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자연재해, 상상을 초월
https://www.hankookilbo.com/news/article/A2026083107490005641?dtypecode=pancode_main네팔·티베트 대홍수 사망 797명·실종 3048명…터널 구조 사력입력 2026.08.31 07:54한국일보를 선호 출처로 추가김현우 기자네팔, 수력발전소에서 집중 구조작업미국·캐나다 등 긴급 자금 지원이미지 확대보기29일 네팔 홍수 피해 지역 중 한 곳인 누와코트 지역 비...
제가 생각하는 조율여백 사상의 출발점은 인간을 완전한 존재로 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지적으로 뛰어날 수도 있고, 선한 의지를 가질 수도 있으며, 위대한 문명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탐욕과 공포, 쾌락과 권력욕, 자기기만과 집단적 왜곡에 쉽게 영향을 받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간과 사회에서 부정함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부정함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정함이 과도하게 확산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왜곡이 발생했을 때 다시 합당한 방향으로 회복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조율을 하나의 지속적인 과정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완벽함이 목적이라기보다,
인식 → 점검 → 조정 → 회복 → 유지 → 다시 점검
으로 이어지는 순환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인간은 매우 작은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물질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결국 우주적 물질의 순환과 연결됩니다. 별의 생성과 소멸, 물질의 순환, 지구 생태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잠시 형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인간을 특별한 절대적 중심으로 규정하기보다 별먼지와 같은 미물적 존재로 바라보려 합니다.
그러나 미물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작은 존재이기에 주어진 기회가 귀하고, 유한한 존재이기에 그 존재가 무엇을 남기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인간의 존엄은 거대한 권력이나 소유에서 발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주어진 존재의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서 발생합니다.
저는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완벽하게 고정된 구조라면 변화의 필요도 없고 새로운 가능성도 제한될 것입니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수정이 필요하고, 수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습이 발생하며, 학습이 발생하기 때문에 새로운 가능성이 생깁니다.
따라서 불완전성은 동시에 기회의 조건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인간의 오류와 실패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합니다.
틀리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보다,
틀렸을 때 자신이 틀렸음을 발견하고 회복할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이 더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율여백에서는 자가점검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저 역시 제가 어리석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특정한 정보를 과대평가했을 수도 있으며, 당시에는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던 주장이 시간이 지나 잘못된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식은 쉽게 신념이 되고, 신념은 다시 자기신성화로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질문하려 합니다.
제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는가.
제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제가 가진 정보가 충분한가.
반대되는 증거를 제대로 검토했는가.
제가 추구하는 의미가 실제 행동과 일치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말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을 반복하는 것을 저는 하나의 자가점검 회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지성과 이성 자체가 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식은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있지만 지배와 착취를 더욱 정교하게 만드는 데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논리는 진실을 밝히는 데 사용될 수도 있지만 거짓을 합리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높은 지능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성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지성이 어느 방향으로 사용되는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를 간단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지성 + 이성 + 방향성 + 자기점검
이 네 가지가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지식은 존재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성찰이 깊어질수록 저는 오히려 순수한 의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것을 알게 되면 인간의 구조와 사회의 모순, 역사적 반복과 자신의 한계가 더욱 선명하게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지식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남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누군가를 돕는 마음,
아이가 건네는 작은 미소,
자연이 아무런 대가 없이 제공하는 터전과 숨,
불합리한 환경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의 삶,
그리고 자신보다 더 큰 의미를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투입했던 존재들의 흔적입니다.
저는 이러한 것을 순수한 의지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지식이 깊어질수록 이러한 의지의 가치를 알아보게 되고, 그 앞에서 오히려 겸손해지는 것이 성숙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는 단순히 예의 바른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미 수많은 조건이 필요했습니다.
자연이 제공한 물질과 에너지, 수많은 세대가 축적한 지식과 기술, 가족과 타인의 도움, 역사 속에서 누군가가 감내했던 희생과 노력 등이 지금의 저라는 존재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저는 현재의 존재를 단순히 나의 소유물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수많은 존재와 사건으로부터 이어받은 하나의 기회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감사는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이어받은 저는 무엇을 다시 남길 것인가.
