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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지층과 웃지층: 겉지층과 곁지층- “윤구병 철학: 함께 이야기하기”
  • 류종렬
  • 등록 2026-11-03 22:25:06


밑지층과 웃지층: 겉지층과 곁지층

- “윤구병 철학: 함께 이야기하기”, 2026 10 31, 정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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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구병의 철학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동의 장이 열렸다. 우리 철학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넘어서, 어쩌면 우리 시대에 우리 방법으로 철학하기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다. 제시하는 만큼이나 내용과 방법이 다양하게 분출되는 분위기였다. 형님은 글에서도 선승과 같은 말씀이 종종 있었다. 발표자들과 형님의 질의응답은 마치 선문답 같았다. 그러면서 선문답의 주제라 할 ‘이뭣꼬?’라는 물음에 대해 다루는 방법 또는 찾아가는 공통적 방향이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 되었다. 방향 설정은 형님의 저술 순서이기도 하고 사유의 전개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즉 존재론, 형이상학, 우주론으로 펼쳐졌다고 할 수 있다.

    방법으로는 우선 “있음”으로부터 다루는 데 우리 입말을 통해서 할 수 있다고 하고, 이런 입말로부터라는 점에 대해 대부분의 동의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있음을 통한 세상의 질서 또는 배치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방법은 논리학보다 앞서는 논리(또는 이법)가 먼저 있다고 하고, 그 논리의 전개를 형님은 저술에서 입말을 통해 36가지로 전개할 수 있다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의 항목과 삼단논법이나 칸트의 범주와 판단과 달리할 수 있는 우리 입말의 논리 가능성을 열었다고 본다. 이런 흥미있고 생성적인 우리 언어에서 논리의 전개 방식을 공간에서 그리고 시간에서, 그리고 공간과 시간을 겹쳐서, 미래와 의지(욕망)의 발현에 이르기까지 전개하였다. 서양에서 지성(이성)의 논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체계를 전개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입말에서 온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인식능력으로서 지성(이성)의 규준을 수용하여 우리의 문자화도 가능하다고 보는 방식인 것 같다. 이런 방법은 플라톤(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나 불교 선문답의 분수화(유식철학처럼)에서 대립과 반대, 대응과 평행, 대칭과 변환을 아마도 형님이 자유롭게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형님은, 존재론은 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 형이상학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유일 신학론, 우주론은 데카르트에서 분석학과 산술학의 결합 방식의 발전을 따라가면서 뉴턴의 중력장, 오일러의 상수, 아인슈타인에서 상대성 공식, 슈뢰딩거의 양자장론으로 발전하는 우주의 장(영역)을 다루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 또는 원인으로부터 (연역적?) 추리를 하는 지성의 방법으로 우리의 새로운 공동체로 나갈 방향 또는 방식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논의에서 형님의 저술에서 보여준 미래에 대한 즐거운 놀이로서 삶의 영토에서 당파성이 나올까?

    ‘함께 이야기하기’의 대화공간에서, 논평자들 중 일곱은 인식론을 바탕으로 두고 존재론-형이상학-우주론으로 가능 방향으로 이해하고 대화의 글을 쓴 것으로 보인다. 물론 흥미있게도 김성환은 과학 인식론적 관점에서 영화 예술론으로 연결성을 물었는데, 이는 이미 인식론의 진리론이 도덕론, 예술론(미학), 음덕론(종교론)과는 층위가 다르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상식적으로 도덕론, 종교론, 예술론도 그 분야의 지식을 많이(질적으로?)이 갖출 때 더 잘 이해하고 이용한다고 한다. 분화의 논의 앞서서 나로서는 사유의 기원 또는 근원이 무엇인지를 존재론보다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류의 삶에서 ‘있다와 없다’보다 ‘이다와 아니다’가 먼저라고 하는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인류가 정체성을 다루면서, 주체성으로 다룬 것과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말은 인간이 무엇인가(정체성)는 자연과 연관이고, 인간이 누구인가(주체성)는 어쩌면 그리스 시대의 논리를 갖추기 시작한 지성(로고스)로부터 인간과 대상의 구별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다”가 대상의 일반화에 가까운데, 그리스 시대에 “이다”는 항목 또는 개념으로 파악하면서 지적 체계를 세울 수 있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 인간의 실천에서 그 개인 또는 인류의 정체성을 보아야(느껴야) 한다는 쪽이 있었다. 플라톤에서 아리스토렐레스에서 전자의 길을 갔다면, 소크라테스에서 퀴니코스-스토아의 길은 후자의 길이라고들 한다.

