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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속의 정신사: 식민지 병합에서 역전까지(1910–2030)
  • 김철호
  • 등록 2026-10-13 11:08:44
  • — 민족종교가 지켜온 혼(魂)의 사관과 통일 시대정신 —

국문 초록

1910년 국권을 상실한 민족이 한 세기 만에 산업화·민주화·문화적 세계화를 동시에 이룩한 사례는 세계사에 드물다. 본고는 이 ‘역전의 100년’을 설명하는 심층 변수로서 ‘정신적 저수지’ 가설을 제시한다.

특히 본고는 이 물음을 경계 밖(beyond borders), 곧 750만 재외동포의 시좌(視座)에서 던진다. 국경 단위의 사관 바깥에 서 있는 디아스포라의 자리야말로 대한민국의 거시사와 대동사관을 가능하게 하는 관점임을 방법론적 전제로 삼는다.

먼저 663년 백강전투에서 1910년 병합에 이르는 1,300년의 거시적 시야에서 한·일 관계사를 ‘분리의 3단계’로 재구성하고, 일본의 대륙 지향을 ‘본토 회복 서사’라는 해석적 가설로 읽는다(반론 병기).

이어 19세기 말의 총체적 위기 속에서 창발한 신흥 민족종교 — 수운 최제우의 동학, 증산 강일순의 증산 계열, 홍암 나철의 대종교, 소태산 박중빈의 원불교 — 가 시천주· 인내천· 인존· 해원상생·정신개벽으로 이어지는 후천개벽 사상사 속에서 인간관의 대전환을 이루고, 이들이 민족사학과 함께 형성한 정신적 저수지가 3·1운동의 종교연대로 폭발하여 남강 이승훈—오산학교—김기석으로 이어지는 교육의 전승 회로를 통해 제도화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아울러 오늘날 교세는 미약하나 민족사관 현양의 선봉에 서 온 민족종교의 역사적 위상을 재평가한다. 나아가 단재 신채호의 혼(魂)의 사관과 김기석의 정신사적 현실 판단을 준거로, 20세기 한국사의 굴절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이 정신적 자산이 산업화·민주화·K-컬처라는 현대적 성취와 맺는 상관관계를 구조적 요인들과의 변수 통제 속에서 논증한다.

결론에서는 백강 이후 기원을 지운 백제 유민과 기원을 현양하는 오늘의 디아스포라를 대비 시켜, 일본이라는 거울(경고)에 디아스포라라는 거울(희망)을 병치한다. 아울러 남북 분단이 ‘존재론적 분리’로 굳어질 위험을 경고하고, 식민사관·사대사관을 넘어서는 홍익 대동사관을 남·북·해외 세 주체가 함께 쓰는 2030년 통일 시대정신의 사관적 기초로 제안한다.

주제어: 정신사, 백강전투, 신채호, 김기석, 3·1운동, 신흥 민족종교, 후천개벽, 인존, 산업화, 민주화, K-컬처, 대동사관, 통일, 디아스포라, 재외동포


Ⅰ. 서론: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 문제 제기와 사관의 전환 


1. 물음: 패배는 어떻게 역전이 되었는가

크로체는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대사”라고 하였다.[1] 과거의 사건은 현재의 절실한 물음 속에서만 역사로 되살아난다. 오늘 우리가 던지는 물음은 이것이다. 1910년 국권을 통째로 상실하고, 1945년 타율적으로 해방되어 국토마저 분단되고, 전쟁 후유증으로1953년 세계 최빈국의 폐허 위에 섰던 민족이, 어떻게 한 세기 만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고 나아가 자신의 문화로 세계와 대화하는 나라가 되었는가. 이른바 ‘역전의 100년’의 동력은 무엇인가.

본고가 이 물음을 던지는 자리는 서울이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곧 경계 밖(beyond borders)  이다. 오늘 약 708만에 이르는 재외동포는 남과 북 어느 체제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은 채 민족사를 살아가는 제3의 주체다.[2] 경계 밖의 삶은 결핍이 아니라 시좌(視座)다. 국경 단위로 재단된 국사(國史)의 틀 밖에 서 있기에, 디아스포라는 1,300년의 거시사를 국가 간 대립의 연대기가 아니라 하나의 문명권이 갈라지고 다시 만나는 드라마로 조망할 수 있다. 본고의 거시적 시야와 대동사관은 바로 이 자리에서 비로소 가능해지는 관점임을 먼저 밝혀 둔다.

통상적 설명은 구조에서 답을 찾는다. 냉전 지정학과 미국의 원조, 발전국가의 산업정책, 높은 교육 투자, 수출 주도 전략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유사한 구조적 조건에 놓였던 다른 탈식민 국가들이 같은 성취에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구조만으로는 설명이 완결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본고는 그 결락(缺落)을 메우는 심층 변수로 ‘정신적 저수지(spiritual reservoir)’ 가설을 제시한다. 패배의 시대에 신흥 민족종교와 민족사학, 그리고 교육 구국운동이 축적해 놓은 가치·상징·조직·인적 네트워크의 총량이, 구조적 기회가 열렸을 때 민족적 응답의 질과 속도를 결정했다는 가설이다.

이는 본 컨퍼런스〈역전의 정신사〉에 부여된 과제, 곧 ‘정신사적 뿌리와 현대적 성취(산업화·민주화·K-컬처)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는 작업이며, 다른 세션에서 다루어질 민족종교의 창발, 후천개벽 사상, 1919년의 이념, 독립항쟁 조직의 논의를 종합하여 현재와 미래로 잇는 결론부의 성격을 갖는다.


2. 1,300년의 시야: 백강에서 병합까지 — 하나의 해석적 가설

이 물음에 답하려면 시야를 1910년보다 훨씬 멀리, 663년의 백강(白江) 하구까지 소급할 필요가 있다. 그해 8월 나당연합군은 백제 부흥군과 그를 지원한 왜(倭)의 대선단을 백강 어귀에서 격파하였다. 『구당서』는 왜선 400척이 불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닷물마저 붉었다”고 전한다.[3] 백제 부흥의 꿈이 좌절되자 왕족·귀족·학자·기술자를 포함한 백제 유민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로 열도로 건너가 정착하였다. 그 누적 규모를 발표자는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한다.[4]

주목할 것은 그 이후의 속도다. 패전 후 열도의 정권은 다이호 율령(701)으로 율령국가의 골격을 세우고, 720년에는 정사(正史) 『일본서기』를 완성한다.[5] 패배로부터 두 세대가 지나기 전에 국가 형태와 공식 역사를 함께 갖춘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의 서사는 단순한 건국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한반도 기원을 지우는 대신, 거꾸로 신대(神代) 이래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서사(이른바 임나일본부)를 축조함으로써[6] 스스로를 만주 대륙과 중국 동부, 한반도에 이르는 동북아 문명의 정통 계승자로 정위하려는 기획이었다. 요컨대 망국의 유민이 새 땅에서 국가를 세우며, 잃어버린 본토에 대한 기억을 ‘본래 우리의 강역이었다’는 신화적 청구권으로 반전시킨 것이다.[7]

