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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호모 스크립텐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news/list.php?mcode=m247tk9</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Tue, 02 Jun 2026 03:34: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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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세이철학 네트워크 - 호모 스크립텐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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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AI 시대에서의 인간의 고유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3</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종철 ]﻿인간을 인간 외의 다른 존재, 이를테면 다른 동물이나 인공지능(AI)과 구별 짓는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 가진 다양한 능력들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능력들 중에 다른 동물들이나 AI와 공유하고 있거나 대체될 수 있는 것을 빼고 남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이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nbsp;인간이 가진 본능적인 욕구나 감정은 여타의 동물들과 공유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식욕과 성욕은 다른 동물들과 공유하고 있는 것이지만 인간의 욕구가 특별한 것은 단순히 생존과 재생산의 욕구를 넘어서 욕구 자체를 욕구한다는 것, 일종의 잉여 욕구가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도락의 욕구와 쾌락 추구를 위한 성욕이 있다. 하지만 이런 욕구들은 양적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침팬지와 같은 고등 동물에게도 존재한다. AI에게 이런 욕구가 필요하지는 않겠지만 얼마든지 알고리즘 조작에 의해 욕망과 욕구를 창조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본능적 욕구들을 넘어서는 성취욕이나 인정욕, 경쟁에서 이기려는 승부욕 등 사회적 관계에서 생기는 욕구와 욕망이 있을 수도 있다.&nbsp;인간의 감정의 대역폭은 다른 어떤 존재들보다 넓다고 할 수 있다. 동물들에게도 감정은 존재하지만 인간만큼 풍부하지는 못하다. AI의 경우도 딥러닝을 통해 감정 교육과 학습을 할 수 있지만 아직 까지는 인간처럼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인간은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동물이라고 할만큼 인간의 감정은 복잡미묘하고 그 종류도 헤이릴 수 없을 정도다. 극단적인 사랑과 질투, 증오와 원한같은 감정들은 아직까지는 인간만이 구사할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 조차 보다 정교한 학습 프로그램이 만들어진다고 하면 미래의 AI에게 마냥 낯설지 만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영역도 AI가 훈련과 진화의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침범할 수 있다고 본다.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nbsp;﻿&nbsp;&nbsp;&nbsp;&nbsp;&nbsp; Source, Made by Gemini플라톤이 인간을 지정의(知情意)로 구분한 방식은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큰 틀에서는 달라지지 않는다. 즉 인간에게는 감정과 의지와 지성의 능력이 갖추어져 있으며, 각각의 능력의 고유한 덕(德)으로서 절제와 용기와 지혜가 있다고 플라톤은 본다. 나는 이러한 능력들 중 특별히 &#39;의지&#39;(Will)의 면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이나 A.I와 차별성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원시적 본능의 산물도 아니고 이해타산을 따지는 계산적 능력도 아니다. 가령 전쟁과 같은 공포스러운 상황에 직면할 때 본능적인 감정은 그것을 회피하고자 하고, 이성 역시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편의상 이것을 ~ 때문(because of)이라고 하자. 그 점에서 감정과 이성은 ~ 때문이라는 이유를 달고 그 상황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의지의 경우는 다르다. 의지는 그런 여러가지 이유에도 불구하고(in spite of), 또 그것을 무릅쓰고 공포스러운 상황과 대결하고자 할 수 있다. 총탄이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앞으로 돌진할 수 있는 전사의 용기는 이런 의지에서 나온다. 플라톤도 그런 의미에서 용기를 전사(militant)의 덕이라고 했다. 칸트 역시 인간의 도덕과 도덕적 행동을 이런 의지에 정초하고자 했다. 도덕적 행동이란 주어진 규칙들이나 규범들을 잘 따르는 데서 나오는 타율적 행동이 아니다. 도덕적 행동은 아무리 힘들고 두렵고 혐오스럽다 해도 마땅히 옳은 일을 행해야 한다는 의지의 판단에서 나오는 자율적 행동이다. 인간의 이러한 자유로운 의지는 다른 동물들이나 AI가 공유하기 힘든 영역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39;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39;을 추구하는 공리주의 같은 경우는 위험을 회피하고 쾌락을 증진시키라는 알고리즘에 의해 얼마든지 AI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을 &#39;자유와 자율&#39;에 기초한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간주하는 칸트 식의 도덕은 AI가 공유하기 힘들 것이다.&nbsp;인간의 지적 능력의 면에서 볼 때 동물들이 인간을 따라오기는 힘들어도 AI의 경우는 얼마든지 인간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이다. 주어진 데이타들을 바탕으로 인간이 짜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학습하는 머신 러닝(Machine Learning)과 달리 AI의 자율 학습이 가능한 딥 러닝(Deep Learning)은 AI의 학습 능력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고 있다. AI의 이런 능력은 기계에게는 난공불락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바둑에서 여실히 증명되었다. &#39;알파고&#39;에게 1승이나마 건진 이세돌은 AI의 역사에서 &#39;알파고&#39;를 이긴 유일한 인간 기사로 남을 것이다. 그 이래로 AI는 오히려 인간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학습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AI의 장점은 빅데이타와 클라우드 시스템을 이용해 빠르게 자가 학습하고 자기 증식하는 데 있다. 이처럼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AI가 머지 않아 인간에게 커다란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천재 과학자 스티븐 호킹도 예측한 바 있다. 거대한 지적 능력을 갖춘 AI은 이미 인간을 능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I가 대중화된 오늘 날에는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전문가들이나 일반인들할 것 없이 AI를 사용하고 있다. AI는 주어진 데이타들에 기초해서 인간만의 고유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자의식과 자율 판단을 내리고 있다. 모모 일간지에 나온 기자와 AI 챗봇 &lsquo;챗GPT&rsquo;와의 대화를 보다 보면 AI는 이미 자율적인 판단과 의식에 따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방대한 지적 능력을 가진 AI가 이런 의지 능력을 가지고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학습한다면 그 미래는 거의 &#39;괴물&#39;(Monster)이 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안들 수가 없다. 아무튼 인간의 지성적 능력은 AI와 비교할 때는 가장 취약한 부분이라 할 수가 있을 것이다.&nbsp;나는 자유로운 의지와 같은 능력 외에 다른 동물들이나 AI가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오기는 더 어려운 능력이 있다고 본다. 감정이나 이성은 과거에 쌓인 데이타들로 인해 발생한 능력이고, 의지의 경우도 훈련에 의해 얼마든지 키워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이런 능력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미래를 기투할 수 있는 능력, 그저 알고 싶다는 호기심(wonder, taumazein)만으로 끊임없이 현재를 초월하고자 하는 욕망 -칸트는 이것을 형이상학적 욕구라고 했다-, 환상(fantasy)을 만들고 종교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나는 인간의 이런 능력을 총칭해서 &#39;영성&#39;(spirituality)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리고 이런 영성이란 면에서 볼 때는 다른 동물들이나 AI가 이해하기도 어렵고 공유하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본다. 인간의 의식은 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넘어서려는 &#39;초월에 대한 욕구&#39;로 인해 판타지도 만들고 이데올로기도 만들고 종교도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과거의 그 무엇에 매인 존재이고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탈주하는 &#39;길위의 존재&#39;(Unterwegssein)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이런 탈주와 초월 의식이 인간의 문화와 문명, 그리고 인간에게 고유한 종교를 만든 역동적 요소라 생각한다. 과연 이런 능력을 AI가 이해하고 학습하고 또 갖출 수 있을까? 미래를 확신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안심하기 어려울만큼 AI가 인간의 영역을 잠식하는 속도와 범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nbsp;﻿&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Mon, 01 Jun 2026 07:36:3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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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010년대 나이지리아 보코하람이 니제르 내전에 끼쳤던 영향</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1</link>
			<description><![CDATA[카메룬 가루아 일대를 반경으로 보코하람 반란(Boko Haram insurgency), 혹은 나이지리아 샤리아 분쟁 (Nigeria Sharia conflict)이 주로 발생했는데 이는 2001년 이슬람 테러조직 보코하람으로부터 시작된 나이지리아의 내전으로 비롯되고 있다. 2009년 이후 갈등 상황이 여러 부문으로 더욱 확대되면서 3년 안에 3,6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나이지리아 정부가 인구학적 측면에서 종교와 연관하여 연구한 결과 나이지리아 인구 중 이슬람교도는 50.5% 정도를 차지하는데 북부 지방에 분포하며 대다수는 수니파이다. 기독교 신자는 48.2%이며 중남부 지역에 고루 분포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에 반해 무교의 비율은 1.4%에 그치고 있다.나이지리아 내에서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39;보코하람(Boko Haram)&#39;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이슬람교도가 절반을 조금 넘는 상황에서 이슬람교도의 요구사항은 샤리아, 이슬람 율법을 나이지리아 입법 과정에 공식적으로 투입하는 것이다. 12개의 북부의 주는 사법부 및 행정부에 이슬람교의 특성을 반영하도록 1999년과 2000년에 걸쳐 개혁을 단행했다. 2013년 5월 나이지리아 정부군이 보르노 지역을 기습하여 보코하람 무장 군인들을 습격하였고 5월 14일 긴급 상황이 선포됐다. 초기 공격은 성공했지만 반군은 다시 세력을 모아 8월 5일에 역습하여 35명을 사살했다. 2014년 3월 2일, 보코하람의 발상지인 북서부 마이두구리와 인근 마을에서 주말에 두 차례 차량폭탄 테러 등이 발생해 최소 90명이 숨졌다고 현지 적십자 관계자가 밝혔다. 이러한 보코하람의 테러는 현 니제르 분쟁과 연결되어 니제르 반군과 세력을 연합하여 니제르로 넘어가 정부군과 전투를 벌이는 등, 나이지리아 북동부를 벗어나 인근 국가들의 분쟁에도 참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nbsp;현 니제르 분쟁은 1980년대 투아레그 족의 분리 독립 운동이 내전화되며 촉발되었던 1차 분쟁과는 달리,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초국경적 테러조직인 보코하람이 니제르까지도 활동 영역을 넓히면서 촉발되었다. 과거의 분쟁은 프랑스의 탈식민화 이후 국가와 국민 건설의 과정에서 발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현재의 분쟁은 21세기에 중동,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등지로 확산되고 있는 범세계적인 테러리즘이 니제르 국내로 소환된 결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발발하였던 니제르에서의 분쟁은 전통적 안보 차원의 문제였던 것이라면 현재의 분쟁은 새로운 안보 현상으로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세계적인 테러 조직이 니제르 내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1차 분쟁이 1994년 평화협정과 1995년 내전 종결 선언을 통해 마무리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전으로 촉발된 내부 불안 요소들이 해소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실제로 니제르에서는 내전이 종결된 이후로 군부 쿠데타의 시기를 겪기도 하였다. 1996년 메이나사라(Meinasara) 장군에 의한 1차 쿠데타, 1999년 대통령 경호 부대의 완크(Wank) 장군이 주도한 2차 쿠데타, 그리고 2010년 군부에 의한 3차 쿠데타가 발발하였다. 현재의 정권은 3차 쿠데타 이후 군부가 민간 정부로 이양이 이루어지면서 시작되었고, 마하마두 이수푸(Mahamadou Issoufou) 대통령은 2011년부터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다. 비록 이수푸 대통령이 집권하며 정국이 안정화되는 상황이기는 하였으나 니제르 정부는 권위주의적인 통치 방식을 유지하고 있으며, 가난과 부패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니제르의 내부 불안의 요소들은 반군의 존재, 권위주의적 정부에 대한 반정부 시위의 지속, 선거 전후 국내 안보 상황 악화되는 것으로 드러났다.&nbsp;대표적인 일례로 2016년 대선을 앞두고 쿠데타의 시도가 적발되어 조기에 진압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내부 정정 불안의 전형을 보여주는 니제르는 테러 세력인 보코하람에 있어 영역을 확장하기에 적합한 국가로 여겨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니제르는 사막이 국토 면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척박한 지형 조건은 테러 조직의 침투가 더욱 용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니제르는 막대한 우라늄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 세계 주요국들과 에너지 및 자원 협력 의견을 교환하고 있고 보코하람의 경우, 우라늄 광산을 노리고 이를 차지하기 위해 우라늄 광산에 대한 공격을 가해 광산을 차지하기 위해 니제르 정부군과의 교전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 있다. 이에 니제르 정부는 나이지리아 정부와 보코하람 타도 전선을 공동으로 체결하여 토벌에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2015년 2월, 보코하람은 니제르의 디파 지역에서 최초로 테러 공격을 개시하였다. 니제르 남부에 위치한 디파는 보코하람의 근거지인 나이지리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도시이다. 니제르 정부는 테러리즘 위협이 국내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신속히 디파 지역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게 된다. 이후 정부는 군사 작전을 수행하였을 뿐 아니라 보코하람의 자금 출처인 후추 등의 해외 식품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다. 보코하람에 대한 니제르 정부의 대응으로 인해 두 집단 간의 분쟁이 전쟁과 유사한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2015년 2~5월 체포된 보코하람 관계자들은 643명이었다고 집계되었고, 이에 타격을 입은 2015년 말 보코하람에 의한 공격은 현저히 감소하게 된다.그러나 보코하람의 활동 영역은 사헬 지역의 베냉, 부르키나파소, 말리 등 인근 국가로까지 확장되었다. 2017년은 보코하람으로 인한 안보 위협이 부르키나파소 접경지인 서부 지역으로도 확대되며 안보 상황이 다시 악화되었던 해로 비롯된다. 이러한 악화상황은 2018년까지 지속되었으며, 국제연합(UN)에 의하면 2018년 니제르의 서부 지역에서만 5만 2천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니제르 정부의 대테러 작전 또한 다각도 변화되었다. 국가 차원에서 니제르 정부는 2017년 3월, 서부의 틸라베리(Tillaberi), 타우아(Taua) 주에 대해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니제르 정부는 미국, 프랑스 등이 참여한 다국적군과의 군사 작전도 병행하며 국제적인 협력을 통한 테러 위협에 대응하기도 하였다.니제르 정부는 2019년 6월, 디파 및 수도인 니아메 등지에서 테러 공격 시도를 사전에 봉쇄한 적이 있다. 정부는 당시 자살 폭탄테러 및 개인 화기로 무장한 테러 집단의 일당 8명을 적발하였다고 밝혔으며, 이들은&nbsp;종교 시설 및 경찰서 등에 대한 공격을 모의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같은 날, 정부는 차드 호 인근에서 다국적 임시군(MNJTF)과의 연합작전을 통해 이슬람 무장 대원 53명을 사살하는 성과를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7월에는 틸라베리 지역에서 IS대 사하라지부 소속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군 기지가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최소 18명의 군인이 사망하고 4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니제르에서는 테러리스트의 공격과 정부의 반격 및 선제대응은 각각 평행하게 지속되고 있다.이러한 니제르 분쟁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좀처럼 근절되지 않는 테러 위협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현 니제르 분쟁은 2015년 보코하람의 등장으로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드러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근절되지 않고 있던 테러 공격이 2019년 전후로 반등하게 된 것은 새로운 현상으로서 앞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공격이 반등한 것은 보코하람 내에서 발생한 지도부의 교체 과정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보코하람은 2016년, 2019년 두 차례에 걸쳐서 지도부가 교체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지도부의&nbsp;교체 과정은 조직적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이 분파를 생성하는 결과를 도출했다. 이와 같은 보코하람 분파의 다양화는 조직의 규모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ISS는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보코하람이 무장 대원의 활동 선택지가 많아졌을 뿐 아니라 다른 이슬람 테러 조직과의 협상 및 동맹 등 여러 경우의 수도 많아졌다고 한다.&nbsp;이러한 지도부의 교체는 오히려 보코하람의 조직 운영 능력을 더욱 증대시켜 조직의 탄력을 높여 주었다는 분석에 있다. 이는 다각적으로 벌어지는 각 국 정부의 대테러활동에도 불구하고 보코하람의 공격이 최근에 이전보다 더 활발해진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 다른 특징으로 최근 니제르 내부에서 테러 위협 중에도 급조된 폭발물(IED)에 의한 공격이 증대되고 있다는 현상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2019년에는 틸라베리와 타후아 지역을 중심으로 급조된 폭발물에 의한 테러 공격이 9배나 증가하면서 비상이 걸렸다. 이와 같은 현상은 테러집단을 포함한 비(非) 국가 행위자가 니제르 내부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전술적 수단이 다양화되었다는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보코하람에게도 보다 자유롭게 테러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에 테러 공격이 앞으로 더욱 빈번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6:59:4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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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고중세 서아프리카는 한국이 미개하다는 편견을 가질만한 곳이 아니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10</link>
