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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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철학 네트워크=이종철 ]
몽골에서 보낸 4개월
지난 8월 22일 밤에 울란바타르에 들어왔으니까 오늘 부로 거진 4달이 되어가는 군요. 처음에 들어와서 날씨도 좋고 신기한 마음에 이곳 저곳 관광도 많이 다니기도 했지요. 하지만 나는 이곳에 온게 놀러 온 것이 아니라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해서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기 위해서 온 것이지요. 지난 4개월을 가만 돌이켜 보면서 내가 했던 일을 크게 몇 가지 정리해볼 수 있군요.
1. <한국학 중앙 연구원>의 <찾아가는 한국학 콘서트> 행사를 주관했습니다. 처음 도착해서 사람도 잘 모르는 상태라 주변의 교수들이 힘들 것 같다고 했지만 그래도 성황리에 행사를 치뤘습니다. 이 행사를 통해 몽골 대학생들이 자신의 전통에 대해 자극도 받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후레대에서 열린 강연은 몽골 국립대와 과학기술대 2군데를 합친 참석인원 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후레대에서 참석한 인원이 150여명이 되었는데, 두 대학을 합친 곳에서는 30명이 안되었지요. 그만큼 후레대에서 준비를 철저히 했다고 볼 수가 있지요. 이 행사 덕분에 후레대의 이공계통 교수들도 인문학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요.<한중연>은 앞으로도 계속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2. 매주 정기적으로 수요일에 모이는 UB 포럼을 통해 사람들도 사귀고 보다 전문적인 분야의 협력을 구해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피상적인 모임인 것 같아서 한 2달 정도 나가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이곳에 보면 여러 형태의 자문관(Adviser)들을 만나는데 이들을 보면 할 일 없이 시간 때우기 위해 돌아다니는 느낌도 많이 받았습니다. 자문관들은 대개 현직에서 정년 퇴직하고 자신들의 숙련된 노하우를 가지고 파견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월 4천 달라에다 기타 비용까지 합하면 거진 5천 달라를 받습니다. 이 정도면 몽골 대통령보다 더 많은 수입이지요. 거의 몽골 돈으로 1,200만 투그릭을 받는 셈인데 과연 그 정도의 전문성을 발휘하면서 역할을 하는지 의문이 많이 들더군요. 여러 모임들에 가다 보면 거진 시간 때우기 형태로 얼굴을 들이 대미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지요. 이곳 대학의 한국어과에서 강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좀 더 이들에 대한 실태를 파악해서 나중에 보고서라도 하나 써야 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3. 후레 대학의 폰사 교수가 단국대에서 운영하는 해외 차세대 한국학자 심포지움에 응모를 했는데 합격을 했습니다. 체재비와 왕복 항공료를 단국대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지요. 폰사 교수의 신청서를 내가 다 써줬습니다. 처음에 써온 글을 보니까 도저히 그대로 제출할 수가 없어서 내가 다시 써줬지요. 그런데 처음에는 고맙다고 하면서 점심 한 번 사겠다고 하더니 그냥 입을 딱 씼더라고요. 이곳 한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인들이 너무 퍼주기 형태로 몽골을 대하다 보니 몽골 사람들이 공짜 심리가 강하다고요. 내가 이런 경우를 몇 번 경험해봤습니다. 수교한 이래 20년이 넘도록 사실 한국이 몽골에 퍼준 돈이 적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생색 내는 형태로, 그리고 공짜로 하다 보니 별 표가 나지 않습니다. 일본은 나름대로 계획을 가지고 시스템이나 인프라를 깔아줘서 상당한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한국은 대부분 유명인사들 중심으로 퍼주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지난 아셈회의하면서 박근혜가 다녀갈 때 10억달라 MOU 체결했다고 자랑하던 모습이 생각날 겁니다. 덕분에 몽골인들도 한국인 상대할 때 퍼주는 것을 당연시한다고 합니다. 별론 좋은 것은 아니지요.
