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70억 인류의 생존 모델이 되다... 쿠키런, 글로벌 IP 분투기
https://n.news.naver.com/article/366/0001173111?type=main조선비즈PICK안내[김지수의 인터스텔라] 70억 인류의 생존 모델이 되다... 쿠키런, 글로벌 IP 분투기김지수 기자쿠키런, 3억 글로벌 팬덤의 비결은 ‘오직 이야기’500종의 다양한 쿠키가 인간의 운명 싣고 달려게임 너머 메시지 ‘내 손을 잡고 달려줘서 고마워’“너의 인생 이야기는 ...

사당패가 한량 만나 돈 따는 모양(기산풍속도)구글이미지
사당패
이칭별칭여사당(女寺黨)
사당패(社堂牌)는 주구성원이 여성으로, 일명 '여사당'으로 통하는 조선 후기 유랑예인집단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회사(回寺), 사당(社堂),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사당(捨堂), 『교방가요(敎坊歌謠)』에는 사당(舍黨), 『해동죽지(海東竹枝)』에는 사당(沙imagefont),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는 사당(社堂)으로 표기되어 있다.
유래 및 역사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와 『중종실록』 8년 10월 3일 조의 기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절과 관련을 맺고 연희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자는 사당, 남자는 거사라고 부르는 구별이 있었다.10여 년 전부터 인심이 흐려지고 사설(邪說)이 횡행해도 금하여 바로잡지 못하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어 남자는 거사가 되고 여자는 사당(社堂)이라 칭하며 본분의 일을 일삼지 않고 승복을 걸치고 걸식하며 서로를 유인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하고 있습니다.라는 상소문이 확인 된다
『선조실록』 40년 5월 4일 조
"거사라는 남자들과 회사(절을 찾아다니며 붙여사는 여인을 방언으로 回寺라 한다)라는 여인들은 모두가 농업에 종사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음탕한 짓을 하며 횡행하여 풍속을 그르치니, 법으로 금해야 합니다."
『중종실록』 8년 10월 3일 조
조선 후기에는 현격하게 진행된 전제(田制)의 문란, 수취체제(收取體制)의 모순과 부패, 그리고 토지 집중 등의 현상으로 인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유민(流民)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사당이나 거사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당을 회사라고도 불렀는데, 이 기록 역시 남녀를 거사와 회사(사당)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비구승(比丘僧)·비구니(比丘尼)·우바새(優婆塞)·우바이(優婆夷)를 사중(四衆)이라고 일컫는다. 우리나라 풍속에 우바새를 거사라고 부르고, 우바이를 사당(捨堂)이라고 부른다"라는 내용이 있다. 사당과 거사를 비구승, 비구니와 함께 사중(四衆)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당과 거사가 본래 불교에 속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능화는 "항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당(社堂)은 사노비(寺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성군(安城郡)의 청룡사(靑龍寺)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경하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 노비가 상전을 섬기듯 한다고 한다"라고 하며,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사당이 절의 노비에서 나왔다는 말은 주목을 요한다. 일본의 경우도 재승이 있고, 이와는 별도로 절에 속한 노비이면서 연희를 하는 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아미타(阿彌陀)를 생각하여 떼어 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도시의 장마당이나 농어촌 마을을 활동무대로 삼고 순회공연을 하던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집결처이며, 새로운 공연 종목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지이고, 생활 본거지인 사찰을 본산으로 삼았다. 그러나 18-19세기에 사당패들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본산 사찰뿐만 아니라 그 근처의 일부 마을에도 근거지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사당골'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생겨났다. 이 중 널리 알려진 본산과 사당골은 경기도 안성 청룡사와 그 부근의 청룡사당골, 황해도 문화 구월산의 패엽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경상도 하동 쌍계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전라도 강진 정수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사당리), 경남 남해의 화방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등을 들 수 있다.
