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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 이득재
  • 등록 2026-11-02 08:41:29

[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

“야, 걔 있잖아, 애가 좀 맹하지 않냐?” 멍청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맹盲 자는 한자 그대로 눈目이 망亡했다는 뜻이겠다. 눈이 망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인데 멍청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만 맹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맹하다. 누구 할 것 없이 멍청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누가 누구 보고 맹하다는 말을 사용하면 오류다. 

왜 그럴까?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길거리의 개나리를 눈으로 보고 개나리라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 개나리가 뇌 속에서는 어떻게 스캔되어 있을까. 눈으로 본 개나리와 뇌 안에 시신경으로 전달된 개나리의 이미지는 같을까. 인간의 눈에는 놀라운 점이 있다. 맹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사람에게는 맹점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이지미가 망막에 전달되도 시신경이 빠져나가는 곳이자 빛에 무감각한 곳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맹점이라 부른다. 눈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본다고 해도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시각에 늘 그만한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세상을 다 보지 못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을 보고 맹하다고 비난한다면 그것은 무지의 소치다.

인간이 왜 맹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실험이 있다. 

왼쪽 눈을 감은 채 그림 십자가를 똑바로 바라보라. 그 때 그림 전체를 눈에서 약 40cm 떨어뜨려 이리저리 움직여보라. 그러면 결코 작지 않은 검은 점 A가 그림에서 갑자기 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그림은 다른 종이에 그대로 옮겨 그린 뒤 검은 점 A를 관찰해도 된다. 점 A가 얼마나 커져야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점 A가 있는 곳에 점 B가 오도록 그림을 돌린 다음 똑같은 관찰을 해도 된다. 그러면 점 B를 지나는 선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라.

이 실험은 우리에게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 해준다. 일본의 뇌과학자인 요로 다케시는 『바보의 벽』이란 자기 책에서 뭔가를 안다는 것이 잡다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그는 앞의 실험처럼 사실을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일이라고 말한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보지 못한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인간은 결국 알지도 보지도 못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우리가 책을 읽고 공부하며 추구하는 지식이란 무엇인가? 지식은 잡학이 아니다. 아무 것도 알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알고 있고 보고 있으며 눈으로 보는 개나리가 진짜 개나리라는 착각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것이 사회다. 그렇다면 요로 다케시의 말처럼 그런 사회는 무서운 사회다. 눈으로 보는 개나리가 뇌 속에 스캔된 개나리와 다르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현실의 자세한 모습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유일한 존재, 즉 신이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 속에 있는 인간이 더 큰 착각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진실, 객관적인 사실, 본질 같은 것이 존재할까? 서양 사상의 토대에는 이러한 것들이 전제되어 있지만 동양 사상은 그렇지 않다. 사물을 보되 보지 못하고 어떤 사실을 알고 있되 알지 못한 채 더 큰 착각을 자초하던 서양 사상은 20세기에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끔찍한 사고를 치는 기반이 되었다. 최근에야 프랑스의 랑시에르 같은 사상가가 자기 책 『무지한 스승』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필요 없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나는 다 알고 있고 다 보고 있기에 누군가를 가르칠 수 있다는 계몽사상이 유럽을 지배하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착각은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이데올로기라고 하니까 지레 겁먹을 이유는 없다. 이념, 아이디어 등의 뜻으로 쓰이는 idea에 논리를 뜻하는 접미사가 붙은 것이 이데올로기니까 말이다. idea란 그리스어로 ‘본다’는 뜻이다. 이데올로기란 따라서 세상을 보는 논리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는 존재인데도 세상을 보는 논리가 마치 존재하기라도 하다는 듯이 고집하다 보면 이데올로기가 출현하고 만다. 이데올로기는 그 안에서 100% 진리다. 내가 세상을 보는 논리가 진리이듯이 나의 이데올로기,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엄청난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진리이자 절대적인 진실이다. 따지고 보면 나의 이데올로기가 맞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맹한 존재이니까. 그런데 이러한 착각이 인류의 비극을 불러 왔다. 무섭고 공포스러운 일이다. 

지식이 아니라 잡학이 난무하는 세상은 무섭고 위험하다. 우리는 흔히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말하고 또 꿈꾼다. 새 정부 들어서서 위장 전입, 병역 기피, 세금 탈루를 기본 3종 세트로 갖고 있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 부지기수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상식은 이런 곳에서만 안 통하는 것이 아니다. 지구온난화가 탄산가스의 증가 때문이라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고 원자력은 안전하다는 사실을 철석같이 믿으며 비타민 C가 몸에 좋다며 열심히 챙겨 먹는다. 무엇이 진실인가? 과연 이러한 행동은 상식적인 것인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과학철학자인 칼 포퍼는 반증될 수 없는 이론은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타민 C가 몸에 좋다면 그것이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 

예전에 채식의 배신』이라는 책이 논쟁거리로 떠오른 적이 있다. 절대적 채식주의자vegan이었던 리어 키스는 채식주의를 배신하며 쓴 이 책에서 암 세포가 비타민 C를 좋아한다고 주장하며 자기의 주장을 논증한다. 과연 무엇이 진실일까? 이 세상에 과연 확실한 것은 얼마나 될까? 담배는 과연 나쁠까? 담배가 나쁜 것이 아니라 싱크대의 가스렌지에서 나오는 프로판가스가 더 나쁜 것은 아닐까? 수많은 언쟁들이 오고 가겠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만다. 막걸리로 식초를 만들어 아내의 유방암을 고쳐주었다는 사람이 방송을 타고 싱싱한 채식으로 건강을 지켰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온다.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지식일까? 정보가 흘러넘치는 시대는 잡학이 판을 친다. 어떤 맥락에서는 그럴 수도 있고 다른 맥락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식이 인정을 받는 세상이 와야 한다.

성찰이 필요한 세상이다. 서양 문화는 성찰보다 행위를 중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인식한다고 하는 특별한 상황을 마주하기를 전통적으로 꺼려 왔다. 그래서 칠레의 유명한 인지과학자인 바렐라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보지 못한 채 살아 왔다고 말한다. 앎을 알기 전에 다 안다고 이야기하고 앎을 알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에 실제로 가장 가까운 우리의 경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모른다는 것은 바렐라 말대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기회가 한 번 되시면 KBS 다큐 프로그램인 <오토매틱 브레인>을 보시길 강추한다. 성찰이란 자기가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인식하는 과정이다. 다큐 프로그램처럼 우리가 90% 이상을 무의식 속에서 살고 있다면 내가 살고 있고 보고 있으며 알고 있다고 인식하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과연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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