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하다”
• 창제 배경: 중국의 한자를 빌려와 우리말을 적으려니(이두, 구결 등) 우리말의 뜻과 소리를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 세종의 뜻: 이 때문에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글로 제대로 펴지 못하는 것을 가엾게 여겨, 누구나 쉽게 익혀 쓸 수 있는 새로운 글자 28자(훈민정음)를 만들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 언해본 서문
2. 한문(고립어)과 한국어(교착어)의 문법적 차이
3. 한문 원문을 그대로 두고 그 의미를 이해하는 언어적 기술
• 이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나라는 한문 어순을 그대로 두면서도 우리말의 조사(은/는/이/가)와 어미(하여, 하니, 이니라)를 글자 사이사이에 넣어서 우리말의 구조로 자연스럽게 전환하여, 읽으면서 바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언어적 기술을 이용하여 왔다.
• 한문은 뜻이 통하는 자리로 단어를 늘어놓고, 우리말은 그 사이에 조사를 넣어 관계와 어미를 밝혀야 문장이 된다.
4. 실제 문장으로 본 사례
논어 첫 장, 학이(學而) 편 첫 구절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한문의 어순만 보면 ‘말하다–배우다–그리고–때–익히다–그것을–아니다–또한–기쁘다–어’로 정보가 나열되어 있다.
위 예에서 ‘면’①은 조건을, ‘아’는 감탄의 물음을, ‘이면’②은 양보를 우리말 어순에 맞게 끼워 넣은 토이다. 한문 자체에는 그 조사가 없고, 읽는 사람이 문맥으로 보충했다. '면'이나 '이면'의 토를 달려면 문장 전체를 오롯이 알아야 가능하다. 토를 표기하는 방법으로 이두는 한자의 음과 뜻을 빌려 우리말 조사를 적었고, 향찰은 향가에서 그 방식을 시로 밀고 나갔다. 한글이 생긴 뒤에는 같은 자리에 한글로 ‘면·아·이면’을 달아 현토로 정착시킨 것이다. 글자의 뜻은 한문에 두고, 말의 뼈대는 우리 어순으로 되살리는 읽기이다.
5. 향찰, 이두, 전통 구결(석독·순독), 현대의 한글 현토
『논어(論語)』 안연편(顔淵篇)의 구절인 「樊遲問仁 子曰 愛人」을 바탕으로 대비해 보겠습니다.
(1) 차자체계별 표기 대비표
구분 | 표기문 형태 | 음독(낭독) | 특징 및 문법적 원리 |
한문 원형 | 樊遲問仁 子曰 愛人 | 번지문인 자왈 애인 | 한문의 SVO 어순 그대로 읽음 (무토독) |
향찰 (鄕札) | 樊遲 仁乙 問爲隱大 子 曰隱 人乙 愛爲尼羅 | 번지 인[어딜] 문[묻]ᄒᆞᆫᄃᆡ 자 ᄀᆞᄅᆞ샤ᄃᆡ 사ᄅᆞᆷ[인]을 ᄉᆞ라ᇰᄒᆞ니라 | • 완전한 우리말 어순(SOV)으로 재배열 • 실질형태소는 훈독/음독, 형식형태소는 음차/훈차로 전면 표기 |
이두 (吏讀) | 樊遲 問仁爲隱大 子曰 愛人是尼羅 | 번지 문인ᄒᆞᆫᄃᆡ 자왈 애인이니라 | • 한문의 어순 유지하되 절·문장 끝에 문법소(토)를 삽입 • 공문서·실용문 위주 실질 단어(問仁, 愛人)는 한자어 그대로 유지 |
차자구결 (구결자/부호) | 樊遲問仁爲厓/𪜈(ᄒᆞᆫᄃᆡ) 子曰厓/𪜋(ᄒᆞ샤ᄃᆡ) 愛人伊羅/𪜕(이라/이니라) | 번지문인ᄒᆞᆫᄃᆡ 자왈ᄒᆞ샤ᄃᆡ 애인이라 | • 한문 어순 사이사이에 약체자(약자)로 토(吐)를 기입하여 독송 보조 |
현재의 한글 구결 (현토) | 樊遲ㅣ 問仁ᄒᆞᆫ대 子ㅣ 曰ᄒᆞ샤대 愛人이니라 | 번지이 문인한대 자이 왈하샤대 애인이니라 | • 한글로 주격조사(ㅣ) 및 연결·종결어미를 직접 현토 |
(2) 세부 표기 분석 및 설명
① 향찰 (鄕札) 표기
향찰은 향가(鄕歌)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의 문맥과 어순(SOV) 전체를 100% 한자로 치환하여 적는 종합적 표기 방식입니다. 실질적인 뜻을 가진 말은 훈(뜻)을 빌리고, 조사나 어미는 음이나 훈을 빌려 촘촘하게 표기합니다.