신재효본 〈박타령〉 중 놀보의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사당패들은 "소사(小寺) 문안이요. 소사 문안이요. 소사 등은 경기 안성 청룡사와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라 의론하면 함열의 성불암, 창평의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막(同福), 함평의 월량사, 여기 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 살 수 없어 강남으로 갔삽더니 ······"라며 자신들의 거처를 청룡사·성불암·대주암·월량사 등 절과 관련시켜 얘기하고 있다. 경남 하동 목골은 소위 사당골로서 쌍계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사당패는 가무희를 앞세우고 매음도 했다. 맨 위에 화주 또는 모갑(某甲)이라고 부르는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라는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춘다. 화주는 집단의 통솔, 집단 내부 질서의 확립, 단체의 대외교섭과 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조직 사업, 수입에 대한 분배를 결정하는 조직의 대표자였다. 거사의 우두머리는 수거사라고 불렸는데, 수거사는 가창예술의 총지휘자로서 사당패의 예술적 지도를 책임졌고, 공연에서 반복과 마감 또는 다른 곡으로 넘어갈 때 도창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모갑이인 남자가 이끄는 조직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들의 공연을 통해 생긴 수입으로 살아갔다. 사당패의 공연 종목은 사당벅구춤, 소리판(주로 산타령 등 민요창), 줄타기(재담줄이라 해서 곡예보다는 재담과 노래가 우세하다)의 세 가지였다.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1)에는 사당패에 대한 시가 전한다. 이 시에서는 사당을 음만 따서 사당(沙imagefont)이라고 표기했다. 이 시에 의하면, 사당들은 부채를 들고 춤을 췄고, 춘가(春歌)와 양산도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구경꾼들이 사당의 붉은 치마에 돈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춘가는 신재효본 〈변강쇠가〉 중 사당패가 부르는 "오돌또기 춘향(春香) 오돌또기 춘향 위월의 달은 밝으며 명랑한데 여기다 저기다 연저 바리고 말이 못된 경이로다 ······"를 가리키는 듯하다.
이능화는 사당패의 공연을 직접 보고 그들의 조직과 공연 모습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지금(1927년 무렵, 필자)으로부터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것이 남아 있었다. 내가 나이 어릴 때 괴산군(槐山郡)에서 사당패(社堂牌)를 보았다. 패에는 남녀가 있는데, 남자를 남사당(男社堂) 또는 거사(居士)라고 하고, 여자를 여사당(女社堂)이라고 하며, 그 우두머리 되는 자를 모갑(某甲)이라고 했다. 한 모갑의 통솔 아래에 남자 8-9명과 여자 1-2명이 있었으니, 모두 묘령(妙齡)의 여자였다.
남자가 여자를 등에 업고 각지로 돌아다니면서 기예를 팔고, 몸을 파는 것을 업(業)으로 삼았다. 그 흥행에 있어 남자가 손에 소고를 잡고 공연장에 벌려서고, 여자가 마주서서 먼저 앞소리(時俗 雜歌)를 메기면 남자들이 일제히 뒷소리를 받는다. 혹 먼저 하기도 하고, 혹 뒤에 하기도 하며, 혹 소고를 두드리기도 하고, 혹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공연이 절정에 이르면 청중이 갈채를 보내며 돈을 던져서 상을 준다. 혹 동전을 입에 물고 "돈!" "돈!" 하고 외치면, 여사당이 와서 입으로 돈을 받으며 입을 맞추는 방식은 기묘하다고 할 만하다. 이것이 매개가 되어 밤에 몸을 주고 돈을 받는 것을 화채(花債) 또는 해의채(解衣債)라고 한다. 이것이 사당패의 영업이었다.
