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형이상학에 대한 단상들
- 『꿈꾸는 형이상학』(윤구병, 보리출판사, 2020)을 읽고서
---『꿈꾸는 형이상학』을 읽고나서 쓴 것들인데 순서를 재배치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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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가 형이상학이라고 생각한다. 서양철학에서 형이상학의 대상은 공간과 시간, 인간의 현존 상태에서 도덕과 아름다움, 자유와 필연, 음덕(기적, 은총)과 같은 우발적 사건들과 운명, 그리고 이런 바탕으로서 자연과 신들도 대상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이것들을 다루는 ‘생각하는 자아(인간)의 다양한 역량’인데 감각, 감정, 오성, 지성, 이성, 추리, 추억, 기억 등을 다루는 인식론이 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인간의 생각이 만들어 낸 구성, 구축, 조성, 상상을 통해, 틀(도식)과 계열, 체계를 다루는 논리학, 수학, 물질과학, 생명과학일 것이다. 그리고 늦게서야 사람이 사는 터전에 대해 인간이 인간과 관계를 맺고, 연결들의 고리든 그물망이든, 조직화하여 만들어가는 공동체에서 사회, 노동, 국가, 체제, 그 안에서 재화의 축적와 분배, 탐욕을 추구하는 폭력과 통제도 있지만, 공감과 공명을 통한 평등과 평천하를 추구하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요즘에 덧붙여서, 터전에서 즐기며 화해하고 경쟁하는 놀이들, 운동, 음악, 예술 등을 다룰 수 있으며, 살아가는 지역에 따라 달리 생성된 놀이와 다음측정을 향한 문화론도 보태야 할 것이다.
이 책 『꿈꾸는 형이상학』을 읽으면서, 형이상학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길라잡이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이전에도 철학 입문서가 여러 종류가 있지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우선 『철학의 제 문제』(소광희, 이석윤, 김정선 저, 1973)가 있었고 이는 독일 관념론에 영향 아래 서양철학 또는 앵글로색슨 철학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에 비해 라틴계의 입문서로서 프랑스 고교 4학년에게 철학입문으로 쓴 베르제즈와 위스망의 『인간학 철학 형이상학(1)』(1999), 『인간과 세계(2)』, 『지식과 이성(3)』, 『실천과 목적(4)』(남기영 번역)이 있는데, 프랑스 고등학생 전부가 철학을 교과과정으로 만든 나라는 프랑스가 유일하다. 두 입문서는 앵글로색슨의 사고방식과 라틴계의 사유방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여기 이 책은 우리 땅에서 우리 입말로 쓴 책이라는 점에서 우리 방식의 배치와 용어가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사의 지위에서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여기 이 책을 통해서 성찰하고 숙고할 수 있으리라. 이런 시금석과 같은 방법을 제시하기는 매우 어려움에도, 저자는 우리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소통하기 위하여 그리고 다음 시대를 만들어가기 위해 썼을 것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우리말로 우리사유를 할 수 있는 단초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참조로, 그 책을 읽는 분들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서 지나가듯이 읽어보게 한 것을 한 꼭지 만들었다. https://cafe.daum.net/milletune/REM4/181 (59U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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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철학의 기본 설정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어쩌면 하나의 화두, 태극, 니르바나, 선의 이데아와 같은 것일 수 있는데, 이를 다루는 방식은 어느 학문들에서나 둘로 갈라져서 다루게 되는가 하는 의문도 포함한다. 그런데 서양철학에서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다루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다른 한편 자연의 도식과 체계를 찾는다고 하면서 변장된 신학을 동원하고 있다. 이런 두 방식이 서양철학사가 걸어온 길인지 모른다.
지식의 체계 안에서 자연을 다룬다고 생각하는 방식은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처럼 분할을 생각하고, 또 무한히 분할하는 방식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 방식으로 우선 자연 또는 존재의 단위와 원리를 찾는데 관심이 있었고, 그런 관심이 인식능력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자연을 겉에서 안으로 깊이 들어가면서, 게다가 생물학에 마주하면서, 인간이 생물들의 한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반성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간이 자연을 다루면서 인간의 방법으로 다루어도 잘 다루어지지 않은 생명과 영혼이 있듯이, 이런 반성의 시대에 지식이 다루는 것이 총체적 자료들일까 하는 고민을 안았던 것 같다. 우선 벩송은 분할하여 단위로 다루는 것이 공간의 입장이며, 물체의 결합과 해체, 움직임과 정지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삶의 내재성과 연관 있는 세 가지를 물리화학적 또는 수학적 방법으로 풀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보았다. 이 세가지 영역으로, 도덕에서 착하다(훌륭타), 미학에 아름답다(이쁘다), 종교에서 음덕(은총)이라 했다. 이를 다루는 방식은 기억과 유전으로 다루어야 하고, 그 방법이 직관이라 했다.
