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철학 네트워크=김홍성 ]
취생과 몽사
몽사가 스스로 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
나이는 43세. 직업은 여행 작가. 오지나 절경을 찾아다니면서 찍고 써서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프리랜서. 절경보다 오지를 좋아한다. 그러나 친구들로부터 ‘너 때문에 오지가 남아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듣고부터는 국내 오지 취재를 포기. 취생과 함께 인도, 네팔, 파키스탄, 티베트 등의 히말라야 기슭을 뒤지고 다닌 지 만 2년이 되었다. 2년 동안 해마다 6개월 정도는 여행하며 살았음. 이번에도 6개월 일정으로 출국했음.
몽사가 능변이라면 취생은 말을 아꼈다. 친절하고 명랑한 성품인 듯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나이는 서른 살 전후로 보였다. 부부로 보기에는 나이 차이가 크게 났다. 둘은 연인 사이가 아닌가 싶었지만 결례다 싶어서 그들의 신상에 관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들도 내 신상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인도 네팔 등지에서 떠돌이 생활을 해 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바로 귀국할 예정인 여행자라는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잡다한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 나는 드라이클리닝을 맡긴 우모 침낭을 찾으면 바로 시킴으로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당일에 바로 시킴 입경 허가가 나오는 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여기서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얘기도 했다.
몽사는 우모 침낭을 드라이클리닝 하면 침낭의 성능이 많이 떨어진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오리나 거위의 앞가슴에 나는 잔털에는 강한 복원력을 유지하게 하는 자체 성분이 있는데 드라이클리닝의 세제인 벤젠은 그 성분을 다른 기름때와 함께 빼 버린다는 거였다. 취생도 예전에 네팔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결국 새 침낭을 장만한 후로는 고어텍스 커버와 융으로 만든 내피를 같이 사용한다고 했다.
몽사는 뚱바를 제대로 마시는 법에 대해서도 알려 주었다.
“술이 빨리 우러나게 한답시고 빨대로 통 속의 꼬도를 휘젓지 마세요. 꼬도의 겉껍질이 손상되어 숙성되지 않은 술까지 우러나오므로 머리가 아플 수 있거든요. 뜨거운 물을 부어 놓고 술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도록 기다렸다가 빨아야 제맛이 납니다.”
취생의 보충 설명이 따랐다.
“성질 급한 분들은 뚱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개중에는 뚱바를 통해 자기 성격이 급하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 사람이 뚱바를 즐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성격이 조금씩 변하나 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빨대로 꼬도를 휘저었던 그 사람이거든요.”
두 사람은 팔꿈치로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가며 웃었다. 나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빨대로 빨기는 하지만 차처럼 우려서 마시는 음료니까 곡차라고 해야겠군요. 다도를 익히듯 주도를 익힌다…. 이거 말 되네요.”
술이 밍밍해지자, 새 뚱바를 시켰다. 페마는 뚱바를 가져다 내려놓고 중국제 마호가니 병의 뜨거운 물을 조금씩 세심하게 부어주었다. 페마가 미소 지으며 떠난 후 대화는 다시 몽사의 뚱바 얘기로 이어졌다.
“시킴 산중에서 주목으로 만든 뚱바 통을 봤어요. 그 통에는 뚜껑이 있더군요. 가운데는 빨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통 옆에는 쇠고리가 두 개 달려 있었어요. 그 쇠고리는 장식품이 아니라 가죽 끈을 연결해서 어깨에 걸기 위한 거였어요. 추운 겨울에 말을 타고 길을 나설 때 뚱바 통을 숄더백처럼 옆구리에 차고 거기에 긴 빨대를 꽂고 따끈한 술을 빨면서 추위에 견뎠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림이 그려지나요? ”
몽사의 구수한 얘기를 들으니 뚱바 통을 찬 행장으로 말에 앉은 사내들이 내 눈에도 그려졌다. 나는 그걸 보이는 그대로 두 사람에게 읊어주었다.
“아아…. 보입니다. 보여요. 말을 타고 온 사내들이 주막집 앞마당에 모여 있습니다. 뚱바 통을 찬 사내들입니다. 주막집 헛간에 김칫독 같은 독이 있고 거기서 뚱바가 숙성되고 있어요. 화덕에서는 뜨거운 물이 끓으면서 김이 오릅니다. 페마처럼 생긴 부인네들이 뚱바를 한 바가지씩 퍼서 말 탄 사내들의 뚱바 통에 담아 줍니다. 뜨거운 물을 바가지로 퍼서 뚱바 통에 부어주는 부인네들도 있습니다. 다 담았나 봐요. 서로 합장하는군요.”
몽사와 취생은 내가 읊조리는 상상에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다. 그때 문득 나의 뇌리에는 그림이 떠올랐다. 산닥푸 능선에서 만난 일본인 요시부미가 보여준 러시아 화가 로에리치의 그림 ‘Remember(기억하라)’이었다. 그 얘기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참았다. 그 얘기가 길어지면 자칫 나의 거짓말쟁이 행각을 들킬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말을 누르고 건배사를 읊었다.