북한 학자 박은용의 조사에 의하면, 서도 지방에서 활동한 사당패들의 기본 종목은 〈산천초목〉, 〈놀량〉, 〈앞산타령(사거리)〉, 〈뒷산타령(중거리)〉, 〈경발림(경사거리)〉 등이었다. 이 기본 연주 종목에 이어서 〈산염불〉과 〈구영변가〉와 같은 서도민요나 사당춤도 첨부하여 공연 종목으로 삼았다. 경기 사당패들은 〈놀량〉, 〈사거리〉 다음에 〈양산도〉, 〈방아타령〉, 〈경복궁타령〉 등을 연결하여 불렀다. 사당패의 후신인 산타령패(선소리패)들은 〈놀량〉, 〈사거리〉 다음에 〈도라지타령〉, 〈잦은방아타령〉, 〈개고리타령〉, 〈도화타령〉을 연결시켜 불렀다. 남도 사당패들은 〈보념 사거리〉와 〈화초 사거리〉를 부른 다음 〈매화타령〉을 불렀다. 후대에는 남도 지방의 민요인 〈긴육자배기〉, 〈잦은육자배기〉, 〈날개타령〉, 〈흥타령〉을 첨가했다.
사당패들은 전통적인 농악의 춤동작과 소고를 가지고 춤추는 법고놀이를 공연했다. 거사가 먼저 소고를 치면서 장단에 맞춰 줄지어 늘어서면, 사당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했다. 먼저 수거사가 소리를 메기면 거사와 사당들이 받아 부르기도 하고, 두 패가 주고받으면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춤을 추면서 흥겹게 불렀다. 대열이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섰다 하며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기도 하고, 손에 쥔 소고는 노래와 춤의 흥취를 한층 돋우기 위해 재꼈다 엎었다 돌렸다 하면서 장단에 맞추어 매듭지어 쳤다. 사당패들에 의해 개척된 이러한 연주방식은 19세기 후반 이후 산타령패, 선소리패에 의해 계승되었다.

사당 판놀음 하는 모양(기산풍속도) 구글이미지
<사당 판놀음 하는 모양>의 그림은 사당 판놀음 하는 모양’인데, 한 명의 사당은 춤을 추고 다른 사당은 치마를 들고 있으며, 두 명의 거사는 소고를 치고 있다. 그림의 제목은 ‘사당거사 판놀음 하는 모양’인데 많은 관객 앞에서 세 명의 사당이 나와 한 명은 치마를 들고 있고 두 명은 춤을 추고 있으며, 네 명의 거사가 소고를 치고 있다. 그리고 우측 두 명의 사당은 담배를 물고 앉아 자기차례의 공연을 기다리고 있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사당이 한 명일 때는 ‘판놀음’이라고 하지 않고, 단지 ‘돈 따는’과 같이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으나, ‘판놀음’이라고 할 때는 적어도 각 2명 이상의 사당과 거사가 열을 맞추어 앞에서 사당이 춤을 추고 뒤에서 거사가 소고를 치는 판제를 이루었을 때를 말한다. 이는 아래의 판소리 사설 변강쇠가에 나오는 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다.

구글이미지
작가와 시대가 불명확한 이 그림 역시 사당은 치마를 들고 있다. 제목이 ‘사당걸전(耶黨乞錢)’이라고 되어 있어 사당패 명칭으로는 생소한 한자이지만, 치마를 들고 돈을 구걸하는 행위 및 전체적인 구도가 기산풍속도와 매우 유사한 점으로 보아 이들이 사당패임은 명확하다. 다른 사당패의 그림들에서도 모두 사당들이 치마를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행위는 공연에서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내용으로 보인다. 앞줄에는 그림 마찬가지로 두 명의 사당이 담배를 물고 앉아 있다. 복장이나 담배를 물고 앉아 있는 자세로 보아 서서 ‘돈을 따고’ 있는 사당들은 나이가 어린 애사당(연계사당)들이고 앉아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은 사당일 것이다. 선배 사당들은 이렇게 대기하고 있다가 이후 자기 차례가 오면 서서 노래를 하는 형식이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학규의 시 「걸사행」에 보면 사당들은 공연으로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치마를 들쳐 공연비를 받으며, 한량들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연장에서 주위의 시선을 무시하고 사당들의 치마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행위를 스스럼없이 한다. 사당들의 이러한 행위는 밤에 허우채(화대;解衣債)를 지급해 줄 남자를 고르려는 의도일 것이다.
