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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의 몸에 대한 담론
  • 김병철
  • 등록 2026-10-12 20:52:12



개체로서의 한 인간의 지적 능력을 통계화하고 수량화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던 하나의 개념 장치였던 지능지수 만큼이나 1990년대에 미국에서 고안되었던 감성 지수에 대한 우리사회의 관심과 흥미의 진전은 감정의 문제가 개별적 개인의 사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적인 영역으로 까지 전이 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 한다고 할 것이다.

 

우리에게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면서 자연적인 것이다. 일상의 삶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적 또는 정서 반응을 우리는 모두 의식화 해 낼 수 없다. 감정은 언제나 직접성을 띄는 것이어서 일정 시간의 지속성을 지닐 뿐 특별히 의식에 의해 표상화 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감정은 사라진다 . 한 달 전에 점심시간에 먹었던 음식에 대한 미각이나 포만감 , 그리고 함께 식사를 했던 지인들과 나누었던 즐거운 대화를 생생히 그 감응 그대로 기억 할수 있을까 ? 특별히 기억해야 할 추억거리가없다면  무엇을 먹었는지 조차 희미 할 것이다.

 

의식으로 모든 감정이 환원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일상속에 항시 느낌이나 정서,혹은 감정을 통해 세계와 만나고 있다. 우리들 자신조차 사실 자기자신을 사유나 이성보다 더 직접적으로 원형적인 자아로서 감정이나 느낌,혹은 정서를 통해 만나고 교감을 하며 감응한다. 자기 감정이 그것이다. 오늘은 왠지 활력이 넘치고 느낌이 좋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유를 알수 없지만 지치고 생기가 없어서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알수 없이 느낌이 좋고, 이유없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우리신체의 전체적인 자연적 반응을 의식이 하나의 단일한 표상으로 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리 몸에서 일어난 직접적이고 자연적이며 전체성으로 일어난 하나의 사태를 기분 좋은 느낌이나 기분 나쁜 느낌으로 단순하게 표상 을 하지만 이렇게 표상된 느낌이나 감정이 외적 원인 인지 내적원인지를 의식의 주체인 자아가 확인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의식의 주체가 좋은 느낌, 또는 나쁜 느낌의 인과 관계를 확인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의 느낌자체를 인식론적으로 부적절 한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으며 부정 될수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들의 자아는 원인과 결과 관계가 확인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 알 수 없는 > 또는 < 이유 없이>라는 수식어를 첨가해서 느낌이나 감정을 표상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우리들의 자아는 우리신체 상태의 직접성을 표상으로 매개한다. 매개된 직접성으로서의 감정은 이제 술어가 된다. 나는 기분이 좋다,혹은 나쁘다 의 서술이 그것이다. 의식으로 표상하는 자아 없이는 감정이나 정서, 혹은 느낌은 성립 할수 없다.

 

단세포 동물인 아메바를 얇은 실핀 같은 것을 이용해 툭툭 건드리면 고통의 감정을 느낄까 ? 뾰족한 물체가 아메바의 몸에 닿는 순간 아메바는 이 불쾌한 ? 자극의 반대 반향으로 헤엄을 칠것이다. 차가운물을 아메바가 있는 수조에 붓는다면 따뜻한 곳으로 이동을 할것이며 동일한 온도라면 먹이가 좀더 풍부한 농도가 짙은 곳으로 유영 할 것은 분명하다.

아메바는 어떻게 진동이 심한 곳보다는 안전하고 조용한 곳으로 이동 할수 있을까 ?

 주지하다시피 단세포인 아메바는 뇌가 있을 리 없으며 신경도 마음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바의 자연적이고 직접적인 반응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반응을 표상할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느낌이나 감정이 성립 할수 없다. 반응은 있지만 느낌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메바는 오직 아메바라고 하는 자신의 몸만을 지닐 뿐이다.  

 

감정은 우리 몸에서 일어난 자연적 신체 상태를 의식이 하나의 표상으로 산출한 것이기 때문에 몸의 감각적 변화를 동반한다. 직접적이고 자연적인 것이다. 분노, 슬픔, 우울함, 지루함, 사랑, 가족애, 혐오,수치, 질투,연민, 신뢰 등의 다양한 감정들의 표현은 특별히 감정훈련을 받은 연극 배우 같은 직업군을 제외한 일상의 사람들에게 서는 신체의 변화로 여과없이 나타 난다.

