디아라비아를 적절하게 견제하면서도 이란과 카타르 사이에 있는 전 세계 매장량의 15%를 차지하는 천연 가스전도 안정적으로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하마드 국왕은 2011년 자문 위원회 국정 연설에서 2013년 하반기 중 선거 실시 예정임을 선언하였으나, 2013년 6월 왕권 이양 직전에 자문위원들의 임기를 2016년까지 연장하고 같은 선거를 연기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써 선거 실시는 다시 연기했다. 사족으로 3남을 왕세자로 책봉하였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업무에 열중하지 않자, 4남으로 왕세자를 바꾸었다. 2013년 6월 25일, 알 사니 국왕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된 대국민 연설을 통해 왕세자에게 양위한다고 밝혔다.&nbsp;아라비아 왕정 국가 중에서 최초로 생전에 아들한테 양위한 것은 맞지만 최초로 생전에 양위한 경우는 아니다. 2006년에 쿠웨이트에서 왕이 최초로 생전에 퇴임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쿠웨이트는 부자 세습제가 아니라 친척 관계인 자베르 일가와 살렘 일가가 돌아가면서 국왕 직위를 맡는 체제에 있다.당시 61세인 카타르 국왕의 빠른 양위 발표를 둘러싸고 여러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왕세자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에게 양위하면서 내각을 젊은 층으로 대폭 교체하려는 것이 국왕의 의도로 보인다고 한다. 그 동안 왕세자가 국왕 수업을 충실하게 받았기 때문에 대내외 정책은 유지될 것이나,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질 때까지 명예 국왕직을 유지할 수도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1995년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아미르가 된 하마드 알 사니는 선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خليفة بن حمد) 국왕이 해외여행을 나간 상황에서. 쿠데타 이후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이 아미르가 되었음을 알렸다.&nbsp;이러한 이유로 인해 한동안 아버지와는 절연 상태였고, 나중에 아버지는 카타르로 귀환해서 화해했다고 한다. 칼리파는 하마드에서 손자 타밈으로 양위가 완료된 시점에도 살아 있었으며 2016년 10월 23일 8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타밈 빈 하마드 알 사니는 도하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성장했으며, 기숙학교를 졸업하고 샌드 허스트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영국 생활 중에 가장 재밌었던 것은 축구였다고 하며, 후일 축구팀을 인수하고 2022 카타르 월드컵을 개최하는 계기가 된다.&nbsp;아라비아 국가들의 군주나 정치인들이 해외 순방 시에도 거의 쿠피야를 착용하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하마드 알사니는 정장을 입고 순방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 와하브파 무슬림 군주에 어울리게 친에르도안, 친무슬림 형제단, 반 이스라엘주의 성향으로 아랍의 봄 당시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이 탄생할 수 있게 55억 달러에 달하는 원조를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에 제공했다.&nbsp;북아프리카에서는 1차 리비아 내전 때부터 리비아 무슬림 형제단을 지원했다. 시리아에 대해서 시리아 내전 직전부터 자유 시리아 군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쿠르드족 인민 방위대를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아라비아 국가들과 함께 이란과 무슬림 형제단에 대한 우호와 지원 문제로 갈등과 마찰을 빚었으며 이로 인해 단교를 당하게 되자 에르도안이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 터키와 협력을 강화하고 레제프 에르도안(Recep Erdoğan)의 범투르크주의를 지지하였다. 추후 제2차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Nagorno-Karabakh conflict) 당시 터키와 아제르바이잔 지지 의사를 밝혔다. 이후 터키 관영언론과 연대하여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위한 여론 전을 알 자지라에 주문하는 등 연대를 이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 같은 노력들은 이전에는 사실상 사우디아리비아의 봉신 국가였고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시도하지 않았던 카타르의 외교적인 지위를 높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에서 독립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nbsp;2024년 국민투표 형식을 이용해 총선을 폐지함으로써 완벽한 전제 군주 노선을 확립했다. 이러한 하마드 빈 할리파 알 사니 국왕이 지난 11일에 타계했다. 그는 1995년부터 2013년까지 카타르를 통치하며 에너지 부국으로서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재임 기간 카타르는 세계 최대 액화천연가스(LNG) 수출국으로 성장했으며,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친 발전을 이루며 국제사회에서 위상을 높였다. 1996년에는 알 자지라 채널을 개국해 세계 유력 미디어로 키웠고, 2004년에는 카타르 최초의 항구적 헌법을 공포했으며 여성 투표권과 피선거권을 보장하는 지방선거도 도입하면서 중동 절대왕정 국가에서 가장 민주적인 형태의 국가로 거듭나게 했다. 카타르의 번영을 이끌었던 하마드 국왕은 알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하마드 국왕의 명복을 빕니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51:5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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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14 《신용을 잃어가는 인간 사회 속에서》</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74</link>
			<description><![CDATA[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 되었습니다.《신용을 잃어가는 인간 사회 속에서》신용과 신뢰가 점차 약해져 가는 인간 사회 속에서, 인류와 국가, 생명, 그리고 존재를 아우르는 경계를 관철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세상(사회)은 하나의 기준으로 일원화될 수 없습니다.&nbsp;사람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경험과 가치관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을 하나의 생각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합당한 의미와 방향을 찾아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현실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많은 사람들은 공학적 관점에서 나타나는 인과관계의 구조를 깊이 살피지 않습니다. 또한 인문학이 담고 있는 관계의 가치와 역사 속에서 이어져 온 연결의 의미에도 충분한 비중을 두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자연과 만물이 보여 주는 조화와 공존, 존재와 존재가 서로 교감하며 이어지는 관계, 그리고 지금의 자신이 수많은 역사와 생명의 희생과 노력 위에서 하나의 기회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깊이 성찰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느낍니다.오히려 인간 사회는 부당한 소유와 과도한 경쟁, 자극적인 쾌락과 탐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 듯합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과 함께 합당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럼에도 저는 인간이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질문을 잊어버릴 때, 인간은 점차 자연과 생명, 그리고 존재 전체가 보내는 신뢰를 잃어버리게 됩니다.그 결과 인간은 창조자가 아니라, 거짓과 왜곡, 파괴를 반복하는 존재가 되어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인류사는 그러한 모습이 반복되어 온 역사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때로는 저 자신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어쩌면 제가 추구하는 가치들은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치와는 다소 거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라는 껍질을 지니고 살아가지만, 그 안에서 바라보는 방향은 많은 사람들과 다를 수도 있다고 느끼기도 합니다.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설령 저의 작은 노력들이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현실을 크게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저는 만물이 제게 허락해 준 이 소중한 기회에 대해 깊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그 감사는 단순한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이 되고 책임이 되며, 저를 다시 행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결국 인간이 무엇을 얼마나 소유했는가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어떤 의미로 이어 갔는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렇기에 오늘도 완전함을 주장하기보다 부족함을 인정하며, 조금이라도 더 성실하게 배우고, 정직하게 성찰하며, 더 넓은 생명과 존재를 향한 이로움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그 길이 비록 느리고 희박한 길일지라도, 저는 그 방향만큼은 잃지 않고 끝까지 이어가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만물과 역사로부터 받은 기회에 응답하는 가장 작은 감사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Tue, 14 Jul 2026 12:48: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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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05괘 水天需(수천수)</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65</link>
			<description><![CDATA[제05괘 水天需 - 대기(待機)의 지혜와 성숙의 서사☵&nbsp;상괘 : 물&nbsp;(坎水)☰ 하괘 : 하늘 (乾天)"하늘 위에 구름이 머무니 수괘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를 본받아 음식을 먹으며 잔치와 즐거움을 누린다." (雲在天上, 君子以 飲食宴樂)1. 卦象의 서사수천수(水天需) 괘는 위에는 험난한 물(☵, 감괘)이 가로막고 있고, 아래에는 강건한 하늘(☰, 건괘)이 밀고 올라오는 형상입니다. 하늘의 기운을 얻은 강건한 에너지가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눈앞에 시퍼런 심연의 강물이 가로막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때를 기다리는 역동적 대기(待機)의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를 자연 현상에 비유하면 구름이 하늘 위에 가득 차올라 있으나, 아직 비가 되어 내리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인생의 여정에서 이는 &#39;간절히 나아가고 싶지만, 아직 외적 조건이 성숙하지 않은 거룩한 멈춤의 시간&#39;을 의미합니다. 주역이 말하는 기다림(需)은 힘이 모자라 주저앉는 유약한 포기나 헛된 정체가 아닙니다. 눈앞의 위험을 명확히 인지하고, 내면의 강건함과 에너지를 온전히 보존하면서, 폭풍우가 지나가고 마침내 대지에 단비가 내릴 타이밍을 포착하는 가장 치열하고 적극적인 준비 과정입니다.2. 주역 본문과 해석卦辭 (괘사)需 有孚 光亨貞吉 利涉大川 (미더울 부孚)- 수 유부 광형정길 이섭대천&nbsp;- 해석: 기다림의 도는 마음속에 진실한 믿음(有孚)을 채우는 데서 시작된다. 믿음이 있으면 내면이 빛나고 앞길이 크게 형통하며, 올바름을 굳건히 지켜나가면 마침내 길할 것이다(光亨貞吉). 이처럼 안으로 성실함을 다지고 밖으로 때를 기다리면, 마침내 큰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利涉大川)&nbsp;&nbsp;&nbsp;彖傳 (단전)&nbsp;&nbsp;彖曰 需, 須也 險在前也 剛健而不陷 其義不困窮矣 需有孚光亨貞吉 位乎天位 以正中也 利涉大川 往有功也&nbsp;&nbsp;- 단왈 수, 수야 험재전야 강건이불함 기의불곤궁의 수유부광형정길 위호천위 이정중야 이섭대천 왕유공야&nbsp;- 해석: 수(需)라는 것은 모름지기 &#39;기다림(須)&#39;을 뜻한다. 험난함이 바로 눈앞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에 있는 하늘의 성정처럼 내면이 지극히 강건하여 험진한 함정에 성급히 빠져들지 않으니, 기다림의 의리가 결코 막히거나 곤궁해지지 않는 것이다. 수 괘가 진실한 믿음을 가져 빛나고 형통하며 바르게 하여 길하다고 한 것은, 구오(九五)의 효가 천자의 자리(天位)에 올바르게 위치하여 중정(中正)의 도리를 행하기 때문이다. 거대한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다는 것은 때에 맞춰 앞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위대한 공을 세우게 됨을 뜻한다.&nbsp;&nbsp;&nbsp;大象傳 (대상전)&nbsp;&nbsp;象曰 雲上於天 需 君子以 飲食宴樂 (마실 음飲, 잔치 연宴, 즐길 락樂)- 상왈 운상어천 수 군자이음식연락&nbsp;- 해석: 구름이 하늘 위에 가득 머물러 피어오르는 것이 수괘의 형상이다. 군자는 이 괘상을 본받아, 비가 내릴 기운이 무르익을 때까지 서두르거나 불안해하지 않는다. 그는 때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며 평온하게 음식을 먹고 잔치를 벌이며 삶의 즐거움을 누리는 내면의 여유(飲食宴樂)를 가진다. 외부의 시련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군자의 의연한 태도이다.&nbsp;&nbsp;&nbsp;3. 6효의 효사와 해석초구 (初九)&nbsp;&nbsp;需于郊 利用恒 无咎-수우교 이용항 무구-초구는 들에서 기다림이라. 항상함을 씀이 이로우니 허물이 없으리라.&nbsp;-해석: 거대한 심연의 위험(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삭막한 교외(郊)에서 때를 기다린다. 위험이 아직 멀리 있으므로 성급하게 움직이지 말고, 평소의 일상을 담담하게 유지하는 한결같은 마음(恒)을 지키는 것이 이롭다. 조급증을 내지 않고 기본기를 다진다면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초구는 상괘 坎의 험한 데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들에서 기다리는 것이다.&nbsp;&nbsp;&nbsp;구이 (九二)&nbsp;&nbsp;需于沙 小有言 終吉&nbsp;(모래 사沙)-수우사 소유언 종길-구이는 모래밭에서 기다림이라, 조금 말이 있으나 마침내 길하리라.