    한글학회 주시경의 제자였던 최현배는 우리 언어에서 ‘이다-아니다’를 지시사로, ‘있다 없다’른 존재사로 구별하자고 했었다. 미군정이 서양 8품사론 체계론에 몰아넣어서, 서양 근대언어의 계사와 현존을 함께 쓰는 etre, be, sein가 있고, 이보다 앞선 시대의 용어인 esse와 einai로 이어지는 길에서 주어와 술어의 분화(이중화, 분열)에 근거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혼동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다음 또는 아제에서 ‘할 것이다, 하리다’라는 의미에서도, 이 입말에는 미래, 조건, 의욕, 예측, 상상 등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발설에 대해 선승은 ‘할’[일갈]했다고 하는데, 그 발설자의 방향의 오류에 대해 지적인지, 방향의 일방성(일관성)에 대해 조심하라인지, 예측과 의욕의 앞세우는 데 대한 경계인지 등 여러 가지 의미들이 있음을 알려준다. 내가 보기에 선승의 일갈을 학문적으로 진위를 구별할 수 없지만, 삶에서 인습에 젖거나, 이익에만 고집하거나, 또는 누구의 편만을 들거나 하는 것을 교정 또는 조율하는 방편으로 쓰고 있는 것 같다.

 

윤구병철학, 함께 이야기 하기(2026, 10, 31)

1부에서 김혜경. 강성훈, 유형수, 이정우 순서였고

2부에서 긴성환, 최종적, 류종렬, 이병창 순이었다.

 그리고 이정호의 논평은 발표하지 않았으나, 전 과정에서 사회를 보면서 충분히 그의 견해를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님의 ‘할’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거나, 해석과 설명을 보탰다. “함께 이야기”의 중요 흐름은 우리말로 철학하기 였고 그 가능성을 넘어서 현실성이 있다고 참석자들은 느낀 듯하다. 왜냐하면 이렇게 일관성있게 네권의 저술을 발전적 또는 확장적으로 쓴 예가 없었기 때문이다. 『있음과 없음(2003)』,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2013)』, 『꿈꾸는 형이상학(2020)』, 『우주의 역사(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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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로서는 흥미로운 점이 있었다. 최종덕의 양자장을 설명하면서 오일러 상수와 양자장의 연관을 잘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다. 여러 유투브에 나오는 해설들을 보았는데, 그의 설명이 갑자기 와 닿았다. 그는 오일러 등식 eiπ+1=0과 양자장함수의 상수(상항)ψ를 설명하였다. 오일러의 등식에서 수(數)가 양자장의 상태(위상)를 설명해주는 부분으로서 역할을 한다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념론은 관념들 중에 사물과 대응이 된다고 여겨 신실재론으로 여긴 것도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이었다.

  이런 논의는 18세기에 오일러의 로그(log2)의 산술화로부터 많은 오일러 등식의 여러 종류들이 성립함을 알렸다. - 이것을 알면 신의 현존을 믿을 밖에 없다고 한 오일러는 디드로가 이것을 모르기에 무신론자라고 비꼬았다. - 그리고 다음 세기에 1830년대 열역학, 파동론, 전자기학 등에서 사물들의 상태를 표시하는 상수(상항)의 영역 안에서 에너지, 자기력, 전자력 등을 표시하는 방식은 방정식이라기보다 함수로 표시하면서, 대수학이 산술학의 연산규칙을 넘어서는 연산, 당시는 연결(connexion)이란 용어를 쓰는데, 행렬의 방식이 나오면, 함수 방정식의 요소들은 수와는 다른 단위들이 있다고들 한다.

  흥미로운 점은 수를 기반으로 하는 논리(추리)가 함수에서 다른 차원(승수)과는 다른 영역(장)을 다룸에도 논리하고 한다. 그래서 논리학(la logique)과 구별하여 논리계산(la logistique, 기호논리학)이라 한다. 이에 논리라는 방식의 기반이 무엇인가에 대해 반성으로 정의과 공리에 대해 새로이 검증하면서, 논리학이 추리의 기원으로서 선전제를 증거(증명)없이 이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보가드로 수, 볼츠만 상항, 플랑크 상항 등을 제시하는 대수함수론이 사물들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해줄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상항은 산술학의 상수와 다르다. 그럼에도 오일러 등식의 역할이 대수함수에도 적용(응용)되면서, 수학자들은 수학의 확장으로 물리적 상항에게 정의 내릴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런 상항은 증명하는 수학적 상수와 달리, 증거를 제시하면서, 이런 상항이 이루어지는 모습 또는 변형과정에서 조화로운 상항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순수 수학의 논리에서는 이런 조화로운 상항들이 개연성 또는 일정한 조건과 영역 안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아, 수학적 적용(응용)이지, 산술학의 논리성과 달리 대수학의 논리성이라 하며, 이 두 논리의 차이가 산술적 4칙연상에 보태어 변환(치환) 연산을 덧보탰다고 한다. 즉 산술적 상수의 확대 적용에는 위상, 속도, 시간 등의 새로운 요소를 포함하여 물질의 실재성의 일부를 다룬다고 한다. 나로서 수적 상수와 물리적 상항 사이에 근친성이 있다고 본다. (수학적 기호로 = 라기보다 ≃일 것이다)

