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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동양철학 편력기, 다섯째 마당
  • 이종철 칼럼니스트
  • 등록 2026-10-10 18:55:21
  • 수정 2026-10-10 23:14:00


내가 지난 10년 동안 동양철학과 한국철학 관련해서 논문이나 연구서들을 이것 저것 읽었지만, 어떤 체계를 세워서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공부를 하면서 내가 느낀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철학의 내용은 어떡하든 이해를 할 수가 있었지만, 한문이라고 하는 언어적인 장벽을 뛰어넘기는 쉽지가 않았다. 학문을 함에 있어서 언어의 역할은 참으로 크다. 말과 달리 언어는 사유를 명확히 하고 또 그 사유의 지평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독일어를 모르고 독일철학을 한다든지 프랑스어를 모르고 프랑스철학을 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정신적인 친숙함을 느낀다 해도 한문이라고 하는 동아시아 공통의 언어를 모르고서는 고전 문헌에 접근하기가 어렵다. 물론 지금은 다양한 형태의 번역서들이 나와 있어 그런 번역서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여전히 한문 독해가 필요하다. 때문에 에세이 형태의 글을 쓰거나 논문을 쓸 때 이런 한계를 많이 느낀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한계는 아니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서양철학을 연구해왔던 내가 동아시아 철학을 연구할 때 그 쪽 전문 연구자들과 똑 같이 할 수도 없도 할 필요도 없다. 나의 동아시아 철학에 대한 관심은 주로 비교철학적 연구에 있다. 동아시아 철학이나 사상에서 동서양의 사유구조를 일관하는 보편적 구조와 이러한 사유구조를 동아시아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는가가 그것이다. 이를 단순화시킨다면 한편으로는 내가 오랫동안 숙지해온 서양철학의 방법과 사유구조를 통해 동아시아 철학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철학이 서양철학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비교철학적 관점에서 본다면 동양을 통해 서양을 이해하고, 서양을 통해 동양을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은 20세기 포스트모던니즘의 확산과 영향으로 인해 전통적 의미의 분과나 경계를 허물고 얼마든지 다른 사유-타자성-를 이해하고 상호 간의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동서양 간의 보편적이고 이질적인 사유구조의 이해라는 차원에서 접근하기 때문에 세세한 자구(字句)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오래 전 동국대학에서 유식학에 관한 논문을 학위를 받은 후배가 논문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그 후배는 원문을 꼼꼼히 해석하고 주석한 논문을 써서 열심히 설명하고 있지만, 가뜩이나 어려운 유식학(唯識學)의 용어를 가감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어투도 그런 철학의 전통을 따르다 보니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 마디로 전공자들 사이에서는 통할 지 몰라도 비전공자나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것이다. 나중에 논문에 관해 논평을 하면서 이 점을 지적했더니 동국대 불교철학과의 전통에서는 그렇게 해야만 논문을 쓸 수도 있고 통과도 된다고 단호하게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런 입장을 고수한다면 다른 철학과의 대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질 수 있다. 동서양을 위시해 모든 철학들은 그 고유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보편성도 가지고 있다. 대화는 각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런 공통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차이만 고수한다면 어떻게 대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유식학은 본래 무착(無着, 310-390), 세친(世親, 320-400) 등의 인도 철학자들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수많은 원전들이 한문으로 번역되고, 거기서 사용되는 용어들도 중국화된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유식철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용어들을 한문 용어들로만 고집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내 생각으로는 이런 방식의 철학은 철학의 보편적 내용을 특수한 언어의 한계에 가두는 것이고, 그것이 강조되다 보면 자구풀이에 스스로 갇히고 만다. 가뜩이나 철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서양철학은 오퍼상이고, 동양철학은 고물상이라고 자조식으로 말하는데, 이제는 이런 식의 연구를 지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서양이나 동양철학을 연구하는 것은 그 철학 자체를 이해하는 것 외에도 그 철학들이 현재의 나의 철학과 이 시대의 철학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때문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과거의 철학은 원용의 차원일 뿐, 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철학의 문제의식과 내용이라 할 수 있다. 

둘째, 동서양 비교 철학을 할 때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장애물은 한문이라는 '언어'였다.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여간 어렵지가 않다. 그런데 이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리고 있다. AI의 급속한 발전 덕분에 외국어 번역의 수준도 빠르게 좋아지고 있다. 이제는 전문 학술 번역의 경우에도 그 퀄리티가 95% 이상 될 정도이다. 이 정도면 전문 번역가의 수준을 상회한다고 볼 수도 있다. 게다가 AI의 번역기의 속도는 추종을 불허한다. AI의 번역기는 동서양, 고전어와 현대어를 불문하고 거의 모든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때문에 과거처럼 언어를 배우느라고 큰 고생을 하거나 시간 투자를 할 필요가 없을 지경이다. 오히려 그런 시간과 에너지를 철학 자체에 투입할 수도 있다. 이 AI 번역기는 앞으로 철학 연구 방식 자체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보통 연구자들이 그룹 스타디나 세미나를 할 때 원서를 가지고 한 구절씩 번역하면서 공부하곤 했다. 원전 공부에는 이 과정이 거의 필수적이다. 이러한 원전 강독을 통해 해당 철학의 내용도 공부하고 해당 언어도 학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AI 번역기가 대신해줄 수 있다. 국내외에서 학위를 받은 연구자들 대부분은 초기에 핵심 고전이나 2차 문헌을 번역하곤 했다. 한국처럼 21세기에도 여전히 외국의 이론이나 철학을 번역하는 수입국에서는 학문 연구에서 번역이 자지하는 비중이 크다. 그런데 이제는 그 역할을 AI가 대신해줄만큼 충분히 성장했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갈 것이다. 그런 마당에 굳이 번역에 시간이나 노력을 투자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AI의 번역기가 동서 간의 비교 철학에 가장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바야흐로 철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는 시대이다. 이 시대의 철학 연구자라면 당연히 "이제 우리는 철학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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