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의 길: 팔천만 입말의 소통
2026 09 23 추분(秋分) : 올해는 추석이 추분 다음다음이구나
세상을 놀이터 또는 수련터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 자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숙명처럼 살아야 하며, 절대적 신앙 속에서 그 신앙에 맞는 운명을 살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는 데 비해, 놀이(수련)터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숙명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데도 믿는 구석이 있는데, 그 믿음은 약간은 건방지게도 스스로 자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이 들어있다. 아마도 빠스깔은 전자를 택했을 것 같다.
세상의 이야기가 길고 두꺼운 백과사전에 실려있듯이, 어느 영역 또는 어느 방향에서 자신을 만들면서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마치 백과사전의 한 쪽 또는 한 꼭지 속에 장면처럼, 삶의 과정과 목표를 참조할 것이다. 종교인들이야 당연히 자신들의 종교에 맞는 경전을 참조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에서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문헌이든 경전이든 간에 그 사이에 빠져있는 부분들을 끌어낸다고 했었다고 한다. 어째거나 세상을 책으로 비유한 이들은 많았다. 책을 잘 읽어야 자기 삶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여겼다. 공부를 평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세계라는 책’에서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고 한다. 그런 책을 스스로 썼는데, 그 해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받는 것을 알고서, 이 책을 썼으나 출판하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데카르트 시절만 해도 신앙의 지배가 약화 되었음에도, 마남사냥의 여파는 학문의 세계에도 넓게 너울처럼 덮여있었다. 이 너울을 벗어나야 진실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인민들이 ‘니르고자 홀배 있어도’ 자기 입말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남사냥이 공개적이지 않던 1730년대를 들뢰즈는 다양한 발현(되기, 생성)의 시대라고 했었다. 그리고 백과전서파들이 인민이 물질과 더불어 생활하고 생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상세히 나열 하였다고 한다. 그 책은 삶의 터전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 활동을 넓히는 작업을 위한 작품이었다. 이 작업의 응용들은 다음 세기인 1830년대 이후에 거의 무제한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로부터 모순이나 우연과 달리 아자르(hasard, 주사위 놀이)라는 용어가 책을 가로질러 그리고 현상을 떠돌아 놀게 될 것이다.
이상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물질적 세계의 다양한 효과들을 발견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의 세계에도 다양한 기호적 함수들을 발현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회도 이런 물질과 사유에게 각각의 이중적 측면만큼이나, 생명체로서 생명의 유기적 조직화의 다양한 가지치기들과 더불어, 사회제도의 조직화에서도 여러방식들이 등장하였다. 공산사회의 건설은 맑스와 엥겔스의 것만이 아니라, 미시시피강 가에 실제적인 공산사회를 건설하려는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도 있었다. 이런 사유의 발현, 물리적 세계의 발명, 생명체의 유기체 계열, 사회의 조직화의 결사들과 방향들 등은 기존의 스콜라적인 보편과 절대로부터 연역체계와 다른 일상의 공통성에서 합의와 약속에 이르는 귀납체계의 진솔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현상에서 다양함과 삶과 사유 방식의 여러 갈래들이 무엇을 만들어 내었을까.
19세기 중반에서부터, 무작위 세계, 자연 세계, 추리 세계, 추상 세계 등에서 하나의 통일성으로 꿰뚫는 체계란 허구 또는 착각이 아닐까? 인간에게 통일성으로부터 도덕과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거꾸로 인간을 굴레 속에 또는 제도 속에 포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 루소가 이미 이런 세상을 감옥으로 보았지만 - 세상의 현실 또는 상황은 아자르의 세계가 아닐까? 개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상하게도 니체(1844-1900)와 말라르메(1842-1898)는 같은 시기에 다른 분야에서 다른 서술의 방식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각각의 사유에 주사위 놀이를 끌여 들었다. 삶의 과정이란 공중에 뜬 주사위와 같고, 놀이의 방식이 6면체든, 정20면체든 어느 면이 정해지는(이 세상을 뜨는) 시기까지의 놀이하고 있는 중과 같다. 그 놀이 과정들을 니체는 “도덕론”의 계보로, 말라르메는 기나긴 장편의 “책”이라는 제목의 ‘시’로 서술하였다고 한다. 어느 놀이든 인간답게 살아가려거나 인간답게 생각을 풀어보려는 것이리라.
