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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 」-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 소개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10-02 23:55:35

Photo from Wikipedia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에세이 형태의 길지 않은 글이지만, 현대의 우리가 놓치고 있는 적지 않은 것들을 생각거리로 남겨주고 있다. 이 글은 니콜라이 레스코프(Nikolai Semyonovich Leskov, 1831~1895)라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중요한 소설가이자 단편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레스코프는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도스토예프스키와 같은 거장들과 동시대에 활동했으나, 상대적으로 국내에서는 덜 알려져 있다. 

 

이 글은 다소 비관적인 시선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야기꾼—그 이름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게 들리지만—그가 지닌 살아 있는 작용력은 결코 우리 앞에 온전히 현존해 있지 않다. 그는 이미 우리에게서 멀어진 존재이며, 지금도 더욱 멀어져 가고 있는 존재다.” 이야기는 경험을 서로 나누는 능력이지만, 경험의 가치가 하락하면서 이야기꾼이 점점 더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의 세대는 생각하기도 힘든 먼 옛날에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살던 지역을 벗어나기 힘들었다. 이때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던 장사치들이나 배로 먼 지역을 오가는 선원들은 단순히 물건만 팔고 실어 나르는 것이 아니었다. 실상 그들은 서로 다른 지역의 다른 이야기들을 옮기고 나누는 이야기꾼들이었다. 많은 이야기꾼들은 삶에 대한 실제적 지향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농사꾼들에게 농업에 관한 실제적 기술을 조언한다든지, 다른 지역의 발달된 자연과학적 가르침을 줄 수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꾼들은 삶의 교훈이나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 지혜란 살아온 삶의 재료 속에 짜 넣어진 조언,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기술이 점차 사라지면서 진리의 서사적 측면, 즉 지혜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러한 소멸은 장구한 역사적 상상력들이 낳은 필연적 현상이다. 

 

벤야민은 이야기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근대 초기의 소설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갖는 이야기와의 차이에 주목한다. 이야기가 이야기꾼의 경험에서 길러지고, 입을 통해서 전달되는 반면, 소설은 본질적으로 책에 의존한다. 이야기꾼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요구하는 다른 이들에 둘러싸여 그것을 나누는 반면, 소설가는 고립되어 있고, 소설의 탄생 장소는 고독한 개인이다. 더 나아가 이야기의 퇴조에 소설보다 힘을 보탠 것은 현대 세계에 범람하는 ‘정보’다. 이야기가 이야기꾼이나 듣는 이들의 해석을 요구하지만, 정보는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검증가능한 것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상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스코프는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투스를 끌어들여 그 차이를 설명한다. 헤로도투스의 책 〚역사〛제3권 14장에는 페르시아 왕 캄비세스가 포로로 잡은 이집트 왕 프삼메니토스를 모욕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포로로 잡힌 왕을 페르시아의 개선 행렬가에 세워두라고 명령했다. 페르시아 왕은 먼저 이집트 왕의 딸이 하녀의 모습으로 물동이를 들고 우물로 가는 장면을 보여주었고, 얼마 뒤에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들을 보여주었다. 많은 이집트인들이 그 장면들을 보면서 통곡을 했지만, 그는 눈을 내리깔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뒤 늙고 가난해진 자기 시종을 보았을 때는 주먹으로 자기 머리를 치며 심하게 슬퍼했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그 이후 많은 사람들은 이 이집트 왕 이야기에 대해 여러가지 분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그들의 놀라움과 사유를 불러 일으켰다. 만일 이것이 단순한 정보에 그쳤다면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했을까? 

 

이야기의 퇴조는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발레리의 다음의 문장을 보라. “마치 영원성에 대한 사유의 쇠퇴가 오래 지속되는 작업에 대한 혐오의 증대와 함께 일어나는 것 같다.” 영원성에 대한 작업은 죽음에서 가장 강력한 원천을 얻어왔다. 이야기꾼은 자신의 권위를 죽음에서 빌려온다. 그런데 이 사유가 쇠퇴한다면 죽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달라지고 말 것이 아닌가? 이바사의 어느 해시계에는 이런 구절이 새겨져 있다. “마지막 시간은 많은 이들에게 온다.” 설명을 위해 벤야민은 다음의 말을 더한다. “오늘날 시민들은 죽음으로부터 깨끗하게 보존된 공간 속에 살고 있다. 그들은 영원의 건조한 거주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끝이 다가오면, 상속자들에 의해 요양소나 병원으로 치워진다.” 중세인들에게 죽음은 삶과 동떨어진 낯선 현상이 아니었다. 로마 병정들이 개선행진을 할 때 포로로 잡힌 노예들이 합창하는 소리가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이 배제되고 추방된 삶은 ‘영원의 건조한 거주자들’만이 사는 단조로운 세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음을 자신들의 삶과 다르게 타자화한다. 죽은 시신은 그저 사물처럼 처리될 뿐이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은 라스코프의 작품 해석을 통해 발전된 기술과 문명 세계가 놓치고 있는 것을 섬세하게 살핀다. 「이야기꾼」은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공동체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야기,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을 통해 매 순간 살아 있는 삶의 의미를 다시 확인시켜 주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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