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떨이에서 혼자 타고 있는 담뱃잎에서 나오는 연기는 크기가 매우 작은 탄소성분의 미립자들이다. 이 미립자들은 지름이 빛의 파장과 엇비슷할 만큼 작다. 이런 미립자들을 빛이 통과할 때에는 가시광선의 7가지 색 가운데 파장이 짧은 청색계통 빛이 가장 강하게 산란된다. 그 때문에 우리 눈에 파란 빛으로 보이는 것이다. 공기 분자나 미세한 먼지밖에 없는 맑은 날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그러나 이 연기를 빨아들이면 몸속의 수증기가 연기 미립자를 핵으로 삼아 뭉침으로써 아주 작은 물방울을 형성하게 된다. 입 밖으로 나온 이 입자들의 크기는 빛의 파장보다 조금 더 크다. 그렇게 되면 청색광뿐 아니라 모든 파장의 빛이 작은 물방울들에 이리 저리 부딪히면서 반사돼 결과적으로 하얀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늘의 구름이 하얀 것과 같은 원리다.
이것은 담배연기의 광학적 메커니즘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인문학적으로 풀어 보면 어떻게 될까. 담배연기의 광학적 메커니즘 같은 자연과학적인 설명이 인문학으로 들어오게 되면 사람이 연관된다. 담배연기가 하얀색으로 보이든가 파란색으로 보이든가 하는 것은 인문학에서 문제되지 않는다. 담배를 깊게 내뿜는 사람에게서 일상의 고뇌를 보거나 재떨이의 담배꽁초들을 보고 삶의 여러 흔적들을 살펴보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말 그대로 사람 혹은 인간에 관한 사고를 하자는 것이다. 사회과학에도 경제주체인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 때의 사람은 도화지 위에 크레용으로 그려진 사람일 뿐이다. 사고하고 지각하고 인지하며 감정을 드러내는 생생한 인간이 등장하는 곳은 인문학뿐이다. 자연과학에서 사람은 40조개의 세포로 구성된 세포덩어리이거나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나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최근 마음의 과학이 등장하면서 뇌 - 신체 - 마음의 삼각관계를 연구하고 있지만 사람의 손을 만질 때 느껴지는 손의 따듯한 온기가 마음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아직 오리무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회과학과 마찬가지로 자연과학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닉 레인이 쓴 책 『미토콘드리아』처럼 사람이 박테리아에서 진화한 것이라는 자연과학적인 주장은 인문학이 사람에 대해 가졌던 막연한 관념을 뒤흔들 만큼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처럼 인문학에 등장하는 그 사람이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어려운 것은 하늘과 땅 사이에 꽃비가 내리듯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사람의 속성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말에 천지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은 인간이다. 인‘간’의 사이 간 자처럼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한다. 즉 사이존재가 인간이자 사람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인문학 하면 인간이란 그 본성에 있어서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대학에서 인성교육 운운하듯이 인간성, 인성을 인문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물론 훌륭한 인성이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인문학은 앞서 말했듯이 ‘사이’를 사고하는 것이다. 인문학이 사람을 사고하는 곳인 이유는 사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늘은 자연과학의 영역이고 땅은 자연과학의 영역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사람처럼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존재한다. 사람만 사이존재가 아니라 인문학 자체가 사이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이’란 무엇인가? 인문학이 사이존재라는 뜻은 인문학이 하나의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사이에, 인문학과 사회과학 사이에 존재하기에 인문학은 어디 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는다. 인문학에 등장하는 사람도 하나의 속성이나 내용으로 환원시킬 수 없듯이 인문학은 그 인문학이라는 공간에 사람이 등장하되 그 사람의 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사실 한 길 사람 속이라 하지만 사람 속은 몇 길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사람의 입이 음식을 먹는 데에도 쓰이고 테이프를 끊는 데에도 사용되듯이 인문학은 사회과학일 수도 있고 자연과학일 수도 있다. 어디에다 쓰느냐, 다시 말해 어디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구름처럼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흔히 인문학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인문학이 어려운 이유는 사과라는 단어가 밭에서 자라나는 물질로서의 사과를 지칭하듯이 그러한 지칭관계가 존재하지 않기에 어려운 것이다.
