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자연재해, 상상을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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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죽음》
― 행복의 층위와 존재의 방향성에 대하여
저는 죽음을 바라볼 때에도 행복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의미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행복이라고 부르는지는 자신이 어떤 층위에서 삶을 바라보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낮은 층위에서는 생존을 위한 행복이 있을 것입니다.
먹고, 쉬고, 안전하게 살아남으며 자신의 터전을 지키는 것 자체가 중요한 행복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소유와 자원의 확보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다음에는 욕망으로서의 행복이 나타납니다.
더 많이 가지고 싶고, 더 편안하고 싶으며, 더 큰 쾌락과 인정과 우월감을 얻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욕망 자체를 모두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욕망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할 때에는 행복을 추구하는 행위가 오히려 다른 존재의 삶과 기회를 침해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면 이성적 행복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것은 단순히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 행복이 아니라, 나와 타인의 관계와 환경을 함께 고려하면서 합당한 범위 안에서 누리는 행복에 가깝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등가성입니다.
제가 얻는 행복이 다른 존재의 과도한 희생 위에 세워지고 있다면, 그것을 온전히 합당한 행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성은 욕망을 없애기보다는 욕망이 미치는 영향과 범위를 살피고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보다 더 높은 층위에는 가치로운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만족을 넘어 다른 존재에게도 이로운 방향을 선택하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크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지속하는 행복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행복의 수식 자체가 달라집니다.
얼마나 많이 얻었는가에서
무엇을 남겼는가로,
얼마나 편안했는가에서
무엇을 지켜냈는가로,
얼마나 사랑받았는가에서
얼마나 사랑하고 이롭게 했는가로 질문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너머에 또 다른 층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을 잠정적으로 숙명적 행복이라고 표현해 보고 싶습니다.
숙명적 행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와는 조금 다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주어진 존재와 기회,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준 수많은 존재와 역사를 인식하면서 감사와 책임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삶과 죽음의 관계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이 단순히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사건이라면 삶은 소유를 축적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을 수많은 존재로부터 이어받은 기회의 시간으로 바라본다면, 죽음은 소유를 얼마나 많이 가져가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다시 세상에 돌려놓았는가를 묻는 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행복한 죽음은 반드시 오래 살거나 편안하게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는 죽음에 가깝습니다.
나는 무엇을 받았는가.
그것을 어떻게 사용했는가.
누구에게 무엇을 돌려주었는가.
그리고 마지막까지 어떤 방향을 지켰는가.
생존과 욕망의 단계에서는 나의 행복이 중심이 됩니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합당한 행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상의 단계에서는 가치로운 행복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존재의 본질을 바라보는 단계에서는 감사와 책임이 결합된 숙명적 행복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단순히 한 줄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계단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층위와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사람이 생존하면서 동시에 사랑하고, 욕망하면서도 책임을 지며,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현실적 한계를 감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결국 행복을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받은 수많은 기회를 얼마나 성실하게 이해하고, 그 기회를 얼마나 합당하게 사용했으며,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어떤 의미가 다른 존재에게 이어질 수 있는지를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성을 최종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경계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는 《행복한 죽음》은 죽음을 찬미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생각함으로써,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마지막에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문장이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이 가진 삶보다,
많이 받은 것을 잊지 않은 삶.
많이 누린 삶보다,
받은 기회를 다시 이은 삶.
그리고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방향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삶.
저는 그것을 하나의 ‘행복한 죽음’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