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든 '포지션 설정'이 중요하다. 이러한 설정에는 뉴턴역학의 초기 조건처럼 '최초의 설정'이 중요할 때가 있고, 불확정성이 지배하는 양자역학에서는 사태의 진행에 따라 수시로 설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설정에는 글쓰기에서도 중요하고, 길거리 싸움에서도 중요하고,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과 큰 싸움에서도 중요하다.
싸움꾼 시라소니가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에 의해 반 죽음이 될 정도로 린치를 당한 사건은 잘 알려져 있다.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별명으로도 불려진 시라소니는 늘 혼자 다니고 뛰어난 싸움 실력이 유명하다. 그는 조직에 몸담지 않고 혼자 활동하는 '낭만파 주먹'의 대명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주특기인 공중걸이 박치기로 인해 그는 만주의 수많은 주먹들을 누를 수 있었다. 해방 후 그의 명성은 남한의 거리에서도 여전했다. 당시 남한의 주먹으로는 종로의 김두한이 있었고, 이천 씨름왕 출신인 동대문 사단의 이정재가 있었다. 이 둘 모두에게서 시라소니는 '형님' 대우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대접에 방심한 것은 시라소니의 '오만'(hybris)이었다. 건들거리는 꼴을 보기 싫어한 동대문 사단은 시라소니를 잡기로 모의를 했다. 그것도 모르고 평소처럼 동대문 사단으로 간 시라소니가 말했다.
"뎡재야, 돈 좀 내놔라. 내레 쓸 데는 많은데 호주머니가 먼지만 날리고 있어." 이 정재 역시 주먹들의 오야붕인데,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심사가 편하겠는가? 시라소니가 자신의 싸움 실력을 믿고 안하무인 격으로 논게 그의 큰 실책이다. 그를 노린 이정재의 부하들이 좁은 사무실 공간에 사시미 칼과 자전거 체인, 야구 방망이들을 들고서 집단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날랜 시라소니가 4-50평 되는 사무실의 책상 위로 훨훨 날아디니면서 발차기와 헤딩으로 치고 박고 했다. 하지만 사무실 공간이 넓어도 20여명이나 되는 주먹들이 각자 손에 무기를 들고 공격하는 것을 계속 막아낼 수는 없다. 더구나 평지도 아니고 사무실 집기들이 곳곳에 널린 곳에서 실수가 없을 수 없다. 그가 순간적으로 발을 헛디뎌 비틀 거릴 때 어깨 죽지로 야구방망이가 찍히고, 이어서 사시미 칼이 등짝을 파고드는 것이다. 그 다음 이야기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시라소니는 초죽음이 된 상태에서 병원으로 실려 갔다. 하지만 나중의 보복을 두려워 한 이정재 사단의 칼잡이 이석재가 병원까지 잠입해서 시라소니의 아킬레스 건까지 잘라 버렸다. 더 이상 재기를 못하게 완전히 절단 낸 것이다.
사실 이 싸움은 초기 설정부터 잘못되었다. 상대는 각종 무기들을 들고 집단으로 공격을 가해왔다. 이 정도는 워낙 길거리 싸움에 능한 시라소니가 겁을 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좁은 공간, 집책상과 의자 그리고 집기들이 가득한 사무실에서는 다르다. 좌우 사방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포지션 설정에서 시라소니는 지는 게임을 할 수 밖에 없고, 결국 만신창이가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시라소니의 '오만'도 큰 책임이 있다.
