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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계통의 유목민족인 사카족 계통의 종족에서 투르크계 종족으로 변화한 사타돌궐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29 02:16:51
  • 당나라 말기, 중국 대륙을 휩쓸었던 거대 유목 집단

사타돌궐이 중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당나라 초기 시대이다. 사타(沙陁) 또는 사타돌궐(沙陀突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타족은 서돌궐의 예속된 부락으로서 처월의 일파이다. 원래는 스키타이와 같이 페르시아 계통의 유목민족인 사카족 계통의 종족이었는데 오랫동안 철륵과 밀접한 관계를 맺자 투르크계인 철륵에 동화되어 서돌궐의 한 부(部)가 되었다. 서돌궐은 강성했으나 지속된 내전과 당 태종의 연이은 공격으로 657년, 결국 서돌궐은 멸망했다. 서돌궐이 멸망하자 이어 사타족은 당나라의 기미주인 영주로 거처를 옮겨 당나라에 귀부했다. 이후 사타족은 당 태종을 따라 고구려 원정과 설연타 원정에 나서기도 하였으며, 설인귀를 따라 철륵 토벌 전에서도 공을 세웠다. 이후 당나라는 공을 세운 추장 주야금산(朱邪金散)을 북정도호부의 관할을 받도록 하였다. 

당나라 말기에 나타난 사타돌궐의 기병,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712년, 사타족은 토번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정주(庭州) 막하성(莫賀城)으로 이동했다. 이에 당 현종은 주야보국(朱邪保鞠, 사타부락의 추장으로 추정)을 금만주도독(金滿州都督)에 임명하였다. 돌궐은 한 때 당나라와 유사한 거대한 제국을 건국했고, 사타부는 천산산맥 방면에 자리 잡고 서돌궐에 예속되어 있었다. 돌궐이 8세기 말 위구르에 멸망당한 이후에도 옛 서돌궐의 구성원이었던 투르크계 유목 민족 집단 일부는 살아남았고, 그 가운데 하나였던 돌기시(突騎施, 투르기스) 계통의 처월(處月)이라는 부족이 지금의 중국 화북 지방으로 남하하였고, 당나라가 이들을 오르도스(Ordos)의 지역에 있도록 하며 이들을 사타돌궐이라 부르게 되었다.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의 서역 지배권이 토번과 위구르 제국에 넘어가자 정원 연간 사타 역시 당나라를 버리고 토번에 귀부했다. 이로부터 사타는 토번이 당나라의 변경을 침입할 때마다 선봉으로 나섰다. 790년, 토번의 명장 줘치수(卓赤蘇)가 북정성을 공격했을 때도 사타의 협력이 존재했다. 당시 서역 일대는 토번과 위구르 제국이 지배권을 두고 서로 견제하고 있었다. 얼마 후에 위구르 제국이 양주 점령하여 서역 일대가 혼란에 빠지자 토번은 사타의 배신을 미리 예방하고자 이들 거주지를 이주시키기 위해 모의하였다. 주야집의(朱邪執宜)가 당나라에 투항해서 서북 변두리의 음산부(陰山府) 병마사로 임명되었고, 8세기 후반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동관(潼關)을 지키던 가서한(哥舒翰)의 군에 종군해 당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808년에는 헌종(憲宗)에게 투항하였다. 


당나라 헌종은 직접 조서를 내려 사타를 염주(染州)에 거주시켰고, 음산부(陰産部)를 설치했다. 또한, 당나라가 직접 양과 소를 매입해 사타의 재력을 충당시켰다. 이후 당나라는 사타를 삭주로 사민하였으며 847년에는 토번이 위구르 제국과 연합해 당나라의 하서를 침공하자 사타의 추장 주사적심이 당나라군과 연합해 토번군을 격파했다. 868년 방훈의 난이 일어나 농민 세력들이 강소성 일대와 산동성 남부, 안휘성 북부까지 미치자 당나라는 사타, 토욕혼 등의 이민족 군대를 편성했다. 주야집의의 아들이자 삭주자사(朔方刺史)였던 주야적심(朱邪赤心)이 이를 진압하고 당나라의 황제로부터 국성인 이(李)씨와 국창(國昌)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 유력 군벌이 되었다. 875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이국창의 아들 이극용이 검은 군장으로 통일한 아군(鴉軍, 갈가마귀 군단)이라 불리는 무리를 거느리고 산서로부터 남하해 황소를 격파하고 장안을 탈환하는 공을 세웠다. 


