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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된 불가리아 총선에 등장한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 시메온 2세와 그의 정당 "시메온 2세 국민운동연합"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6-16 23:03:28

불가리아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역사에 있어서도 이런 인물은 정말 찾기 힘들 것이다. 그는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였으며 현행 불가리아 공화국에서 총리도 역임하여 불가리아를 통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아직까지도 정정하게 살아있다. 역시 장수의 나라 불가리아라 그런지 그는 정계를 떠났어도 여전히 입지전적의 인물로 그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다. 세계 역사상 차르 칭호를 사용한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칸반도 국가들의 전 군주들 중 현재까지 살아있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역사상 유일무이한 혁명으로 인해 퇴위한 군주가 공화제로 바뀐 조국의 정부수반이 된 그 또한 유럽에서 유일무이한 인물이기도 하다. 물론 군주가 아닌 왕족이 공화정의 정부수반이 된 사례로 본다면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왕자인 모하마드 다우드 칸과 라오스 왕국의 왕자 쑤파누웡이 1970년대 왕정이 붕괴된 이후에 공산당 1당 사회주의 공화제가 수립된 라오스와 공화국이 된 아프가니스탄의 초대 국가주석, 혹은 대통령이 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차르)이자 불가리아 공화국의 제48대 총리를 지낸 시메온 삭스코부르크고츠키(시메온 2세), 출처 : Liberal International


다만 다우드 칸은 대통령이 된지 5년 뒤인 1978년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정권이 전복되어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 세력들에 의해 피살되었고 암매장까지 당하는 등 그 끝이 좋지 못했다. 쑤파누웡의 경우는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 서자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공화제를 받아들여 전제 정치를 버리고 주석이 된 케이스이다. 국가수반이나 정부 수반급이 아닌 정치인으로써 운신의 폭을 넓히면서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바이에른 기독교 사회 연합당 소속으로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사례가 있지만 현존했었던 왕이나 황제가 현행 공화국 국가 수반이자 대통령이 된 경우는 없었다. 부왕인 보리스 3세가 유태인들을 잡아 들이라는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한 뒤 의문사를 당하고, 시메온 2세는 1943년 6세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뒤를 승계하여 불가리아의 차르로 즉위했다. 당시 즉위를 기념하여 어린 모습이 담긴 사진이 불가리아의 화폐인 레바 지폐의 도안으로도 쓰이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인플레가 심화되었을 때 나타난 단위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메온은 재위 3년째인 1946년에 공산혁명이 발생하여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건국되자 그는 차르의 제위에서 축출되었다.


우선 차르의 나이가 어리다보니 왕국의 실권은 섭정이었던 숙부 키릴 프레슬라프(Кирил Преслав) 왕자, 보그단 필로프(Богдан Филов) 전 수상, 니콜라 미호프(Никола Михов) 장군 등 섭정단에게 있었는데 1944년부터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에 의해 공산화가 진행되면서 키릴 프레슬라프 왕자를 포함한 섭정단은 국회의원 67명과 함께 숙청 대상에 올라 처형당했다. 특히 키릴 왕자는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나 소련 등 연합국 측과 접선하려고 했었지만 소련은 결국 디미트로프의 손을 들어주었고 키릴 왕자와 섭정단은 반동으로 몰려 참형을 면치 못했다. 한편 당시 즉위하고 있었음에도 나이가 어렸기에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시메온 2세는 모후 조반나와 함께 망명이 허락되었다. 시메온 2세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망명했다. 시메온 2세의 모후 조반나는 이탈리아 왕국의 공주로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셋째 딸로 그의 아버지인 에마누엘레 3세가 먼저 망명해있던 알렉산드리아로 간 것인데 그는 외할아버지와 어머니의 손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된다. 