4. 내가 이번 학기 강의를 하지 않았지만 4학년 논문 지도는 무료로 담당했습니다. 매주 보통 4명에서 6명 정도 참석을 했는데 들락 거리는 학생들이 몇 명 있습니다. 몽골 학생들을 대하면서 기초 학력 혹은 교양부문에 대한 훈련이 상당히 약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조차 잘 모르는 경우를 보았지요. 후레 대학의 한계인지 아니면 전반적으로 몽골 대학생들의 수준인지는 좀 더 두고 봐야 겠지요. 그래서 총장한테 교양 교육을 강화하자고 제안을 했지만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냥 기술자 양성 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학교의 방침이나 운영과 관련해서 총장과 몇 번 의견 충돌이 있고 나서 부터는 더 이상 그런 문제에 관심갖지 말아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왜 공부를 하느냐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낮아서 한국으로 유학을 가도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번 한중연 대학원에 진학한 몽골 학생들 숫자가 전세계에서 가장 많더군요. 이곳 대학에서는 한국 유학 가는 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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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1월 1일 자로 <후레 대학 한국학 연구소>를 외형적으로 설립을 했습니다. 총장 지시로 처장 회의를 통과했지요. 하지만 총장 말인즉슨 단 한 푼도 지원해줄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합니다. 교학처장도 필요한 법적 조치는 얼마든지 도와주겠지만 학교 재정상 도와주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만나면 늘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하지요. 그나마 깐깐한 행정 처장이 간단한 비품이나 비용들은 지원해주는 편입니다.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아직 없지만 책꽂이 2개 정도는 마련해주겠다고 합니다. 그 밖에는 거의 빈약한 내 호주머니 털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게 수군작 선생이 간판 글씨도 무료로 써주었고 표구 비용은 사업하는 권상근 대표가 도와주어서 드디어 간판을 달았습니다. 한 마디로 감개가 무량하지요. 몽골에 온 지 100일만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리고 인하대학의 김영 교수님이 도서를 25권 정도 기증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앞으로 운영 비용이나 기타 연구소 관련해서 기금도 조성을 하고 프로젝트로 끌어오려고 하는데 참 쉽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번 겨울에 그 준비를 할 겁니다.
6. 어제 좋은 소식이 하나 들려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이곳에 와서 박사 논문을 하나 도와준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선교를 하시는 목사님인데 오래 전 내 수업도 들었던 분입니다. 철학 박사 논문을 쓰는 일에만 전념해도 쉽지 않은데 해외에서 선교사업을 하면서 틈틈히 과정도 이수하다가 몇 년 전부터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학기가 데드라인이지요. 그 마지막 학기에 내가 몽골에 도착하니까 이분은 천우신조라고 하면서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청하더군요. 보니까 논문 쓰느라고 준비도 많이 했고 직접 작성을 하면서 고생도 많이 했더군요. 하지만 전문적으로 훈련을 받지 않다 보니까 구성이나 논리, 그리고 표현들에서 서툰게 많이 보입니다. 내가 보기에도 난감했지만 마지막 학기라 더 이상 물러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요. 그걸 몇 개월 동안 같이 씨름하면서 많이 교정을 해주고 표현도 잡아주고 논리와 논증도 신경써주었습니다. 1차 예심을 무사히 통과하고 그 이후 2차 본심에서 한 번 보류도 되고 하면서 고생하는 모습도 많이 봤습니다. 보류되고 나서 마지막 열흘 동안에는 거의 실시간적으로 자문도 해주었지요. 내가 이런 걸 보면서 한국의 학위 시스템이 얼마나 부실한 지를 다시 확인했습니다. 한국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지도 교수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다 써논 논문이 잘됐는지 심사만 하는 것을 자신들의 본분으로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까 논문을 쓰면서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난감해하는 모습을 많이 봤습니다. 정말 한국 대학이 자체 브랜드로 학위를 배출하려면 지금과 같은 논문 작성과 심사를 완전히 바꿔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고생 고생하다가 마침내 어제 날자로 심사위원들 전원 일치로 합격 했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목사님이 내 도움이 컸다고 아주 고마워 하더군요. 나도 그동안 신경 쓴 보람이 있어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몽골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목사 사모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요. 물론 기브 앤 테이크는 아니지만 어려울 때 마음 써주는 사모님 마음이 보통이 아닙니다.
