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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_칸첸중가_021_전신전화국/카닥
  • 김홍성
  • 등록 2026-10-07 15:12:42



전신전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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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길게 누워 있고 한 사람은 바닥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사람은 여자,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턱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은 누워 있는 남자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다. 보트는 흐르지 않는 듯 흘렀다. 
 

여자는 느린 노래를 힘없이 부르고 있었다. 슬픔이 극에 달한 사람이, 슬픔에 눌려 죽어가는 사람이 낼 수 있는 음성이었다. 어쩌면 오래 이어진 가녀린 흐느낌이 노래로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꿈에서 깨면서 방금 꾼 꿈을 세세히 기록해 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볼펜을 들자마자 꿈은 달아나고 있었다. 꿈에 본 여자의 얼굴이, 낯익은 얼굴이 사라지면서 낯선 얼굴로 변하고 있었다. 무표정해지고 있었다. 안타까웠다. 그 얼굴은 잠든 내 머리맡에 앉아 있다가 내가 잠에서 깨자마자 빠르게 변모하면서 연기가 되어 창틈으로 빠져나가는 듯했다. 

왜 그랬을까? 문득 모친에게 전화해 볼 생각이 났다. 콜카타에서는 모친에게 전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전화국에 가지 않고, 아니, 전화국에 가다 말고 위스키를 사러 갔었다. 주류 전문 판매 상점에 가고 오는 그 사이 글마와 일마의 다툼이 있었다. 글마와 일마는 내 속에 둥지를 튼 거주민이자 대변인이다. 일마와 글마, 둘의 말다툼이 길어지면 절마가 나타난다. 일마와 글마, 그리고 절마. 셋은 나도 아니고 나 아닌 것도 아닌 귀신이랄까 뭐 그런 존재들이다. 다음은 그 날 셋의 대화이다. 
 

일마 : 술 사러 가는 건 좋은 생각이야. 모친에게 전화한들 무슨 말을 하겠니. 곧 돌아가니 안심하라고 할 거야? 아니지?

글마 : 그냥 모친이 ‘여보세요’ 하는 음성이라도 한 번 들어 보고 싶어서 그러지.

절마 : 아버지가 받아서 ‘여보시오’하면 어쩔건대? ‘어머니 좀 바꿔 주세요’ 할 수 있겠어? 안 그래?”

글마 : 그 생각은 못 했군. 젠장. 

일마 : 거봐. 내 말이 그 말이야. 자, 오늘은 큰 걸로 두 병! 

다르질링의 전신전화국(電信電話局)은 티브이 타워에서 시장으로 가는 비탈길 오른쪽 계단 위에 있었다. 주정부 건물이라 워낙 우중충하기도 했지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폭도들의 난입을 저지하기 위해 내부를 쇠창살로 차단해 놓아서 살벌한 느낌마저 들었다.

업무 개시 시간인 10시가 되었는데도 공무원들은 서류 수납 창구를 두툼한 장부로 막아놓고서 엉성한 전기난로 곁에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가운 나무 의자에 앉아 추위에 떨면서 쇠창살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자니 통행금지 위반죄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던 때가 생각났다. 

화 나는 걸 꾹 참고 버틴 끝에 일착으로 접수 장부에 등록을 마칠 수 있었지만, 기다린 지 1시간이 넘도록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다. 내 뒤에 줄을 섰던 사람 중에는 벌써 전화를 마치고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았다. 창구 직원에게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느냐고 항의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짧았다. ‘wait!’이었다. 

일마 : 야, 너 성질 다 죽었다. 
절마 : 그래도 대답은 해 주었잖니.
일마 : please 한 단어만 더 붙였으면 또 몰라. 그냥 wait, 이건 얘를 아주 무시한 거야. 
절마 : 창구 직원 저 놈도 영어가 모국어는 아니잖니? 
글마 :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속이 편할 거다. 

세 명의 ‘마’는 입을 다물었다. 치솟던 화도 일단 주춤해졌다. 지루한 시간이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채 잠깐 졸다 깨보니 좁은 창구 앞은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열어놓은 현관으로 들어오는 짙은 운무가 사람들 사이를 흘러 다니고 있었다.

운무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양털 재킷을 적시며 역한 개 비린내를 풍겼다. 참기 어려운 비린내였다. 소변이 마려웠다. 하지만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전화가 연결될까 봐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

전화가 연결된 것은 소변보러 열 번 갔다 와도 될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나 허망하게도 ‘받지 않는 전화’라는 녹음이 우리말과 영어로 번갈아 흘러나왔다. 다시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이 짜증을 내면서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전신 전화국 밖으로 나섰을 때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계단을 딛고 한걸음 씩 내려설 때마다 땅속으로 쑥 꺼지는 듯했다. 잠시 선 채로 버티고 있을 때 운무 속에서 칸첸중가가 나타났다. 

청룡 백룡 같은 구름 띠를 거느린 웅장한 자태였다. 거대한 섬처럼, 유라시아 대륙의 한 모퉁이처럼 나타났다. 그러나 이내 환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다르질링 섬 전체가 다시 짙은 운무 속에 푹 잠긴 것이었다. 