“여기 뚱바가 있고, 취생이 있고, 몽사가 있으니 자연스럽게 취생몽사가 되겠군요. 자, 다시 한번 건배합시다.”
두 사람은 내 눈앞에 엄지를 치켜세우면서 대단하다고 부추겼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불안이 엄습했다. 이러다 다시 형편없는 술꾼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이었다.
* 콜카타의 박물관 뒷골목 수데르 거리. 사진 왼쪽 위에 호텔 마리아의 간판이 보인다.
낙원
이미 말했던가? 콜카타에서 지냈던 1월은 취생몽사의 나날이었다고? 날마다 호텔 마리아의 옥상에서 아침까지 마셨다는 얘기는 했지만 어느 날 새벽에는 만취하여 몸을 못 가누는 여성을 부축하고 그녀의 방 화장실로 계단을 내려갔던 얘기는 아직 안 했다. -이런 얘기를 하자면 나는 그가 된다. 비겁하지만 그가 되지 않고는 이런 얘기를 계속할 수 없다.
여자는 일어서려고 하다가 주저앉곤 했다. 일어서지를 못했다. 주변의 누구도 그녀를 돕지 않았다. 그들 혹은 그녀들은 낄낄낄 웃기만 했다. 모두 만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었던 그가 보다 못해 일어섰다. 그도 취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의 정신은 있었다. 그녀는 잘 걷지도 못했다. 그는 그녀가 걸을 수 있도록 부축했다.
그녀는 그에게 매달리다시피 해서 간신히 걸음을 떼었다. 여자는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렸다. 옥상의 공동 화장실은 진작부터 폐쇄되어 있었다. 각자 자기 방의 화장실을 쓰거나 아래층 로비의 화장실을 써야 했다. 로비까지 내려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녀의 방이나 그의 방, 둘 중 어느 하나에 있는 화장실을 써야 했다.
그녀의 방은 옥상 밑에 있었고 그의 방은 한 층 더 밑이었다. 계단을 간신히 내려가서 그녀의 방 앞에 이르자 그녀가 목에 목걸이처럼 걸고 있던 방 열쇠를 조금 들어 보였다. 그녀의 목에서 그것을 벗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의 목이 자꾸 꺾였기 때문이다.
문을 열어 주고, 화장실 문도 열어 주고, 그녀 스스로 반바지를 내릴 수 있는지를 보려고 잠시 기다렸지만, 그녀는 곧 주저앉을 듯이 상체를 흔들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좀 더 도와줘야 했다.
우선 그녀의 턱을 왼쪽 어깨로 받치고 한 팔은 그의 목에 두르게 했다. 다음에는 반바지 허리를 여민 쇠 단추를 제치고, 지퍼를 내렸다. 하얀 팬티가 보였다. 반바지를 팬티와 함께 내리려고 팬티의 고무줄에 손가락을 찌른 순간 그녀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그의 목에 둘렀던 팔을 급히 거두어 그의 가슴을 떠밀며 '동작 그만 개새끼야'라고 소리쳤고, 이어서 '차렷 개새끼야'라고 소리쳤다.
그는 술이 확 깨는 것을 느끼며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자 난데없는 따귀가 번쩍 날아왔다. 그는 눈을 한 번 크게 떴다가 조용히 돌아섰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따귀 맞고 난 후에 보인 그의 동작은 꼭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 몽유병자처럼 한 발 한 발 천천히 옥상으로 올라가면서 그는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옥상에 올라서 보니 동이 트고 있었다. 산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일망무제의 평야, 그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맞이하며 그는 탁자에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묘한 안도감과 쾌감이 따랐다. 그는 생각했다. 동작 그만이나 차렷은 군대 용어 아닌가? 이십 년 전 졸병 생활 3년 동안 그토록 군대식 명령어에 세뇌되었던 건가?
옥상의 남조선 술꾼들은 전멸 상태였다. 몇몇은 상체가 꺾였거나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있었고 몇몇은 서로에게 기대거나 포개져 있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그가 여자를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가 혼자 올라왔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낙원을 찾아서 콜카타에 왔고, 그들만의 낙원에서 취생몽사하고 있었다. 거기엔 일탈, 탈피, 망각, 치유, 향수, 감격, 쾌락, 자유, 평화, 만족이 있었다. 그러나 술이 깨고 혼자 남으면 극심한 불안만이 남았다. 그들은 다시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날마다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동작 그만 개새끼야, 차렷 개새끼야……라고 명령했던 그녀는 다음 날 아무도 몰래 어디론가 떠났지만 저 말은 그의 입을 통해 마리아 호텔 옥상의 남조선 술꾼들이 무료해질 때마다 한 번씩 터져 나왔다. 그는 입이 쌌다. 맨정신에는 입안에서만 맴돌던 말들이 술 취하면 취할수록 질질 천박하게 새 나왔다. 그게 그의 고질병이었다.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계속>
#장편소설_칸첸중가_018_취생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