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나누어 먹는 몸 , 함께 생각하는 몸 , 그리고 하나되는 감정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당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젊은 아테네 청년들이 어떻게 하면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 할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아리스토텔레레스의 대답은 간결했는데, 각자의 자기 자신의 습관과 잘 결혼하라고 답을 내놓고 있다.
다소 의아스럽게 들릴 수 도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젊은이에 대한 충고의 요지는 좋은 여성을 자신의 외부에서 찾지 말고 자신의 몸에 좋은 습관이 길들여지도록 부단히 노력 한다면 그러한 자신의 몸의 좋은 습관들이 좋은 배후자를 만나도록 길을 열어 줄 것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는 것이 었다. 그리스어로 결혼과 습관은 어원적으로 동일한 데, 습관이 한번 우리의 몸에 굳어지게 되면 좀처럼 바뀌어지거나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결혼 또한 습관과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암시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언급이다.
어찌 보면 시시 콜콜하게 여겨 질 수 있는 좋은 결혼의 방법을 아테네 청년들이 당시 대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물었듯이 , 아테네의 고대 그리스 인들은 특히 스파르타나 기타 다른 지역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와는 달리 서로 물음을 던지고 물음에 답하는 자유스러운 몸들의 만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이런 즐거운 몸들의 만남은 아테네 시민으로서의 자유로운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자들과 노예들은 시민들이 어울리는 이러한 몸들의 만남에서 제외된 몸들이었다.
어떤 주제가 주어지면 하루 해를 다 보내서 다음날 동이 틀 때까지 아테네 시민들은 토의하고 또 토의했다. 토론의 귀결점은 토론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연령과 같은 몸의 자연적 차이나 빈 부의 차이와 같은 사회적인 몸의 차이에 제약됨이 없이 토론 참가자들이 오직 논리적인 몸과 몸들의 교류와 만남을 통하여 생성된 논리적인 정합성에 있었다.
플라톤의 <향연>과 크세노폰의 <향연>을 통해서 고대 그리스에서 어떻게 논리적 몸들의 만남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우리는 확인할 수가 있다.
그리스어로 <향연>이란 말은 함께syn 와 마심 posia 의 합성어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논리적인 몸들의 기쁜 만남 (향연) 을 크게 나누어서 술을 마시는 주연과 토론으로 구분하고 있다. 결혼식, 생일, 우승자에 대한 축하, 알고 지내는 사람들의 환송등을 위해 향연이 마련되기는 했고 술과 노래, 춤 , 게임 등이 동반되 었지만 술을 마시는 주연은 향연에서 토론을 위한 전제적 성격의 한부분을 이룰 뿐이다. 플라톤의 기록인< 향연>에서 보면 향연이 있던 그날도 일부 참석자들은 술에 취해,집에 돌아가거나, 쓸어져서 옆에서 자기도 했지만 , 주량이 대단 했던 소크라테스는 참석자 모두가 잠든 새벽 첫 닭이 울때까지 연설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 할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연설 마지막까지 아가톤, 아리스토파네스등이 그나마 남아서 연설을 들었지만 큰 술잔에 포도주를 담아서 풍습 데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려가며 마시던 이들은 차차 졸음을 견디다 못해 아리스토파네스에 이어 아가톤도 잠이들고 만다. 특히 술에 골아떨어졌던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와 주고받은 이야기의 내용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플라톤의 <향연>은 술에 곯아 떨어져 더 이상 포도주를 마시거나 논리적 토론을 주고 받을수 있는 사람들의 몸들이 향연장소에 있지 않게 되었을 그때에, 엄청난 술에도 끄떡없던 소크라테스가 향연이 열리었던 장소를 떠남으로서 끝을 맺게 된다. 플라톤의<향연>속에 나타난 두주불사인 소크라테스의 엄청난 음주량에 놀라기도 하지만 향연의 목적이 술을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기 전이나 술을 마시는 동안 그리고 술을 마신 후에도 동일한 논리적 몸을 간직했던 소크라테스에 우리는 더욱 놀라워 하게 된다. 술 취하지 않는 정신, 바로 그가 소크라테스였다.
논리적인 몸들의 열린 만남의 場이였던 고대 그리스의 향연은 로고스적인 요소인 상호 토론이 주된 구성요소였지만 ,향연을 시작 하기 전에 향연을 베푸는 주체자가 각각 안내한 자신들의 위치에서 풍요의 신이자 포도주의 신이 디오니소스 에게 포도주 원액을 따라서 땅에 몇 방울 떨어 뜨리는 형식의 헌주를 하고 이 디오니소스 신을 찬미하는 찬가를 부르고 간단한 통례대로의 의식을 거친후 술을 마셨다는 점에서 그리스에서 향연은 일종의 민족종교적인 제례의 성격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헌주와 신에 대한 찬미 그리고 일련의 예식은 일반적인 향연뿐만 아니라 올림푸스 신전에서의 제례 그리고 크고 작은 신들에 대한 축제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공동의 예식이었다.