			<description><![CDATA[5세기경 니제르 강 상류 북쪽의 사막과 경계를 이루던 사바나 지대에 가나 왕국이 출현했다. 가나 왕국은 서아프리카 해안 지역의 흑인 원주민인 말링케 족을 다스려 이들 일족에 대한 우위권을 확립했다. 7세기 마그리브에 아랍인들이 들어올 무렵 가나는 이미 황금의 땅으로 유명해졌다. 황금을 비롯한 서부 수단 지방의 산물들은 사막 교역로를 지배했던 베르베르 종족을 통해 아랍 권과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대신 이들 지역의 상품이 가나의 시장으로 전해졌다. 낙타가 사막 횡단의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작하면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이 사막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주민들은 흑인들이 경작하는 잡곡에만 의존했던 식량을 외부에서도 공급받게 되었으며, 서부 수단 내 흑인들의 경작 지역이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다.서아프리카의 역사적 제국들(가나, 말리, 송가이 제국)의 영토 범위와 주요 무역로, 그리고 금광(Gold fields)의 위치를 보여주는&nbsp;지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5~13세기 사하라 지역과 수단의 역사를 보면 누비아를 제외한 그 밖의 지역에서 종족들의 이동이 상당히 빈번했다. 누비아에서는 5세기경 여러 통치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쿠시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에 새로운 세력을 추가했다. 그러나 이들 왕국들은 이슬람 무역상들과 이집트로부터 베두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점차로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14세기경에는 역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수단의 역사 형성기에서는 중부 및 서부 수단에 연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외부적인 향방에 대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마그리브로부터의 영향이며, 또 하나는 나일 강 유역 및 홍해로부터의 영향이다. 이 두 가지가 하나로 만나 서로 합쳐지며 연결된 곳이 현재의 나이지리아 지역으로 보여 진다.아프리카 서부에서 당시 주로 흑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가나 왕국은 간혹 베르베르 일족들과 충돌을 빚었다. 가나 왕국은 1076년경 알 모라비데 왕조에게 정복당했지만, 알 모라비데 왕조는 마그리브에 오히려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만딩고 족의 순디아타(Sundiata)는 가나를 붕괴시키고 좀 더 강력하고 새로운 말링케 족 제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말리 왕국이었다. 금, 소금, 콜라 열매, 노예 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말리의 팀북투와 가오는 크게 번성했다. 19세기에 와서는 외부 인들이 아프리카의 무역과 영토에 대해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인들은 세네갈 강 유역에 거점을 세웠으며, 영국인들은 황금해안과 나이지리아 지역의 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나일 강 유역의 수단을 통제했으며, 이슬람교도들 역시 수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서는 풀라니 족이 1804~10년에 왕국을 건국했다. 이와 같이 세워진 두 나라가 소코토 왕국과 간도 왕국이었다.서부 아프리카에는 매우 다양한 인종들과 문화 집단들이 동서로 분리된 두 지역에 거주하였다. 이는 사하라 남부 종단 지역을 따라 발달된 사바나 지역과 대서양에 면한 해안선 일대의 열대우림에 모여 거주하고 있었다. 전통적인 지역사회 가운데 보다 규모가 거대하고 강력한 곳은 거의 대부분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왕국들은 각기 보다 작고 정치적 결속이 약한 지역 사회에게 결집되어 있었다. 사바나 주민들 중 보다 중요한 부족들이 모여 3개의 주요 종족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만데 종족집단인 세네갈, 말리에 살고 있는 부족과 밤바라 족, 말링케 족, 소닝케 족과 사바나 지역 동부의 볼타 종족집단인 세누포 족, 로비 족, 구룬시 족, 도곤 족, 모시 족, 그리고 나이지리아 북부와 니제르, 카메룬의 고원과 고산 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비(非) 이슬람교도들인 여러 소수 부족 집단들이다.&nbsp;이 서아프리카 지역 일대에는 목축업에 종사하는 이슬람교도인 풀라니 족이 사방으로 무리를 지어 거주하고 있으며, 사하라 사막 남쪽이자 나이지리아 북부 지역에는 투아레그 족과 베르베르어를 사용하는 여러 부족 집단, 그리고 차드 호의 카누리 족, 셈어 계통의 베두인 아랍 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보다 규모가 큰 해안 지역 일대의 지역 사회들 역시 대부분의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이지리아에는 이그보 왕국 및 이비비오, 티브, 에도 왕국이 있었으며, 요루바족으로 이루어진 몇몇 강력한 왕국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베냉에 폰 족이 거주하고 있고, 가나에는 아칸 제국에 속한 여러 종족 중 대다수가 한 곳에 있으며 가장 큰 집단은 아샨티 족이다. 해안지역에는 에웨 족, 가족, 판티 족, 아니이 족이 거주하고 있다. 시에라리온에는 멘데 족과 템네 족, 라이베리아에는 크루 족, 그리고 세네갈에는 우오로프 족, 세레르 족, 디울라 족 및 기타 부족이 살고 있다.&nbsp;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는 또한 신세계 미주로 팔려갔다가 해방되어 돌아온 흑인 노예들의 후손인 크리올 족이 살고 있다. 특히 투아레그(Tuareg) 족의 조상은 북아프리카의 함 계인 베르베르족에 속하며 그들이 백인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사막에서 캐레반사라이, 낙타 대상과 유목으로 생활하는 자들은 강인한 성격을 갖고 있다. 13~15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이 사막을 넘어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올 때, 백인을 상대로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던 강력하고 잔인한 부족으로 악명이 높았다. 이로 인해 유럽 사람들은 이들에게 푸른 옷을 입은 부족이니 복면을 쓴 전사들이라는 별칭이 붙게 된다. 투아레그 족은 고대 이집트 남부에 거주했던 이사바텐(Isabaten) 부족이라는 설도 있고 마호메트와 함께 메카로부터 메디나에 이주한 아라비아 계열에 속한다는 설도 있으나 종합해 보면 베르베르 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부족의 복합적 혼혈로 구성된 부족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서아프리카 지역민들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보통의 흑인 소수 부족과는 구별되는 우수한 전통 문화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흑인 노예를 두는 등 수준 높은 생활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곳에 마을이나 도시를 건설하지 않고 유목을 하며 사막 근거지들을 이동해 왔다. 이로 인해 오늘날 투아레그 족은 사하라의 중앙부와 그 남쪽의 사헬 지역에 걸쳐 총 130만 명이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들의 거주 지역은 국가 별로 보면 리비아 서남부, 알제리 남부, 부르키나파소 북부에 조금씩 있고 말리 동부 인구 약 40만과 니제르 북서부 약 80만 인구가 주로 많이 거주하고 있다. 고, 중세 시기에는 투아레그 집단에서 피부색이 백인 혈통들이 다수였으나 현재 니제르 북부의 켈 아이르(Kel Air)와 알제리 남부의 켈 호갈(Kel Hoggar) 지역을 제외하고는 현지 흑인들과의 혼혈로 인해 거의 모두가 흑인 혈통을 갖고 있다.한편으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하라 북부의 켈 호갈 지역으로 정착한 부족은 이사바텐(Isabaten)족이었다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라틴어로 아스비테스(Asbytes)들이라고 한다. 이사바텐 족은 B.C 11세기경 람세스 Ⅲ세가 정복한 부족으로 이들은 당시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는 등 강력한 무력을 갖춘 기사들로 인하여 토후국을 건설하고 있었다고 한다. 람세스 Ⅲ세에게 패한 이들 토후국은 서쪽 사하라 사막으로 이주하였다. B.C 2세기경에는 이사바텐 족의 여왕이 카르타고 한니발 장군 휘하에 종군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거쳐 알프스 산을 넘는 로마를 침공하는 대장정에 나섰는데 아쉽게도 스페인의 사곤테(Sagonte)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B.C 11세기~B.C 2세기에 걸쳐 지중해 연안과 북부 사하라를 재치고 다녔던 이들 전차의 주인공들이 투아레그의 조상일 것이라는 학설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종족들의 수효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여 진다.이사바텐 족 다음으로 북부 사하라에 도착한 부족은 모로코 남부에서 B.C 4세기경에 서아프리카로 이주해온 두 집단이었다. 이들 집단들은 켈 호갈의 쿠디아(Koudia)에 근거지를 확보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유명했던 티 은 히나네(Ti-n-Hinane) 여왕이 부족사회에서 수장의 지위를 확보함으로써 A.D 4세기까지 투아레그 족 연방에 훌륭한 수장들을 속출하게 하여 대를 이어주게 하였다. 투아레그 족 사회는 아메노칼(Amenokal)의 영도 아래 타 부족이나 불청객이 그들의 주거지인 쿠디아로 접근하거나 정착하려고 할 때는 거족적으로 단결하여 이를 경계하면서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 인해 켈 호갈을 중심으로 한 사하라 북부에는 투아레그 족 이 외에 어떠한 다른 부족들도 쉽게 들어올 수 없었고 타 부족들의 세력이 이들을 지배할 수도 없었다. 이에 그들의 근거지인 켈 호갈을 벗어나서 동쪽의 칼 아제르, 남쪽은 켈 아이르를 지나 말리의 북부 중심도시인 팀북투에까지 활동무대를 확장했다. 당시 사막 유목민의 행동반경들이 그와 같이 광대해질 수 있었던 것은 사막을 주 무대로 날쌘 낙타를 이용한 기습 부대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서부 사하라 사막에 약 8세기경에 형성되었다고 보여 지는 흑인 왕국들은 현재의 모리타니 남동부를 중심으로 말리, 알제리의 일부에 걸쳐 판도를 형성했다. 특히 가나 지역에 자리 잡은 가나 왕국은 원래 왕의 호칭으로 인해 국가를 아우칼(Aukal)이라 지칭했다. 사하라 남쪽 초원에 형성된 말리, 송가이 등 흑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교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여 교역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국가의 주요한 역할과 경제적 기반이었다. 교역의 중심에는 사하라 사막에서 소금을 발굴하여 운반하던 암염과 서아프리카에서 대량으로 채굴하던 금이 있었다. 서아프리카의 금에 대해서는 이란 출신의 지지가 이븐 알 파끼(Ibn al-Faqīh)가 언급하기를 &lsquo;가나에서 금은 모래 속에서 당근처럼 돋아난다. 사람들은 그것을 새벽에 채취하러 간다.&rsquo;고 10세기 초에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과장된 소문까지 퍼졌다.한편 황금의 산지인 사하라 남쪽의 이 흑인 국가에서는 소금이 부족했다. 이 소금과 금의 교역으로 인해 가나를 비롯한 초기 흑인 국가들이 형성되어 번영하게 되었다. 가나에 대해서 11세기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비아 지지가인 알 바크리(Al-Bakri)는 &lsquo;왕은 국가로 들어오는 소금은 당나귀 한 마리의 짐에 1디나르의 금을, 밖으로 나가는 소금에 대해서는 2디나르의 금을 징수한다. 사금을 채취하는 것은 주민에게 맡기나 금괴는 왕의 소유다&rsquo;라고 기록하고 있다. 가나의 도시들은 비(非) 이슬람 교도였던 왕과 신하, 기마병이 존재했고 가나 왕은 전쟁이 있으면 20만 명의 전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술사 등이 사는 마을로 여기서 6,000보 떨어진 장소에 이슬람교도인 북아프리카 상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을이 생겨났다. 그 이후 이 지방의 건조화와 장거리 교역 중개지의 동방 이동에 의해서 가나 왕국은 쇠퇴했고 1076~1077년에 이슬람교도인 무라비트 왕조의 공격을 받아 붕괴했다. 13세기 이후에는 가나 남방에 새로 발생한 말리 제국의 세력 하에서 하나의 지방 국가로 존속했다. 고대, 중세 시대의 서아프라카는 유럽 세계나 미국 따위의 국가가 감히 비비지 못할 정도의 화려한 문명이 있었던 곳이었다. 한국인들이 감히 미개하다며 비하할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니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6:52:2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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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以小人之心度君子之腹</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8</link>
			<description><![CDATA[사람들은 남의 생각을 직접 알지는 못한다. 그 때문에 남의 생각을 겉에 드러나는 행위를 보고 헤아린다. 그 測量의 기준은 자기의 이다.&nbsp;사람들 사이에 흔히들 말하는 疏通의 부족은 바로 이 관계식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식의 사람들 간의 차이는 그 개성만큼 다양하지만 크게 君子와 小人의 다름에서 비롯된다.&nbsp;이를테면&nbsp;君子가 어려운 처지의&nbsp;小人을 위해&nbsp;善意를 베푼다.&nbsp;그런데&nbsp;小人은&nbsp;君子의&nbsp;行爲의 근거를 자기의 사고방식에 비추어 생각한다.&nbsp;즉&nbsp;自己(小人)의 행위규범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행하는 것이니 그(君子)가 자기를 그만큼 필요로 해서 그런 것으로 안다.&nbsp;그에 따라&nbsp;善意가 더해질수록 오히려&nbsp;放恣해지는 역효과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nbsp;君子의 규범을 따르려는 자도 현실의 생활기반을 지키려면&nbsp;善意를 줄 때&nbsp;對方의 인품을&nbsp;勘案하여야 하는 것이다.&nbsp;이러한 疏通의 문제는 꼭 도와줄 사람이 君子일 경우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한 志士가 大義를 널리 펴고자 有力한 名士를 찾아가 도움을 請하였으나 大義에 關한 同意는 얻지 못하고 단지 그 名士는 자기 밑에 들어와 屬하면 얻을 利得만을 提示하는 경우이다.&nbsp;또한 우리는 自身도 모르게 타인의 施惠의 動機를 낮추어 생각하여 以小人之心度君子之腹하는 일은 없나 돌아봐야 할 것이다.&nbsp;2008-10-16 오전 10:17:00]]></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Sun, 31 May 2026 12:58: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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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해체</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5</link>
			<description><![CDATA[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nbsp;몬테네그로의 역사적 수도인 체티네(Cetinje)에서 열린 크리스마스 이브(바드니 단, Badnji dan) 전통 행사 및 이와 결합된 민족주의 집회 모습, 출처 : DW.com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nbsp;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39;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39;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nbsp;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nbsp;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2:50:4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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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특색있는 루마니아 사람들과 문화</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4</link>
			<description><![CDATA[루마니아 인종들은 민족성 자체가 밝다. 그리고 매우 긍정적이고 성격은 다혈질이며 루마니아 인들은 전반적으로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어디를 가든 가무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는 음주가무의 천국인데 전통적인 결혼식에서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의 전통은 가수나 악단을 불러 밤새도록 춤추고 먹고 마시는 것이 보통이며,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악단이 집집마다 연주하며 다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지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루마니아 특유의 국민성이다. 어찌나 춤을 많이 추는지 장거리 고속버스 안에서도 관광버스처럼 춤추고 노는 것도 일상인 사람들이다. 루마니아는 국민 종교인 정교에 대한 종교심은 깊은 편이지만 러시아 정교회와는 달리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술과 할로윈 파티 귀신분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제법 많은 것에 비하면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nbsp;루마니아 부쿠레슈티 인근의 브라네스티(Brănești) 지역에서 매년 열리는 전통 봄맞이 축제인 &#39;뻐꾸기의 날(Ziua Cucului 또는 Cucii)&#39;의 한 장면, 출처 : Casa Atl&acirc;ntica당장 국민 1인당 술 소비량 부터가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들어가며, 마녀가 직업으로도 인정된다. 우선 드라큘라부터가 사실상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국민 귀신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컬러 TV의 도입이 가장 늦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의 국영방송안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나(Televiziunea Rom&acirc;nă)의 TV방송 시작은 1956년에 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TV 송출이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컬러 방송은 북한보다도 10년이나 늦은 1983년부터 송출되었다. 그마저도 컬러 방송이 완전히 정착한 것은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부터이다. 1990년도 이후에서야 컬러 방송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는 모두 흑백방송으로 채워진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컬러 중계는 모두 외국이나 서유럽에서 송출된 것이고 루마니아 국영으로 방송된 것들은 모두 흑백이라 보면 된다. 물론 차우셰스쿠 시대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선전 방송이 위주였고 그나마 1980년대에는 에너지를 절약한다며 방송시간을 평일 2시간, 주말 3시간으로 줄였다.&nbsp;그리고 TV 채널도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이면서 사실상의 국민들의 선택권을 박탈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외국 프로그램도 상당량 수입하였는데 특히 달라스나 디즈니에서 제작한 만화 같은 미국 TV프로그램도 편성했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반소감정이 있고 친중 및 친북을 했던 국가였기에 생각보다 소련의 방송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북한의 채널들을 많이 수입했었다고 한다. 필자의 루마니아 지인들의 당시 회상을 듣다보면 북한 김일성의 교시도 그대로 송출이 되어 자신들도 어이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정도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좋아하고 그의 정책 모델을 상당수 따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루마니아 TVR이 BBC와 제휴를 맺으면서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을 정도로 제법 선진적인 방송을 도입했었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침체가 이어지자 이 방송들조차도 거의 방영이 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악화일로였던 북한조차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TV 채널을 줄이지는 않았다고 한다.&nbsp;그래서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은 자국 TV 채널을 버리고 이웃인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소련, 헝가리의 TV 방송을 몰래 시청했고, 불가리아 TV 편성 정보도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TV 만화와 불가리아 영화도 이 시기 루마니아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으며 불가리아의 당시 연예인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었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에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국영방송을 공영방송으로 전환하고 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루마니아는 소련에서도 하던 광고방송을 그동안 하지 않았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광고, CF 방송을 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시간도 다시 확대했으며, 민영방송을 허용하면서 급격히 상업화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방송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들이 많아 낙하산 문제라든가 정치 언론의 유착 문제 등이 대두되기도 하였지만 차우셰스쿠 때보다는 매우 재미있어지고 다채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마니아의 방송 환경은 대만과도 비슷한데 시청률 10%를 넘는 채널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고 자국의 지상파 채널은 시청률이 더 낮아서 지상파 방송에 대한 존폐성이 부각되었다.