 

직접성을 띄는 감정의 표현들은 비언어적 의사소통 행위로 들어난다, 손짓,발짓,몸짓등의 제스춰들이 그것이다. 일련의 사례들의 분석은 비언어적 의사소통 행위가 무의식적인 내적 감정상태를 독해해 낼 수 있는 도구가 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도 하다.

 

신체의 자연적 상태에서 일어나고 비언어적 의사소통행위를 동반하는 감정,또는 감정의 표현은 감정표현의의 담지자인 주체나 객체모두를 포괄하는 지금 사태가 처한 상황에 대한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인식이다.

 

감정의 발생이나 그것에 대한 인지가 직접성의 형태를 지닐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감정현상은 우리들의 신체,곧 우리들의 몸을 통해서 , 몸에 의해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몸의 표현인 감정은 몸에서 일어난 자기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인 동시에 즉각적으로 자신이 아닌 타자에게도 읽혀지고 해독되어져타자의 감정적 반응을 야기시킨다는 의미에서 감정 그 자체는 하나의 행위이다. 

 

사적영역에서나 공적영역에서 우리들은 우연적인 방식이든 필연적인 방식이든 수많은 감정을 지닌 몸들을 마주친다.우리 몸은 이렇든 세계내에 열림의 형태로 주어져 있으며,타자들은 나의 몸으로부터 나는 타자의몸으로 부터 감정들을 해독한다. 공동체의 구성은 공동체의 이념이나 목적,합목적성과 같은 차가운 지식으로만 완결되지 않는다. 공동체 구성원간의 정서적,혹은 감성적 감응이 완결성을 이룬다.

모든 생명체를 비롯해서 인간은 자연적인 몸이라는 육체성을 전제로 다른 몸들을 만난다. 전통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 사유의 주체, 초자아. 이드 는 항시 나의 몸을 전제로 생각하고 추상하며, 욕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몸이며 이미 몸이었다.

 

 어떤 공동체 안에서 한 구성원이 논리적으로 정연하고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누구도 부정할수 없도록 그가 주장하는 내용을 구성체 내의 다른 구성원에게 주장한다고 해도 양자간의 정서적 감응이 없다면 죽은 시체처럼 차가운 사실의 전달일 뿐이다. 정서적 감응이없는 몸들의 만남만이 이뤄지게 되면 자연적인 몸을 지닌 우리들의 몸들은 피곤하며, 불쾌하다. 아메바를 비롯한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보다 쾌적하고 좋은 몸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항상성을 지니고 있으며 항상성 그 자체의 활동이 바로 몸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아폴론은 카산드라에게 사랑에 빠져 구애를 하게 되고  아폴론의 예언의 능력을 승락조건으로 받기로 하고 카산드라는 아폴론의 구애를 허락한다. 그러나 예언의 능력만을 챙긴체 사랑을 주지않는 카산드라에게  화가 잔뜩 난 아폴론은 단 한번의 입맞춤으로 카산드라에게서 설득력을 빼앗아가 버린다. 얼음처럼 투명하게 별빛처럼 뚜렷히 카산드라는 예언을 할수 있었지만 누구도 믿어주지 않게 된다. 키산드라의 신화는 동감이나 사랑, 기쁨따위의 정서적 감응없는 사실체계는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현실성이 없음을 반증한다. 실지로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 사람들은 카산드라의 사실 전달로서의 예언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사람들은 카산드라가 <나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 또는 <나는 미리 알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사실전달>을 공동체의 이름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몸의 감응이 없다는 이유로 해서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공동체에서 정신적으로 추방 당하고 있다.

 

 감정을 이해 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은 철학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지만 주지주의적 관점에서 감정은 사유나 이성에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파악 되어 져 왔다. 합리적인 로고스인 이성에 대척점을 지닌 감정이 몸과 결합되었을때는 몸을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감정을 통제하려는 시도를 동서양의 역사속에서 우리는 손쉽게 발견한다. 인류의 역사는 몸이 지니고 있는 에로스를 통제하고 제어 하고 로고스를 통하여 문명을 만들어 온것이다. 감정의 통제는 몸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이루어 질수 없다. 