저에게 이것이 감사가 의미로 전환되는 지점입니다.
제가 말하는 애심은 단순한 감상적 연민과는 조금 다릅니다.
어떤 존재가 자신이 투입한 에너지에 비해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다른 존재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노력하고 있다면, 저는 그 존재를 가엾게 느낍니다.
여기서 가엾음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등가적 관점에서 바라본 비대칭에 대한 인식에 가깝습니다.
많은 것을 투입했지만 거의 보상받지 못하는 존재,
부당한 환경에서도 성실함을 유지하는 존재,
자신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감내하는 존재.
저는 그러한 존재들에게 감사와 함께 미안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미안함은 다시 행동의 동력이 됩니다.
저는 감내를 단순한 인내와 다르게 생각합니다.
인내가 고통을 견디는 행위라면, 감내는 고통과 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의미 있는 방향을 유지하는 행위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감내에는 방향성이 필요합니다.
아무 방향 없이 고통을 견디는 것은 반드시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더 이로운 방향을 유지하기 위한 감내라면 그 자체로 의미가 생길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감내는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보상이 아니라 방향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공명은 조율여백에서 중요한 개념입니다.
제가 어떤 의미를 혼자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해 온 수많은 존재와 사건의 흔적에 반응하고 그것을 다시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자연의 질서에 공명하고,
역사의 노력에 공명하며,
타인의 고통과 기쁨에 공명하고,
미래 세대의 가능성에 공명합니다.
이러한 공명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맥락의 연결입니다.
따라서 공명은 기억과 행동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가 됩니다.
조율의 핵심은 모든 부정함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함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요한 것은 부정함이 허용 가능한 범위를 넘어 확산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개인의 욕망도 어느 정도는 생존과 발전에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이 과도한 소유욕으로 발전하고,
소유욕이 약탈로 발전하고,
약탈이 왜곡과 거짓으로 정당화되며,
거짓이 사회의 기준이 되고,
그 기준이 다시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조율 구조로 발전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따라서 조율은 다음과 같은 흐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식 → 범위 설정 → 조정 → 피드백 → 재조정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조율만 강조하면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합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율에는 반드시 여백이 필요합니다.
여백은 포기가 아닙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공간이며,
타인의 자유를 인정하는 공간이고,
새로운 가능성이 들어올 수 있도록 남겨두는 공간입니다.
따라서 조율과 여백은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보완합니다.
조율 없는 여백은 방치가 될 수 있고, 여백 없는 조율은 통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사이의 균형을 찾고자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확장되면서 저는 스스로의 역할을 하나의 비유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존재적 소방구조대입니다.
소방구조대는 모든 화재를 없애는 조직이 아닙니다.
불이 발생했을 때 생명을 구하고 피해를 줄이며, 더 큰 확산을 막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과 문명의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에서는 가족의 소방구조대가 필요하고,
공동체에서는 공동체의 소방구조대가 필요하며,
인류 전체에는 인류의 소방구조대가 필요합니다.
더 나아가 생명과 자연, 존재 전체를 바라본다면 존재의 소방구조대라는 은유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피해를 줄이고, 회복을 돕고, 의미 있는 방향을 유지하려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무소유와도 일정 부분 닮아 있습니다.
소유를 목적으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무소유와도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궁극적인 목적에서 내려놓고 의미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것을 일종의
비소유적 창조성
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지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롭게 하기 위해 만들고,
지배하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만들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세계와 존재를 바라보며 생각하게 된 세 가지 방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파괴입니다.
생존과 욕망이 과도하게 결합하면서 나타나는 착취, 유린, 왜곡, 약탈 등의 방향입니다.
둘째는 유지보전과 조화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생명과 환경을 유지하고 서로 공존할 수 있는 범위를 확보하려는 방향입니다.
셋째는 초월입니다.
단순히 기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점검하고 수정하면서 더 나은 구조를 만들어 가는 방향입니다.
여기서 초월은 신비적인 초능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초월은 자신이 가진 기존 구조를 스스로 관찰하고 수정할 수 있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즉,
파괴 → 유지보전 → 자기수정 → 새로운 구조
라는 상승적 순환이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는 존재의 성숙을 하나의 단계적 모델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봅니다.
