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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_칸첸중가_023_론리플래닛_스바나
  • 김홍성
  • 등록 2026-10-09 13:34:29


론리플래닛

나처럼 못났고, 나처럼 슬프고, 나처럼 술에 탐닉하는 인간인 미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 둘은 마누라 이야기가 드리운 암울한 그림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둘 다 운무 스크린에 투영되는 각자의 과거에 붙들려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한 떼의 술꾼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앉을 자리를 찾았다. 주막집 여자가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만 마시고 가라는 뜻이었다. 내가 먼저 일어섰다. 미셸도 일어서서 왼손으로 자신의 주머니들을 뒤지며 돈 찾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손수건이 나오자, 콧물을 닦으며 말했다.

“네가 좀 찾아봐 다오. 어느 주머니에 넣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분명히 1백 루피짜리 한 장이 있을 거다. 1백 루피면 내 술값으로는 충분하다.”

쿡, 웃음이 나오는 걸 참았다. 미셸의 1백 루피짜리 지폐는 주머니가 아니라 양말이나 허리춤에 감추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미셸을 먼저 내보내고 술값을 치렀다. 우리가 마신 팩 소주는 모두 여섯 개, 나는 두 봉지를 더 사서 재킷 주머니에 넣고 주막집을 나섰다.

안개는 서서히 가시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장거리에는 등불이 켜지고 있었다. 미셸은 길 건너 전봇대를 안고 비틀거리며 소변을 보고 있었다. 저 녀석을 저대로 두고 그냥 가버릴까? 학교까지 데려다줘야 하나? 좋다, 만일 미셸이 오줌을 다 누고 바지 지퍼를 제대로 올리면 데려다주자.

그가 바지 지퍼를 올리고 길을 건너왔으므로 그의 팔짱을 끼고 광장을 향해 올랐다. 몹시 숨차하는 그의 빨갛고 뾰족한 코끝에서 콧물이 달랑거렸다. 이따금 손수건을 꺼내 콧물을 닦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을 이으려고 애썼다. 나를 옆에 붙들어 두는 유일한 도구는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열다섯 살 때 말이야, 우리 반 친구하고 가출했거든. 어딜 갔었는지 알아? 티베트로 갔어. 그때는 차가 없어서 걸어서 갔다고. 여기서 칼림퐁까지 하루, 칼림퐁에서 갱톡까지 또 하루……. 넷째 날 밤엔가 국경을 넘었어. 6월이었는데 우린 무지무지하게 추웠어. 다행히 거기 곰파가 있더군. 짬바 가루를 뜨거운 차에 타서 마셨지. 이튿날에는 염소국과 고기를 먹고. 우린 그 절에서 한 달을 살았어.”

“국경을 어떻게 넘었냐?”

“국경 초소가 있긴 했지만, 그땐 별문제가 안 됐어. 더구나 난 티베트 말도 잘했거든. 우리 어머니가 티베트 여자니까. 난 외가가 있는 시가체까지 갈 생각이었는데 절에서 승려들이 하도 잘 해줘서 그냥 머물렀던 거야. 외가에 가봤자 반겨줄 사람도 없었고.”

“하마터면 라마승이 될 뻔했구나?”

“그럼. 그럼. 그런데 우린 거기서 돈을 훔쳤어. 다르질링으로 돌아올 여비를 만드느라고.”

“안 들켰냐?”

“들켰지. 라마승들이 쫓아왔어. 우린 붙들렸지. 그런데 말이야, 겨우 그 돈 가지고 어딜 가냐며 돈을 더 주는 거야. 짬바 가루, 말린 염소 고기도 갖고 왔더라니까. 내 참.”

“참 착한 중들이다.”

“다른 여행들은 다 잊고 싶어도 그 여행만은 잊고 싶지 않아. 생각만 해도 즐겁거든.”

“같이 갔던 친구는 어떻게 됐냐?”