 

누가 감정을 통제하는가 ? 그래서 결국 누가 몸을 통제하는가 ? 

감정을 통제하려는 역사는 인간에 대한 몸을 통제하려는 역사와 동일하다. 감정은 역사성을 지니고 있다. 감정의 역사성은 감정 표현의 의미에서 표현된 몸의 역사성이다. 어떤 감정은 허용되어 지고 어떤 감정은 금지되며, 또 어떤 감정들은 처벌되어 지거나 죄악시 되어진다. 감정이나 감정의 표현이 한 사회 내에서 형성되어지고 생성되며 , 어떤 특정 감정들은 강화되며, 약화되기도 한다. 감정 표현의 양태 또는 몸의 표현의 양태는 그 개인이 속한 사회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감정표현의 양태는 우리 몸이 지닌 직접성을 지나 상징화 되고 추상화 되어진다.

 

 

논개, 그리고 그녀의 몸 ,음탕한 몸에서 의리 있는 몸으로 

 

일상의 일 가운데 너무 나도 잘 알려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언급되어져서 오히려 바르게 인식되지 못하는 것들이 존재하는데 논개에 관한 이야기가 그 가운데 하나가 아닐 까 한다.

 

조선왕조시대에 기생, 그것도 관비는 노비와 신분상 차이가 없었다. 조선왕조시대에 기생이라는 직업을 가진 여성은 전체 인구의 0.5 퍼센트를 상회할 정도로 많았다.

논개이야기를 <어우 야담>에서 기록하고 있는 유몽인도 임진왜란에 목숨을 잃은 기생들이 논개외에도 부지기수로 많다고 적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논개의 죽음도 여러 다른 기생의 죽음과 외면적으로 고찰한다면 큰 차이가 없다. 

 

논개를 기타 다른 기생의 죽음으로부터 확연히 구별시켜주는 점은 왜장을 남강 위의 바위에서 부둥켜 안고 떨어져 죽음으로써 왜장으로부터 정조를 지켰으면서 결과적으로 유교의 덕목인 나라에 대한 충성됨을 체현했다는 점이다. 자신을 지킨 몸에서 국가를 지킨 몸으로 몸의 외연이 확장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기생은 연회에서 흥을 돋우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하는 직업군의 여성을 일컫는 말이었다. 관비는 통상적으로 지금 시간으로 아침 9시경에 소속된 관에 나아가 출근을 확인받아야 했으며 연회의 특성상 퇴근의 확인은 없었다. 진주의 관기였던 16세기 말경에 논개의 일상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논개는 전라도 장수의 현감을 지냈던 최경원을 따라서 장수에서 진주에 오게 된 것으로 미루어 최경원이 논개를 아꼈던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문헌에는 논개가 진주병사였던 최경원의 소실이라고 적고 있기도 하지만 신분이 관기였던 논개가

연회에서 다른 관원이나 사대부를 접대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기생 혹은 창기에 대한 사대부들의 인식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이었다. 정조때 19세의 정약용은 화순에 현감으로 있던 그의 부친인 정재원이 예천 군수로 전보되자 자신의 처와 함께 진주를 방문하고 그 감회를 <촉석루회고> 와 같은 시를 남겼고 , 정약용의 장인이자 논개의 사당을 정조 3년에 처음으로 보수하는 책임을 맡았던 홍화보의 부탁을 받아서 <진주의기사기>를 지었는데, 이러한 <진주의기사기>속에서 기생들에 대한 당시 사대부들의 생각을 엿 볼수 있다.

 

`` 창기 같은 여인들이란 어려서부터 음탕하고 지조 없는 여인들로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성품이 허량하여 그 마음속에는 남정네라면 모두 지아비가 될 수 있다고 여긴다. 이처럼 부부간의 도리도 모르는데 어찌 군신 간의 의리를 알 수 있겠는가 ? ``

<여유당 전서 제 1집>

 

<진주의기사기> 확인할 수 있는 정약용의 기생에 대한 일련의 판단들을 조선 왕조 당대의 사대부들의 일반적인 생각으로 간주해도 다른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설적이며 부정적인 직업윤리를 가진 것으로 간주 되었던 진주관비 논개는 왜장을, 그녀 자신이 몸을 섞었던 그 많은 다른 남자들의 몸들의 범주에 귀속시키 못했을까 ? 몸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죽음을 결심할 정도의 격한 감정에 논개를 다다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 

