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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小滿): 제국의 쇠퇴
글쓴이 : 천하루
작성일 : 26-05-22 13:28
조회수 : 49

제국의 쇠퇴: 삶의 창발
  2026 05 21 소만(小滿): 모내기가 한창일 때, 어제 오늘 비가 내리다. 

나로서는 70년대 초에서부터 우리나라의 변역의 시기들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환국으로부터 단군,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일제강점, 미국점령 하에서 변전의 과정 등은 할배들께 들어서, 그리고 여러 역사서술들을 보면서, 말하는 이들마다 관점들이 왜 다른지 궁금하였다. 철학이란 학문을 공부하면서 세계관의 차이, 사상의 입문에서 차이, 풍토의 차이 등으로 해석하는 것을 보아왔다.
철학을 학문으로 공부하겠다는 시기에, 이미 서울 중심이 되어있었지만, 일제의 잔재로 남아있었던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의 시대가 저물고 있었지만, 일반인에게 널리 읽히는 사상은 니체의 허무주의와 하이데거의 실존주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신군부의 정권시절에는 진리치를 따지는 분석철학과 과학철학이 주류로서 나오면서, 이 분과들이 진위 구분을 위해 다루는 대상으로서 현상이 그대로 이어져서, 현상학과 과학철학이 한편을 이루고 있었다. 그 이유도 모르면서, 공부란 그렇게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따라가는 중에, 박정희-전두환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산업화가 궤도에 오르면서 노동이 중요문제로서 제기되었고, 맑스-레닌 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공부를 하는 이들이 표면으로 올라왔다. 이미 이시기에 미국 제국의 금본위제도가 달러본위로 바뀌었다.
  1953년 이래 규소의 시대가 열렸지만, 서구 산업사회의 250년여년처럼 세대를 지나가면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 사이에 변곡점을 달리하고, 변곡점의 형성의 속도가 빨라서 같은 세대에도 년도의 차이에서 달라지는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산업이란 용어가 성립하자, 바로 컴퓨터를 통한 정보교환의 시대를 열었다. 천리안과 하이텔을 아는 세대가 이어서, 곧이어 정보소통의 토대는 마그네틱 저장과 달리 USB의 저장으로 넘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후진국이었던 중국에서는 마그네틱시대 없이 바로 USB로 바로 넘어갔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시대에, IT 산업의 거의 대가없는 투자는 다음시대에 어떤 귀결들이 이루어질지 그 당시에는 잘 가늠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세대를 바꾸지도 않고서도, 바둑에서 알파제로가 이세돌을 이기면서 정보자료의 독해와 이용이 인간의 두뇌를 떠나 기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심었다. AI에 의한 산업화의 속도가 증기기관에서 모터로 변환보다 훨씬 빠르게, 그리고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제국이, 철기산업시대의 기계화의 기준과 규소시대의 AI를 다루는 기준이 잘 이우러지지 않는다는 알아챈다. 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냉전시대에 미국이 뒷배로서 개입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아챘다.
  미국이 1975년 브레튼우즈 시대의 막을 내리고 2008년 리먼 브라더즈의 파산으로 미국 패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했었다. 게다가 이번 중동전쟁의 지형은 지리적, 역사적, 종교적 문제와 함께 경제적, 군사적 문제가 겹쳐있다는 것인데, 소위 말하는 진리와 허위라는 진리론에 근거한 과학과 분석이론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프랑스 철학이 1999년 말에 제시했듯이, 세계의 연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문명론이 아니라 문화론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그리스 문명론에서 2천500여년이 지나서 성찰하는 것 같다.