인문학에 특정한 장소가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인문학이 사이존재라는 것은 인문학이 앞서의 입 이야기처럼 배치라는 뜻이다. 구름이 산의 형상으로 호랑이 형상으로 시시각각 변하듯이 인문학 또한 배치방식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그래서 인문학이란 배치이자 구름의 배치이기도 하며 궁극적으로는 구름이기도 하다.
인문학을 요리하기가 어렵고 인문학에서 깊은 맛이 우러나도록 요리한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렵다. 이것은 인문학의 속성, 딱히 어느 한 곳을 고정시킬 수 없는 인문학의 속성에서 비롯한다. 인문학은 사회과학, 자연과학, 인문학이 어우러지는 곳이다. 그리고 인문학은 사이존재이기에 지식들이 어우러지는 사이, 간극에 존재한다. 그 간극에서는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서로 각자의 경계를 넘어 월경越境한다. 한국 음식만 유별나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인문학을 요리에 비유하자면 돼지고기, 양파, 고추장, 육수 등이 서로 어우러져 서로의 경계를 부수고 간극 안에서 서로에게 스며들어 깊은 맛을 내는 것이 인문학이다. 사이존재란 이렇게 상호 삼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공감共感이란 sympathy가 아니라 empathy다. 공‘共’이란 곁에서 어우러진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곳 안으로 들어간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양파의 맛이 돼지고기 안으로 스며들어야 하고 육수의 향이 고추장 안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한국 음식에만 젓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상호침투가 이루어지다보면 무엇이 멸치이고 무엇이 양념인지 모르는 경지에 도달한다. 상호 침투가 정점에 도달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서로가 변한다. 한동안 이슈가 되었던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의 변화에 다름 아니고 경영계에서 인문학에 주목하는 것도 상호침투의 결과이자 하나의 특정한 내용을 지칭하지 않는 인문학의 속성 탓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몽타쥬라는 말은 누구나 잘 아는 단어다. 그런데 이 단어는 범죄자의 얼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서 쓰이는 촬영기법을 뜻한다. 이 기법으로 영화를 처음 만든 사람은 <국가의 탄생>을 만든 그리피스 감독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러시아의 영화감독인 에이젠쉬쩨인이 만든 말이다. 기원을 더 추적해보면 에이젠쉬쩨인은 이 말을 한자에서 얻어왔는데 가령 똥 분糞자는 쌀 미米 자와 다를 이異 자가 합쳐진 말이다. 여기서 똥 분을 A, 쌀 미를 B, 다를 이를 C라 하자. B는 C와 모양이 다르고 A는 C와 형태가 다르며 A도 B와 글자가 다르다. 각각 다른 모양을 한 B와 C가 서로 스며들어 B와도 다르고 C와도 다른 글자 A가 만들어진다. B에 없던, C에 없던 전혀 새로운 글자 A가 탄생한 것이다. 이 때 A를 가리켜 몽타쥬라 한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똥 분 자인 것이다. A안에는 B와 C가 들어 있고 음식처럼 B와 C가 서로 스며들어 나타난 결과가 A다. A가 인문학인 것이다. 이것을 요즘엔 통섭이라 부른다. 영어로 ‘함께 같이 위로 뛴다’는 뜻에서 나온 consilience를 윌슨의 제자인 최재천 교수가 통섭으로 번역한 것인데, 굳이 윌슨 이야기를 빌리지 않더라도 인문학의 운명은 통섭이자 몽타쥬다. 이 몽타쥬 개념을 문학과 사회과학으로 끌어들여 이야기한 사람이 러시아의 사상가 미하일 바흐친이다. 그는 아이(생명, B)를 임신한 노파(죽음, C)의 이미지를 가리키는 그로테스크 개념, 전혀 새로운 글자인 A처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유토피아적인 카니발 개념을 만들었다. 그 자체가 영화, 문학, 사회과학이 서로 경계를 넘나들고 마치 구름처럼 영화에서 문학으로 문학에서 사회과학으로 이동 배치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사이란 상호 접속이고 인문학은 다른 것들과 상호 침투한다. ‘나는 접속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란 말도 있지 않은가. 21세기의 화두는 접속이자 상호 침투다. 인문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한 길 안에 수많은 길이 있고 접혀진 부채 안에 여러 부채살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인문학은 특정 영역이 없고 모든 것을 다 다루고 포괄한다. 에이젠쉬쩨인도 바흐찐도 아닌 필자 자신의 말로 표현하자면 인문학은 발효되어 정체성이 각자 상실된 발효식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