이 둘에는 그 문헌들과 사유 과정 사이에 상응하는 방식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변증법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변증법이 아니라 다양한 발산의 과정에서 수렴들(주사위의 수 놓기)의 다변화에서, 그래도 함께 할 수 있는 공통기반의 마련을 위한 평결을 만드는 방식이 중요할 것 같다. 당대까지 알려진 비례중항과 조화중항 사이에 있을 이다. 전자에서 연역의 길을 택하거나 후자에서 귀납의 길을 택하거나, 두 길은 인간의 신체의 활동(작동) 속에 이중화 현상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좌파와 우파는 같은 표면 위에 배치되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자유이고 의지이다. 그 인간들의 선택의 연관들을 그래프로 만들면 아마도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온 종(鐘)모양의 가우스 곡선이 될 것이다. 그 곡선의 좌측은 자기 완성을 향한 가치를 추구하고, 우측은 완성된 제도 속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종모양의 꼭대기와 같은 변곡점들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죽 있어 왔다. 마치 천개의 “고원”처럼, 지구의 역사 속에서는 수 만개의 “고원”처럼 형성했을 것이다. 개인에게도 변곡점이 있으며, 우리는 변역(變易)의 시기라 부르고 사회에서는 혁명(革命)이라 부를 것이다. (59T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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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의 좌우의 방향은 생각하는 방법들이 다르다는 의미(un sens)에서 방향차(un sens)이다. - 이 단어는 감관이라는 의미도 있다. - 그리고 각각이 생각하는 기술(techne, art)이 그 사람의 삶의 양태를 표출한다. 사람들의 양태들은 방향이 반대 방향으로 다를 수 있다고 해서 모순이라 할 수 없다. 지국의 남극과 북극을 모순이라 부르지 않고 지구의 자전으로부터 사유하는 기술을 갖는다. 우리는 항상 말하듯이, 좌편과 우편이 51 대 49가 좋은 양태의 시대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유시민이 말하는 현재 민주당의 가우스 곡선은 5 대 95인 것 같다. 문조털래유를 양키두들처럼 받아들이고 노래하고 놀이하는 것도 양태들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시민사회에는 사유 방식들의 차이는 여론조사가 종과같은 현상을 드러내지만, 정점을 기준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진 것 같다. 사유의 과정상으로 그리고 사회의 변역상으로, 적대적 관계에서가 아니라 합의와 평결의 연관에서 인격도 제도도 건강성을 유지할 것 같다.
돌이켜 보건데, 사림파를 제거한 무오사화 이래로, 그리고 사문난적을 기치로 마치 마남 사냥을 일삼은 노론 지배를 거쳐서, 근대에서 이들의 일제 부역자들의 놀이판, 이 후예들의 미제 숭배자들에 이르기까지 기울어진 평면이라고 들 했다. 우리 입말로 소통하기 시작한 지 80년이 지나, 좌파와 공화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변곡점에 이르렀다. ‘나랏말씀이 뒹국과 달라’ - “입말과 문자화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와 다르기에” 새로운 공화국을 창안하리라.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권에서 특이하게 우리입말과 우리 문자화가 있다. 통일과 공화정은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이론상 이런 이론이 6.5명을 거치면 거의 전체가 소통된다고 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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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전두환 군부쿠데타 시절에,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집에서 수업을 하겠다고 계엄군부에 신고했는데, 수업을 못하게 해서 그해 5월 18일 이후 그 학기에는 강의를 못했다. 그는 다음 학기에 수업이 다시 열리면서,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또 다시 한탄하셨다. 서울대에서만이라도 이렇게 많은 교수들이 있는데 제대로 공부하는 교수가 없다는 말슴이 이해가 안되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나로서는 당시에 아직 어렸었구나 하고 되돌아본다. 이런 생각에서 철학사에서, 그리스 민주정 시절에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의 계열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빛들세기”에 루소와 그 주변의 유물론자들이 왜 달리 말하기 하는 시기에 제3신분과 인민이 등장하였는지, 프랑스 인민이 인민의 입말로 소통하는 공화정으로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흥미로웠다. 19세기 말 다양한 공간 개념들과 더불어 시간(지속)에 대한 논의들에서 여러 종류의 직관들을 제기되었다. 이 즈음 철학도 수학들(les mathematiques)처럼 복수로 철학들(les philosophies)이고 써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향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여러 혁명들을 거치면서, 더불어 삶의 터전에서 다양한 발현들, 분화들에서 나오는 방법들이 실증적으로 다른 길들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한 몫 하였으리라.
