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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_칸첸중가_014_보리수_거짓말
  • 김홍성
  • 등록 2026-08-20 07:25:56
  • 수정 2026-08-31 09:23:07

장편소설_칸첸중가_014_보리수_거짓말 

보리수

온 길을 되짚어서좀 전에 지나온 림빅 마을과 실리콜라 강을 거슬러서끝없이 이어지는 서글픈 상념에 잠겨서걸음을 옮길 때마다 흙먼지가 발목을 감싸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보기도 했다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지만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다길에는 아무도 없었다나를 따라오던 사람은 상념 속에 스쳤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이제는 나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소년이이제는 나라고 할 수 없는 그 사내를 따라가고 있었다.

 

한 시간 이상 그렇게 걸어서 마을과 마을 사이의 한적한 길에 접어들었을 때길가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그루 나무가 보였다실리콜라 강을 따라 일본 청년들과 함께 내려올 때는 미처 못 본 제법 크고 의젓한 나무였다멀리서는 나목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시든지 오래지만 아직 떨어지지 않은 잎사귀들이 여린 바람에 팔랑이고 있었다. '하트모양의 잎사귀 끝이 올챙이 꼬리처럼 가늘고 길었다.

 

우리나라의 서낭당 나무처럼 동네에서 치성드리는 나무였다드러난 뿌리 위에는 타다 남은 향과 양초가 있었고둥치와 가지에는 실타래나 헝겊이 걸려 있었다그것은 객지에 나간 식구가 탈 없이 돌아오기를 빌고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고좋은 신랑을 만나 오순도순 살게 해 달라고 빌었던 흔적이었다.

 

그 나무의 이름은 피팔_Peepal, 싯다르타_Gautama Siddhartha가 그 나무 밑에서 명상 수행을 했다하여 보리수라고도 부르는 나무였다보리수 밑은 해충이나 독사가 꼬이지 않고그늘이 넓으며밤이슬을 막아 주어서 수행자들이 거처하기 좋은 곳이라고 들은 기억이 났다

 

배낭을 멘 채 보리수 둥치에 기대어 쭉 뻗은 두 다리의 연장선 저 멀리 실리콜라 강물이 반짝이고 있었다서글픈 상념이 가라앉고 고요해지는 풍경이었다그대로 낮잠 한숨 푹 자도 좋았으련만 아리따운 처녀 펨 도마네 산장에서 마셔본 랄리구라스 꽃술이 떠올랐다다시 오면 한 달을 머물러도 돈을 안 받겠다던 룸부네 집은 멀고 높았지만 펨 도마네 산장은 거기서 멀지 않았다.

 


나는 도리질을 쳐서 방금 떠오른 위험한 상념을 흩어버리려고 애썼다술을 한 번 입에 대면 사흘이고 나흘이고 지칠 때까지 계속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 나의 병이었다일주일 내내 밤낮이 바뀌는 것도 모르고 마신 적도 있었다캘커타의 마리아 호텔에서는 보름이 넘도록 아침에 자고 저녁에 일어나 마셨다맥주에 위스키를 섞어서 해장하고 있으면 술 좋아하는 여행자들이 하나둘 술병을 들고 옥상으로 모여 들었다그렇게 시작된 술은 동틀 때까지 이어졌다.

 

캘커타를 떠나고다르질링의 유스호스텔에서 알리멘트로 숙소를 옮기고결국 이렇게 혼자 산길을 걷게 된 근본 이유는 동포 여행자들과 그런 술자리를 만들고 싶지 않은 데 있었다그러나 술 없이는 여행 또한 일상처럼 경직되거나 진부해지지 않았던가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가 마시는 술에는 그런 모순이 있고 왜곡이 있었다.

