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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깜보의 똥을 밟다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09-19 09:14:20


2. 깜보의 똥을 밟다

 

반려견을 키우다 보면 제일 먼저 부닥치는 문제가 배설물 처리이다. 강아지나 개가 알아서 잘 처리하면 그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하지만 정해 놓은 장소에서 처리를 하지 못하고 아무 데서나 함부로 배설하면, 일일이 그걸 좇아서 처리하는 일로 보통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키운 초롱이는 이미 성견인 데다가 배변 훈련을 받은 듯 처음부터 문제를 전혀 일으키지 않았다. 다만 영리한 초롱이는 배변을 가지고 나에게 강한 의사표시를 하는 경우가 있었다.

 

당시 나는 헤비 스모커였다. 지금은 한국의 거의 모든 아파트가 실내 흡연을 금지하고 있지만, 2004년 당시에는 아파트 안에서도 담배를 피웠다. 당시 내 방의 책상 바로 앞으로 베란다를 끼고 있어서 담배를 피면 바로 배출을 할 수 있었다. 덕분에 하루에도 2갑 이상을 피워 댔다. 여름에는 그래도 괜찮지만 겨울에는 창문을 밀폐해서 환기를 못하거나 아주 짧게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담배 연기와 냄새가 충분히 빠지지 못했다. 이처럼 과도한 흡연에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 베란다 앞에 놓인 화분들이다. 한번은 봄날 창가 앞에 놓인 난의 이파리를 얇은 천으로 닦는데 담배의 노란 진액이 묻어났다. 그것을 보고 내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마음도 아팠다. 내가 어느 날 하루 아침에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이다.

 

초롱이는 누구보다 내가 담배 피는 것을 싫어했다. 가뜩이나 코가 예민한 초롱이는 내 방에 있다가도 내가 담배를 들면 바로 빠져나가곤 했다. 그런데 나와 놀자고 내 방에 찾아오는 초롱이를 내 쫓기 위해 내가 일부러 담배를 든다는 것을 초롱이가 눈치챈 것이다. 그럴 때는 초롱이가 침대 이불 위에다 일부러 똥을 싸고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처음에 그것을 보고 “아니 이똥이 아직도 배변을 가리지 못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동작이 몇 번 되풀이 되면서 그게 초롱이가 나에게 하는 시위라는 것을 알았다. 영리한 초롱이가 배변을 무기로 사용한 예이다.

 

깜보가 온 지 이틀째 밤이다. 내가 방에서 거실로 나오는 데 갑자기 발에서 물컹한 느낌이 들었다. 깜보가 거실에 싼 똥을 밟은 것이다. 그때 발바닥으로 전달되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꼭 불쾌하거나 나쁘지는 않았다. 요즘은 이런 똥을 밟는 경우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는 우마차를 끄는 소가 걸으면서 똥을 싸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이 똥을 불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똥이 말라 비트러지면 줏어다가 땔감으로 쓰는 경우도 많았다. 내가 몽골에 갔을 때 비슷한 경험을 겪은 적이 있었다. 1년 평균 강우량이 크게 적은 몽골에는 사막이나 메마른 땅이 많지만 초원도 적지 않다. 한 번은 몽골의 두 젊은이들과 울란바타르 동쪽의 톨(Toll) 강으로 낚시를 하러 갔다가 워낙 바람이 세게 불어서 젊은이의 할아버지가 사는 게르(Ger)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 게르에서 몽골인들과 독한 보드카 몇 잔을 마시고 나서 술을 깨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바깥은 온통 초원으로 둘러 쌓여 있었는데 발을 옮길 때마다 온통 말들과 소들이 싸 놓은 똥 천지이다. 멀리서 보면 이런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아름다웠지만, 사실 가까이서 보면 온통 똥들이다. 그런데 이런 가축들이 싸놓은 똥들은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이 추운 겨울을 지낼 때 유용하게 사용하는 연료이다. 그래서 초원에는 등에 넝마를 지고 이런 똥을 집게로 짚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내가 깜보의 똥을 밟은 뒤로 나는 깜보에게 바로 배변 훈련을 시켰다. 배변판을 화장실 입구 쪽에 놓고 깜보가 배변할 때마다 그쪽으로 유도를 했다. 잘하면 간식거리를 주면서 칭찬을 했고, 실수를 하면 간단한 벌을 주었다. 그랬더니 단 이틀 만에 깜보가 바로 배변을 똑바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보고 깜보가 영리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어린 강아지가 말귀를 바로 알아듣고 따라할 수 있다는 것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깜보가 영리하다는 것은 그 이후 여러 가지로 드러났다. 깜보는 특별히 훈련을 받지 않았는데도 밖에서 외출을 할 때 아주 절도 있게 행동을 했다. 내가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아는지 절대로 빨리 걷지 않고 항상 내 옆에서 나와 걸음을 맞췄다.