이 심층 서사의 관점에서 보면, 그 뒤의 역사에 하나의 장기 지속하는 충동이 감지된다.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걸고 조선을 침공하였으나 그 칼끝은 조선을 넘어 명, 곧 대륙을 향해 있었다.[8] 그 기획이 좌절된 뒤에도 충동은 소멸하지 않았다. 서세동점의 시대에 가장 발 빠르게 서구 제국주의를 수입한 일본은 정한론(1873)에서 한일병합(1910)으로, 만주국(1932)에서 대동아공영권으로 나아가며 마침내 ‘조상들의 땅’이라 여긴 대륙 침탈을 실행에 옮겼다.[9] 백강에서 병합까지 1,300년 — 이것이 본고가 취하는 거시적 시야다.

물론 이 독법은 해석적 가설이며, 주류 학계의 통설과는 구별하여 제시한다. 통설은 야마토 정권의 자생적 성립을 전제하고, 임진왜란을 전국 통일 이후의 국내 정치적 요인으로, 근대 일본의 팽창을 서구 제국주의 모방이라는 근대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본고의 ‘본토 회복 서사’ 가설은 이러한 실증적 인과 설명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건들의 국면적 원인 아래에서 작동해 온 심층의 집단 서사, 맥닐(W. H. McNeill) 이 말한 ‘신화역사 (Mythistory)’의 층위를 조명하려는 것이다.[10] 민족의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실증된 과거만이 아니라 스스로 믿는 과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운 기억이 어떻게 갈망이 되는가’라는 반문에 대해서는, 의식이 지운 기원일수록 서사의 심층 구조에 무의식적 충동으로 침전된다는 관점을 취한다. 『일본서기』가 기원을 지우는 바로 그 행위로써 대륙 경영의 서사를 축조했다는 사실이 그 증좌다. 바로 그렇기에 이 가설은 검증과 반증에 열려 있어야 하며, 본 컨퍼런스가 종합토론에서 반론 세션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 사관의 전환: 식민사관·사대사관에서 홍익 대동사관으로

거시적 시야가 필요한 둘째 이유는 사관(史觀)의 문제다. 우리는 지난 100년의 역사를 여전히 두 개의 빌린 안경으로 보아 왔다. 하나는 식민사관이다.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축조한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은 한국사를 반도에 가두고 그 출발점인 고조선을 신화로 격하하였다.[11] 다른 하나는 사대사관으로, 중화 중심 또는 강대국 중심의 질서 속에서 우리 역사의 자리를 종속 변수로 배치해 온 관성이다. 두 안경 모두 한국사를 ‘당하는 역사’로 서술하게 만든다.

본고는 그 대안으로 ‘홍익 대동사관(弘益大同史觀)’을 제안한다. 이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의 건국 이념을 사관의 원리로 삼아, 동아시아사를 지배와 종속의 서사가 아니라 문명의 공유와 상생의 서사로 재구성하려는 관점이다. 대동사관은 국수주의적 자기 확대가 아니다. 일본을 영원한 타자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같은 문명의 포대기에서 자라난 이웃이 어떻게 타자가 되어 갔는지를 직시함으로써, 오늘의 남북이 같은 길을 걷지 않도록 경계하는 성찰의 사관이다. 아래에서 본고는 기승전결의 구성에 따라, 패배의 구조와 정신적 저수지의 형성(承), 역전의 동력과 현대적 성취(轉), 그리고 2030년을 향한 통일 시대정신(結)을 차례로 논한다.

예상되는 반론에 미리 답해 둔다. 가치를 내장한 사관을 제안하는 것은 결국 식민사관의 거울상이 아닌가. 아니다. 관점(perspective)과 왜곡(distortion)은 세 가지 기준으로 갈린다. 첫째, 사료 취급의 정직성이다. 조선사편수회는 사서를 수거·통제하며 서사를 축조했지만, 대동사관 은 모든 전거를 공개하고 논쟁 중인 사료는 논쟁 중이라고 밝힌다. 둘째, 반증에 대한 개방성이다. 본고는 핵심 주장들을 해석적 가설로 명시하고 반론을 병기하지만, 타율성론은 스스로를 가설로 취급한 적이 없다. 셋째, 타자의 자리다. 식민사관은 타자를 열등한 객체로 배치했지만, 홍익의 사관은 타자 — 일본, 그리고 북조선 — 를 같은 문명의 갈라진 가지로 대우한다. 요컨대 문제는 가치의 유무가 아니다. 가치 없는 사관은 없다. 문제는 그 가치가 학문의 규율에 복종 하는가이다.


Ⅱ. 패배의 구조와 정신적 저수지의 형성, 1860–1945


1. 서세동점과 두 갈래의 응전

19세기 후반 동아시아는 서구 제국주의라는 미증유의 파도 앞에 섰다. 일본의 응전은 물질의 길이었다. 화혼양재(和魂洋才)를 내걸고 출발한 메이지 유신은 곧 탈아입구 (脫亞入歐) 로 기울었고, 서양의 물질문명과 함께 그 제국주의까지 통째로 수입하여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행사하는 길로 나아갔다. 그 귀결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1910년의 병합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던 조선은 물질의 경쟁에서 패배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패배의 골짜기에서 전혀 다른 응전이 시작되었으니, 그것은 정신의 길이었다. 본고는 이 시기에 축적된 가치 (홍익· 상생·자존), 상징(단군·개벽), 조직(교단과 학교), 인적 네트워크의 총량을 ‘정신적 저수지’라 부른다. 물질의 전쟁에서 진 민족이 정신의 저수지에 물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첫 수원(水源)이 아래에서 살필 신흥 민족종교의 창발이다.[12]


2. 위기 속의 창발: 민족종교 발생의 사회사적 배경과 비교종교학적 고찰

신흥 민족종교의 발생은 우연이 아니라 총체적 위기의 산물이었다. 19세기 조선은 안으로 세도정치의 부패와 삼정(三政)의 문란, 거듭되는 기근과 콜레라의 창궐로 민중의 삶이 뿌리째 흔들렸고, 밖으로는 이양선의 출몰과 서학(西學)의 확산, 아편전쟁 이후 중화 질서의 붕괴가 세계관 전체를 뒤흔들었다. 홍경래의 난(1811)에서 임술민란(1862)에 이르는 민란의 세기는 기성 질서의 응답 능력이 소진되었음을 보여 준다. 기성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지배 이데올로기로 경직된 성리학은 민중의 고통에 답하지 못했고, 오백 년 억불(抑佛) 아래 산중으로 밀려난 불교는 사회적 발언권을 잃은 지 오래였으며, 천주교는 외래 세력과 결부되어 박해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이 종교적 공백에서 민중은 밖에서 빌려 오지 않고 스스로의 영성으로 새 하늘을 열었다. ‘위기 속의 창발(emergence)’이란 이를 가리킨다.

