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 보시
스님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귀 보시 수행을 했는지 내 말을 잘 들어 주었다. 계속하라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라고,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 주겠다는 태도로 귀를 열고 내 앞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한때는 내 직업도 듣는 게 반이었다. 나는 여성잡지의 고스트 라이터_Ghost Writer, 즉 대필 작가였다. 기자로 고용되어 월 2~3명씩 3년 동안 최소한 1백 명을 상대로 그들의 삶에 대해서 듣고 그들의 이름으로 육필 수기_肉筆 手記라는 걸 쓰면서 월급을 받은 적이 있다.
그때 알았다. 듣는 사람이 잘 들어 주기만 해도 말하는 사람의 입은 저절로 열리고, 말이 샘물처럼 저절로 흘러나온다는 것을. 내 입에서는 구태여 과장할 필요도 없고, 꾸며낼 필요도 없는 얘기가 술술 흘러나왔다.
까말라 얘기, 까말라가 입은 싸리나무꽃 같은 스웨터 얘기, 싸리나무꽃 같은 스웨터 때문에, 어린 시절과 동시에 어머니가 떠올랐던 얘기, 그리고 그 스웨터를 떠 주었다는 여행자가 누군지 궁금했다는 얘기, 붉은 술에 취해서 펨 도마의 순진한 얼굴을 바라보자니 딸 생각이 났던 얘기, 그리고 나도 모르게 주절거린 가증스러운 거짓말도 세세히 옮겼다. 그러고 나니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더 후련해지고 싶었다. 그래서 얘기를 이어갔다.
길에서 본 안개 속 보리수 얘기, 림빅의 디키 도마가 그 여행자에게 ‘다니 디디’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는 얘기, 디키 도마의 오빠 얘기, 그리고 내가 트레킹하면서 지나온 모든 마을을 며칠 간격으로 뒤따라온 한국인 커플을 아일랜드 게스트 하우스에서 만났으며, 그들이 나를 페마네 뚱바집으로 안내했다는 얘기도 했다.
뚱바집 페마는 디키 도마의 언니이며 펨 도마도 친척이더라는 얘기도 했다. 한국인 커플, 그러니까 취생과 몽사는 펨 도마로부터 실종된 딸을 찾는 한국인 아버지가 다녀갔다는 얘기를 들었으며 그 아버지가 바로 나라는 것과,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내색을 안 한 채 시킴으로 떠났다는 얘기까지 다 했다. 그래도 미진한 게 가슴에 남아 있었다.
탁자에 놓인 맥주 세 병이 어느새 모조리 빈 병이 되었다. 더 마시고 싶었고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자정이 가까웠다. 알리멘트의 식당 홀에 남은 손님은 우리 둘뿐이었다. 타파가 와서 소등 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간 후 스님이 말했다.
“얘기를 참 잘하세요. 듣는 내내 영화를 보는듯했습니다. 내일 시킴으로 떠난다고 하셨는데 ……. 저도 가보고 싶네요. 트레킹은 별생각 없고, 그냥 한적한 마을에서 좀 쉴까 봅니다. 시킴주 입경 허가를 신청하면 한 1주일 걸린다죠?”
“1주일? 누가 그럽니까?
“이곳 비망록에 그런 기록이 있더군요. 한글 메모였어요.”
“아, 전에는 그랬나 보군요. 지금은 몇 시간 만에 나옵니다. 내일 오전에 신청하면 오후에는 갱톡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우리 시킴에 같이 가요. 내일 오후에 가면 좋고, 안 되면 모레 갑시다. 어때요?”
“좋죠. 내일도 좋고 모레도 좋습니다.”
대답은 덤덤하게 하고 헤어졌지만 내심 무척 기뻤다.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직 할 말이 많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님은 잘 들어줄 거라고 믿는 말들이 가슴을 뻐근하게 했다. 그러나 금방 불안해졌다. 스님도 사람인데 마음이 갑자기 변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갑자기 싸늘한 말을 뱉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런 얘기는 이제 그만하시는 거 어때요? 듣기 싫어요. 지겹다니까요. 제발 그만 하세요. 시끄러워요. 닥쳐, 개새끼야. 아아, 그런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끝인데 …….
