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한국 사회에 커다란 센세이션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00:01]. 수십 년 만에 찾아온 국가적 경사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지만, 일각에서는 냉정한 비판의 목소리도 흘러나왔다 [00:14]. 대한민국이 과연 세계적인 문학상을 받을 만큼의 성숙한 토양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다.
한국은 국민 독서량, 문해력, 그리고 정신건강 지표 등에서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02:14]. 문학 시장의 자생력마저 부족한 이러한 현실에서, 국내 작가 집단이 세계 최고 권위의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는 비판은 일리가 있다 [00:14, 02:14].
물론 한강 작가 개인의 역량만을 놓고 본다면, 국내의 다른 작가들에 비해 수상 자격은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00:36]. 소설가인 부친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조기 교육을 받았으며, 삼국지 번역이나 방만한 대하소설에 치중해 온 기존 원로 작가층과 달리 오롯이 ‘순수 문학’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00:50, 01:09, 01:20]. 한국 작가가 노벨상을 받을 차례였다면, 그녀가 상대적으로 가장 적합한 후보였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01:32].
그러나 시선을 국내가 아닌 세계 무대로 돌려보면, 노벨상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내재된 본질을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노벨상은 쇠퇴해 가는 유럽 중심주의가 세계를 향해 행사하려는 마지막 영향력의 수단(Key)과 같다 [02:39]. 그들은 아시아나 제3세계 국가들에 차례로 상을 배분함으로써 그들의 환심을 사려 한다 [02:50].
여기서 작용하는 핵심 기준이 바로 유럽식 ‘정치적 올바름(PC, Political Correctness)’과 진보적 가치다 [03:02]. 유럽의 지식인 사회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즉 유럽식 문화 가치를 이식하는 데 기여하거나 그들의 정서에 부합하는 인물들을 지지하고 상을 수여한다 [03:02, 05:26].
이러한 맥락에서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우크라이나의 정치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처한 상황과 묘하게 닮아 있다 [03:28]. 현재 유럽 사회와 정상들은 젤렌스키를 매우 아끼고 소중하게 여긴다 [03:41]. 그들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젤렌스키에게 노벨 평화상이든, 자유민주상이든 어떤 명예로운 상이라도 안겨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태다 [04:23, 04:33, 04:54]. 만약 그가 조금 더 서둘러 평화 협정을 이끌어냈다면 이미 노벨 평화상은 그의 몫이었을 것이다 [04:08]. 유럽 노벨상 위원회는 그에게 상을 주고 싶어 하지만 마땅한 명분이나 타이밍을 찾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04:54].
결국 '문학적 토양이 척박한 나라에서 나온 노벨 문학상'과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의 정치인이 받는 노벨 평화상(혹은 유럽이 주고 싶어 하는 상)'은 동격이다 [02:27, 03:28]. 두 사례 모두 대상자 개인의 성취를 넘어, 유럽 사회가 자신들의 이념과 가치관을 투영해 '이뻐하는 인물'에게 영예를 부여하려는 정치적·문화적 메커니즘이 작동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03:02, 05:36].
한강의 수상에 무조건적으로 취하기보다, 이 상이 지닌 유럽 중심의 정치공학적 이면을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02:39].
整理 : 제미니Gemini
https://www.youtube.com/watch?v=KtRRz8iqPeQ&t=34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