하나의 원리로부터 또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연역법이 모든 사실들의 자료(la donné)들을 다루는 것이 유일하고 보편과학의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중세의 보편논쟁에서 한번 걸러졌었다, 그리고 대혁명에서 제3신분의 등장과 더불어 공공과 공화의 의미를 달리 생각했으며 터전에서 삶의 토대에는 귀납적 방법이 먼저이고 연역은 결과를 이용한 현실에서 적용에 방법적 차이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19세기 초반에 미적분의 활용이 정태적 공간에서뿐만 아니라, 동태적 공간과 지속하는 시간에서도 적용 가능하며, 그 적용의 방법들은 현상들의 영역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로서 열역학에서 열의 전파의 세 국면, 전자기학에서 자기장의 삼중성, 빛의 운동의 파동과 입자의 양면성에 보태어 열에너지의 발산, 소리의 파장에서 결들의 회절과 중첩에 이어서 크기와 높낮이에 보태어 고유한 음색에 대한 3국면 등의 논의에서, 구성과 구축보다 조성에서 공명을 이루는 조화를 다시 생각했다고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학이든 물질계든 내재성의 다양성을 제기하는 자료들(les données)을 여성으로 쓴 것 같다.
이런 다양한 방법들의 방향과 영역들마다 적용방식에 따른 수학적 함수들의 다양성들도 제기되었다. 보편 또는 절대의 용어들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정신이 있기나 한가? 오성, 지성, 이성이라고 부르는 인식 역량들은 자연을 또는 인간적 자연(la nature humaine)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 인식 역량의 최상위로서 정신을 먼저 설정한 것이 보편자와 절대자의 선전제에 근거하면서,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악순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인간의 인식능력이 신적 정신에 못미친다면, 그 못 미치는 점이 무엇이며 무엇을 자료로 삼는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뒤따랐다. 진리(la vérité)가 있다와 절대적 또는 보편적 진리가 있다는 것이 같은 말인가? 신이 아닌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절대적 보편적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검증할 수 있는(vérifiable) 것까지만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검증가능한 진리는 무엇인가? 이로서 모든 진리들은 가능한 조건 속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능한 세계 내에서, 가능한 추론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 것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검증가능성에 대해서는 열역학 제2법칙의 문제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진리라는 것이 일정한 범위, 영역, 함수, 범주 안에서 체계의 획일성 또는 정합성이지, 자연의 모든 현상들과 사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열역학 연구자들이 진리의 개연성을 주장하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의 고르기아스의 불가지성, 아케데미 학당의 후기(9대학당 이후)에 이데아의 개연성,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제기 등도 진리의 확실성을 보증해주는 것이 결국은 인간의 인식능력이 아니었던가 였다. 이 인식역량들조차 다양하고(다곱성), 서로의 체계들 간에 정합성을 찾을 수 없어서 대립 또는 반대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들 사이의 대립이 모순이 아니라 체계들 사이에 정합성이 서로 환원되지 못하는 체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체계가 진리검증을 통해 모든 것의 진리가 아니라, 한 조건 안에, 또는 한 경계의 틀안에서 진리일 뿐이라는 측면에서 독사들인 셈이다. 한 체계의 독사에 대해 다른 체계의 독사라는 것이, 즉 독사의 독사가 파라독사인 셈이다. 이를 눈치챈 것은 집합론의 여집합을 무 또는 부재로 놓았던 것을 현존의 한 요소로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던 러셀이다. 물론 레셀이전에 프레게가 이미 제시했지만, 비존재를 현존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 또는 부조리로 취급했다가, 그 추론 자체가 스스로가 부조리에 빠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연역적 체계의 논리적 추론상, 왜 열은 평준화되어 절대온도로 이르지 않는가? 지금까지 진리를 맞다고 하는 것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이런 생각은 열역학처럼 사물들 속에서, 수학에서 수의 기원에 대해서, 또한 기하학의 점이 현 위에서 또는 소리의 결(파동) 위에서 점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에서 추론의 최고 류항목(류개념)이 인위적이 아닌지를 회의하였다. 언어에서 모든 용어가 고정적이고 정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동태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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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와 더불어 수학사를 읽으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보편이니 절대니 무니, 무질서니, 정태적이라는 용어들이 착각이라는 점이다. 벩송도 착각이라고 한다.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과, 오류가 있어도 믿는다고 하는 말이, 어쩌면 들뢰즈식으로 표현하면 같은 기호화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것이다. 브룅슈비끄 식으로 말하면 같은 은유, 유비, 상징, 알레고리(une allégorie), 비례(une proportion)등으로 공통성과 공유성 함께 하는 합의에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추론하여 더 나아가 추상하여 기호를 체계화하는 것이 인식의 틀(도식)에 가깝다. 이런 틀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 오성, 지성, 이성의 착각이 아닐까 한다.