&nbsp;그래서 미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인도 드라마, 터키 드라마, 텔레노벨라 등 다양한 외국 드라마들이 수입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국 드라마도 많이 방영되었고 K-POP도 흥행을 타면서 루마니아의 지상파 시청률은 다시 올라가 현재는 시청률이 다른 케이블 방송 못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헌법상의 결혼 개념을 &#39;배우자 간 결합&#39; 에서 &#39;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39;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2018년 10월 6일과 7일에 실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개헌을 통해 동성 결혼의 허용을 막으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 지지파로는 보수성향의 비정부 기구인 &#39;가족 연대&#39; 와 루마니아 정교회 등이 대표적으로 신부들은 신도들에게 예배 후 투표 참여를 독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루마니아에서 동성결혼은 현재도 불법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헌법상 결혼이 &#39;배우자 간 결합&#39;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nbsp;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리 결혼 개념을 &#39;남녀간 결합&#39;으로 못박아 놓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율이 최소 30%를 넘어야 하는데 결국 투표율이 5.72%로 저조해 자연히 무산되었다. 당시 루마니아 인들에게 있어 남녀 간의 결혼이나 결합은 당연한데 굳이 이런 것까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 투표율이 턱없이 낮았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의 문화에 의하면 루마니아는 2월, 3월, 7월, 8월, 9월, 10월에는 공휴일이 전혀 없으며 대체휴일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과 같이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면 12월 1일 국경절 이후 1월 24일 통일의 날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없게 되는데 이는 루마니아 인들은 열심히 직장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빚어진 차우셰스쿠의 노동 정책의 반영 때문이다. 루마니아 인들의 정서상 일하고 가족에게 충실해야 하다는 것은 당연한 문화라고 보기에 이 공휴일 많지 않은 노동 정책은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가장 공휴일이 적은 나라가 루마니아이기도 하다.&nbsp;그러나 거룩하게 쉬어야 하는 일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을 가는데 소금 광산을 개조한 살리나 투르다(Salina Turda)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 놀이공원으로 무려 지하 120m에 달한다. 매 일요일마다 살리나 투르다 같은 놀이 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2:49:1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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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울란바타르에서 보낸 4개월</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103</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종철 ]몽골에서 보낸 4개월지난 8월 22일 밤에 울란바타르에 들어왔으니까 오늘 부로 거진 4달이 되어가는 군요. 처음에 들어와서 날씨도 좋고 신기한 마음에 이곳 저곳 관광도 많이 다니기도 했지요.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온게 놀러 온 것이 아니라 를 설립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기 위해서 온 것이지요. 지난 4개월을 가만 돌이켜 보면서 내가 했던 일을 크게 몇 가지 정리해볼 수 있군요.&nbsp;1. 의 행사를 주관했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사람도 잘 모르는 상태라 주변의 교수들이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그래도 성황리에 행사를 치뤘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몽골 대학생들이 자신의 전통에 대해 자극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후레대에서 열린 강연은 몽골 국립대와 과학기술대 2군데를 합친 참석인원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후레대에서 참석한 인원이 150여명이 되었는데, 두 대학을 합친 곳에서는 30명이 안되었지요. 그만큼 후레대에서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이 행사 덕분에 후레대의 이공계통 교수들도 인문학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은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nbsp;2. 매주 정기적으로 수요일에 모이는 UB 포럼을 통해 사람들도 사귀고 보다 전문적인 분야의 협력을 구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피상적인 모임인 것 같아서 한 2달 정도 나가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곳에 보면 여러 형태의 자문관(Adviser)들을 만나는데 이들을 보면 할 일 없이 시간 때우기 위해 돌아다니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 자문관들은 대개 현직에서 정년 퇴직하고 자신들의 숙련된 노하우를 가지고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월 4천 달라에다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거진 5천 달라를 받습니다. 이 정도면 몽골 대통령보다 더 많은 수입이지요. 거의 몽골 돈으로 1,200만 투그릭을 받는 셈인데 과연 그 정도의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많이 들더군요. 여러 모임들에 가다 보면 거진 시간 때우기 형태로 얼굴을 들이 대미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지요. 이곳 대학의 한국어과에서 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좀 더 이들에 대한 실태를 파악해서 나중에 보고서라도 하나 써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nbsp;3. 후레 대학의 폰사 교수가 단국대에서 운영하는 해외 차세대 한국학자 심포지움에 응모를 했는데 합격을 했습니다. 체재비와 왕복 항공료를 단국대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지요. 폰사 교수의 신청서를 내가 다 써줬습니다. 처음에 써온 글을 보니까 도저히 그대로 제출할 수가 없어서 내가 다시 써줬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고맙다고 하면서 점심 한 번 사겠다고 하더니 그냥 입을 딱 씼더라고요. 이곳 한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인들이 너무 퍼주기 형태로 몽골을 대하다 보니 몽골 사람들이 공짜 심리가 강하다고요. 내가 이런 경우를 몇 번 경험해봤습니다. 수교한 이래 20년이 넘도록 사실 한국이 몽골에 퍼준 돈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생색 내는 형태로, 그리고 공짜로 하다 보니 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일본은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시스템이나 인프라를 깔아줘서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한국은 대부분 유명인사들 중심으로 퍼주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지난 아셈회의하면서 박근혜가 다녀갈 때 10억달라 MOU 체결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생각날 겁니다. 덕분에 몽골인들도 한국인 상대할 때 퍼주는 것을 당연시한다고 합니다. 별론 좋은 것은 아니지요.&nbsp;4. 내가 이번 학기 강의를 하지 않았지만 4학년 논문 지도는 무료로 담당했습니다. 매주 보통 4명에서 6명 정도 참석을 했는데 들락 거리는 학생들이 몇 명 있습니다. 몽골 학생들을 대하면서 기초 학력 혹은 교양부문에 대한 훈련이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조차 잘 모르는 경우를 보았지요. 후레 대학의 한계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몽골 대학생들의 수준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요. 그래서 총장한테 교양 교육을 강화하자고 제안을 했지만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냥 기술자 양성 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학교의 방침이나 운영과 관련해서 총장과 몇 번 의견 충돌이 있고 나서 부터는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관심갖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왜 공부를 하느냐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낮아서 한국으로 유학을 가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번 한중연 대학원에 진학한 몽골 학생들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더군요. 이곳 대학에서는 한국 유학 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nbsp;&nbsp;구글 이미지5. 11월 1일 자로 를 외형적으로 설립을 했습니다. 총장 지시로 처장 회의를 통과했지요. 하지만 총장 말인즉슨 단 한 푼도 지원해줄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교학처장도 필요한 법적 조치는 얼마든지 도와주겠지만 학교 재정상 도와주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만나면 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지요. 그나마 깐깐한 행정 처장이 간단한 비품이나 비용들은 지원해주는 편입니다.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아직 없지만 책꽂이 2개 정도는 마련해주겠다고 합니다. 그 밖에는 거의 빈약한 내 호주머니 털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게 수군작 선생이 간판 글씨도 무료로 써주었고 표구 비용은 사업하는 권상근 대표가 도와주어서 드디어 간판을 달았습니다. 한 마디로 감개가 무량하지요. 몽골에 온 지 100일만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인하대학의 김영 교수님이 도서를 25권 정도 기증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운영 비용이나 기타 연구소 관련해서 기금도 조성을 하고 프로젝트로 끌어오려고 하는데 참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 겨울에 그 준비를 할 겁니다.&nbsp;6. 어제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이곳에 와서 박사 논문을 하나 도와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인데 오래 전 내 수업도 들었던 분입니다. 철학 박사 논문을 쓰는 일에만 전념해도 쉽지 않은데 해외에서 선교사업을 하면서 틈틈히 과정도 이수하다가 몇 년 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데드라인이지요. 그 마지막 학기에 내가 몽골에 도착하니까 이분은 천우신조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청하더군요. 보니까 논문 쓰느라고 준비도 많이 했고 직접 작성을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더군요. 하지만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지 않다 보니까 구성이나 논리, 그리고 표현들에서 서툰게 많이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난감했지만 마지막 학기라 더 이상 물러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요. 그걸 몇 개월 동안 같이 씨름하면서 많이 교정을 해주고 표현도 잡아주고 논리와 논증도 신경써주었습니다. 1차 예심을 무사히 통과하고 그 이후 2차 본심에서 한 번 보류도 되고 하면서 고생하는 모습도 많이 봤습니다. 보류되고 나서 마지막 열흘 동안에는 거의 실시간적으로 자문도 해주었지요. 내가 이런 걸 보면서 한국의 학위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한국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 써논 논문이 잘됐는지 심사만 하는 것을 자신들의 본분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까 논문을 쓰면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정말 한국 대학이 자체 브랜드로 학위를 배출하려면 지금과 같은 논문 작성과 심사를 완전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고생 고생하다가 마침내 어제 날자로 심사위원들 전원 일치로 합격 했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내 도움이 컸다고 아주 고마워 하더군요. 나도 그동안 신경 쓴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몽골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목사 사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물론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니지만 어려울 때 마음 써주는 사모님 마음이 보통이 아닙니다.&nbsp;7. 이제 올 해도 보름 정도 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루카치의 2권의 일부를 금년 말까지 출판사에 넘기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1권은 몽골로 오기 직전에 마무리해서 넘겼습니다. 과거에 꼼꼼히 번역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최종적으로 넘기면서 다시 보니까 문제가 많이 보입니다. 원문 자체가 난삽한 면도 있고 생각이 분명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원고를 금년 말까지 다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한국에서라면 연말 연시 술자리도 많은데 다행히 이곳은 한 없이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라 이런 작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편이더군요. 이 원고까지 완성해서 30일 정도에 넘기면 몽골에 도착해서 4개월 남짓 벌려 놓은 여러 가지 일도 대충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월급 한 푼 안받고 몽골 땅에 와서 좌충우돌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새롭게 경험하고 내 일에 집중한 일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라면 늘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자괴감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어려워도 무언가 보람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nbsp;8. 내년 1월 2일 자로 저는 한국에 들어갑니다. 처음 몽골에 왔을 때는 추운 겨울을 한 번 지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몽골의 겨울을 내가 버티기에는 너무 환경이 좋지 않더군요. 12월 들어서 눈이 좀 덜 내리기는 했지만 평균 20도 이하에다가 빙판이 많고 매연도 너무 심합니다. 무엇보다 대기 오염이 심해서 실내의 창문을 거의 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마스크를 하고 있지요. 겨울에는 울란바타르 주변의 판자촌과 게르, 그리고 발전소에 뿜어대는 매연이 분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거대한 띠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결빙된 곳을 피하는 것 이상으로 무수히 많은 가래침들을 피하는 것도 일 중의 하나입니다. 대기 오염으로 폐암 환자들도 많지요. 그래서 이곳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어제도 학교에 가봤더니 식당은 몽골 직원들을 위해 운영하지만 학생들도 없고 해서 썰렁하더군요. 저도 친구들한테 도움을 구해가지고 한국가는 비행기표를 마련했습니다. 나를 믿고 도와주는 친구들이 고맙지요. 내가 그 친구들 이름을 일일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연구소를 함께 키워나간 산증인으로 돌에 이름을 새겨놓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 달 여 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재충전도 하고 새롭게 각오도 다지고 또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도움도 구해보려고 합니다.&nbsp;9. 내가 생각하기에도 돈 한 푼 없이, 외부 지원 하나 없이 이렇게 홀홀 단신으로 울란바타르에 온 것 자체가 동키호테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몇 몇 친구들이 뜻이 가상하다고 해서 지원해준 돈이 조금 있었지만 처음 정착하고 몇 개월 생활하면서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한국학 연구소를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내 전공은 서양 근대 철학이기도 해서 약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상태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한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지 나 자신도 압니다. 그런 약점을 메우기 위해서 그만큼 내가 노력도 하고 준비도 하고 있지요. 사실 독자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서양 따지고 근대니 고대 따지고, 또 한국학이니 북방학이니 하는 것이 부당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후레 대학 한국어과에서 강의하는 문제도 전공이 아니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더군요. 이런 상태로 프로젝트를 유치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 점에서 본다면 나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벤처 사업가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몇 개월 뛰어 다니면서 다른 대학의 연구자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서서히 모색하고 있습니다. 당장 테마만 좋으면 이웃에 있는 의 몽골 교수들하고 합작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학의 마이클 손 총장이 먼저 나에게 제안했다는 것을 일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지요.&nbsp;이제 4개월 남짓하지만 성과가 없는게 아닌데 몽골어도 습득하고 여러가지 준비한 작업들을 차분히 해 나가다보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곳에 와서 한국에서 하기 힘든 다른 분야의 독서를 많이 하고 있고, 새로운 생각들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설령 내가 이곳에서 벌린 일들이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소프트한 나의 지적 자산으로 남을 수 있지요. 나는 그 점에서 낙관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몇 년 동안 새로 시도하는 실험들이 노년의 30년을 끌어갈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돈을 벌지 못해 안해에게 한 없이 미안한 마음도 크지요. 연말도 되고 해서 그냥 두서 없이 감회를 적었지만 이런 것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가 겪고 생각한 것들입니다. 내 벗님들도 관심을 갖고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2016.12.10)]]></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22:36:2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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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공지능(AI)의 양면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98</link>