다른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사물과 대상들을 그림처럼 사실(만들어진 것)을 언어로 배치와 배열로 다룰 수 있다고 “철학-논리 논고(1921)”에서 쓰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 대상이 윤리학, 미학, 종교라고 거의 끝부분에 간단하게 썼다.
다시 소크라테스 이래로 훌륭타, 이쁘다, 스스로 이뤄지다는 것을 정의하기가 불편하지만, 인간이 이런 것들을 추구한다고 하고, 이런 면에서 지혜를 사랑한다고 한다. 물체로서 다루거나 영혼으로 탐색하거나 간에, 인간은 이런 것들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으면서, 철학의 임무가 정의하고, 원리를 찾고, 공리든 공준이든 가정하고서 물음에 대해 해답을 찾는 것으로 보았다. 2천 5백 년의 시대를 거치면서, 수학, 과학, 논리 등의 지식은 도덕, 예술, 믿음의 지혜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형이상학 또는 ‘자연의 배후학’를 알려는 긴나긴 노력에서, 자연이 자기의 자치와 자율의 힘(충력, 엘랑)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판단하고 또는 기호화하고 나아가 어떤 상징이나 표시(기표)를 만들고, 그리고 인간은 이것들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면서 공동체의 안정를 유지하고자 하였다.
이런 과정들을 보건데, 자연의 자기생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적 지성과 같은 인간 지성이 모든 답을 찾을 수 있다고, 그리고 그 환경속에서 비례에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던 쪽들이 있다. 이들은 단위와 통일성을 통해 동일성을 바탕으로 다루었다. 이런 사유방식을 사회에 적용하여 거래에 소중한 비례중항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이질성의 생성과 발산이 통일성이라기보다 다양체라고 보았고, 공동체에서 삶은 거래보다 분배가 먼저임을 알고 있었다. 게다 사회 집단이 사실들의 모입(집합)이라기보다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연관 또는 연결방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는 쪽들도 있다.
어째거나 19세기 후반에서부터 자연으로부터 나온 인간의 활동이 물체의 집합들과 다르다고 여기면서, 물체를 통한 생물학이 아니라 생명체의 다곱성을 통한 사회학과 심리학을 찾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에 비해 지성(이성)이 천문학, 물리학, 화학, 분자와 전자운동에까지 파고들어 수학적 도식 또는 상징화(기호화)와 함수계산을 통한 설명이 가능하다고 믿는 쪽이 여전히 우세한 것처럼 보였다. 이 후자는 생물의 내부 움직임도 상징화가 가능하리라고 여기면서 다루었는데, 아직도 생명과 영혼에 대한 수학적 함수든 기호화든 이루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생명이 물체(신체)를 지니는 한에서 수학적 또는 역학(정역학이든 동역학이든)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설명하려 들고, 나아가 0과1의 체계 속에 인간의 두뇌활동까지 해명하려 하고 있다. 그럼에도 전자들은 생명과 영혼에 관한 한 해명의 틀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포섭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고들 한다. 이런 양자의 사유는 대결(길항관계)이라기보다, 서로 상반된 방향의 힘이, 마치 지구 자성의 남극과 북극처럼, 또는 마치 플로티노스의 유출과 전향의 두 방향처럼, 방향이 달리하는 힘들의 진행으로 여기는 것은 현존에서 공연적으로 존속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양자의 사유가 이원성에서 출발하기보다 다원성으로 다루어 조직화와 유기체화에서 연대적, 대칭적, 상보적 등의 표현들은 다발 속에서 가지들 사이의 정도의 차이로 여기기도 한다.
