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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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Deutsche Welle에서)
하버마스가 타계(他界)했다고 전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상진 명예교수가 <중민재단>에 빈소를 차리겠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상적 영향을 생물학적 의미의 조상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선시대나 가능할 줄 알았는데 AI 시대에도 보게 되는군요. 한국학자들의 '사대주의'는 유전자 속에 각인된 것은 아닌가라는 합리적 의심도 듭니다. 하버마스가 금세기의 뛰어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지만, 한국철학계에 미찬 하버마스의 공과는 따져봐야 할 겁니다.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2세대 학자로서 1970년대 후반부터 한국사회에 간간히 소개가 된 바 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한신대의 장일조 교수가 번역한 <기술과 전향>(<Technik und Wissenschaft als „Ideologie“>)이 처음일 것입니다.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과학과 기술이 단순히 생산력을 높이는 도구를 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음을 경고한 책이라 당대의 한국 지식인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요. 다음으로는 1980년대 후반 동국대의 홍윤기 교수가 번역한 <인식과 관심>(Erkenntnis und Interesse)이란 책입니다. 이 책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지적 전통을 이어받은 하버마스의 실증주의 비판서입니다. 독일 사회학자 대회에서 아도르노와 칼 포퍼가 벌인 '실증주의' 논쟁은 세계의 관심을 끌었었지요. 이책에서 하버마스는 지식을 구성하는 관심(Interesse)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크게 기술적 통제에 관한 '기술적 관심'과 상호 이해를 지향하는 '실천적 관심', 그리고 자기 성찰에 기반한 '해방적 관심'으로 구분합니다. 이 책은 당시 지적 굶주림이 컸던 한국의 지식층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하버마스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독일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온 한승완 박사가 하버마스의 박사학위 논문인 <Strukturwandel der Öffentlichkeit, 1962>을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라는 이름으로 번역 출간합니다. 이 책은 현대사회에서도 예민한 '공론'이나 '여론' 문제를 서구사회의 변화와 관련해 추적한 역저입니다. 당시 시끌벅적한 한국사회의 실정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책이었지요. 이책이 출간된 전후로 한국사회에서 하버마스가 본격적으로 부각됩니다.
이 시기에는 1980년대 후반 마르크스적 세계관이 붕괴된 후 지적 아노미 상태를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이미 서구에서 본격화된 포스트 모더니즘의 열풍이 한국 사회의 지적 공백기를 파고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쇠뇌를 받은 집단이나 사회 변혁에 관심 있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대안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적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했지요. 일종의 백지 항복 같은 느낌이 들어서지요. 하버마스는 바로 그런 자리에서 심리적이고 이론적인 대항마가 될 수 있다는 명분을 주었지요. 실제로 하버마스는 1994년에 이진우 교수가 번역한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 에서 니체, 하이데거, 푸코, 데리다 등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들에 맞서 '미완의 기획'으로서의 근대성(Modernity)을 옹호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처럼 이성 그 자체를 폐기하거나 해체하기보다, 이성의 '의사소통적 잠재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런 하버마스의 태도는 한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적 태만을 덮어줄 명분이나 심리적 지지대 역할도 할 수 있었지요. 그후 한국철학계에는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학자들과 국내의 학자들이 모여 <사회와 철학 연구회>를 만듭니다. 이 학회는 1980년대 만들어진 진보적인 철학 단체인 <한국철학사상 연구회> 다음으로 '철학의 사회성'을 표방한 학회인데, 이 학회를 중심으로 하버마스의 공론장과 민주주의 이론, 의사소통 이론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확산되었습니다.
그 이후 하버마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강력한 대항마로 앞세워집니다. 이런 배경으로 『의사소통 행위 이론 (1, 2권)』 (장춘익 역, 1994 / 2006)이 번역 출간됩니다. 이 책은 현대사회를 분석하는 이분법적 모델로 '시스템(System)'과 '생활세계(Lifeworld)'라는 제시합니다. 경제와 행정으로 대표되는 '시스템'이 우리의 일상적 소통 영역인 '생활세계'를 침범(생활세계의 식민화)하는 현상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의사소통적 합리성'을 제안합니다. 다음으로 서울대 사회학과의 한상진 교수가 그의 제자 박영도 교수와 함께 『사실성과 타당성』 (한상진·박영도 역, 2000) 이란 책을 역간합니다. 이 책은 1980년대 변혁 운동 이후 한국사회에서도 중요한 담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법과 민주주의' 문제를 다룬 대작입니다. 이 책은 법의 강제성(사실성)과 법적 정당성(타당성) 사이의 긴장을 '담론 윤리'를 통해 해결하려 시도하고 있는데, 그 이후 한국사회 이론가들의 입에서 빠지지 않는 '숙의(성찰적) 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이론의 모델을 구체화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위르겐 하버마스는 지난 30여년 동안 한국의 담론계를 이끌어온 수많은 학자와 운동가들의 지적 사상가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한국사회에 들어온 과정을 면밀히 고찰한다면 한국의 지성계의 지적 태만과 무비판을 엿볼 수도 있을 뿐더러, 한국사회에서 하버마스 이론의 비현실성과 부적합성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서구와 풍토가 다른 민주주의 이론이나 의사소통이론을 그저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지성계의 치명적인 병폐입니다. 하물며 그런 상태에서 상갓집 빈소까지 차리는 모습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차라리 '왜 하버마스냐'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을 갖는게 더 학자들 다운 태도가 아닐까요? 이왕 나온 김에 내가 하버마스 방문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를 덧붙이겠습니다. 하버마스는 1996년 5월 3일 서울대 문화관 중강당 「타자의 포용(Die Einbeziehung des Anderen)」이란 주제로 강연을 한 바 있습니다. 그 때 로비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국철학계의 몇몇 중진들이 했던 말이지요. "저 친구, 언챙이 아냐?" 그 말을 듣는 순간 뒷머리를 쇠망치로 맞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선생들 말에 끼어들지 못한게 두고 두고 후회가 되더군요. 사상과 철학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외모로 평가하는 한국철학자들의 수준을 더이상 무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수준에서 '사대'가 부활하는 것일까요? 아무튼 돌아가신 위르겐 하버마스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