    이런 수적 체계의 정합성이 물리적 세계의 일관성(항상성)에 적용이 가능하고, 또 수학적 의미에서 상수와 같은 상항을 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생물의 내분비의 상항을, 마치 동물들의 상온을 설명할 수 있듯,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듯이, 생물로서 인간의 활동과 사유방식도 상항을 형성할 수 있다고 유추하는 쪽으로 가는 경향이 있었다. 나누기보다 복잡한 분수들과 곱하기보다 훨씬 넓은 영역을 다차 승수로 다루는 방식은 산술학의 범위와 기하학의 범위로 한계(limite) 지울 수도, 그리고 정의할(definit)수 있는 영역과는 다른 영역이 인간의 유기화에서도 사회의 조직화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수학의 우월성을 믿는 쪽은 인간이란 생명체를 다룸에서 물질의 상항을 다루듯이 다룰 수 있다고 여기는 쪽이 과학주의로서 논리실증주의로 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식 상태를 뇌의 분비물의 이동을 상항(상수)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 좌초하듯이, 사회 공동체의 정립에서도 수적이든 함수로든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부분이 더 많다. 많은 수학자들은 생산과 소비의 경제적 관계를 함수로 또한 인간의 욕망과 새로운 창안도 수학적 함수처럼 변형상항(대수상항의 확장)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다른 쪽의 수학자들은 그렇게 상항을 조성하는 것이 수와 물리의 구성과 구축과 다르다고 보았다. 이로서 생물학과 다른 방식으로 조직화에서 사회학이 등장할 것이다.

  사회의 조직화가 왕정이든 국가든 조직화에서 국가예산과 집행을 수식화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 행정조직의 집행의 연관들을 여전히 수학과 물리학을 모방 수식처럼 다루었지만, 공동체의 평등과 안녕에 대해 답해주기보다 조직화에서 배치와 배열에 맞게 살아가라는 암묵적 통치가 지배하였다. 이런 조직화에서 인간이 자기의 완성(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에 의문을 품으면서, 공동체가 그림 이론처럼 사실들의 배치와 배열이라기보다, 삶의 터전에서 조성과 공감이 그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보았다. 게다가 공동체의 조직화에서 개인의 성향과 의도가 이런 제도로서 조직화와 다르고, 그 인격들은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의욕과 욕망의 실현의 방법을 달리 창안하고 나아가 혁명을 추동하고 있다는 점을 무의식으로 밀어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적 정합성이, 물리적 법칙성과 동등하지 않지만, 적용가능의 국면에서 둘 사이에 어쩌면, 한 평면에서 겉지층과 곁지층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 사회조직화와 심리공감대는 이 두 층위와는 다른 층위일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지성을 지닌 논리적 진리를 우선으로 하는 이들은 수학과 물리학의 정립처럼 사회와 심리도 정립되리라고 보았다. 지금도 전자의 학문들이 철학에서 중심처럼 여기는 쪽이다. 이에 비해 사회와 심리(심성)의 영역은 전혀 다르다. 어쩌면 플라톤의 『폴리테이아』편의 선분의 4가지 분할 비유에서, 도형에서 이데아는 물리학과 수학의 관계에 닮았고, 그림자에서 사물이라는 관계 심성과 터전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플라톤 이후의 플라톤주의자들은 앞의 두 분할이 수와 원자로서 설명하려고 했다면, 후자의 두 분할을 원주 위의 점과 현의 점 위의 소리와 같다고 여겼다. 중세 내내 4학을 다루면서 산술학과 기하학, 그리고 천문학과 음악을 다룬 이유이기도 하다. 중세는 이런 구별들 당연히 퓌타고라스와 에우클리데스의 정의과 공리를 잘 이용하여 적용하면 천문학도 음악도 다룰 수 있다고 여겼다. 근세에는 이런 적용과 방법을 대수를 받아들인 데카르트가 분석기하학을 방법으로 제시했다. 스피노자를 거쳐서 칸트와 헤겔에 이르기까지 이런 방향의 인식이, 지성이든 절대지이든 인간사회에도 그리고 의식에도 지배하고 있다고 믿었다.

