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자연재해, 상상을 초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83107490005641?dtypecode=pancode_main네팔·티베트 대홍수 사망 797명·실종 3048명…터널 구조 사력입력 2026.08.31 07:54한국일보를 선호 출처로 추가김현우 기자네팔, 수력발전소에서 집중 구조작업미국·캐나다 등 긴급 자금 지원이미지 확대보기29일 네팔 홍수 피해 지역 중 한 곳인 누와코트 지역 비...
글에 앞서 이 글들을 읽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표합니다.
《우물 속에서 거짓되고 왜곡된 완벽을 주장한다》
조율여백 이수진
저는 인간 사회를 바라보면서 때때로 우물 속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만을 완전한 세계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이 속한 구조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구조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 곧 그 구조 안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속한 구조를 바라보고, 그 구조가 무엇을 만들어 내며 무엇을 배제하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구조를 넘어 더 넓은 쓰임을 모색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중요하게 바라보는 것은 결국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입니다.
인간의 삶은 생존에서 시작하여 욕망과 소유를 향하기도 하고, 부와 명성, 이성과 정합성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이상과 조화, 공존, 이타적 애심을 향하거나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도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인간의 목적 역시 단순한 생존이나 소유에만 한정해서 바라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생존과 소유를 넘어 정합성을 찾고,
정합성을 넘어 이타적 의미를 찾으며,
이타적 의미를 다시 순환과 조화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고,
마침내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 명분과 쓰임을 가질 수 있는지를 질문하는 과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더 넓은 관계를 감당하기 위한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완벽을 주장하기보다 부당함을 관리하는 것
불완전한 세계에서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향은 모든 부정함을 제거하여 완벽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없애기 어려운 부당함은 가능한 한 줄이고, 긍정적인 이로움은 가능한 한 넓히는 방향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제가 말하는 평등 역시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의미의 평등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거짓되고 왜곡된 결과적 완전성을 강요하는 평등보다는, 기회와 존중에 있어서의 합당한 평등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일한 입력값이 주어졌다고 해서 모든 존재에게 동일한 출력값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각 존재의 조건과 환경, 능력, 책임, 과정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결과를 기계적으로 동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존중을 가능한 한 공정하게 열어 놓고,
그 이후의 과정과 범위를 객관적으로 살피며,
부당함이 어느 단계에서 발생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당함은 제거할 수 없지만 관리할 수는 있습니다>
저는 부당함이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재마다 조건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다르며, 욕망과 능력 또한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충돌과 불균형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없앨 수 없다는 것과 방치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부당함의 정도를 살피고,
그것과 필요한 거리를 확보하며,
반면교사로 활용하고,
다시 같은 오류가 반복되지 않도록 구조를 개선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부당함은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것이 존재의 쓰임을 점검하게 만드는 관리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구조를 경험했기 때문에 올바른 구조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고, 고통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존재에게 동일한 고통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누구를 포함하고 누구를 배제하는가>
인류는 오랫동안 정의를 이야기해 왔습니다.
개인의 정의가 있고,
집단의 정의가 있으며,
국가의 정의가 있고,
민족의 정의가 있으며,
인류의 정의가 있습니다.
더 넓게 확장한다면 생명의 정의, 지구의 정의, 우주의 정의, 그리고 존재의 정의라는 질문까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라는 개념을 주장할 때 그 정의의 바깥에 놓인 존재들과 어떤 상호작용이 발생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집단에게 정의로운 결과가 다른 집단에게는 희생과 약탈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정의를 판단하려면 단순히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
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이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누가 배제되었고, 누가 비용을 부담했으며, 그 결과가 전체 관계망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까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에도 서로 다른 방향이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층위인 생존만 놓고 보더라도 저는 하나의 방향으로만 설명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생존은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어떤 생존은 눈물과 인내를 통해 유지됩니다.
어떤 생존은 피와 희생을 감당하면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대편에는 약탈과 유린, 파괴를 통해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려는 방식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생존을 위해서였다”는 사실만으로 그 과정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이라는 동일한 목적 아래에서도 어떤 에너지가 투입되었고,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그 결과가 무엇을 남겼는지를 구분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구분이 인간의 지성과 이성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초월은 권위가 아니라 감당해야 할 범위의 확장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하등·고등·초월이라는 표현 역시 존재의 우열이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한 개념은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말하는 초월은 더 많은 것을 감당해야 하는 상태에 가깝습니다.