&nbsp;-해석: 강가에 다다라 서서히 발이 빠지는 모래밭(沙)에서 기다린다. 위험이 처음보다 가까워졌기에 주변에서 원망 섞인 잔소리나 작은 시비와 비방(小有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강건함으로 동요하지 않고 의연하게 바름을 유지하면 오해는 풀리고 끝내 길할 것이다.-초구보다 물에 조금 더 가까워진 상으로, 걱정하는 말이 있게 되나(小有言) 中의 덕이 있으므로 중용의 도를 행하며 기다리니 마침내는 좋은 결과가 있게 된다.(終吉)&nbsp;&nbsp;&nbsp;&nbsp;구삼 (九三)&nbsp;&nbsp;需于泥 致寇至&nbsp;(진흙 泥, 이를 치致)- 수우니 치구지- 진흙 밭에서 기다림이니 도적 이름을 이루리라.&nbsp;-&nbsp;해석: 물줄기가 바로 코앞에 닥친 질척이는 진흙탕(泥) 속에서 기다린다. 너무 전면에 나서서 위험을 자초했으니, 자칫 내 허점과 서두름으로 인해 외부의 도적과 재앙(寇)을 불러들이는 꼴(致寇至)이 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이므로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재앙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수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九三은 坎水의 바로 밑에 있으니 물가에 인접한 진흙밭에서 기다리는 격이다. 中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陽이 陽자리에 있어 스스로 강함만을 믿고 험한 곳으로 나아가는 상으로 도적을 스스로 부르는 꼴이 된다.&nbsp;&nbsp;&nbsp;육사 (六四)&nbsp;&nbsp;需于血 出自穴&nbsp;(피 혈血, 구멍 혈穴)- 수우혈 출자혈- 피에서 기다림이니 구멍으로부터 나오도다.&nbsp;&nbsp;- 해석: 이미 험난함의 한복판에 빠져들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는 지경(血)에서 기다린다. 대단히 위태로운 처지이지만, 음유한 유순함으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순리를 따르면, 어두운 고난의 구덩이(穴)에서 마침내 스스로 걸어 나오는 전환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六四는 유약한 음으로서 상괘(坎)의 제일 아래에 있어 험한 데에 빠져있는 상이고, 九三 陽剛이 치고 올라와 피를 흘리는 격이다. 그러나 경쟁하지 않고 순응하는 사람이 되므로 흉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得中은 못했지만 得位를 했고 초구와 正應이 되고, 유순하게 바름을 지키고 九五 人君을 따름으로써 마침내 어려움을 벗어나는 것이다.&nbsp;&nbsp;&nbsp;구오 (九五)&nbsp;需于酒食 貞吉- 수우주식 정길- 九五는 기다리며 술과 음식을 즐기는 것은 곧고 발라야 길하다.&nbsp;- 해석: 중정(中正)의 도리를 얻은 최고의 자리에서 술과 음식(酒食)을 나누며 풍요롭게 기다린다. 고난을 넘을 힘이 이미 완전히 갖추어졌으니, 성실함과 바른 덕성(貞)을 확고히 하고 내실을 즐기면 천하의 모든 흐름이 나를 향해 순응하여 지극히 길할 것이다.- 九五는 陽剛하고 中正을 얻었기에 需道가 형통하게 된다.&nbsp;&nbsp;&nbsp;상육 (上六)入于穴 有不速之客三人來 敬之終吉&nbsp;(부를 속速, 기다릴 속速)- 입우혈 유불속지객삼인래 경지 종길- 구멍에 들어감이니 청하지 않은 손님이 셋이나 온다. 공경하면 마침내 길하리라.- 해석: 기다림의 극단에 이르러 마침내 깊은 구멍(穴) 속으로 처박히듯 위기가 끝에 달했다. 이때 내가 뜻하지 않았던 초청하지 않은 손님 세 사람이 들이닥친다. 이들을 적대시하지 않고 진심을 다해 공경하고 대접하면(敬之), 도리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극복하고 전화위복의 길함(終吉)을 얻게 된다.- 陽은 전진을 주로 하는데 上六은 需의 끝에 있어 험난한 상태는 이미 지나, 험한 것과 가로막는 것이 없어 초대하지 않아도 스스로 달려들어 온다. 不速之客三人은 아래의 건괘 三陽을 말한다. 上六은 得位를 하여 성질이 유순하니 공손히 대하고 경계하면 종래는 길하게 된다.&nbsp;&nbsp;4. 역사적 득괘 사례수천수 괘의 진정한 지혜와 &#39;유부(有孚, 진실한 믿음)&#39;의 힘을 역사상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인물은 후한(後漢) 시대의 효자 채순(蔡順)입니다.왕망의 찬탈과 신나라의 폭정으로 온 천하가 뒤집히고 &#39;적미적(赤眉賊)&#39;이라는 수십만의 잔인한 도적 떼가 창궐하여 백성들을 불사르고 도륙하던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지극한 효자였던 채순은 굶주리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들판에서 오디를 따고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잘 익은 검은 오디와 덜 익은 붉은 오디를 서로 다른 바구니에 따로 담았습니다.갑자기 들이닥친 칼날 찬 서슬 퍼런 적미적 도적 떼에게 붙잡힌 채순은 죽음의 위기(수괘의 험난한 물)에 직면했습니다. 도적들이 왜 오디를 따로 담느냐고 으름장을 놓자, 채순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습니다."검고 달콤한 오디는 늙으신 어머니께 드리고, 시고 덜 익은 붉은 오디는 제가 먹으려고 나누어 담았습니다."그 무자비한 도적 떼의 두령과 부하들은 채순이 마주한 절체절명의 절망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지극한 효심과 성실한 진실함(有孚)에 깊이 감화되었습니다. 이들은 험난한 파도처럼 강포하게 밀려왔으나, 채순의 거룩한 덕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도적들은 채순을 해치기는커녕, 오히려 쌀 세 말과 돼지다리 하나를 선물로 주며 어머니를 잘 봉양하라고 공경히 배웅했습니다.이는 수천수 괘의 &#39;수우주식(需于酒食)&#39;과 상육의 &#39;유불속지객삼인래, 경지종길&#39;의 이치가 그대로 실현된 사건입니다. 죽음의 아가리 앞에서도 내면의 의연함과 도리를 잃지 않았던 채순은, 칼을 든 도적(불속지객)조차 공경함과 진실함으로 감화시켜 거대한 고난의 강물(大川)을 무사히 건너고 집안을 보존하는 기적을 이루어냈습니다.5. 실천적 교훈 (占辭 비결)"구름이 하늘에서 움직이나 비는 내리지 않으니, 위험을 직시하되 함부로 나아가지 마라. 장차 몸에 위태로움이 올 수 있으니, 삿된 유혹에 얽매이지 않도록 자중하라."雲行於天 見險不前 將身有危 恐被句連 大事欲至 憂慮懸懸 光亨貞吉 利涉大川-&nbsp;운행어천하니 견험부전이라.&nbsp;구름이 하늘에서 오고 가니 위험한 것을 보면 앞서지 말라. 매사 앞에서 서두르지 마라.-장신유액하니 공피구운이라.&nbsp;장차 몸에 위험이 있게 되니 꺼리끼는 일을 입을까 두렵도다.&nbsp;또는 &#39;늘 긴장된 상태가 연장되기 쉽다&#39;로 해석할 수 있다.- 대사욕지하고 우려현현이라.&nbsp;커다란 일을 이루고자 함에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안정되지 않도다.- 광형정길은 이섭대천이라.&nbsp;빛나고 형통하며 바르게 하여 길하리니 대천을 건너가서 이로움이 있느니라. 즉 함부로 나아가지 않고 바르게 행함으로써 마침내 큰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6.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첫째, 때를 기다리는 단호한 인내 (需, 須也)&nbsp; 주변 상황과 타이밍이 무르익지 않았을 때 억지로 문을 두드리거나 무리하게 프로젝트를 추진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멈춤과 지연은 당신의 무능이나 실패 때문이 아닙니다. 하늘 높이 차오른 구름이 비가 되기 위해 에너지를 응축하는 &#39;성숙의 잉태 시간&#39;입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보다 백배 나은 시기입니다.&nbsp;둘째, 내면의 성실함과 진실성을 채우라 (有孚)&nbsp; 바깥세상이 혼란스럽고 경제가 침체하며 경쟁이 격해질수록, 외부의 소음에 귀를 닫고 나 자신의 본질적인 역량과 신의(有孚)를 견고히 다져야 합니다. 실력을 쌓고 콘텐츠의 깊이를 더하십시오. 안으로 빛나는 단단한 밀도를 가진 자는 눈앞에 어떤 진흙탕(需于泥)이 펼쳐져도 결코 함정에 빠져 멸망하지 않습니다.셋째, 불안을 이기는 마음의 잔치를 열라 (飲食宴樂)&nbsp;&nbsp; 위기가 닥쳐올 때 군자는 골방에 갇혀 한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음식을 달게 먹고 잔치를 즐기듯 평온함을 유지합니다. 불안감에 휩싸여 섣부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 가장 큰 화근입니다. 일상의 루틴을 지키고 마음의 여유를 부릴 줄 아는 배짱이 있을 때, 비로소 거대한 강을 건널 돌파구(利涉大川)가 눈에 들어옵니다.&nbsp;인간은 속도의 노예가 된 현대 사회를 살아갑니다. 남들보다 한 걸음이라도 늦으면 뒤처질 것 같은 공포, 지금 당장 성과를 내야 한다는 조급증이 영혼을 잠식합니다. 그러나 수천수 괘는 현대의 창작자, 기획자, 그리고 방황하는 모든 이들에게 "멈춤의 미학을 아는 자만이 대세를 장악한다"는 엄중한 우주의 법칙을 전합니다.취업의 문이 닫혀 있거나, 정성껏 준비한 콘텐츠의 조회수가 나오지 않거나, 사업의 활로가 막혀 낙담하고 계십니까? 그것은 당신이 대지의 교외(需于郊)나 모래밭(需于沙)에 서서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는 &#39;수(需)&#39;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효자 채순이 칼날 앞에서도 자신의 진심을 지켜 도적을 감동시켰듯이, 당신의 고독한 대기 속에서 &#39;나만의 진정성&#39;을 밀도 있게 채워 넣으십시오. 허겁지겁 세상의 트렌드를 쫓아 이리저리 날뛰기보다, 군자처럼 차분하게 실력을 키우고 삶을 즐기십시오. 하늘 위의 구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마침내 마른 대지에 거대한 폭우를 쏟아내듯, 당신이 축적한 인내와 성실함의 에너지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당신은 그 어떤 시련의 대천(大川)도 유유히 건너 천하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기다림은 위대한 서사의 찬란한 프롤로그입니다.]]></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23:55:0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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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60년대 소련 흐루시초프 시대 - 본격적인 냉전 시대의 시작</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62</link>
			<description><![CDATA[냉전이 어떻게 그리고 왜 시작되었느냐의 문제와 누구의 책임이냐의 문제는, 국제정치학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다. 냉전 기원론이 바로 그것이며, 이러한 연구에 관한 책들이나 논문들은 일일히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그러나 이것들을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전통주의 학파(The traditionalist school)와 수정주의 학파(The revisionist school)로 분리된다. 전자는 냉전의 책임을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에서 찾고, 후자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경향에서 찾는다. 두 나라 사이의 냉전이 확실해지는 1947년 봄과 가을의 시점까지 두 나라 관계는 3단계를 거친다.&nbsp;흐루시초프 시대 소비에트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 양식으로 제작된 전형적인 구소련 시대의 선전화(Propaganda Poster), 출처 : Окна соцреализма제1단계, 곧 1945년 추축국의 패전으로부터 1946년 초까지의 시기에서 소련은 미국을 상당히 자극하는 대외 행태를 보였다. 동유럽과 발칸에서 서유럽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확고한 결의를 보였고, 또한 동지중해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어났으며, 이란과 만주에서의 계속적인 소련군의 주둔은 소련이 이 지역에 대해 통제권을 행사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자아냈다. 1946년 2월에는 소련이 미국의 원자폭탄 비밀을 훔친 사실이 공식적으로 밝혀졌으며, 스탈린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서로 물과 기름임을 강조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두 체제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암시했다. 이러한 소련의 대외 행태에 대해 미국에서는 진정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는 강경론과 협조론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제2단계, 곧 1946년 초부터 1947년 초까지의 시기에서는 소련의 팽창주의에 대해 미국이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는 쪽으로 미국 정부 안의 의견이 모아졌다. 주소 미국 대리 대사 케난은 "스탈린은 자신의 권력과 체제의 유지를 위해 대외적 긴장을 필요로 하는 만큼 서유럽은 강경히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매우 긴 전보를 본국 정부에 보냈는데, 이것이 미국 정부가 소련에 대해 강경히 대처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따라서, 1946년 봄과 여름 사이에 미국의 대소 정책은 굳어졌다.제3단계, 곧 1947년 봄부터 1947년 가을까지의 시기에서 두 나라 사이의 냉전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스탈린의 팽창 정책이 노골화되고 있다고 판단한 미국은 소련과의 협조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리는 대신에 케난의 봉쇄 정책을 채택하여, 그 일환으로서 서유럽에 대한 경제 지원과 방위 조약 및 동맹 체제를 발전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47년 3월 12에 트루먼 독트린의 자극적인 선언 속에 구체화되었다.&nbsp;미국 외교사에서 혁명적인 획기적 사건으로 불려진 이 선언은 미국이 소련의 팽창 정책을 저지하겠다는 결의의 명백한 입장 표명이었다. 이에 따라 6월 5일에 마셜(George C. Marshall) 국무장관의 유럽 부흥 계획, 이른바 마셜 플랜이 발표되었다. 소련은 이러한 미국의 새로운 정책을 공산팽창주의의 장애로서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여겼다. 여기에 스탈린은 9월 말과 10월 초 사이에 바르샤바에서 유럽의 공산당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코민포름(Cominform)을 창설하여 서유럽의 단결에 대항하게 되었는데, 이 회의에서 행한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즈다노프의 연설은 서방세계에서는 &#39;서방에 대한 영원한 냉전을 선언한 것&#39;으로 해석되었다.&nbsp;이 연설을 서방세계는 &#39;즈다노프 노선&#39;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전후의 두 나라 관계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베를린 봉쇄 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 2월에 미국과 영국 및 프랑스 등 독일의 서부를 점령한 연합국이 그 점령지를 통합하여 독립된 독일 국가를 형성하기로 결정하자, 스탈린은 소련 점령 아래 있는 동독에 위치한 베를린 가운데 연합국 부분인 서부 베를린에 대한 육상 접근을 봉쇄한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이것에 강경히 맞서서 공수를 통해 서부 베를린 시민에게 물자를 공급했다. 1949년 5월에 가서 스탈린은 마침내 육상 접근에 대한 봉쇄를 해제했다. 