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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찐의 철학으로 생각하는 세월호 참사
  • 이득재 칼럼니스트
  • 등록 2026-10-31 11:07:17
  • 수정 2026-10-31 11:40:47

세월호 참사로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가깝게는 초동대처 미흡으로 멀게는 선박 수명을 20년에서 30년으로 규제를 완화해 준 것이 화근이었다. 선박 수명을 20년으로 제한했더라면 20년 넘은 낡은 선박이 수입되었을 리 만무하고 사람들은 세월호가 아니라 다른 배편을 이용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화물 수입으로 돈을 더 벌려고 평형수를 다 채우지 않고 선박을 개조해 많은 사람들을 짐짝처럼 취급해 실어 나른 것도 세월호 참사의 또 다른 화근이었다. 

생명의 존엄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과 무책임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혹자는 한국 사회가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한 반지성주의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 또한 올바른 말이다. 한국 사회의 교육이라는 것이 무조건 외우고 외운 것을 시험지에 오바이트 하듯이 쏟아내는 것이니 생각이고 뭐고 할 겨를이 없다. 학교 현장에서는 여전히 비판적 사고를 배제한 채 권위주의와 상명하복 식의 군대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학생 놈이 건방지게 교장실을 찯아 와” 하며 학생들을 겁박하는 문화가 여전히 팽배하니 상명하복 문화에 길들여진 학생들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때 학생들은 갑판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고 죽어 나갔다. 세월호 침몰 후 벌어진 수색에서 학생들이 얌전하게 가만히 웅크린 모습으로 죽은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한국 사회의 교육 현장에 명령과 복종의 문화가 얼마나 팽대했던 것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는 세월호 참사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고자 한다. 낯선 이름일지 모르나 ‘대화주의’의 사상가로 유명한 미하일 바흐친이라는 러시아인이 있다. 1895년에 태어나 1975년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친 바흐친은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 『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 시대의 민중문화』 등으로 20세기 중반 ‘바흐친 산업’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다. 그의 사상 권 안에는 대화주의, 독백주의, 카니발, 그로테스크, 응답성, , 행동, 존재의 비 - 알리바이, , , 시선의 잉여분 등 많은 키워드들이 들어 있다. 본고에서는 바흐친의 사유 안에 들어 있는 이러한 키워드들을 가지고 - 이러한 시도가 자식을 잃은 유가족들에게 전혀 도움은 안되겠지만 - 생명에 대한 철학과 세심한 배려가 전무하다 싶을 정도의 한국 사회를 반성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해보고자 한다. 다른 사건도 있었겠지만 삼풍 백화점부터 세월호에 이르기까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론 등 재난과 인재 문제를 다루는 사회과학적 성찰은 있었지만 인문학적인 성찰은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응답성 있는 존재다. 여기서 응답성이란 윤리적이고 법적인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응답성은 응답성으로 번역하는 편이 낫다. 러시아어로 응답성은 ответственность라고 쓰는데 뜻은 대답, 답변, 반응이라는 뜻의 ответ에서 왔다. 영어로는 answerability나 responsibility로 번역된다. 바흐찐에게 있어서 인간이라는 존재는 해바라기가 햇살이 있는 쪽으로 머리를 돌리듯이 반응하고 대답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반응하고 대답하는가? 바흐찐은 스포츠 예를 들면서 내가 나에게 장애물로 작용하는 경우를 든다. 바흐찐에게 영향을 미친 스승 브베젠스키에 따르면 나는 나를 볼 수 없고 나는 나를 들 수 없다. 바흐친과 브베젠스키는 20세기 초 상트 페테르스부르그에서 유행한 ‘죽음의 심리학’이라는 사상의 흐름 속에 있었는데 죽음의 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타자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나라는 존재도 너의 입장에서 보면 너이고 너라는 존재도, 즉 타자라는 존재도 나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고 타자의 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타자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도 타자이고 타자도 타자라는 것이다. 바흐친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타자다. 인간이 응답성 있는(응답하는) 존재라는 것은 결국 이러한 타자에게 반응하는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사람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반응을 보이고 있다. 바흐친에게 있어서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고 타자의 존재에 의해 형성되는 것처럼 나를 떠나 타자의 입장에 서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KBS 보도국장이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세월호 참사로 죽은 이가 더 적다라는 말을 해 유가족과 시민들의 공분을 산 것은 그가 나의 입장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래서 자기는 안전 불감증을 이야기해보자는 뜻이었다고 이야기하고 사과 없이 사임한 것이다. 유가족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 얼마나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KBS 보도국장은 내가 나의 장애물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흐찐에 따르면 존재는 언제나 나의 바깥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는 finding oneself outside의 존재이기 때문에 나를 나의 바깥에 머물게 하지 않으면 대화가 성립하지 않고 KBS 보도 국장처럼 공분만 사게 된다. 바흐친을 대화주의의 사상가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타자에 대한 사고에서 나온다. 바흐친이 말하는 시선의 잉여분도 외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타자가 볼 수 있고 타자가 볼 수 없는 시선을 내가 볼 수 있다는 시선의 잉여분 개념은 그 자체가 대화의 토양이 될 수 있는 에너지라는 뜻이다. 만일 이러한 시선의 잉여분이 없다면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시선의 잉여분 탓에 나와 타자는 결코 융합될 수 없다. 따라서 내가 유가족의 시공간 안에 선다는 것, 유가족의 감정을 획득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정 탓에 유가족들이 성금 모으기를 거부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유일무이한 존재 안의 위치에서 벗어나고 타자가 타자의 존재 안에서의 유일무이한 위치에서 벗어나 형성되는 대화의 공간일 뿐이다. 

