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이다. 논술 교육 관련해서 여러 학자들 모임을 시작했을 때이다. 그 당시 좌장 역할을 했던 돌아가신 서울대 철학과의 김영정 교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논술 교육과 같이 철학의 대중화를 말하면 사시로 보는 동료 철학자들이 많다. 이런 일은 그야말로 3류 철학자들이나 하는 일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마저 손을 놓는다면 이 중요한 일을 누가 하냐?"
김영정 선생의 그 말은 그 이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왜 철학의 대중화가 전문 철학자들의 경시 대상이 되는가? 그러다 보니 대중들에게 이름 깨나 알려진 대중 철학자들이 대학이나 전문 철학회에 발을 붙이기가 힘들다. 그들은 거의 등 떠밀리다시피 대학 바깥으로 밀려나는 경우들이 많다. 하지만 철학이 자신만의 고고한 성을 쌓기 보다는 대중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인식을 끌어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
서양철학사에서도 가장 난해한 철학서로 손꼽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도 사실은 자연적 의식을 일깨워 절대지에 이르게 하는 사다리와 같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명제를 '사다리'로 비유했을 때는 양가적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는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한 다음에는 버려야 한다는 의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기 까지 사다리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대중의 인식을 철학으로 인도하는 일도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불교의 <유마경>의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출가자 중심의 부파 불교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유마힐거사는 평범한 일반 재가 신도들 속에 들어가 부처님의 법을 설파한 것으로 유명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불교의 근본 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부처의 지혜와 깨달음(菩提)을 구한 후로는 괴로움에 빠진 중생을 교화(下化)하는 일도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에세이철학'의 기본 정신도 위와 동일하다. 오늘 날 철학은 지나치게 분과화되어 같은 철학분과들 조차 서로 간에 소통하기가 힘들 정도이다. 이를 테면 수리 논리학을 전공하는 철학자의 글을 형이상학을 전공하는 철학자가 읽기 힘들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경향 각지로 전문화된 철학회들이 수십개가 넘지만, 두더지처럼 각자 제굴만 파고 있을 뿐이다. 매년 '한국 철학자 대회'를 개최하기는 해도 그냥 수많은 철학회들을 한 데 모아서 서로 소통하지 않는 세션만 운영할 뿐이다. 이런 형태의 철학회가 '세계철학자대회' 까지 연장되고 있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외형적인 형식이 아니라 내용적인 소통에 있는데 현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여전히 철학자들 입에서는 '철학의 부재', '인문학의 위기'가 끊임 없이 반복될 뿐이다. 철학자도 이해를 못하는 철학의 현실 유리와 지나친 추상화가 병폐의 원인이라 할 수 있다.
'에세이철학'에서 말하는 '철학'은 그런 분과학으로서의 철학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로 <에세이철학회>에 가입한 전문 학자들 중에는 철학자들 보다 인문과 사회, 그리고 예술과 자연 과학 등 개별 학문의 전문가들이 많다. 이렇게 전공이 다른 학자들을 어떻게 '에세이철학'이란 이름으로 묶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모든 학문은 근본 깊이로 들어가면 철학적 물음을 물을 수 밖에 없고, 이러한 근본적 질문을 통해 궁극적으로 철학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에세이철학이 지향하는 이런 근본적 물음은 깊이에 대한 이해이고 전체에 대한 통찰이다. 여기서 사용하는 언어는 분과 철학의 추상화된 언어가 아니라 에드문트 훗썰이 말하는 삶의 세계(Lebenswelt), 곧 일상적인 삶에서 우러 나오는 일상언어인 것이다. 때문에 '에세이철학'은 '철학의 대중화'를 지향하고, '대중의 철학화'를 구하는 모든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정신에 바탕한 에세이철학은 각주와 레펀런스에 파묻혀 사유의 건강성을 상실한 분과 철학의 글쓰기를 벗어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사유와 자기 언어, 자기 삶을 되돌릴 수 있는 것이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유명한 화가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슨 그림을 그리기가 가장 쉬운가?”
화가가 대답했다.
“귀신이나 용을 그리기가 가장 쉽습니다.”
“귀신이나 용은 본 적이 없을 텐데, 어찌하여 그것을 그리기가 가장 쉽다는 말인가?”
“귀신이나 용은 제가 본 적이 없지만 다른 사람도 역시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렇게나 그려 놓아도 사실과 다르다고 시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그림을 그리기가 가장 어려운가?”
“개를 그리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왜 그런가?”
“개는 누구나 항상 봅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잘못 그려도 잘못 그린 부분을 금방 찾아냅니다. 그러므로 개를 그리기가 가장 어렵습니다.”(동아일보, [한자 이야기] <167>)
여기서 나온 말이 ‘畵狗最難(화구최난)’이다. 모든 이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아류나 3류가 아니라 최상의 깨우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