 

이러한 궁금점을 풀어줄 실마리를 지금은 필사본으로만 내려오는 유몽인의 <어우 야담>에서 엿볼 수 있다. 논개가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것이 선조 26년 즉 1593년 6월 로, 2차 진주성싸움이 패전으로 끝난 직후였고 <어우야담>이 1621년에 쓰여져서 약간의 시간의 간격이 있기는 하지만 전해오는 많은 논개에 관한 문헌 가운데 유몽인의 기록은 가장 믿을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 어우야담>의 저자 유몽인은 진주성 함락후에 당시 군사를 모집하고 훈련, 위문하며 때에 따라서는 전몰 가족을 조사하고 포상하는 업무를 맡았던 무군사 직책을 떠맡아서 세자와 함께 삼남 지방에 내려왔던 것이 확인되고 있다.유몽인은 업무의 일환으로 진주에 내려와 논개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노인이나 생존자들에게 청문하여 채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우야담>에서 논개의 죽음을 국가의 신성한 교화를 입은 백성으로서의 충절의 표현으로 기술하고 있다. 조선 건국의 이념이었던 주자 성리학적 유교이념이 담론의 생산자인 사대부들은 물론 조선왕조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중 가장 기저층이자 사실상 주변인에 머물렀던 관노비에 해당하는 관기에까지 삼투되여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선이 16세기 말에 와서야 비로소 이념적으로 완전히 건국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로소 16세기 조선을 구성하던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군주로부터 천민,또는 관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정체성을 고려가 아닌 조선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사실상 2세기의 적응 기간을 거쳐 구성원들에게 체화되었다. 실질적인 조선건국이 실현된것이다. 

  

조선의 유교 이념은 공동체 구성원들의 몸과 몸들에서 일어나는 감정들과 그 감정들의 변용을 통제하고 허용하며 금지하고 구성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권력이 되었다. 같은 공동체 내의 익명의 다른 몸들에게는 허락되는 몸이지만 왜장에게만은 허용될 수 없는  배타적인 몸이 논개의 몸인 것이다. 허락되어지는  몸이었던 논개의 몸은 절개라고 하는 유교적 도덕 감정으로 체화된 몸이었다. 물론 왜에 대하여 조선을 구성하는 공동체 구성원들의 문화적 우월감이 논개의 죽음의 그 기저에 전제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정약용은 <진주의기사기>에서 마치 그 자신이 논개가 강물 위로 목숨을 던지던 계사년 6월 남강에 있었던 것처럼 논개를 애절하게 추모한다.

 

`` 부인들은 천성이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 .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는 여인도 있고, 의리상 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은 여인도 있어서 이들을 절節이니 열烈 이라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가 그저 자신의 목숨만을 끊었을 뿐이다. 계사년에 왜적이 진주성을 함락했을 때 어여쁘고 어린 의로운 한 기녀가 왜장을 유인하여 강위 바위에서 춤추다가 춤이 서로 어우러졌을 때 왜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었는데, 중략~ 

이 어찌 열열한 현부인이 아니겠는가 한 연약하고 어린 여인이 마침내 적의 우두머리를 죽여 나라에 보답 할 수 만 있었다면 임금과 그 신하의 義理가 세상에 밝혀 졌으니 진주 성의 패배쯤은 근심할 것 없었다. 이 얼마나 장쾌한가 ! ``

 

그러나 정작 죽임을 당한 왜장은 논개의 몸과 감정을 완전히 잘못 해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사도를 근간으로 한 당시 왜는 전쟁에서의 승리는 전승을 올린 지역의 일체의 것이, 즉 가축으로부터 토지,가옥,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모두 전승자의 소유가 되는 것이 상례였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이미 결혼한 여인이라도 사무라이는 전리품의 일환으로 얼마든지 자신이 취할 수 있었다. 우리식으로 표현해서 사서 삼경이나 십삼경이 일찍이 왜에 소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승려들이나 지배 계급인 사무라이 층에서 교양의 함양차원에서 읽혀 정도 일뿐 명나라나 조선처럼 유교이념의 확립차원에서 과거 시험을 통한 지배 이념의 재생산 의 체계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왜와 조선 사이의 이러한 문화적 차이를 고려해볼 때,우리는 왜장이 논개가 기생의 신분이든 이미 혼인한 여념집의 부인되었던지에 관계없이 논개의 몸을 취할수 있다는 몸에 대한 자기만의 해독 코드를 지녔음을 쉽사리 추론해 볼 수가 있다. 몸과 그리고 몸들이 만들어내는 감정들을 파악하는 해독 코드들의 불일치가 가져온 문화적 타살인 것이다.