    플라톤의 4분할 선분의 비유도 설명하는 방식이 여럿이다. 좀 전처럼 상위 둘과 하위 둘을 달리 보는 경우, 하위에서 상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귀납법과 유사)에 경우, 상위에서 하위로 내려가는 경우(연역법과 유사)가 있는가 하면, 근대 대수함수론의 이후로 학문의 성립에서는 각 선분들(이데아, 도형, 물체, 그림자)의 각 학문들이 성립 또는 형성하는 방식으로 보아 여러 학문들의 형성방식들을 설명하기도 한다. 각각의 선분을 바탕 또는 자료로서 사용하기도 한다. 인식론 즉 지식론이라는 면에서, 예를 들어 선분의 아래에 있는 그림자에 해당하는 쪽이 새로운 지식론으로서 영혼론과 심리학인 셈이다.

    이와 달리, 『티마이오스』편에서, 데미우르고스의 우주발생론(또는 우주론)을 생각하면서, 지성의 창조론에는 신적 창조와는 다른 의미를 끄집어내기도 한다. 불변의 이데아(페라스)를 통해 움직이는 물질(아페이론)을 조작하여 만드는 방법도 제시될 수 있다. 여기서도 학문들 각각의 발달을 설명할 수도 있다. 그 중에서 아페이론에서 출발하는 경우는 어쩌면 벩송의 관점에서, 박홍규선생님의 관심사 중의 하나였을 것이고 내가 들었던 ‘영혼’에 관한 설명은 이런 단면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아페이론(자연)의 자발성을 설명하는 예는 생물 진화론에서부터일 것이다. 아마도 선생님은 자연이 자발성을 갖는 쪽에서 우주발생론으로 읽었을 것 같다.

    우주 발생론으로 읽으면 덩어리가 먼저이고 그리고 단위가 설정되는 쪽이 생명체들들이 나오고, 그 생명체들은 자연의 총생산에 맞추어 조화롭게 인간도 만들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뷔퐁에서 라마르크로 이어지는 생명체의 노력에 있다고 한다. 물질과학에서도 중력개념 이전에 갈릴레이가 물체 속에 힘을 ‘충력’이 있다고고 생각했듯이, 벩송은 생명체의 증가는 노력을 ‘에는’이라 보았다. 이런 견해를 벩송은 진화의 과정을 독특하게 요약했다.

    의식의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의식과 생명(La conscience et la vie, 1911)」(ES, 1장)에 나오는데 1911년 강연에서이다. 벩송은 이 강연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과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그리고 사회의 조직화를 설명하기 이전에,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1932)』에서도 다시 이 변환 과정을 먼저 설명했다. 그런데 들뢰즈의 『천개의 고원(1980)』, 「3장, 기원전 1만년: 도덕의 지질학(지구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은 벩송의 “사실들의 선들(les lignes de faits)”에서 “사실들” 대신에 “지층들”로 바꾸고, 생명 진화로서 생명의 변환과 변형과정을 변조(la modulation)의 과정처럼 서술했다. 그 두 흐름의 방향과 내용은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사물을 다루는 방법으로 구성과 구축의 관계 방식을 통한 시뮬라크르를 이용하였고, 그 다음으로 내재의식을 다루는 방식으로서 조성과 조율의 연관방식(수학에서 고차 함수의 변환들처럼)을 통한 변조(la modulation)를 이용한 것 같다.