비교종교학의 시야에서 보면 위기의 시대에 민중 종교운동이 분출하는 것은 세계사적 보편 현상이다. 중세 유럽의 천년왕국운동, 청 말의 태평천국, 북미 원주민의 고스트 댄스가 그러하다.[13] 그러나 한국의 신흥 민족종교는 이 보편 유형과 뚜렷이 구별되는 특성을 보인다. 첫째, 파국의 종말론이 아니라 전환의 개벽론이다. 세계의 멸망과 선민(選民)의 구원이 아니라, 선천(先天)의 낡은 질서가 다하고 후천(後天)의 새 문명이 열린다는 대전환의 선포다. 둘째, 심판이 아니라 해원(解冤)이다. 압제자에 대한 보복의 서사 대신, 쌓인 원한을 풀고 함께 사는 상생의 서사를 택했다. 셋째, 무장 봉기의 좌절 이후에도 절멸적 폭력으로 기울지 않고 교육· 수양·문화 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놀라운 자기 절제를 보였다. 패배의 한(恨)을 보복이 아니라 개벽의 에너지로 승화시킨 이 특성이야말로, 훗날 3·1운동의 비폭력 노선과 민주화 운동의 평화적 성격으로 이어지는 원형질이다.

창발의 계보를 그 창시자들로 짚어 보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경주의 몰락 양반가에서 태어나 1860년 결정적 종교 체험 속에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侍天主)의 선언은 신분제 사회의 근저를 흔드는 것이었고, 그는 1864년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되었으나 그 도맥은 해월 최시형을 거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의 천도교로 이어졌다.[14]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은 동학농민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뒤 무력이 아닌 길을 물어, 원한으로 가득 찬 천지의 질서 자체를 뜯어고친다는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고 해원상생을 선포하였다. 그 법통은 사후 보천교·증산도· 대순진리회 등 증산 계열 교단들로 이어졌다.[15]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은 문과에 급제한 엘리트 관료 출신으로, 을사오적 처단을 시도하다 유배되었고, 1909년 단군 신앙을 다시 일으켜 대종교를 열었다. 국교(國敎)의 재건이 곧 국권의 재건이라는 그의 확신은 만주 무장투쟁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는 1916년 구월산 삼성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교하였다.[16]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은 1916년 대각 후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로 불법연구회(원불교의 전신)를 세우고, 저축조합과 간척 사업으로 개벽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새 길을 열었다.[17] 국망 전후 반세기 사이에 몰락 양반의 아들, 농민의 아들, 급제 관료, 청년 구도자가 각기 다른 자리에서 같은 방향의 문을 연 것이다.


3. 후천개벽의 사상사: 인존·해원상생·정신개벽과 인간관의 대전환

이들 종교의 사상사적 핵심은 인간관의 대전환에 있으며, 그 계보는 뚜렷한 상승선을 그린다. 수운의 시천주 — 사람은 저마다 한울님을 모신 존재다 — 에서 출발하여, 해월의 사인여천(事人如天) — 사람 섬기기를 하늘같이 하라 — 을 거쳐,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다 — 에 이른다. 증산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존(人尊)을 선포하였다. 하늘의 시대와 땅의 시대가 지나고 이제 사람이 높임을 받는 시대가 열린다는 것이다. 소태산의 정신개벽은 이 인간 존엄의 사상을 물질문명 시대의 과제로 번역하였다. 물질의 개벽이 인간을 노예로 만들지 않으려면 정신의 개벽이 그에 상응해야 한다는 통찰은, 기술문명 비판으로서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이 계보가 함축하는 인간관의 변화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천명을 받드는 백성에서, 하늘을 모신 존재로, 하늘 그 자체로, 마침내 천지의 주인으로 — 반상(班常)과 적서(嫡庶), 남녀와 장유의 차별이 물샐틈없던 신분제 사회의 한복판에서 만민의 존엄이 선언된 것이다. 해월이 며느리의 베 짜는 소리를 한울님의 일하심이라 하고 어린이를 때리지 말라 가르친 것은 그 실천적 표현이며, 천도교 소년운동에서 방정환의 어린이 선언과 어린이날이 나온 것은 그 제도적 결실이다.[18] 요컨대 후천개벽의 인간관은 서구 인권 담론의 수입 이전에 이 땅의 영성이 내재적으로 도달한 인간 존엄의 선언이었고, 제Ⅲ장에서 보듯 한 세기 뒤 민주화의 정신사적 원류가 된다.


4. 교세와 공헌의 비대칭: 신흥 민족종교의 위상에 대한 정당한 평가

오늘의 종교 지형에서 이들의 자리는 초라해 보인다. 2015년 인구총조사 기준 개신교 인구는 약 19.7%, 불교는 15.5%, 천주교는 7.9%인 데 비해, 천도교·대종교·원불교·증산 계열을 모두 합쳐도 1%에 미치지 못한다.[19] 수천 년 전통의 사찰과 문화 유산을 지닌 불교, 그리고 구한말 미국 선교사들의 학교·병원과 함께 뿌리내리고 해방 후 미국 주도의 질서와 고도성장의 물결에 올라타 대형 교회로 기업화하기까지 한 개신교의 교세에 비하면, 민족종교의 현재 교세는 미미하다.

그러나 이 비대칭을 읽을 때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오늘의 교세는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탄압의 누적 결과다. 동학은 창도자의 처형과 농민전쟁의 학살로 수십만의 피를 흘렸고, 일제는 민족종교를 ‘종교’가 아닌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경찰 단속의 대상으로 삼았다. 한때 수백만 신도로 추산되던 보천교는 강제 해산되었고, 대종교는 교단의 중심을 만주로 옮겨야 했으며 무장투쟁의 대가로 지도부가 궤멸당하는 임오교변(1942)을 겪었다.[20] 민족과 운명을 같이한 종교는 민족이 수난당할 때 함께 수난당했던 것이다. 둘째, 종교의 역사적 무게는 신도 수로 재는 것이 아니다. 교세의 저울이 아니라 정신사의 저울로 달면 형세는 역전된다.

