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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_칸첸중가_022_미셸 / 마누라
  • 김홍성
  • 등록 2026-10-08 16:55:29


다시 짙은 운무. 무작정 걸었다. 물러 터진 토마토가 굴러다니는, 질척질척하고 좁은 채소 시장 골목을 빠져나오니 비썩 마른 노동자들이 트럭에서 짐을 내리는 길모퉁이가 나왔다. 낯익은 장소였다. 트레킹 직전에 몇 번 들렸던 선술집이 그 모퉁이 맞은편에 보였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은 사내의 담뱃불이 빨갛게 피다가 졌다. 눈이 쓰리도록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도 담배를 피워야 하는 주정뱅이들, 오줌 지린내 같은 땀 냄새와 쥐가 썩는 그것 같은 겨드랑이 냄새, 그리고 주인 여자가 입은 양털 옷에서 나는 비린내도 역겹지만, 앉을 자리도 없었다.

돌아설까 하는데 옆자리가 비어 있다고 손짓하는 사내가 있었다. 몇 번 봤으며, 한 번은 합석하여 통성명한 기억이 나는 사내였다. 미셸이라는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지독한 운무다.”

악수를 청하자, 그는 왼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마누라가 의자를 던졌다. 그걸 막다가 다쳤다. 몹시 아프다. 뼈가 부러졌는지도 모르겠다.”

“술 마시면 안 좋을 텐데.”

“하지만 너무 아파. 진통제만으로는 효과가 없어.”

그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플라스틱 약병을 꺼내 보였다.

“이제 서너 알밖에 안 남았어.”

“진통제와 술을 같이 먹으면 심장에 무리를 준다.”

“걱정하지 마라. 난 칵테일 블러드다. 특별한 인간이지.”

“칵테일 블러드라니?”

“전에 말했잖아. 내 혈관에는 티베탄의 피와 유럽인의 피가 섞여 흐른다고.”

미셸은 술에 찌들어 망가지긴 했지만 잘난 사내였다. 자세히 보니 체형이나 얼굴 윤곽이 영화배우 록 허드슨을 닮았다. 그는 노란 액체가 찰랑이는 비닐 팩 모서리를 담뱃불로 지져 조그만 구멍을 뚫고는 유리로 된 맥주 컵에 짜 넣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 넣고 나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한국 친구 넌 뭘 마시겠냐?”

“그게 뭔지 모르지만, 너와 같은 걸로 하겠다.”

“좋은 생각이다. 헬로 매덤, 여기 이거 한 봉지 더 줘요.”
미셸은 우선 주문부터 하고 말을 이었다. 

“이건 소주야. 말이 소주지 공업용 에틸알코올에 가깝다. 40도짜리야. 락시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락시에는 농약을 타지만 이건 이 자체가 농약에 버금가는 독성이 있거든. 두어 팩만 마셔도 헬리콥터가 뜨는 거야. 너무 떠서 내일 아침엔 골치가 좀 아프겠지만.”

빈 컵에 비닐 팩 소주를 꾸겨 넣어서 들고 온 주모는 의심스럽다는 눈길로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묻는다.

“이 술값은 누가 내는 거지?”

미셸이 자기 코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낸다.”

“아냐, 내 술은 내가 낸다. 넌 네 거만 내.”

나는 일부러 단호하게 말했다.

미셸 같은 술꾼들을 많이 겪어보았다. 그들은 자기가 술값을 낼 것처럼 떠벌리며 기분을 내다가 결국은 무책임하게 취해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사내와는 엄격하게 선을 그어 놓고 마시는 것이 현명하다. 나 자신을 너무 풀어지지 않게 단속하는 효과도 있다.

나는 비닐 팩 끝을 이빨로 찢었다. 일부러 송곳니를 보여서 여차하면 잔인한 사내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하고 싶었다. 

“자, 마누라를 위해 건배하자.”

“그래 마누라를 위해서. 그리고 내 손을 위해서.”

술잔을 입에 대자 이마가 지끈할 정도로 역한 알코올 냄새가 났다. 나는 한 모금만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는데 미셸은 목울대를 몇 번 꿀꺽 이는가 싶더니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픈 손을 겨드랑이에 넣고 찡그렸다.

“많이 아파?”

“염려하지 말아라. 곧 괜찮아진다. 진통제를 한 알만 더 먹으면.”

미셸은 아픈 손을 겨드랑이에 낀 채 왼손만으로 약병 뚜껑을 열었다. 어느새 탁자에 놓인 빨간색 알약을 집어 먹고는 플라스틱 물통을 쳐들었다. 

 

마누라 

 

약을 삼키고 나서 그가 말했다.
“참, 네 이름이 뭐였지?”

