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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삼숙이출(三宿而出)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09-08 16:56:02
  • 수정 2026-09-08 16:58:34

 

맹자의 <양헤왕> 편에는 맹자가 제선왕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제선왕은 제사에 희생될 소가 두려워 떠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양으로 바꾸라고 지시한 적이 있다. 맹자는 이를 통해 그에게 측은지심이 살아 있다고 보았지만, 사실 왕은 재물과 여색을 밝히고 패도정치에 더 관심이 많은 자였다. 결국 맹자는 그에게 실망을 하고 제나라를 떠나는데 문제는 국경선 근처에서 3일을 유숙하는 데서 일어난다. 유명한 삼숙이출, 三宿而出 이야기다. 평소 불의와 타협하지 않던 맹자의 과단성과 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모습에 제자가 의문을 품자, 맹자는 "내가 어찌 제선왕을 버리고 싶어 버리겠는가? 왕이 혹시라도 마음을 고쳐 먹고 나를 다시 부르기를 바랐다"라며 솔직한 심정을 고백한다. 이를 보고 제나라의 윤사(尹士)가 통렬하게 비판한다. 


"왕이 탕, 무(湯, 武) 같은 성군이 될 수 없음을 모르고 왔다면 이것은 지혜가 밝지 못한 것(不明)이요, 불가능함을 알고서 왔다면 이것은 은택을 요구한 것(干澤))이다. 천리 먼 길을 왕을 만나보러 왔다가 뜻이 맞지 않으므로 떠나가되, 사흘을 유숙한 뒤에 주 땅을 출발하니, 이 어찌 이리도 오랫동안 체류한단 말인가? 나는 이것을 기뻐하지 않노라"


앞서 적었듯, 맹자는 혹시라도 왕이 마음을 고쳐 먹지 않을까 하고 고대했음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윤서의 비판은 논리학 교과서에 나올 법한 딜레마(Dillema)로 맹자를 궁지에 몰아 넣은 것이다. 이 논법에 따르면 맹자는 제선왕이 탕무가 될 수 없음을 모르고 제나라에 왔다면 어리석은 것이고, 알고서 왔다고 한다면 녹봉이나 권력을 바란 것이 된다. 알거나 모르거나 어떤 경우든 비난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이다. 게다가 3일이나 국경에 머물면서 미적거렸으니 윤사의 비판을 경박하다고만은 할 수 없지 않을까? 


그리스의 소피스트들도 좋아했던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논리학 교과서는 '양뿔을 잡으라'고 가르친다. 즉 不明한 것이 아니요, 干澤을 바란 것도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맹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 “나는 제선왕이 탕·무와 같은 성군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왕에게서 녹봉이나 은택을 얻으려고 찾아간 것도 아니다.” 


여기서 다시금 맹자의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신이 사흘 동안 떠나지 못한 이유를 숨기지 않았다. “왕이 혹시라도 마음을 고쳐 먹고 나를 부르기를 바랐다.” 맹자는 제선왕이 이미 성군이 되었다고 믿은 것이 아니라, 성군이 될 가능성이 아직 그에게 남아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것은 윤사가 만들어놓은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 들어 있지 않다. 왕이 탕·무가 될 수 있는지를 ‘알았다/몰랐다’로 나누고, 왕을 찾아간 동기를 ‘어리석음/은택을 구함’으로 나누는 것은 인간의 마음을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 아닐까? 정치에 참여하는 이유가 반드시 무지 아니면 사욕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현재 모습에 실망하면서도 그의 변화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맹자가 택한 제3의 길이었다.


어쩌면 이 점에서 「양혜왕」 편의 삼숙이출은 맹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흔히 맹자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사람으로 기억한다. 왕이 인의를 버리고 패도를 추구한다면 과감하게 떠나고, 부귀와 권세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정작 그가 제나라를 떠나는 순간에는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한다. 사흘이나 국경에 머물렀다. 제자의 눈에는 의아한 일이었고, 윤사에게는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망설임 때문에 맹자는 오히려 우리에게 가까운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는 제선왕에게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왕이 언젠가 자신의 말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바꾸어 다시 부르기를 기다렸다. 여기에는 정치가로서의 계산이 있었을 수 있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 그리고 그 가능성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이다.


윤사의 논리는 바로 이 복잡한 마음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맹자의 선택을 두 갈래로 갈라놓는다. 몰랐다면 어리석고, 알았다면 은택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에는 논리적 딜레마가 포착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우리는 상대가 지금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실패할 가능성을 알면서도 다시 한번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은 무지와 사욕의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윤사의 비판은 틀린 것일까? 반드시 그렇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오히려 윤사는 맹자가 스스로 감추고 싶었을지도 모르는 약점을 정확하게 찔렀다. 맹자는 정말로 제선왕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했다.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군주를 만나고 싶었고, 그 가능성을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삼숙이출은 맹자의 과단성이 무너진 순간이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이 장면에서 맹자의 위대함을 찾고 싶다. 위대한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이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바라는지를 끝내 직시할 수 있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맹자는 제선왕에게 실망했고 제나라를 떠났지만, 자신이 왕의 변화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를 숨기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정치와 인간에 대한 맹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맹자는 인간에게 선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제선왕이 희생될 소를 보고 차마 불쌍해서 양으로 바꾸게 한 작은 마음에서 그는 왕의 측은지심을 보았다. 그러나 현실의 왕은 그 마음을 정치 전체로 확장하지 못했다. 맹자는 그것을 보면서 실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에게서 선한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 한 마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사이에는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 맹자가 하려 했던 일은 바로 그 작은 마음을 더 큰 정치적 마음으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제선왕이 당장 탕·무가 아니더라도, 측은지심의 씨앗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니 삼숙이출은 어쩌면 맹자의 실패담이면서 동시에 맹자의 철학이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는 왕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왕에게 굴복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그는 왕의 현재를 인정하면서도 왕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


윤사는 현재만 보았던 반면, 맹자는 현재와 함께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긴장이 바로 이 짧은 일화를 흥미롭게 만든 것이다. 논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윤사의 말은 매끈하다. 양자택일을 피할 수 없게 만들고, 어느 쪽을 선택해도 상대를 공격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논리학의 딜레마처럼 그렇게 깔끔하게 둘로 나뉘지 않는다. 모른다고 해서 어리석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를 바란다고 해서 반드시 은택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 우리는 상대가 변할 가능성을 믿기 때문에 떠나지 못한다. 때로는 이미 실망했으면서도 다시 한번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가장 비논리적인 인간이 되는지도 모른다. 맹자가 국경에서 사흘을 머문 까닭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성인은 어쩌면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인간에 대한 기대까지는 버리지 않는 사람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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