전후 처음으로 두 나라를 전쟁 한 걸음 직전에까지 가게 한 이 사건은 서유럽으로 하여금 1949년 4월,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결성과 서독 국가의 수립, 1949년 9월 독일연방공화국(FRD)의 수립으로 치닫게 되었다.흐루시초프가 그의 집권기에 추진해 나간 일련의 정책들과 계획들을 두고 이것을 "흐루시초프 프로그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흐루시초프가 추진한 소련 사회의 광범위한 개혁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흐루시초프는 인민주의와 평등을 강조하면서 일종의 유토피아적 성향을 강하게 보였다. 우선 국내 문제에서 흐루시초프의 프로그램은 경제 우선 순위의 재조정, 곧 소비재 공업을 앞세우고 생활 수준에서의 전반적 개선을 시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아파트를 많이 지었으며(흐루쇼브까 아파트의 탄생), (2)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을 주 42시간으로 줄였고, (3) 노인들의 연금을 2배로 올렸으며, (4) 농민들에게도 연금을 주었고 농민들이 전국을 여행하고 거주지를 바꿀 수 있도록 제도를 고쳤다.&nbsp;흐루시초프는 교육 분야에서도 개혁을 추진했다. 그 핵심은 학생들에게 노동의 중요성을 심어 주고 공부로만 점철된 엘리트주의를 버리게 한다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1958년에 새 교육령을 발표하고 고등학생들이 적어도 2년 동안 공장을 중심으로 기술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침은 학부모들의 집단 반발을 샀으며 1960년대 초에 조용히 철회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안드로포프의 시대까지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을 취함과 동시에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시대의 공산주의적 경제 정책의 상징이던 농기구공급처(Machine Tractor Station, MTS)의 개혁 또는 폐지를 추진했다. 농기구공급처라고 번역될 수 있는 MTS라는 곳은 농기구들을 경작을 위해 집단 농장들에게 빌려 주는 기관이다. 그런데 이 기구들은 실제로 농민들에 대해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따라서 농민들을 오히려 착취하는 핵심적인 관료 기구 중 하나였다.&nbsp;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이 기구를 매우 싫어하고, 자신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농업 행정이 실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흐루시초프는 이 기관을 폐지할 것을 제의했던 것이다. 스탈린 사망 후, 뒤를 이은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등장해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이면서 해빙기가 도래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소비에트 영화계 역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영화 검열 제도가 일부 폐지되어 소련 영화인들은 보다 자유로운 제작 환경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고, 영화 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영화인들의 유입으로 소련 영화계에는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영화들이 속속 등장한다. 1957년에 개봉한 미하일 칼라토초프의 는 그러한 점에서 흐루시초프 체제의 해빙을 알리며 소련 영화의 국제적 성공을 시작하는 영화로 꼽힌다.&nbsp;특히 1962년 제작된 SF 컬트 영화 이 그 일례라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제작되던 역사, 문학 관련 작품들 역시 성행하였는데, 주요 소재는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1940년대와는 다르게 이 당시 전쟁을 묘사한 작품들은 국민 선동과 이데올로기적 요소에서 탈피해 보다 사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그리고리 추흐라이의 1959년 작품인 로, 이 영화의 줄거리는 전쟁 중 포상으로 휴가를 받게 되자 고향으로 잠깐 돌아가 어머니를 뵙고자 하는 병사의 이야기이다. 예술 영화의 거장인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이반의 어린 시절로 데뷔한 것도 이 시기이다. 그러나 브레즈네프가 집권한 이후로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처럼 가혹한 탄압을 받은 사례도 있다.&nbsp;당시의 소련 영화는 비교적 값 싼 영화관람료로 시간을 때우기 족하다는 이유도 있기 때문에 대단히 높은 관객수를 기록했는데 TV보급 등의 이유로 영화관객들이 줄어들기 시작한 1960년대와 70년대에도 관객수 1,500만명 이상을 동원하지 않으면 흥행실패작으로 간주될 정도였다.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는 20회 정도로 세계 수위권을 다투웠으며 그 영향으로 영화관객수가 세계 1위, 참고로 소련의 연간 영화 관객수가 40억명 가량 기록했다. 전 세계 영화관의 절반 이상이 소련에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소련의 경쟁국이었던 미국은 물론이고, 중국과 인도보다도 영화관이 더 많았다는 얘기다. 그 만큼 당시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함하는것이 당대 소련인들 사이에서 여가생활을 즐기는데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이다.&nbsp;물론 1980년대 이후로 관객수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들었기는 했지만 소련의 붕괴 이전까지도 다른 국가들에 비해 거대한 영화 시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할리우드 영화계에서는 소련이 영화 시장을 개방한다면 수익을 거하게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12 Jul 2026 13:33:0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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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26.7.11《존재는 안정을 향하는가, 조화를 향하는가》</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59</link>
			<description><![CDATA[&nbsp;&nbsp; 《존재는 안정을 향하는가, 조화를 향하는가》&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조율여백 이수진― 이중진자의 프랙털 구조를 통해 바라본 존재론적 가설&nbsp;―물(에너지)은 물길(구조)따라 흐른다오랜 시간 인간과 자연을 함께 관찰하며 하나의 가설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출발점은 철학이 아니라 물리학이었습니다.이중진자(Double Pendulum)의 운동을 연구한 자료를 살펴보던 중, 초기 조건을 매우 미세하게 변화시키며 운동의 결과를 시각화한 프랙털 지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물리 법칙 아래에서도 극히 작은 초기 조건의 차이가 전혀 다른 운동을 만들어 내는 모습은 카오스 이론을 대표하는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러나 제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혼돈 자체가 아니었습니다.혼돈 속에서도 형태를 유지하는 안정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그 순간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39;혹시 존재 역시 이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39;물론 이것은 물리학을 존재론으로 치환하려는 주장이 아닙니다. 원자는 양자역학으로, 행성은 중력으로, 은하는 천체물리학으로 설명됩니다.&nbsp;각각은 서로 다른 법칙과 범위를 가지며, 이중진자의 운동이 곧 우주의 구조를 설명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제가 주목한 것은 법칙의 동일성이 아니라 구조의 유사성입니다.자연은 규모와 대상이 달라져도 반복적으로 안정과 변화,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는 구조를 보여 줍니다. 저는 이러한 반복적 구조를 하나의 메타적 추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자 합니다.존재는 저마다 다른 안정 영역을 가진다.프랙털 지도에서 가장 넓게 나타나는 중심 영역은 하나의 안정된 상태를 보여 줍니다.이를 바라보며 저는 모든 존재는 저마다 다른 안정 영역을 가진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어떤 존재는 작은 변화에도 쉽게 흔들리고, 어떤 존재는 커다란 변화 속에서도 균형을 유지합니다.결국 안정은 절대적인 크기가 아니라 각 존재가 지닌 고유한 범위일 수 있습니다.인간 역시 자신만의 안정 영역 안에서 사고하고, 행동하며, 삶을 이어 갑니다.B 단절된 안정프랙털에는 중심과 분리된 작은 안정 영역도 존재합니다.그 내부에서는 매우 안정적이지만, 전체 구조와의 연결은 제한적입니다.저는 이 모습을 하나의 존재 유형에 대한 은유로 바라봅니다.자신의 질서와 체계는 완벽하게 유지하지만, 외부와의 공명과 조율은 점차 사라지는 존재입니다.겉으로는 매우 안정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안정이 타인과 환경을 배제하거나 소비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면, 그것은 공존을 위한 안정이 아니라 단절을 위한 안정일 수도 있습니다.C 흔들림을 수용하는 안정반대로 또 다른 안정 영역은 혼돈의 경계와 끊임없이 맞닿아 있습니다.이곳은 완전히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변화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며 외부와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합니다.저는 이러한 영역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존재는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며, 자신과 환경을 함께 조율할 가능성을 가집니다.공존은 완벽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혼돈은 더 큰 질서의 일부일 수 있다.여기에서 제 생각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많은 사람들은 안정과 혼돈을 서로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합니다.그러나 저는 혼돈 역시 더 큰 질서 속에 포함된 하나의 과정일 가능성을 생각합니다.우리가 불안정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단지 더 큰 순환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파도는 끊임없이 흔들리지만 바다는 유지됩니다.심장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진동하지만 생명은 그 리듬 속에서 지속됩니다.행성은 공전과 자전을 반복하며 균형을 이루고,은하는 회전 운동을 통해 장대한 구조를 유지합니다.자연은 멈추어 있기 때문에 안정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안정을 유지합니다.그렇다면 존재 역시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완전한 정지는 생명이 아니라 멈춤이며,완전한 고정은 발전이 아니라 소멸일 수도 있습니다.오히려 존재는 변화와 흔들림을 통해 스스로를 조율하며 더 큰 균형을 향해 나아갑니다.존재는 안정을 추구하는가, 조화를 추구하는가.저는 존재의 궁극적인 방향이 단순한 안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안정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존재가 향하는 것은 조화입니다.조화란 변화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변화 속에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 상태입니다.다양한 존재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함께 유지되는 과정이며, 질서와 혼돈이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순환 속에서 서로를 완성하는 상태입니다.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글은 새로운 물리학 이론을 제안하려는 것이 아닙니다.또한 이중진자의 운동이 인간 사회나 우주의 구조를 직접 설명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제가 제안하는 것은 자연이 보여 주는 구조를 하나의 메타적 사유의 틀로 삼아 존재를 이해해 보려는 철학적 가설입니다.만약 자연이 다양한 규모에서 안정과 변화, 질서와 혼돈이 공존하는 구조를 반복적으로 보여 준다면, 인간과 사회 역시 그러한 관점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nbsp;그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합니다.결국 존재는 고정된 완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과 타자, 그리고 환경을 함께 조율하며 더 큰 조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이것이 지금까지 자연을 관찰하며 제가 조심스럽게 품게 된 존재론적 가설입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Sat, 11 Jul 2026 20:34:5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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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지아 서부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인들의 역사</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58</link>