철학사에서 한편 수학과 물리학의 방식에서처럼 단위로서 수와 원자의 결합과 조립에서 체계를 만들고 그 틀과 그물망 안에서 소통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이들이 비례중항을 구하는 시뮬레이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하자. 다른 한편 삶에서 연결의 다곱성과 다양체에서 단위로서 리좀과 덩이로서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조화중항을 찾는다고 여기며, 여기서는 모듈레이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해보자. 이 둘 사이에 대칭도 평행은 아니지만 어떤 연대성이 있을 수 있으며, 자연의 생성과 발생의 다발에서 각 부문들로부터 형상화 또는 도식화를 이룰 수 있고, 다발로서 여러 조직화와 체계화가 이루어지는 터전에서 거래가 아닌 분배의 조화를 찾는 노력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이제까지 하나의 단위도 하나의 통일성을 찾지 못했다고 여기는 자연론자는 자연이 창조하고 드러내 보이는 것을 좀 더 깊이 노력하여 찾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그런 노력을 하는 것이 지성에 의해 수학과 논리, 물리와 생물에 대한 일정 부분을 체계화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거꾸로 반문한다. 자연에 대한 탐구가 같은 대상을 동일하게 다루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자연 속에서, 다른 한편에서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으며, 그 속에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여긴다. 아마도 문제를 보는 시각의 차이는 도덕에 있을 것 같다. 후자 편은 이익과 탐욕이 들어있는 데 비해, 전자에서는 공화와 공감에 있다고 해햐 할 것이다.
형이상학(자연배후학)의 탐구는 자연의 자발성이 창조해낸 것에 대해, 그 속에서 그 많은 생명체들이 창조된 것에 대해, 그들 사이에 조화중항에 비추어서, 인간이 총체적으로 진지하고 겸손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사유하게 되면, 다른 생명체가 자연 속에서 사는 것을 본능이라고 부르기 보다, 그 생명체가 지닌 직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간도 여러 다른 생명체들의 직관들과 더불어 “다음측정”을 찾아가면서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지 않겠는가. 함께란 결국 도덕론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는 태어나는 이들도, 살아가는 이들도, 자연의 흐름을 익히는 학습이 필수적이라는 의미에서 교육이 중요하다. 자연 배후학, 교육, 그다음으로 자연 또는 지구라는 공동의 판을 공감과 공명으로 살아가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리라. 원래 형이상학에 제시하는 화두는 함께 어우러져 잘살자는 것이 아닌가. (59U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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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책들은 읽어보면 저자가 용어를 통상 용어와 달리 쓰는 것 같고, 또한 용어들을 저자 자신의 고유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쓴다. 게다가 저술의 뒤에 용어 찾기(인덱스)가 없다. 나로서는 새천년 초반에 2년에 걸쳐 세미나를 통해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1969)』을 읽었었다. “함성”이란 단어에 주목한 것은 아니지만, 그 단어가 거의 마지막에 나온 것에 놀랐다. 바디우가 들뢰즈의 사후에 그에 대한 비평의 글로서 『들뢰즈, 존재의 함성(Deleuze. La clameur de l'Être, 1997)』“”을 썼다. 바디우는 잘 읽었다고 해야 하나(?)
프랑스 철학저술들이 이런 색인이 없다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그런데 그것을 읽고나서, 그것을 되돌아볼 기회가 있어도 어느 구석에 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경우가 태반이다. 노트 없이 읽어놓으면 읽은 것이 못되고 또는 참조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형님의 이 책도 용어색인을 만들지 않아야 할 것 같다. 그 단락 또는 문단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 바디우의 비평서를 읽으면서 바디우가 약간 소심하다고 느꼈다. 그 용어를 알았으면, 들뢰즈가 살아 있을 때 책을 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로서는 차이의 반복에서 들뢰즈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생명 또는 영혼이 생성 또는 발현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에, 존재의 함성이 아니라, ‘생성(창안)의 함성’이라 해야 할 것 같다.
프랑스의 학문계에서, 저술에서 색인을 만들지 않듯이, 프랑스 저자는 또는 사상가는 자기의 글을 자기식 표현대로, 자기 방식대로 글을 쓴다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흥미로운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내용을 전부 읽지 않으면, 그 저자의 어떤 중요한 용어를 고를 수 없고, 그 단어의 쓰임새를 알지 못하고 그 용어를 인용하면, 그의 의도에 반대를 찬성으로 인용하는 경우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냥 죽 읽어서 그 내용을 관통하여야, 그가 쓰는 용어들 또는 내용의 진의를 깨달을 수 있다.
