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자연재해, 상상을 초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83107490005641?dtypecode=pancode_main네팔·티베트 대홍수 사망 797명·실종 3048명…터널 구조 사력입력 2026.08.31 07:54한국일보를 선호 출처로 추가김현우 기자네팔, 수력발전소에서 집중 구조작업미국·캐나다 등 긴급 자금 지원이미지 확대보기29일 네팔 홍수 피해 지역 중 한 곳인 누와코트 지역 비...
우랄 산맥 서쪽에 광대한 영지를 확보하며 볼가 강과 드네프르 강 일대를 약탈했던 코사크족은 마침내 우랄 산맥을 넘어 동진하여 오늘날 예카테린부르크를 침공하여 단 2시간 만에 예카테린부르크를 장악했다. 이 지역을 장악한 예르마크는 스트로가노프에 사절을 보내 이곳 일대에서 모피 무역거래를 할 수 있게 허락을 요구했고 이에 대한 승낙을 받는다. 단 스트로가노프의 윤허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모피 교역으로 군자금을 벌어 시베리아 원정을 지속하라는 것이다. 예르마크의 코사크 족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자금도, 병력도 지원받을 수 없었다.

러시아의 화가 니콜라이 도브로볼스키(Nikolai Dobrovolsky)가 1886년에 그린 <이르쿠츠크의 앙가라강 건너기(Crossing the Angara River in Irkutsk)>, 출처 : 트레챠코프 미술관
이는 젬스키소보루나 두마 회의에서 허가 받은 것이 아닌 이반 4세의 단독 결정이었고 스트로가노프 가문 또한 수많은 공후들의 견제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예르마크의 코사크 족들은 타타르를 제압하고 시베리아를 장악하는데 있어 모든 물자를 현지의 약탈과 교역으로 조달해야 했다. 스트로가노프는 에르마크와 그의 부대에게 현지에서 얻은 물품들을 모두 승전의 대가로 주면서, 당시 우랄 산맥 건너 오비 강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시비르 칸국을 정벌하는 일을 일임했다. 게다가 코사크 군에 대한 독자적인 지휘를 맡기고 군의 통솔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부분의 양면에는 만약에 잘못되더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겠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성공하면 이반 4세와 스트로가노프의 절대적인 입지 강화와 더불어 이반 4세는 그의 통치권을 완전히 굳히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셈이었다. 대신 러시아 정부에서 대포와 식량, 화승총 등 전쟁물자 일체의 보급들을 제공하긴 했지만 전선이 넓어지면서 보급의 현지 조율은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처음 마주친 우랄의 부족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첼랴빈스크와 우파에 거주 중인 바시키르 족은 우랄의 초지에서 가족 단위로 거주했는데 코사크 군의 진격이 시작되자 코사크인들에게 집단으로 항복했다. 이어 대규모 투르크계 부족들이 모여 있는 샤드린스크(Шадринск)와 쿠르간을 공략했다. 이들은 고전적인 기마전으로 대결에 나섰으나 총포를 이길 수 없었다. 이들도 1~2일 안에 정벌에 성공한 예크마르는 시비르 칸국의 공격에 나섰다.
1579년 4월 에르마크는 1,100명의 코사크 부대를 이끌고 시비르 칸국 원정에 나섰다. 시비르 칸국의 수도인 토볼스크 남쪽의 투멘(Тюмень)을 공략했다. 쿠춤 칸은 예르마크에 맞서 5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에 나섰다. 에르마크의 부대는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화포를 100여 문을 배치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으나 화승총과 활을 적절히 이용하던 에르마크 부대는 오로지 활과 창을 쓰는 쿠춤 칸의 군대를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 물론 쿠춤 칸의 시비르 칸국도 총포를 가지고 있었지만 총포가 녹이 슬었던 것도 많았고 타타르 족이 사용한 화약무기들은 신식 무기를 장착하고 성능을 개조한 러시아 코사크군에 비해 완전히 구식이었다. 게다가 장전하고 발사하는 시간도 오래 걸렸기 때문에 오히려 총포를 버리고 활과 창으로 맞섰던 것이다.