자유로운 남성 시민들의 몸들의 모임인 향연은 고대 그리스 민속종교의 제례성을 지닌 <공동 식사>였다. 고대 그리스이전에 향연과 같은 공동 식사는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에서도 확인 할수 있지만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의 향연은 왕족들만의 모임의 성격의 것이었다. 시민의 영역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엿볼 수 있는 포도주를 따르고 신을 찬미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 <공동식사>는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하게 한다.
신약 성경가운데 다음 4곳에서 <마태복음 26장 26절~29절>,<마가복음14장 22절~25절>, <누가 22장 15절~22절>,<고린도 전서 11장 23절~26절>에서 직접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만찬 저녁을 묘사하고 있으며, 직접적인 만찬에 대한 서술은 아니지만< 요한복음6장 51절~59절>에서 성찬의 의미로서 만찬의 서술을 엿볼 수 있다. 이 글의 뒷부분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만찬이 갖는 의미와 몸들의 관계 그리고 감정들을 살펴 볼 것이며 , 고대그리스의 <공동식사>를 구성했던 논리적인 몸들이 어떻게 유대 땅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의 몸(σωμα )을 기억하는(αναμνησιν ) <공동식사>를 구성하는 거룩한 몸들이 되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보면 , 향연 참가자들이 토론에 아무리 치중 한다해도 토론을 하는 중에도 포도주를 계속 마시면서 토론에 참가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소크라테스 또한 충분히 포도주를 마셨으면서도 가문 좋은 집에서 열린 질 좋고 값비싼 포도주를 사양하지 않고 계속 마시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향연은 이틀을 연이어 열리기도 했으며 슬픔을 치료하는 힘이 있다고 고대 그리스인들이 믿었던 포도주는 언제나 향연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주빈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의문점이 하나 들 수 있는데, 연이어서 이틀을 향연을 연다면 향연 참석자들은 자신의 생업을 어떻게 꾸려 나갔을까 하는 점이다. 작은 모임의 향연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해도 구성요소를 모두 갖춘 향연을 연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상당한 비용이 들었다.
가령 격식을 차려서 전식으로서 허브향이 가미된 포도주를 한잔씩 마시는 것을 시작으로 향연의 두번째 부분인 토론 즉 심포토스에 들어가지전에 까지 시라쿠스출신의 예쁜 아울로스aulos 연주자들을 초대해서 그 연주를 감상한다든지 젊고 멋진 소년 소녀 무용수들을 초청해 칼 돌리기나 덤부링하기 ,무언극등을 감상한다는 것은 향연의 주최 비용을 상당히 높이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더구나 플라톤이 전하는 <향연>에서의 소크라테스처럼 밤새워 술을 마실 경우 향연을 주최한 집주인은 밤새워 마실 포도주까지 미리 마련해야 했다. 여분의 포도주를 모두 마셨을 경우 주인은 대개 일정량의 물과 포도주 원액을 사람 키만한 항아리인 크라테르 craterd에 섞어 자그만한 술병으로 계속 손님에게 내놓게 하기도 했다.
물론 일반적으로 향연에 초대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마실 음료와 음식들을 동반한 노예에게 향연 장소에 들고 가도록 하고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지만 , 향연에서는 일단은 자신이 가져간 음료와 음식들은 자신이 사용하는 탁자 밑에 메 달아놓고 주인이 장만한 음식을 먼저 시식하는 것이 관례였고 음식이 남더라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탁자 밑에 움크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던 개들에게 빵과 음식을 뭉쳐서 개먹이로 던져 주는 것이 관례였다.
엄밀한 의미에서 향연을 주최하고 손님들을 초청한다는 것은 신분이 자유로운면서도 어느 정도 부유한 아테네시민만이 가능한 일이 였던 것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향연을 주최하는 주인도 격식에 맞추어 향연을 배 풀 만큼의 경제적 능력을 소유하고 있어야 어야 하는 것은 향연을 주최함에 있어서 필요 조건 이었지만 초대 받은 손님들의 경제적 상태가 또한 각각 자신의 생업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흔쾌히 향연에 응할 수 있는 경제적 구조 속에 놓여져 있을 때, 향연은 열려지게 되고 기쁘게 초대된 손님들로 체워 질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과 같은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생을 꾸려 간다는 것은 고대 그리스인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가령 제화공이 가죽구두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제화공의 삶이 자신이 만든 가죽구두를 구매하는 사람에게 얽매여 있는 것이다.
