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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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게스트 하우스에 가서 체크아웃하고 배낭을 알리멘트로 옮겼다. 세탁소에 맡긴 빨래와 침낭도 찾아왔다. 침낭은 깨끗해졌지만, 벤젠 냄새가 심했다. 아스피린을 먹고 잠시 잊었던 두통이 재발하는 듯했다. 침낭을 침대에 펼쳐 놓고 보니 과연 홀쭉해져 있었다. 햇살 좋은 날 빨랫줄에 널어놓고 손으로 비비면서 두드리면 어느 정도 복원이 된다던 몽사의 말이 생각났다.
벤젠 냄새라도 빼야겠다 싶어서 침낭을 대충 말아 안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하늘은 흐리고 바람도 없었지만, 안개도 없었다. 침낭을 빨랫줄에 널어놓고 손바닥으로 두드려서 오리털 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옥상의 유일한 방이며, 전에 내가 며칠 묵었던 방에서 얼굴을 내민 그 사람은 승려처럼 삭발한 머리였기 때문에 성별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동양인이었다.
그는 잠깐 쳐다보다 문을 닫았지만 내 작업이 그를 방해한다 싶어서 다시 둘둘 말아 안고 방으로 내려왔다. 침대 위에 앉아 무릎 위에 펼친 침낭을 두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어느 정도 복원되었구나 싶어서 작업을 그치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좀 전의 그 삭발이 카운터 옆의 메모판 앞에 서 있었다.
삭발은 바쿠 차림이었다. 티베트 불교의 여승 ‘아니’처럼 보였다. 눈길이 서로 마주쳤을 때 삭발이 ‘저 모르시겠어요?’라고 우리나라 말을 했다. 어디서 보기는 했다 싶은 데 기억이 안 났다.
“글쎄요, 실례지만 누구신지요.”라고 했더니 피식 웃었다.
“됐어요. 기억 안 나시면 할 수 없죠.”
“그런데 ……. 저 아시나요?”
“글쎄요, 실례했습니다. 어서 볼일 보셔요.”
원래는 식당에서 뭐 좀 먹고 나가려고 했던 것인데 ‘어서 볼일 보셔요’ 하는 바람에 머쓱해져서 밖에 볼 일이 있다는 듯이 문을 밀고 나왔다. 누굴까, 누굴까, 누굴까 하면서 세 걸음쯤 걸었을 때 불현듯 생각이 났다.
‘동작 그만!’이었다. 콜카타의 마리아 호텔에서 갑자기 사라졌던 그 여자였다. 그 여자가 옥상의 내가 썼던 방에서 삭발한 얼굴을 내밀다니! 참 묘한 인연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계속 기억이 안 나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작정했다. 웃음이 나왔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광장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관광객들 사이로 어린 거지들이 따라다니고, 개들이 벤치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그중 한 놈은 감자칩을 먹는 어린애의 발치에 얌전히 앉아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어젯밤 내 목을 물어뜯을 듯이 덤벼들던 개들 중에 저 개도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이 안 되었다.
광장에서 한 계단 내려선 골목 끝에 키 큰 랄리구라스 나무들이 서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지붕을 가득 덮고 있는 건물이 미셸네 학교였다. 마당 가장자리에 어젯밤에는 몰랐던 작은 화단이 보였다. 하오의 햇살 아래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학교 건물은 서부 활극에 나오는 시골 교회 같았다. 건물 동쪽 벽에 인부들이 흰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가족사진
비탈길에서 학교 마당으로 내려섰다. 미셸은 거기 있었다. 인부들이 페인트칠하는 벽을 다른 두 사람과 함께 턱을 쳐들고 올려다보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무슨 모임에서 금방 돌아온 듯한 정장 차림이었다.
“김!”
미셸이 반갑게 웃었다. 면도했는지 얼굴이 말쑥했다. 미셸이 함께 있던 두 사람을 소개했다. 젊은 여자는 친정에 갔다던 미셸의 아내 강가, 눈초리에 의심과 짜증을 달고 있었다. 체구가 큰 서양 남자는 미셸의 형 요한. 형제라지만 둘이 너무 달랐다. 미셸이 사근사근하고 순진해 보인다면 요한은 거칠고 야비해 보였다. 배다른 형제일지도 몰랐다.
요한은 나를 멀거니 세워 둔 채로 미셸과 불어로 문답을 나누었다. 형사가 피의자를 심문하는 태도였다. 잠시 후 나에게도 그런 태도로 물었다. 빠른 영어였다.
“나갈랜드에 가 봤냐? 반란군들은 꼭 너같이 생겼어. 노란 얼굴에 찢어진 눈.”
“.......”
잘못 들었나? 하지만 제대로 들은 게 확실했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어서 말이 안 나왔다. 미셸이 끼어들었다.
“반란군 얘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어, 형.”
미셸의 형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미셸의 아내 강가도 슬그머니 뒤채로 돌아갔다. 두 사람 다 나를 배격하는 게 분명했다.
“괜히 왔구먼. 나는 간다. 잘 있어.”
“형을 이해해 줘, 김. 형은 나갈랜드 내전 때문에 엄청난 재산 피해를 봐서 저래.”
“......”
미셸은 내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흔들었다.
“오늘 벌써 네 알째 먹었어. 봐, 빈 병이지.”