시비르 군은 투멘을 내주고 이심(Ишим)과 페트로파블의 구원 군을 불러 토볼스크를 방어하게 했다. 그리고 카자흐족과 샤이바니의 히바와 부하라 칸국에도 지원 요청이 전달되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이심에 도착한 카자흐족은 3만의 군대였다. 이들은 예르마크의 배후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예르마크는 휘하의 440명의 정예병을 선발하여 밤을 틈타 이심을 공격했다. 당시 이심을 지키고 있는 군대는 카자흐족 3만과 시비르 타타르군 2만의 군대로 투멘과 비슷한 5만의 군대였다. 당시 이심의 성은 목책과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던 요새 중에 요새였다. 예르마크는 공성전을 피하고 히바와 부하라 칸국이 시비르 칸국을 배신했다는 정보를 흘려 시비르군과 카자흐족을 성 밖으로 유인했다.
결국 유인책에 걸린 시비르군과 카자흐족은 대부분의 군대가 섬멸 당했다. 이후 성곽을 화포로 포격해 파쇄하고 성 내로 진입해 농성 중이던 타타르-카자흐족 연합군을 화승총과 다 연발 총포로 제압했다. 투멘과 이심에서 동원한 총 10만의 군대 중 살아남은 군대는 1만에 불과했다. 우수한 무기를 앞세워 시비르 군을 격파한 예르마크는 시비르 칸국의 수도인 토볼스크로 진격했다. 배후에 남아있던 카자흐족과 타타르족의 군대들을 섬멸하면서 토볼스크에 도착한 예르마크는 같은 해, 6월부터 토볼스크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폭이 3m가 넘는 해자와 인공적으로 만든 언덕 위에 6m 넘는 목책이 설치되어 있고 45도의 경사 끝에 설치된 석성이 자리 잡은 토볼스크는 공략하기 쉽지 않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지속적으로 포를 쏘며 공격했지만 포의 사정거리는 목책과 목책 주변 밖에 미치지 못했다. 코사크족은 오히려 성을 지키는 타타르족의 공격을 받아 성곽에서 250m 정도 밀려나 있었다. 이에 예르마크는 성을 이대로 공격하기 어렵다는 것을 파악하고 성 안의 카자흐족과 타타르족의 내분을 일으키는 전략을 선택했다. 우선 포로로 잡은 우랄인 첩자들을 이용하여 토볼스크성에 잠입시킨 다음 성 안의 거리들에게 카자흐 족이 성을 버리려 한다는 포고문을 붙였다. 이에 성 안에는 급속도로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카자흐족과 타타르족의 설전까지 벌어졌고 결국 카자흐족의 8,400명의 군사들이 토볼스크성을 탈출했다. 성 안의 혼란으로 결국 성문이 열리자 코사크족이 입성하여 성안의 주민들을 학살하고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춤 칸은 마침내 성을 버리고 탈출하여 오늘날의 노보시비르스크로 달아나자 토볼스크 성곽은 파괴되고 토볼스크 요새는 함락되었다. 토볼스크가 함락되고 인근 지역을 평정함으로써 예르마크는 여러 우랄-알타이 계 민족, 핀-우그르계 민족들로 하여금 농사를 지으며 코사크인들에게 세금 형식으로 곡물을 바치게 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를 개척하게 된다. 물론 여기서 나오는 소출들은 시베리아를 정복하는 코사크인들의 식량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투르크계 주민들과 타타르 족들은 시베리아 서부 타이가 지역에서 동부지역 변방으로 밀려나 버렸다. 시비르 칸국의 타타르족들이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지만 시비르 칸국의 중요한 도시들과 도성이 함락되었고 이로 인하여 시비르 칸국이 일정 부분 붕괴되었다는 것에 상당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투멘과 토볼스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타타르 인들이 당시 시비르 칸국을 영위했던 타타르족들의 조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이들은 시비르의 군사들이 아니라 주민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앞서 멸망한 카잔과 아스트라한의 타타르족들은 킵차크 칸국을 건국한 바투의 후손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볼가 강 유역으로 이주한 투르크계 불가르족의 후예로 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킵차크 투르크족의 후예인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족이나 키르기스스탄의 키르기스족과 혈통적으로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