<얽매여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이 항상 다른 사람의 욕구를 만족 시켜야 하는 일종의 예속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이므로 타자를 위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는 자신과 타자의 관계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에서는 강제노동을 해야 하는 노예奴隸에게나 가능한 관계구조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의사 출신이라는 것을 불명예스럽게 여겼던 정서적 거부 반응도 바로 이러한 고대 그리스인인 직업관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리스 사람들은 특히 남자의 경우 점차 성인이 되어 가면서 가능하면 빨리 가정경제적인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아테네에 비해 집단 군사 공동체의 성격이 강했던 스파르타는 성인이 된 남자가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부끄럽고 불명예스러운것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불명예스러운 정서는 아테네 시민들이 느끼는 것보다 더욱 강력했다.
스파르타에서 건강하지 않은 남자아이는 출생직후 직후부터 스파르타의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건강한 남자아이들만이 7세스파르타의 공동체에서 배제되고, 건강한 남자아이들만이 7 이후에 가족으로부터 분리되어 일종의 전사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 전사 공동체에서 전사로 자라난 성인 스파르타 성인 남자의 결혼이란, 결혼을 통해서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된 부인이 전적으로 가족경제를 중심으로 한 일체의 경제행위를 가장을 대신해 수행하게 됨으로써 스파르타의 남자 시민들은 공적인 영역에만 전념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스파르타에서 시민이면서 성인인 남자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활동을 공적인 영역에 할애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아테네에 비하여 더욱 남성적이며 강력한 군사적 의미를 지닌 정치적 공동체였던 도시국가 스파르타에서 결혼은 시민 남자들의 공적인 활동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통과의례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은, 적어도 자유로운 시민은 타자의 욕구에 종속된 사회적 동물일 수는 없었으며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에 참여 하는 정치적 동물이어야 했다.
그런데 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언급 했을까 ?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정치학에서 언급했다고 알려져서 우리에게는 일상적인 명구가 된 이 명제는 사실상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정황에는 적합하지도 않다. 이제까지의 언급에서 우리가 확인 할 수 있는 것처럼 가족 경제의 사적 울타리를 넘어서 공적인 정치적 영역으로 이행하여야 할 아테네에서 시민은 본질적으로 정치적 동물이 되어야 했다.
폴리스 공동체에서 정치적 레토릭( zoon logon ekhon )을 나눌 때 아테네 시민은 공적인 즉 정치적 영역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자신이 아테네 시민이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민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벗어나 다시 가족 경제의 영역인 사적 영역으로 이행 할 것을 권면하는 듯한 언급을 할 수가 있었을까 ?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아니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었다.
정치학에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정치적 동물 zoon politikon 이 아퀴나스의 창조적 오역 ?에 의해 사회적 동물로 전환된다. 라틴문명의 스펙트럼으로 채색된 사회적 동물은 , 고대 그리스에서 공적 영역이 단지 정치적 영역에 한정되었지만 이제 공적 영역은 경제영역까지 그 외연이 확대 되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퀴나스가 살았던 중세 시대에는 본질적으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야 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렵게 인도 서부 초입까지 그리스 원정군을 이끌고 다달 았지만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인도 본령으로 원정을 확대하지 않고 그리스로의 귀환길에 오르게 된 배경에도 원정에 동반했던 장군들의 강력한 반대 논리를 대왕 자신이 논리적으로 설득 할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참작해야 만 한다.
정치형태가 공화정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 험준한 산맥을 넘어 왔던 그리스 원정 군이 여기서 그리스로 귀환 한다면 다시는 동방원정의 꿈을 실현시킬수 없으리라 판단하고 격정에 가깝도록 알렉산더 대왕이 인도 본령의 진입을 설득하지만 장군들을 논리적으로 설득 시킬 수는 없었다.
여기서 역사적 가정을 한가지 해서 만약 알렉산더의 그리스 원정군이 아니라 중국 진나라의 진시황이 티벳의 고원을 넘어 인도의 동부 초입에 이르렀다면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 문신과 무신들에게 진시황제가 원정의 확대 여부를 물어 볼 수는 있겠지만 일찍이 농업을 기반으로 봉건 사회를 확립한 절대 군주인 진시황은 관료들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참고 사항 일뿐 본의의 의지에 따라 원정의 확대 여부를 결정 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동양의 왕들은 논리적인 몸들이 이미 아닌 서열화된 최고의 몸이었다. 가령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조선왕조 시대에도 관료들과 군왕사이에 국가적 업무를 위시한 크고 작은 사항에 관한 토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논리적 몸들의 만남은 엄밀한 의미에서 아니었다. 조선 왕조 시대에 군왕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과거 이전세대에 지금 되고 있는 이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였는지에 관한 역사적 기록이 왕을 관료가 설득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었다.