樊遲 仁乙 問爲隱大 (번지 어딜 묻ᄒᆞᆫᄃᆡ / 번지가 인을 묻자)
仁(실질 의미: 어질), 乙(조사 '을'의 음차)
問(실질 의미: 묻다), 爲(하), 隱(ㄴ/은), 大(ᄃᆡ/대) 爲隱大 = ᄒᆞᆫᄃᆡ (연결어미 '~한대')
子 曰隱 人乙 愛爲尼羅 (자 ᄀᆞᄅᆞ샤ᄃᆡ 사ᄅᆞᆷ을 ᄉᆞ라ᇰᄒᆞ니라 /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曰隱 (ᄀᆞᄅᆞ샤ᄃᆡ 또는 ᄀᆞᆯ온)
人乙 (사ᄅᆞᆷ을: 人은 훈차 '사ᄅᆞᆷ', 乙은 음차 '을')
愛爲尼羅 (ᄉᆞ라ᇰᄒᆞ니라: 愛는 훈차 'ᄉᆞ라ᇰ', 爲는 'ᄒᆞ', 尼는 '니', 羅는 '라'의 음차)
이두는 관청의 행정 실무나 실용문에 주로 쓰였으며, 한문 본래의 단어 순서를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문장 마디마디에 결합어적 문법 요소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樊遲 問仁爲隱大 (번지 문인ᄒᆞᆫᄃᆡ)
'問仁'이라는 한자 단어 덩어리 뒤에 어미 爲隱大(ᄒᆞᆫᄃᆡ)를 붙여 배경/조건을 나타냅니다.
子曰 愛人是尼羅 (자왈 애인이니라)
'愛人' 뒤에 서술격 조사와 종결어미의 결합형인 是尼羅(이니라/시니라)를 붙여 문장을 완결합니다. (是는 '이/이다'의 훈차, 尼는 '니', 羅는 '라'의 음차)
③ 전통 구결(口訣) 및 한글 현토(懸吐)
구결은 한문 원문을 학습하거나 낭독할 때 문맥의 단락을 짓고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덧붙인 문법적 장치입니다.
석독구결(釋讀口訣)과 순독구결(順讀口訣): 고려시대 이전에는 글자 옆에 구결자(예: 爲의 약자 𪜈, 厓의 약자 등)를 달아 우리말 어순으로 뒤집어 읽는 '석독구결'이 쓰였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원문의 어순을 존중하면서 조사와 어미만 읽어 나가는 '순독구결'이 정착되었습니다.
한글 구결(현토): 훈민정음 창제 이후 한자 약체자 구결 대신 한글로 토를 달게 되었습니다.
樊遲[ㅣ] 問仁[ᄒᆞᆫ대] 子[ㅣ] 曰[ᄒᆞ샤대] 愛人[이니라]
주격 조사 ㅣ, 연결 어미 ᄒᆞᆫ대, 존칭 연결 어미 ᄒᆞ샤대, 종결 서술 이니라가 원문의 한자 덩어리 사이사이에 결합하여, 한문의 통사 구조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우리말 교착어의 문법적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도록 돕습니다.
첫째, 위 역사적 사실을 알고 우리가 현재 한글로 의사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한 것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둘째, 한글로 인하여 의사소통과 문화 발전의 바탕이 되었고, 디지털 강국의 배경이 되었고, 디지털 시대에 세계 중심국가로 갈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습니다.
셋째, 인문학 시대를 맞아 중국 고전이나 한문시대의 우리나라 서적을 공부하려면 한문체계와 우리말 체계를 다 같이 이해해야 제대로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