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득재 ]

예전에 한 케이블 방송사 프로그램에 부모님의 용돈으로 온 몸에 명품을 걸치며 살았다는 4억 명품녀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명품녀 당사자는 가짜로 밝혀졌고 명품녀와 방송사 사이에 분쟁이 오고가더니 명품녀와 명품을 만들어 준 회사 사이에도 법적인 분쟁이 생겨났다. 쇼핑의 여왕 페리스 힐튼에게도 비교되는 이 명품녀의 한 바탕 소동은 우리 사회에 ‘명품’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이러한 소동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방송 시청율과 광고 수주에 혈안이 되어 무분별하게 유행어를 양산해 내는 방송언론의 책임도 크고 유독 여자라는 이름을 희생시켜 이루진다는 것도 큰 문제다. 오크녀, 된장녀, 알파녀 등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 할 것이다. 그 중에서 2005년 <주간 경향>에 실린 기사를 계기로 하여 나타난 된장녀는 사실 명품녀의 전사에 해당된다. 비싼 수입 명품을 즐기는 여성들 중에서 소비 생활을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여자들을 비하하기 위해 등장한 말이 된장녀이기 때문에 이번에 소란을 피운 명품녀 또한 소비 생활을 무려 4억 원이나 되는 부모 용돈으로 꾸렸다는 점에서 2005년 된장녀와 2010년 명품녀(지금은 무슨 여자인지 모르겠다)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여자만 명품녀일까. 우리 주변에는 온통 명품으로 가득차 있다. 사극도 명품 사극이고 심지어는 보험도 명품 보험이다. 개나 소나 다 명품 타령이다. 심지어는 명품 복근도 있으니 혀를 찰 일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요즘 텔레비젼에는 아파트 광고가 나오지 않는다. 명품 아파트라는 말을 질리도록 들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요즘 텔레비전에는 온통 대출 광고다. 부동산 시장이 죽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기억하기로 명품이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은 자살한 모 탤런트가 아파트 광고에 출연하면서 부터다. 어느 건설사의 아파트인지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지만 명품이라는 단어는 한국 사회에 부동산 투기 열풍이 분 것과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지난 노 무현 정부는 한국의 금융산업을 아시아 최고의 금융 허브로 만드는 허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한국의 은행 자산을 불렸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분기마다 거의 1조원에 가까운 이익을 낸 국내 은행들이 자산 부풀리기 경쟁에 뛰어 들었다. 2002-2003년에 지어진 아파트들이 2004-2005년에 대규모로 분양되기 시작하면서 이 시기에 부동산 투기 광풍이 몰아닥쳤다. 지금은 아파트 이름이 ‘힐스테이드HILLSTATE’이듯이 그 정점에 서 있다. 예의 된장녀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한 것은 이 때쯤이었다. 이렇게 노 무현 정부와 은행은 이른바 프로젝트 파이낸싱으로 사람들을 개발의 욕망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개발, 프리미엄, 시세차익에 눈 먼 사람들은 주택을 담보로 하여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시세차익이 많이 나는 명품 아파트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는 사이에 목동에서는 10억짜리 명품 아파트와 그 이하의 짝퉁 아파트라는 말이 나타났다.
명품 아파트라는 말에서 출발한 ‘명품’이란 단어는 그 후 언어 사이를 순환하며 된장녀, 명품녀로 거듭났고 이제는 근육에까지 들러붙어 살아가고 있다. 보드리야르는 유명한 저서 『소비의 사회』에서 노동 과정이 문화 전체를 지배하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명품이 됐든 짝퉁이 됐든 소비 문제가 현대의 특수성이라고 보는 보드리야르의 입장은 왜 한국 사회에서 ‘명품’이 문제가 되고 명품녀가 등장해 논란거리를 제공하는지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명품이라는 상품이 왜 페티시가 되어 인간의 마음 속에 빙의를 일으키는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한 사회를 명품과 짝퉁으로 양분하는 신자유주의 논리가 전 지구적으로 관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절주의자인 알랭 리피예츠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란 어느 한 사회가 모래시계 사회hourglass society로 변하는 것을 가리킨다. 모래가 아래로 흘러내리면서 사회는 중간부분이 개미허리처럼 홀쭉해지고 아래 부분이 두터워지는 극심한 양극화사회가 바로 모래시계 사회다. 중국이든 미국이든 한국이든 이제는 1%가 한 사회의 부와 권력을 싹쓸이하는 99 : 1의 사회로 변했다. 명품과 짝퉁은 한국 사회가 - 그리고 전 지구가 - 바로 이러한 모래시계 사회임을 입증하는 단어일 뿐이다. 타워 팰리스가 명품 아파트라면 강북의 어느 주택은 명품은 커녕 짝퉁 축에도 들지 못한다.
보드리야르는 노동 과정이 문화 전체를 지배한다는 논리만 전개할 뿐, 오늘날 그 노동 과정이 슬림화되는 것을 지적하지 않는다. 기술 발전으로 핸드폰이 슬림화를 거듭하는 동안 노동 과정 또한 슬림화를 거듭하며 저임금으로 치달아 왔다.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사람들이 모래시계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명품 아파트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복지라고는 눈꼽 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그 시세 차익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를 충당해야 했고 명품 부자들은 그 돈으로 또 다른 투기를 감행하고 자식들을 신인류, 신 계급으로 성장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명품에 열광하고 아무 말에나 명품이라는 말을 빙의시키는 것은 나의 존재가 짝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공포감, 모래시계의 밑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 탓이다. 최근 외교부 장관 사태에서 나타났듯이 신분이 철저하게 세습되고 어느 누구 가릴 것 없이 성골 내지는 진골이 되기 위해 광기를 부리는 사회에서 명품은 마치 하류로의 전락을 방지하는 부적과 같은 존재다. 그러나 그 부적의 힘으로는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시달리는 시대를 바꾸지도 신자유주의의 부산물인 명품녀도 구하지 못한다.
목에 걸어 사용하는 물건에 명품이라는 단어가 영가로 들어오고 주거공간인 아파트에 명품이라는 단어가 영가로 들어 와 고액의 교환가치를 지닌 상품으로 둔갑하는 시대의 모순은 퇴마사의 능력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존 롤스 식의 공정사회라는 구색이라도 최소한 갖추어야 명품이라는 영가에 몸과 마음을 훼손당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