 

 왜장의 죽음은 당시 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풍신 수길에게 보고되고 ,전쟁터에서의 전사가 아닌 일개 기생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작성해 두었던 출병자의 명부에서 왜장의 이름은 삭제되게 된다. 

 

 1593년 계사년 6월에 몸을 던진 논개의 몸은 오늘날 박종화의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節槪 와 忠의 義理를 상징화된 몸이 되었지만 논개의 몸에 대한 상징화는 광해군을 비롯해 인조,경종, 영조, 정조, 심지어 고종에 이르기까지 논개사후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300여년에 걸친 장구한 상징화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진주 남강에 있는 논개가 왜장과 함께 자진한 바위에는 義巖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전각은 임진왜란때 함경도 의병장이었던 정문부의 둘째아들 정대융이 새긴것으로 추정된다. 글을 잘 짓고 붓글씨의 필법도 뛰어났던 정대웅은 자신의 부친인 정문부가 인조 2년 정월에 무고로 화를 당하자 부친의 권고를 따라 경상도 진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게다가 촉성루에 의암기를 지었던 오두인이 경상우도에 관원으로 파견나왔던 참에 진주성에 들러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전각이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의암기를 지었을 때가 효종 2년 1651년의 일이므로 적어도 1651년이전에 의암이라는 전각이 바위에 세겨져야 하므로 정대웅이 진주로 거처를 옮긴 인조 3년경 1625년경을 바위에 전각된 시점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없을듯하다. 논개 사후 32년이 지난 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이 두 글자는 조선 왕조에 걸쳐 논개의 몸이 상징화되는 데에 중요한 시발점이자 계기가 된다.

 

논개의 몸과 그녀의 몸에 체현되어 있는 절개와 의리의 감정들을 성리학적 이념으로 채색된 몸과 감정들로 편입시키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조선 사회 사대부들에 의해 부정당하거나 거부당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광해군 4년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원에서 반란의 조짐이 보이자 국가차원에서 임진왜란 중에 일어났던 미담사례,즉 충신,효자, 열녀들을 읍 단위까지 홍문관 부제학등으로 하여금 채록하도록 하고 그 채록의 결과는 광해군 9년에 < 동국신속삼강행실도>로 발간 된다. 미담사례의 채록은 한양을 제외한 전국 전역에 걸쳐서 사대부나 일반 서민 ,또는 공노비나 관노비를 막론하고 충,효 ,열이 현저한 사람을 보고하게 한 것을 미루어 볼 때, 관기였던 논개를 비롯한 여러 기생들이 거론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기는 그 신분이 천박하다는 이유로 수록되지 못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논개마저도 수록되지 않았다. 

 

 <어우야담>을 지었던 유몽인이 논개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개연성은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 유몽인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편찬을 담당하는 실무자는 아니었지만 광해군즉 왕명으로 인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의 발문을 작성했다. 따라서 추정컨데, 유몽인이 논개를 수록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지만 , 아무리 논개라고 하더라도 당시 사대부 관료들에게서 논개의 몸과 감정은 단순히 음탕한 여자의 몸과 감정 그 이상의 것일 수는 없었다. 거기다가 유몽인 자신이 인조 2년에 화를 당함으로써 논개의 몸의 상징화는 역사적인 잠복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조선조에서 논개의 몸과 감정이 절개와 충의 의리를 지킨 의로운 기생으로 공식적으로 상징화되는 계기는 논개가 죽은 후 128년이 지난 1721년 경종 1년에 일어나게 된다. 광해군때 음탕한 몸으로 상징화 된 관기의 몸이 어떤 이유에서 절개가 있는 몸으로 또는 의리가 체화된 몸으로 전환되었을까 ? 사대부들이 관기에 대한 부정적 윤리관을 철회했거나 아니면 관기들의 몸이 더 이상 음탕하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었을까 ?