악수
술이 설취해서 잠이 안 왔다. 마음이 들떠서 안 오는지도 몰랐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책상에는 일기장이 그대로 펼쳐져 있었다. 쓰다만 문장이 마침표를 요구하고 있었다. 뒷말은 생략한 채 마침표를 찍었다. 한 줄 비워놓고 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스님에게 말로 들려준 얘기들을 문장으로 옮겨두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원숭이에게 양복을 입히고 넥타이를 졸라 매 놓은 듯 우스꽝스러웠다. 결국 옷 입히기를 포기하고 말하듯이 써버렸다. 쉽고 간결했다. 리듬을 타고 주절주절 길게 나오기도 했다.
이튿날 아침 9시. 이를 닦고 있는데 타파가 올라왔다. 미셸이 식당에 와 있다고 알려 주었다. 슬그머니 짜증이 났다. 사람을 사귈 때는 귀찮은 일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게 후회스러웠다. 이를 닦고, 머리도 감고, 팬티까지 빨아 널면서 머리를 굴렸다. 미셸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일마, 절마, 글마가 한 마디씩 읊어 주었다.
미셸, 난 오늘 할 일이 많다.
미셸,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했던가?
미셸, 아무 때나 마음대로 찾아오는 건 곤란해.
식당이 시끌시끌했다. 주방의 석유 버너 타는 소리도 숨이 가빴다. 빈 탁자가 없었다. 미셸은 카운터 아래 전화받는 탁자에 옹색하게 앉아 손의 붕대를 고쳐 매고 있었다. 맙소사, 미셸의 탁자 위에는 어느새 비운 맥주병과 컵이 놓여 있었다.
서빙하던 타파가 턱짓으로 미셸을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아침부터 술 냄새 풍기며 영업집 분위기 깬다는 뜻이었다. 나는 팔꿈치로 미셸의 옆구리를 쿡 찌른 후 식당 밖으로 곧장 나가 출입문을 열고 서서 미셸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미셸이 못마땅한 얼굴로 나와서 나에게 말했다.
“난 지금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김.”
“미안해. 하지만 나는 하던 일이 있었어. 마저 마쳐야만 하는.”
“널 오늘 칼림퐁에 데려가고 싶어. 어제 말했나? 그 누나는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아…….”
“고맙지만 못 간다. 시킴에서 꼭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있어.”
“칼림퐁에 들렀다 가도 되잖아? 시킴에는 볼 것도 없어. 차라리 칼림퐁이 낫다. 칼림퐁은 여기 다르질링하고 달라. 날씨도 따뜻하고. 무엇보다도 물가가 아주 싸. 닭, 염소, 물론 싱싱한 채소도 많아. 장을 봐다가 누나에게 주면, 누나가 요리를 해 주지. 술도 걱정 없어. 누나가 아주 좋은 꼬도 락시를 얼마든지 구해올 수 있어.”
“시킴에 먼저 가야 돼. 중요한 일이 있어.”
“무슨 일인데? 말해 봐. 내가 도와줄게.”
“우선 사람을 찾는 일인데 설명하자면 길어. 그리고 넌 몰라도 되는 일이야.”
“여기 경찰 서장이 우리 아버지 제자야. 검찰청에는 우리 형 친구들도 많아. 돌대가리에 악당들이지만 도움이 될 때도 있어. 말해 봐. 무슨 일이야?”
“미셸, 제발. 나 좀 이대로 내버려둬 줘. 부탁이야.”
나는 미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작별하자는 손이었다. 미셸은 악수를 거부하지 않았다. 붕대 두른 손을 내밀었기에 살짝 잡았다가 놨다. 돌아서서 저만치 걸어간 미셸의 뒷모습이 측은했다.
“시킴에서 돌아오면 바로 연락할게.”
미셸은 돌아보지 않고 붕대 두른 손만 높이 들었다가 내렸다. 그의 뒷모습은 무리에서 축출된 늙은 고릴라 같았다. 전날 밤에 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를 따라서 칼림퐁에 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시장에 내려가서 비닐 팩에 든 싸구려 소주를 마셨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스바나의 가게에도 들렀을지도 모른다. <</span>계속>
#장편소설_칸첸중가_028_귀보시_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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