미셸은 빈 약병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이라도 얘기 좀 더 하고 가.”
미셸은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어떤 문을 열었다. 널찍하지만 우중충한 사무실 같은 방인데 바닥은 마루였다. 크고 오래된 나무 책상과 헌책들이 무질서하게 꽂혀 있는 책장이 먼저 보였다. 미셸은 내게 팔걸이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책상에 딸린 의자에 앉았다.
“네 아내는 친정에 갔다더니?”
“나도 깜짝 놀랐어. 들어와 보니 자고 있더군. 네가 그냥 가버린 건 정말 다행이었어. 그런데 왜 갑자기 돌아갔던 거지?”
“하얀 고양이가 튀어나온 게 불길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광장에 올라가서는 미친 듯 짖어대는 개 떼거리를 만났어. 하마터면 당할뻔했지.”
바지를 붙들고 혁대를 휘둘렀던 상황을 실연으로 보여 줬더니 미셸은 배를 잡고 웃었다.
“웃지 마, 난 심각했어.”
“미안, 미안. 혁대를 휘두른 건 참 잘한 거야. 대단해.”
책상 위에 세워 놓은 크고 작은 사진틀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흑백사진들이었다. 미셸의 부모 사진. 조부모 사진, 외가의 조부모 사진, 어린 시절의 미셸과 요한, 그리고 누구인지 짐작이 안 되는 소년이 미소 짓고 있는 독사진이 있었다. 다른 모든 사진의 인물들도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독사진의 소년이 짓는 미소는 자연스럽고 천진해 보였다.
“미셸, 이 사진은 누구냐. 설마 너는 아니겠지?”
“걔는 내 동생이야. 오래전에 죽었어.”
“이렇게 환하게 웃었던 소년이 죽었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언제 죽었는데?”
“결혼 하고 잘 살다가 죽었지. 동생의 가족사진도 있어. 보고 싶냐?”
“그래.”
“강가가 싫어해서 치워 놓았어.”
책상 서랍에서 꺼낸 사진틀에는 단란해 보이는 일가족이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제수가 정말 미인이구나. 지금은 어디서 사냐?”
“미국.”
미셸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창 너머로 미셸의 형이 인부들의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미셸의 아내 강가는 그 옆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미셸은 반대편 창문을 마저 연 뒤에 양말 짬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미셸은 담배 연기를 창밖으로 뿜었다.
“식구들이 담배를 싫어하는군.”
“특히 형이 싫어하지. 형하고 교회 가고 오는 동안 담배 참느라고 무척 힘들었어.”
담배를 한 모금 빨고서 입에서 뗄 때마다 쪽 소리를 내는 미셸을 바라보자니 어젯밤 스바나의 술집 안에서 들려왔던 쪽 소리가 생각났다.
“첫 아내와 헤어진 건 언제냐?”
“20년도 넘었다.”
“그럼, 지금 아내와는 언제 만난 거냐?”
“4년 전. 말하자면 길어. 지금 아내는 네 번째다.”
“세 번도 아니고 네 번째?”
“그래 네 번째……. 두 번째는 티베트 여자였는데 콜카타에서 3년 살고 헤어졌어. 세 번째는 독일 여자였어. 지금 아내를 만날 때까지 여기서 함께 살았지.”
미셸은 커다란 콧구멍으로 두 줄기 굵은 담배 연기를 빠르게 몇 번 뿜고서 꽁초를 창밖 축대 위로 던졌다. 그리고는, 동생네 가족사진이라고 했던 사진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말했다.
“좀 전에 한 말은 사실이 아니야. 이건 나야. 그리고 내 가족이야.”
미셸은 이어 소년의 독사진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소년도 죽은 동생이 아니라 나야. 믿어져? 얘가 나라는 게?”
우습다는 건지, 화난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웃음 끝에 미셸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꽤 긴 사연인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미셸의 첫 아내는 프랑스 여자였다. 미셸과 이혼하고 미국에 가서 미국 시민과 재혼했다. 아들은 3년 전까지는 상선의 선원이었다. 작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 왔다. 딸은 어머니와 미국에서 살면서 대학에 다녔는데 작년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헤어진 지 너무 오래됐어. 이제는 이 사진 속에서 만나야 서로를 알아볼 거야.”
“......”
나는 실리콜라 강변의 산장에서 펨 도마에게 말했던 내 거짓말 사연만큼이나 우울한 미셸의 얘기가 길어지는 것이 싫었다. 듣다 보면 나도 내 거짓 사연을 미셸에게 늘어놓게 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나는 그만 가 보겠다고 말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셸은 형이 퇴근하면 같이 스바나 네 식당에 가서 꼬도 락시를 마시자고 붙들었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있고, 다음날 일찍 시킴으로 떠나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단호하게 돌아섰다.
마당으로 나왔다. 미셸이 따라 나왔다. 햇빛이 눈 부셨다. 작별하기 직전에 미셸이 어느 호텔에 머무느냐고 물었다. 숙소 이름을 말하면 찾아올 것 같아서 그냥 게스트 하우스라고만 대답했다. 미셸은 더 이상 캐묻지 않고, 시킴에서 돌아오면 바로 자기한테 오라고 했다. 내 방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고 하면서 무료라고 덧붙였다. <</span>계속>
#장편소설_칸첸중가_025_조우/가족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