 

 논개사후 32년이 지난 인조 3년경을 전후 해서 진주 지방에서는 양반과 서민 사이 에서는 조선왕조의 공식적인 인정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이미 義巖이라는 전각 된 논개의 몸은 절개와 의리를 지킨 몸으로 상징화되어 있었다. 연례적으로 논개에 대한 제례가 거행되었고 적어도 진주 지역에서 비록 신분이 관기였지만 절개와 의리를 지켰다는 사실은 부정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었다. 

 

 성리학자였던 정식과 박태무도 논개에 관한 글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재미있는 점은 명암 정식과 서계 박태무는 진주 지방 출신의 남명 조식의 학맥을 계승한 유학자라는 사실이다. 지역적 연고와 학맥을 이 두 사람은 같이한다. 당시 진주 지방의 유림들은 논개의 몸이 진주라고 하는 지역에서만 상징화되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처한 독특한 정치적 상황의 절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재가 논개의 몸이었다. 조선초기에 영남 출신의 관료의 절반이 진주출신이라는 말이 유행 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던 진주였고 <택리지( 1751 ) >의 기록에 의하면 경상도의 진주전라도의 남원, 그리고 구례가 전국에서 최고의 기름진 땅으로 일컬어 질 만큼 진주의 농업 생산력은 당대 최고였다. 진주는 17세기와 18세기에는 田結數가 2배로 늘고 수확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는데, 오늘날 방죽에 해당하는 제언 (提 堰) ,보(洑) 의 개수가 경상도 다른 지역에 비해 1.5배나 더 많았다. 이러듯 튼실한 물적인 토대와 생산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세력을 유지해온 진주지방의 양반 지주층이었지만 인조반정 (1623 )을 거치면서 大北파의 이념적 지주인 남명학의 본향이었던 진주는 심한 타격을 받았다. 더욱이 영남 지방에서 굉장한 지지를 받았던 이인좌의 난 ( 1728년 )이후에는 어떻게 하든지 역모의 사상적 뿌리를 남명학에서 찾으려는 분위기가 조정에 팽배하게 된다.

 

 가령 1740년 문신 이천보는 영조와의 대화속에서 ,조식 뿐만 아니라 조식의 뒤를 잇는 정인홍등을 경상도 우도,즉 진주 지방에 살았기 때문에 그 기질이 순수하지도 못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언급하면서 같은 경상도라고 해도 이황이 경상 좌도 출신이라서 경상 좌도 출신 사대부들이 무신년 (1728년)에 난을 일으키지 않았으며,그리고 글을 잘짓고 배움이 있으며 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놀랍게도 영조는 이천보의 말을 그대로 수용하여 옳다고 여기고 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인조 반정(1623 )으로 참형을 당하고 그 신원이 결국 회복되지 않은 정인홍의 고향은 경상우도인 진주가 아니라 경상좌도인 합천이었다. 엄연히 고향이 합천인데도 정인홍의 스승 조식의 고향이 진주라는 이유만으로 정인홍의 사상적 고향을 진주로 간주해서 진주를 차별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1796년에 조식에 대한 제사가 국가적으로 인정되고 영조와 정조 시기에 진주를 포함한 영남 지역의 인재 등용이 논의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경상 우도 진주는 기피 지역이었다. 진주는 경제적으로 최적화된 환경을 지녔지만 중앙 정치권에서는 집단 따돌림을 당해야만 했다. 이러한 정치적 격리와 차별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더 이상 경상 우도 진주가 역모의 기운이 만연하는 逆 鄕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유림들이 사는 忠 鄕으로 상징화되어야만 길만이 있을 뿐이었다. 

 

진주 유림들의 오랜 바람과 관심은 논개의 몸과 그녀의 절개와 의리의 숭고한 감정들이 조정으로부터 언제 어떻게 공식적으로 상징화되느냐 하는 것에 쏠려 있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다양한 경로를 통해 진주 유림들이 누차 공식적인 상징화를 시도 해 보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번번히 좌절 되었는데, 경종 원년5월에서 2년 11월 까지 경상 우병사로 진주로 내려왔던 최진한을 통해 조정으로부터 논개의 몸과 감정들은 절개와 충성스러운 의로운 기생으로 공인 된다.조선 조정은 논개의 몸을 공식적으로 義 妓로 확인해주는 것이다.