 

다 자란 깜보의 크기는 중형견 정도 되었다. 그래도 아파트에서 키우기는 약간 부담스럽기는 했다. 무엇보다 깜보가 운동하기가 쉽지 않다. 산책을 자주 나가는 것도 아니니까 아파트에 거주하는 애견들이 비만증에 걸리는 경우들이 많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많이 먹고 적게 움직이면 어쩔 수 없이 경험하는 증상이다. 그런데 깜보는 먹는 것을 탐하면서도 항상 날씬한 몸매를 유지했다. 그 비결이 바로 운동이다. 깜보는 하루에 3번씩 30분 정도 거실에서 자기 스스로 격렬한 운동을 한다. 두툼한 쇠 사슬을 혼자서 아이스하키 하듯 치고 박고 한다. 이 쇠사슬이 멀리 가버리면 달려가면서 껑충 뛰어 잡기도 한다. 이렇게 격렬하게 운동을 하다 보면 입에서 거품까지 흘린다. 그 모습을 보다 보면 영락없이 운동 선수가 운동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어떻게 개가 저렇게 도구를 이용해서 운동을 할 수가 있을 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깜보는 이런 운동을 늘 식사하기 전에 했다. 식사가 다 준비가 되어 깜보에게 “그만하고 밥먹자!”고 하면 힐끔힐끔 놀이 기구를 쳐다 보면서 마지 못해 밥그릇 앞으로 다가간다. 그런 모습을 보면 어렸을 때 땅거미가 짙어질 때까지 친구들하고 놀고 있는 데 ‘밥먹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지못해 집으로 아쉬운 발길을 떼던 나의 모습이 연상된다. 깜보의 운동하는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서 유튜브에 올려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 일로 번거로워질 것 같아서 참았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확실히 지능지수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내가 키웠던 깜보는 상위권에 들 법하다. 깜보는 ‘자기학습’ 능력 면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한 번은 깜보가 온 지 서너 달이 지난 겨울철에 아내와 함께 깜보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했다. 드라이브 코스는 행신동 아파트에서 일산 IC를 탄 다음 외곽순환도로를 거쳐서 남양주로 빠졌다가 다시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조수석 자리에서 아내의 품에 있었던 깜보가 계속 낑낑거리다가 결국 구토을 한 것이다. 약간 정도 한 것이 아니라 깜보를 안고 있던 아내의 옷과 조수석 시트가 깜보의 토사물로 인해 떡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개가 구토을 하는 것을 그때 처음 보았다. 개도 차멀미를 한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깜보를 차에 태울 때는 상당히 조심을 했다. 깜보 역시 혀를 내밀면서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 때면 잠시 차를 멈춰서 깜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곳에서 구토을 하도록 유도했다. 이런 식으로 몇 개월 정도 훈련을 하고 나니까 더 이상 깜보는 차멀미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일종의 장애를 스스로의 노력과 훈련으로 극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려견과의 생활은 흔히 사진 속의 귀여운 모습으로 먼저 상상되지만, 실제 돌봄은 먹이고 치우고 씻기는 일에서 시작된다. 배설물을 처리하는 일은 가장 소박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깜보의 똥을 밟았던 그 밤은 우리 가족의 생활에 다른 생명체의 리듬이 들어왔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달은 순간이었다. 불쾌하다고 화를 내는 대신 어린 강아지가 어디에서 배설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했다. 돌봄은 상대가 처음부터 우리의 규칙을 알고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고, 알아들을 때까지 기다리며 반복하는 일이다.

 

깜보가 이틀 만에 배변 장소를 익히는 모습을 보며 나는 훈련이 일방적인 명령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신호를 주고, 개는 그 신호의 의미를 추측하며 반응한다. 사람도 다시 개의 반응을 관찰하면서 방법을 바꾼다. 이런 주고받음이 쌓여 하나의 생활 규칙이 만들어진다. 말을 할 수 있는 쪽이 언제나 더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이 만든 기준을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상대가 보내는 작은 신호를 놓치기 쉽다. 깜보를 가르치는 동안 나 역시 기다림과 관찰을 배웠다.

 

초롱이가 담배 연기에 대한 불만을 배변으로 표현했던 일도 같은 맥락에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당시에는 말썽이나 복수로 여겼지만, 그것은 초롱이가 사용할 수 있었던 강력한 의사표현이었을 것이다. 동물의 행동을 단순히 문제 행동이라고 이름 붙이면 그 행동이 전하는 내용을 듣지 못한다.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환경이 불편했는지 살펴볼 때 비로소 함께 사는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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