실제로 근현대사의 결정적 국면마다 민족종교는 교세와 어울리지 않는 압도적 기여를 하였다. 3·1운동은 천도교의 기획력과 자금, 보성사의 인쇄망 없이는 불가능했고, 민족대표 33인의 최다수가 천도교인이었으며 그 영도자가 손병희였다. 대종교는 북로군정서와 청산리 대첩의 모체였고, 임시정부 요인의 상당수가 대종교적 배경을 지녔다.[21] 나아가 개천절의 국경일 제정, 단기 연호의 사용, 교육이념 홍익인간의 채택 등 신생 대한민국의 정신적 상징 체계 자체가 대종교가 지켜 온 단군 사상의 국가적 수용이었다.[22] 천도교의 《개벽》지는 식민지기 최대의 사상 잡지였고, 원불교는 교육·의료·교화 사업으로 개벽의 사회화를 이어 왔다.

물론 이는 타 종교의 공헌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33인의 한 축이자 근대 교육·의료의 통로였고, 만해 한용운이 보여 주듯 불교에도 민족적 각성의 흐름이 있었다. 본고가 강조하는 것은 위상의 정당한 회복이다. 민족의 시원(단군)과 역사 주권을 종교적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 민족사관 현양의 선봉에 서 온 것은 신흥 민족종교였으며, 정신적 저수지의 원천 수원이 바로 여기였다. 교세가 아니라 이 공헌이, 이들 종교가 한국 근현대 정신사에서 차지해야 할 정당한 자리다.


5. “역사는 혼이다”: 단재와 백암의 혼의 사관

정신적 저수지의 또 하나의 수원(水源)은 민족사학이었다. 백암 박은식은 『한국통사』 (1915)에서 나라의 형체(國魄)는 멸할 수 있어도 나라의 혼(國魂)인 역사가 살아 있는 한 국가는 반드시 부활한다고 썼다.[23] 단재 신채호는 「독사신론」(1908)에서 민족을 역사 서술의 주체로 세웠고,[24]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 정의하였다.[25] “역사는 혼이다. 혼을 잃은 민족에게 역사는 없다”는 명제는 이 두 사가의 사상을 관통하는 민족사학의 핵심 테제다.[26]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역사 서술은 학문이기 이전에 혼의 보존 투쟁이었다.

이 테제의 절박성은 상대의 기획을 보면 선명해진다. 조선총독부는 병합 직후부터 사서를 수거하고,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조선사』 37책을 편찬하였다. 단군은 신화로, 고조선은 반도 북부의 작은 부족사회로, 한국사의 무대는 만주와 대륙에서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그것은 영토의 병합에 뒤이은 기억의 병합, 곧 혼의 말살 기획이었다. 단재가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까지 상고사 서술에 매달린 것은, 빼앗긴 국가보다 먼저 빼앗기고 있던 것이 역사였기 때문이다. 패배 속에서 혼을 지킨 자와 승리 속에서 혼을 지운 자 — 20세기 전반의 한일 관계는 이 두 정신사의 대결이기도 하였다.


6. 1919년: 종교연대의 정신사적 폭발

정신적 저수지의 수문이 처음 열린 사건이 1919년 3·1운동이다.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자 33인이 종교와 교파의 벽을 넘어 연대하였고, 두 달여 동안 200만 명 이상이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27] 3·1운동은 군사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한 ‘실패’였다. 그러나 그것은 왕조의 회복이 아니라 ‘민국(民國)’의 수립을 선언한 공화주의 혁명이었고,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의 도덕적 우위로 제국에 맞선 문명사적 선언이었으며, 그 직접적 결실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건립되었다. 패배의 형식 속에 담긴 승리 — 이것이 3·1운동의 정신사적 본질이다.

종교적 저수지가 무장투쟁의 역량으로 전이된 사례도 뚜렷하다. 1909년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는 단군 신앙으로 만주의 한인 사회를 조직하였고, 그 교단 조직은 북로군정서의 모체가 되어 청산리 대첩(1920)의 인적 기반을 이루었다.[28] 신흥 민족종교가 관념의 체계에 머물지 않고 학교와 군대, 신문과 결사로 육화되었다는 사실은, 정신사가 곧 실천사였음을 보여 준다.


7. 남강—오산—김기석: 혼의 전승 회로

정신적 저수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통로는 교육이었다. 그 표본이 남강 이승훈과 오산학교다. 보부상 출신의 사업가였던 남강은 도산 안창호의 연설에 감화되어 1907년 오산학교를 세웠고, 105인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3·1운동에서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33인의 한 사람으로 섰다. 오산학교는 조만식·함석헌·김소월·이중섭 같은 인물들을 길러 낸,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혼의 양성소’였다.

이 계보의 정신사적 의미를 학문의 언어로 정리한 이가 김기석(金基錫, 1905~1974)이다. 오산학교 출신으로 와세다와 도호쿠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와 학장, 한국교육학회 초대 회장으로서 신생 대한민국의 교원 양성 체계를 세웠고, 『현대정신사』 등의 저술로 정신사라는 문제 틀을 한국 학계에 도입하였다.[29] 그가 만년에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전기가 『남강 이승훈』(1964)이다.[30]

김기석의 현실 판단의 요체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3·1운동은 정치적으로는 좌절되었으나 그 좌절이야말로 민족 정신사의 기점이 되었으며, 패배 속에서 단련된 혼은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의 인격과 역량으로 전승된다는 것이다. 그는 남강의 생애에서 그 전승 회로의 원형을 보았고, 스스로 사범대학장으로서 그 회로를 국가적 제도로 확장하였다. 같은 오산 출신인 함석헌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한국사의 고난을 세계사적 사명의 담지로 읽어 냈다면,[31] 김기석은 그 고난의 정신사를 교육 제도 속에 부어 넣은 실천가였다. 단재가 혼의 사관을 세우고, 남강이 혼의 학교를 세웠다면, 김기석은 혼의 사범(師範)을 세운 것이다. 1949년 교육법 제1조가 대한민국 교육의 이념으로 ‘홍익인간’을 명시한 것은 이 전승 회로가 신생 공화국의 골격에 각인된 상징적 순간이었다.[32]


Ⅲ. 역전의 동력: 정신사적 뿌리와 현대적 성취의 상관관계, 1945–2020년대 


1. 굴절과 왜곡: 혼의 잠복기

해방은 도둑같이 왔고, 미완으로 왔다. 국토는 분단되었고, 전쟁이 산하를 태웠으며, 반민특위의 좌절로 식민 협력의 청산은 무산되었다. 역사학에서도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학맥이 강단의 주류로 이어지면서, 단재와 백암이 목숨으로 지킨 사관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났다. 20세기 후반 한국사 서술의 굴절과 왜곡은 이 미청산의 그림자다. 그러나 잠복이 소멸은 아니다. 저수지의 물은 지표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다. 잠복기에도 수로(水路)는 있었다. 오산의 후예들이 세운 학교들, 교단과 재야로 스며든 민족종교 출신의 인맥, 그리고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로 대표되는 저항 담론이 제도권 밖에서 혼의 언어를 이어 날랐다.[33] 그 물길이 다시 지표로 솟은 세 개의 분출구가 산업화, 민주화, 그리고 문화적 세계화다.


