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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철의 속담철학 :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09-21 20:10:49
  • 수정 2026-09-22 08:51:25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이 있다. 이 오래된 경구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말을 유창하게 잘하라는 뜻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적절한 언어가 지닌 위력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일 것이다.

아내가 쉬는 날, 함께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양평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이 구간은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여러 번 지나야 하는데, 진입로가 좁고 차량이 몰려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행여나 접촉 사고라도 날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톨게이트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아내가 불쑥 찐 밤 하나를 내 입가로 들이밀었다.

평생 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며 살아온 아내이기에 곁에 있는 사람을 챙기는 것이 몸에 밴 다정한 호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운전대를 잡고 잔뜩 긴장해 있던 나는 순간적으로 짜증이 솟구치고 말았다. "아니, 지금 상황도 살피지 않고 그렇게 들이밀면 어떡해?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말이 다소 날카롭게 나갔다 싶었는데, 아내는 곧바로 연신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그 즉각적인 사과에 내 마음의 날도 금세 무뎌졌다. 하지만 아내 역시 머쓱하고 섭섭했던 모양인지 뒤끝 있는 혼잣말을 흘렸다. "힘들게 밤까지 쪄다 바치는데 욕만 먹네." 그 억울해하는 투가 밉지 않아 나는 픽 웃으며 대꾸했다. "그걸 보고 바로 '떡 주고 뺨 맞는 격'이라고 하는 거지." 그 한마디에 차 안을 맴돌던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웃음이 번졌다. 아내의 빠른 사과와 나의 실없는 농담 한마디가 자칫 하루의 기분을 망칠 뻔했던 부부 사이의 '천 냥 빚'을 갚아준 셈이다. 사실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 아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억울할 만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이처럼 일상에서의 말 한마디가 감정의 빚을 갚는다면, 역사의 흐름을 바꾼 말 한마디도 있다. 고려 시대 외교관 서희의 이야기가 그렇다. 993년, 거란의 장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을 때, 서희는 단기필마로 적진에 들어가 담판을 벌였다.

그는 단순히 언변만 화려했던 것이 아니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역사적 명분을 쥐고, 송나라와 교류를 끊고 싶어 하는 거란의 숨은 불안과 속내를 정확히 읽어냈다. 상황의 맥락을 꿰뚫은 그의 말은 칼보다 예리하고 방패보다 견고했다. 그 결과 고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과 국교를 트는 동시에 강동 6주라는 막대한 영토까지 얻어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은 것을 넘어,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 영토를 확장한 기적을 이뤄낸 것이다.

인간의 삶과 관계에서 언어는 이토록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상대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내기도 하고, 반대로 따뜻하고 정제된 말 한마디가 상대를 위로하고 얼어붙은 관계를 회복시키기도 한다. 결국 훌륭한 언어란 단어의 화려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이는 '때'와 '상황'을 살피는 사유의 깊이에 있다.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관계의 톨게이트를 통과하며 살아간다. 그 좁고 아슬아슬한 길목에서, 나의 말은 상대를 향해 어떤 온도로, 어떤 맥락으로 건너가고 있는지 신중하게 되짚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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