당시 부친을 따라 다녔던 이극용(李克用)은 당나라 말기에 일어난 황소의 난을 진압하고 경조를 회복했다. 이후에 중서령에 이르렀고, 진왕(晉王)으로 책봉되었다. 황소군의 주온 즉 주전충이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 조정에 귀부하면서 황소군은 와해되었으나, 이후 주전충에 의해 당나라 자체가 멸망하기에 이른다. 당나라의 국성인 이씨를 사용하던 사타족은 스스로를 당나라의 정통성을 승계하는 민족이라 자처하며 이극용(李克用)과 그 아들 이존욱(李存勗), 2대에 걸쳐 주전충의 후량과 대결을 벌였고, 또한 북방의 신흥 세력이던 거란과는 제휴와 대립을 반복하면서 끝내 후량을 붕괴시키고 923년 후당을 세웠다. 


사타족 계통의 왕조의 특징으로는 친아들과 양아들의 격차가 없었다는 것인데, 그로 인해 황제가 붕어한 이후, 후계를 둘러싸고 친아들과 양아들 사이의 다툼이 빈번하게 벌어졌다. 이는 원래 소규모 세력으로 유목 경제를 만들다 초원을 떠나온 이들 군사 집단이 그 핵심 군사력을 유지하고 늘리기 위해서는 수장 층을 포함한 간부급 무장들이 난세에 갈 곳을 잃은 자들 가운데 군인, 병사로써 용맹한 자들을 발탁하고 그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기르는 것으로, 양아버지-양자 체계로 구축된 군벌 기구를 구축해 나갔다고 한다. 이존욱의 뒤를 승계한 이사원(李嗣源)은 이극용의 양자였고, 이사원을 승계한 것도 그의 친아들인 이종후(李從厚)가 아니라 그로부터 황위를 찬탈한 양자 이종가(李從珂)였다. 


이사원의 사위였던 석경당(石敬瑭)은 이종가를 살해하기 위해 거란과 결탁하고, 나아가 이종가를 격파하며 후진을 건국했다. 하지만 실상 그들은 거란의 괴뢰국이나 마찬가지였고, 국내는 당나라 말기처럼 각지의 군벌들이 할거 하고 있었다. 석경당이 사망한 이후, 재상이었던 풍도(馮道) 등은 석경당의 아들이 없자 조카인 석중귀(石重貴)를 옹립하였으나 거란(훗날의 요나라)의 분노를 사서 요 태종 야율요골(耶律堯骨, 야율덕광)에 의해 멸망당했다. 산서 지역에 자리 잡았던 군벌 유지원(劉知遠)이 후한(後漢)을 건국했지만, 이마저도 지배 집단이 적어서 곧 붕괴되고 말았다. 후촉(後蜀)의 건국자 맹지상(孟知祥)도 사타족으로 추정된다. 사타족은 발해를 멸망시킬 때 거란을 도왔던 세력 중 하나로 <遼史>에 언급된다. 또는 발해를 멸망시킬 때 주변 지역 민족들을 평정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요나라에 복속된 사타족도 있다 보니 일부는 거란을 지원했을 수도 있다고 보여 진다. 5대 10국 시대라 불리는 중국 역사의 분열 시기에 화북 지방에 자리 잡았던 5대의 항쟁은 실제로는 사타부 계통의 왕조와 거란, 요나라 사이의 제휴와 이반이 거듭된 역사나 다름이 없다. 979년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중국 북쪽 초원 지역에 남아있던 사타부의 잔당은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인근의 여러 몽골족과 투르크족에 동화되어 사라졌다. 타타르 연맹의 백타타르나 옹구트가 사타부의 후예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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