2. 산업화: 교육열이라는 정신사적 유산

1962년 1인당 국민소득 약 120달러의 최빈국이 한 세대 만에 산업국가로, 두 세대 만에 3만 5천 달러의 선진 경제로 도약한 ‘한강의 기적’은[34] 통상 발전국가론으로 설명된다. 암스덴은 국가 주도의 후발 산업화 전략을,[35] 에커트와 식민지 근대성론자들은 식민지기에 형성된 자본과 제도의 유산을 강조한다.[36] 냉전 체제하의 미국 원조와 시장 접근도 결정적 조건이었다. 본고는 이 구조적 설명들을 성실히 수용한다.

그러나 구조가 설명하는 것은 기회이지 응답이 아니다. 같은 원조, 유사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왜 유독 이 민족은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열로 응답했는가. 문맹률이 80퍼센트에 육박하던 해방 공간에서 불과 십수 년 만에 완전 취학에 근접하고, 전쟁 피난지의 천막에서도 학교부터 세운 이 행동 양식은 경제적 유인만으로는 환원되지 않는다.[37] 그 심층에는 배움으로 사람이 하늘이 된다는 동학적 인간관, 실력을 길러 나라를 되찾는다는 교육구국·자강운동의 기억, 그리고 남강—오산—김기석으로 이어진 교육입국의 회로가 놓여 있다. ‘잘살아보세’의 집단적 열망은 단순한 물질적 욕망이 아니라, 패배의 한(恨)을 개벽의 에너지로 반전시키는 정신사적 동력의 세속적 표현이었다. 요컨대 구조는 무대를 제공했고, 정신사는 배우의 연기력을 길러 놓았던 것이다.


3. 민주화: 3·1 원형의 반복과 확장

한국 민주화의 궤적은 정신사적 계보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영역이다. 4·19혁명(1960), 부마항쟁과 5·18민주화운동(1979~80), 6월항쟁(1987), 그리고 촛불혁명(2016~17)에 이르기 까지, 한국의 민주주의는 제도의 이식이 아니라 비폭력 대중 항쟁의 반복적 분출로 쟁취되었다. 그 원형이 3·1운동임은 헌법 전문이 스스로 증언한다.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는 나라다.[38] 보국안민과 인내천을 외치며 일어선 동학 농민의 대오에서, 만세를 부르던 1919년의 군중을 거쳐, 광장의 촛불에 이르는 이 계보는, 사람이 하늘이라는 명제가 한 세기 반에 걸쳐 정치적 근대의 언어로 번역되어 온 과정이라 할 수 있다.


4. K-컬처: 혼의 문화적 발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뒤에 온 것이 문화의 세계화다. BTS와 K-팝, 칸과 아카데미를 석권한 『기생충』(2019~20), 세계 최대 OTT의 기록을 갈아치운 『오징어 게임』(2021), 그리고 K-드라마·웹툰·K-푸드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는 21세기 소프트파워의 대표적 사례가 되었다.[39] 커밍스가 지적했듯 20세기 내내 한국은 주변국의 렌즈로만 조명되던 나라였으나,[40] 이제 세계가 한국의 렌즈로 자신을 비추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사의 관점에서 K-컬처의 핵심은 물량이 아니라 서사의 보편성이다. 한(恨)을 신명으로 풀어내는 풍류의 미학, 약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해원(解冤)의 서사, 위계를 뒤집는 개벽적 상상력은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이 세계인의 심금을 울린 문법 그 자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의 이념은, 자국 문화의 우월성 과시가 아니라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승화될 때 비로소 세계와 공명한다는 것을 K-컬처는 실증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도 수출 산업화 전략, 플랫폼 자본, 디지털 전환이라는 구조적 조건이 작동했음을 병기해 둔다. 그러나 콘텐츠의 혼까지 산업 정책이 만들 수는 없다.


5. 방법론적 성찰: 변수 통제와 반론에 답함

이상의 논증에 대해 예상되는 반론은 정신사적 설명이 사후적 목적론, 곧 성공한 결과에 원인을 소급 부여하는 오류가 아니냐는 것이다. 정당한 경계다. 본고의 주장은 정신사 일원론이 아니다. 냉전 체제, 산업화 정책, 교육 투자, 인구 구조와 같은 구조적 변수들을 통제하고 나서도 여전히 설명되지 않는 나머지 — 응답의 강도, 속도, 방향 — 를 설명하는 심층 변수로서 정신적 저수지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 가설은 비교사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유사한 구조적 조건에 놓였던 사회들과의 비교, 종교·교육 네트워크의 밀도와 이후 성취의 상관에 대한 실증 연구가 후속 과제이며, 본 컨퍼런스가 구조적 요인을 다루는 종합토론을 병치한 것은 이 검증의 장을 스스로 여는 설계다. 특히 대만·베트남처럼 민족종교의 매개 없이도 강한 교육열을 보인 유교 문화권 사회들과의 비교는 이 가설이 통과해야 할 가장 엄격한 시험대다. 교육열의 유교적 기원론과 개벽적 기원론을 변별하는 실증 연구를 후속 과제로 명시해 둔다.


Ⅳ. 결론: 2030년을 향하여 — 일본이라는 거울과 통일 시대정신 


1. 분리의 3단계: 일본이라는 거울

이제 서론의 거시적 시야로 되돌아가자. 1,300년의 한일 관계사는 하나의 공동 문명권이 완전한 타자로 갈라서는 과정, 곧 ‘분리의 3단계’로 요약된다. 첫째는 663년 백강전투가 초래한 지리적 분리다. 백제 유민의 주류가 열도로 건너가 『일본서기』로 자기 기원을 재구성하면서, 같은 핏줄이 다른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둘째는 1592년 임진왜란의 적대적 분리다. 같은 문명의 포대기에서 자란 이들이 침략자와 피침략자로 마주 서면서 분리는 감정의 골짜기로 깊어졌다. 셋째는 1910년 병합의 존재론적 분리다. 상대의 역사와 혼 자체를 말살하려 한 식민 지배를 통해, 그들은 더 이상 같은 조상을 기억하지 않는 민족이 되었다.

이 거울에 오늘의 남북을 비추면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이후 80년,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어휘로 말하고 다른 영웅을 기억하며 다른 역사를 가르친다. 젊은 세대에서 ‘같은 민족’이라는 감각 자체가 희미해지고 있다. 일본이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나는 데 천 년이 넘게 걸렸다면, 분단 체제는[41] 그보다 훨씬 가파른 속도로 존재론적 분리를 향해 미끄러지고 있다. 백강 이후의 열도가 두 세대 만에 별개의 국가 서사를 완성했음을 상기하면, 80년의 분단은 이미 위험 수역이다. 역사를 공유하지 못한 민족은 결국 같은 민족이기를 멈춘다 — 이것이 일본이라는 거울이 주는 경고다. 물론 이 비유에는 한계가 있다. 한일의 분리는 바다와 언어의 분화를 수반한 천 년의 과정이었고, 남북은 같은 언어와 생존 세대의 기억을 아직 공유한다. 그러나 그 차이는 안도의 근거가 아니라 기회의 근거다. 아직 늦지 않았다는 것 — 그것이 이 거울의 진짜 전언이다.


