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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타지 않은 재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08-29 22:15:42
  • 수정 2026-08-29 22:18:24

            사진 출처 : 경북 메일


기차는 덜컹거리며 남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휙휙 지나갔다. 유리창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었다. 깊게 패인 주름, 검버섯이 내려앉은 뺨, 그리고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칠순이라는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 거울 속의 저 낯선 노인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주머니 속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를 꺼냈다. 주소 하나가 적혀 있었다. 40년 전, 내 심장을 잿더미로 만들고 떠나버린 여자, 연희가 있다는 곳이다.

우리는 불이었다. 서로에게 다가가면 데일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20대의 사랑은 이성이 끼어들 틈이 없는 맹목적인 투쟁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소유하려 했고, 서로의 바닥까지 확인하려 들었다. 헤겔이 말한 '인정 투쟁'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채 매일 밤 반복되었다. 나는 그녀가 나만의 것이기를 원했고, 그녀는 내가 그녀의 우주이기를 강요했다. 그 치열함이 사랑의 깊이라고 착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태워버리고 말 거야."

헤어지던 날 그녀가 했던 말이 아직도 이명처럼 귓가를 맴돈다. 그날 나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젊은 날의 치기 어린 자존심이었다. 그녀가 떠난 후, 나는 불이 꺼진 아궁이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다른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장으로서 성실하게 살았다. 겉으로는 평온한 삶이었으나, 내면의 깊은 곳에는 언제나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었다. 데리다가 말한 '흔적(trace)'처럼, 그녀는 부재함으로써 내 삶에 가장 강력하게 현존했다. 

기차가 터널을 통과하자 차창 밖이 암흑으로 변했다.

'나는 지금 무엇을 확인하러 가는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다시 사랑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노욕이다. 용서를 빌러 가는가? 그것 또한 위선일지 모른다. 나는 그저 확인하고 싶었다. 내 젊은 날을 송두리째 태웠던 그 불꽃의 실체를. 그리고 그 불꽃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 허무인지, 아니면 아직 온기가 남은 재인지.

들뢰즈는 '반복'이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라 차이를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연희와 지금 내가 만나러 가는 연희는 같은 존재일까? 40년이라는 세월은 세포 하나하나를 교체시켰을 것이다. 그녀의 외모도, 목소리도, 생각도 변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과거의 유령을 쫓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새로운 타자를 만나러 가는 것인가.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바닷가 작은 마을이었다. 역사를 빠져나오자 짭조름한 바다 냄새가 섞인 찬 바람이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눈발이 조금씩 날리기 시작했다.

주소를 따라 걷는 길은 멀지 않았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 끝, 작은 찻집이었다. 간판도 없이 '茶(차)'라고만 적힌 나무 문패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칠순의 심장도 이토록 거칠게 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잠시 문 앞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따뜻한 온기가 밀려왔다. 실내는 고요했다. 창가 쪽 테이블에 한 여인이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희끗한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고, 두꺼운 숄을 어깨에 두른 뒷모습.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세월이 겹겹이 쌓여도 변하지 않는 어떤 본질, 일종의 아우라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어서 오세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40년 전의 팽팽하던 피부는 주름으로 덮였고, 날카롭던 눈매는 세월의 풍파에 깎여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 나를 바라보는 그 깊은 눈동자만은 그대로였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서서히 차오르는 그리움이 그녀의 눈에서 읽혔다.

"민석... 씨?"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억양은 예전 그대로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오랜만이군. 연희."

우리는 뜨거운 차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40년의 공백을 무엇으로 메울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창밖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이 오네." "그러네요. 첫눈인가 봐요."

그녀가 찻잔을 감싸 쥐며 옅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평생을 그리워했던 것은 20대의 아름다운 연희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라는 존재 그 자체, 나와 함께 그 시절을 통과했던 유일한 증인을 그리워했던 것이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늙어버린 얼굴을, 변해버린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내 손을 내밀어 살며시 찻잔을 쥐고 있던 연희의 손을 잡았다. 40년 만에 다시 잡은 그녀의 손의 느낌이 예전 그대로 살아 났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수만 가지의 감정이 오갔다. 과거의 불꽃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엔 은은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더 이상 서로를 태워버릴 만큼 뜨겁지는 않지만, 얼어붙은 손을 녹일 수 있는 숯불 같은 온기.

"잘 살았어?" "그럭저럭요. 당신은요?" "나도... 그럭저럭."ㅌ

그것으로 충분했다. 더 이상의 확인은 무의미했다. 그녀가 살아있고, 내가 살아있고, 우리가 서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이 칸트가 말한 '요청된 불멸성'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스쳤다. 우리의 사랑은 현상계에서는 끝났지만,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지속되고 있었으므로.

한 시간 남짓 머물렀을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게." "벌써요?" "응. 눈이 많이 쌓이기 전에 가야지."

그녀가 문까지 배웅을 나왔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한 번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그것은 작별 인사이자, 긴 세월을 견뎌낸 서로에 대한 위로였다.

"건강해." "당신도요."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오는 길, 눈발은 더욱 거세져 있었다. 하지만 발걸음은 올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나는 평생 나를 괴롭혔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그 찻집에 두고 나온 기분이었다.

기차에 올라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눈 내리는 풍경 속으로 마을이 멀어져 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타오르던 붉은 불꽃은 이제 하얀 눈 속으로, 고요한 잿빛 바다 속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사랑은 불처럼 타오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오른 뒤에 남은 재가 되어 영혼의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나의 노년을, 그리고 다가올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안의 소년이, 청년이, 그리고 중년의 사내가 비로소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이 느껴졌다. 기차는 어둠을 뚫고, 나의 남은 생을 향해 묵묵히 달리고 있었다.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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