    『티마이오스』편을 갈릴레이가 종교재판 받고 난 뒤, 말년 10여년을 『티마이오스』편을 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선생님도 『티마이오스』편을 당신의 독백으로 열 번을 넘게 읽었다고 하셨고, 유독히 이 책 만은 거의 낱장이 될 정도이며, 각 쪽에는 잘 읽을 수 없는 주들이 꽉 차있다. 그럼에도 해석은 분분하다. 이데아로부터 아페이론을 설명하는 방식과 아페이론에서 이데아로 설명하는 방식에서 전자를 플라톤주의, 후자를 플라톤 고유성이라고 설명하는 후대의 수학자들은, 전자에서 비례중항을 찾는 노력을 했다고 하고, 전자에서 조화중항을 탐색했다고 한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사회학의 발달 시기에도 나오는데 전자에서는 교환에서 후자에서는 분배에서 찾는다(수학사에서는 수의 성립에서 다루는데 그리스 사유 이전에 수메르와 이집트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프랑스에서 경제학의 발전시기에 총생산량의 분배를 중시하여 중농주의를, 영국에서 상품의 거래에서 중상주의를 중심으로 다루었다고 한다. 사회변혁기에 정치경제학은 중상주의하에서, 상부와 하부의 불평등의 심화에서 형님이 주장하듯이 당파성을 지녀야 한다고 하듯이, 아페이론으로부터 페라스가 조율되는 것이지 페라스에서 아페이론을 규정하는 쪽이 아닐 것 같다. - 선생님 수업중에 진위결정 우위로서 학문을 하는 쪽은, 맞는 쪽이 맞지 아니하는 쪽을 정복함으로써, 이익을 챙기기에 전쟁을 할 위험이 크다고 하셨다. 나로서는 교환을 중심으로 비례중항을 하는 쪽이 제국주의 이래로 전쟁을 걸 위험이 있다고 말하고 싶고, 조화중항을 추구하는 쪽은 전 지구가 함께 살아가자는 고민을 한다고 생각한다. - 유엔의 세계인권 선언은 사회주의자들의 협의의 산물이라고 한다.

    변역(變易)을 말하는 쪽은 상층에서 심층으로 질서와 명령을 통하여 배치와 배열을 하면서, 심층에서 저항을 무화 또는 배제자로 만든다. 그런데 심층에서 발현으로, 사회라는 표면에 다양한 방식들(학문들도 마찬가지)과 수리과 물리로서는 적용이 잘 아니 되는 도덕론, 예술론, 음덕론(은총론)을 중요시하는 쪽은 상층의 저항(기존지배)을 뚫고 나오는 쪽을 반역처럼 생각하지만, 우주발생론으로 보아 심층의 발현이, 인민의 저항이 정역인 셈이다.

    이날 발표자들과 형님의 일갈들은 우리말로 사유하기를 바라는 도반들과 선승의 대화처럼 느꼈다. 한철연에서 느낀 것인데, 그럼에도 나로서 규성형도 민중을 기반으로 분출하는 새로운 사회를 바랐듯이 형님도 심층 또는 생명이 먼저라고 하면서 인민의 발현을 정역으로 보는 것 같다. 더하여 나에게는 벩송이 정체성의 실현을 위한 ‘다음측정’의 방향이 될 두 철학자(형과 형님)는 수학과 물리학의 통일성까지는 아니라도 그 두 학문을 기반으로 설명하려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낀다. 나로서 그날 발표장에서 나의 발표문을 읽지는 못했지만, 형이상학이든 철학이든, 지성의 도식 또는 체계보다, 자연에서 힘, 충력, 에너지, 엘랑의 발현이 심층에서 솟아나는 것이 먼저라고 보고 싶었다. 다른 한편 서양의 문법구조가 아닌 우리 입말로서 ‘이다-아니다’, ‘있다-없다’를 넘어서 ‘있으라, 있으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이에 대해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언어가 항목의 연산인 시뮬라시옹이라기 보다, 기호의 연결로서 시뮬레이션이라고 보고, 전자의 파라독사 생산과 달리 의미(기호, 마치 물리적 상항처럼)의 생산 방식에 빗대어 입말의 전개를 다음에 쓰고 싶다.

    이날 최종덕이 일상적이 아닌 젊은이의 용어를 들어 내면서 분위기를 바꾼 것은, 들뢰즈가 루이스 케롤의 글을 인용하면서, 꼬마 엘리스를 말투를 인용한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아제는 학습하는 과정에서 벗, 동료와 동지를 사랑하는 길 위에서 8천만의 입말과 더불어, 합의(convention)와 평결(sententiaire)을 통해, 다음 공화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리라. (5:18, 59VKA) (6:02, 59VK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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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충고 그리고 조언을 주실 분은
https://cafe.daum.net/masilga/MIk2/87
여기에서 덧글이든 댓글을 쓸 수 있습니다.

**참조*
형이상학의 위상 (하나에서);
https://cafe.daum.net/milletune/S5wU/5
형이상학에 대한 단상들;
https://cafe.daum.net/milletune/S5wU/6
형이상학, 우주생성론 대 우주론; 
https://cafe.daum.net/milletune/S5wU/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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