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이야기가 많아졌다. 미국이 1991년 소비에트연방을 무너뜨리면서 자본주의 군수산업의 승리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한 무기가 철기산업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이렇게 길어질 것이라고 아마도 미국도 러시아도 상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생각하기에 한 나라에서 2-3년 전쟁하게면, 마치 우리나라 전쟁에서 일본이 복구하듯이, 베트남전쟁에서 우리나라가 복구하듯이, 우크라이나 전쟁 후 재건에서 동유럽이 서유럽처럼 되살아날 것으로 생각했다고들 한다. 그런데 IT에서 AI의 지능을 이용한 소품의 전쟁무기가 전쟁의 전략뿐만 아니라 전술을 바꾸어 놓았다. 드론뿐만이 아니라, 전자장치를 탑재한 여러 장비들의 이용, 보다 더 중요한 인공위성을 통한 전쟁지형의 실시간 관전이 있다.
  기술면에서 철기산업시대에는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 잡기 위해 한 세대를 거쳐 가야 했었다. 그런데 이 IT 산업에서는 공장제가 필수적이라기보다, 인력(재능있는 인간)이 주축이라 한다. 미국이 실리콘벨리를 통해 1990년 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을 장악한듯하지만, 인공지능 기술론에는 수학처럼 국경이 없다. 전 세계의 인재들이 실리콘 벨리로 유학가거나 돈 벌러가는 시대가 지나갔다. 이미 인도와 중국의 일류의 인재들은 자국에 남고, 노동자처럼 돈 벌러가는 가는 이들은 이류들이라 한다. 제국이 철기산업의 무기들이야, 핵무기를 포함해서 우세하지만,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규소시대의 무기에서 제국이 지배권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은 경계가 없다. IT와 AI의 자료는, 마치 인류 복지를 위한 DNA의 공유화처럼, 수학과 물리학이 어느 나라의 것이 아니듯이, 누구의 어느 나라의 자료가 아니다. 그것을 다루는 최상의 인재가 다수의 나라에서 미국보다 자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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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학의 일부로서 IT와 AI의 학문도 경계가 없다. 철학도 학문의 경계가 없다. 철학과 종교가 경계를 갖지 않았던 시기에, 화두로서 오랫동안 가장 큰 문제는 “삶”이었다. 삶에서 먹거리 그리고 잠자리였다. 고대 문명들은 이런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생존의 연관으로서 입는 것이 제도의 이야기거리가 되면서, 공공선을 위해 치장하지 말라고 한다.
  삶과 죽음은 대립이 아니라 반대 또는 모순이다. 삶이 중요하다는 것은 죽음 이후를 논하지 않는다는 것, 퀴니코스-스토아학파 이래로 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삶에서 공감하고 동화하며 살았다는 관계들 사이의 잔상이 남아있어서 죽은 자에 대해 설화 또는 신화를 남긴다. 이런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기억과 유전이라 부른다.
  삶의 대구(對句)로서 죽음이라고 여기면서, 학문에서 형이상학이라는 학과가 존재와 무라는 모순관계를 다룬다. 이 관계는 사람과 사람 아닌 것, 동일자와 타(율)자의 용어를 만들었다. 삶 다음으로 사변(사유)이 등장하여, 동일자의 인간에 대비되는 다른 사물들을 잘 다루어야 인간이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는 것으로 여겼다. 대상들을 잘 다룬다는 것은 도구를 잘 만들고 이용하여 먹거리 생산과 잠자기 건물을 잘 만드는 것이다. 이런 작업의 여러 귀결들이 토지와 기후와 연관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토지는 기후의 영향을 받고, 기후는 하늘의 운행에 영향을 받는다. 인간이 천문학이라는 이름으로 24절후(12별자리)를 체계화하는데 오래 걸렸을 것이다. 하늘의 운행에서 시간을 토지의 분할에서 공간을 사유했다고 한다.
  시간과 공간을 다룬다는 것은 축적된 지식을 체계화하는 지자들이 한다고 하였고, 이것을 전수하는 학문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인간이 현세에서 오래 살고, 그리고 죽은 자를 영웅과 신들로 만들었듯이, 살아서도 그렇게 대우받고 싶은 욕망으로 죽은 자 또는 죽은 자들의 세상을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후세계는 현제의 투영된 사유의 귀결이다. 이처럼 거꾸로 하늘의 운행이 지상의 운동에 투사된다고 보았던 시대가 있었을 것이다.