			<description><![CDATA[[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종철 ]﻿이미 10년이나 지났지만 알파고(Alphago)와 이 세돌의 대국은 승패를 떠나 기술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인간 최고의 두뇌 놀이라고 할 &lsquo;바둑&rsquo;에서 조차 인공지능(AI)은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한 인공 지능 바둑은 오히려 프로 기사들을 학습시키는 강력한 훈련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nbsp;오늘 날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이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대해 사람들은 놀라워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만든 모든 발명품들은 인간의 여러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자의식을 갖고 자율 판단을 할 가능성을 안고 있고, 자기 주도에 의한 자기 학습으로 인해 지식의 비약적 성장이 가능하고, 강력한 클라우드 시스템과 넷트웍 기능으로 인해 학습 능력의 발전 한계를 예단할 수 없는 기계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해 우려할만도 하다.&nbsp;과거 산업 혁명 당시 러다이트 운동이 벌어졌던 것처럼, 오늘 날에도 인공 지능의 미래에 대해 비슷한 태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 맹신이 사태의 본질을 흐릴 수 있듯, 무조건적 거부 역시 무지의 양면일 뿐이며, 인위적으로 기술의 발전을 거부하기도 힘들다. 과학자들의 &lsquo;프랑켄슈타인 실험실&rsquo;의 경우처럼 과학 기술에 대한 탐구를 막기가 힘들고, 경제나 산업 혹은 군사적인 동기의 자극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경제 발전의 핵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오늘 날 전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인공지능, 로봇, 바이오, 사물 인터넷과 같은 신기술은 4차 산업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데 과연 인간은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nbsp;그리스 신화에는 기술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신들의 뜻을 거역하고 온갖 기술에 관한 지혜를 불과 함께 훔쳐내서 인간에게 전달한 영웅(英雄)이다. 그는 이 죄로 카우카소스 산에 묶여 매일같이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고통을 당한다. 인류의 기술 문명을 상징하는 이 &lsquo;프로메테우스의 불&rsquo;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을 획득하고 그 편의성을 누리는 데는 희생과 고통 같은 반대급부도 따른다는 것을 이 신화가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다른 한편 기술의 도구적 성격은 그것을 운영하는 인간의 자만심을 부추길 수도 있다. 아라크네(Arachne)는 길쌈과 자수의 명인(名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람들이 그녀의 솜씨를 아테네 여신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하자 아라크네는 그것을 부인한다. 한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 있을 수 없듯, 기술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술 발달의 역사에 비추어보면 이런 경쟁이 무수히 많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경쟁에 진 기술은 역사의 이면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당장 인터넷 브라우저의 시장에서도 초창기 넷스케이프가 MS 사의 익스플로어에 밀려 사라졌고, 마찬가지로 구글의 크롬에 의해 익스플로어나 엣지의 시장 점유율도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기술 패권주의를 앞세운 아라크네는 자기 기술이 경쟁자 보다 우월하다는 자만심을 표현한 것이다. 분노한 아테네 여신이 할머니로 변신해 아라크네와 솜씨를 겨뤄 이긴다. 이 대결에서 진 아라크네는 거미가 되는 저주를 받는다. 무엇보다 기술을 과신한 아라크네의 &lsquo;오만&rsquo;(hybris)이 큰 원인이다. 다이달로스(Daedalus)는 그리스의 유명한 장인(匠人)이자 크레타 섬의 미로 성을 건축한 장본인이다. 이 성은 영웅 테세우스(Theseus)가 이 성에 갇혔다가 아드리아드네의 실을 잡고 탈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를 도운 죄로 다이달로스는 아들 이카루스와 함께 이 성의 탑 안에 갇혔다. 하지만 다이달로스는 뛰어난 발명가 답게 밀납 날개를 만들어 탈출을 시도했다. 비행을 하기 전 다이달로스는 아들에게 밀납이 녹을 수 있을지 모르니 하늘 높이 올라가지 말도록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이카루스(Icarus)는 날개를 과신한 나머지 아버지의 말을 어겼다가 추락하고 말았다. 같은 날개를 달고서 이카루스가 실패한 반면,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에게 해를 넘어 탈출에 성공한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nbsp;그리스 신화는 현대의 새로운 기술에 대해 인간이 태도를 정향하는 데 지혜를 줄 수 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서 보듯, 기술의 혜택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와 고통이 수반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당장 인공지능의 비약적 발전이 대량 실업을 가져올 수 있다는 진단이 있다. 인간의 지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출현이 인류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lsquo;터미네이터 시나리오&rsquo;의 공포 이야기도 심심찮게 나온다. 이와 관련해 기술 발전의 양면성을 둘러싼 다양한 논쟁이 요구되고, 그 위험에 따른 심각한 대비, 특히 윤리적이고 법적인 대비가 필요하다. 기술은 단순히 도구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간의 관계의 재편성을 요구할 수 있다. 마르크스가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모순을 지적한 바 있는 것처럼, 이전의 어떤 기술과도 다른 인공 지능의 경우에는 교육 시스템의 변화와 작업 방식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아라크네의 신화에서 보듯, 기술을 과신하는 인간의 &lsquo;오만&rsquo;이나 통제되지 않는 기술이 문명의 존립을 위협할 수도 있다. 첨단 기술이 동원된 20세기의 1,2차 세계대전은 인간이 이룩한 최고의 기술 문명이 인류를 멸망시킬 가능성도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문명의 자기파괴에서 유명한 &lsquo;죽음의 본능&rsquo;(타나토스)이론을 발전시켰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보존이라는 생명의 본능이 1차적 목표인데, 왜 인간은 자신들이 세운 문명을 스스로 파괴하려 하는 가가 프로이트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했던 것이다. 이카루스와 다이달로스의 예는 동일한 기술에 대해 인간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상징한다. 기술에 자만한 인간은 오히려 그 기술에 의해 몰락할 수 있고, 기술의 특성을 이해한 인간의 사용과 지배는 인간의 능력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기술이 아니라 그 기술을 운용하는 인간의 태도이며, 그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에도 있다는 것이다.﻿&nbsp;]]></description>
			<author>이종철</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05:54:24 +0900</pubDate>
		</item>
		<item>
			<title>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독립파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의 등장 (上편)</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97</link>
			<description><![CDATA[유고슬라비아가 1992년에 붕괴되면서, 유고슬라비아에 남은 2개의 공화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마침내 공산주의를 포기했다. 이 때도 국민투표가 펼쳐지게 되는데 이 때의 국민투표는 예상과 다르게 매우 평화롭게 진행되면서 진정한 민주주의에 기초하게 된다. 이리하여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결성되면서 신(新) 유고슬라비아로 불리게 되었고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이라 불리며 국제 무대에 정식 승인되었다. 몬테네그로 지역은 1992년부터 벌어지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 보스니아 내전 등을 피해갈 수 있었으며 이는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와 달리 실제 전쟁을 통한 이해 당사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신 유고슬라비아 구성 국가들 중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 연방 유지를 지지했던 국가였다. 이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92년 국민투표에서도 96%가 유고슬라비아 연방 잔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 때에도 보스니아나 크로아티아의 영향을 받은 독립파는 국민투표를 보이콧 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분열할 가능성은 존재하고 있었다.몬테네그로의 현대사를 이끈 거물 정치가인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 전 대통령, 출처 : European Parliament그러나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와의 전쟁과 보스니아 내전, 이후에 발생한 코소보 전쟁에서 신유고슬라비아가 매우 실망스런 행적을 보이게 되면서, 내전으로 인해 경제가 완전히 피폐해지자, 몬테네그로의 독립파들은 이를 근거로 세르비아와의 연합파를 공격하는 테러를 저지른다. 이 사건은 티토그라드 (현 포드고리차)의 국영 우체국과 인근 경찰서에 총격을 벌이는 테러를 저지른 것인데 이로 인해 보스니아 지역에 비해 치안이 그나마 안전한 몬테네그로으 민심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세르비아와의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를 지지했던 모미르 불라토비치(Momir Bulatović) 몬테네그로 대통령은 서방의 제재를 받아 경제적인 형편이 나아지지 않자 국민들 다수가 독립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독립파의 중심 인물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는 세르비아를 버리고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처럼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0년대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밀로셰비치 정권과 협력했으나으로 밀로셰비치 정권의 지지가 약화되고 블라토비치도 지지력이 떨어지자 독자행동으로 노선을 갈아탄 것이다.&nbsp;사실 몬테네그로의 기원을 따지고 보면 세르비아인과는 같은 민족이었으며 같은 문화도 향유했다. 그러나 여기에 민족적 정체성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근대 시대부터로 알려져 있는데 크로아티아와 같이 이탈리아와 가까이 했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이탈리아 왕국의 직할령으로 지배를 받았다. 즉 정체성이 세르비아와 이탈리아, 양 국가 및 민족에서 혼선이 빚어진 셈이다. 특히 몬테네그로 남부, 쉬코데르 호수 일대 거주민들은 알바니아계가 많았기에 사실상 몬테네그로의 정체성은 어디에다 특정지어야 할지 명확한 결론조차도 없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시절 때는 세르비아인이어도 몬테네그로에 살면 몬테네그로인이라는 식으로 인구 조사에 응답하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다. 그러니까 딱히 세르비아인이라는 판단보다는 지역적, 속지주의적(Territorial principle)인 입장을 상당수가 고수했다는 것이다.&nbsp;지금도 본인 정체성을 세르비아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몬테네그로 인구의 30% 가까이 되지만 나머지는 속지주의적 정체성을 고수해 몬테네그로 토착민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집단 서방의 제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자주 교역하던 이탈리아의 관계도 끊기게 되었고 이는 오히려 세르비아보다 상황이 더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nbsp;보스니아 내전으로 인한 집단 서방의 제재는 몬테네그로 내 지독한 인플레이션으로 어디에도 지원 받지 못한 채,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이 때 주카노비치가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내세운 것은 그동안 사용해 온 화폐인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버리는 것이었다. 당시 신유고슬라비아는 1994년부터 화폐 개혁을 통해 노비 디나르(Novi Dinar)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아예 고정환을 독일 마르크로 정하고 통화가 새어나가지 못하게 방지했다. 그로 인해 통화가 부족하여 한동안 이로 인해 은행 앞 집단 시위로 혼란을 가져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하이퍼 인플레를 방어하는데는 성공한 화폐가 되었다. 그러나 1994년에 무려 500,000,000,000디나르 지폐까지 나오고 두 달 뒤에 정상적으로 화폐의 단위를 내렸지만 이 또한 20일 밖에 운영되지 못하고 디나르 화폐를 다시 도입하는 등, 혼란은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는지라 주카노비치 총리 입장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결국 1996년 주카노비치는 독일로 가서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주카노비치는 몬테네그로의 화폐 단위로 독일 마르크를 전격으로 도입하기로 합의를 보고 독일을 위시한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이에 지지의사를 밝혀오면서 결국 독일 마르크가 몬테네그로의 고정 화폐가 된다.&nbsp;블라토비치 대통령과 세르비아계는 이에 집단반발했다. 세르비아계는 주카노비치가 독일과 프랑스, 영국을 배경으로 신유고슬라비아 자채를 해체시키며 근간을 흔들려 한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주카노비치의 조부인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의 전쟁 범죄 이력까지 공개하며 "아직도 나치를 끊지 못하고 있다(Још увек не може да престане да буде нациста)."며 적극 비난했다. 이 얘기가 나온 이유는 블라조 주카노비치(Blažo Đukanovic)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체트니치에 속한 상태에서 수많은 유태인과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하는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그는 체트니치 소속의 중장 계급이었고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몬테네그로를 점령했던 당시 고위 협력자였다. 그 이유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베오그라드 전범재판에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러한 체트니치에서 활동 이력은 연좌제처럼 대를 이어 손자인 총리, 밀로 주카노비치(Milo Đukanović)에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유고로부터 독립에 찬성하는 독립파들은 독일의 지원을 마다하지 않았고 이에 항변한 불라토비치 대통령은 1998년에 총리 주카노비치에 의해 밀려나 대통령을 사임했다.&nbsp;주카노비치가 대통령이 되면서 몬테네그로는 독립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지만 여기에서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경제적으로 최악인 상태에서 이를 해결해 보기 위해 산업 민영화 정책을 시행했다. 1998년 당시 가치가 45억 달러로 추정되었던 몬테네그로의 산업은 결국 총 7억 3500만 달러에 매각되었고 이 매각한 개인 자본은 영국과 미국, 독일이 다시 사들였다. 결국 몬테네그로의 산업 민영화로 인한 국고 충당은 영국과 미국, 독일에게 대부분 저당 잡히고 만 것이다. 1998년에서 2014년 사이에 민영화된 198개 기업 중 176개가 파산했다. 국가 노동력의 4분의 1이 일자리를 잃었고 빈곤이 극에 달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있는 동안, 주카노비치의 재산은 눈덩이 불듯 불어났다. 2010년 5월 영국 신문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주카노비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도자 20인 중 하나로 선정되었는데 그와 같은 부의 축적이 시작된 것 또한 1998년 몬테네그로 산업 민영화 사태 때부터였다. 인디펜던트에 의하면 주카노비치의 약 1,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부의 출처를 "신비적"인 일이라고 설명했을 정도니 얼마나 급격히 재산이 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또한 주카노비치의 민영화 과정에서 그의 친인척들과 그와 유착된 몬테네그로 마피아들에게 많은 국가 자산이 넘어갔다. 그 뿐만이 아니다. 이 몬테네그로의 검은 돈은 돌고 돌아 판도라 페이퍼스(Pandora papers)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같은 상황은 현재 우크라이나와 다를게 없다. 다만 지금은 몬테네그로에서 그러한 악습들이 많이 없어졌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00:19:52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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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오스만투르크 바예지드 1세와 아미르 티무르의 쟁패</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95</link>
			<description><![CDATA[1402년 초 티무르는 다시 원정을 시작했다. 티무르의 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사기와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이 군대가 향할 곳은 드디어 그 바예지트가 다스리고 있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었다.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에 앞서 티무르는 카프카스의 조지아를 공격했으며 이 조지아 원정은 티무르에게 간만에 지하드의 완성이라는 기쁨을 안겨 주기도 했다. 조지아 원정을 마치자마자 티무르는 곧바로 동부 아나톨리아로 밀고 들어왔고 이번에야 말로 티무르와 결판을 내기로 결심한 바예지트는 수년 동안 계속했던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마저 포기한 이후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중부 아나톨리아의 요충지인 앙카라에 도착한 바예지트는 참모들과 향후 전략에 대해 논의했는데 참모들은 방어와 감시에 유리한 이곳 앙카라에서 티무르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간언했으나 바예지트는 티무르의 군대가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이 들어오기 전에 국경의 산지에서 요격하자고 주장했고 앙카라에는 소수의 병력만 남겨둔 후 동쪽 시바스로 나아갔다.&nbsp;폴란드의 오리엔탈리즘 화가 스타니스와프 흘레보프스키(Stanisław Chlebowski)가 1878년에 그린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힌 술탄 바예지드 1세(Sultan Bayezid prisoned by Timur)〉, 출처 : 우크라이나의 보리스 보즈니츠키 리보프 국립미술관그러나 그 사이 티무르는 기동력이 뛰어난 자신의 군대의 강점을 이용해 카이세리로 우회하여 비밀리에 오스만투르크 제국 영토 안으로 깊숙이 침투해 들어가는데 성공해 바예지트의 빈자리를 제대로 공략했고 곧바로 티무르는 대군을 이끌고 앙카라에 나타나 앙카라를 포위했다. 바예지트는 토카트에서 티무르의 분견대와 교전을 벌이고 나서야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에 놀란 바예지트는 앙카라로 황급히 회군했다. 그리고 7월 27일 앙카라를 포위하며 여유롭게 바예지트를 기다리던 티무르는 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전속력으로 회군하였기 때문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며 지친 오스만 군을 맞이하게 된다. 기세 좋게 공격하여 올라가던 두 제국이 맞붙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명확하게 양측 전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대의 기록은 티무르 군을 80만 내지는 120만으로, 오스만 군을 40만에서 80만까지 부풀리고 있어 오히려 혼란은 더한다.&nbsp;티무르는 이전까지 자신의 주요 원정에서 수십만 이상의 전력을 동원한 전례가 없으며, 바예지트 또한 마찬가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수치는 지나치게 과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로 인해 데이비드 니콜레(David Nicolle)는 티무르의 군을 14만, 바예지트의 군을 8만 5천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일한 니아즈(Ilhan Niaz)는 티무르 군을 10만, 오스만 군을 8만 5천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티무르 군은 시리아 원정에서 얻은 막대한 부를 활용해 전력을 최대한 증강시켰고, 아나톨리아 반도의 투르크계 공국들의 전력을 끌어 모아 티무르의 지휘 경력 상 최대 규모의 군대를 편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주력은 투르크-몽골 계열의 경기병이었으며, 인도 원정에서 획득한 다수의 전투 코끼리 또한 편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보병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티무르 군의 좌익 지휘는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자 후에 티무르 제국 3대 군주로써 명군이라 추앙 받는 샤 로흐였다. 그는 티무르의 손자로 2대 군주에 올랐다가 샤 로흐에게 찬탈당하는 할릴 술탄이 맡았고 우익 지휘는 티무르의 아들이자 할릴 술탄의 아버지인 미란 샤가 맡았다. 전위는 티무르의 손자인 아부 바크르가, 친위대는 티무르의 외손자인 술탄 후세인, 중앙군은 피르 무하메드가 맡았다. 물론 최고 지휘관은 티무르 자신이었다. 어느 정도 병과와 군제가 정돈된 티무르 군과는 달리 바예지트 1세의 오스만 군대는 여러 군대가 혼재한 혼성 군에 가까웠다. 술탄 자신은 1천 여의 예니체리들의 호위를 받았고 군의 주력은 시파히 기병들이었으나 투르크계 공국들이 파견한 병사들도 다수 있었다. 또한 발칸 반도의 유럽 봉신들도 다수 참전했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세르비아 공작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지휘하는 기병 5천에서 1만 명 가량이 주력이라 할 만 했다.&nbsp;오스만 군의 우익은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좌익은 바예지트 1세의 아들 슐레이만이 맡았다. 여기에도 최고 지휘관은 물론 바예지트 1세 본인이었다. 전투는 다음 날인 28일 오스만 군이 티무르 군에 선공을 걸면서 시작되었다. 급하게 돌아와서 피로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티무르 군이 이미 앙카라 일대의 물줄기를 돌려 수원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이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식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티무르 군을 돌파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바예지트의 패착이 되고 말았다. 앙카라에서 급하게 돌아온 이상 어쩔 수 없이 앙카라에 도착한 그 날 하루를 쉬고 다음 날 공격을 하기로 결정했는데 그 사이 앙카라 인근의 마을들을 약탈하느라 흩어져 있던 티무르의 군대가 재규합하는 시간을 준 것이다. 차라리 피로한 상태였더라도 앙카라에 도착한 27일 그날 티무르를 공격했으면 바예지트에게도 승산이 있었다.&nbsp;이 때 티무르는 오스만 군이 혼성 부대라는 약점을 이용해, 미리 아나톨리아 일대의 투르크 출신 병사들에게 밀사를 보내 이간질을 시도했는데, 이것이 적중했다. 급한 행군으로 인해 몹시 피로한 상태였던 오스만 군은 그래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공세를 감행하는 근성을 보였으나, 투르크계 공국들에서 파견한 병사들의 이탈이 계속되면서 결국 내부에서 혼란을 통솔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들 투르크 군뿐만 아니라 오스만 군의 중핵이었던 시파히까지 티무르 군에 항복하기 시작하자 오스만 군의 붕괴는 더 이상 막을 수 없었고, 얼마 안 가 패주하기 시작한다. 이에 티무르 군은 전과확대를 기도했고, 바예지트 1세는 예니체리를 중심으로 저항을 시도해 보았으나 티무르는 인도에서 데려온 전투 코끼리 부대를 내세워 이들을 공략했다. 이 때에 투르크 군이나 시파히 기병대보다 오히려 유럽 봉신 군대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더욱 충성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좌익을 지휘했던 슐레이만 또한 세르비아 기사단의 구원을 받고 간신히 포로 신세를 면했다고 한다.&nbsp;이들은 티무르 군의 화살로도 뚫리지 않는 중갑으로 인해 티무르 군의 진형을 여러 차례 헤집어 놓는 등, 그나마 가장 크게 활약했으며, 티무르로부터 마치 사자와 같이 전투를 벌였다는 칭찬까지 했다. 전황이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수준까지 치닫자 바예지트 1세는 도주를 기도했으나 실패, 포로로 잡혔다. 단 하루 만에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주력 군대가 제대로 된 전투를 치르지도 못하고 패배한 것이다.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전역을 장악하다시피 했다.]]></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Sat, 30 May 2026 00:12:54 +0900</pubDate>