2. 또 하나의 거울: 디아스포라 — 경고에서 희망으로

그런데 재외동포의 시좌에서는 이 역사에 또 하나의 거울이 보인다. 백강 이후의 백제 유민과 오늘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는 같은 이산(離散)에서 출발했으나 정반대의 정신사를 쓰고 있다. 유민은 본토를 잃고 기원을 지우며 스스로 타자가 되는 길을 갔다. 오늘의 디아스포라는 본토가 건재한 채 경계를 넘어 살며, 기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현양한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2세들이 목격하는 것은 부모 세대가 감추고 싶어 했던 출신국이 자녀 세대의 문화적 자산으로 반전되는 광경이며, 구매력 기준 1인당 소득에서 한국이 일본을 추월했다는 통계는[42] 그 체감의 뒤늦은 확인일 뿐이다. 국권을 찬탈당한 나라의 후손이 찬탈한 나라를 활력과 문화에서 앞지르는 이 광경은, 단재가 뤼순의 감옥에서 상상할 수 없었던 방식의 아(我)의 승리다.

홍익인간은 애초에 국경의 이념이 아니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명제에는 민족의 경계가 없으며, 홍산의 제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시원의 문명은 영토 국가 이전의 문명, 말하자면 최초의 beyond borders였다. 그렇다면 남·북·해외라는 세 꼭짓점 가운데 경계 밖의 동포야말로 어느 체제의 공식 사관에도 매이지 않기에 공통 뿌리의 기억을 가장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리다. 일본이라는 거울이 경고라면, 디아스포라라는 거울은 희망이다. 본 컨퍼런스가 태평양 건너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다는 사실 자체가, 분리의 서사를 되돌리는 홍익 문명권의 회복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3. 홍익 대동사관과 화평한 남북국 시대

그렇다면 무엇이 이 분리를 멈출 수 있는가. 본고의 답은 사관의 회복, 곧 공통 뿌리 의식의 고양이다. 남한 교육기본법의 홍익인간 이념과 북한의 단군릉 복원이 보여 주듯, 단군과 고조선의 기억은 38선이 갈라놓지 못한 남북 공통의 정신적 지층이다. 홍산문화를 비롯한 요하 일대의 고고학적 발견은 그 지층의 깊이를 시사하는 자원이며,[43] 그 귀속을 둘러싼 학계의 논쟁을 존중하되,[44] 남북이 함께 발굴하고 함께 해석해야 할 공유 유산임은 분명하다. 식민사관이 잘라 낸 뿌리를 남북이 함께 잇는 역사 교육이야말로 가장 깊은 수준의 통일 운동이다.

대동사관은 미래 설계의 원리이기도 하다. 홍익은 남과 북 어느 한쪽의 번영이 아니라 널리 함께 이로움이요, 상생은 흡수가 아니라 함께 삶이며, 자존은 외세의 눈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단이다. 이 원리를 경제의 언어로 번역하면, 남의 효율과 북의 평등주의적 잠재력을 결합하는 인본주의적 중도 경제 — 생활임금과 공동 복지를 보장하는 특구 모델, 교류 수익의 일부를 남북의 소외 계층에 돌리는 공동번영기금 — 로 구체화될 수 있다. 그것은 맹자가 말한 인정(仁政), 곧 사람의 가치를 천하보다 무겁게 여기는 정치의 현대적 실현이며,[45] 적대적 두 국가론을 넘어 ‘화평한 남북국 시대’를 경유하여 존재의 회복으로서의 통일로 나아가는 경로다.


4. 맺음말: 역전의 완성을 향하여

본고의 논지를 요약한다. 첫째, 663년 백강에서 1910년 병합에 이르는 1,300년의 시야는 한일 관계를 ‘같은 뿌리의 분리사’로 읽게 하며, 이는 남북 분단의 미래에 대한 가장 준엄한 경고가 된다(해석적 가설로서, 반론에 열려 있다). 둘째, 1860년 이후 신흥 민족종교와 민족사학 이 축적한 정신적 저수지는 3·1운동에서 폭발하고 남강—오산—김기석의 교육 회로를 통해 제도화되어, 구조적 기회가 열린 20세기 후반 산업화·민주화·K-컬처라는 3중의 성취로 분출되었다. 셋째, 그러므로 ‘역전의 100년’의 다음 과제는 자명하다. 패배 속에서 지켜 낸 혼이 물질적 역전을 이루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 혼의 힘을 분단이라는 마지막 패배의 극복, 곧 민족의 존재 회복으로 돌려야 한다.

2030년은 병합 120년이자 3·1운동 111년이 되는 해다. 우리는 이 시점을 ‘역전의 완성’을 향한 원년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크로체의 명제대로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백강의 불길도, 병합의 치욕도, 만세의 함성도 오늘 우리의 물음 속에서 되살아난다. 역사는 혼이다. 혼을 잃은 민족에게 역사가 없다면, 혼을 지킨 민족에게는 아직 쓰이지 않은 역사가 있다. 패배 속의 정신사가 역전의 정신사가 되었듯, 분단의 정신사는 통일의 정신사가 될 것이다. 그 서사의 다음 장을 쓰는 일은 반도의 남과 북만의 몫이 아니다. 태평양 건너 이곳에, 경계 밖에 모인 우리 모두의 몫이다.

 

참고문헌:

1. 사료

『삼국사기』, 『구당서』, 『일본서기』, 『맹자』.

『동경대전』, 『용담유사』, 『대순전경』, 『원불교 정전』.

대한민국 헌법; 교육법(1949); 교육기본법.

통계청, 「2015 인구주택총조사: 종교 부문」, 2016.

외교부, 「재외동포현황」, 2023.

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

2. 국문 문헌

김기석, 『남강 이승훈』, 1964(재간: 한국학술정보, 2005).

김기석, 『현대정신사』; 『철학개론』; 『윤리전서』.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박은식, 『한국통사』, 1915.

백낙청,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신용하,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신채호, 「독사신론」, 《대한매일신보》,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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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욱환, 『한국 사회의 교육열: 기원과 심화』, 교육과학사, 2000.

우실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소나무, 2007.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존 카터 코벨(김유경 편역), 『부여 기마족과 왜』, 글을읽다, 2006.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개정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기석」 항목.