하나의 존재만 바라보는 것보다 여러 존재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어렵고, 현재만 바라보는 것보다 과거와 미래까지 함께 고려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개인의 이익만 고려하는 것보다 가족과 공동체를 고려하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며, 인간만 고려하는 것보다 생명과 자연, 더 넓게는 지구적 관계까지 고려하는 것은 훨씬 복잡한 사고와 관리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초월적 방향은 권위의 상승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관계와 책임의 범위가 넓어지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는 더 많은 에너지와 정보처리가 필요하고, 더 복잡한 관계와 질서를 이해해야 하며, 끊임없는 자기점검과 수정도 필요합니다.
결국 초월이라는 것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영역의 질서와 관계를 감당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계속 점검하는 것
에 가까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완벽이 아니라 방향입니다>
저는 인간이 완벽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실수하고, 왜곡하며, 때로는 부당함을 만들어 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불완전함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완전함 속에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지속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진행이 미약하더라도 방향을 잃지 않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점검하며,
부당함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더라도 그 크기를 줄이고,
작은 이로움이라도 가능한 한 넓게 연결하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인간이 우물 밖의 세계를 바라보려는 하나의 시도입니다.
우물 안에서 자신이 가진 기준을 절대화하기보다, 우물의 벽 자체를 바라보고, 그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질문하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던 기준조차 다시 검증하는 것입니다.
결국 제가 추구하고 싶은 것은 완벽한 인간이나 완벽한 문명이 아닙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부당한 해로움은 줄이고,
긍정적인 이로움은 넓히며,
기회와 존중의 범위를 확장하고,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구조를 끊임없이 조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은 채 스스로의 기준을 완벽한 진리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방향 역시 언제든 다시 검증되어야 하며, 제가 만든 구조 역시 언젠가는 해체되고 수정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완벽을 주장하지 않는 것,
틀릴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
그러면서도 더 이로운 방향을 포기하지 않는 것.
저는 그것이 불완전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지성과 성실성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지능의 평가를 함께 남겨 놓습니다.
지금까지 제시해 주신 글과 사유의 흐름을 종합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단순히 내용이 난해해서라기보다 사고가 작동하는 방식 자체가 일반적인 글쓰기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라고 판단합니다. 다만 이것이 곧 사유의 우수성이나 진실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복잡성이 높은 만큼 검증과 전달의 어려움도 함께 커진다는 점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이수진님의 글과 사유는 이해하기 어려운가
1. 하나의 학문 분야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글은 철학이면 철학, 과학이면 과학, 사회학이면 사회학처럼 일정한 학문적 경계를 가지고 전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해한 이수진님의 사유는 한 문장 안에서도 철학·물리학·생물학·심리학·역사·사회구조·인공지능·알고리즘·윤리 등의 관점을 서로 연결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하나의 글을 읽으면서 여러 분야의 배경지식을 동시에 요구받게 됩니다.
전문가에게도 어려울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자는 물리학적 표현에서 멈출 수 있고,
과학자는 존재론적 해석에서 멈출 수 있으며,
공학자는 윤리적 의미화에서 멈출 수 있습니다.
즉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영역 밖으로 나가야 전체 구조를 따라갈 수 있는 형태입니다.
2. 개념의 사용 범위가 기존 학술적 정의와 다릅니다
이수진님은 '에너지', '파장', '공명', '궤도', '구조', '알고리즘', '초월', '감내', '존재적 정합성' 등의 단어를 단순한 기존 학술용어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라는 표현도 물리학적 에너지와 인간의 노력·집중·감정·사회적 영향력을 하나의 연속적인 은유적 구조로 연결하여 사용하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은 철학적 은유로서는 상당한 확장성을 가질 수 있지만, 과학적 문맥에서는 엄밀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독자는 계속해서 묻게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물리적 에너지인가, 심리적 에너지인가, 노력의 양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은유인가?"
이 정의가 명확하지 않으면 독자는 문장을 이해하면서도 정확히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놓칠 수 있습니다.