 

경종 1년 1721년의 일이다. 최진한이 논개가 절개와 충의 의리를 지킨 기녀라는 사실을 진주 士 民 의 요청를 빌어 우병영에 제출했고 그후 비변사의 협의 과정을 거쳐 오늘날의 논개가 지니고 있는 여러 이미지가 구성 될수 있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그의 능력의 탁월함 때문에 비롯된 것이기보다는 최진한 자신이 집권 세력과 상당히 밀접하고 밀착된 관계에 있었던 점이 더 크게 작용했었다는 점은 조선시대의 정치의 배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논개의 몸과 감정들은 더 이상 음탕한 몸과 감정들이 아닌 의리 있는 몸과 감정들이 된 것이다. 

 

 논개의 몸과 감정들이 사적인 영역인 자신을 지키는 몸과 감정으로부터 공적인 영역의 몸인 나라를 지키는 몸과 감정이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으로는 논개의 몸과 감정들이 조선사회의 정상적인 사회 질서들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의 아마존 여전사처럼 무기나 창을 들고서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영역이었던 군사적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당시 여성에게 요구되었던 여성의 본분이라 할 수 있는 희생의 방식으로 유교적 가치를 완성하고 전달했다는 점이다. 

 

논개의 몸과 감정들이 성리학적 질서 속으로 편입 될 수 있었던 세번 째 요소로는 유교적 이념의 척도를 적용하지 않은 논개의 몸과 감정들에 대학 해독가능성을 완벽히 차단 했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해 볼 때, 논개의 몸과 감정들에 관한 상이한 해독도 가능하다. 숭고한 성리학적 이념을 동원 할 필요 없이,남강의 한 바위위에서 그저 단순히 자기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발생적 자기 방어행위 일수도 있었고 , 아니면 전라도 장수에서부터 논개 자신이 모셔 왔던 최경원이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하게 촉석루 밑으로 투신하여 산화 했고 치열 했던 진주성 전투에서의 패전으로 상당수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게 됨으로써 논개라는 개인이 실존인 상실감을 경험하게 된 것이 그녀의 죽음에 더욱 근본적인 동기일수가 될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상이한 개연성은 권력이 논개의 몸과 감정을 통제 할 수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므로 권력은 구태여 논개의 몸과 감정들을 상징화 할 필요가 없다. 성리학적 이념으로 해독되어 코드화 된 논개의 몸과 감정들이야말로 진주 지방의 유림이나 중앙 정치 세력 모두에게 필요한 몸이며,감정들인 것이다.  

 유교의 이념으로 일단 코드화 되어진 논개의 몸과 감정들은 모든 물체가 관성을 지니듯 논개의 몸과 감정은 더욱더 드라마틱하게 각색되고 구체화된다 . 논개가 애초에 왜장 한 사람과 춤을 추다가 부둥켜안고 남강으로 투신했지만 . <호남 절의록>에 의하면 한 명으로는 부족한지 동시에 2명을 안고 투신하고 있다. 최경원과 논개의 관계도 처음에는 최경원이 그저 논개를 눈여겨보는 관계에서 사랑하는 관계 ( 愛)가 된다. <호남 삼강록 1839 >. 박태무의 <의기전>에서는 논개가 가야금을 퉁기며 노래를 하고 있다. 


  이름이 알려 지지 않았던 왜장의 이름도 가토 키요사마(1562- 1611)로 언급되다가 1908년에는 일본의 전설적인 검객이며 민속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게야 무리 로쿠스케로 알려지기도 한다. 장수 현감으로 있던 최경원을 따라서 진주로 논개가 옮겨 왔다는 정황을 들어 논개의 고향을 장수라고 추정하다가 < 호남읍지1872>에서는 논개의 고향은 막연히 장수가 아닌 임현내면 풍천으로 구체화 된다. <1945 년>에는 논개의 고향이 임현내면 풍천에서 더욱 구체화되어서 대곡 주천리로 일컬어 지며, 1954년에는 지역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 원래 논개는 몰락한 양반 가문의 후손이 되며 朱라는 성까지 생기게 되어서 이름 주 논개가 된다.

구한말에 편집된 <진주군입지 1899년>에서 논개는 장렬히 산하한 女忠臣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의 고종 9년까지 논개의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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