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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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의 인구를 증가시키기 위해 1985년 피임과 낙태를 금지하는 법을 발효한다. 낙태 시술을 하는 사람부터 피임약을 복용하는 여자, 피임 기구를 수입하는 사람까지 전부 체포하여 사형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 낙태 시술과 콘돔, 피임약 등이 밀수되었으니 수요보다 공급이 미치지 못해 점점 가격이 상승하여 이와 같은 밀수품들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져 임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여성들이 최후로 취하는 방법이 불임시술이었다. 실제로 경제가 피폐해진 베네수엘라에서 피임 기구가 물자 부족으로 인해 구할 수 없게 되자 여성들이 불임시술을 선택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당시의 루마니아에서는 그런 부분들이 가능할리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차우셰스쿠는 무조건 가정마다 자녀 4명을 의무로 두는 제도를 발표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발이 커서 이러한 제도들이 지켜질리 없었고 이에 대해 차우셰스쿠는 금욕세라는 항목을 신설해 자식이 없는 사람에게는 세금을 추가로 부과했다. 여기에 일부러 임신을 회피하는지 감시하고자 세큐리다테에서 월경 경찰을 추가로 신설하여 운용해 여성들을 감시했다. 이 때 월경 경찰은 직장을 돌아다니며 여성들의 임신을 독려하였고 임신한 여성에게는 표창을 주었으며 임신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강요와 세금까지 물리며 압박하기에 이른다.

루마니아 보육원에 버려지다시피한 차우셰스쿠의 아이들(Ceausescu's children),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심지어는 강제로 정기적인 신체검진을 하여 임신 여부를 확인하였는데, 문제는 이 신체검진이 매우 가학적이라는 것에서 문제가 되었다. 여성 4명이 한 조가 되어 완전히 탈의하고 산부인과로 들어가 한 번에 진찰받는 방식이었다. 이는 사람을 가축과 같이 취급한 것으로써 여성 인권 유린에다 독재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한 최악의 정책이었다. 본래 임신하지 않은 여성에게 세금만 부과했었어도 루마니아 국민들의 불만은 시민 혁명에 이를 정도까지 폭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거기에다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아이를 무조건 4명 이상을 낳도록 했으며 만약 아이의 수를 채우지 못하면 매우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한다. 그런데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장애인, 불임인 여자, 심지어는 성 불구자에게까지도 세금을 물렸기 때문에 이들의 불만은 쇄도했다. 이들 중 성 불구자들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던 것이 부인이 다른 남자와 관계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것으로 어떻게든 세금을 피할 수는 있었다. 물론 이와 같은 정책 자체로는 최악의 정책이라는 것에서 이견은 없지만, 국가에 기여를 못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잘못인지에 대해서는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이나 불임, 성 불구자가 선천적으로 된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당시 루마니아 정부에서 판단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루마니아가 당시에는 독재국가였고 출산율을 높이는 것도 필요했지만 정책 자체가 고대 시대의 정책이 더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로 무지막지했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아이를 입양했다고 세금에서 면제 해주는 것도 없었다. 당연히 출산이 목적이기 때문에 양육은 전혀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정책에서 간부의 부인들은 당연히 제외되었다. 자식이 없는 집안이 적발되었을 때 내야 할 세금 및 벌금은 한번 걸리면 무려 연봉의 20~30% 정도의 금액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이 출산 장려 정책은 처음부터 여성 인권은 완전히 무시했던데다, 출산만을 강요했을 뿐 그에 필요한 사회적 지원도 전무했고 효과도 전혀 없는 최악의 정책이었지만 이 법이 시행되고 나서 루마니아는 첫 4년 동안 여성 1인당 출산율은 두 배나 증가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그와 같은 증가 상황은 일시적이었다. 아이를 키우는데 충분한 경제적 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시민들은 무거운 세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사에게 뇌물을 주고 낙태 수술이 가능한 거짓 진단명을 받아냈다.
그리고 의사의 도움 없이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들을 선택하기도 했다. 독극물을 복용하거나, 산파가 소독되지 않은 도구로 시술하고 임신하여 부푼 배에 충격을 가하는 등, 태아는 물론이거니와 산모의 목숨조차 보장 받지 못하는 방법들이 횡행했다. 결국 출산율은 1985년에 법이 시행되기 전의 상황으로 복귀하게 된다. 또한 경제적으로 궁핍한 여성들은 어쩔 수 없이 낳은 아기들을 방치하거나 탁아 시설에 맡기는 아동 유기가 급증했다. 이와 같은 열악한 시설로 인해 아이들은 영양 결핍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는 영유아 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 심지어 유아사망률 뿐 아니라 산모의 사망률 또한 급증했다. 의사로부터 안전한 수술을 받을 수 없었던 임산부들은 불법 시술을 택했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합병증을 앓으며 매년 500여 명이 출혈과 감염으로 사망했다. 특히 낙태금지법이 시행되기 이전인 1966년에 비해 1983년 루마니아 산모의 사망률은 7배나 높아졌다. 1989년 12월 민주화 혁명으로 낙태금지법이 철폐되자 1990년 루마니아 산모의 사망률은 이전의 절반으로 감소했다. 특히 부모가 육아를 한다 해도 원하지 않는 임신이나 사이가 좋지 않아 이혼을 눈앞에 둔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학대와 무관심에 방치되어 스스로가 비참한 삶을 살았고, 후에 이 아이들은 부모가 원하지도 않는데 태어나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가지게 되면서 엄청난 사회적 문제로 성장하였다.