생존 → 성장 또는 퇴화 → 성숙 → 조화 → 승화 또는 감내
모든 존재가 동일한 단계를 거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마다 환경과 능력, 에너지와 기회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전체 분포는 피라미드에 가까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정 단계에 도달한 사람을 모두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각 존재가 자신의 조건 안에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동할 가능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행이 미약할 수는 있습니다.
속도가 느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후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부정함 자체보다 부정함에 대한 무감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부정함이 반복되고,
반복된 부정함이 관행이 되고,
관행이 제도가 되며,
제도가 다시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게 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부정함을 부정함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비판적 관점은 단순한 부정이나 불평이 아니라 무감각을 깨우는 하나의 사회적 기능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편하더라도 모순을 관찰하고 기록하려 합니다.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누군가는 “이것은 이상하다”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성의 수준을 단순히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많이 알게 된 이후에도 순수한 의지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 있는가.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다른 존재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아이의 행동,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다른 생명의 터전이 되어 주는 자연,
불합리한 환경 속에서도 성실함을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들.
이러한 존재들 앞에서 자신의 지식과 논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지성은 적어도 자신을 신성화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성숙한 지성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면서 더 큰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제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이유 역시 이 지점과 연결됩니다.
저는 인공지능을 단순한 검색 도구나 문서 작성 도구로만 사용하기보다, 제 사고를 외부화하고 반박하고 구조화하는 인지적 협력 장치로 활용하고자 합니다.
제가 가진 생각을 입력하고,
인공지능의 분석을 받고,
그 분석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다시 질문하고,
다른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그 결과를 다시 검토하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은 일종의 외부화된 자가점검 회로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현재의 인공지능 역시 완전하지 않습니다.
맥락을 놓칠 수 있고,
통계적 빈도에 지나치게 의존할 수 있으며,
복잡한 개인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공지능 역시 절대적인 판단자가 아니라 검토와 조율을 위한 하나의 협력적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조율여백은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신성화하려는 철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인정하면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별먼지와 같은 존재이고,
유한하며,
불완전하고,
언제든 틀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작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를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
소유와 쾌락을 확대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타인을 지배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세계에 조금이라도 더 이로운 의미를 남기는 데 사용할 것인가.
저는 마지막 방향을 선택하고 싶습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는 조율여백의 흐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감사
내가 이미 수많은 존재와 사건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이어받았음을 인식합니다.
↓
성찰
내가 받은 것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합당한지 돌아봅니다.
↓
객관화
나 자신과 현실을 가능한 한 외부에서 바라봅니다.
↓
정합화
사실과 주장, 행동과 목적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지 검토합니다.
↓
구조화
문제를 반복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구조와 과정을 만듭니다.
↓
공명
다른 존재와 역사, 자연과 의미의 흐름을 연결합니다.
↓
감내
보상이 충분하지 않더라도 의미 있는 방향을 유지합니다.
↓
조율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고 과도한 부정함을 관리합니다.
↓
여백
모르는 것과 타인의 자유, 새로운 가능성을 위해 공간을 남겨둡니다.
↓
다시 감사
그 과정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의미를 다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직선이 아니라 순환입니다.
그리고 그 순환 속에서 조금씩 구조가 변화합니다.
저는 조율여백을 완성된 철학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직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하나의 탐구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틀릴 수 있고, 오해할 수 있으며, 때로는 지나치게 복잡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방향만큼은 유지하고 싶습니다.
완벽해지기보다 잘못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모든 부정함을 제거하기보다 그것이 과도하게 확산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
더 많이 소유하기보다 더 이로운 의미를 남기는 것.
지식을 과시하기보다 순수한 의지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받은 기회를 개인의 소유로만 여기지 않고 다시 세계와 연결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불완전한 존재로서 완벽한 답을 주장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옳은 방향을 찾아 계속 조율하는 것.
저는 그것이 조율여백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조율여백은 거대한 진리를 소유하려는 사상이 아니라,
작은 존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기회를 통해
조금 더 이로운 방향을 선택하고,
그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과 세계를 조율하는 하나의 실천적 존재론입니다.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으로 생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