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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도 수리 기사의 직업정신이 필요하다!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10-13 20:44:52


스마트폰 충전 단자에 문제가 생겨 서비스센터에 다녀왔다. 몇 번 들러본 곳이지만 갈 때마다 친절하고 수리도 확실하다. 담당 기사는 휴대전화를 분해해 충전 단자 쪽 회로판을 교체한 뒤, 고장 원인과 수리 내용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집에 돌아온 뒤에는 사용에 불편한 점이 없는지 확인하는 전화까지 걸려 왔다. 기술에 친절을 더하고, 자신이 한 일의 결과까지 챙기는 모습을 보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오래전 노트북을 수리하러 갔던 일이 떠올랐다. 여의도의 두어 평 남짓한 작업실에는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노트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액정을 손보는 까다로운 작업이었는데, 기사는 능숙하게 기기를 분해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말끔하게 고쳐 놓았다. 나도 기계 만지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직접 노트북 액정을 열었다가 오히려 전체를 망가뜨린 적이 있다.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고, 자신감과 전문성 사이에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

자동차가 고장 났을 때는 이런 차이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멀쩡하던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거나 교차로에서 잠시 멈춘 차가 움직이지 않으면 눈앞이 캄캄해진다. 이때 원인을 정확히 짚어 내고 차를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정비 기사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자동차의 구조를 안다는 것은 부품 이름을 줄줄 외운다는 뜻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증상에서 보이지 않는 원인을 찾아내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줄 안다는 뜻이다.

물론 모든 기술자가 그런 신뢰를 주는 것은 아니다. 진단을 잘못해 엉뚱한 부품부터 바꾸는 사람도 있고, 고객이 잘 모른다는 사실을 이용해 불필요한 수리를 권하는 사람도 있다. 고객은 의심이 들어도 전문지식이 부족해 반박하기 어렵다. 나는 그래서 한 번 거래해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오래 관계를 유지한다. 비용이 합리적인지, 원인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수리한 결과에 책임을 지는지를 함께 본다.

한번은 자동차 검사를 받으러 갔다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다. 담당 기사는 차에 문제가 있다며 예상보다 훨씬 비싼 견적을 내밀었다. 수리하지 않으면 검사를 통과하기 어렵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평소 거래하던 정비소에서 고쳐 오겠다고 하자 검사필증을 내주었다. 설명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곳을 나온 뒤에는 차량 운행에도 문제가 생겨 결국 견인차를 불러야 했다. 익숙한 정비소로 옮기고 나니 수리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고, 비용도 처음 견적의 3분의 1 정도에 그쳤다.

당시 운행 문제가 왜 생겼는지 내가 기술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객에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설명했는지, 수리의 필요성과 비용을 정직하게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전문성이 신뢰의 근거가 되기도 하지만, 상대의 무지를 이용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 경험이었다.

이 문제는 작은 정비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이 생활 깊숙이 들어온 지금은 거대한 통신기업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2025년 SK텔레콤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대표적이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약 2,3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고를 조사한 뒤, 안전조치 의무와 유출 통지 의무 위반을 이유로 그해 8월 약 1,348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라는 사실만으로 고객의 정보가 안전하게 보호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입자는 통신망의 보안 상태를 직접 점검할 수 없다. 기업이 필요한 조치를 했으리라고 믿고 서비스를 이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전문적인 조직일수록 설명과 책임의 의무가 더 무거워야 한다. 문제가 생겼을 때 원인을 얼마나 정확히 밝히는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 같은 잘못을 막을 장치를 마련하는지가 중요하다. 내 휴대전화를 고쳐 준 기사가 수리 후의 불편까지 확인했던 태도는 대기업에도 요구되는 직업정신이다.

나는 이런 전문성과 책임이 사물의 수리나 신체의 치료에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가르치는 교육, 갈등을 조정하는 행정, 공동체의 방향을 정하는 정치에도 필요하다. 오히려 다루는 문제가 복잡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이 많을수록 더 높은 수준의 판단과 책임이 요구된다.

고대 그리스 철학이 덕과 앎, 기술의 관계를 거듭 물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다만 인간을 잘 이끄는 능력을 기계를 잘 고치는 기술과 그대로 같다고 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엇인가를 제작하는 기술인 테크네와, 인간에게 좋은 삶이 무엇인지 헤아리고 행동하는 실천적 지혜인 프로네시스를 구별했다. 정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함께,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판단하는 지혜를 요구한다.

자동차 수리에서는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한다는 목표에 비교적 쉽게 합의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바람직한지부터 의견이 갈린다. 같은 정책이라도 누구에게는 혜택이 되고 누구에게는 부담이 된다. 효율을 높이는 조치가 약자의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능력에는 사실을 파악하고 수단을 선택하는 기술뿐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를 공정하게 조정하는 판단이 포함되어야 한다.