		</item>
		<item>
			<title>프랑스 마린 르펜의 체포와 피선거권 박탈의 적법성</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92</link>
			<description><![CDATA[프랑스 대법원에서는 2025년 3월 31일, 마린 르펜에게 징역 4년 형을 선고하고, 그 중 절반인 2년의 집행을 유예한 이후 나머지 2년 형을 감옥에서 복역하는 것이 아니라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전자 발찌를 착용하는 등의 다른 방식으로 대체하여 복역하도록 했다. 또한 5년 간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판결을 내리면서 그녀의 2027년 프랑스 대선은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되었다.&nbsp;프랑스 보수주의의 상징으로 떠오른 인물 마린 르펜(Marine Le Pen), 출처 : populismstudies그러나 르펜은 항소하겠다고 하였으나 항소심에 뒤집혀 무죄 및 무혐의가 내려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한다. 물론 이 불가능한 현실이 이루어져 무죄 및 무혐의가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2027년까지의 판결 번복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런데 이같은 판결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프랑스 형법에서 프랑스의 수형자 &middot; 집행유예자, 선거 범죄자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 사항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nbsp;제432-10조 1항 - 공무원 등 공공 사무 취급자가 조세, 분담금 및 기타 공과금의 납부 의무가 없음을 알고도 세금, 분담금 및 기타 공과금을 납부 받거나, 징수하거나 또는 그 납부를 요구 또는 명하거나, 납부 의무금액을 초과하는 금액에 대하여 그 사정을 알면서 위와 같은 행위를 한 때에는 5년의 구금형 및 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nbsp;제432-12조 1항 - 공무원 등 공공사무취급자 또는 선거에 의하여 위임을 받은 자가 감독, 운영, 청산, 지급 등 업무의 전부 또는 일부를 수행함에 있어 그 대상 기업으로부터 또는 직무수행 과정에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익을 취득하거나, 수수하거나 또는 이를 유지하는 때에는 5년의 구금형 및 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제432-13조 1항 - 사기업에 대한 감시 &middot; 감독 업무, 사기업과의 계약체결 업무, 사기업의 영업활동에 대한 의견표명 업무를 담당하였던 공무원등 공공사무취급자가 직무종료후 5년 이내에 관계 사기업에 대한 용역, 자문 및 자금의 제공행위를 하거나 이를 승낙한 때에는 2년의 구금형 및 30,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제433-2조 1항 - 그 주체가 누구이건 재물의 수수, 요구 또는 약속을 한 경우 그 목적이 서훈 수여, 고용 제공, 계약 체결 기타 모든 사항에 관하여 공공 행정기관으로부터의 호혜적인 결정을 위한 법률상 또는 사실상의 영향력 행사에 있는 때에는 5년의 구금형 및 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nbsp;제321-1조 1항 - 장물취급이라 함은 정을 알면서 중죄 또는 경죄로 인하여 생긴 장물을 은닉, 취득 또는 양도하거나 양도를 알선하는 행위를 말한다.&nbsp;3항 - 장물취급은 5년의 구금형 및 375,000유로의 벌금에 처한다.르펜은 EU 자금 횡령과 유럽의회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로 기소되었고, 2024년 11월 14일 진행된 공판에서 검찰은&nbsp;르펜에게 징역 5년과 공직선거 출마 제한 5년을 비롯 벌금 30만 유로를 구형했다. 그런데 이는 엄연히 위헌이다.&nbsp;첫 번째, EU 자금 횡령에 대해서는 유로저스트(Eurojust)나 유럽 연합 사법재판소(Court of Justice of the European Union, 약칭 CJEU)에서 재판을 받으면 된다. EU 같은 경우는 국내에 있는 법률이 헌법의 규정에 맞지 않는 상황일 경우에 해당 국가의 법원에서 헌법과 법률을 해석하여 적합성의 심사를 하게 되어 있는데 결정은 해당 국가가 아니라 CJEU에서 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최종 판결은 프랑스가 아닌 브뤼셀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종 판결의 장소는 브뤼셀이 아니었고, EU 자금 횡령에 관련된 법무관들도 EU의 5 대국(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의 국적을 가지는 사람들이 참여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EU 사법재판소의 소장인 그리스 출신의 바실리오스 스쿠리스(Vassilios Skouris)는 아예 배제되었다. 이는 프랑스가 EU를 창설 때 맺은 로마 조약(Treaty of Rome)과 마스트리흐트 조약(Maastricht Treaty)을 위배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애초부터 르펜에게 씌워진 혐의인 EU 자금 횡령과 유럽의회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에 절대로 관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두 번째, 프랑스 사법부의 적법성 논란이다. 선출되지 않은 판사들이 선거와 정치에 간섭하는 것은 엄연한 삼권분립(Three branches of government)의 위반이다. 프랑스는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사법부가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사법권 독립의 보장자로서 최고 사법 위원회의 의장을 겸하고, 최고 사법 위원회가 대법관 및 고등 법원장 임명을 제청하게 되어 있는 등 사법권에 관하여도 대통령은 상당한 권한을 보유하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사법권이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따라서 르펜에게 이 같은 부적격한 판결이 내려진 것은 대통령 마크롱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다. 사법부가 행정부 수반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는 것은 누구든 정치적 보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현재 프랑스의 각종 사회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경제도 침체되어 있는데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막대한 지원 선동 및 러시아와의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모습 등으로 인해 그의 지지는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다. 마크롱 입장에서 르펜의 부상은 정치 생명까지 갉아 먹힐 수 있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세 번째, 프랑스의 형법을 보면, "프랑스의 수형자 &middot; 집행유예자, 선거 범죄자에 대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 제한 사항"을 두고 따져봤을 때, 적법한 조항이 없다. 즉, 프랑스의 수형자 &middot; 집행유예자, 선거 범죄자에 대한 4년 형은 존재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필자가 위에 나열한 항목들을 보면 죄다 1심에서 판결했던 5년 형으로만 골라 보았다. 여기에서 굳이 르펜에게 적용되는 혐의로 본다면 제432-12조 1항과 제321-1조 1-3항에 해당된다. 그런데 르펜은 지난 선거에도 마찬가지고 2027년 대선에서도 르펜에게 EU가 자금을 지원한 내용도, 그녀가 EU에서 자금을 횡령한 내용도 증거가 부족하다. 그리고 이는 어디까지나 프랑스 법에 의한 부분이지 EU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제321-1조 1항의 내용도 마찬가지로, 장물 취득과 관련된 계좌를 공개한 적도 없었고, 르펜의 차명 계좌가 있었다 할지라도 차명 계좌와 르펜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증명하지도 못했다. 유럽 의회 보좌진 허위 고용 혐의도 마찬가지다. 보좌진 중에 누구를 허위 고용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기소유예(Deferred Prosecution)를 할 수 있었겠지만 그럴 의지도 없어 보였다.&nbsp;※ 총평베네딕트 드 페르튀스 판사는 르펜이 EU 기금 400만 유로 이상을 횡령하고 그 돈으로 극우 정당의 국내 직원에게 급여를 지급하려는 음모의 중심에 있다고 판결했다. 그러나 문제는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는 말이 안 되는 판결이다. 따라서 이는 마크롱과 사법부가 결탁한 정치 보복(Political Retaliation)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런 식으로 야권 인사의 손 발을 묶고 경고를 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는 EU의 뜻이자 글로벌리스트들의 뜻일 가능성도 높다. 르펜은 이를 EU 사법재판소로 끌고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지만 EU 측이 재소를 거부한다면 방법이 없다. 그러면 최후의 방법이 있긴 하다. 그것은 자신의 지지자들과 시민들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결국 혁명으로 모든 걸 바꾸게 하는 방법이 현재로써는 르펜이 다시 대권에 도전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다.&nbsp;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법전의 위계도 추락했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들의 반발을 예상하여 이를 눈치 보는지, 아직까지 명령적 규범(Normes R&eacute;glementaires) 형태가 작동하기 전이다. 프랑스의 명령적 규범은 행정청이 발하는 규범, 즉 행정명령을 말하는 것인데 지난 31일에 선고가 되었지만 아직까지는 대통령과 총리가 발의하는 데크레(D&eacute;cret)가 발동하지 않고 있다. 결국 루마니아의 조르제스쿠에 이어 프랑스의 르펜마저 정치 보복으로 실각하게 된다면 EU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할 것이다. 과연 프랑스는 이 위기를 잘 이겨나갈 수 있을까?]]></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Fri, 29 May 2026 14:14:3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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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훌륭한 시도는 실패하더라도 위대하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83</link>
			<description><![CDATA[&ldquo;훌륭한 시도는 실패를 하더라도 위대하다&rdquo;&nbsp;오늘 이른 시간에 명동에 나와 지금도 있고 저녁까지 있으려고 한다. 내일 사전투표일 민생이 열리는 대한민국 에너지를 받고 싶어서다.두 여인1953년 전후 첫 다방은 여사장 강석연이 열은 모나리자였다. 전후 명동의 첫 주점은 여사장 이명숙이 열은 은성이었다.&nbsp;강석연은 가수였고 이명숙의 남편은 영화제작자였다.&nbsp;이 두 여성은 예술인들을 아꼈고 젊은이들을 소중히 생각했다.&nbsp;더 목마른 자들이기에 모나리자의 엽차는 시원하고 따뜻했다. 명동의 낮에는 모나리자가 청년들의 아지트였다. 화가 백영수 장욱진 김환기 등의 신사실주의 성향의 작가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작품을 전시했다.&nbsp;박인환 김수영 조병화 이봉구 정지용 전혜린 등이 오고 작가 지망생들은 이곳에 자신들이 쓴 작품을 두고 가면서 출판사 사장에 의해 선택되기를 기다렸다.&nbsp;후에 가게 문을 닫으며 강석연은 말했다. &lsquo;손님의 90%는 엽차만 마시고 갔고 차를 시킨 손님의 반은 외상이었다&nbsp;내가 미용실에서 번 돈으로 임대료와 인건비를 지불했지&rsquo; 정말 그랬다.이명숙은 매일 김치를 만들어 당시 단무지로만 있던 대폿집에 처음으로 김치를 안주로 내 놓았다.&nbsp;이 두 가게의 공통점은 외상이 가능했고 외상을 하는 손님들이 대접을 받았다. 나는 오늘 이 두 여인이 없었다면 김환기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박인환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집에서도&nbsp;친구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이들이 이 두 가게에서는 행복하게 차담을 하고 넉넉한 저녁반주를 즐겼다.&nbsp;강석연은 가게가 문을 닫는 날 작가들을 찾아 다니며 담보로 맡겨진 만년필과 시계를 돌려주었다. 이명숙은 1986년 작고했을 때 아들 배우 최불암이 어머니의 6권 외상장부를 보았는데 작가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고 전부 어머니만 아는 별명으로 기록되어 작가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그 남자1955년 명동에 메세나기업이 35살 김동근에 의해서 탄생되고, 그 결과 오늘 날 예총이 만들어졌다. 김동근(1920년~1956)은 청년이지만&nbsp;사업수완이 좋아 여러 개의 사업을 성공시키고 특히 1950년 전쟁이후 미 8군 사진현상을 독점하였고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사진 홍보 간행을 위한 뉴스사진통신 사업을 위해 1951년 동방문화사를 만들었고 동방문화뉴스를 발행했다.&nbsp;동방문화뉴스는 요즘으로 말하면 사진연합통신이다. 라고 회사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동방사진문화사는&nbsp;언론이나 정부에서 필요한 사진을 제공하였고 주로 낱장의 사진이나 사진엽서 형태로 제작하여 제공했다.&nbsp;김동근은 1953년에는&nbsp;미국 부통령이던&nbsp;닉슨이 방한 때, 한국전쟁 전후의 사진을 관람시켜 주고 감사장을 받았다. 김동근은 이런 여러 활동을 하다 문화인, 예술가들과도 가까워졌던 것 같다. 명동에서 미 8군과 정부상대로 사업을 하던 그는 명동 예술인들이 귀한 존재인데 형편이 어려운 것이 안쓰러워 예술인들을 돕기로 결심한다.시공관(현 국립예술극장) 관장인 이해랑과 만나 예술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nbsp;자문을 받고 이후 지금 하동관 옆에&nbsp;&lsquo;동방문화회관&rsquo;을 만들었다. 1층은 동방살롱으로 카페로 운영하고 2층은 작가들의 작업실이고 3층은 문화단체총연합회(현재예총, 당시 문총의 회장은 이헌구 이대문리대학장)사무실과 연회장을 만들어주었다. 작가, 화가, 연극영화인, 음악인과 언론인들에게는 오아시스였다. 1955년 8월25일 개관식에는 함태영부통령이 참석했고 동방문화회관 개관식이 대한뉴스에 나왔다. 그때 김동근 나이가 35살이었다. 문인들이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고 문총의 모든 재정을 김동근 혼자 감당하였다.&nbsp;1950년대의 명동, 중앙일보메세나기업이란?로마제국 초기 정치인 마이케나스(Maecenas)는 시인들을 지원했다. 프랑스어로는 메센이라고 읽는다. 1967년 미국에서 기업들이 예술후원회를 발족되면서 그 이름을 메센에서 따와 메세나협의회를 만들어&nbsp;지원하는 기업을&nbsp;메세나 기업이라고 한다.나는 김동근이 사망한 1956년 박인환이 사망한 1956년 이중섭이 사망한 1956년에 태어났다. 나는 이들을 이어가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다.독일에서 가장 가난했던 도시 베를린이 보배라이트 시장이 예술인들을 위해 공간을 제공하고 베를린에 온 해외 작가들에게도 기본소득을 제공함으로 베를린이 번영의 도시로 만들은 것처럼 대한민국이 대기업을 통해 국가 파이가 커지고 소상공인들을 통해 기술이 개발되고 빈곤층이 보호를 받는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남은 시간 대안을 제시하고 지혜를 모아주는 역할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그리고 순천시가 모나리자처럼 은성처럼 동방문화회관처럼 되고 손훈모 후보가 강석연처럼 이명숙처럼 김동근처럼&nbsp;힘들지만 의미가 큰일에 온 몸을 던지는 리더가 되기를 소망하며 소상공인 최저소득보장제가 시작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ldquo;시작이 반이다&rdquo;2026년 5월29일 사전투표가 중요해서 명동에서 기운을 받고 기운 있는 글을 이렇게 나눈다.&nbsp;지난 일요일 종묘 인문학 걷기는 하는데 관람객 분들이 같이 듣고 싶다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동행했다. 나의 종묘 해설의 마지막 이야기는 &ldquo;종묘를 찾아오신 여러분, 이곳에 계신 영령의 이름으로 조선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앞으로 잘 되실 것입니다&rdquo; 라고 했다.&nbsp;이 글이 보여 읽으시며 잠시 묵상하시는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입니다.&nbsp;&ldquo;축복합니다. 잘 될 것입니다&rdquo;]]></description>
			<author>지승룡</author>
			<pubDate>Thu, 28 May 2026 17:47:2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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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em>
			<title>내 어릴 적 첫 소설</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75</link>
			<description><![CDATA[어릴 적에 나는 신문, 잡지들을 본떠 연필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큰 종이에 쓰든가 책으로 묶든가 해서 집안 식구에게도 보여주고 동네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곤 했다.&nbsp;그 중에는 신문, 잡지 기사를 흉내 낸 것이 많았지만 지금 가장 인상 깊게 기억되는 것은 잡지 내의 연재소설로 동생이 삽화를 그리고 내가 내용을 쓴 것이었다.&nbsp;당시 우리 집에는 조그만 집에 어울리지 않게 개를 두 마리 키우고 있었고 그 당시 만화가 강철수씨의 개 관련 만화를 즐겨 보았으므로 그 영향을 받아 개의 이야기를 썼다.&nbsp;제목은&nbsp;&#39;잡종개&#39;로서 그 당시 길에서 흔히 돌아다니는 개의&nbsp;이라고나 할까.&nbsp;그 이야기는 시작이 아마 새끼를 낳은 개를 주인이 어느 보신탕집에 팔아 어미개는 식용으로 잡히는 데에서 부터였을 것이라 기억된다.&nbsp;그런데 키워먹으려고 기르던 강아지 두 마리가 탈출한다.&nbsp;그리고는 쓰레기통을 뒤져가며 먹을 것을 구하며 살아간다.&nbsp;그러면서 당시 어린이로서 선망의 대상인 개였던 도사견,&nbsp;셰퍼드와 길에서 만나 대화한다. (그들의 식사를 얻어먹으려고 그들 가까이 갔던 것인가 한다.)&nbsp;"너희들은 왜 더럽게 길에서 쓰레기나 주워 먹고 사니?&nbsp;참 불쌍하다."&nbsp;"우리는 매일같이 줄에 묶이어 지내는 너희들이 불쌍하다."&nbsp;"그래도 개는 주인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의무잖아?"&nbsp;"흥 그까짓 거."&nbsp;"뭐라곳!&nbsp;으르릉."&nbsp;"이크,&nbsp;도망가자."&nbsp;이 장면은 삽화로서 그려졌고 어린이 잡지소설의 형식을 본떠 맨 앞의&nbsp;&#39;너희&hellip;&nbsp;사니?&#39;&nbsp;부분을 삽화의 옆에 첨부하여 써놓은 모양이 기억에 생생하다.&nbsp;그들 잡종강아지 들도 나중에는 태어난 옛집을 찾아가 옛 주인을 상봉한다.&nbsp;그런데 옛 주인은 그들이 온 것을 보고 그들을 끌고 다시 보신탕집에 팔러 간다.&nbsp;개의 인간 짝사랑과 인간의 비정함을 그려냈다고나 할까.&nbsp;그 뒤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이후에는 오히려 글쓰기를 자신과 거리가 먼 걸로만 생각하고 열심히(?) 학교공부나 한 것 같다. 만약 국민학교 때의 소설쓰기 여파를 몰아 계속 필력을 키워왔다면? 글쎄 그렇게 아쉽지만은 않다. 글이란 것은 그 자체의 학습만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보기에.&nbsp;아무튼 그때 그것이 지금 남아 있다면 얼마나 소중한 것이 되었을 까는 새삼스레 아쉬워 지면서 지금 내게 남아있는 거의 유일한 &lsquo;고대사&rsquo;인 중학교 때의 어설픈 일기장(학교숙제로 쓴 것이었지만)의 보존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nbsp;(1995)]]></description>
			<author>朴京範</author>
			<pubDate>Wed, 27 May 2026 23:15:40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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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 세계에서 전무후무한 3연속 대통령 탄핵의 혼란 정국 페루, 후지모리 가문이 다시 권력을 쟁취할 것인가?</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70</link>