“내 이름은 김이다.”

“김, 그래 기억난다. 김이었지. 미안하지만 나이와 직업은 기억나지 않는다.”

미셸은 새삼스럽게 나의 이모저모를 뜯어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뭐라고 말해 주어야 둘 다 즐거울 것인가를 궁리해 냈다.

“직업군인이었어. 1971년에는 베트남에 있었지.”

“1971년에 베트남이라……. 그럼 네가 몇 살이란 말이냐?”

“1950년생. 올해 마흔다섯 살. 안 믿어지겠지?”

“맙소사.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너한테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

“사람을 죽여 봤냐? 베트남에서?”

“내가 쏜 총을 맞고 죽은 사람은 없었을 거다. 나는 늘 하늘에다 대고 신의 궁둥이를 향해서 쐈으니까.”

“흐흐흐 잘했다. 멋지다. 우리는 잘 어울린다. 김! 이제는 이름을 안 잊을게.”

주워들은 얘기를 얼른 가져다 붙이는 내 재주에 미셸은 매우 만족했다. 미셸 또한 능란한 이야기꾼이었다.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네 나이 때 나는 콜카타에서 멋진 사업을 하고 있었다. 여자들이 줄줄 따랐지. 내 오토바이 꽁무니에는 날마다 다른 여자들이 매달려 다녔어. 그때는 오리지널 잉글랜드 위스키 싱글 몰트 아니면 안 마셨지.”

“전에는 교사라고 하지 않았나?”

“그 사업이 완전히 망했거든. 그래서 다시 교사 노릇을 시작한 거야.”

“어떤 학교냐?”

“기숙사 시설이 있는 학교. 9학년까지 있어. 내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야. 형이 교장이고 나는 교감인 셈이지.”

“교감? 교감이 이런 데서 싸구려 독주를 혼자 마시고 있다니 믿을 수 없다.”

“그렇겠지. 하지만 좀 더 들어봐. 학교는 지난 3년간 폐교됐었어. 그러다가 닷새 전에 다시 열었는데 어제까지 학생이 모두 몇 명 왔는지 알아? 겨우 두 명이 왔어. 10년 전 내가 콜카타에서 돌아왔을 때는 120명이나 있었는데 말이지……. 너에게 내 학교를 보여주고 싶어. 원한다면 지금 가도 좋아. 나는 학교에서 산다.”

“그 무서운 아내도 같이?”

“그래, 하지만 오늘 아침에 친정으로 갔어. 며칠 있어야 올 거다.”

“형은?”

“형은 형네 집에 있어. 형네 집이 아니라 돌아가신 아버지의 집이지. 방이 모두 스무 개나 되는 진짜 집이지. 그런데 내게는 방을 안 줘. 난 학교를 지키라는 거야.”

“학교에 술 있냐?”

“글쎄……. 아니, 없어. 어제 끝냈어.”

“어쨌든 일어나자. 네 학교에 가보자.”

미셸은 머무적거렸다. 아직 날이 훤하다고 했다. 교감 선생 신분이라 대낮에 술 취해서 거리에 나서는 것은 좀 곤란하다고 했다. 형에게 알려지면 따귀를 맞는다면서 어두워지면 나가자고 했다.

그는 고기만두와 비닐 팩 소주를 두 개 더 시켰다. 주인 여자는 더 이상 누가 돈을 낼 것인지 묻지 않았다. 나는 아까처럼 송곳니로 비닐 팩을 찢었다. 제법 마셨지만 취하지는 않았다. 취하는 게 아니라 각성 상태로 가는 듯했다.

“미셸, 하나 더 물어보자. 와이프가 너에게 의자를 던진 이유는 뭐냐?”

“나는 다만 밥 달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망할 년이 갑자기 의자를 집어 던졌다. 그러고 나서 뭐라고 소리 질렀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

“나는 네 하인이 아니다! 이렇게 악을 쓰고는, 부엌 물건들을 다 집어 던지고 넘어트리더니 식칼을 들었어.”

“그래서?”

“도망쳤지 뭐. 한 번 발작하면 우리 형도 못 말려.”

“......”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끈질기지 못하고, 타개보다는 도피하는 성격. 술과 자학으로 빠져드는 주정뱅이 남편을 둔 아내들은 결국 악만 남는 것인가. 

내 아내였던 여자는 ‘밥 먹고 똥만 싸냐’라고 소리 지르며 남편이 들어가 앉아 있는 화장실 문을 미친 듯이 걷어찼었다. ‘남자 돈 없는 놈은 여자 못생긴 것과 똑같다’라고도 했었다. <</span>계속>


#장편소설_칸첸중가_022_미셸 / 마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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