 

 내가 나 바깥에 그리고 나를 마주보고 있는 한 사람 전체를 관찰할 때, 우리의

 구체적인, 실제로 체험한 지평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왜나하면 각각의 순간에,

 내가 관찰한 사람, 이 타자가 어떤 상태에 있든, 나에게 얼마나 가깝게 있든지

 간에, 그가 자기 자리의 밖에서 그리고 나와 마주보고 있는 곳에서 볼 수 없는

 어떤 것을, 나는 볼 것이고, 알 것이기 때문이다

 

나와 타자는 융합하지 않더라도 나의 입장을 떠나 타자의 입장에 설 수는 있다. 바흐친이 말하듯이 나는 타자를 사랑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외재성의 존재로서 타자의 반응에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은 상당히 중요한데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이 KBS 본사나 청와대까지 쫓아간 것은 응답성 있는ответственный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바흐친이 「텍스트의 문제」라는 글에서 말하듯이, 그리고 우리가 흔히 듣는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냐!’라는 외침처럼 반응을 원하고 자기의 말이 들려지기를 원하는 존재다. 이 말이 들려지지 않을 때 인간의 감정은 폭발한다. 

 

 들려짐услышенность은 이미 대화적 관계이다. 말은 들려지고 이해되며 응답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이후 이러한 반응, 응답은 나오지 않았다. 유가족들이 원했던 것은 KBS 보도국장의 사임이 아니라 그의 사과 말 한 마디였다. 그러나 유가족들의 외침은 들려지지 않았다. 바흐친 식으로 이야기하면 한국 사회는 지금 독백주의의 사회다(시청자들이 <응답하라1994>에 열광했던 것을 보면 아직 100% 독백주의 사회는 아닌 모양이다). 관료들은 대통령의 말을 받아 적기만 하고 대통령은 국민들과 대화하려고 하지 않는다. 타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철저하게 나의 위치에서만 말한다. 그래서 유가족들이 우리들이 필요할 때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대통령 본인이 필요하면 진도에 온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바흐친이 「행동철학을 향하여」라는 글에서 꿈꾸던 삶, 철학도 이러한 것이었다.

 

 삶은 구체적인 응답성 안에서만 의식될 수 있다. 삶의 철학은 도덕 철학이 될 수 있

 을 뿐이다. 삶은 사건으로만 의식할 수 있지 존재 - 주어짐으로는 의식될 수 없다.

 응답성에서 떨어져 나온 삶은 철학을 가질 수 없다. 그러한 삶은 원칙적으로 우연적

 이고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한국 사회는 응답성에서 떨어져 나와 철학을 가질 수 없는 삶으로 가득 차 있다. 바흐친은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늘날의 위기의 근저에는 당대 행동의 위기가 있다. 행동의 동기와 그 산물 간에

 심연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 결과 존재론적인 뿌리에서 떨어져 나온 산물도 시

 들기 시작했다. 돈이 도덕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 경제적

 물질주의는 현재 순간에 대한 관계에서는 옳지만 행동의 동기들이 산물 안을 관통

 해 있고 더 나아가 거꾸로 나름의 의미를 가진 산물이 현실적인 동기부여에 따르는

 행동과 절연되어 있기 때문에 올바르지 못하다

 여기서 바흐친이 말하는 행동은 뜀뛰기 같은 육체운동, 생물학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응답, 소망, 감정, 보는 것, 생각하고 일하는 것 등을 모두 뜻한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의 동기가 그 산물(결과물)에 일치하지 않는 사태가 생겼다는 것이다. 언어는 그러므로 인류의 교양이 어느 정도 높고 낮은가를 결정해주는 척도다. 『미래의 철학의 근본 명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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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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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min2026-11-01 15:37:07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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