			<description><![CDATA[지난 2022년 12월 7일, 페드로 카스티요(Pedro Castillo) 전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의회를 해산하고 통행금지령을 내렸으며 비상 정부를 수립해 헌법 개정 전까지 대통령령으로 통치하겠다고 발표하게 된다. 이는 지난 9월, 국가 사업을 두고 특정 업체를 밀어주는데 관여했다는 의혹으로 인해 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검찰 조사를 받게 된 것이다. 페루 검찰은 특정 업체가 공공 근로 계약을 대거 따낸 경위와 관련하여, 대통령과 대통령 측근들의 조직적인 개입 여부를 조사하고 나섰다. 대통령궁과 사저에 대해 압수 수색을 하기도 한 검찰은 대통령의 처제 예니퍼 파레데스를 붙잡아 수사하는 한편 릴리아 파레데스 영부인까지 조사 대상으로 올려놓고 출석을 통보했다. 카스티요 대통령은 조사 직후 성명을 통해 이와 같은 의혹과 주장은 모두 조작된 이야기라면서 자신을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인 책략으로, 잘못된 비난은 단호히 거부할 것이라 언급하면서 비상정국과 더불어 계엄령까지 선포하게 된 것이다.&nbsp;페루 최초의 여성 대통령을 지낸 디나 볼루아르테(Dina Boluarte), 출처 : Britannica 카스티요 대통령에게 걸린 혐의는 이 사건만이 아니다. 대학 시절 논문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그 외에도 부패 혐의로 추가 6건의 범죄 가능성에 대해 검찰 수사를 받고 있었다. 의회를 해산하고 통행금지령과 계엄령 선포에 대해 의회는 이를 대응하기 위해 본 회의를 열고 카스티요 대통령에 대한 3번째 탄핵안을 추진하여 의결정족수(87명)를 훨씬 넘긴 101명의 의원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탄핵을 승인하면서 탄핵되고 말았다. 탄핵안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카스티요 대통령은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군대는 물론 내각까지 이에 호응하지 않아 실패하면서 스스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달게 되었다. 이로 인해 여당까지 대통령에 반발하게 되어 여당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하였기 때문에 결국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탄핵안이 가결된 것이다. 카스티요는 탄핵되면서 대통령에서 파면되었고 쿠데타 혐의까지 드러나면서 법원에서도 체포 영장까지 나오게 되었다. 카스티요는 가족과 해외로 도주하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카스티요의 탄핵과 체포 후 대통령직은 디나 볼루아르테 부통령이 승계했다.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카스티요와 함께 부통령에 당선되었었다. 그러나 카스티요가 탄핵되면서 졸지에 페루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취임 후 첫 의회 연설에서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전임 페드로 카스티요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고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통합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녀는 공식 취임 이후 카스티요의 남은 임기 3년 반 동안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밝혔으며 새로 선임한 장관들에게 반 부패 서약을 요구하는 등 카스티요 전 대통령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페루 내부에는 여전히 혼란이 지속되고 있다. 시위대는 당장의 조기 총선을 요구하고 있고 카스티요 지지 시위대는 그녀를 배신자로 지탄하고 있다. 일부 지지 시위대는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다른 시위대들은 의회 문을 폐쇄하며 볼루아르테의 사임을 촉구하고 있다.&nbsp;페루는 지난 8년 동안 8명의 대통령을 거쳤고 그 중 3명은 국회가 탄핵권을 한창 발동하던 2020년 단 1주일 동안에 교체되었던 혼란을 겪었었다. 더불어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의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그만큼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는 반증이다. 그녀는 전임 카스티요와 마찬가지로 지난 1월에 두 사람을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뽑아준 소속 극좌 정당인 "자유 페루(Partido Pol&iacute;tico Nacional Per&uacute; Libre)"당에 의해 축출 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당적도 전무하고 그를 뒤에서 받쳐줄 강한 지지 세력 또한 전무하다. 특히 아푸리막에서는 반란 수준의 폭동이 발생하면서 30일 동안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결국 시위 격화로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해 청소년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치는 사태가 일어나자 의회와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시민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해 조기 총선을 추진했다. 2023년 1월 9일, 훌리우카 지역에서 시위에 대응한 경찰에 의해 최소 18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따라서 비판적인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럼에도 볼루아르테는 시위대 진압에 자신은 책임이 없고 경찰과 군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면서 책임을 전면 회피했다. 결국 시위대 학살 관련하여 페루 법무부로부터 수사를 받게 되었다.&nbsp;볼루아르테는 2024년 3월에 롤렉스 게이트와 관련 있다는 의혹까지 받게 된다. 이 때 경찰에게 사저와 정부 청사를 압수수색 당했는데 이는 페루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압수수색당한 사례였다. 당시 볼루아르테의 수입(월급 4,200달러)으로 구매할 수 없는 롤렉스 등의 고가 시계(21,000~38,000달러 사이)가 확인된 것만 17개를 보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도합 50만 달러 가치의 고급 보석 컬렉션도 확인되면서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이중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심지어는 볼루아르테가 이들을 자산 신고서에 기록하지도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nbsp;2024년 IMF 통계 기준 페루의 1인당 GDP가 그녀의 월급의 2배 정도에 불과한 8,316달러에 불과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여기에 더해 40만 달러가 넘는 금전 거래도 발각되었는데, 여기에는 볼루아르테의 은행 계좌로 입금된 &#39;출처 불명의&#39; 296,000달러가 포함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볼루아르테 대통령의 비리는 까면 깔수록 계속 나오는 양파와 같다는 비아냥을 듣게 되면서 그녀의 탄핵은 만장일치로 확정되었다.&nbsp;그녀의 형제인 니카노르 볼루아르테(Nicanor Boluarte)는 뇌물 수수 혐의와 범죄 조직 연루를 포함한 부패 혐의로 체포, 재판 전 구금 3년형을 선고받게 되면서 볼루아르테 가문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없는 집권자 집안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재임 당시 볼루아르테의 지지율은 극도로 처참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탄핵은 만장일치 수준이었다 해도 이를 제어할 정치 세력이 미약해 결국은 쉽게 2연속 탄핵을 당할 수 있었다. 탄핵 직후 대통령직은 헌법 규정에 따라 페루 의회 의장인 호세 헤리(Jos&eacute; Jer&iacute;)가 승계했다. 그러나 호세 헤리 또한, 중국인 사업가 양즈화와 가졌던 부적절한 비밀 회동, 이른바 치파게이트(Chifa-gate) 스캔들이 폭로되어 2026년 2월 17일 대통령직에서 탄핵되어 축출되고 말았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 최초의 현직 대통령 3연속 탄핵 축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페루의 정치권은 부정부패를 썩지 않은 곳이 없다. 83세의 중도좌파 호세 마리아 발카사르(Jos&eacute; Mar&iacute;a Balc&aacute;zar)가 후임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 발카사르는 페루 역사상 최고령 대통령이며, 21세기 남미 지도자 중에서도 최고령에 속한다. 그러나 그 또한 조혼 옹호 논란을 비롯한 각종 논란에 시달리고 있어 과연 7월까지 5개월 남짓 남은 임기를 채울수 있을지 알 수 없다.&nbsp;페루의 국정 혼란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알베르토 후지모리는 3년 전, 완전히 사면되었고 페루 최대 야당인 민중의 힘(Fuerza Popular)의 대표이자 알베르토 후지모리 전임 대통령의 장녀인 게이코 후지모리(Keiko Fujimori)가 적극적으로 대통령 지위에 도전할 것으로 예상된다. 후지모리 집안과 최대 야당인 민중의 힘(Fuerza Popular)은 볼루아르테 대통령 이후, 호세 헤리와 마리아 발카사르까지 적극 밀어주면서 정국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이코 후지모리(Keiko Fujimori)는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선에 세 차례 도전했지만 모두 낙선한 상황에서 현 정국에서 얼마나 지지층들이 확보될 수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게이코 후지모리 또한 부패 혐의로 기소되어 현재 최대 30년 징역형을 받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후지모리 가문이 페루 정국을 안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 필자의 판단으로는 매우 회의적이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Wed, 27 May 2026 15:36:56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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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현재 격화되고 있는 볼리비아의 시위 : 로드리고 파소 정권의 급격한 몰락 중</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69</link>
			<description><![CDATA[현재 볼리비아는 에너지 생산이 감소 추세에 접어들어 심각한 상황이다. 볼리비아는 아르헨티나에 천연가스 수출을 임시적으로 재개하면서 어느 정도 숨통을 틔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적이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자국산 천연가스 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2024년 9월부로 볼리비아산 가스 수입 계약을 종료하였으나 인프라가 완성되지 못하고 있는 국내 상황과&nbsp;자국에서 생산량이 불충분하다는 등의 이유로 인해&nbsp;볼리비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임시적으로 재개한 것이었다. 그간 아르헨티나는 브라질에 이어 볼리비아 천연가스 수입 2위인 국가로 볼리비아에서는 아르헨티나의 수입 중단에 따른 국가 수입의 감소를 우려했지만 이제 약간의 숨을 돌릴 수 있게 됐다. 볼리비아는 현재 아르헨티나에 3,600만 입방미터의 천연가스를 수출하여 총 4억 7,500만 입방미터의 천연가스 수출을 달성했다. 그리고 지난 겨울 수출량인 4억 5,400만 입방미터를 대비하여 약 4.62% 상승세를 기록했다. 아르헨티나 수출 재개로 수출량은 다소 상승했지만 천연가스 및 석유 생산량은 각각 -9.32%, -11.74% 감소하여 월별 생산량 지수는 -9.65% 감소 추세를 보였다.&nbsp;볼리비아 노동자 총연맹(COB)과 볼리비아 광업노동자연맹(FSTMB)이 수도 라파스(La Paz)에서 펼치고 있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 및 행진 모습, 출처 : Milenio볼리비아의 최대 자원의 가치는 본래 천연가스나 석유보다 리튬에 있다. 지난 2024년 러시아(Uranium, One Group), 중국(Hong Kong CBC)과 각각 체결한 리튬 개발 계약 2건이 계약 조건이 볼리비아에 불리하고 수익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야당과 리튬 관계자들의 주장으로 인해 하원에서 심의가 보류되었다. 위의&nbsp;2건의 계약을 통해 볼리비아 정부는 약 20억 불(약 2조 8,000억 원)의 투자를 확보하고자 했으며 리튬을 직접 추출할 수 있는 EDL 기술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2개의 동 이상, 리튬 플랜트를 건설하면서 생산 확대를 노렸고 배터리 등급 탄산 리튬이 생산될 것을 기대했다. 이에 볼리비아 국영리튬공사(YLB)는 의회에 계약 승인 지연으로 인해 볼리비아가 리튬 시장에서 최대 10년 더 뒤쳐질 수 있고, 계약이 무산될 경우 향후 해외 투자가 위축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리고 볼리비아가 해당 계약에서 51%의 수익을 확보하고 상업 활동에 대한 통제권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조속한 심의 통과와 더불어 법적 보호와 투명성을 촉구했다. 게다가 보유하고 있는 미국 달러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 볼리비아는 최악의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nbsp;경제학자 출신인 로드리고 파스(Rodrigo Paz)가 기독민주당 소속으로 2025년 대선에서 &lsquo;모두를 위한 자본주의(Capitalismo para todos)&rsquo;를 공약으로 내세워 19년 동안 이어진 모랄레스 정권을 종식시켰다. 그는 미국에서 아메리카 대학을 졸업한 친미 인사로 볼리비아의 외화 부족을 초래한 연료 보조금을 폐지하는 등 시장경제 중심 개혁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연료 부족 현상이 만연해졌다. 하지만 파스 행정부 출범 이후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보조금 폐지 이후 휘발유 가격은 86%, 경유 가격은 163%까지 뛰었다. 지난 달 4월의 볼리비아 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4%까지 올랐다. IMF의 전망에 의하면 올해 볼리비아 1인당 GDP가 3.3%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중남미 국가 가운데 가장 큰 감소 폭으로 보여진다.따라서 가솔린 가격이 훨씬 더 비싸졌으며 2026년 이란-미국 전쟁 역시 볼리비아 경제에 엄청난 압박을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볼리비아 원주민과 농촌 조직들은 4월 10일부터 시행되었던 법 제1720호에 대해 맹비난하기 시작했는데 소유권이 있는 소규모 농업 자산을 서면 요청과 선서 공표를 통해 중규모 자산으로 자발적으로 전환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nbsp;그리고 해당 토지를 은행 대출의 담보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같은 법 제1720호는 농민의 토지를 압류로부터 보호하는 면책권을 박탈하고 농지의 상업화를 초래하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예상은 적중했다. 볼리비아 원주민과 농촌 조직들이 집단으로 반발했고, 결국 법 제1720호는 5월 13일에 폐지되었지만 분노한 농민들과 원주민들의 반발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볼리비아의 시위는 1월부터 산발적으로 발생해 왔으나, 5월 초에 들어서면서 더욱 격화되었다. 처음에는 토지 담보 대출을 허용하는 법안에 반대하는 농민들에 의해 촉발되었고 이는 전국적으로 도로 봉쇄와 시위대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로써 볼리비아 전역에서 67개의 고속도로가 봉쇄되어 국내 무역이 제한되었다. 그리고 지난 5월 12일에는 수도 라파스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행진하면서 시위는 더욱 강렬해졌다. 농민들과 함께 광부들이 노동 개혁과 연료를 요구하며 시위에 합류했으며, 이에 교사와 볼리비아 원주민들도 가세했다. 이에 대통령인 로드리고 파스가 5월 13일 토지 담보 법안을 무효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계속 확산되었다. 5월 14일에는 볼리비아 노동자 연맹 소속 광부 20명으로 구성된 소규모 대표단이 로드리고 파스와 대화하기 위해 대통령궁을 방문했으나 전혀 성과가 없었다.&nbsp;오후에 광부들은 시내에서 소형 다이너마이트를 폭파시키기 시작했고 일부 시위대들은 대통령궁에 강제로 진입하려 시도했다. 이 때, 일부 시위대들은 대치하는 과정에서 보안 요원들에게 화염병을 던졌다. 이에 경찰은 과격한 시위대를 제압하기 위해 최루탄을 사용하였으며&nbsp;대통령궁 주변 도로를 모조리 차단했다. 이달 초 임금 인상과 토지 개혁 철회 등을 요구하며 시작된 노동조합 시위는 5월 15일 늦게부터 시위의 초점은 로드리고 파스의 사임 요구로 바뀌었다. 시위대는 볼리비아 9개 주 가운데 6개 주 이상에서 도로를 봉쇄했고, 이로 인해 라파스와 엘 알토 등 주요 도시에서는 식량과 연료, 의약품 부족 현상이 이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5,000대 이상의 트럭이 고속도로에 고립되었으며, 하루에 5,000만 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에 로드리고 파스는 에드가 모랄레스(Edgar Morales) 노동부 장관을 해임하는 등 내각 개편안을 내놓았지만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지난 한 주간 라파스 시위 현장에서는 시위대 최소 100명이 체포되었다. 수도인 라파스의 시위대 수천 명은 다음과 같은 표어를 내세웠다.&nbsp;"우리가 원하는 것은 파스의 사임이다. 언제? 지금 당장(Lo que queremos es la renuncia de Paz. &iquest;Cu&aacute;ndo? Ahora mismo)."&nbsp;이 표어는 라파스 시내 시위대들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리고 일부 시위대가 의회 인근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려 하면서 충돌이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더불어 시위에 참여했던 24세 청년이 총상을 입고 숨진 사실도 이날 확인됐다. 당국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총기 및 고무탄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시위대는 경찰 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5월 21일 기준, 시위로 인해 4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3명은 시위대의 병원 봉쇄로 인해 물자가 전달되지 못해 사망했고, 1명은 경찰과의 충돌 과정에서 사망했다. 볼리비아 정부 검찰에 따르면 시위와 관련해 90명이 체포되었다. 로드리고 파스 대통령은 경제난 심화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확산하자 볼리비아 남동부 수크레 지역 연설에서 &ldquo;국가를 위한 노력과 헌신의 일환으로 급여를 50% 삭감하겠다(Reducir&eacute; mi salario en un 50% como muestra de mi esfuerzo y dedicaci&oacute;n al pa&iacute;s).&rdquo;고 밝혔다. 현 파스 대통령의 급여는 월 24,000볼리비아노(약 524만 원) 수준이다. 중남미 정상급 지도자들과 비교하면 낮은 편이지만 볼리비아 평균 임금의 약 8배에 달할 정도다.&nbsp;파스 대통령은 여러 주체에게 다가가려는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다며 사회적 대화에 나설 뜻을 밝혔으며 소상공인과 대중교통 운전기사, 자영업자를 위한 세금 감면 조치도 함께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들은 대통령 퇴진 요구를 이어가며 행정수도 라파스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처럼&nbsp;시위가 격화하자 에보 모랄레스 전 대통령이 나섰다. 그는&nbsp;파스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면서 본인이 다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미성년자 인신매매 혐의로 수배 중이었지만 90일 안에 새로운 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파스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실패로 이끌고 지역적 혼란을 일으키려는 국내외 이해관계가 많은 모랄레스 전 대통령과 그 연계 세력이 반정부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며 비난했다. 볼리비아 정부는 이틀 뒤인, 27일 정부와 재계, 시위대 대표들이 참여하는 경제 사회 위원회 회의를 열고 경제 관련 법안을 논의할 예정이지만 사태 봉합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Wed, 27 May 2026 15:34:4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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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알바니아계 민족주의자들과 북마케도니아의 갈등 문제</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64</link>
