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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8.10《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롭지 못한 구조 사이에서》
  • 조율여백
  • 등록 2026-08-10 00:25:03
  • 수정 2026-08-10 09:32:01
《정의로운 개인과 정의롭지 못한 구조 사이에서》


정의롭다고 판단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존재한다면, 과연 그 사람이 속한 조직과 사회, 더 나아가 인류 전체를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질문을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로만 바라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한 개인의 행위가 합당하다고 해서 그가 속한 조직 전체가 합당한 것은 아니며, 한 조직이 일정한 정의를 실현한다고 해서 그 사회와 인류 전체까지 정의롭다고 단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개인과 집단, 제도와 문명 사이에는 상당한 간극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 이미지는 인공지능을 통해 생성되었습니다.


제가 정의를 바라보는 기준 역시 일반적인 법적·제도적 정의와는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물질적 소유에 대한 집착을 가능한 한 줄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널리 이롭게 사용하는 태도, 그리고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존재들이 감내하며 축적해 온 배려와 노력에 대한 감사와 책임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에 논리와 이상을 함께 바라보면서, 하나의 관점에 머무르기보다 서로 다른 층위를 해체하고 다시 연결하는 객관화와 정합화, 구조화와 의미화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제가 말하는 정의는 단순히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판정하는 기준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질문에 가깝습니다.
이 판단과 행동이 지금의 나에게만 이로운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존재들이 남긴 배려와 희생을 이어받아 다음 존재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는가.
저에게는 이 질문이 정의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정의로운 개인이 왜 구조와 충돌하는가>


이러한 기준으로 주변의 조직과 사회, 인류의 역사를 바라보면 상당한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개인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개인이 속한 구조가 반드시 선의의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직에는 생존을 위한 관성이 있고, 사회에는 권력과 소유의 관성이 있으며, 문명에는 경쟁과 확장의 관성이 존재합니다.
그러한 관성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개인의 선의마저 구조 안에서 변형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공익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보존을 위한 조직으로 변할 수도 있고, 정의를 위해 만들어진 권력이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특정 개인의 악의 때문이라고만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개별 존재의 의도와 구조 전체의 방향이 서로 어긋나는 현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어떤 조직이나 사회의 구성원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조직의 논리를 그대로 정의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경찰이 되었다고 해서 경찰 조직의 모든 판단이 정의가 되는 것도 아니고, 검사가 되었다고 해서 검찰의 판단이 모두 정의가 되는 것도 아니며, 판사나 국회의원,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 위치 자체가 정의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직위(인간)는 정의의 증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의의 전제>


제가 생각하는 정의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합당한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누군가의 고통과 결핍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풍요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풍요를 누리는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결핍을 가진 존재를 함부로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재 가진 것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존재의 가치까지 낮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는 노력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만으로 존재의 가치를 판단한다면, 오랜 시간 아무런 보상 없이 감내한 수많은 존재들의 노력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넷째는 조화와 공존을 고려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로운 결과가 다른 존재의 생존 가능성을 파괴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성공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는 오픈화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언제든 검토될 수 있도록 열어 두고, 오류가 발견되었을 때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정의는 완성된 정답이라기보다,
객관화 → 정합화 → 구조화 → 의미화 → 재검증
이라는 순환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반작용처럼 저항하게 됩니다
이러한 기준을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마찰이 발생합니다.
저는 그것을 특별한 용기나 영웅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조가 한 방향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졌을 때 그에 대한 반작용처럼 나타나는 저항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다시 질문하고, 이미 관행이 되어버린 부당함을 다시 바라보고,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부분을 문제 삼는 과정에서는 상당한 피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가진 것이 많지 않은 존재가 기존의 권력이나 소유, 관행에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 존재의 문제 제기는 쉽게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무엇을 문제 삼고 있는가가 더 중요한데도, 사회는 종종 사람의 자격과 지위를 먼저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구조적 관성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존재들을 고립시키거나 오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만약 제가 어떤 시대에 경찰이었든, 검사였든, 판사였든, 국회의원이었든, 혹은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지도자였든, 제가 정의라고 생각하는 기준이 동일했다면 그 위치가 저를 자동으로 정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자신이 가진 권한과 영향력을 더욱 엄격하게 검증해야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의는 권한이 아니라 방향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제가 생각하는 정의는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는가의 문제에 가깝습니다.
많이 가지고 있는가보다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보고,
얼마나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그 권력을 통해 무엇을 보호하는지를 보고,
얼마나 많은 성과를 이루었는가보다 그 성과가 다른 존재의 기회를 빼앗아 만든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 역시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 두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판단조차 다시 검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를 추구하던 사람 역시 어느 순간 자신을 정의의 기준으로 신성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추구하는 정의는 완성된 정의가 아니라 계속해서 자신을 검증하면서 더 합당한 방향을 찾아가는 정의에 가깝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슬픔과 결핍을 외면하지 않고, 노력과 감내를 기억하며, 조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넓히고, 잘못된 부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다시 조율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사회와 충돌하더라도 그 충돌 자체를 목표로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항을 위한 저항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한 저항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방향의 끝에는 개인의 승리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존재가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는 합당한 기회와 의미의 확장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정의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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