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자연재해, 상상을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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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동인을 오명에 빠뜨린 자들

성남시 대장동 개발 사업에서 ‘천화동인’은 단순한 회사 이름이 아니었다. 화천대유자산관리를 중심으로 한 민간 측이 2015년 전후로 설립한 특수목적법인(SPC) 계열의 투자 창구였다. 천화동인 1호부터 7호까지 SK증권 특정금전신탁 형태로 성남의뜰(시행사)에 지분을 보유하며, 극소액의 출자로 수천억 원대 배당을 가져간 구조의 핵심 축이었다. 이름 자체는 주역 13괘 天火同人에서 직접 따온 것으로, 화천대유(14괘 火天大有)와 짝을 이뤄 의도적으로 선택했다. 사업 설계와 수익 배분 과정에서 이 이름이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민간 사업자들(김만배 측과 남욱·정영학 등)이 그 구조를 운용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천화동인 괘의 본뜻과 계사전의 ‘견기이작’을 기준으로 그 과오를 교훈으로 삼는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하늘 아래에 불이 있다.
불이 위로 타올라 하늘과 같은 방향을 향하니,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인다. 이것이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괘사(卦辭)는 분명히 말한다.
「 同人于野 亨 利涉大川 利君子貞 」
들(野)에서 함께 하니 형통하다. 큰 강을 건너는 것이 이롭고, 군자가 바르게 지키는 것이 이롭다.
‘들(野)’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다. 혈연·학연·지연의 좁은 문 안이 아니라, 모든 이가 볼 수 있는 광장에서 뜻을 모으라는 가르침이다. 육이효는 경고한다. 「同人于宗, 吝.」 종족끼리만 뭉치면 인색하고 막힌다.
구삼효는 수풀에 병사를 숨기고 높은 언덕에서 엿보는 형상을 보여 주며, 그런 은밀한 도모는 삼 년이 지나도 일어나지 못한다고 한다.
진정한 同人은 사사로운 이익의 울타리가 아니라, 하늘의 밝은 불(離)이 비추는 공정함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 위에야 대유(大有)가 따른다. 동인이 먼저이고 대유가 나중이다. 순서가 뒤집히면 이미 역(逆)이다.
대장동의 그들은 이 이름을 가져다가 정반대의 구조를 세웠다.
열린 들(野)의 同人이 아니라, 극소수의 닫힌 문 안에서 이익을 나누는 同人을 만들었다. 공공이 절반을 출자하고도 배당에 상한을 두고, 민간이 지분 7%로 대부분의 초과 이익을 가져가는 배분 방식. 미리 땅을 선점하고, 공영개발의 명분을 민간의 실질 주도권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 이름만 천화동인이고, 실질은 종족의 동인, 수풀에 숨은 동인이었다.
계사전은 군자의 도리를 이렇게 이른다.
「君子見幾而作, 不俟終日」
군자는 기미(幾)를 보고 일을 일으키니, 하루가 다 가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기미란 변화의 첫 실마리,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나 이미 시작된 흐름의 징후다. 대장동의 구조가 잡히던 시점, 수익 배분의 불균형이 설계되던 그 순간, 이미 기미는 있었다. 공공의 이익이 제한되고 민간의 이익이 무한히 열리는 그 비대칭, 소수가 독점하는 배당의 구조, 이름과 실질이 어긋나는 전도(顚倒). 이 모든 것이 ‘종족의 동인’으로 기울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러나 그들은 기미를 보고 바로잡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미를 수익의 기회로 삼아 밀어붙였다. 견기이작이 아니라, 견기이탐(見幾而貪)이었다. 변화의 조짐을 포착하되, 공(公)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사(私)를 향해 질주한 것이다.
주역은 동인 다음에 대유를 두고, 대유 다음에 겸(謙)을 둔다. 크게 소유할수록 더욱 낮추라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이름이 대유를 표방하고 동인을 자처하면서도, 겸손의 기미를 외면한 채 이익의 극대화만을 추구했을 때, 그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열린 들의 동인이 닫힌 문의 동인으로 변질되는 순간, 하늘의 불은 더 이상 밝게 비추는 광명이 아니라, 자신을 태우는 불이 된다.
이 서사가 전하는 핵심 교훈
이름은 빌려 올 수 있으나 철학은 빌려 올 수 없다.
천화동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내걸었으나 실질이 ‘들에서 함께하는 동인’이 아니라 ‘문 안에서 뭉치는 동인’이었기에, 이름은 오히려 자신들을 고발하는 거울이 되었다.
기미를 보고도 공(公)의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재앙의 씨앗이 된다.
견기이작은 기회를 포착하는 기술이 아니라, 변화의 조짐을 보고 하늘의 도리에 맞게 스스로를 바로잡는 행위다. 기미를 탐욕의 도구로 삼는 순간 군자의 도는 소인의 계산으로 전락한다.
진정한 대유는 열린 동인 위에서만 가능하다.
소수가 독점하는 이익은 오래가지 못한다. 동인이 먼저이고 대유가 나중이라는 순서를 뒤집으면, 대유 또한 결국 허상이 된다.
지도자와 사업의 설계자는 항상 ‘들판’을 기준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한다.
내가 모으는 사람들이 열린 광장에 서 있는가, 아니면 닫힌 문 안에 숨어 있는가. 내가 포착하는 기미가 바로잡기 위한 신호인가, 아니면 더 크게 취하기 위한 신호인가.
천화동인 괘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이 모으는 同人은 들판의 同人인가, 아니면 문 안의 同人인가.
당신이 포착하는 기미는 바로잡기 위한 기미인가, 아니면 더 크게 취하기 위한 기미인가.
군자가 바르게 지키지 않으면, 同人은 동인이 아니요, 大有는 대유가 아니다.
이름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실질이 그 이름을 배반하는 순간 이미 역천이다.
그 교훈을 우리는 대장동의 이름들에서 다시 한 번, 더 아프게 읽게 된다.
참고 : 천화동인괘 설명 https://essayphilosophy.net/news/view.php?idx=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