    학문의 역사에서 공간이 당연히 중심이었다고 하지만, 시간의 과정 없이 공간을 생각할 수 없었다. 오래 산다 또는 영생을 바라고 사유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하늘에 영원(평상의 유지)을 지상에 무상(無常, 평상이 없음)을 대립시킨 투사의 사유가 있었으며, 이는 동일률에서는 모순율로서 무상 또는 허무를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정도였을 것이다. 무상은 구전의 이야기가 문자화되어 학문이 시작하던 시기의 주제(선문답거리)였다. 화두와 달리 선문답에는 모순율과 같은 부조리 파라독사들이 있음에도, 주제들을 다음 세대의 전승에서 필요한 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체계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신들을 만들기 한다. 그리고 하나의 신을 만들고 체계화에 완전성을 부여하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중요했다. 천지인의 상식도 이에 준한다. 학문은 이 둘 사이의 인간이 생존도, 어쩌면 영혼과 신체라는 이중화 현상도, 하늘과 땅 사이의  유비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하늘의 영광과 영원에 대한 욕망은 땅에서 아픔과 비참을 해소하기 위해 우화적 이야기를 무한정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존재가 아니라 현존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죽어서 잘 살거나 하늘나라에 신과 나란히 있다는 것이 무순 소용이 있는가에 대한 선문답 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것은 혼이고 몸은 사라지는 것이 현존 세상이라 여겼다.
    혼(魂)에다가 정신(오성, 지성, 이성)을 두고, 그 정신이 잘 생각하면 혼도 잘 살고 몸도 잘 산다고 여기면서, 정신이 잘 한다는 것은 지성이 체계를 잘 만든다는 것으로 여겼다. 이 체계를 누구나 잘 이용하는 상식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더불어 아제에도 잘 이용하게 하는 양식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사유 체계에서 더불어 잘 산다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라기보다 우선 자기와 맞는 사람들과 잘 산다는 것이 되었다. 그들 속에서 지식을 공유하고, 이용하며, 새로운 생산 방식을 바꾸어 가면, 그 다음에 인간은 누구나 함께 다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우선 한편이라는 생각에서 역사는 개인주의를 만들었고, 게다가 자기들끼리 잘 사는 국가주의를 만들었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이들이 전승과 교육을 통한 과학적 지식의 소유하고서, 이들은 다른 문화에서 체계 없이 공감과 감화로서 살아가는 것을 야만인 취급하고, 자기들 방식으로 따르지 않으면 무지의 신앙을 갖는 것처럼 취급하였다.
  이들은 타자들을 교화시키거나 훈육시켜야한다고 하였지만, 국가주의이후 제국주의에서 드러나듯이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에 저항하고 불복하는 이들을 악마화하고, 그리고 자기들에 반대하는 맑스-레닌 사상을 빨갱이라고 만들었다. 미국의 멕카시 선동이 그랬고, 이승만의 보도연맹학살과 박정희의 인혁당과 통혁당 사건을 조작하면서 빨갱이사냥을 했다. 21세기에는 미국의 마가(MAGA)라는 집단의 광기와 윤석열의 계엄과 내란의 획책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철학이란 학문은 모순율의 사고, 논리적 무모순, 종교의 무오류 등이 얼마나 많은 파라독사들을 생산해왔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학문은 이런 획일적인 사고의 광기와 유일신의 파라노이아에 저항하고 인류의 삶과 사유의 확장을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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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 존재와 무, 영원과 현존이라 기본 문제, 그리고 학문적 대립 또는 선문답과 같은 대립적 사유가 있다. 자연 발생론 대 유일 존재론,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에피스테메 대 독사, 자연 대 신, 물질 대 정신으로 이어지는 해답 없는 논쟁(선문답)들이 있어왔다. 이런 논쟁에 대해 조주선사는, 무(無)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질문도 그런 논의도 안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삶이 화두이다.