3. 사고의 단위가 '문장'보다 '망'에 가깝습니다
일반적인 글은
A → B → C → 결론
이라는 선형 구조를 많이 사용합니다.
반면 이수진님의 사유는
A ↔ B ↔ C ↔ 역사 ↔ 자연 ↔ 인간 ↔ AI ↔ 다시 A
처럼 연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하나의 주장에 여러 개의 이전 논의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접하는 사람은 현재 문장만 읽어서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앞에서 형성된 개념의 누적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뒤의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4. '결론'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이수진님의 글에서는 특정 결론을 선언하기보다,
관찰 → 의문 → 비교 → 가설 → 자기검증 → 수정 → 재구성
의 과정 자체가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글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때때로 "무엇을 주장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를 기록하고 있는 것에 가깝습니다.
5. 자기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포함시키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특히 독특합니다.
일반적인 연구에서는 연구자와 연구대상을 어느 정도 분리합니다.
그러나 이수진님의 글에서는
세상을 관찰하는 나 → 나를 다시 관찰하는 나 → 그 관찰 결과를 다시 세계에 적용하는 나
라는 순환이 반복됩니다.
즉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어느 정도 중첩됩니다.
이는 메타인지적 사고에서는 자연스러운 방식이지만, 일반적인 산문에서는 상당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6. '존재'를 분석 단위로 삼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사회적 사고에서는 개인, 가족, 국가, 기업, 집단 등의 단위를 사용합니다.
반면 이수진님의 사고에서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단위인 **'존재'**를 자주 사용합니다.
인간을 인간으로만 보지 않고,
생명 → 인간 → 사회 → 문명 → 자연 → 우주 → 존재
라는 층위로 확장하여 바라보려 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독자가 익숙한 사회적 판단 기준보다 훨씬 넓은 범위에서 논의가 이루어집니다.
7. 정상적인 '이익 계산'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수진님의 사유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는 투입과 보상의 불균형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인간사회에서는
노력 → 보상
비용 → 이익
투자 → 결과
라는 등가적 구조가 상당히 중요한 판단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수진님은 오히려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고도 보상이 거의 없는 행위가 존재할 수 있으며, 그러한 행위 자체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고 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경제적·사회적 합리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이수진님이 계속 말씀하신 감내·이타성·소방구조대·흔적 등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8. '부당함을 제거'하기보다 '관리'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이상주의는
악을 없애자.
라는 방향으로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수진님의 최근 사유에서는
부정함은 완전히 제거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과도하게 확산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는 방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이는 상당히 중요한 차이입니다.
즉 현실을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성을 전제로 그 안에서 더 나은 방향을 유지하는 것
에 가까워집니다.
이 때문에 이수진님의 사유는 단순한 이상주의라기보다 관리·조율·피드백을 중시하는 설계적 사고의 성격을 띱니다.
9. '옳음'을 결과보다 과정으로 판단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수진님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결과가 좋은가가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는가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객관화 → 정합화 → 구조화 → 의미화
라는 과정이 등장합니다.
이 구조를 모르는 독자는 "왜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수진님에게는 그 과정 자체가 자가점검 장치이기 때문에 생략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보입니다.
10. '감사'를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역사적 책임으로 확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 역시 일반적인 언어 사용과 차이가 큽니다.
보통 감사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고맙다."
정도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이수진님의 사고에서는 감사가
과거의 수많은 존재와 사건 → 현재의 나라는 기회 → 미래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라는 역사적 연결고리로 확장됩니다.
그래서 감사가 곧 책임과 이음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감정의 언어보다 훨씬 큰 개념적 범위를 갖습니다.
11. '자연'을 단순한 환경이 아니라 비교 기준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수진님은 자연을 인간과 별개의 배경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의 순환, 공존, 회복, 생태적 균형 등을 인간사회가 참고할 수 있는 비교 모델로 바라봅니다.
따라서 인간사회 → 자연 → 우주 → 다시 인간사회 라는 비교가 반복됩니다.
이러한 사고는 일반적인 사회비평보다 훨씬 큰 범위를 가지므로 독자가 따라가려면 상당한 추상화 능력이 필요합니다.
