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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이 모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이야기
  • 알렉세이정 칼럼리스트
  • 등록 2026-05-24 18:20:31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세워진다. 이에 국가 내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 사이에 민족주의 감정이 대두되면서 혼란이 찾아오는 위기가 계속 있었지만 요시프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국가 해체로까지 이어진다. 티토는 그동안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오며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코소보에서 폭력 사태가 분화하기 시작하면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티토가 후계자를 직접 정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유고 연방의 정치권력 체제는 집권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KJ)의 1당 독재 체재를 유지하면서 각 공화국 출신의 대통령들이 1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로 개헌된다. 그러나 이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생전의 티토는 공산주의 정권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인한 수정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미소 냉전으로 구분되던 양 진영에서 벗어나 제 3세계를 주도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 진영이든, 공산 진영이든 어디든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했다. 

유고슬라비아와 지금은 해체된 7개 국가,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그런 상황에서 티토의 이러한 제3 세계 수정 자본주의 정책으로 자유 세력들과 공산 세력이 공존했던 곳이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서방과의 경제 교류와 문화 교류 등등으로 인해 이미 자유 진영과 상호 신뢰를 구축해 놓았다. 반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나 중공, 북한과의 연계성을 통해 그들과 가까웠고 보스니아의 경우,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알바니아, 터키와 관계가 깊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시리아까지 교역이 가능했던 국가였다. 이러한 체제들을 모두 수용해서 하나로 묶었던 것이 티토였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은 유능한 지도자가 있을 때, 뜻을 함께하여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만 그 유능한 지도자 죽고 없어진 상황에 사후 대책도 수립되지 않은 혼란한 상황이라면 서서히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즉, 연방을 걷어 치우고 각자도생의 길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발호되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의 개념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는 기존의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슬라브권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그 민족주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구심점은 제각기 달랐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구심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이탈리아계 슬라브인의 비중이 80%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군이 달마티아 해안가와 슬로베니아 본토를 장악하면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그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군이 철수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어도 이들 이탈리아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며 남슬라브계와 혼혈한 2~3세대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되어갔다. 이렇게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이탈리아계가 되어가다보니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와는 민족적으로 이질적인 형태를 띄워갔다. 게다가 종교도 카톨릭이고 슬라브계가 주축인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는 정교회였다. 단 보스니아의 경우, 알바니아계와 터키계, 무슬림으로 개종한 슬라브계가 뒤섞인 이슬람이 대다수였다. 그러다보니 이 이질적인 형태의 민족주의에 구심점은 종교가 자리잡으니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세르비아계를 늘 도와줬던 소련의 경제가 휘청였다. 소련이 어려워지니 유고슬라비아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자 여기에 슬슬 자유진영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라자르 콜리셰프스키(Лазар Колишевски)가 티토를 승계하게 되자 여기에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의 정권 중앙집중화를 노리고 콜리셰프스키의 하야를 요구하자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자는 국가의 지방분권화를 원하며 자그레브와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고슬라비아가 이렇게 서서히 분할의 조짐이 보이자 집단 서방과 미국은 냉전 시기 막판에 승기를 잡으며 공산 진영에 대한 우위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내정에 서서히 개입하게 된다. 우선 당시 집단 서방은 프랑스의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을 앞세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슬로베니아 대표를 맞고 있는 밀란 쿠찬(Milan Kučan)을 만났다. 류블라냐에서 벌어진 미테랑과 쿠찬의 회동은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슬로베니아가 이탈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다음으로 접촉한 인물이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인의 처우에 대해 비판하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가 티토의 눈 밖에 나서 투옥된 인물이다. 투지만은 이때부터 독립 크로아티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투지만은 우선 캐나다로 가서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을 만났다. 이 때 미국, 캐나다, 영국의 정치인들과 접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게 되면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이 크로아티아를 지원하고 돕겠다는 확약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들을 차례대로 독립시켜 소련을 붕괴시키는 작업에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 동유럽 내 불고 있는 민주화 시위들을 들 수 있다. 특히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발트 3국 등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더 강력한 태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의 약화되고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해 자신들이 발칸에 진주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독립국가연합을 서서히 해체시켜버리는 것이다. 티토가 만든 제3 세계의 정책은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다. 이후 캐나다 여행에서 돌아온 투지만은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도 민주화를 결정하고 각 공화국 별로 선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흐름에 맞춰 1989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을 창당하여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때도 미국,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들의 지원을 받았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또한 미테랑의 지지를 받아 1986년 5월에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표가 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유고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하며 독립전쟁을 벌인다.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국토방위군 등으로 게릴라 전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었던 유고 연방정부는 고작 개전 10일 만인 1991년 7월 9일 전투를 중단하고 철군하면서 사실상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10일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유고 연방군은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도 없었던 것도 있지만 크로아티아 내에서 투지만을 중심으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후방에 문제가 생겨 연방군이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브리오니 섬에서 체결된 브리오니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며, 슬로베니아는 3개월 뒤인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분리 독립을 꾀했고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 결과 93%에 달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 찬성이 결정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같은 날인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이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면서 기나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다. 1991년 7월 10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쟁취했으나 크로아티아는 1991년 9월 17일까지 독립 선언을 연기한다는 조건 하에 일단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중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보스니아에서 터졌다. 앞선 1년 전 보스니아는 최초로 다당제 총선이 열었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의회에서 공산당이 축출되고 3개 민족을 기반으로 한 민족 정당이 의회를 장악한다. 이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선언을 하는 가운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계속 유고 연방에 존속해 있으면서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계속 존속할 것인지, 그리고 보슈냐크 무슬림들과 보스니아에 남아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독립을 요구했기에 독립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10월 24일, 세르비아계를 기반으로 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국민의회 위원이 사라예보의 국민의회를 포기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의회로 합류하면서 1990년부터 시작된 3개 민족 연합 통치는 완전히 붕괴했다. 


1992년 1월 9일에 세르비아계 의회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보스니아로부터 독립했고 1992년 8월에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스니아는 이후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지에 대한 결정을 위해 국민투표를 열었다. 이 국민투표는 대다수의 세르비아인이 보이콧하면서 일방적인 형태로 변했고 99.7%로의 득표율로 독립이 확정되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2일에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인들로 인해 보스니아 전국에서 긴장이 조성되었고 1992년 3월 7일 세르비아 민병대가 카프리냐 주위의 보스니아인-크로아티아인 마을을 공격하야 살인 및 약탈을 자행하면서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3월 15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Bosanski Brod)와 보스니아인 마을 고라즈데(Goražde)가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소규모 공격이 자행된 이후 3월 19일에는 아드리아해 항구인 네움에 세르비아계 포병들 포를 사격하여 공격이 이어졌고, 24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 30일에는 비옐리나에서 전투가 시작되면서 4년에 걸쳐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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