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남자로서 젊어서는 求愛의 대상으로 여러 여성들을 접하지만 중년이후에도 사회활동 중에 많은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혼인을 하고 정상적 가정을 營爲하는 경우도 많고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비록 중년이라도 서로가 자유로운 상황이라면 새로운 因緣의 構築을 생각해봄도 過히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런데 남녀의 일생의 생리주기가 다른 것이 쉽게만 생각하기를 어렵게 만든다. 자연섭리적으로 남자는 자식에 대한 부양책임이 '없다'. 따라서 남자는 자식이 성년이 되기까지 살아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해도 계속 생식의 능력을 놓지 않는다. 반면에 여자는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자식만을 두게 되기 때문에 자식이 성년이 될 때까지 건강히 살 가능성이 클 경우에만 생식이 허용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여성이 비록 혼자라도 중년의 나이가 되면 적어도 初婚의 대상으로서는 그 의미가 半減되는 것이다. 물론 플라토닉하고 순수한 사랑의 관점에 있어서는 무관한 것이겠지만 현실적인 결혼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아니할 수 없다. 通常 남자는 재혼남이라도 괜찮고 여자는 재혼이 퍽 不利한 듯이 느껴지지만 그것은 일부 財力家 남자 등에 관련된 이야기일 뿐이고 현실통계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초혼남+재혼녀 > 재혼남+초혼녀) 高齡未婚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초혼상대로서는 이를테면 40代 處女보다는 30代 離婚女가 더 좋은 조건이다. 여자 입장에서는 남자의 나이가 큰상관이 안되니 아무래도 총각이 더 유리하겠지만.
그러므로 남자가 이십세 成年이 되어 우선 반드시 자기의 직업을 찾아야 하듯이 여자에게 婚姻과 사랑은 성년이 됨과 동시에 고려되어야 할 일생의 進路로서 重視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이토록 일생에서 중요한 혼인과 사랑을 아직 세상사를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이십대에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자는 운이 닿거나 주변 환경이 따르면 이십대에도 혼인이 가능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스스로 여건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삼사십대에도 가능하지만 여성으로서는 정신의 성숙과 반비례하여 조건과 상황이 불리해져가는 안타까움이 있는 것이다. 과거의 양반집이나 지금의 명문가라면 세상일을 현명히 판단할 수 있는 부모가 親히 대상자를 골라 부모의 권위로써 혼인을 成事시키기도 하지만 지금에 와서 반드시 그런 방식의 혼인만을 모범적으로 권장할 수도 없다.
사랑에 대해 너무 利害打算的인 饒舌이 甚했던 것 같다.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이들에게는 如何한 이해타산은 물론 그 이상의 高尙하고 현명한 충고도 무용지물임을, 비록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하더라도, 겪은 자들은 모두들 理解할 것이다.
결론은 여성들에게 사랑의 자유를 더욱 許하는 방법밖에 없다.
젊은 여성들이 자신에게 求愛하고 請婚하는 남자들을 장래의 불안없이 더욱 용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慣習과 制度를 더욱 개혁해야 할 것이다.
남자에게는 구애의 자유와 폭은 넓혀주되 혼인에 따른 책임은 분명히 附課한다. 다만 여성에게는 受請의 책임을 최대한 덜도록 한다. 端的으로 말하면 離婚할 때에는 여성에게 재산권 양육권 모든 면에서 더욱 유리한 조건이 주어지도록 한다.
얼핏 보면 여성의 권리만을 옹호하는 페미니즘적 사상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이렇게 되면 남자가 아내를 자기의 것인양 소유하고자 하는 권리는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도 解雇가 어려우면 간절히 일자리를 구하는 求職者가 곤란을 겪는 반면 해고가 쉬우면 구직자는 일자리를 얻기 좋아진다. 이것은 사랑의 문제로 고통당하는 많은 젊은 남성들에게도 希望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사랑의 의미를 알고 나서야 사랑을 구하려하나 이미 상황이 따르지 않는 여성들의 안타까운 경우도 줄일 수 있다. 사랑행위에 대한 여성의 책임은 자연이 내린, 아이에 대한 責任으로도 충분하다.