계획이론가 토머스 라이너(Thomas Reiner)가 제시한 ‘가치의 기술자’라는 표현도 이런 문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는 계획가의 역할을 논하면서 이 개념을 사용했다. 나는 이 표현을 정치에도 적용해 보고 싶다. 좋은 정치인은 현실을 다룰 수 있는 전문성과 함께, 그 능력을 어떤 가치를 위해 사용할 것인지에 대한 성찰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가치의 기술자라고 해서 시민을 대신해 좋은 삶을 결정할 권한까지 갖는 것은 아니다. 시민은 전문가가 마음대로 고쳐 놓을 수 있는 부품이 아니다. 자신의 요구를 말하고,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며, 공동체의 방향을 함께 결정하는 주체다. 정치의 전문성은 시민의 판단을 대신하는 권위가 아니라, 시민이 더 잘 판단하고 함께 선택할 수 있도록 돕는 능력이어야 한다.

문제를 한국 정치로 돌리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우리 정치인들은 권력을 얻는 방법에 비해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얼마나 익히고 있는가. 선거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능력과, 민생의 어려움을 줄이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은 다르다. 전자에 능숙하다는 이유만으로 후자까지 보증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 때마다 물갈이 요구가 쏟아진다. 그러나 새 인물이 들어온다는 사실만으로 정치가 좋아지지는 않는다. 초선이라고 무능한 것도 아니고, 여러 번 당선됐다고 유능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공부하는 태도, 현장의 이야기를 듣는 능력, 다른 의견을 조정하는 인내심, 그리고 자신이 만든 법과 정책의 결과를 확인하는 책임감이다. 정당은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고 길러 내는 조직이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법안 발의 건수나 방송 출연 횟수, 상대 진영을 향한 공격의 강도에 머문다면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법안을 많이 냈다는 사실만으로 시민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제도가 왜 작동하지 않는지 살피고, 실행에 필요한 예산과 인력을 따지며, 시행 뒤의 문제까지 고쳐야 비로소 일이 완성된다. 수리 기사가 부품을 교체한 횟수만 자랑하고 차가 제대로 움직이는지는 살피지 않는다면 누가 다시 그를 찾겠는가.

대통령에게는 그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한 분야에서 쌓은 경력과 명성이 곧바로 국가 운영 능력이 되지는 않는다.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시민의 목소리를 듣고, 헌법이 정한 권한의 한계를 지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국가 운영은 자신의 확신을 관철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그 확신을 끊임없이 검증받는 일이기 때문이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과 그 뒤의 사태는 이 문제를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헌법재판소는 2025년 4월 4일 재판관 전원일치로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어 2026년 2월 19일에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되었다. 형사재판의 최종 확정 여부와 구별하더라도, 대통령의 권한 행사에 대해 이처럼 중대한 헌법적·형사적 판단이 내려졌다는 사실은 정치의 책임을 새삼 묻게 한다.

이 사태를 정치 초보자의 미숙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경험 부족과 권한 남용은 구별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유능하다는 것은 원하는 일을 밀어붙이는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하고, 법과 절차를 지키며, 권력에 대한 견제를 받아들이는 것까지 포함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도 지켜야 할 한계를 무너뜨리는 데 쓰인다면 공동체를 해치는 능력이 될 뿐이다.

정당 역시 이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당마다 정책과 지지 기반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시민이 묻는 것은 그 차이가 실제 삶에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느냐는 것이다. 주거비 부담을 얼마나 줄였는지, 돌봄의 공백을 어떻게 메웠는지, 청년이 미래를 계획할 조건을 얼마나 넓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진영의 잘못을 감싸고 상대의 실패만 부각하는 일에 능숙하다면, 정당의 전문성은 공동체보다 조직의 생존에 봉사하게 된다.

막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뿐 아니라 그 신념을 행동으로 옮겼을 때 생길 결과까지 감당해야 한다. 좋은 뜻이었다는 말로 피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국민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더라도 국민의 삶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면, 무엇을 잘못 판단했는지 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한다.

그렇다고 정치의 모든 실패를 개인의 인품이나 능력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잘못된 진단을 걸러 내고, 무리한 결정을 제어하고, 실패한 정책을 수정할 제도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유능한 사람을 뽑는 일과 누구라도 책임을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일은 함께 가야 한다. 좋은 정치는 한 사람의 탁월함에 기대는 만큼이나 여러 사람의 오류를 교정하는 체계에 달려 있다.

서비스센터에서 돌아온 뒤 받았던 짧은 전화가 다시 생각난다. 수리한 뒤 사용하는 데 불편은 없는지 묻는 전화였다. 그 말에는 자신이 한 일이 상대의 생활에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확인하겠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나는 우리 정치에서도 이런 태도를 보고 싶다. 법을 만들고 예산을 집행한 뒤, 시민의 삶이 실제로 나아졌는지 되묻는 정치 말이다.

고장 난 휴대전화 하나를 고치는 사람도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고 결과를 확인한다. 하물며 수많은 사람의 삶을 맡은 정치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정치를 하겠다는 사람에게 거창한 구호를 듣기 전에 묻고 싶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어떻게 고칠 것인가. 그리고 고친 뒤에도 끝까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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