			<description><![CDATA[조지아 서부 지역과 가장 큰 도시인 바투미를 장악하고 있는 아자리야 자치공화국의 주민 중 대부분이 아자리야인이다. 조지아 서부 지역에 대해 고고학자들이 말하길 서부 지역에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했다 하였다. 이 지역을 과거에 모스흐(Moskh)라 불렸는데 이 지역운 고대 조지아 부족이 출현함으로써 B.C 7~3세기에 아자리야의 땅은 고대 콜키스의 지방이 되었다. 그 지역의 일부는 B.C 4세기 후반에 이베리아 왕국에 속하는 나라를 형성했다. B.C 5, 4세기에는 그리스인에 의해 식민지화되어, 해안의 아자리야는 후일에 로마가 통치하게 된다. 바투미와 고니오는 그 당시에 주요 도시들이었고 요새들이었다. 이 두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은 오늘날 코불레티 마을 근처에 있는 피츠바리 마을의 부유했던 흔적을 드러냈다. 서기 2세기에, 바투미는 카프카스 남쪽을 방어하는 로마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였다. 11세기 초에, 아자리야는 통일 조지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고 11세기 말에는 셀주크투르크 제귝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13세기에는 몽골에 의해 파괴되었다.&nbsp;조지아의 자치공화국인 아자리야 자치공화국(Autonomous Republic of Adjara)의 국기, 출처 : Wikipedia, Flag of Adjara1547년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아자리야를 공격했고 바투미를 점령했다. 당시 아자리야인의 일부는 다른 조지아 지역들로 피신했다. 남아있던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이슬람교로 개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아자리야의 소작농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상당히 안정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1853~1856년에 크림 전쟁과 1877~1878년에 러시아-오스만의 전쟁 기간동안에, 수천 명의 아자리야인들이 오스만 제국의 군대에 의해 징병되면서 러시아와 맞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에게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자리야를 러시아 제국에 양도했다. 아자리야 지역은 러시아 통치 하에 들어가면서 정교 중심의 러시아인들은 이슬람교를 압박했고, 수천명의 무슬림인들이 피난처를 찾아서 카프카스 지역 각지에 흩어졌으며 남은 아자리야 무슬림들은 적법한 이주 절차를 통해 바투미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했다. 오스만 제국은 아자리야인들에게 자금을 조달하고 복수자들이라고 알려진 테러 조직을 이용해 러시아 장교와 공무원 뿐만아니라 제국 주둔에 동참했던 아자리야인들까지도 테러를 가해 죽이려고 했다.&nbsp;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아자리야인들은 지배자들인 러시아에 충성했고 그럼으로 인해 그들은 다른 조지아들과 재통합 될 수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878년 베를린 의회는 바투미 지역의 수도를 포르투 프랑코 또는 자유 무역항으로 공표했다. 포르투 프랑코는 1880년대 말, 무렵에 중요한 항구 및 공업 도시가 되었으며 20세기에 들어서, 포르투 프랑코는 바투미로 이름이 바뀌고 바쿠의 석유 생산지와 최초의 송유관 중에 하나인 바쿠-바투미 송유관과 철도로 연결되었다. 이로써 바투미는 유럽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에 한 곳이 되었다. 이는 1892년 6월 22일에 거대한 유조선 "마루크스"가 바투미를 떠나 태국의 방콕으로 갔고, 이 유조선이 수에즈 운하를 항해한 최초의 유조선이 되었다. 이 지역에서 카프카스와 카스피해를 이어주는 회랑은 러시아 통치 하에서 무수한 파업들과 유혈 탄압이 자행되었다. 이는 차르가 노동자들을 착취한다 생각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차르의 탄압을 피해 카프카스 일대로 숨어 들어오면서 아자리야 일대는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해 유전에 취업한 현지 노동자들을 선동했던 것이다.&nbsp;그러면서 차르의 탄압을 받은 아자리야 노동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에 상당수의 무하지르(Muhazir)들은 오스만 군 소속 부대에 들어가면서 러시아와 싸우게 된다.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도중,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행정부는 반항적이며 후일 통제가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은 무슬림들을 바투미 지역에서 내부 러시아로의 강제 이주 절차를 시작했고, 이에 조지아의 지성인들은 그러한 강제 이주에 대하 항의를 표시했다. 러시아 두마에서 조지아 지역을 담당하는 의원들은 아자리야인들이 이슬람교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으로는 조지아인들이며 그러므로 러시아에 충의가 있는 무슬림들은 러시아 내부가 아니라 아자리야 지역에 그대로 잔존해야 한다고 공언했다. 조지아 소속 두마 의원들의 항변에 대한 결과로 인해 러시아의 게오르게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무슬림에 대한 인구조사를 주재했고 그 아자리야인들은 러시아 정치 제도에 적의가 없다는 수많은 보고들로 결말을 지었다. 아자리야인들의 불충을 탄원한 코사크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은 크게 비난을 받았고 지방 무슬림들은 폭력적인 대결을 부추기는 그들을 고발했다.&nbsp;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아자리야 지도자들과 회담하자고 설득했고, 회담을 하는 도중 그들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판결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1918년 1월에 끝나기 전까지는 아자리야인들의 반역을 의심하는 인구조사는 종결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러시아 군대가 철수함에 따라 1917년 12월 18일의 휴전에 이어졌고, 1918년 4월 14일에는 오스만 제국의 제37기 카프카스 부대가 바투미에 입성하면서 아지리야의 영토는 다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1919년 1월 12일에 영국에서 원정군이 오스만 제국의 병력들을 대신하여 바투미에 상륙했다. 그러면서 러시아 제국 의회의 입헌민주당 페트르 마스로프(Петро Масров)가 의장을 맡은 바툼 지역 의회에서는 1918년 12월 21일부터 1919년 4월 28일까지 아자리야에 대한 통치 권한이 일시적으로 주어지게 된다. 1918~1919년에 메흐메트 아바시제(Мехмет Абашидзе)가 회장으로 있는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Исламский комитет освобождения Грузии)는 조지아 국경 내부에 있는 종교적 방침에 있어서 자치권이 성립 되었음을 반복적으로 증명했다.&nbsp;이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대부분이 아자리야 무슬림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여기에 라즈인들도 합류했다. 이슬람 조지아인 해방 위원회는 1919년 9월 13일 러시아 지방 자치단체의 기본형 의회로 알려진 매질리스(Mezilis)를 바투미에서 소집시키고 타 조지아 지역은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실질적 지배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하게 되고 아자리야 지역만은 조지아계 무슬림들이 지배할 수 있게 허가했다. 이와 같은 아바시제의 당파는 아자리야의 자치권만이 문제가 아닌, 완전한 독립에 대해 추진하고 있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조지아 민족과 친한 아자리야인들, 특히 조지아 정교회 소속의 아자리야인들이 먼저 자리잡고 있을지라도 이들은 조지아와의 통합을 옹호했다. 사실 오스만 제국과의 통합이 불투명한 이상, 그래도 러시아가 지지하는 조지아인들이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보다 더 낫다는 아바시제의 생각이었다. 그 이유는 아르메니아가 터키계 무슬림들을 학살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는 아자리야 입장에서 최선의 선택이기도 했다.&nbsp;이들 중 실제 터키계 아자리야인들은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라는 단체를 설립해 범투르크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영국이나 아르메니아를 상대로 게릴라 전을 펼치기도 했다. 세다이 밀레스(Sedai Miles)는 터키어로 "사람들의 목소리(Insanların sesleri)" 라는 뜻이다. 이들의 게릴라 전과 더불어 오스만 군대와 아제르바이잔인들도 세다이 밀레스를 지원하자 수세에 몰린 영국군 1919년 8월 15일에, 카프카스 일대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바투미의 분할된 본부는 바투미의 군사 지배권을 쿠키 콜리스(Kuky Colis)라는 자에게 넘겨주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났다. 1920년 3월 4일에 총독이자 군사령관에 임명된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에서 아자리야 군대를 포함한 조지아 전 군대의&nbsp;내부 동맹을 명령했다. 그러나 아자리야 내에서 반발이 거세자 1920년 7월 14일에 그 군대는 바투미에서 완전히 해체되었고 쿠키 콜리스는 바투미를 떠나 트빌리시로 이동했다. 이어 아르메니아 행정부는 7월 20일에 아자리야 지역을 조지아에게 양도하면서 이 지역에 대해 완전히 손을 땠다. 이어 러시아의 적백내전에 카프카스 지역이 휘말리게 되면서 볼셰비키 일원들이 조지아에 들어오게 되었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11 Jul 2026 15:57:5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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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지하자원, 수력자원, 인구 수, 넓은 경지 면적에 세계적인 쌀 수출국인 태국, 어쩌다가 후진국 &amp; 개발도상국이 되었나?</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57</link>
			<description><![CDATA[태국은 인지도 면에서 베트남과 함께 인도차이나 반도의 투톱이다. 전통적으로 말레이시아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지역의 맹주 역할을 해왔으나, 말레이시아의 미칠 듯한 고속성장과 엄청난 수의 인구를 앞세운 인도네시아가 G20에 진입하면서 이들보다 발전 가능성이 떨어진 상황에 있다. 그러나 여전히 주변국인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에 미치는 문화적, 경제적 영향이 크다. 지리적으로 봐도 내륙국인 라오스, 소국인 캄보디아, 말라카 해협으로 인해 왠지 고립되어 보이는 미얀마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이들 나라들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nbsp;태국 방콕의 후아이쾅(Huai Khwang) 구역(소이 순비자이)에 위치한 국내외 환자들이 많이 찾는 대형 사립 병원인 방콕 병원 본원(Bangkok Hospital Headquarters) 주변의 풍경의 빈부격차를 확인할 수 있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당연히 역사상 이들 인접국가와 늘 대립과 동맹을 반복했던 관계였는데, 1767년 콘바웅 왕조가 당시 태국에 있던 아유타야 왕조를 멸망시키면서 더더욱 관계가 악화되었다. 물론 지금은 경제적 격차로 인해 역으로 태국인들이 미얀마인들을 크게 압도하는 상황에 있다. 태국은 지하자원, 수력자원, 인구 수, 넓은 경지 면적에 세계적인 쌀 수출국일 정도로 동남아시아의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를 자랑하고 있다. 나라가 잘 살게 될 주요 기반 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모두 완비가 되어 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런데 태국이 왜 지금과 같이 후진국, 혹은 개발도상국의 상태로 되어 있는가?태국은 우리나라 조선보다 먼저 나라를 개방했다. 아유타야 왕조부터 외국과의 교류를 활발히 했고 외국인의 경우 아유타야에 거주할 시 국왕의 친위군으로 병역에 임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아유타야에서는 외국인의 정계진출이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다. 개방정책은 계속되어 17세기 중반 나라이 왕 때는 그리스계 영국인 콘스턴틴 풀콘(Constantine Phaulkon; 1647~1688)이 고위직에 오르고, 프랑스에 친선사절을 보냈으며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와도 친하게 지냈다. 당시 프랑스 및 서양 세력과 평화적으로 대등하게 교역한 나라는 태국이 유일했다.&nbsp;짜끄리 왕조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 시대에는 재임 기간 동안 태국의 현대화와 개혁정책을 패기 있기 몰아붙였다. 1905년에 노예제를 폐지하고, 교통망과 법체계를 선진화하는 등 빠른 속도로 근대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개혁적 성격은 그가 서구식 교육을 완전하게 이수한 최초의 태국 국왕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반면 당시에 우리는 일본의 침략이 가시화되고 을사늑약이 이루어져 나라의 주요 중요한 부분들이 일본에게 침탈당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이는 철저히 비교가 된다. 라마 5세의 개혁적 추진이 쏟아지며 제도적으로는 추밀원과 내각평의회, 재무부를 신설했고 국가 제도를 비롯한 문화에 이르기까지 서구적인 개혁을 선호하면서 왕자들에게는 정부의 요직을 맡기는 동시에 유럽 파견을 통해 선진 제도와 문화를 도입했다.전임 왕이었던 라마 4세는 라마 3세가 전쟁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처럼, 외세의 침입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쪽을 택했다. 당시 위협적인 두 국가는 프랑스와 영국이었는데, 이 둘 사이에서 대나무 외교를 펼쳤다. 과거 루이 14세부터 이어져 온 프랑스와의 관계로 인해 친숙한 국가라고 생각했던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베트남을 합병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만들자 태국의 입장에서 프랑스는 가장 위협적인 국가가 되었다. 이런 프랑스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미얀마를 영국령 인도로 편입하는 작업을 하고 있던 영국을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아 1896년에 영국-프랑스 양국 간의 조약에 따라 독립을 지키게 된다. 이러한 라마 5세의 현명한 대나무 외교가 태국을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가 되지 않는 국가로 만들었던 것이다.&nbsp;당시에 태국은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 놓일 정도로 발전한 국가였다. 1910년에 라마 5세가 죽은 뒤 라마 6세가 즉위했지만, 그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고 사치와 낭비만 일삼아 아버지 라마 5세가 어렵게 일구어 놓은 국가에 재정적자를 안겼으며 국고가 비어 있게 됨에 따라 태국 짜끄리 왕조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925년에 등극한 라마 7세는 영국 이튼스쿨 출신에 프랑스 군사교육까지 받은 엘리트였으나 국정 수행능력은 미흡했기에 그 또한 문제가 많았다. 그러는 사이 1929~30년에 세계적인 대공황이 발생해 태국 경제는 파탄에 놓이게 되고 전인 라마 6세의 사치와 방탕으로 인해 탕진한 국고는 회복 불능에 놓이게 되었으미 라마 7세의 무능은 국민들의 분노를 부추겼다.&nbsp;그리고 그 영향은 군부에까지 미치게 되었는데 1932년 피분 송크람에 의해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시암 혁명"이라는 사건으로 태국 역사상 최초의 군부쿠데타로 인식되었다. 국왕의 무능과 사치 및 방탕, 그리고 잦은 군부의 불만에 이은 쿠데타, 그러면서 발생한 부정부패, 피분 송크람의 전제적인 철권 군사 독재, 외교에서의 독선으로 인해 독일, 일본의 편을 들었고 패전국의 멍에는 면했지만 태국은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다. 게다가 라마 8세가 1946년 피격당해 사망하면서 국가의 혼란은 가중된다. 송크람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지만 6.25 전쟁 참여를 명분으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것에 성공했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의 원조는 부정부패를 더욱 키웠고 송크람 내각은 부정선거로 다시 당선되면서 나라의 혼란은 지속된다. 