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세계화의 물꼬 튼 '해의만(海義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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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이반 4세 그로즈니의 이콘,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는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