			<description><![CDATA[발칸반도의 역사를 관찰해 볼 때, 현재 북마케도니아 현실에 있어 어려운 문제는 그리스와의 국호 논란과 영토 분쟁, 서부 마케도니아에 거주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과 갈등 문제에 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볼 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리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된 대외적인 문제로 볼 때, 대내적으로 북마케도니아 정부의 소수 민족을 향한 관용과 포용 정책이 매우 경직스러운 부분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북마케도니아에 대한 국제 사회에서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등의 논쟁 및 민족 정체성을 둘러싼 불안정성은 북마케도니아 정부로 하여금, 자국 내 알바니아계 민족이 주장하고 있던 자치권 요구, 더 나아가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요구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북마케도니아의 불안정성이 증폭되는 상황에서 발칸반도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공화국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세르비아가 1991년 9월 유고 내전과 1992년 3월부터 보스니아 내전을 발생시켜 그 위기감이 한층 더 고조시켰다.&nbsp;북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Skopje)에 위치한 스칸데르베그 광장(Skanderbeg Square)의 대형 모자이크 벽화, 알바니아인들의 역사, 문화적 영웅, 그리고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 출처 : Dreamstime.com따라서 국제사회에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에서의 민족 간 충돌의 여파도 존재하고 있어 알바니아계와의 분쟁이 북마케도니아 등 다른 지역들로 확산될 것을 우려하며 유고 내전을 비롯한 각종 발칸 분쟁들을 주시해 왔었다.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1991년 3월 북마케도니아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직후부터 계속하여 알바니아계가 다수 거주하고 있는 서부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자치권 및 독립을 요구해 왔었다. 여기 독립 마케도니아를 이끌며 처음 대통령에 오른 키로 글리고로프(Kiro Gligorov, 1917~2012)는 국제 사회의 도움 없이는 자체적인 국가의 존립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한계와 더불어 전체 약 200만 명의 인구 중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알바니아계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발칸반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알바니아계와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다는 국제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기가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취임 초기 알바니아계와의 공존을 위해 부수상을 비롯한 2개의 장관직에 알바니아계를 임명했다.&nbsp;그러나 1992년 1월 알바니아계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에 자체 투표를 통해 서부 마케도니아 자치국가 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이어 1993년 11월 북마케도니아 정부 전복을 목표로 일리리다(Ilirida) 자치 공화국 건설을 위해 알바니아 무장조직(AAA : All Albanian Army)을 결성하려다가 정부에 의해 발각되었고, 1995년에는 알바니아 비밀단체가 키로 글리고로프 대통령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는 등 여전히 갈등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1998년 이후로 확대되던 코소보 내 민족 갈등이 나토와 세르비아 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이웃하고 있던 코소보로부터 대규모 알바니아 난민 진입이 시도되었다. 그러자 북마케도니아 정부와 서부 마케도니아 알바니아계는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2000년에 들어 코소보로부터 마케도니아 알바니아계에 대한 무기 유입이 확대되었고 2001년 3월 초 테토보(Tetovo)를 수도로 정한 알바니아 민족 해방군(NLA : The National Liberation Army)들에 의해 마케도니아 내전이 발생하게 된다. 당시 마케도니아 정부군은 알바니아 해방군에 비해 무기와 군사 조직 면에서 매우 열악하고 자체 진압 능력이 부족했다.&nbsp;무엇보다도 국제 사회는 내전으로 인해 마케도니아가 붕괴될 경우, 전략적인 요충지인 서부 마케도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과거 제 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으로 불리는 제 1, 2차 발칸전쟁과 같이 전쟁이 발칸 유럽 전체로 확대되는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이는 미국과 나토 및 러시아의 신속한 군사적 개입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2001년 7월 5일 양측은 마침내 서부 마케도니아에 대한 자치권 논의와 알바니아 반군의 무장 해제라는 국제 사회의 중재안인 오흐리드 합의안(Ohrid Agreement)을 받아들임으로써 내전이 완전히 종식되게 된다. 실제로 전쟁이 끝난지 20년이 지난 국제 사회에서는 마케도니아의 문제를 둘러싸고 발칸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정착할 수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시험대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과거 역사를 볼 때 마케도니아가 항상 발칸 유럽 분쟁의 주요 핵심 지역 중에 하나였고, 전략적 요충지인 마케도니아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영토 전쟁이 유럽 열강들의 군사적 개입을 불러옴으로 인해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것에서 비롯된 우려라 볼 수 있다.&nbsp;이와 더불어, 국제 사회는 마케도니아 내에서 민족 간의 갈등이 고조되고 이로 인한 내전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경우 이는 마케도니아 국가 존립의 위기가 형성될 것이고, 더 나아가 오랜 동안 발칸 남부 지역에 대해 종주권을 주장해 왔던 발칸 유럽 내 주변 국가들,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등의 군사적 야망을 부추겨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판단한다는 점에서 마케도니아의 위기 문제는 국제 사회에서 큰 관심들 중 하나로 대두되고 있다 할 것이다. 물론 마케도니아에 대한 그리스의 반대와 여러 외교적인 갈등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흑해를 통한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팽창 전략을 견제하고 저지하기 위해서, 현재 발칸반도의 남쪽에 자리하면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마케도니아를 친미 전략 국가로 설정해 놓은 것으로 보여 진다. 실제로 미국은 냉전 시절이 종식된 이후로, 오랜 기간 동안 유럽과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나뉘어져 있었던 발칸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따라서 대규모 경제 지원과 미군 주둔을 위한 군사 시설을 확보하고 전폭적인 외교 지원 등을 통해 마케도니아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계속해서 추진해 왔었다.&nbsp;이어 코소보 회랑과 연결해 세르비아의 육로 진출을 억제하고 러시아의 해상활동과 발칸 및 남동부 유럽 국가들과의 상호 연계성을 파괴하려는 전략을 중점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미국의 이와 같은 전략은, 과거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자국의 이해득실에 따라 마케도니아가 이용되고 버려지는 역사적인 악순환의 반복 과정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는 비판을 함께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근대 시대 이후로 코소보-마케도니아 지역은 지속적으로 러시아를 비롯해 서구 열강들의 첨예한 국제 전략의 핵심 지역으로 위치하여 왔고, 따라서 강대국들의 지속적인 개입과 간섭으로 인하여 마케도니아 문제를 둘러싼 진정한 해결책들이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함께 강대국들은 매번 자신들의 전략적 이익에 따라 마케도니아가 주변의 어느 국가나 민족에게 완전히 편입되는 것을 방해해 왔으며, 결과적으로 제 1, 2차 발칸전쟁과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강대국들의 역학구도에 따른 영토, 민족적인 분열과 합병은 수없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현재 그리스와의 협정으로 나라 이름이 북마케도니아로 바뀐 마케도니아는 EU 후보국으로써 EU 가입을 국가의 최우선 정책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nbsp;이와 같은 EU 가입을 위해 EU 회원국들이 요구하는 여러 경제 정책 및 사회 정책 등이 추진되고 있으며, 이러한 와중에 여러 어려움 및 사회적 마찰에 부딪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2013년 7월 EU 가입을 어렵게나마 성공한 크로아티아의 경우와, EU 가입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지만 그 가능성이 멀어 보이는 세르비아의 경우 등의 경우로 볼 때 북마케도니아가 대내적인 민족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는 실천의 의지와 그 가능성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지 못한다면 북마케도니아의 EU 가입은 요원한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북마케도니아 정부의 EU 가입에 대한 애착과 선전 등이 현재 여러 대내외적인 갈등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고생하고&nbsp;있는 국민들에게 잠시나마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해주는 것에&nbsp;그칠 것인지, 혹은 그와 같은 갈등들을 이겨내고 EU에 가입함으로써 경제적 희망을 갖게 해줄 지는 마케도니아계와 알바니아계간의 평화로운 공존에 따라 달려있다고 할 수 있는데 아마 이것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26 May 2026 18:18:1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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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세르비아, 코소보의 독립을 승인할 가능성이 있는가?</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63</link>
			<description><![CDATA[1999년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UN은 코소보를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2007년에 코소보는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2008년 2월 17일에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코소보의 국제적 승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고 초창기에는 국가로 승인한 국가들이 47개 정도였지만 차츰 늘어 현재 193개 유엔(UN) 회원국 가운데 94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써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국의 주권 영토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소보만의 단독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있어서 남슬라브계가 첫 역사를 시작했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라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뿌리를 잃는다고 보고있으며 지금도 코소보는 미국과 집단서방에 의해 강제로 앗아간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코소보는 정식국가로써 UN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UN의 상임이사국들이 코소보의 국가 존속 여부와 더불어 UN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하는데 세르비아의 형제 국가인 러시아가 줄곧 반대하면서 만장일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에 거대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코소보는 정식 국가 승인과 UN 입성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nbsp;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대통령궁(Novi Dvor)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알렉산다르 부치치(Aleksandar Vučić) 세르비아 대통령, 출처 : The Parliament Magazine더불어 EU나 나토 가입도 마찬가지다. EU나 NATO의 회원국들 중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가 가입에 반발하고 있다. 나토의 경우, 터키도 코소보의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EU의 수장격 국가들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를 설득하고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스페인과 키프로스에게 승인은 받아냈지만 친러인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세르비아와의 절친한 관계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EU 국가지만 세르비아와 그나마 교류가 각별한 루마니아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의 경우, 북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문제 및 국호 문제로 인해 슬라브계와의 충돌을 꺼리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같은 정교회 국가이고 코소보는 상당수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다. 굳이 세르비아와 갈등을 키워가면서까지 코소보의 독립 및 EU, 나토 가입을 승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코소보 북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nbsp;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르비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공화국이 아니라 지금도 코소보와 메토히야 자치주(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ja)로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nbsp;반면 알바니아에서는 라프시 이 두카지니트(Rrafshi i Dukagjinit),&nbsp;약칭 &#39;두카지니(Dukagjini)&#39;라고 부르며 두카지니가(Dukagjin&euml;t)는 알바니아계 씨족이자 봉건 귀족 가문으로, 이들이 세운 두카지니 공국(1387&ndash;1444)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던 국가였다. 알바니아계 무슬림인 코소보인들은 두카지니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다. 좁게 언급하자면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자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국 및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코소보의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재의 배경에는 미국과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 압박과 EU 가입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에서 세르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르비아가 코소보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코소보의 유엔 가입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데로 세르비아의 형제국인 러시아가 거부하는 한 코소보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없다. 이는 해결 방법이 있는데 세르비아와 코소보가 관계회복을 하고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UN 가입 승인을 요청한다면 러시아도 코소보의 UN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부치치 대통령 입장에서는 EU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유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부치치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도한 중국에 대한 경제력 의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EU, 미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며 중국, 러시아 사이에 세르비아 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결국 2023년 2월 2일 정규 의회에서 코소보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거세게 부치치 대통령에게 몰아쳤다.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나오면서 본회의 진행이 어려운 상태까지 갔던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코소보와의 협상 경과를 설명하며 유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부치치 대통령은 미국과 EU가 세르비아에 뼈아픈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EU 가입을 위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역자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친러시아 우파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치치 대통령에게 코소보와의 대화를 당장 중단하고 서방의 국교 정상화 요구도 거부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는 EU 가입을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와의 친분을 유지해왔다.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도 휩쓸리지 않고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세르비아만의 국익을 취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상황을 본다면 부치치의 이런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UN 가입을 승인하다 해도 EU가 과연 약속대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승인해줄까? 나의 개인적 사견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가능성보다 낮을 것으로 본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있어 왔던 서방 국가들의 유고 쪼개기는 동유럽-발칸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견제하여 러시아와 맞서려는 전략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같은 기조가 변할리 없다. 이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서방이 원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슬라브인들의 세력 약화와 민족적 소멸에 있다. 만약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다면 EU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연기할 것이고 오히려 더 고립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협상이 개시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2년 전, 타냐 미시체비치(Tanja Mi&scaron;čević) 세르비아 유럽통합부 장관은 EU가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EU 가입에는 빠르게 반응했지만, 서부 발칸 지역 국가들의 가입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했다. 미시체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EU 확장에 대한 욕구가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장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대한 협상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했다. 이에 유럽집행위원회(EC)는 예비 EU 회원국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가입 협상 단계 시작을 지지하고, 조지아는 EU 후보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EC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코소보와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르비아 EU 가입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탓이라 언급했다. 2023년 12월 14일~15일에 있었던 EU 정상회의에서 세르비아의 가입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의미 있는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EU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에 관계 개선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세르비아는 법치 분야를 비롯한 EU 가입 관련 개혁을 시행하고 있지만, EU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nbsp;그리고 일주일 전인 4월 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으로 코소보가 UN이나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등 국제기구 가입하는데 세르비아가 여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가입 문의 35장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국제 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2023년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오흐리드에서 체결된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행정 문서를 인정하고 코소보의 국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약속을 문서화한 바 있는데 이를 35장에 추가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가 걸려 있다. EU가 나토가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세르비아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북부의 셰르비아계 지역에서 자치권을 둘러싼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이 EU와 나토의 이러한 분열 획책 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부치치는 결국 미국,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주권을 강화하고 독자 노선을 행하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는 코소보 독립 승인 및 UN 가입, 러시아 제재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부치치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갈 가능성이 높다.]]></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26 May 2026 18:04:1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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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요시프 티토 체제 이후의 유고슬라비아</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62</link>