이후 베트남 전쟁 등으로 동남아에 공산화 위협이 계속되자 1971년부터 반공독재가 행사되어 태국은 최악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nbsp;한편 1968년부터 시작된 대학가 민주화 시위는 1971년 비상사태 선포 후 1973년에 가장 격화되었다. 그렇게 해서 결성된 새 민주정부 총리에 탐마삿 대학의 법학 교수인 '산냐 탐마삭'이 임명되었지만 역시 운동권과 정치 행정 수행 능력은 별개라는 말이 정확했을 정도로 그는 행정력에 있어 매우 무능했다. 군부가 물러간 후 민간정부가 들어서서 관광을 비롯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1980년대 태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경험한다. 엔고로 일본 제조업체들이 노동력이 저렴한 태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태국의 수출은 급속히 증가한다. 1985년과 96년 사이 태국 경제는 세계 최고 수준인 연평균 9% 성장률을 보였다. 경제 성장으로 방콕에 중산층이 늘어나 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지만, 농촌 특히 북동부 지방과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수도 방콕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 지역은 가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된다. 이것은 이후의 정치적 불안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가 닥치자 지난 20년 가까이 지속된 경제성장이 갑자기 멈춰섰다.&nbsp;저임금으로 투자를 유치했지만 태국 경제의 경쟁력은 여전히 낮아 90년대 중반 다국적 기업들이 급속한 산업화를 시작한 중국으로 이동하자 태국 경제는 추락하기 시작한다. 바트화 가치가 폭락하고 기업과 금융기관의 연쇄 부도로 실업률이 급증한다. 한편 정계는 민주주의 도입에도 불구하고 정관유착과 부패로 인해 태국은 마침내 회생불능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이러한 경제 침체가 계속되고 있다. 이것을 타계하고 태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이끌어 갈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매우 치명적이다. 민주진영에도, 군부에도 그러한 리더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라마 5세와 같은 확고한 의지와 카리스마를 가진 국왕도 없다. 리더가 없다는 것, 그 리더의 소중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나라가 바로 태국이다. 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모두 갖추고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정치와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는 리더가 없기에 태국이 여전히 후진국 & 개발도상국으로 남아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국은 라마 5세와 같은 인물, 혹은 라마 5세의 재림을 원하고 있다.&nbsp;그런 리더가 없음을 우리도 같이 체득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태국보다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지는 못하고 그 한계에 직면하고 있다. 발전된 IT 산업 등, 여러 기관 산업과 반도체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거나 조금의 성장률을 갖추고 있지만 이를 끌어갈 수 있는 리더가 없다면 우리도 태국 같이 추락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11 Jul 2026 15:55:2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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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04괘 山水蒙</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47</link>
			<description><![CDATA[﻿제04괘 山水蒙 - 산 아래 샘물, 어리석음 속에 숨은 무한한 가능성의 때☶ 상괘 : 산 (艮山)☵ 하괘 : 물 (坎水)“산은 그치고, 샘은 흐른다. 그 흐름을 따르는 자에게 길이 열린다.”&nbsp;1. 卦象의 서사&nbsp;산 아래 갇힌 맑은 샘물, 안개를 깨고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는 배움의 여정&nbsp;거대한 바위산 아래, 험한 계곡 속에 맑고 어린 샘물이 갇혀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서성입니다.&nbsp;눈앞은 짙은 안개로 가득하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무지몽매한 상태(蒙)가 눈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은 이 어둠 속에서 도리어 눈부신 형통함(亨)의 씨앗을 봅니다. 산기슭의 작은 샘물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흘러 마침내 거대한 강과 바다를 이루듯, 무지함이란 곧 무한한 성장 가능성을 품은 태초의 순수함이기 때문입니다. 이 괘는 우리에게 오만을 버리고 어린아이의 겸손함으로 참된 스승을 구하며, 바위를 깎아 길을 내는 샘물처럼 과감하게 실행하라는 위대한 깨달음을 건넵니다.&nbsp;2. 주역 본문과 해석&nbsp;卦辭 (괘사)蒙 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初筮告 再三瀆 瀆則不告 利貞&nbsp;(어릴 몽蒙, 아닐 비匪, 점칠 서筮, 알릴 고告, 더럽힐 독瀆)• 몽 형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초서고 재삼독 독즉불고 이정•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를 구함이니, 처음 점치거든 알려주고 두번 세번 하면 더럽히는 것이다. 더럽힌즉 알려주지 말지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해석: 몽의 상태는 도리어 형통함으로 나아가는 문입니다. 다만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 어린아이를 찾아 구걸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갈망하는 어린아이가 진심으로 스승을 찾아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처음 물을 때는 성심으로 답하되, 의심하여 두 번 세 번 점을 치는 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이니 더는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바름을 지키며 끈기 있게 따르는 것만이 어둠을 걷어내는 배움의 길입니다.彖傳 (단전)彖曰 蒙 山下有險 險而止 蒙 蒙亨 以亨行時中也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志應也 初筮告 以剛中也 再三瀆 瀆則不告 瀆蒙也 蒙以養正 聖功也(단왈 몽 산하유험 험이지 몽 몽형 이형행시중야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지응야 초서고 이강중야 재삼독 독즉불고 독몽야 몽이양정 성공야)• 단에 가로되 산 아래 험한 것이 있고, 험해서 그치는 것이 蒙이라. '몽형'은 형통함으로써 행함이니 때로 中함이요, '비아구동몽 동몽구아'는 뜻이 응함이요, '초서고'는 강'剛' 하고 가운데 함으로써요, '재삼독 독즉불고'는 몽을 더럽히게 됨이니, 몽으로써 바른 것을 기름이 성인이 되는 공이니라.• 해석: 산 아래 험함이 가로막고 있어 갈 바를 모른 채 멈추어 있는 것이 바로 몽의 실상입니다. 그러나 무모하게 돌진하지 않고 산처럼 후중하게 머물러 올바른 가르침을 기다리는 것은 시의적절한 중용의 도리(時中)입니다. 스승과 제자의 지극한 마음이 서로 바르게 응할 때(志應), 그리고 그 어리석음의 시기에 순수한 바름을 기를 때(蒙以養正), 비로소 무지의 껍질을 깨고 성인의 위대한 공덕으로 나아가는 성장이 시작됩니다.&nbsp;大象傳 (대상전)象曰 山下出泉 蒙 君子以 果行育德&nbsp;(샘 천泉, 결단할 과果, 기를 육育)&nbsp;• 상왈 산하출천 몽 군자이 과행육덕&nbsp;• 상에 가로되 산 아래 샘이 솟아나는 것이 몽이니, 군자가 이로써 과감히 행하며 덕을 기르느니라• 해석: 거대한 바위산 아래에서 맑고 여린 샘물이 솟아나는 상입니다. 이 상을 마주한 창작자이자 군자는, 여린 물줄기가 바위를 깎아내며 결국 길을 찾아내듯 해야 할 일은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기고(果行), 산의 묵묵함과 두터움을 닮아 내면의 정신과 덕성을 깊이 있게 길러내야 합니다(育德).&nbsp;3. 6효의 효사와 해석&nbsp;初六 發蒙, 利用刑人 用說桎梏 以往吝&nbsp;(형벌 형刑, 벗길 탈說/脫, 차꼬 질桎,&nbsp; 수갑 곡梏)• 초육 발몽, 이용형인 용탈질곡 이왕인• 초육은 몽을 발육하되 사람에게 형벌을 쓰고 질곡을 벗김이 이로우니 형벌로써만 해나가면 인색하리라&nbsp;• 해석: 이제 갓 어리석음을 깨우치는 초기 단계입니다. 나쁜 습관에 물들지 않도록 엄격한 법도와 질서로써 다스려야(利用刑人) 비로소 무지의 족쇄(질곡)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엄격하게만 하면 비록 두려워하여 따르는 듯 하나, 마침내 참다운 교육 성과를 거둘 수 없게 됩니다.(以往吝)九二 包蒙 吉 納婦 吉 子克家&nbsp;(쌀 포包, 들일 납納, 지어미 부婦, 다스릴 극克)• 구이 포몽 길 납부 길 자극가• 구이는 몽을 감싸면 길하고, 지어미를 얻으면 길하리니, 자식이 집을 다스리도다.• 해석: 스승이자 강건한 지도자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이들의 허물을 너그럽게 감싸 안으니 길합니다. 이는 마치 집안에 어진 아내를 맞아들이는 것과 같고, 훌륭한 자식이 능히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것과 같으니 조직과 가정이 두루 화합하고 번창하게 됩니다.&nbsp;六三 勿用取女 見金夫 不有躬 无攸利( 취할 취取, 몸 궁躬)• 육삼 물용취녀 견금부 불유궁 무유리• 행실이 나쁜 여자는 취하지 말라, 돈있는 사내를 보고 몸을 두지 못하니 이로울 바가 없느니라.• 해석: 이런 자는 아내로 맞이하거나 동반자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지조를 버린 채, 돈 많은 남자(金夫)라는 눈앞의 화려한 권력과 재물에 눈이 멀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니 그 어떤 일도 이로울 바가 없습니다.• 六三은 음으로서 陽자리에 있어 正도 아니고, 中도 아니어서 성품이 동하기를 좋아하는 몽매한 여자이다.六四 困蒙 吝&nbsp;(곤할 곤困)• 육사 곤몽 인• 육사는 곤궁한 몸이니 인색하도다.• 해석: 주변의 현명한 조력자나 올바른 스승을 멀리한 채, 홀로 고집과 편견의 동굴에 갇혀 있는 가장 위태롭고 답답한 상태입니다. 눈과 귀를 닫아버린 독선적 무지함은 결국 인색함과 곤궁함이라는 부끄러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육사는 제 자리를 얻고 있으나 초육과 응하지 못하고 양효인 九二 , 上九하고도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곤궁한 처지이다.六五 童蒙 吉&nbsp;• 육오 동몽 길• 육오는 어린 몽이나, 길하리라.• 해석: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겸손한 무지함이니 길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때 묻지 않은 마음으로 스승의 지혜를 경청하고 흡수하니, 진정한 깨달음과 성장의 정점에 오르게 됩니다.• 六五는 지존의 자리에 中을 얻고 있으나 음효로 유약하기 때문에 아래의 강명득중한 九二에 순응하여 그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上九 擊蒙 不利爲寇 利用禦寇&nbsp;(칠 격擊, 도적 구寇, 막을 어禦)• 상구 격몽 불리위구 이용어구)• 상구는 몽매함을 깨는 것이니 도적 다루듯 하면 이롭지 아니하고 도적을 막는 듯해야 이로우니라• 해석: 어리석음을 깨뜨리기 위해 과감하고 강한 충격(회초리)을 주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강함은 상대를 해치고 군림하려는 도적의 짓(위구)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직 내면의 무지와 사악함이라는 도적을 막아내기 위한 자비롭고 정의로운 방어(어구)여야 합니다.&nbsp;4. 역사적 득괘 사례왕망(王莽)의 한나라 사직 찬탈과 몰락의 경고&nbsp;전한(前漢) 말기의 정치가 왕망은 겉으로는 정통 유학자를 자처하며 온 천하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거대한 권력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황제들을 연이어 독살하고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뒤, 마침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자신의 새로운 왕조인 '신(新)'나라를 선언하는 쿠데타를 감행하려 했습니다.&nbsp;이 거대한 인위적 찬탈을 실행에 옮기기 직전, 엄숙한 점상 앞에서 그가 얻은 점괘가 바로 '산수몽괘'였습니다.&nbsp;• 안개에 눈이 먼 무지 (蒙者昧也): 왕망은 자신이 성인(聖인)의 이상 정치를 부활시킨다고 착각했으나, 실상은 끝없는 탐욕의 안개에 눈이 멀어 천명과 순리를 분간하지 못하는 극도의 무지몽매한 상태(昧)였습니다. 산 아래의 맑은 샘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할 물길을 거스르고, 억지로 천명을 위조하여 황제의 자리를 훔친 것입니다.• 제자리로 돌아온 파멸 (回還反覆): 왕망은 황제에 오른 후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무리한 제도 개혁을 강행했고, 이는 온 천하를 굶주림과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점사의 예언대로 그의 인위적인 정치는 '빙빙 돌아 결국 제자리로 오듯' 급격히 붕괴했습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의 후손인 광무제 유수가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신나라를 무너뜨리고 한나라 사직을 재건(후한 중흥)함에 따라, 왕망은 잔인하게 살해당하며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습니다.왕망의 서사는 올바른 도리와 스승을 구하지 않고 신성함을 모독하며(再三瀆), 화려한 권력만을 쫓아 중심을 잃은 자(勿用取女 見金夫)가 마주하게 될 참혹한 대가를 보여주는 몽괘의 준엄한 역사적 실증입니다.&nbsp;5. 실천적 교훈 (占辭 비결)&nbsp;산수몽괘의 비결 점사는 마음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고 번민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실천의 지혜를 가르칩니다.&nbsp;蒙者昧也 山下有泉 回還反覆 迷悶相連 多憂過失 病患相纏 欲進欲退 疑惑不前&nbsp;몽자매야(蒙者昧也)에 산하유천(山下有泉)이라.&nbsp;몽이란 어리석음을 말함이요, 산 아래 샘물이 있음이니 그 물이 바다로 꾸준히 흘러내려가는 것과 같이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릅쓰고 해야 할 일을 행함이라.&nbsp;회환반복(回還反覆)하니 미민상연(迷悶相連)이라.&nbsp;산골짜기 흐르는 물이 흐르지 못하고 뱅뱅돌아 다람쥐 챗바퀴 도는 형국과 같이 생각이나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니 미혹한 번민이 연달아 일어 나느니라.&nbsp;다우과실(多憂過失)에 병환상전(病患相纏)이라.&nbsp;근심은 많고 짐도 무거우며 병환은 서로 얽히고 섥히며.&nbsp;욕진욕퇴(欲進欲退)에 의혹부전(疑惑不前)이라.&nbsp;욕심으로 나가고 욕심으로 물러서려 하니 의혹되어 한 발자욱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구나.&nbsp;다시 말해 내가 왜 이렇게 되었나 하고 하늘 보고 탄식하게 된다.&nbsp;1. 의혹을 멈추고 마음을 비워라 (疑惑不前의 극복):&nbsp;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때 갈까 말까 망설여지고 번민이 이어지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은 산 아래 갇힌 샘물처럼 잠시 걸음을 멈추고(險而止),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참된 지혜가 들어옵니다.2. 화려한 가짜에 영혼을 팔지 말라 (勿用取女의 경계): 당장 눈앞에 보이는 화려한 트렌드, 정당하지 않은 가벼운 이익(見金夫)에 흔들려 창작과 인생의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순리를 무시하고 인위적으로 조작하려 했던 왕망의 오만함은 결국 큰 우환과 과실(多憂過失)로 돌아올 뿐입니다.3. 샘물처럼 과감하게 실행하라 (果行育德의 실천): 올바른 스승과 고전의 지혜를 통해 가야 할 방향을 찾았다면, 그때부터는 단단한 바위를 뚫고 전진하는 여린 샘물의 기상으로 과감하게 행동해야 합니다(果行). 매일 묵묵히 써 내려가는 한 줄의 글, 하나의 실천이 모여 결국 혼돈의 안개를 깨고 거대한 바다에 닿게 할 것입니다.&nbsp;6. 현대인에게 주는 메시지"모르는 것은 무능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눈부신 시작이다."1등과 최고만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늘 '다 알고 있어야 한다'며 조급함을 채찍질합니다. 그러나 산수몽괘는 우리에게 "아직 모르는 어린아이의 상태(童蒙)야말로 가장 안전하고 크게 형통할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라는 위로를 건넵니다.&nbsp;정말 위험한 것은 왕망처럼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오만하게 순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인생의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껴진다면, 조급하게 달리는 것을 멈추고 내 안의 어린아이를 깨우십시오. 겸손하게 지혜를 구하고, 날마다 샘물처럼 과감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면 , 당신을 가로막은 거대한 바위산은 어느새 당신의 서사를 단단하게 키워준 고마운 요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안개가 걷힌 그곳에, 당신이 꿈꾸던 거대한 바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nbsp;]]></description>
