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아프리카 차드 분쟁과 독재자 이드리스 데비(Idriss Déby, 1952~2021), 보코하람과의 항쟁
차드 분쟁은 1960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래 남부 기독교 세력과 북부와 동부의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으로 점철되었으나, 1980년대 정권을 취득한 북부 지역의 파벌 간의 내분으로 전이된 내분 형태의 분쟁으로 나타난다. 해당 분쟁의 주요 행위자는 여러 차례 변경되었으나, 이러한 정치 행정권자들은 항상 국가 통치 주도권을 두고 경쟁...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3238185&PAGE_CD=N0006&utm_source=naver&utm_medium=newsstand&utm_campaign=naver_news&CMPT_CD=E0033M빨치산의 태평소 소리 좋아했던 미군, 국악의 전도사가 되다[이희용의 월드코리안 12] 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민족·국제 이희용(hoprave)▲가야금 타는 해의만만년의 해...

●위 이미지는 AI인공지능으로 생성되었습니다.
<<방향성과 감내의 층위에 대하여>>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널리 이롭고자 하는 방향성" 자체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 영향력의 크기가 크든 작든,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든 그렇지 않든, 그 출발점이 자신만의 이익이 아니라 더 넓은 이로움을 향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를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미물적 존재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존재가 스스로의 당위성을 확보하려고 할 때에는 필연적으로 고단한 과정과 마주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만을 위한 삶은 비교적 단순할 수 있지만, 타인과 공동체, 더 나아가 세상 전체를 고려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는 감당해야 할 책임과 고민의 범위가 크게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존재의 성숙을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나 능력의 확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것을 감당하려 하는가"
에 가까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층위란 우열의 개념이라기보다, 감당하려는 범위와 방향성의 차이에 가깝습니다.
개인만을 책임지려는 사람도 하나의 층위가 될 수 있고,
가족과 공동체를 책임지려는 사람도 또 다른 층위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인류와 생명, 존재 전체를 고민하려는 사람도 하나의 층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범위가 넓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더 훌륭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범위가 넓어질수록 필연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 교환이 필요해지고, 더 복잡한 절차와 관계를 이해해야 하며, 더 정교한 조직과 구조를 다루어야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고단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난해함을 마주하게 되고, 오해를 받기도 하며, 때로는 충분한 보상 없이 책임만 증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바로 이러한 지점이 하나의 검증 과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그 고단함을 감내하며 방향을 유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결국 존재의 성숙이란 특별한 능력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기보다, 감사할 줄 알고, 성실함을 잃지 않으며, 정직하려 노력하고, 보다 넓은 이로움을 향한 방향을 유지하는 가운데, 그에 수반되는 어려움을 얼마나 감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층위가 높아진다는 것을 권력이나 우월함의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
더 넓은 책임과 더 큰 의미를 감당하려는 의지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화려한 성취의 기록보다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방향을 잃지 않으려는 성실한 노력 속에서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