3. 영문 문헌

Amsden, Alice H., 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Cohn, Norma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Croce, Benedetto, Teoria e storia della storiografia, 1917.

Cumings, Bruce,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 W. Norton, 1997.

Eckert, Carter J.,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McNeill, William H., “Mythistory, or Truth, Myth, History, and Historians,” American Historical Review 91-1, 1986.

Nye, Joseph S., Soft Power: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 PublicAffairs, 2004.

Shin, Gi-Wook &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Abstract:

A Spiritual History Within Defeat: From Colonial Annexation to Reversal (1910–2030)

  • The Historiography of the National Soul(Hon) sustained by Korea’s National Religions and the Zeitgeist of Unification

Few nations in world history have lost their sovereignty entirely, as Korea did in 1910, and within a single century achieved industrialization, democratization, and global cultural influence all at once. This paper proposes the hypothesis of a “spiritual reservoir” as the deep variable behind this century of reversal. The question is posed from beyond borders: the seven million Koreans of the diaspora, standing outside the official frames of both Korean states, occupy the very vantage point from which a thirteen-century macro-history becomes visible. It first reframes thirteen centuries of Korea–Japan relations — from the Battle of Baekgang (663) through the Imjin War (1592) to the Annexation (1910) — as three successive stages of separation (geographic, antagonistic, ontological), and offers, as an interpretive hypothesis presented alongside mainstream counterarguments, a reading of Japan’s continental ambitions as a long-durée narrative of “recovering the ancestral homeland.” It then traces how Korea’s new national religions — Donghak founded by Ch’oe Che-u (1824–1864), the Jeungsan lineage of Kang Il-sun (1871–1909), Daejonggyo revived by Na Ch’ol (1863–1916), and Won Buddhism founded by Pak Chung-bin (1891–1943) — transformed the very conception of the human being through the lineage of Sicheonju, Innaecheon, Injon, Haewon-sangsaeng, and the Great Opening of the Spirit (jeongsin gaebyeok), and how these religions, though numerically small today compared with Buddhism and corporatized Protestantism yet standing in the vanguard of national historical consciousness, together with nationalist historiography accumulated values, symbols, organizations, and human networks that erupted in the interreligious solidarity of the March First Movement (1919) and were institutionalized through the educational lineage running from Yi Sung-hun and the Osan School to Kim Ki-suk, dean of Seoul National University’s College of Education and pioneer of Geistesgeschichte in Korea. Drawing on Shin Chae-ho’s historiography of the national soul (hon) and Kim Ki-suk’s judgment that the “failed” March First Movement was in fact the fountainhead of modern Korean spiritual history, the paper argues — with explicit controls for structural factors such as the Cold War, developmental-state policy, and educational investment — that this spiritual reservoir best explains the intensity, speed, and direction of Korea’s modern achievements in industrialization, democratization, and K-culture. The conclusion holds up Japan as a mirror: the eighty-year division of Korea is sliding toward ontological separation at a far faster pace than the millennium that estranged Japan. Yet a second mirror offers hope: whereas the Baekje refugees after Baekgang erased their origins and became the other, today’s diaspora lives beyond borders while proclaiming its roots — the third vertex, together with South and North, of a Hongik civilization to be restored. It therefore proposes a Hongik-Daedong historiography — beyond colonial and Sinocentric frames — as the historiographical foundation of a unification Zeitgeist toward 2030.

Keywords: spiritual history (Geistesgeschichte), Battle of Baekgang, Shin Chae-ho, Kim Ki-suk, March First Movement, new national religions, Later Heaven Opening (hucheon gaebyeok), industrialization, democratization, K-culture, Hongik-Daedong historiography, unification, Korean diaspora, beyond borders


[1] 베네데토 크로체(Benedetto Croce)는 『역사서술의 이론과 역사』(Teoria e storia della storiografia, 1917)에서 “모든 진정한 역사는 현대사이다”라고 하였다. 과거는 현재의 삶의 관심 속에서만 역사로 되살아난다는 뜻이다.

[2] 외교부, 「재외동포현황(2023)」 기준 재외동포는 약 708만 명이다.

[3] 『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의자왕조 및 『구당서』 권84 유인궤(劉仁軌) 열전. 『구당서』는 백강구 전투에서 왜선 400척이 불타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닷물마저 붉었다(煙焰漲天 海水皆赤)”고 전한다.

[4] 『일본서기』 덴지(天智)기에는 백제 유민 남녀 400여 인을 오미(近江)에, 700여 인을 가모군(蒲生郡)에 사민하고 좌평 여자신·귀실집사 등 지배층에게 관위를 수여한 기사 등이 단편적으로 전한다. 수차에 걸친 이주의 누적 규모를 20만 명 이상으로 보는 것은 사료의 단편성을 감안한 발표자의 해석적 추정이며, 학계의 실증적 합의 수치는 아님을 밝혀 둔다.

[5] 다이호(大寶) 율령은 701년, 『일본서기』는 720년 도네리 친왕(舍人親王) 주관으로 완성되었다. ‘일본’ 국호와 ‘천황’ 칭호의 공식화도 7세기 말~8세기 초의 일이다.

[6] 『일본서기』의 이른바 ‘임나일본부’ 서사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는 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창비, 2010 참조.

[7]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김유경 편역, 『부여 기마족과 왜』, 글을읽다, 2006.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 이래, 야마토 왕권 형성에서 한반도계 도래인의 역할은 일본 학계 안에서도 꾸준히 논의되어 왔다.

[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하였고, 관백 서한에서 명 정복 후 천황의 베이징 이주 구상까지 언급하였다. 임진왜란의 배경과 국제관계에 대해서는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참조.

[9] 메이지 초기의 정한론(征韓論, 1873) 논쟁에서 쇼와기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이르는 대륙 팽창 노선의 연속성에 대한 논의는 일본 근대사 연구의 오랜 주제이다.

[10] 주류 학계의 통설은 야마토 정권의 자생적 성립을 전제하며, 임진왜란은 전국(戰國) 통일 후 다이묘 세력의 배출구 확보 등 국내 정치적 요인으로, 근대 일본의 팽창은 서구 제국주의 모방이라는 근대적 현상으로 설명한다. 본고의 ‘본토 회복 서사’는 이러한 실증적 인과 설명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기 지속의 심층 서사(mythistory) 차원에서 제기하는 해석적 가설이다. 신화와 역사 서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William H. McNeill, “Mythistory, or Truth, Myth, History, and Historians,” American Historical Review 91-1, 1986 참조.

[11] 조선총독부는 1925년 조선사편수회를 설치하여 『조선사』 37책을 편찬하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이 주도한 이 사업은 단군조선을 신화로 격하하고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에 국한하는 타율성론·정체성론의 골격을 만들었다.