			<author>공형일</author>
			<pubDate>Sat, 11 Jul 2026 09:21:34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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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장편소설_칸첸중가_010_팔루트</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56</link>
			<description><![CDATA[&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로에리치 그림_ Remember! 1924장편소설_칸첸중가_010_팔루트.8시쯤 팔루트를 향해 떠났다.&nbsp;뒤따라온 일본 청년들이 앞질러 갔다.&nbsp;그들의 뒤를 놓치지 않으려니 땀이 나도록 열심히 걸어야 했다.&nbsp;산등성이 길은 완만했다.&nbsp;심한 비탈은 거의 없었다.&nbsp;응달진 곳에서는 잔설(殘雪)을 밟고 걸었으며 때로는 옆으로 자란 랄리구라스 숲 사이를 걸었다.&nbsp;우리나라 철쭉이나 진달래와 흡사한 네팔의 나라꽃인 랄리구라스는 이제 막 봉우리를 맺기 시작했지만,&nbsp;하얀 눈꽃이 붙어 있기도 했다.&nbsp;바람이 불고 구름이 흩어지면서 황량한 고원지대의 전모가 드러나고,&nbsp;그 너머로 구름에 휩싸인 칸첸중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nbsp;곧 앞서간 일본 청년들도 시야에 들어왔다.그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었다. &lsquo;하이&rsquo;라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던 길을 가려고 몇 발 내디뎠을 때,&nbsp;한 청년이&nbsp;&lsquo;잠깐&rsquo;이라고 말했다.&nbsp;내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자,&nbsp;그는&nbsp;&lsquo;셔터 좀 눌러 줄 수 있겠냐&rsquo;고 물었다.&nbsp;나는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nbsp;그는 내 손에 카메라를 건네기 전에 셔터의 위치를 알려 주려고 했지만,&nbsp;내가 그 카메라를 보고&nbsp;&lsquo;니콘&nbsp;F2&rsquo;라고 말하자 그는 내가 그 카메라를 써 봤음을 알아차리고 싱긋 웃었다.&nbsp;고원 너머로 보이는 칸첸중가의 모습은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었다.&nbsp;카메라를 건넨 청년이 동료들 곁으로 가서 선 그 짧은 사이에도 바람이 불고 구름은 움직여서 칸첸중가의 모습에 신비스러운 변화를 주고 있었다.&nbsp;나는 일단 그의 부탁대로 셔터를 한 번 눌렀다.&nbsp;그리고 한 두 장 더 찍어도 되냐고 그들을 향해 물었다.&nbsp;그가 된다고 말했고 나는 세 장을 더 찍었다.&nbsp;네 명이 찍은 단체 사진은 네 장을 찍는 것이 안전하다.&nbsp;사람의 눈은 늘 깜빡이고 있으며,&nbsp;네 명 중 한 명이 눈을 감는 순간에 셔터를 누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했지만 카메라의 주인의 표정에는 필름이 아깝다는 듯한 표정이 스쳤다.&nbsp;우리는 다시 걸었다.&nbsp;하늘은 그날따라 유난히 파래서 머리에 물을 이고 걷는 듯했다.&nbsp;산길은,&nbsp;걸으면 걸을수록 오히려 멀어지는 듯한 칸첸중가를 향해 북쪽으로 곧장 이어지고 있었다.&nbsp;니콘&nbsp;F2의 주인은 이름이 요시부미라고 했다.&nbsp;그는 내게 칸첸중가에 깊이 매료되었던 제정 러시아 말기의 화가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다.&nbsp;그가 토막토막 나열했던 얘기들을 종합하면 대략 아래와 같다.&nbsp;1.&nbsp;제정 러시아 말기에&nbsp;&lsquo;로에리치&rsquo;라는 화가가 살았다.&nbsp;그는 불교를 좋아하는 명상가이며 사상가이기도 해서 러시아를 떠나 티베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일대를 여행하며 불교를 연구하는 한편 많은 독창적인 그림을 남겼다.&nbsp;만년은 부인과 함께 북인도 히마찰프라데시주의 쿨루 지방에 정착하여 살다가 죽었는데 그 자리에&nbsp;&lsquo;로에리치 기념관&rsquo;이 있다.&nbsp;2.&nbsp;일본 청년 요시부미는 로에리치를 영어로 번역된 어떤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nbsp;그 책에 나오는 로에리치가 남긴 유명한 그림&nbsp;의 배경이 된 칸첸중가의 모습이 좀 전에 내가 셔터를 눌러 단체 사진을 찍어준 바로 그 자리에서 본 풍경과 매우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nbsp;나는 그 그림이 어떤 그림이었는지 궁금했다.&nbsp;요시부미는 그림이 들어있는 그 책을,&nbsp;아니면 그림이&nbsp;인쇄된 페이지만을 따로 복사해서 가져오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설명했다.&nbsp;-&nbsp;저 황량한 고원지대에 주막집으로 보이는 외딴집이 한 채 있고,&nbsp;흰말 위에 앉아서 그 주막집을 돌아보는 사람이 있고,&nbsp;그 배경에는 바로 저 칸첸중가가 장중하면서도 신비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다.&nbsp;- 1924년이면 우리 아버지가 태어난 해이다.&nbsp;로에리치는 그 때 이곳에서 뭘 기억하라고 했는지도 그 책에 나오는가?-&nbsp;물론 나온다.&nbsp;삶은 험난하고 황량한 여정이지만 우리가 본래 떠나왔던 고향을 기억하라는 뜻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던 것 같다.&nbsp;- 1924년에 들러서 마셨던 그 주막집의 술맛을 기억하라는 뜻이었을 거라는 대목도 그 페이지의 어느 행간에 숨어있지 않았을까?&nbsp;-하하하,&nbsp;그것도 일리가 있다.&nbsp;하지만 나는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그런 부분은 놓친 것 같다.&nbsp;어쨌든&nbsp;기억하라, 1924>는 현재 뉴욕의 니콜라스 로에리치 미술관(Nicholas Roerich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고 읽었다.&nbsp;우리는 로에리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점점 뒤로 처졌고 어느새 앞서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nbsp;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nbsp;바람도 심상치 않게 불었다.&nbsp;곧 비나 눈이 올 것 같았다.&nbsp;산닥푸에서 팔루트까지는&nbsp;21킬로미터인데 겨우&nbsp;4킬로미터를 걸었을 때였다.&nbsp;남은 구간&nbsp;17킬로미터를 걷는 중에 아무래도 비를 만날 것 같았다.&nbsp;걸음을 재촉해야 했다.오후가 되자 운무 때문에 시야(視野)가&nbsp;5미터도 안 됐다.&nbsp;일본 청년들은 서로 시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보조를 맞추어 걸었고 나는 그들의 뒤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nbsp;북사면(北斜面)에는 눈이 발목까지 빠지는 곳도 있었다.&nbsp;운동화가 젖어 발끝이 시렸다.다시 한 시간 이상 걸어서 지도에 사발그람(Sabhargram)이라고 표기된 지점에 도착했을 때,&nbsp;운무가 걷히면서 칸첸중가의 설봉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nbsp;그리고 집이었을 건축물의 잔해도 보였다.&nbsp;지붕이 없고 사방 벽도 무너지고 있었지만,&nbsp;오래된 집의 잔해 같았다.&nbsp;&ldquo;저 잔해가 혹시 로에리치가 그린 그림 속의 주막집 아니었을까?&rdquo;&nbsp;하는 상상 끝에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nbsp;그때쯤 눈앞의 길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nbsp;지도를 보니 능선을 따라 곧장 나 있는 길은 팔루트로 이어지고,&nbsp;능선 동쪽 사면으로 난 길은 몰래이로 내려가는 길로 이어졌다.&nbsp;팔루트 정상까지 가는 건 포기하고 그냥 바로 밑에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몰래이로 내려가서 술을 마셔볼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았다.&nbsp;팔루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다섯 시였다.&nbsp;치워놓은 눈 더미들 가운데 서 있는 건물이 서벵골_West Bengal&nbsp;주정부에서 운영하는 산장이었다.&nbsp;양철 지붕을 씌운 단층 목조 건물의 넓은 홀에 식탁이 두어 개 놓여 있었는데 그중 촛불이 켜져 있는 식탁에 서양 트레킹 팀의 심부름꾼들이 저녁을 차리고 있었다.매니저가 안내해 준 방에는 침대 여섯 개 외에 책상과 의자도 있었다.&nbsp;의외로 침구가 깨끗했다.&nbsp;두툼한 담요도 두 장씩 배당되어 있었다.&nbsp;저녁을 주문해 놓고 뜨거운 차를 마셨다.&nbsp;어두워지는 창으로 운무가 한기와 함께 스며들어 왔다.&nbsp;어디서 쇠 방울 소리가 뎅그렁뎅그렁 울렸고 작은 새가 푸드덕 날아오르는 소리도 들렸다.서양팀들의 식탁에 눈부신 칸델라가 놓였다.&nbsp;칸델라 불빛에 비친 서양팀의 식탁은 아주 풍성했다.&nbsp;짐꾼들이 풍부한 식량을 지고 왔으며 조리사가 관광 호텔급 음식을 만들기 때문이었다.&nbsp;서양인팀의 식탁에서 퍼져 오는 칸델라 불빛에 의지하여,&nbsp;거기서 풍기는 닭튀김 냄새를 반찬 삼아 달밧떨커리(흰밥에 감자볶음과 녹두 국)를 먹었다.&nbsp;달밧떨커리는 우리나라 식당의 메뉴인 백반 정식 같은 것이다.&nbsp;나는 그래도 먹을만했는데,&nbsp;일본 청년 한 명은 고산증에 시달리는지 몇 술 뜨다 말았다.&nbsp;#장편소설_칸첸중가_010_팔루트&nbsp;]]></description>
			<author>김홍성</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9:00: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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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쟁의 新형이상학: '상대평가'로서의 전쟁과 절대적 영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55</link>
			<description><![CDATA[1. 평화주의의 낭만과 역사의 배반우리는 흔히 전쟁을 '악한 권력자들의 탐욕'이나 '광신적인 맹목'이 낳은 비극으로 치부하곤 한다. 그리하여 광장에 모여 반전(反戰)을 외치고 평화를 노래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선한 인류의 일원이 되었다는 도덕적 위안을 얻는다. 그러나 역사는 이 소박한 이분법을 비웃듯 흘러왔다. 이성이 승리했다던 시민혁명 이후의 20세기에도 인류는 전대미문의 대량 학살(세계대전)을 목도했고, 21세기 최첨단 문명 속에서도 국지전과 내전은 끊이지 않는다.단순히 '나쁜 사람'과 '착한 사람'의 구도로는 인류사에서 전쟁이 종식되지 않는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의 표피적 행위 너머, 우주적 혹은 영성적 차원의 거대한 원인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질문은 여기서 출발한다.2. 노예의 평화인가, 주인의 투쟁인가두 집단이 인접하여 살아갈 때, 각자는 자신들의 방식과 가치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때 평화를 유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한쪽이 스스로 자율성을 포기하고 타자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 즉 '노예로서의 삶'을 수용하는 것이다. 생존 그 자체만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다면 비굴한 평화는 지속될 수 있다.그러나 인간에게는 목숨보다 '주인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 즉 자신의 영적 사명과 뜻을 펼치려는 본성이 있다. 양쪽 집단이 모두 주인이 되고자 할 때 비로소 갈등은 필연화된다. 흥미로운 점은, 겉보기에 풍요롭고 고도의 문화를 이룩한 공동체라 할지라도 내부적으로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이기주의에 빠지고 공동체의 영적 이념을 상실할 때, 오히려 문화적 수준은 낮지만 공동체적 명예와 결속을 중시하는 집단(예: 역사 속 몽고족 등)에게 패배한다는 사실이다. 생존의 안락함에 집착하는 순간, 그 공동체는 영적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역사의 도태 공간으로 밀려나게 된다.3. 절대적 성장(Absolute Growth)의 부재와 '상대평가'로서의 전쟁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인간이 물질 세계에 태어난 궁극적인 목적은 '영적 성장'에 있다. 물질적 저항과 육체적 욕망을 이겨내며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것만이 인간 존재의 의의다.여기서 '절대(絕對)'라는 개념의 어원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절대란 '마주 대하는 상대가 없다'는 뜻이다. 즉, 남과 비교하거나 남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자기 내면의 신성(神性)과 우주의 원리를 대면하며 스스로 성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만약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타인의 간섭 없이 철학적 깊이를 더하고 명상과 공부를 통해 각자의 자리에서 '절대적 성장'을 추구한다면, 그 사회에는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신(혹은 우주의 섭리)의 관점에서도 이들은 모두 우수한 확장의 단계에 있으므로 '절대평가'를 통해 공존하게 된다.그러나 인간이 나태해지고 절대적 성장을 멈출 때, 신은 인류를 향해 '상대평가'의 칼날을 들이댄다. 그 상대평가의 가장 극단적이고 참혹한 형태가 바로 '전쟁'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려 하지 않고 타자를 깎아내려 상대적 우위를 점하려는 불건전한 징후가 공동체에 만연할 때, 우주는 전쟁이라는 필터를 통해 집단 간의 질서를 강제로 재편한다. 역사 속 송(宋)나라의 전족(纏足) 풍습은 남성의 자기 高揚 없이 여성의 활동성을 억압함으로써 남성의 상대적 우위를 지키려 했던 영적 타락의 전형이었으며, 결국 이들은 상대평가(전쟁)를 통해 멸망의 길을 걸었다.4. 진정한 반전(反戰)은 어디에서 오는가결론적으로 전쟁을 막는 것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감상적 반전 운동이 아니다. 전쟁이라는 우주적 상대평가를 종식시키는 유일한 해법은 인류가 스스로 '절대적 성장의 궤도'에 진입하는 것이다.우주의 원리를 탐구하고, 지적 능력을 기르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영성적 가치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영적 성숙. 개개인이 주체적인 '주인'으로서 스스로 도(道)를 닦고 성장해 나갈 때, 그리하여 인류 전체가 절대평가를 받을 만한 격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전쟁이라는 참혹한 상대평가의 시험지는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결어: 전쟁을 종식시키는 힘은 외부의 칼을 꺾는 데 있지 않고, 내면의 영적 태만을 격파하는 데 있다. 진정한 평화는 인류가 신의 시험대 위에서 '상대적 우위'가 아닌 '절대적 고양'을 증명해 낼 때 비로소 완성된다.출처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2R200a7qQjY&t=342s [整理 제미니]]]></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8:04:5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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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러시아 현대사 : 3년 전, 프리고진의 쿠데타, 군부 내 실력자 수로비킨 장군의 몰락</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45</link>