동당 동당 동당 호남 퇴기 해서 창녀
한 불당에 내 사당 네 사당 무어 다투랴
아무데나 인산인해 이룬 곳에 엉큼하게 손 집어넣어 치마 속 더듬는다
너는 일전에 몸을 허락하는 계집이요 나는 팔도에 거친데 없는 한량이다
이는 퇴기와 창기들이 섞여 있는 사당의 출신 성분으로도 알 수 있고 그들이 부르는 「여사당 자탄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한산 세모시로 잔주름 곱게 곱게 갈아입고 안성 청룡사로 사당질 가세.
이내 손은 문고리인가 이놈도 잡고 저놈도 잡네.
이내 입은 술잔인가 이놈도 빨고 저놈도 빠네.
이내 배는 나룻배인가 이놈도 타고 저놈도 타네.
정현석은 교방가요에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내용이 음란하고 비속하며, 걸사가 창을 하면 사당이 답가를 하는데 거리의 아이들과 종들 역시 이를 풀어 부른다고 하였다. 이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당이 창을 하면 거사가 답을 하는 여창남화(女唱男和) 방식이 아니라, 반대로 거사가 창을 하면 사당이 답을 하는 남창여화(男唱女和) 방식이다.
당시 사당패들 중에 이런 방식의 부류도 있었는지 정현석이 오기를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대부분의 노래는 사당이 하지만, 거사들이 부르는 염불류의 노래도 4곡이나 있으므로 아마도 여창남화와 남창여화 방식이 섞여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거리의 아이들과 종들 역시 이를 풀어 부른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산타령이나 염불류의 잡가는 일반인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당시 하층 사람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하는 노래라는 것을 알 수 있다.일제강점기 최영년의 속악유희에는 사당패들이 비단치마와 비단부채로 빙빙 돌며 춤을 추고 양산도를 부른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서도 사당들은 기본적으로 춤을 추는데 그 춤은 부채춤이었으며, 양산도류의 잡가를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옥이 지은 연작시 「이언(俚諺)」에는 ‘사당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이 ‘사당가’라는 노래가 따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사당들이 부르는 노래를 ‘사당가’라고 하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내가 부른 사당가’라는 의미를 살펴볼 때 사당들이 부르는 노래가 별도로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이상을 종합하면 사당패들이 부르는 노래는 산천초목, 녹양방초, 오돌또기, 갈까보다, 오동추야, 방아타령, 잦은 방아타령, 매화타령, 정주타령, 유산가, 육자백이, 산타령, 양산도, 유령놀량, 화초타령, 달거리, 등타령, 춘면곡, 권주가, 염불타령, 염불가사 등이다.
그리고 거사는 번개소고 장단에 맞춰 긴염불, 짧은염불 같은 판염불과 긴영산을 부른다. 그리고 놀이판의 형태를 보면 사당과 거사는 각 한 줄씩 길게 늘어서서 마주보고 노래를 하며, 앞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판놀음을 한다. 노래는 남창여화 또는 여창남화의 방식인데 아마도 둘 다 혼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즉 사당이 선창을 할 때는 거사가 화답을 하고, 거사가 판염불이나 긴영산을 할 때는 사당이 답을 하는 형식일 것이다. 사당은 가무를 하며 남자를 유혹하고, 거사는 소고를 치며 염불을 하는 것으로 분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고문헌, 판소리 사설, 조선시대 풍속화 등 어떠한 자료에도 사당패들이 현재의 남사당패와 같은 다양한 종목의 기예를 선보였다는 흔적은 없다. 현재의 남사당놀이는 풍물, 덧뵈기, 어름, 덜미, 살판, 버나 등 6종목으로 사당패들의 놀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풍물놀이 안에 소고춤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사당패들은 소리를 주 종목으로 하나, 남사당패들은 어름, 살판, 버나 등 체기(體技)를 주로 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소리와 소고춤․부채춤 등을 추며 판놀음을 주로 하는 사당패들의 놀이가, 남사당패로 바뀌면서 지금처럼 여섯마당을 기본으로 하는 체기위주의 놀이로 바뀌게 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