이어서 1951년 스페인으로 망명한 시메온은 1962년 마르가리타와 결혼해 4남 1녀를 두었다. 스페인 생활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학교에 들어갔으며 이어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스페인으로 돌아와 경영 컨설턴트의 직업을 갖고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평범한 사업가로 성공가도를 달리던 중, 1990년에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이 무너지고 불가리아가 민주화된지 6년 뒤인 1996년에 불가리아 젤류 젤레프(Желю Желев) 대통령은 공산화 직후 국외로 추방된 시메온 전 국왕 등 불가리아의 옛 왕가 사람들에게 내려졌던 입국 금지 조치를 해제하고, 불가리아에 귀국을 허용하게 된다. 그래서 시메온 본인도 귀국 이후, 자신의 귀국을 허용해 주었던 젤레프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였다고 전해 진다. 젤레프 전 대통령이 퇴임 후인 2015년 노환으로 사망했을 때도 적극적으로 애도를 표하고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불가리아의 민주 공화국 정권은 그의 귀국을 허용하면서 과거 군주제의 상징인 시메온에 정치적인 관심이 쏠리는 것을 방지하려 시도했으나, 망명한지 50년 만에 귀국한 차르에 모든 불가리아 국민들은 환호했다고 한다. 


귀환 이전에도 여러 차례 불가리아에 방문하여 각 계층의 인사들과 친분을 쌓아온 시메온은 결국 공화제의 정치에 뛰어들게 된다. 시메온은 지난 10여 년 간 집권 정당이 부정부패와 불가리아 하위 계층의 빈곤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발로 좌익과 우익 양쪽의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시 그는 총선에서 승리할 경우 800일 이내에 빈곤에 빠진 국가 경제를 회생시키겠다고 공약했다. 시메온은 한 인터뷰에서 "공화제보다 군주제가 더 탄력이 있으며 강력한 국민적 합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어, 그가 집권할 경우 불가리아가 55년만에 군주제로 복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함께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시메온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했으며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를 키워 나가야 할 것"이라며 군주제로 복귀 의사는 전혀 없다고 밝히면서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그가 출마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갤럽 등 7개 여론조사 기관이 실시한 출구 조사의 결과 시메온이 조직한 '민족운동 시메온'이 40~43%를 득표하여 이반 코스토프 총리가 이끄는 중도우파의 집권당인 민주세력동맹의 22~30%, 좌파인 사회당이 이끄는 불가리아 연합의 14~20%을 크게 앞질렀다. 


결국 그는 출구조사에 이어 실시된 2001년 총선에서 시메온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하고 당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민주세력동맹 등 다른 정당과 연립정권을 꾸려 불가리아를 이끌어 나가려고 했다. 그는 임기 동안에 외교 활동에서 성과를 이끌어낸다. 2004년에 불가리아는 나토에 가입했으며 2005년에는 EU 가입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리고 불가리아는 2007년에 EU 가입이 확정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지만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등에서 각종 문제가 생겼고 대외무역수지 적자로 비판을 받았으며 부정부패를 척결하지 못했다. 그는 4년의 임기를 마친 이후 국민운동연합은 차르의 귀환이라는 기대치가 너무 높았었기 때문에 기대만큼 불가리아 국민들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래서 2005년 총선에는 연립 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다시 여당 자리를 내어 주어야 했으며, 2009년 총선에는 아예 원외 정당이 되어 의회에서 사라지다시피 했다. 시메온 본인도 당수 자리를 사임하면서 이후 뚜렷한 정치활동을 하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그의 영향력은 강하다.


망명 시절에는 꾸준히 불가리아의 차르라는 서명을 남겼지만 귀국 후에 왕정 복고에 관해서는 뚜렷한 입장을 보이지 않았기에 혹시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그래서 이전의 차르였다는 경력을 정치 활동에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인기를 끌긴 했지만 결국 다음 총선에서 패배하였기 때문에 발언할 기회 자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예측은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뿐이고 실제 불가리아에서 국민들은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높은 편이다. 따라서 불가리아에서는 시메온을 명목상 차르라는 지위를 허가하고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는 대신 불가리아 역사적 상징으로 보존하고 있다. 장남 카르담이 2008년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져 2015년 먼저 사망하였기에 시메온 2세가 사망한다면 카르담의 장남이자 시메온 2세의 장손인 보리스가 명목상의 차르 '보리스 4세' 가 될 예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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