“몇 년 전에 나갈랜드에서 반정부군의 총에 맞아 죽었어. 그 지역 치안 책임자였거든.”

“안 됐다.”

“나갈랜드는 아직도 치안 부재 상태야. 아니,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 내 형도 그쪽에서 사업을 하다가 그만두고 작년에 돌아왔어. 그래서 다시 학교를 시작한 거야.”

광장에 오르자, 안개가 완전히 걷혔다.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시킴 쪽 능선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미셸은 벤치에 앉아 능선들을 향해 손가락을 뻗쳤다.

“저기 저 능선 너머가 칼림퐁이야. 칼림퐁은 참 좋은 데다. 타고르도 여름철이면 칼림퐁에 와서 쉬곤 했다. 내 어렸을 때, 누나처럼 같이 자란 우리 집 하녀가 칼림퐁으로 시집갔어. 난 요즘도 가끔 그 집에 놀러 가지. 네게 그 집도 보여 주고 싶다. 주말에 같이 가서 며칠 푹 쉬다 오자. 누나는 음식 솜씨가 좋아. 물론 술값도 여기보다 싸다.”

칼림퐁. 안 그래도 시킴에서 나올 때 들려 보고 싶었던 곳. 그러나 술값도 싸다는 말에 질렸다. 도대체 이 친구는 얼마나 많이 마시고 싶은 걸까? 남녀 서양 여행자들 서넛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들은 론리플래닛(lonely planet) 출판사에서 나온 가이드북 ’인디아’를 손에 들고 있었다. 미셸이 그들에게 ‘굿이브닝’하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못 들은 척 대꾸 없이 앞만 보고 갔다. 미셸이 그들을 향해 빈정거렸다.

“과연 론리플래닛(lonely planet)이군. 겁쟁이 책벌레들.”

“무슨 뜻이냐?”

“예수쟁이들이 성경에 끌려다니듯 ‘론리플래닛’이라는 가이드북에 끌려다니는 꼴이 우습지 않아? 저놈들 여행은 껍데기야, 알맹이가 없어. 어, 저기 또 론리플래닛이 오는군. 굿 이브닝 론리 플래닛. 헬로 굿 이브닝 론리 플래닛.”

미셸은 마침 또 지나가는 서양 여행자들을 향해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말려야 했다.

“그만둬 미셸, 사람들이 쳐다봐. 저길 봐. 폴리스도 너를 주시하고 있다.”

“폴리스는 걱정하지 마. 경찰 서장이 우리 아버지 제자야. 게다가 난 이 도시에서 태어나 50년을 살았어. 김, 우리 한 잔 더 하자. 집에 가기 전에 조금만 더 마시고 싶어. 근처에 좋은 곳이 있다.”

망설였다. 이쯤에서 이 인간과 작별해 버리는 게 어떨까? 내일 시킴으로 떠나야 해서 더 이상 같이 있을 수가 없다고 지금 말할까? 하지만, 이 인간은 재미있다. 왠지 끌리는 구석이 있다. 저 인간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는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스바나

 .

광장 건너편 행상들이 좌판을 걷고 있었다. 티베탄 마부들도 말을 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미셸은 광장 동쪽 비탈에 있는 공중변소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거기 판자로 지은 싸구려 선술집 서너 채가 나란히 있었다. 다르질링에서 가장 누추하고 좁고 저속한 선술집들이었다. 미셸이 맨 끝 집의 거적을 들치자 흐린 불빛이 퍼져 나왔다. 불빛 속에서 여자의 조그만 얼굴이 나타났다.

“김, 이 숙녀가 바로 내 애인 스바나야. 어서 들어와.”

미셸은 여자의 목을 왼팔로 감으려 했으나 여자는 살짝 빠지며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미셸이 발정한 곰처럼 따라 들어갔다. 안에서 여자의 숨죽인 목소리와 함께 실랑이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나는 문밖에 서서 기다려 주었다.