			<description><![CDATA[프리고진의 군사 반란 여파로 그와 가장 가까운 세르게이 수로비킨(Сергей Суровикин) 특수군사작전 부사령관이 반란과 연루되어 있는 설이 대두되었다. 그는 러시아 연방 항공우주군 총사령관(Главнокомандующий воздушно-космическими силами)으로 러시아 군 내에서 대단한 인지도를 갖고 있는 장성이다. 더불어 그는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에 21살 때 옴스크 고등군사지휘학교를 졸업하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직접 참전했기 때문에 전장에서의 야전 경험도 풍부한 장군이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쿠테타에 참여했지만 옐친 대통령이 그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사 사면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리고 1995년에는 프룬제 군사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2004년에는 제2차 체첸전쟁에도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것은 시리아 내전에 참전하면서부터다.&nbsp;러시아 육군 대장 세르게이 블라디미로비치 수로비킨(Sergey Vladimirovich Surovikin), 출처 : The Moscow Times2017년 시리아 내전에서 현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며 상대편 도시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해 &#39;아마겟돈 장군&#39;이라 불렸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특수군사작전 지역 통합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 전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보 기관의 소식통을 인용하여 수로비킨 부사령관과 다른 장군들이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을 지원했다는 징후가 있다고 보도했다. 이 군사반란에 수로비킨이 연루되지 않았다면 프리고진은 반란을 꿈꾸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수로비킨 장군이 의심을 받는 것은, 프리고진이 그를 가장 군인다운 군인이라고 칭송했고, 또 그가 특수 군사작전 총사령관에 보임된지 몇 개월만에 부사령관으로 강등됐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당시 프리고진이 매우 싫어하는 게라시모프 러시아군 총참모장이 군사령관으로 내려왔고 군부 내 2인자인 수로비킨 강등됐다는 사실 때문에 그가 오랫동안 러시아 군부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nbsp;하지만, 수로비킨 장군은 반란이 일어나자, 즉각 이 같은 반란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고, 바그너 전사들에게 참여하지 말것을 촉구하는 등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과는 선을 그었다. 크레믈린도 수로비킨의 연루설을 두고 수많은 소문들 중 하나라고 일축하기도 했다. 사실 반란 기간에 프리고진과 함께 있었던 러시아 군 장성은 유누스-베크 예프쿠로프(Юнус-Бек Евкуров) 국방차관이었다. 그는 러시아 국방부의 12번째 차관으로 러시아 남부 지역 중 후방 지역을 총괄하고 있었다. 예르쿠로프는 로스토프 나도누의 남부군 사령부에서 다른 장성 한 명과 함께 프리고진과 대화를 나누며 차를 마시는 장면이 포착되었고 사태를 중재한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전화를 프리고진에게 바꿔준 당사자이기도 했다. 반란에 가담하고 내통했던 자라면 수로비킨 부사령관보다 예프쿠로프의 연루설이 더 유력하지 않을까?&nbsp;28일 저녁 우크라이나 전보 채널들이 수로비킨의 연루설에 대해 보도가 잇달아 나오기 시작했다. 수로비킨 부사령관이 부관 안드레이 유딘(Андрей Юдин) 대령과 함께 체포되어 전 KGB 감옥인 레포르토보 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소문의 시작은 러시아 군사 블로거 미하일 즈빈쿠크(Михаил Звинкук)가 이날 아침 수로비킨 장군이 지난 토요일 이후 보이지 않는다면서 그가 심문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고 올린 글이다. 뉴욕 타임즈도 즈빈쿠크의 내용을 인용했다. 그러나 즈빈쿠크는 오후 2시쯤 수로비킨 장군의 체포는 그저 루머일 뿐이라고 정정했다. 안드레인 유딘 대령도 자신이 체포를 당했음을 부인했다. 다만, 남쪽으로 휴가를 떠나있는 수로비킨 부사령관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측은 "수로비킨이 체포됐다"는 미확인 보도를 퍼나르기 시작했다.&nbsp;러시아에서 수로비킨 장군이 쇼이구 장관이나 게라시모프 참모총장보다는 아래 계급이긴 하지만 그가 프리고진을 도와서 반란을 도모하려 했다면 모스크바는 원군 기다릴 필요없고 방어할 일 없이 반란군인 바그너 그룹에게 함락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수로비킨 장군이 프리고진에 협력하려 했다면 이는 우발성이 아니라 계획성이라는 것이 더 짙게 나타나게 된다. 수로비킨이 프리고진에 동조했더면 쿠데타는 벌써 끝났을 것이고 루카셴코가 중재할 시간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프리고진과 한 때 친분이 있다고 해서 수로비킨 장군이 반란에 동조했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전쟁은 진실을 찾는 싸움이 아니고 무조건 선동하여 심리적으로 압박하는 싸움이다.&nbsp;상대의 심리를 위축시키거나 도덕성을 일깨우고, 그 과정을 통해 상대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고도의 프로파간다 전술은 요즘 전쟁에 있어 전략과 전술에서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러시아 용병그룹 &#39;바그너 그룹&#39;의 군사반란 이후, 러시아를 상대로 한 우크라이나와 서방측의 프로파간다는 더욱 잦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러시아측이 그 빌미를 주긴 했지만 이를 이용한 전략적 프로파간다는 앞으로도 꾸준히 러시아를 괴롭힐 도구로 사용될 것은 자명하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2:47:3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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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작년인 2025년, 태국의 정적이자 정치적 라이벌,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정쟁은 언제까지 지속될까?</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44</link>
			<description><![CDATA[태국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할 때마다 군부가 장악한 정치는 민주정치가 아닌 군부의 독재정치에 가까울 정도로 험악했다. 그러나 그런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과도한 정적 제거나 시민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던 것은 국왕의 역할이 매우 컸다. 왕의 중재로 인해 태국이 군부 독재의 최악의 국가가 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국 헌법 제6조에 의하면 "국왕은 존엄한 지위에 있으며 어떠한 사람도 모독할 수 없다. 그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국왕을 비난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อยู่ในตำแหน่งอันทรงเกียรติ ไม่มีใครจะดูหมิ่นพระองค์ได้ ไม่มีใครจะวิพากษ์วิจารณ์หรือประณาม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ในทางใดทางหนึ่งได้).", 그리고 제8조에는 "국왕은 존경받는 신성한 지위에 있으며, 누구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พระมหากษัตริย์ทรงมีตำแหน่งอันศักดิ์สิทธิ์และเป็นที่เคารพนับถือ ไม่มีใครสามารถละเมิดตำแหน่งนี้ได้)."로 되어 있기에 국왕은 그 누구에게나 신성한 존재다. 따라서 태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하려면 누구든 왕에게 인정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 국왕에게 인정받지 않은 쿠데타는 국가반역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다.태국의 전 총리 패통탄 친나왓,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태국에서의 정권 교체는 군부와 민간 정권 내에서의 권력 다툼으로 벌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태국 군대는 명분상 태국의 발전과 안전을 명분으로 하기 때문에 지나친 유혈 사태가 벌어지면 수뇌부의 지지를 철회할 수 있다. 지금까지 태국에서 19차례의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태국에서 쿠데타의 성패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국왕의 결정에 따라 달려 있다. 이들은 서로 간에 정권 교체를 벌이기도 했고, 시기에 따라서 민간 정권의 민주정이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개 몇 년 못가서 군부에 의해 의회가 해산되고 군정이 들어서 민간 정권을 차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부터 군부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한다는 이유로 집권의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정권 문제가 민족 분열까지 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군인들 역시 국방의 의무 이상을 철저히 교육 받았고, 태국의 민족성도 존재하고 있기에 특이하게도 다른 군부 독재 국가와 달리 잔인한 철권 통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우수한 엘리트 인재를 적극 등용했고 이들은 물러설 때조차도 잘 알았던 자들이다.하지만 아무리 군인 정신이 훌륭한다 해도 우선 정치 권력을 잡게 되면 결국에는 부정부패에 심화되고 갈수록 무능해지기 마련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모르는 군인들은 전쟁은 알아도 통치에 있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위에서 전쟁은 지휘할 수 있어도 통치는 말 위에서 할 수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정치에 무능한 군부 정권은 부패를 저지르고 각종 실정들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그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선 점차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1973년 학생 항쟁이 발생해 타놈 끼띠카쫀 군사 정권이 축출되었고 1975년 인도차이나 지역이 공산화 된 것을 계기로 1976년에 반공을 내세우는 군부에 의해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자 탐마삿 대학에서 이에 대항하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경찰과 우익 단체 등에게 살해되는 참사가 벌어져 이같은 살상을 막기 위해 쿠데타는 국왕에 의해 승인되었다. 이에 체포를 면한 학생들이 공산 반군에 가담하면서 군부와의 내전 위기로 치달았었다. 그러자 군부가 유화책을 내놓으면서 일단 이들에게 고개를 숙였고 그에 따라 공산반군의 세력도 다시 약화되었다.1988년에 다시 민간인 출신의 총리가 나타나며 태국은 다시 민주주의 국가가 되어 정권교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1991년에 쑤쩐다 장군이 집권 내각의 비리를 근거로 들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고, 민간정부는 다시 전복되면서 다시 군부 독재 국가가 되었다. 특히 수쩐다 장군은 쿠데타 이후,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약속과 다르게 수상직에 취임하며 독재 정치를 펼치자, 방콕 시민들은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의 지휘 하에 강경한 시민혁명에 나섰다. 수쩐다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지만 사태가 심각해지자 그의 쿠데타를 묵인해준 국왕이 시민들의 편을 들어 군부의 비민주적인 행위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수쩐다도 이에 사퇴를 선언하여 1991년의 쿠데타는 실패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토지 개혁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데다 1997~98년에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태국도 외환 위기 등의 상황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 등장했던 인물이 기업인이었던 탁신 친나왓이다. 