일본에서 활약한 무도인 최영의는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였다. 그는 "무술은 실전이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직접 타격과 실전 대련을 중시하는 극진 가라데를 창시했다. 그는 치바현의 기요즈미 산(淸澄山)에 들어가 1년 반 동안 문명과 단절된 채 폭포 수행, 바위 치기 등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고행 수련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산 후 유명한 무도장들을 찾아 다니며 시작한 '도장깨기'는 일본의 무도인들의 분노와 공포를 자극했다. 마침내 최영의와 관련된 유명한 전설인 '100인 대련'은 단순히 한 번의 싸움이 아니라, 극진회관의 가장 가혹한 승단 심사 과정으로 정착되었다. 최영의가 제창한 '100인 쿠미테'는 한 사람이 100명의 유단자 무도인들과 연속으로 겨루는 전무후무한 대전이었다. 하지만 이 대련은 좁은 무도관이 아니라 갈대숲으로 가득한 넓은 들판에서 이루어졋다. 좁은 공간이었더라면 시라소니와 마찬가지로 최영의 역시 당했을 수 있다. 하지만 넓은 공간에서 치고 빠지면서 행하는 대련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대련이 실제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실전대련을 중시한 극진 가라데의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최영의는 이후 황소와 맨주먹으로 싸워 뿔을 뽑아 버리고, 전세계의 뛰어난 무도인을 찾아 다니면서 대련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포지션 설정은 다른 분야에도 응용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그것을 논쟁적인 글쓰기에 적용을 해보자. 고등학교 철학선생이면서 대중적인 글쓰기를 많이 하고 있는 안광복 선생의 다음 글을 한 번 읽어보라. "인생 최대의 적, 자아에 휘둘리지 말라" [안광복의 주말의 철학](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6/03/07/UCT7L6NUFVAO7K22MSKVVEEZ5U/)
필자가 이글에서 스트라이샌드 효과'나 '평균의 법칙'을 언급하며, 타인의 비난이나 불필요한 논쟁에 매몰되지 말 것을 제안한 것은 얼핏 유용한 조건으로 보인다. 특히 "덜 중요한 존재가 되고 더 많은 것을 하라"는 메시지는 실질적인 성과보다 인정 욕구에 매몰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정신건강의 우선순위를 정한는 문제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기도 한다. 이것은 자기 주도적 삶의 강조: 인생을 우주라는 감독이 준 '배역'으로 비유하거나, 시련을 '시험 과제'로 전환하는 프레임은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벗어나, 자신의 반응 방식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능동적 태도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런 논지(포지션 설정)는 운명(fortuna)과 같은 거대한 로마 제국(Reich)에서 개인주의 철학자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와 연결될 수 있다. 스토아의 철학자들이 보기에 세상은 바꿀 수 없다. 대신 세상에 대한 나의 태도는 바꿀 수 있다. 일종의 '태도 전환'을 통해 운명의 위력을 피하겠다는 전략이다. 스토아학파의 아파테이아(aphateia)나, 에피큐로스 학파의 아타락시아(ataraxia)가 그것이다. 실제로 안정복 선생은 스토아 철학을 대중적으로 펼치는 라이언 홀리데이(Ryan Holiday)를 끌어들여 자신의 논지를 옹호하고 있다. 말하자면 타인이나 사회 보다는 나 개인의 입장에서 해결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구조 보다는 개인 다스리기를 중시하는 이런 논지는 개인의 처세술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논지를 좀 더 확대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로 까지 확대할 수 있다. 불교는 스토아철학과 상통하는 면이 많지만, 이 말의 지나친 강조는 불교의 유심론을 허약한 관념론으로 변질시킬 수 있다. 이에 반해 <유마경>의 '유마힐'은 적극적으로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보살행의 화신이다. 아무튼 이렇게 개인의 마음과 태도 전환만 중시한다면 사회적 부조리와 부정의,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회피, 외면하게 할 수가 있다. 실제로 스토아학파의 '개인주의'가 그랬다. 에피큐로스 같은 쾌락주의자는 보다 적극적으로 '쾌락의 정원'에서 혼자 즐기면서 세상과 등지는 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소승불교 역시 똑 같이 그랬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사회나 국가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고 했다. 그만큼 인간에게는 사회성과 정치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런데 이 중요한 면을 외면하거나 무시한 채 개인의 마음 다스리기로 포지션을 설정한다면 오히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는 잘못된 편견을 심어줄 위험도 있지 않을까? 가뜩이나 각종 미디어에 빠져 '오다쿠' 같은 삶을 살아가는 많은 청소년들에게 현실 도피의 근거를 제시해줄 수 있지 않을까? 안광복 선생의 의도가 반드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실제 선생은 철학의 대중적 실천을 통해 청소년들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 서 실천하고 있다.- 그 의도와 상관없이 '초기 설정'의 잘못으로 자신의 논지를 취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불리한 포지션 설정이다.
나는 글쓰기도 하나의 싸움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전략을 잘 짜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전략에서 '포지션 설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손자병법>에도 나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