 
술 좋아하는 그는아무리 그라고 불러도 결국 나일 수밖에 없는 그는어느새 현수교를 건너고 있었다어느새 산장에 도착하여 붉은 술을 마시고 있었다잔명에 반짝이는 실리콜라의 시린 물살을 창 너머로 바라보며 푸른 목숨을 마시고 있었다

거짓말

취하면, ‘취한지도 모르고 취한’ 괴상한 상태가 되면처절하거나 비통한 이야기를 꺼내어 과장하고 각색하는 자가 거기 있었다창작한 대사를 도취 상태로 읊는 배우가 거기 있었다상대의 관심을 끌어내고자신에게 몰입하게 하고동정과 위로를 얻는 자가 거기 있었다그는그라고 부르고 싶은 나는붉은 술을 마시면서 펨 도마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그는가증스러운 나는실종된 딸을 찾아 나섰다고 펨 도마에게 말하고 있었다딸은 펨 도마 또래이며 펨 도마와 많이 닮았다고도 했다기독교 계통의 봉사단 일원으로 한 달 동안 네팔에 체류하면서 임무를 마친 딸은 다시 한 달 동안 인도를 여행한 후 캘커타에서 귀국할 예정이라고 했는데 한 달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고 했다국내에서 마지막으로 받은 그림엽서에는 다르질링 우체국 소인이 찍혀 있었다고 했다국내에서 무작정 소식을 기다리다가는 미칠 것만 같아서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캘커타를 거쳐 다르질링으로 왔다고 그는 말했다.

이전에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거짓말이 즉흥적으로 나왔다펨 도마는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경청했다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적절한 질문을 던져서 그가 거짓말을 술술 이어가게 했다

사진을 여러 장 가지고 왔는데 다르질링에 도착하자마자 수첩과 함께 분실했다딸의 사진을 다시 보내 달라고 가족에게 전화해 놨으므로 사진은 곧 다르질링에 도착할 것이다사진이 도착하면 경찰서에 찾아가 실종 신고를 하고 전단을 만들어 곳곳에 붙일 예정이라고 그는 말했다.

다르질링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 온 지 몇 달 안 되었다는 펨 도마는 외국인과 영어로 대화하는 걸 즐기는지도 몰랐다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술 마시는 이방인 사내와 대화하는 딸이 마땅치 않았음이 분명하다한 번 불려 가서 주의를 받았던 펨 도마가 다시 불려갔다 와서는 '이제 그만 가 보겠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그는 제법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 빈 술병을 흔들어 보고서야 식탁에서 일어났다.

그는 배낭을 던져 놓았던 방이 어딘지를 기억하기 어려웠다긴 복도 좌우에 늘어선 대여섯 개의 나무 문 중에서 어느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할지를 몰랐다갑자기 출렁다리를 건너올 때처럼 어지러웠다결국 펨 도마의 가족 중 누군가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거짓말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나 천재성을 미끼로 환심을 사려고 한다그러나 간혹 처절하고 비통한 소설을 써서 공감을 얻고 동정을 사려는 자들도 있다그는 언제나 후자의 경우이다전자에 속하는 부류는 그나마 건강한 편이다후자는 어리석고 약하다 못해 깊은 병이 든 자다.

실종된 사람은 그의 딸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그 자신이 가족을 떠났던 것이다그는 가족 모두가 싫고 집이 싫었다회사가 싫고 나라가 싫었다애인도 친구도 지겨웠다타락과 방종으로 이어지는 삶에 넌더리가 났다. 그는 죽고 싶었다. 그러나 그 땅에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죽더라도 멀리아주 멀리 가서 죽고 싶었다. <</span>계속>

 

 

#장편소설_칸첸중가_014_보리수_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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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 1개의 댓글이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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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niceye2026-08-20 21:34:12

    보리수 아래의 고요에서 다시 거짓과 술의 세계로 향하는 여정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실종된 사람은 그의 딸이 아니라 그 자신이었다”**는 문장은 이 글의 핵심을 압축합니다. 타인에게 들려주는 거짓말이 결국 자기 존재의 상실을 고백하는 역설적 순간처럼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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