카닥

넋 놓고 걷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눈앞에 페마가 서서 웃고 있었다. 페마는 묻지도 않았는데 ‘당신의 친구들이 가게에 있다’고 알려 주고 나서 골목 아래로 바삐 내려갔다. 그제야 나는 그 골목이 페마네 뚱바집이 있는 골목이라는 걸 알았다. 내 발길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페마네 가게로 향하고 있었다. 

마호가니 병을 깨트렸던 소년이 ‘안녕하세요’ 라며 페마처럼 환하게 웃었다. 불과 며칠 동안 들었던 우리말 인사를 억양까지 비슷하게 익혔다. 이미 와 있던 취생도 몽사도 번갈아 ‘안녕하세요’를 했다. 그 두 사람은 전에 여주인 페마에게 가르쳤듯이 소년에게도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의 발음과 억양을 가르치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소년의 이름은 파상 셰르파라고 했다.

몽사가 말했다. 추억 여행을 좀 더 하기로 했다고. 무슨 말인가 했더니 네팔 쪽에서 칸첸중가 베이스캠프로 접근하려던 계획을 일단 보류하고 시킴으로 간다고 했다. 트레킹은 그만두고 욕숨의 산기슭과 조레탕의 온천 등지에서 열흘쯤 푹 쉴 생각이라고 했다.

침낭을 찾으면 나도 바로 배낭을 꾸릴 예정이라고 했더니 자기들은 벌써 꾸려 두었으며, 페마가 돌아오면 바로 버스터미널로 간다면서 손으로 식당 구석을 가리켰다. 나란히 놓인 커다란 배낭 두 개와 배낭 위에 올려져 있는 카메라 가방과 보조 가방이 보였다. 
 

취생은 나에게 안색이 안 좋다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별일 없었다고 대답했다. 몽사는 마호가니 병을 기울여 내 뚱바 통에 뜨거운 물을 부어 주었다. 이별주였다. 산골 처녀에게 가증스러운 거짓말을 했던 사실을 들킬 염려와도 이별이었다. 그런데도 마음이 착잡했다. 나도 곧 씨킴으로 떠나야 할 처지였고, 또 만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몽사가 나더러 빨대로 통바를 휘젓고 있다고 알려 주었다. 얼른 손을 멈추고 씩 웃었다. 그때 페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페마의 손에는 길고 흰 스카프 같은 천이 들려 있었다. 페마는 바로 그 천을 가지러 집에 갔던 것을 몽사와 취생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몽사와 취생은 배낭을 짊어지고 서서 페마에게 합장했다. 졌다. 페마는 합장하고 서있는 두 사람의 목에 차례차례 그 천을 걸어 주었다. 그 천은 히말라야 불교도들이 카닥이라고 부르는 물건이었다. 

목에 카닥을 두른 두 사람과 골목 끝에서 악수했다. 시킴에서 또 만나자고 말했지만 그건 약속이 아니었다. 만나면 좋고, 못 만나도 그만인 여행자들 아닌가. 씩씩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자니 왠지 쓸쓸했다.

페마네로 돌아오니 독한 위스키가 마시고 싶었다. 작은 병에 든 위스키와 고기만두를 주문했다. 국물 한 사발이 먼저 나왔다. 만두에 쓸 고기를 발라내고 남은 뼈를 빠개서 푹 삶았다고 했던가? 만두가 나오기 전에 이미 병을 비워버렸으므로 파상에게 같은 것으로 한 병 더 달라고 했다. 파상은 페마를 쳐다보았다. 페마는 웃으면서 허락했다.

"어쩌면 저도 내일 씨킴의 갱톡으로 떠날지도 모릅니다."라고 페마에게 말했다. 페마는 자기네 조상도 씨킴 땅에서 림빅으로 왔다고 말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저도 림빅에서 태어났어요. 림빅에서 컸고, 림빅에서 시집왔어요.”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림빅? 그럼 셰르파 호텔을 아세요?" 

"알다마다요. 거기가 친정입니다." 

또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뒷목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놀랐다. 

"그럼 카지 라마와 디키 도마가 동생인가요? 실리콜라 산장의 펨 도마는 사촌 동생이구요?" 

"그래요. 아저씨도 우리 친정에 들려서 왔군요. 방금 떠난 두 사람도 제 친정에 들렀다 왔어요. 2년 전에도 그랬고요. 인연이란 참으로 묘합니다." 

"아......”

페마의 말 맨 끝, 그러니까 ‘인연이란 참으로 묘합니다’는 내가 해석하여 옮긴 것이다. 페마는 대화 끝에 짧은 염불을 했을 뿐이다. 페마의 염불은 실리콜라의 출렁다리 앞에서 작별한 펨 도마의 아버지가 향로를 흔들며 혼자 읊조리던 염불과 같은 염불이었다. 

나도 페마처럼 염불하듯이 말했다. 
 

“그랬군요....... 그랬군요....... 그랬던 것이 로군요……." 


페마는 나의 이 말도 일종의 염불로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페마의 염불이나 나의 염불이나 결국 같은 뜻이었다. 

“인연이란,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도다.......” 이런 뜻 아니었겠나? <계속>

 

*삽화 : 티베트 불교의 길상 무늬(吉祥紋)를 새긴 돌. 탑의 기단이나 사원의 석축에 박아 넣어 삿된 것들을 물리친다고 믿는다.  


#장편소설_칸첸중가_021_전신전화국/카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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