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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이 '선덕여왕'에 빠진 이유: 현대 철학의 거장이 던지는 5가지 반전 통찰
  • 타라고
  • 등록 2026-04-10 07:41:20
1. 도입부: 인사동 한정식집에서 마주한 'K선생'의 민낯

비평가 조영일의 회고 속 가라타니 고진(이하 K선생)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근엄한 상아탑의 철학자와는 거리가 멉니다. 2010년 가을, '국가주의를 넘어서'라는 육중한 주제의 포럼이 끝난 뒤 인사동의 한 정갈한 한정식집에서 마주한 그는, 빡빡한 학술 일정의 피로를 한국의 동동주와 지지미로 달래는 소탈한 여행자였습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연구자들과 격의 없이 섞여 앉은 그가 "밤마다 한국 드라마를 본다"고 고백했을 때, 좌중에는 기분 좋은 전율이 흘렀습니다. 현대 철학의 최전선에서 자본과 국가의 거대 구조를 해부하던 거장이 어째서 새벽 4시까지 <선덕여왕>에 매료되었던 것일까요? 지식 큐레이터의 시선으로, 그날의 술자리에서 피어난 K선생의 도발적이고도 세련된 통찰들을 재구성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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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akeaway 1] 사극의 이면에서 읽어낸 '세계사의 구조'

K선생에게 한국 드라마는 단순한 여가가 아니라, 텍스트로만 접했던 '세계사의 구조'를 구체적인 형상으로 확인하는 지적 실험실이었습니다. 그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몽>, <선덕여왕>, <제5공화국> 등을 섭렵하며 한반도의 역사를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여기서 거장의 시선은 일반 시청자와는 전혀 다른 지점을 포착합니다. 그는 특히 '내시(환관)'의 존재에 주목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당시 한국이 어떠했는지 어떤 형상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한국이 중국 문화를 얼마나 잘 내면화시켰는지 '내시' 같은 존재를 통해 단적으로 나타납니다. 일본에는 환관이 존재하지 않지요. 여하튼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세계사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이래저래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가 강조한 환관의 유무는 단순한 문화적 차이를 넘어 정치 구조의 본질을 관통합니다. 환관을 통해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를 완성한 한국·중국과 달리, 그것이 부재했던 일본은 서구와 유사한 '봉건제'로 나아갔다는 분석입니다. 또한 그는 드라마 <영웅시대>를 통해 한국 재벌(삼성과 현대)의 형성사를 이해했으며, 이는 곧 한국 사회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핵심 열쇠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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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Takeaway 2] "소설은 끝났다, 그러나 '문학'은 이제부터다"

K선생이 던진 가장 도발적인 장갑은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제입니다. 그는 오늘날의 소설이 고도의 기술(skill)로 전락했다고 비판합니다. 농경 사회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제는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는 선언입니다.

하지만 이는 문학의 멸절을 뜻하는 비관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문학'의 범주를 장르의 틀에서 해방시키는 역설적인 논리를 펼칩니다.

• 근대문학(소설): 작법의 숙련도만 남은 '기술적 복제'의 영역. 더 이상 세계의 구조를 바꿀 힘이 없음.

• 새로운 문학적 작업: 칸트와 맑스를 비판적으로 독해하며 세계의 '구조'를 재사유하는 행위.

그는 소설 대신 칸트와 맑스를 읽는 자신의 철학적 작업을 '진정한 의미의 문학적 행위'라고 주장합니다. 세계의 모순을 응시하고 그 구조적 매듭을 풀고자 하는 비판적 사유야말로, 현대의 소설가들이 포기해버린 문학 본연의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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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akeaway 3] 삼성 불매운동이 마주한 '보로메오의 매듭'

한국의 삼성 불매운동에 대해 K선생은 냉철한 철학적 진단을 내놓습니다. 그는 소비자 운동의 힘을 인정하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지적합니다. 그 저변에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Capital-Nation-State)'**라는 강력한 삼위일체 구조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K선생은 이를 **'보로메오의 매듭'**에 비유합니다. 어느 하나를 당기면 나머지도 함께 조여지는 구조입니다. 대중이 삼성을 공격할 때 느끼는 막연한 공포는 "삼성이 무너질 때 그 자리를 외국 기업이 차지할 것"이라는 국가주의적 불안(네이션)과 국가 이익(스테이트), 그리고 자본의 논리가 하나로 엉켜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소비자 운동이라는 '유통의 장'에서의 저항뿐만 아니라, 생산 현장에서의 '노동자 운동'이 병행되어야만 이 견고한 삼위일체의 늪을 돌파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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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akeaway 4] 평화는 힘의 균형이 아닌 '주권의 증여'에서 온다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재해석하며, K선생은 일본 헌법 9조를 향해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혁명적 시각을 제시합니다. 그에게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적의'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상태입니다.

그는 일본이 전쟁할 권리(주권)를 포기한 것을 세계를 향한 **'증여(Gift)'**로 정의합니다.

"영구평화란 국가 간의 '적의'가 해소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법 9조는 전쟁할 권리를 세계에 증여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실주의적 한계를 넘어서는 하나의 혁명입니다."

강대국들이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맞추는 것이 현실주의라면, 자신의 무력을 먼저 내놓음으로써 상대의 적의를 무력화시키는 '증여'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혁명적 행동입니다. 비록 현실 정치에서는 무력해 보일지라도, 주권이라는 국가주의의 근본 벽을 허무는 유일한 길이라는 통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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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Takeaway 5] 아시아의 '초안정성': 정체가 아닌 고도의 균형

K선생은 아시아(유교) 사회가 2,000년 동안 정체되었다는 서구 중심의 담론을 정면으로 반박합니다. 그는 진관다오의 개념을 빌려 아시아적 생산양식이 도달한 '초안정(Super-stability)' 상태에 주목합니다.

그가 분석하는 아시아적 제국은 낙후된 사회가 아니라, 국가에 의한 재분배와 통제 시스템이 너무나 정교하게 발달하여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고 원형을 복구하는 '하이-레벨(High-level)'의 평형 상태에 도달한 사회입니다. 서구인의 눈에는 이것이 정체된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은 국가가 시장과 공동체를 완전히 압도한 고도로 발달한 사회구성체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안정성'의 발견은 아시아가 서구와는 다른 독자적인 문명사적 경로를 걸어왔음을 인정하는 중요한 지적 전환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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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수유리 산길을 내려오며 되새기는 '증여'의 온도

인사동에서 시작된 대화는 자정을 넘겨 수유리 숲속의 숙소까지 이어졌습니다. 작별의 순간, K선생의 오랜 파트너이자 번역가인 조영일 비평가는 "선생님은 늘 인용을 틀리게 하시는 나쁜 습관이 있다"며 짓궂은 농담을 건넸고, 거장은 그저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습니다.

K선생 부부를 배웅하고 홀로 산길을 내려오는 길, 가로등조차 드문드문 꺼진 어두운 언덕길에서 비평가는 나직이 읊조렸습니다. "춥다. 곧 가을도 가겠구나."

계절이 바뀌는 차가운 공기 속에서 K선생이 던진 질문들은 더욱 선명해집니다. 자본, 국가, 네이션이라는 거대한 매듭 속에서,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권리를 먼저 내어주는 '증여'라는 혁명적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거장이 밤새워 탐독한 한국 사극의 파노라마처럼, 우리 시대의 역사 또한 그 '증여'의 용기에 의해 다시 쓰이길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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