역사적 기록의 범위는 조선왕조실록 전체를 포괄 할 뿐만 아니라 중국의 <주례>를 비롯한 사마천의 사기, <위서 ><당서> ,<후당서>를 포함한 일체 역사적 기록물을 총괄 했다. 이러한 정황 때문에 관료가 되기 위한 학문적 연마의 기간은 대단히 길고 험난했고 방대한 양의 중국 역사서를 비롯한 13경에 관한 숙지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관료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는 학문적 역량을 지니고 있는 군왕들이 등극했던 시기를 고찰해보면 정치와 군사,문화 면에서 여타의 왕들이 치세했던 시기에 비해 월등이 뛰어 났던 점을 확인 할수 있다.( 세종대왕, 영조,정조)
유교적 이념의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연령 또는 여성 남성이라는 자연성의 몸과 신분이라는 사회적 몸들을, 모두 추상화하여 논리적 몸들로 전환 시킬수 없었다. 유교적 공동체 내에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감정의 표현들은 절제되고 순화되어서 가족관계를 비롯한 제반 사회적 관계의 적절한 연관속에서 들어 나야만 하는 예禮인 것이다. 주자성리학의 한국 철학적 담론의 요체인 사단 칠정론四端 七情論 도 , 결국 성性을 지닌 우리의 마음( 心 )이 자기 자신을 비롯한 공동체내에서 어떻게조 화로운 감정(情)들의 상태로 드러나는냐는 문제를 화두로 하고 있는 철학적 담론이라 할 것이다.
유교적 가치이념이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의 몸이 논리적인, 로고스의 몸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특정한 관계범주( 가족, 직장, 혈연, 지연)의 구체적인 상황들에 놓이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상하의 구별관계의 규정속으로 편입되도록 구성원을 배치한다. 이러한 상하관계의 구조 속에서는 항상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전체성의 부분으로만 자신의 개별성을 인식하려는 행동을 보인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이와 같은 유교적 상하관계에 고착되었는지를 할 수 있는 퀴즈를 풀어보자. 다음 퀴즈를 읽고 답을 말하되, 문제를 읽은 뒤 2초 안에 답을 말해야 실험의 정확성을 기할 수 있다.
<퀴즈>
서대문구 홍은동에 살고 있는 21세의 훤 칠 한 키의 약간의 탈모 증상이 있는 대학생 김 성만은 중간 시험 기간이어서 대학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공부할 생각으로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마침 언제나 아침 이른 새벽에 출근하시는 아버지의 차를 얻어 타고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김성만은 녹색 보행 신호가 들어와서 횡단보도를 건너는 도중 음주 운전 단속을 피해 역주행하던 화물차의 앞 범퍼에 치여 중상을 입고 근처 대학 병원 응급실로 운송되어 갔다.
응급실에서 신원을 확인받고 응급 수술을 기다리는 김 성만 학생에게 수술을 준비하던 키가 큰 외과의사가 그를 알아보고는 정신없이 뛰어와서는 비명을 지르듯이
``아이고 이게 웬 일이냐 ! 내 아들 성만아…. 일찍 학교 도서관에 …간다더니..``
하고 김성만 학생이 누워 있는 침대를 붙잡고 놀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 했다.
……………….,
자 이 외과 의사는 누구 일까 ?
대답은 여러 가지 일수 있다. 김성만에게 달려온 외과의사는 키가 크고 의사 가운데에서도 힘든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 의사이므로 남자일 것이고 남자라면 당연히 김성만의 아버지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또 다른 추론은 통상적으로 의사 그것도 외과 의사는 담당 할 수술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매일같이 이른 새벽에 출근하지 않으므로 김성만의 아버지가 외과 의사일 수는 없으며, 그렇다면 아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에 있는 유일한 관계는 어머니밖에 없음으로 이 달려온 외과 의사는 어머니일 수 있다.
외과의사가 자기 아들을 잘 못 오인 할수도 있겠지만 그 가능성은 배제 하기로 한다.
통계적으로 보면 외과 의사의 특성상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의사에 관한 통념상 외과 의사를 김성만의 아버지로 대답하는 경우가 어머니라고 대답하는 경우보다 월등이 많은데 , 이것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gender가 사회적 통념에 의하여 어느 특정한 직업군에 자연스럽게 연관되거나 표상되는 기호 체제가 존재한다는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