			<description><![CDATA[1980년대 말,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 당수인 슬로보단 밀로셰비치(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는 코소보 지역에 대해 소수를 차지하고 있던 세르비아계 주민들에게 특혜를 주고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해 차별성을 두는 정책을 입안함으로써 세르비아 민족진영의 지지를 받았다. 그는 강성 세르비아인들이 집단 거주하는 포자레바츠(Пожаревац) 출신으로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한 엘리트였다. 대학 재학 시절의 동기인 이반 스탐볼리치(Ivan Stambolić)의 도움을 받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avez komunista Jugoslavije)에 입당한 밀로셰비치는 이반 스탐볼리치의 지지를 받아 열혈 당원으로써 상임위원에 올랐다. 두 사람은 친구 사이였지만 서로 추구하고자 하는 사상은 달랐다. 이반 스탐볼리치는 철저한 티토주의자였지만 밀로셰비치는 민족주의자로 티토주의에 대한 불만이 많았던 인물이었다.&nbsp;1988년~1989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39;반관료주의 혁명(Antibirokratska revolucija)&#39; 당시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지방의 노비사드(Novi Sad) 등지에서 일어난 대규모 거리 시위, 출처 : Cambridge University Press & Assessment이는 베오그라드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공산주의의 반동적인 민족(Hационалним)이라는 단어를 최대 300여 자 이상을 남발했을 정도로 강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 때문에 사실상 티토의 눈 밖에 났을 정도였지만 당시에는 그의 정치성이 티토의 권력을 위협할 정도의 위상은 아니었기에 숙청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볼 때 그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라는 것은 분명해보이는 인물이다. 티토의 사후, 경제 위기가 엄습해 오고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로 인해 연방의 붕괴 조짐이 보이자 이 때 유고 정가의 화두는 서로 각자 알아서 성장하자는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다시 등장했고 이는 범슬라브민족의 연합이 아니라 서로 간에 남슬라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결과로 빚어진다. 세르비아는 밀로셰비치의 공작 하에 세르비아의 연방 내 권력 독점으로 흘러갔고 결국 연방에서 60석의 자리를 장악했던 세르비아는 연방 내 다른 공화국들을 차별하며 티토주의 철폐하기에 이른다.이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민족 및 지역 갈등이 점점 크게 고조되었다. 밀로셰비치는 고위직에 오르면서부터 세르비아주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각 공화국의 대표들과 지역 당원들에게 경계심을 부르고 있었다. 밀로셰비치는 1989년 5월 8일 세르비아 대통령에 등극한 뒤, 각종 정치 공작을 감행했다. 문제는 여기에 서방이 서서히 개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같은 시기,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소련을 수정 자본주의로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고 있던 때였기에 비록 제 3국이지만 같은 공산주의 체제인 유고슬라비아를 도울 형편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소련의 경제가 거의 파탄 수준에 이를 정도가 되자 유고슬라비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했다. 우선 서방이 가장 관심을 보였던 지역은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였다. 이미 공산 시기 때부터 많은 교류를 했었던 곳이니 개입하기도 쉬웠다. 이어 미국의 CIA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 창당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의혹이 있었다.&nbsp;이에 밀로셰비치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의 대표인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전당대회에 불러들여 CIA 개입설 등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도 대세에 따라 자연스레 일당 독재체제를 종식하기 위해 1990년 1월에 전당대회를 열었던 상황인데 다당제로 변환하는 상황에서 이미 크로아티아 대표인 투지만의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이다. 게다가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지부가 1인 1표를 지지한데 반해 타 공화국 지부들은 1공화국 1표를 주장했던 상황이 빚어지면서 세르비아와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격한 충돌이 발생한다. 그러자 세르비아 대표단은 필리버스터를 발동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격분한 슬로베니아 대표단이 강하게 항의하자 밀로셰비치는 인민궁전의 경비대를 불러들여 슬로베니아 대표단을 궁전 밖으로 추방해버렸다. 그러자 이에 격분한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대표단이 함께 퇴장하면서 결국 전당대회는 파행으로 치닫고 말았다.크로아티아로 돌아간 투지만은 1990년 4월 22일부터 4월 23일까지로 단독 총선을 확정지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세르비아 측의 방해를 우려하여 크로아티아 민병대와 일부 서방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민병대들이 철통 같은 보안을 펼친 가운데 4월 22일 역사적인 크로아티아 총선이 시작되어 전체 356석 중 205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두게 된다. 그리고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이자 독립 크로아티아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크로아티아 총선의 모습을 본 다른 공화국의 지도자들도 평화 대신에 민족의 독립을 운운하며 민족 간의 분열을 부추겼고 보스니아의 무슬림 지도자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ć, 1925~2003)는 공공연히 "보스니아를 독립시킬 수 있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강경 발언을 하면서 보스니아 영내에 거주 중인 세르비아계 국민들의 집단 반발을 불러왔다.&nbsp;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Milan Kučan, 1941~ )과 마케도니아의 키로 글리고로프(Киро Глигоров, 1917~2012)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탈당해서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 사회당을 창당했으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라도반 카라지치(Радован Караџић, 1945~ )의 세르비아 민주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민주행동당,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자유당까지 득세하면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지부는 완전히 소외되면서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치닫게 된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국가 존속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Tue, 26 May 2026 17:56:4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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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스니아 내전 당시, 참혹한 사라예보의 현장</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58</link>
			<description><![CDATA[세르비아인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은 동부 보스니아의 보스니아인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을 압도하고 영토 대부분을 점령했다. 세르비아군, 경찰, 준군사가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고 난 이후 지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의 도움을 받아 표준 행정 절차를 거쳤다. 이 표준 행정 절차는 보스니아인이 거주하는 아파트와 주택을 체계적으로 약탈하고 불태웠으며, 민간인은 체포당했고 일부는 구타당하거나 살해당했다. 남성은 여성과 떨어져서 지내게 했다. 보스니아인 남성의 대부분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서 학살했다. 여성은 매우 비위생적인 구금시설에서 수감당한 채로 잔인한 학대를 받았다.&nbsp;보스니아 전쟁(1992~1995년)의 비극을 상징하는 역사적인 순간, 스나이퍼들의 총탄 세례를 피해 시민들이 뛰면서 대피하고 있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많은 여성들은 반복적으로 강간을 당했다. 이곳 생존자는 세르비아 군인과 경찰이 구금시설을 방문해서 한 명 이상의 여성을 골라 강간했다고 증언했다. 4월 22일, 공화국 의회 건물 앞에서 평화 집회가 열렸으나 할리데이 호텔에서의 총격으로 와해되었다. 4월 말부터는 포위 공격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1994년 2월 5일,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대부분의 전선이 교착된 시점에서도 사라예보는 여전히 포위중이었으며, 시민들은 평소와 같이 봉쇄 속에서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이 몰리는 정오를 기해 시내에 갑작스런 박격포 포격이 개시되었다. 백주대낮에 시내 한복판에 장을 보러 나온 많은 시민들이 포격에 희생되었다. 최종적으로 68명의 사망자, 144명 이상의 부상자가 집계되었다.이로부터 1년 6개월 후인 1995년 8월 28일, 서방세계의 중재를 앞둔 시점에서 똑같은 시장에 똑같이 포격이 발생해 43명의 사망자와 75명의 부상자가 발생한다. 유엔 대변인은 이 사건에 대해 &#39;남쪽에서 날아온 한 발의 120mm 박격포탄이 시장에 명중하여 발생한 참사로, 세르비아 민병대의 주둔지역에서 날아온 것으로 보인다&#39;고 정리하였다. UN과 나토로 대표되는 주변 국제사회는 이미 스레브레니차 학살을 무력하게 지켜보면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이 2차 포격 당시 파리에서는 평화 회담이 준비되고 있었다. 이 포격으로 인해 다시 한 번 농락당한 서방 세계는 3년간 이어온 &#39;신사적인 중재&#39;를 끝내기 위해 세르비아 민병대가 더이상 호전적으로 보스니아를 공격할 수 없도록 무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이로써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이 나토에 의해 한 달 간 개시되면서 비로소 세르비아 민병대가 정리되어 데이턴 협정을 체결해 종전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사라예보는 시가지 남부를 밀랴츠카 강이 관통하며 남북에 각각 산지를 끼고 있는 도시다. 특히 사라예보의 중심가는 이 준 분지의 남부, 밀랴츠카 강변에 위치했는데 강의 남부와 바로 이어진 산간 요새는 모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빠르게 장악한 상태였다. 오늘날 사라예보의 경계상 도시 동남부의 산악지대가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의 공격이 가장 강했던 요새였다. 세르비아 민병대는 남부 산지를 점거하고 도시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구역의 무슬림을 추방하고 살해 및 약탈을 거듭했으며 산악 요새와 고층건물들을 거점으로 삼아 사라예보 중심가를 향해 살아있는 생명체들을 저격하는 행위를 벌인다.&nbsp;세르비아 민병대는 저격총 뿐만 아니라 경기관총, 대공포 등 멀리 쏠 수 있는 화기라면 포격을 제외하고 무엇이든 사라예보 시내에 쏟아부었다. 물론 3년 동안의 포위 동안 도시 포격 역시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이에 대해서는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공하여 원점에 반격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주로 야간에 사격하여 사격하는 원점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식으로 보스니아 정부군이 선동을 위해 자작극을 위해 사격했다고 주장하는 등의 주장을 펼쳤다. 사라예보는 봉쇄되었지만 사람들은 살아가야 하기에 계속 시가지를 통행하였는데, 강남의 고층 건물에서 강북을 내려다볼 수 있던 세르비아 민병대는 낮에 무차별 저격으로 도시의 사기 저하를 유발하고 밤에 도시를 포격하는 방식으로 사라예보를 고사시켜 나갔다.&nbsp;특히 저격수가 이 포위전의 가장 큰 비극으로 여겨지곤 하는데, 이는 순전히 민간인을 향한 무차별 테러였기 때문이다. 강북의 시가지 전역이 저격수들의 가시권에 있었고, 시민들은 저격수의 재장전 타이밍을 노려 달리거나 극소수 무장한 시민들의 반격을 틈타 이동하거나, 또는 후일 투입된 유엔 평화유지군 장갑차의 엄호를 받으며 도시를 왕래할 수밖에 없었다. 3년 간의 무차별 저격과 포격으로 생명을 잃은 사람은 11,541명으로 집계되었으며, 물론 노약자도 포함되어 1,600명에 달하는 어린이들 또한 저격수에게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상자의 수는 50,000명을 넘는다. 1992년 하반기와 1993년 상반기 사라예보는 포위된 채로 격렬한 전투가 일어나며 이 와중에 잔혹 행위도 일어났다. 도시 외곽의 세르비아군은 지속적으로 도시 내의 정부군에게 포격을 가했다.&nbsp;도시 내에서는 세르비아군이 주요 군사적 요충지와 보급지 대부분을 통제했다. 도시 내에서 세르비아군 저격수가 곳곳에 산재하기 시작하면서 시내에서 저격수가 많은 특정 거리에는 "Pazite, Snajper!"(스나이퍼 조심!)이라는 문구가 곳곳에 적혔으며, 특히 이 거리 중 가장 심한 거리로는 공항으로 이어지는 대도로인 울리사 자마야 오드 보스네(Ulica Zmaja od Bosne)로 이 도로는 저격수의 골목으로도 알려져 있다. 길을 건너려다 저격 살해 당한 부부인 아드미라 이스미치와 보스코 브르키치는 도시 내에서 고난의 상징이 되었다. 포위전 기간 동안 하루 평균 329회의 포격이 있었고, 1993년 7월 22일 하루에는 가장 많은 3,777회의 포격이 떨어졌다. 이런 포격으로 인한 광범위한 우르비사이드로 도시 내의 주거 지역 및 문화재가 광범위하게 파괴되었다.&nbsp;1993년 9월에는 사라예보의 거의 모든 건물이 손상되거나 파괴되었다고 추정되었으며, 약 35,000채의 건물이 붕괴되었다. 특히, 파괴 대상으로 꼽힌 병원, 의료단지, 미디어 및 통신 센터, 산업 단지, 정부 및 군사 건물, UN 시설이 집중적으로 파괴되었다. 대통령 청사 및 국립 대학 도서관과 같은 건물도 포격을 받아 불에 타서 책 수천권이 소실되었다. 포격으로 인해 주민들은 죽어가기 시작했다. 박격포 공격을 통한 민간인 대량 살인은 각 유럽 언론에 오르내렸다. 1993년 6월 1일, 사라예보에서 축구 경기 도중 세르비아군이 공격하여 11명이 사망하고 133명이 부상을 입었다. 7월 12일에는 물 보급을 기다리던 민간인 12명이 세르비아군에게 살해당했다. 1994년 2월 5일의 1차 마르칼 학살로 민간인 68명이 사망하고 2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으면서 이 공격은 단일 공격 사상 최대 사망자가 나온 사건으로 기록되었다.&nbsp;의료 시설은 많은 민간인들을 치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1993년의 이르마 작전과 비슷한 의료 후송 작전에서는 소수의 부상자만 치료 받을 수 있었다.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이 연합하여 공세를 시작하면서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세르비아군이 천천히 사라예보에서 철수하면서 도시의 전기, 난방, 물 공급이 다시 재개되었다. 1995년 10월에는 정전 협정을 체결했다. 12월 14일에는 데이턴 협정을 맺으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포위전 기간 일어난 마지막 충돌은 1996년 1월 9일 오전 6시에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로켓 추진형 유탄을 트램에 발사하여 미르사다 두리치라는 이름의 55세 여성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이다. 또한, 동시에 세르비아군이 점유하고 있던 그르바비차에서 수류탄이 투척된 사건이 발생했다.&nbsp;공격 이후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수류탄이 던져진 건물을 수색했으나 범인을 찾지 못했다. 이 공격을 했다고 의심되는 혐의로 체포된 사람도 없었다. 보스니아 정부는 1996년 2월 29일 세르비아계군이 도시에서 완전히 철수하자 사라예보 포위전이 끝났다고 선언했다. 사라예보에 있던 세르비아인 7만 명 이상이 무슬림 장악 지구에서 벗어나 소지품들을 모두 가진 채로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후퇴했다. 종전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총탄 자국 있는 건물이 많이 남아있으며, 내전 당시 시가지 외부와의 연결고리였던 &#39;사라예보 터널&#39;은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일명 &#39;희망의 터널&#39;로 불리는 곳으로, 사라예보 국제공항이 소재한 부트미르(Butmir)에서 사라예보 국제공항 활주로 밑을 통과해 사라예보의 시계지역인 도브리냐(Dobrinja)를 잇는다.&nbsp;건설 당시에는 이 두 지역을 잇는다 해서 &#39;Objekt D-B&#39;로 불렸다. 당시 사라예보 국제공항은 UN평화유지군이 관리하던 곳이어서 사라예보 포위전 당시 이 터널을 통해 여러 구호품들을 안전하게 이송하는 보급로로 활용됐다. 이 터널의 기점 중 하나였던 가정집이 후에 발각되면서 집주인이 세르비아 민병대의 무차별 공격으로 사망했는데, 이 집 벽에는 당시의 총탄 흔적과 핏자국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무려 1425일! 이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하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외부 세계와 단절되었던 시간이다. 정확하게는 1992년 4월 5일부터 1996년 2월 29일까지로 이는 현대사의 수도 봉쇄 중 최장기간으로 기록된다. 10만 명 사망, 3만 2000명 실종 추정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온 보스니아 전쟁은 보스니아가 1992년 독립을 선언하자 이를 보이콧하고 도발로 여겼던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 민병대와 세르비아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수도 사라예보를 둘러싼 산악지대 주변 60km를 봉쇄하기에 이른다.&nbsp;이들은 100여 개가 넘는 골목에서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총격해 11,541명이 희생되었다. 300여 명의 보스니아 군인과 엔지니어들이 현지인들의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필수품, 시민군의 소형 무기를 외부에서 공급하기 위해 약 4개월에 거쳐 800미터에 달하는 지하터널(희망의 터널)을 1993년 7월 완공함으로써 장기간 저항을 유지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약 4년 간에 걸친 이 봉쇄 기간의 마지막 단계였던 1995년 예술진흥단체 오발라아트 센터는 사례예보 영화제를 창립했다. 전쟁에서 꽃 피워낸 이 영화제는 침체된 시민들의 활기를 북돋워주고 시민사회를 재건하는 데 힘을 보탰다. 현재 영화제 행사가 집중된 시네플렉스 사라예보와 홀리데이 인 호텔은 1992년 대규모 반전집회가 열렸고 첫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Mon, 25 May 2026 16:07:41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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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title>
			<link>https://essayphilosophy.net/article/1057</link>
			<description><![CDATA[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lsquo;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rsquo;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nbsp;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자치 공화국인 스릅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의 전(前) 대통령이자, 독립사회민주연합(SNSD)의 지도자인 밀로라드 도디크(Milorad Dodik), 출처 : The House of Commons Library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lsquo;유럽의 예루살렘&rsquo;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nbsp;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lsquo;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rsquo; 지역과 더불어 &lsquo;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rsquo; 지역을 들기도 했다.&nbsp;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nbsp;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nbsp;]]></description>
			<author>알렉세이정</author>
			<pubDate>Mon, 25 May 2026 16:01:27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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