일반적으로 철학사에서 수(數)와 원자(原子), 그리고 하늘 운행의 점(원주의 점)과 음향의 점(현의 점) 등이 유비와 은유처럼 같은 기호일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기호화의 의미를 진리이게 하는 것, 지성(인식역량)이 기호화를 체계화한 것, 이것이 말로서(공통의 상식) 소통하는 항목들의 설정에서 온 것이라 한다. 이 항목의 체계화가 논리학일 진데, 이 논리학에서 항목들의 계층을 이루어 류와 종 또는 최고류와 최하종으로 등등 계속에서 분류 또는 분할 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논의의 진실은 공동체의 공공성과 체제의 공화에 있을 것인데, 이런 추론의 규칙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긴다. 이 입말의 소통은 이런 규칙에 근거한다. 그 규칙이 법칙으로 그리고 원리로 그리고 하나로서 최고류에 이르는 추리방식은 인류 공동체의 삶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공통규칙으로부터 정의, 공준, 공리 등을 세워서 수학적 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규칙이 영역들 중에서 부분이라고 추리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규칙의 생성이 동일한 하나에서 나왔을까? 반성 하건데 수, 원자, 천문의 지속점, 소리의 결점 등은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알려진 이런 네 가지가 이상하게도 언어의 규칙에서 검증할(vérifiable)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 검증의 터전이 공동체이며, 이런 검증이 잘 이루어져 삶의 터전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사회이다. 사회의 중요성이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과 꽁트의 사회학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궤도 상에 잇다.
언어에서 항목 또는 용어의 기준 마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간단하게 합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합의는 대상에 대한 지시어가 같아야 할 것이다. 이 지시어의 합의에서 용어, 말, 소, 감, 대추 등은 상식의 공유, 공공화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에게도 환인, 길가메시, 헤라클레스의 항목은 정지된 상태의 이름일까? 여기서 흥미 있게도 원시문명을 연구가나 (범죄) 심리학에서 그 항목은 동적인 또는 긴 삶의 과정을 포함하는, 즉 운동하고 지속하는 삶의 총체를 이름하여 항목으로서 개체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언어의 항목이 ‘소’라는 용어가 성체의 ‘소’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자라고 성체가 되는 과정을 일컫어 운동하는 과정의 총체로서 ‘소’이다. 벩송이 단어(명사든 고유명사든)가 정태적이 아니라, 동태적(지속적)이 먼저이고, 편리와 적용을 위해서 한 부분을 잘라서(분할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도) 대표(대리, 표상, 재현)로서 이름을 부르고, 그 사회에서 통용하는 용어로 또는 개념으로 쓰인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에 용어, 항목, 개념, 관념 등이 학문의 분과학들의 편리한 기호작용이라는 것을 제시했었다. 한 용어가 문제제기되는 경우, 이미 선불교에서 선문답에서 다루었었는데,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의 지시에서 다르거나(공안), 행위자들의 의도와 의지를 포함하여 서로 간에 차이가 제시되어서 말투를 달리하거나(선문답), 더 나아가 다른 사회제도와 다른 인식체계에서 공통적 진술(명제)의 차이들이 드러나는 기호화 방법들의 계열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화두의 기호화의 차이). 이들을 종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은 강압과 폭력을 동반하는 데 비하여, 이들 사이의 조화와 공감을 통한 평결과 합의를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이를 찾기 위한 노력을 통하여 제도상으로 민주제와 공화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역사였다. 단일체계의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명령과 강압을 통해서 쉽게 만들어질 수 있지만 속박과 구속의 삶인데 비해, 자아의 만들기와 더불어 자유 실현의 과정에서 계약과 평결을 통한 공화의 길에는 노력과 학습이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다. (59TMA)
(4:24, 59TMC) (5:24, 59TM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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