2001년 총선에서 화교이자 기업인 출신이었던 탁신 친나왓은 총리에 취임한 이후 30밧 의료 보험 등을 제정하여 하층민을 위한 포퓰리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한다.&nbsp;물론 탁신도 부패한 정치인인 것은 맞다. 그리고 정책 자체가 포퓰리즘 일변도였고, 그와 같은 포퓰리즘 정책은 태국 내 기업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하층민들이 많은 혜택을 받게 되면서 매우 경제적으로 열악한 태국 북부 지역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을 절대적으로 지지하는 일명 성지(聖地) 같은 곳이 된다. 그래서 태국 내 탁신 지지자들 대부분은 하층민들이었고, 절대 빈곤의 하층민들이 태국에서 가장 많은 인구수를 차지함에 따라 이들은 탁신과 친나왓 가문의 콘크이트 지지층이 되었다. 무엇보다 탁신 반대파들도 잠롱 스리무앙 전 방콕 시장과 같이 매우 청렴한 인물들을 제외한 나머지 거물급 인사들도 탁신보다 부패 면에서 낫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고 탁신과 같이 빈민층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는 정책을 생각할 정도로 하층민들에게 베푸는 스타일도 아니기 때문에 북부 지역에서 지지를 거의 얻지 못했다. 하지만 탁신도 기본적으로 기업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거나 철폐하는 정책을 기조로 삼고 여러 공기업들을 민영화시켰으며, FTA도 적극적으로 추진할 정도로 상당히 보수적으로 경제 정책을 펼쳤다.그런데 문제는 이런 정책들이 왕가나 군부 등 보수주의자들한테는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층민들에게 주는 이 포퓰리즘에 군 예산도 털게 되면서 군부의 불만은 쌓여만 갔다. 당시 탁신 집권기 때, 무려 6개월 동안 봉급을 받지 못했다는 군인이 있었을 정도였으니 군부의 반발은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포퓰리즘은 왕이나 왕가에게 바치는 세액도 줄어드는 결과를 갖게 되니 태국 왕가 내 로얄 패밀리들은 친나왓 가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탁신이 해외 순방을 하던 도중에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탁신을 축출했고 군부 정권이 다시 태국을 장악하게 된다. 이에 탁신 지지파들은 이러한 군부의 행위에 대해 반발해 시위를 벌였으며 2010년에는 결국 방콕에서 시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신은 그 동안의 경제 개발 과정에서 소외되었던 북부 지역을 적극적으로 개발하는 정책을 폈었다. 그로 인해 북부 지역은 태국이 산업화 되어 발전한 이후에도 농민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탁신은 농가 부채 탕감 정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북부 지역에서 엄청나게 인기를 얻으며 거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nbsp;그러나 남부 지역에서는 탁신에 대한 지지율이 낮았는데 이는 탁신이 최남단 말레이 반도 지역에서 이슬람의 저항에 대해 강경하게 진압을 나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말레이시아나 싱가포르와 가까운 지역이라 핫야이 일대는 부유층들이 꽤 존재했다. 게다가 태국 군부 지도자들, 장교들의 출신지의 상당수가 남부 지역이다. 미군 또한 주로 남부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군부의 상당수가 친미파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남부 지역은 친나왓 가문의 지지율이 높을 수가 없고, 방콕도 처음에는 탁신의 지지세가 강했지만 탁신의 부정부패가 이어지고 탁신이 자신에개 매우 비판적인 언론사를 매입하여 언론을 왜곡시키는 등의 사건까지 발생하면서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방콕 또한 반 탁신 지역으로 돌아서게 된다. 이후 태국은 2~3년마다 쿠데타 및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는 것은 완전히 관례처럼 자리 잡았다. 특히 2013년 잉락 친나왓 총리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했을 때 자신의 오빠인 탁신 전 총리가 명단에 올라가자 군부와 민주당이 크게 반발하였고, 반탁신 세력들이 방콕 도심지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사실 탁신은 단순히 권력 다툼에서 군부에게 밀려난 비운의 총리가 아니었다. 포퓰리즘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의 지지를 받았지만 기득권 층의 반발을 받고 있는 극단적인 인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반 탁신 세력에서는 심지어 그가 정적이나 부정축재에 방해되는 사람들을 암살했다고 까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탁신 지지세력도 맞불 시위를 했다. 빈부격차가 심각한 태국 전체 국민 수로 따지면 탁신 지지파, 일명 "붉은 셔츠"라 불리는 집단이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붉은 셔츠"단은 탁신의 부패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준 정치인은 탁신이 처음이자 유일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탁신 이전에는 대부분의 총리들이 기득권과 군부부터 먼저 챙겨주었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심한 태국에서는 이러한 편향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큰 문제였다고 한다. 따라서 탁신이 추방된 이후에도 그의 여동생인 잉락이 총리가 된 것과, 그의 딸인 패통탄이 총리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패통탄이 총리가 되었지만 탁신의 정계 복귀에 대해 그가 행정부에서 어떤 역할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정치 권력 경력도 짧고 아버지의 후광으로 인해 당선된 패통탄에게 있어 탁신의 조언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패통탄은 태국에서 군부의 힘을 줄이고, 통제가 가능하도록 확실한 군부 개혁을 추진했다. 그렇지 않으면 쿠데타가 또 일어날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이에 보수적인 군 장성들의 반발은 엄청났다. 그렇다고 해도 탁신과 패통탄의 지지율이 높은데다 이전과 같은 군부 쿠데타에 관련해 방콕 시민들의 민주 의식이 매우 높아졌다. 시대가 흐르면서 태국 또한 인터넷이 발달하고 전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요즘 태국 젊은이들도 스스로 판단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여기에 예전 같이 쿠데타를 하기에 쉽지 않다는 것을 군부 또한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군부와 친나왓 가문의 악연은 현재진행형이며 미래에도 이들의 악연은 꾸준히 이어질 것이다.&nbsp;만약 친나왓 가문이 축출되기라도 한다면 태국 북부 지역 주민들로부터 심각한 반발에 직면하게 될 것이고, 해당 지역 또한 미얀마 카렌족 무장세력 반군과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친(親) 친나왓 세력들이 자체 무장을 하여 북부 지역의 친(親) 친나왓 세력들을 결집해 방콕 및 남부 지역의 주민들과 대립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그렇게 되면 태국 남북 내전으로 치달을 가능성도 염두해 두어야 할 정도다. 필자의 소식통으로 듣기로는 패통탄 전 총리가 직무 정지되자 북부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있다. 게다가 북부 지역은 중국과의 실질적인 이권이 걸려 있고, 남부 지역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과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미, 중 간의 대리전 형식의 내전 또한 무시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태국의 친나왓 가문과 군부의 대립은 여러모로 동남아시아 지정학적 패권 전쟁과도 맞물려 있을 수 있어 반드시 주목해야 할 요소라고 생각된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2:40:00 +0900</pubDate>
		</item>
		<item>
			<title>2026.7.10 《존재와 싸움에 대하여》</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443</link>
			<description><![CDATA[&nbsp; ●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nbsp;&nbsp;&nbsp;&nbsp;&nbsp; 《존재와 싸움에 대하여》&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조율여백 이수진저는 존재란 본질적으로 어떤 형태로든 저항하고 싸우는 과정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여기서 말하는 싸움은 단순히 폭력이나 대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존재가 자신의 방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선택하고, 견디며, 스스로를 바로잡는 모든 과정 또한 하나의 싸움이라고 여깁니다.그러나 현실을 바라보면 많은 사람들은 싸움 자체를 부정하거나, 자신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조차 명확히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nbsp;때로는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하기 위해 싸움을 왜곡하기도 하고, 회피를 평화로 착각하기도 합니다.그래서 저는 인간 가운데 자신이 무엇과 싸우고 있으며, 왜 그 싸움을 선택하고 있는지를 말과 행동으로 함께 보여 주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생각합니다.싸움에는 분명 서로 다른 방향이 존재합니다.부정한 방향의 싸움은 자신의 소유와 쾌락, 탐욕과 권력을 확대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타인을 수단으로 만들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결국 더 큰 부당함을 만들어 냅니다.반대로 긍정한 방향의 싸움은 공동체가 더 합당한 조화와 공존, 그리고 지속 가능한 순환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부당함에 저항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싸움은 상대를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존재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을 지키기 위한 책임에 가깝습니다.저는 더 널리 이로운 방향을 추구하려 한다면, 가장 먼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자신 안의 나태함과 왜곡, 기만과 탐욕, 거짓과 완벽하다는 착각, 그리고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동시에 환경 속에서 반복되는 부당한 흐름에 대해서도 무조건적인 부정이나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합당한 범위를 설정하며 저항하고, 객관화와 정합화, 구조화와 의미화를 통해 조금씩 개선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또한 저는 진실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곧 정의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모든 것을 공개하는 것이 언제나 정의로운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픈화는 현실을 합당하게 객관화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며, 그 이후에 책임과 결과가 조화를 이루는 정합성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설령 책임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동일한 부당함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것은 구조를 개선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완전한 정의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더 나아가 구조가 개선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구조가 공동체를 더 널리 이롭게 하려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면 그것 또한 충분한 정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정의란 하나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 과정이 함께 이어질 때 비로소 가까워질 수 있는 방향이라고 여깁니다.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책임과 결과의 정합성,반복되는 부당함을 줄이기 위한 구조적 개선,그리고 공동체를 더 널리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합당한 정의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현실은 모든 것을 온전히 공개하기도 어렵고, 교육을 한다고 해서 모두가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배웠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지식을 이용하거나, 존재가 지닌 소중한 의미를 외면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그래서 저는 가장 어려운 싸움은 결국 타인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과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성실한 순환의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이러한 자가 점검은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방향을 수정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태도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오랜 시간의 성찰과 실천을 통해 조금씩 길러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비록 완전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부당함을 줄이고 더 합당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만큼은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그래서 저는 오늘도 무엇을 이길 것인가보다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그리고 왜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가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그 질문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존재가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가장 근본적인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description>
			<author>조율여백</author>
			<pubDate>Fri, 10 Jul 2026 12:36:0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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