언젠가, 푸꼬가 들뢰즈를 읽거나, 들뢰즈가 푸꼬를 읽으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해의 폭이 넓고 깊은 이유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둘이 동시대에 살면서 서로의 평가에 대해 들어서 아는 분위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 든다. 두 철학자는 1900대 초반에 프랑스 철학계의 양대산맥이었던 벩송과 브륑슈비끄의 대립처럼, 서로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 같다. 이 둘이 서로 라깡 또는 프로이트의 견해들에 대해 다른 방향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두 학자는 다른 계통으로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럼에도 둘이 한 동안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내가 보기에 들뢰즈가 한자리에서 노마드로 살았고, 푸꼬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노마드로 살았는데, 서로 삶의 성향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서로는 적대적이라기보다 서로의 관심을 공유하면서 의미화작업을 대립적으로 서술하면서, 마치 벩송과 브륑슈비끄처럼, 서로 달리 담론을 전개했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
형님의 저술들은 시대와 화해하지 않고 불협화음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렇지 않다. 그가 스승 박홍규가 플라톤의 독해를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읽어내듯이, 형님은 세상(우리나라)을 그가 그려보고 싶은 대로 그렸다고 본다. 형님은 현 세상을 자신의 책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저항 운동에도 닿아있다. 분단의 아픔을 불교와 같은 방식으로 치유에서 찾아내려 하기기도 하고,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는 중생들처럼 스스로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하고 싶어 했으며, 그 이야기를 아픈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그들의 소리를 내고자 했다고 느낀다. 그런 그의 입말은 학문 세계에서 표현하는 단어, 용어, 개념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책을 누가 보겠느냐고 하는 이들이 있지만, 그 아픔의 백성 또는 민중은 제도와 체제 길들여 있었지만 그래도 형님과 같은 느낌으로 읽을 것이다.
형님은 내재의식의 소리를 밖으로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철학자에 속한다. 그 내재의식의 발현하는 가운데, 형님 만큼이나 폭넓기도 하고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이도 드물다. 그러면서도 학문의 통일성을 찾으려는 노력 안에는, 허리 잘린 우리도 통일이 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그도 서울의 분위기에 속했다. 서울의 서양 철학적 풍토는 일본을 통한 계몽이라는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의 입말을 따라가면서 불교의 천년 유교의 오백년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이상하게도 계몽주의를 따라가서, – 우리나라의 실학이 자연주의를 수용하지 못하여? - 일제의 학문적 지배와 미제의 과학적 진리에 그도 모르게 은연중에 빠져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이 두 제국주의에 포획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우리 입말로 글을 쓰고 정리하고자 한 그의 노력은 존재론, 형이상학, 우주론 등의 이름으로 계속해서 이어나온 것이다. 이런 작업은 스승(박홍규)의 구술 책들과 달리 또 하나의 색인 없는 저술들을 만들었다. (59ULA)
(재배치, 4:26, 59UMH) (5:04, 59umh)
시뮬라시옹에서 구성과 구축 물리학적 메카니즘에 가깝다면, 모듈라시옹(modulation) 조성에서 조율과 변조는 생명체의 내부 조절과 변조에 가깝다.
“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은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 1911)」(ES, 1장)에 나오는데 1911년 강연에서이다. 벩송은 이 강연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과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들뢰즈는 『천개의 고원(1980)』, 「3장, 기원전 1만년: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은 벩송의 “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에서 “사실들” 대신에 “지층들”로 바꾸어 진화의 과정을 변조(la modulation)의 과정으로 서술했다. 그 두 흐름의 방향과 내용은 매우 닮았다. 들뢰즈는 사물을 다루는 방법으로 구성과 구축의 관계 방식을 통한 시뮬라크르를 이용하였고, 그 다음으로 내재의식을 다루는 방식으로 조성과 조율의 연관방식(수학에서 고차 함수의 변환들처럼)을 통한 변조(la modulation)를 이용하였다. 이렇게 보면, 들뢰즈는 벩송의 계보이다. (59ume)
천하루 26-10-28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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