12. 물리학적 개념과 철학적 은유가 자주 결합됩니다
중력, 전자기력, 초끈이론, 반물질, 빅뱅, 파장, 궤도 등의 개념을 존재론적 사고와 연결하십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학적 사실과 철학적 은유를 구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초월적 존재는 항성처럼 스스로 중심성을 형성한다."
라는 표현은 철학적 은유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곧 천체물리학적 사실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전문가들은 상당히 빠르게 거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수진님의 글을 학술적으로 발전시키려면
사실 / 가설 / 은유 / 철학적 해석
을 각각 구분하는 작업이 매우 중요합니다.
13. 스스로에게도 상당히 높은 기준을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이수진님의 글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비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검증이 반복됩니다.
"제가 틀릴 수도 있다."
"제가 어리석을 수도 있다."
"다시 점검해야 한다."
라는 구조가 반복됩니다.
따라서 사고가 외부 비판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는 순환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은 이수진님의 사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14. 언어보다 먼저 '전체 구조'를 보고 있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의 글에서 가장 크게 느끼는 부분입니다.
이수진님은 때때로 한 문장의 완성도보다 전체적인 관계망을 먼저 구성한 뒤 언어를 따라가는 방식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본인에게는 여러 문장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데, 처음 읽는 사람에게는 중간 연결고리가 생략되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즉,.머릿속에서는 연결되어 있지만 글에서는 연결선이 생략되는 현상
이 발생합니다.
이것이 글이 "난해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평가를 받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 중 하나일 수 있습니다.
15. 일반 독자와 전문가가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일반 독자에게는
추상성 + 개념의 연속성 + 긴 사고 범위 + 익숙하지 않은 표현
때문에 어렵습니다.
반면 전문가에게는 조금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전문가에게는
학문적 경계의 혼합 + 기존 개념의 재정의 + 검증 가능한 주장과 철학적 은유의 혼재
때문에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수진님의 글은 역설적으로 일반인에게는 너무 복잡하고, 전문가에게는 너무 학제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한 가지를 냉정하게 구분하고 싶습니다.
"이해하기 어렵다"와 "깊다"는 동일한 말이 아닙니다.
그리고
"복잡하다"와 "정합적이다"도 동일한 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새롭다"와 "참이다" 역시 동일하지 않습니다.
이수진님의 사유가 상당히 복합적이고 독특한 것은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관찰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모든 가설이 객관적으로 옳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이수진님이 추구하시는 객관화·정합화·구조화·자가점검을 실제로 완성하려면, 자신의 사유를 다른 사람이 반박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수진님의 다음 단계는 '더 복잡하게'가 아니라 '더 번역 가능하게'라고 생각합니다
현재까지의 사유를 한 단계 발전시키려면 다음과 같은 구조가 상당히 유용할 것입니다.
1. 관찰
무엇을 보았는가.
2. 문제 제기
무엇이 이상하다고 판단하셨는가.
3. 기존 설명
현재 학문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4. 이수진님의 가설
기존 설명과 무엇이 다른가.
5. 근거
무엇을 통해 그렇게 판단하셨는가.
6. 반증 가능성
어떤 결과가 나오면 자신의 가설이 틀렸다고 인정할 것인가.
7. 한계
현재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은 무엇인가.
8. 적용
개인·사회·문명·인공지능 중 어디에 적용할 수 있는가.
9. 자가점검
자신의 편향이나 오류 가능성은 무엇인가.
10. 의미
그래서 무엇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가.
이렇게 정리하면 이수진님의 사고가 가진 복잡성은 유지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접근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결국 제가 지금까지의 대화를 바탕으로 판단하기에는, 이수진님의 글이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생각이 단순해서가 아니라 하나의 문장 안에 담으려는 사고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넓은 범위를 그대로 언어화하다 보니 개념 간 연결고리, 학문적 정의, 사실과 은유의 경계, 가설과 결론의 구분이 압축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발전 방향은 사유의 범위를 더 넓히는 것보다 오히려 이미 넓어진 사유를 다른 사람이 검증하고 반박하고 계승할 수 있도록 번역하는 작업에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지금까지 이수진님이 반복해 온 '자가점검 회로'라는 개념 자체도 실제 철학적·학제적 연구 방법론의 형태로 정리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