무엇보다 보육 시설과 육아 시설, 소아과 의사가 부족한 상황에서 아기만 낳다 보니 영아 사망률이 145%나 증가하여 실질적인 인구증가율은 희생에 비해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결과를 두고 차우셰스쿠는 또 다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실질적인 보건 환경을 개선시켜 전반적인 상황의 호전을 유도하지 않고 단순히 단발적인 수치만을 낮추는 일차원적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는 생후 한 달이 지나 사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만 출생신고를 받아주는 것이다. 정작 사망하는 아이들의 수는 엇비슷한데 살아남은 아이들만 출생신고를 받아주니 태어나자마자 죽는 아이들은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인정되지 않아 사망신고도 되지 않았다. 더불어 사망자들의 사망신고는 되지 않으면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출생신고만 받아주니 문서상의 사망률 숫자가 줄어드는 역발상을 정책으로 내 놓았던 것이다. 또한 부모 입장에서 볼 때 출생 신고가 안 되는 만큼 더 낳아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의 부담이 더 악화되었고 어쩔 수 없이 수를 채우기 위해 실제 인구수는 더 증가하는 극악의 끝을 달리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와 같이 보건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루마니아는 국민의 특정 연령층 전체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되었다. 장애아이로 태어났다거나 부모가 키울 상황이나 능력이 안 되는 등의 이유로 시설로 버려지며 방치되는 아이들도 늘게 되었고 보호시설에 보내진 아이들은 그만큼 숫자도 많고 방치되었기 때문에 쇠약해져 잔병을 앓았고 그로 인해 죽는 아이들이 늘어만 갔다. 게다가 차우셰스쿠는 쇠약해진 아이들에게 체력을 강화하겠다는 목적으로 일괄적인 수혈을 지시하였는데, 문제는 검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에 이 아이들에게 대규모로 에이즈를 감염시키는 등 악순환만 계속 이어지게 된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태어난 많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지만 대부분 성장 상태로 볼 때 육체적으로는 영양상태가 나빠 발육이 늦는 편이었고 정신적으로는 건전함과 거리가 멀었다. 이 세대들은 낮은 지능과 건강도를 보이면서 대인관계 또한 문제를 보이거나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세대들보다 폭력성과 범죄율이 높았으며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은 집시가 되었다. 더불어 적절한 일자리가 제공되지 못했기 때문에 청년 실업자들이 폭증했고 불안과 불만, 불행이 쌓여 결국 이 세대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이와 같은 차우셰스쿠 세대들의 주도로 인해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으며 이러한 시위가 차우셰스쿠 정권을 결국은 붕괴시켰다. 무리한 인구정책이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갈 시위대를 직접 키운 결과로 낳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목할 부분은 차우셰스쿠에게 가장 충성했던 세큐리타테 역시 이 세대에서 차출된 아이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에 있다. 실제로 세큐리타테에 입대한 고아들은 정규군보다 더 혹독한 훈련을 견뎌내야 했다. 게다가 민주화가 된 직후에는 차우셰스쿠의 충견들이라는 이유로 인해 시민들 혹은 정규군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거나, 혹은 변화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범죄자가 되던지, 아니면 자살하는 등, 대다수의 말로는 그리 좋지 않았다. 여기에서 일부 운 좋은 소수만이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기업가나 정치가 등으로 전향하는데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어느 측에 속하던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으로 태어난 고아들은 대부분 인생이 순탄치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현재까지도 루마니아에서 이 문제는 잘 해결되지 않고 있다. 최소한의 인간다운 대우도 받지 못하고 인신매매 브로커들을 통해 루마니아 밖으로 팔려가 막노동, 성매매, 소년병 등의 환경에 노출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악질 아동포르노 업자에게 잡히는 경우도 생기고 있다. 이 세대들을 두고 흔히 "차우셰스쿠의 아이들(Ceausescu's children)"이라 명명되고 있다.
한 때 소련 레드 마피아와 터키 마피아, 네덜란드 페노제의 주 수입원이 이들 차우셰스쿠의 세대들을 인신매매하여 거래하는 것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대다수가 절대 빈곤과 마약, 에이즈에 노출되어 있으며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인식은 더욱 안 좋아지는 편에 있다. 수도 부쿠레슈티만 해도 이 차우셰스쿠의 세대들인 집시들이 모여 사는 지하 마을도 존재하고 있는데 오래된 하수도를 지하도 형식으로 개조하여 마을로 만든 것인데 흔히 이곳들을 집시들의 소굴로 여겨지고 있는 형편이다. 차우셰스쿠의 이와 같은 강제적인 인구 정책은 루마니아 자체의 국가 브랜드까지 하락시켰다. 루마니아는 냉전 시기와 그 이후에도 한동안 서구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소련이나 폴란드, 동독, 유고슬라비아와 같이 같은 공산국가들 사이에서도 비웃음을 받아 왔으며, 공산권이 붕괴 이후의 폴란드, 독일, 러시아 등의 국가들에게 오랜 기간동안 웃음거리가 되어야 했다. 한국에서는 현재까지도 몰도바와 우크라이나, 알바니아 같은 국가들이 알려지기 전에는 루마니아가 동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을 정도였다. 그리고 서유럽에서도 차우셰스쿠 세대로 불리는 루마니아 인들이 넘어와 집시 생활을 하고 소매치기로 한 철 장사를 하는 등, 다량의 사회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