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의 자연재해, 상상을 초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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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철학 네트워크=황인오 ]
민족주의 열풍에서 안보 현실주의로:
- 필리핀 미군기지 철수와 30년 만의 복귀
황인오(동아시아 거주민)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필리핀을 휩쓴 뜨거운 민족주의 열풍은 40여 년이 지난 지금, 거대한 지정학적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식민지 유산 청산이라는 명분 아래 미국을 밀어냈던 필리핀이, 오늘날 중국의 급격한 팽창에 맞서기 위해 다시 미국을 안보의 중심축으로 불러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열풍과 미군기지 철수 (1991년)
1986년 피플 파워 시민혁명으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필리핀 전역에는 강력한 탈식민지화 여론이 일어났다. 당시 민중과 진보 정치인들은 미국이 군사기지를 유지하기 위해 마르코스 독재를 묵인하고 지원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반미 정서는 1987년 새 헌법에 외국의 군사기지 주둔을 원칙적으로 불허하는 조항을 명시하는 기틀이 되었다.
여기에 1991년 6월 클라크 공군기지 인근의 피나투보 화산이 대폭발하는 자연재해가 겹쳤다. 기지가 화산재로 마비되자 미국은 천문학적인 복구비를 들이는 대신 조기 철수를 결정했다. 이어 같은 해 9월, 필리핀 상원은 수빅만 해군기지 주둔 연장 조약안을 “식민지 시대의 마지막 쇠사슬”이라는 명분 아래 단 한 표 차이(12 대 11)로 부결시켰다. 이로써 1992년 말까지 필리핀 내 모든 미군기지가 폐쇄되며 약 1세기에 걸친 미군 상주 시대가 막을 내렸다.
안보 공백과 중국의 남중국해 잠식
미군의 철수는 곧바로 필리핀에게 치명적인 ‘지정학적 안보 공백’을 가져왔다. 당시 필리핀군은 내부 반군 진압에 치중해 있어 외세의 침략을 막을 해·공군 전력이 전무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안보 우산이 사라지자 중국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공세를 시작했다.
중국은 미군 철수 직후인 1995년, 필리핀의 배타적경제수역(EEZ) 내에 위치한 미스치프 암초를 기습 점령하고 군사 요새화를 감행했다. 이어 2012년에는 필리핀 본토와 인접한 스카보러 암초를 해경선을 동원해 강점하고 필리핀 어민들의 접근을 폭력적으로 차단했다. 2016년 들어선 로드리고 두테르테 정권은 친중 정책을 펼치며 대규모 경제 원조를 대가로 영유권 주장을 굽히는 타협을 시도했으나, 중국의 투자는 미비했고 해상 압박만 가중되는 실패를 맛보았다.
미군의 ‘롤백’과 복원되는 군사 동맹
중국의 일방적인 영토 잠식과 경제적 압박은 필리핀 내 여론을 자극했다. 2022년 취임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의 역사적 부담에도 불구하고 실리적인 대중 강경 노선과 친미 선회를 선택했다.
필리핀은 2014년 체결한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대폭 갱신하여, 미군이 순환 배치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국 내 군사기지를 기존 5곳에서 9곳으로 크게 늘렸다. 특히 추가된 기지들은 남중국해 및 대만 해협과 매우 가까운 최전방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미국 역시 이를 기회로 첨단 미사일 체계 등을 전진 배치하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거점을 필리핀에 다시 확보(롤백)하게 되었다. 결국 필리핀의 현대사는 감정적 민족주의가 불러온 안보 공백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냉혹한 국제정치적 위협 앞에서는 결국 현실적인 동맹 구조로 복귀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비슷한 때인 1992년 소련 해체로 독립하면서 외국군 주둔 금지와 비핵화를 헌법에 명문화했던 발틱해의 소국 리투아니아가 2026년 7월 이런 내용이 담긴 헌법 조항을 폐기하는데 여야가 초당적으로 합의하고 실행에 옮긴 사실과 대비된다. 동시에 리투아니아는 자국 영토에 독일 연방군 제45기갑여단을 주둔시키고 있다. 안보 정세가 바뀌면 대응도 달라진다는 것을 두 나라의 사례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진은 한국이 11만원에 인도한 필리핀 해군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