7. 이제 올 해도 보름 정도 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나는 루카치의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2권의 일부를 금년 말까지 출판사에 넘기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1권은 몽골로 오기 직전에 마무리해서 넘겼습니다. 과거에 꼼꼼히 번역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최종적으로 넘기면서 다시 보니까 문제가 많이 보입니다. 원문 자체가 난삽한 면도 있고 생각이 분명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 원고를 금년 말까지 다 볼 수 있을 것 같군요. 한국에서라면 연말 연시 술자리도 많은데 다행히 이곳은 한 없이 외롭고 쓸쓸한 분위기라 이런 작업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편이더군요. 이 원고까지 완성해서 30일 정도에 넘기면 몽골에 도착해서 4개월 남짓 벌려 놓은 여러 가지 일도 대충 마무리를 짓게 됩니다. 월급 한 푼 안받고 몽골 땅에 와서 좌충우돌하면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새롭게 경험하고 내 일에 집중한 일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라면 늘 똑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자괴감을 가질 수도 있었겠지만 이곳에서는 어려워도 무언가 보람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8. 내년 1월 2일 자로 저는 한국에 들어갑니다. 처음 몽골에 왔을 때는 추운 겨울을 한 번 지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몽골의 겨울을 내가 버티기에는 너무 환경이 좋지 않더군요. 12월 들어서 눈이 좀 덜 내리기는 했지만 평균 20도 이하에다가 빙판이 많고 매연도 너무 심합니다. 무엇보다 대기 오염이 심해서 실내의 창문을 거의 열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저는 마스크를 하고 있지요. 겨울에는 울란바타르 주변의 판자촌과 게르, 그리고 발전소에 뿜어대는 매연이 분지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고 거대한 띠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거리를 걷다 보면 결빙된 곳을 피하는 것 이상으로 무수히 많은 가래침들을 피하는 것도 일 중의 하나입니다. 대기 오염으로 폐암 환자들도 많지요. 그래서 이곳 대학의 교수들도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어제도 학교에 가봤더니 식당은 몽골 직원들을 위해 운영하지만 학생들도 없고 해서 썰렁하더군요. 저도 친구들한테 도움을 구해가지고 한국가는 비행기표를 마련했습니다. 나를 믿고 도와주는 친구들이 고맙지요. 내가 그 친구들 이름을 일일히 말할 수는 없지만 연구소를 함께 키워나간 산증인으로 돌에 이름을 새겨놓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습니다. 아무튼 한 달 여 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재충전도 하고 새롭게 각오도 다지고 또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도움도 구해보려고 합니다.
9. 내가 생각하기에도 돈 한 푼 없이, 외부 지원 하나 없이 이렇게 홀홀 단신으로 울란바타르에 온 것 자체가 동키호테 같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몇 몇 친구들이 뜻이 가상하다고 해서 지원해준 돈이 조금 있었지만 처음 정착하고 몇 개월 생활하면서 다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한국학 연구소를 운영하겠다고 했지만 내 전공은 서양 근대 철학이기도 해서 약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상태로 무엇을 해보겠다고 한 것 자체가 얼마나 무모한지 나 자신도 압니다. 그런 약점을 메우기 위해서 그만큼 내가 노력도 하고 준비도 하고 있지요. 사실 독자적으로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 동서양 따지고 근대니 고대 따지고, 또 한국학이니 북방학이니 하는 것이 부당해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지요. 오죽하면 후레 대학 한국어과에서 강의하는 문제도 전공이 아니라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더군요. 이런 상태로 프로젝트를 유치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 점에서 본다면 나는 완전히 맨땅에 헤딩하는 벤처 사업가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몇 개월 뛰어 다니면서 다른 대학의 연구자들과 협력할 수 있는 기반을 서서히 모색하고 있습니다. 당장 테마만 좋으면 이웃에 있는 <몽골 민족 대학>의 몽골 교수들하고 합작으로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학의 마이클 손 총장이 먼저 나에게 제안했다는 것을 일전에 포스팅한 적이 있지요.
이제 4개월 남짓하지만 성과가 없는게 아닌데 몽골어도 습득하고 여러가지 준비한 작업들을 차분히 해 나가다보면 길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곳에 와서 한국에서 하기 힘든 다른 분야의 독서를 많이 하고 있고, 새로운 생각들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설령 내가 이곳에서 벌린 일들이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그런 것들은 소프트한 나의 지적 자산으로 남을 수 있지요. 나는 그 점에서 낙관주의자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몇 년 동안 새로 시도하는 실험들이 노년의 30년을 끌어갈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물론 돈을 벌지 못해 안해에게 한 없이 미안한 마음도 크지요. 연말도 되고 해서 그냥 두서 없이 감회를 적었지만 이런 것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내가 겪고 생각한 것들입니다. 내 벗님들도 관심을 갖고 많이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2016.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