[12] 본 장 제2~4절의 논의는 본 컨퍼런스〈위기 속의 창발〉(19세기 말 민족종교 발생의 사회사적 배경 및 비교종교학적 고찰)과 〈후천개벽의 사상사〉(인존·해원상생·정신개벽 사상의 계보와 인간관의 변화)의 주제와 조응한다.

[13] 위기 시대 민중 종교운동의 비교 연구로는 Norman Cohn, The Pursuit of the Millennium, Oxford University Press, 1957(중세 유럽 천년왕국운동) 참조. 청 말의 태평천국(1851~1864), 북미 원주민의 고스트댄스(1890) 등도 같은 유형에 속한다.

[14] 최제우의 가르침은 한문 경전 『동경대전(東經大全)』과 한글 가사 『용담유사(龍潭遺詞)』로 전한다. 경전을 한글 가사로 지어 아녀자와 민중에게 직접 전한 것 자체가 개벽적 실천이었다.

[15] 증산의 언행은 『대순전경』 등으로 전하며, 그 사후 법통을 계승한 교단으로 보천교·증산도·대순진리회 등이 있다.

[16] 나철은 1907년 을사오적 처단을 기도한 자신회(自新會)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1909년 음력 1월 15일 단군교 (이듬해 대종교로 개칭)를 중광(重光)하였다. 1916년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일제의 교단 탄압에 항거하여 순명삼조(殉命三條)를 남기고 조천(朝天)하였다.

[17]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원불교 『정전(正典)』 총서편의 개교표어. 박중빈은 1916년 대각(大覺) 후 저축조합 운동과 전남 영광 길룡리 간척으로 실천 공동체를 세웠고, 1924년 불법연구회를 창립하였다(1948년 원불교로 개명).

[18] 해월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 법설과 「내수도문(內修道文)」 참조. 천도교 소년회의 방정환은 1922년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19] 통계청, 「2015 인구주택총조사: 종교 부문」. 종교 인구 비율은 개신교 19.7%, 불교 15.5%, 천주교 7.9% 순이며, 원불교·천도교·대종교 등 민족종교 계열은 각각 0.3% 미만으로 집계되었다.

[20] 조선총독부는 「포교규칙」(1915) 등으로 신도(神道)·불교·기독교만을 ‘종교’로 인정하고 민족종교를 ‘유사종교’로 분류하여 경무국 단속 아래 두었다. 차경석의 보천교는 1920년대 한때 수백만 신도로 추산되었으나 1936년 강제 해산되었고, 대종교는 1942년 임오교변(壬午敎變)으로 윤세복 이하 지도부가 대거 투옥되고 다수가 옥사하였다.

[21] 무오독립선언(1919)의 서명자 다수와 북로군정서 지도부가 대종교인이었으며, 임시정부의 신규식·조완구·박찬익 등 요인들도 대종교적 배경을 지녔다.

[22] 개천절은 대종교의 경축일에서 기원하여 1949년 국경일로 제정되었고, 단군기원(檀紀) 연호는 1948~1961년 공용되었다. 홍익인간 교육이념(각주 32 참조)과 함께 신생 공화국의 상징 체계에 수용된 대종교적 유산이다.

[23] 박은식, 『한국통사(韓國痛史)』, 1915. 백암은 결론에서 나라의 형체(國魄)는 멸할 수 있어도 나라의 혼(國魂)인 역사가 살아 있으면 국가는 부활한다고 하였다.

[24] 신채호, 「독사신론(讀史新論)」, 《대한매일신보》, 1908.

[25] 신채호, 『조선상고사』 총론(《조선일보》 연재, 1931).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 상태의 기록이니라.”

[26]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는 문헌상 전거가 확정되지 않은 채 단재 정신의 요약으로 널리 회자된다. 본고에서 ‘역사는 혼’이라는 명제는 단재의 낭가사상과 백암의 국혼론을 아우르는 민족사학의 핵심 테제로 사용한다.

[27] 신용하,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28] 대종교는 1909년 나철이 중광(重光)하였고, 그 교단 조직은 북간도 무장투쟁의 인적·조직적 기반이 되었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대종교 지도자였으며, 청산리 대첩(1920)의 주역들 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 본 컨퍼런스 제4세션의 논점이다.

[29] 김기석(金基錫, 1905~1974)은 평북 용천 출생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학·도호쿠제국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으며, 해방 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학장과 한국교육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현대정신사』, 『철학개론』, 『윤리전서』 등의 저술을 남겼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기석」 항목 참조.

[30] 김기석, 『남강 이승훈』, 1964(재간: 한국학술정보, 2005).

[31] 함석헌, 『뜻으로 본 한국역사』(초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950; 개정판 한길사). 함석헌 역시 오산학교에서 남강과 다석 류영모의 훈도를 받았다.

[32] 대한민국 교육법(1949) 제1조는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라고 규정하였고, 이 이념은 현행 교육기본법 제2조에 계승되어 있다.

[33] 함석헌이 1970년 창간한 《씨알의 소리》는 군사정권기 재야 저항 담론의 거점이었다. 오산학교 인맥이 해방 후 교육계와 종교계로 확산된 경로에 대해서는 본고 Ⅱ장 7절 참조.

[34] 세계은행(World Bank) 자료 기준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962년 약 120달러에서 2020년대 3만 5천 달러 수준으로 성장하였다.

[35] Alice H. Amsden, 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Oxford University Press, 1989.

[36] Carter J. Eckert, Offspring of Empire: The Koch’ang Kims and the Colonial Origins of Korean Capitalism,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91; Gi-Wook Shin &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37] 오욱환, 『한국 사회의 교육열: 기원과 심화』, 교육과학사, 2000.

[38] 대한민국 헌법 전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39] Joseph S. Nye, Soft Power: The Means to Success in World Politics, PublicAffairs, 2004.

[40]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 W. Norton, 1997.

[41] 백낙청,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 창작과비평사, 1994.

[42] IMF, World Economic Outlook Database 기준 구매력평가(PPP) 1인당 GDP에서 한국은 2018년을 전후하여 일본을 추월하였다. 시장환율 기준으로도 양국의 격차는 사실상 소멸하였다.

[43] 우실하,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 소나무, 2007;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44] 홍산문화(기원전 4500~3000)의 담당 주체를 둘러싸고 중국 학계는 중화문명 기원론(요하문명론)의 근거로, 한국 학계 일부는 고조선 문화권과의 연관 속에서 해석한다. 어느 쪽이든 단정적 귀속은 시기상조라는 신중론이 있으며, 본고는 이를 ‘공유 기억의 자원’ 차원에서 다룬다.

[45] 『맹자』 양혜왕 상·공손추 상의 인정(仁政)론. 남북 융합 경제 구상의 상세한 논의는 발표자의 별고 「화평한 남북국 시대」(202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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