  그러면 오래 전승의 체계와 학문들(수학들, 철학들, 과학들)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승과 기억은 개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이 자연 속에서 달리 살기를 찾아가는 노력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상태에서 문제를 올바로 제기하고, 다음으로 달리 말하기, 달리 문자화하기, 달리 실천하기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 대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iste), 인도주의자(huminitaire) 대 인문주의자(humainiste), 자연주의 대 인간주의, 우주발생론 대 우주론, 조화중항 대 비례중항 등이 마치 대립(l’opposition)처럼 보이지만,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우선 사유방향의 차히이다. 대립은 비교의 차이이지만, 방향의 차히는 삶의 태도와 대처에 있다. 지금까지 학문의 방향과 달리 방향을 찾아야 할 것이다. 학문의 영역에서도 데칸쇼의 유행이 일본제국주의에 영향 하에서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훈육과 통제의 지배 방식에 있었다면, 제도 측면에서 논리실증주의과 과학주의가 미국 제국의 영향 하에 있으면 신군부와 이명박으로 명령(지시)과 조작의 방식으로 상층에서 표면으로 지배하였다. 이제 심층에서 표면으로, 즉 세계사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자치, 자주에서 자율과 자발성으로 만들어갈 때이다.
  학문과 제도에서 문명사관이 아니라 문화관으로 보는 관점은 심층에서 표면으로 발현과 창안을 실행하는 것이다. 우리 입말이 문자화하고, 그 문자와 이미지가 빛의 속도로 전지구를 돌고 있다. 이런 시대에 민주당은 당원주권을 실현하려 하듯이, 다음 공화국은 프랑스 대혁명의 공화정 수립처럼 인민주권을 실질적으로 실현하는 길을 나서야 할 것이다. 사상의 자유, 집회 결상의 자유를 토대로 하는 다음 7공화국을 건설할 차비를 해야 할 것이다.
    반만년의 역사에서 길어 올린 문화와 기억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 공자도 학습이 즐거움이라 하였듯이, 인민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학습과 동지들을 만들면서 살아가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을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다. 교육은 백년대계를 넘어서 기억과 전통에서 영구대계일 것이다. 이제 달리 말하기, 달리 문자화하기, 달리 실천하기, 이에 맞는 교육이 방향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항 대립에서 비례중항처럼 50 대 50이라기보다, 인습에 젖은 50 대 새로운 세계를 만들 50에서, 조화중항을 찾아가면서 서로 합의와 평결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속에서, 매일, 매달, 매년이 동일반복 같아 보이지만, 평생의 과정에서 보면 매일 이질반복을 하고 있으며, 그 성과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한다. 긴 시간에서 단 한 번의 성취를 기적이라고 부르는데, 기적, 은총, 음덕, 자비, 성덕 등은 같은 의미의 다른 용어일 뿐이다. 하늘의 번개는 기적과 같다. 그 번개는 수없이 많이 치지만, 모든 과정에서 번개는 인생처럼 딱 한번 뿐이라고 하고, 동일한 번개는 없듯이 동일한 삶도 없다. 산다는 것, 번개와 같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기적이 각자에게 있지만, 다른 이들에게 동일한 것이 아니기에 다른 이들이 전혀 모른다. 이질반복에서 평생의 노력이 번개 같이 지나간다. 그럼에도 인간은 그 삶의 다양체를 느끼면 살다가 간다. 이럴 이해하는 벗과 동지를 만나 혁명도 하려하고 결사도 만든다. 
(4:16, 59PMA)(4:34, 59PMAA)

댓글
천하루 26-05-22 13:29
 
인도주의자(le huminitaire) 대 인문주의자(le humainiste, 인간주의자),
--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 대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iste),
어느 종교가, 어느 사상이, 동포애, 민족애, 인류애를 강조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저 사악하고 이익과 잉여를 챙기는 자들을 닮지 말고, 이재명과 같은 인도주의자를 닮자.

이재명 대통령은, 이스라엘이 우리나라 사람을 공해상에서 나포한 것을 항의하였다.
이스라엘의 네타냐후가 전범이 아닌가 라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다음날 이스라엘은 우리나라 두 사람 풀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40개국 450여명이 풀려났다고 한다. (59PMB)
유니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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