잠시 후 ‘쪽’ 소리가 나더니 미셸이 거적을 들치고 얼굴만 조금 내밀고 조그만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김! 김! 아, 있었군. 미안, 미안. 깜빡했어. 어서 들어와.”

미셸은 술에 취했다 깼다 하는 모양이었다. 흠뻑 먹여서 아예 쭉 뻗게 해 줄 테다.

실내는 어두컴컴했다. 맨 구석에 나무 침대와 조리대가 있었고 긴 탁자와 긴 의자 두 개가 보였다. 촛불이 탁자 끝에서 타고 있었다. 여자는 스무 살 전후로 보였다. 교태가 있는 얼굴인데 낯선 사람 때문에 일부러 무뚝뚝하게 구는 듯했다.

스바나는 달걀부침 두 접시와 락시 한 병, 그리고 컵 두 개를 탁자에 놓고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 손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미셸이 유리컵에 락시를 따랐다. “이 집 락시는 기장으로 빚은 꼬도 락시야. 물론 농약을 안 타지. 우선 맛을 봐. 넌 틀림없이 좋아하게 될 거야.”

스바나네 락시는 과연 림빅에서 맛본 락시처럼 기장으로 만든 것 특유의 향취가 있었다. 술 한 병이 금세 비었다. 미셸은 한 병 더 마시고 싶어 했지만 나는 일어섰다.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구석에 앉아 있었던 스바나가 돌아앉으며 미셸을 향해 ‘50루피’라고 짧게 말했다. 내 지갑에서 50루피짜리 한 장을 빼서 주고 먼저 나왔다. 미셸은 아까처럼 ‘쪽’ 소리를 내고 나와서는 내게 어깨동무하며 소곤댔다.

“스바나가 나더러 뭐라고 했는지 알아? 킬킬킬. 오늘 밤늦게 혼자 오라는 군. 꼭 할 말이 있대.”

“그래? 그럼 더 있다 와. 난 그냥 갈게.”

“아냐, 아냐. 상관없어. 스바나는 오늘 그냥 사내가 그리울 뿐이야.”

“추잡한 놈.”

“뭐라고?”

“나 혼자 한 말이야. 상관 마.”

“김, 너 지금 한국말로 욕했지?”

“상관 말래도.”

공중변소 앞에 이르자 미셸은 공중변소의 벽을 짚고 오줌을 눴다. 무척이나 오래 눴는데, 누면서 말했다.

“김, 너 정말 1971년에 베트남에 있었냐? ”

“미셸, 넌 정말 열다섯 살 때 티베트로 가출했었냐?”

“너부터 말해.”

“아니, 너부터.”

“나중에 하는 거 어때?”

“좋은 생각이다.”

미셸은 변소 앞에서 북쪽으로 뻗은 골목길로 접어들더니 갑자기 어깨동무를 풀고 의젓하게 걸으려고 애썼다. 공제선 위로 떠오른 뿌연 달무리에 쌓인 노란 달이 달걀부침처럼 보였다. 미셸은 노르스름한 달빛 속에 멈추어서 저만치 실루엣만 보이는 서양식 이 층 건물을 가리키며 ‘학교’라고 짧게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교문이 따로 없는 학교였다. 교사 두 동은 모두 붉은 벽돌로 지었는데, 본관인 듯한 건물 이 층 테라스의 난간에 전등불이 켜져 있고 거기 ‘VXXXXX MEMORIAL MISSION SCHOOL’이라고 쓴 금속판이 번쩍이고 있었다. 

미셸은 자그만 학교 마당을 성큼성큼 건너가더니 현관 앞 어디선가 큼직한 열쇠를 꺼냈다. 자물쇠를 풀고, 문을 당기자마자 뭔가 하얀 물체가 문 밑에서 불쑥 튀어나와 마당을 행해 달렸다. 미셸과 나는 흠칫 놀라면서 고개를 돌려 그 물체를 식별했다. 그것은 고양이였다. 하얀 고양이 한 마리가 학교 마당 어둠 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span>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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